이즈베스티야 편집장에서 연방회의 의장까지, 브레즈네프 체제의 공보 엘리트이자 최고 입법기관의 얼굴
브레즈네프 사후 안드로포프가 권력을 잡자, 톨쿠노프는 한때 중앙위에서 함께 일했던 그에게 신문 복귀를 요청했다. 안드로포프는 『프라우다』를 제안했지만 톨쿠노프는 『이즈베스티야』를 택했다.
철도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938년 『프라우다』 기자로 출발한 소련의 언론인·국가 지도자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전쟁 특파원으로 여러 전선을 누볐고, 1960년대 초부터 CPSU 중앙위원회 사회주의국가연락부에서 근무하며 당의 대외 선전 라인을 관리했다. 1965년 『이즈베스티야』 편집장에 취임해 11년간 신문을 이끌었고, 1976년 노보스티 통신사 사장으로 전출된 뒤 1983년 안드로포프 집권과 함께 『이즈베스티야』로 복귀했다. 1984년 소련 최고소비에트 연방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어 1988년까지 재임하며 입법부의 제도적 수장 역할을 수행했다.
1986년 4월 27일 오전 10시, 프리피야티에서 정부위원회를 소집한 셰르비나는 단 한 마디로 회의를 열었다. '피난을 시작한다.' 사고 32시간 만에 5만 명의 도시 전체가 버스에 올랐다.
소련을 세계 1위 탄화수소 생산국으로 만든 서시베리아 석유·가스 단지의 설계자. 튜멘주 당서기와 석유가스건설장관으로서 타이가와 영구동토를 뚫고 송유관·도시·철도를 건설했으며, 부총리로서 체르노빌 사고(1986)와 아르메니아 지진(1988) 정부대책위원회를 직접 지휘했다. 방사능에 노출된 건강 악화 속에서도 현장을 떠나지 않은 기술관료였다.
1987년 5월 1일 브라티슬라바 노동절 퍼레이드에서 한 학생이 주석단에 서 있던 샬고비치에게 달걀 두 개를 던졌다. 그는 경호원에게 달걀이 묻은 재킷을 건네며 자리를 떠나야 했다.
슬로바키아 출신 체코슬로바키아 보안기관 장교이자 정치인. 전시에는 친나치 슬로바키아군에서 소련으로 탈주한 후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에서 복무했고, 전후 StB 장교로 정치탄압에 가담했다. 1968년 6월, 두브체크는 자신과 개인적 친분이 있는 샬고비치를 내무차관 겸 StB 책임자로 발탁했으나, 샬고비치는 KGB와 협력하여 개혁파 체포 계획을 세우고 8월 21일 두브체크 일행을 소련군에 넘겼다. '정상화' 체제에서는 슬로바키아 민족평의회 의장(1975~1989)이라는 의전직에 머물렀고, 벨벳 혁명 직후 자택 지하실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
모두 달아난 뒤, 무전기와 홀로 남았다. "50kg 중포탄의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우리 쪽이 퍼붓기 시작했다!" 전차 넉 대는 불타고 두 대는 멈춰 섰다.
스몰렌스크 농민 가정 출신으로, 위대한 조국전쟁에서 포병 장교로 복무하며 자신의 위치로 포격을 유도해 소비에트 연방 영웅이 되었다. 전후 대외무역 분야에서 성장해 1976년부터 1986년까지 소련 국가은행 총재를 지내며 브레즈네프 시기 계획경제의 통화·신용 시스템을 관리했다. 페레스트로이카 초기 금융개혁 요구와 가족의 망명 사건이 겹치며 퇴임했다.
1973년 출간한 저서에서 "화학공업 없이는 단 하나의 국가적 과제도 최적의 수준에서 해결할 수 없다"고 선언하며 전면적 화학화를 당 노선으로 정당화했다.
모스크바 화학기계공학 연구소를 졸업하고 고스플란에서 엔지니어로 출발해 소련 화학공업의 중앙계획과 당적 지도를 아우른 관료이다. 1965년부터 1976년까지 CPSU 중앙위원회 화학공업부장으로 재임하며 코시긴 개혁기 화학공업 현대화(합성고무·플라스틱·광물비료·석유화학의 대규모 확장)를 당 라인에서 주관했다. 1966년부터 1981년까지 중앙감사위원회 위원으로서 당내 재정·문서 감사 역할을 겸했으며, RSFSR 최고회의 대의원도 3선 지냈다. 그의 저서 『24차 당대회 결정에 비추어 본 화학공업』(1973)은 브레즈네프기 화학공업 정책의 대표적 당 문헌이다.
츠카노프가 말한 '세 개의 못' 원칙: "브레즈네프의 지시는 곧바로 실행하지 않고 상상의 첫 번째 못에 걸어둡니다. 재촉이 오면 두 번째 못으로. 세 번째 못까지 와야 비로소 전화를 들죠. 실제 실행되는 것은 10분의 1도 안 됩니다."
야금 기술자 출신으로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의 수석 보좌관을 20년 가까이 지낸 당 기구의 핵심 인물이다. 드네프로제르진스크 금속공업대학을 같은 해 졸업한 브레즈네프와 인연을 맺어, 1958년 중앙위원회 기구에 합류한 뒤 브레즈네프가 서기장으로 있는 전 기간 동안 그의 비서실을 실질적으로 총괄했다. 정치국 자료와 지시 사항을 필터링하며 총서기가 접하는 정보의 흐름을 통제했고, 이른바 '세 개의 못' 원칙으로 대변되는 특유의 실용주의로 방대한 관료적 업무를 관리했다. 겉으로는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았으나, 매일 브레즈네프를 대면하는 몇 안 되는 인물로서 정체기 소비에트 정치의 배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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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1958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첼랴빈스크 지역 철강 기업에서 근무, 드네프로제르진스크 금속공장 주임기사 역임
붉은 페인트를 뒤집어쓴 트로야놉스키가 무심히 던진 '죽는 것보다 붉은 게 낫군'이라는 한마디에, 안보리 회의장은 긴장이 풀려 웃음이 터졌다.
올레크 트로야놉스키는 스탈린의 통역에서 출발해 흐루쇼프의 외교 보좌관, 주일 대사, 유엔 주재 소련 상임대표, 주중 대사를 역임한 소련의 외교관이다. 초대 주미 소련 대사의 아들로 워싱턴에서 성장한 독특한 배경을 지녔으며, 10년간의 유엔 대표 재임 중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KAL 007기 격추라는 냉전의 최대 위기에서 냉철하고 유머러스한 태도로 서방 외교가들의 존중을 얻었다. 유엔 대표직은 야코프 말리크의 후임이자 고르바초프 개혁 이전까지 소련의 대서방 외교 연속성을 보여주는 자리였다.
1967년 12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시크는 안토닌 노보트니의 사임을 최초로 공개 요구하며 경제 개혁이 정치적 변혁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선언했다, 고르바초프보다 20년 앞서서.
체코슬로바키아의 경제학자이자 정치인으로, 프라하의 봄 경제 개혁의 설계자였다. 1964년 저서에서 사회주의 계획경제에 시장 메커니즘을 접목하는 신경제모델을 제시했고, 1967년 12월 중앙위원회에서 노보트니 체제를 공개 비판하며 경제 개혁이 정치적 변화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1968년 두브체크 내각에서 부총리로 개혁을 주도했으나, 바르샤바조약군 침공으로 유고슬라비아 망명길에 올랐고 이후 스위스에서 '제3의 길'을 이론화하며 생을 마감했다.
1941년 7월, 22세의 피노게노프는 7일간 열차로 코브로프 공장에 도착해 곧장 작업장으로 향했다. 두 달 동안 공장 문밖을 나서지 않았다. 'ShVAK 기관포의 가장 핵심 부품인 포미 장치에 나를 배치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22세의 나이로 데그탸료프 공장에 배치되어 항공기관포 ShVAK와 대전차소총 PTRD 생산을 진두지휘했고, 전후에는 오토바이 민수 전환을 거쳐 공장장까지 오른 군수 생산 행정가다. 1954년부터 6년간 공장장을 맡으며 S-75 지대공 미사일 유도장치와 소련 최초의 대전차유도탄 '시멜'의 양산 체계를 구축했다. 1979년 세르게이 즈베료프의 후임으로 국방공업장관에 임명되어 페레스트로이카까지 10년간 소련의 포병·소화기·탄약·광학기기 생산 전체를 지휘했으며, 아프가니스탄 전쟁 기간 중 군수 조달의 안정성을 책임졌다. 사회주의노동영웅(1976), 레닌상(1982), 국가상 2회(1979, 1989)를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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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코브로프 제2공장(데그탸료프 공장) 교대 마스터로 배치 — ShVAK 항공기관포 생산
그의 회고록은 페트로프의 오경보 판단을 군 내부의 비밀에서 공개된 냉전사의 사건으로 바꾸었다.
유리 보틴체프는 소련 포병 장교로 제2차 세계대전의 전투 지휘를 거쳐 방공과 미사일·우주방어 체계의 조직자로 성장했다. 그는 1967년 창설된 미사일·우주방어군의 초대 사령관으로 기술 체계와 군 지휘를 결합했다. 1983년 스타니슬라프 페트로프의 오경보 보고를 처음 받은 직속 상관이었고, 훗날 회고록에서 사건을 공개해 페트로프의 판단을 세계에 알렸다. 그의 기록은 페트로프를 치하하면서도 군사 일지 문제로 질책한 체제의 모순을 보여 준다.
아나디리 작전 초기 계획 단계에서 참모총국은 단 5명의 장교만 기밀로 삼았다. 서기 한 명에게도 노출되지 않도록 모든 계획 문서를 손으로 직접 작성했다.
소련군 최고사령부에서 냉전 시대를 관통한 군인이다. 1962년 작전명 '아나디리'의 초안을 작성한 참모 장교로서 쿠바 미사일 위기의 물리적 토대를 설계했으며, 이후 레닌그라드 군관구 사령관을 거쳐 1976년부터 1989년까지 바르샤바조약기구 연합군 참모총장을 지냈다. 퇴역 후에는 미·소 양측 장성이 함께 저술한 공동 회고록 『작전명 아나디리』(1994)를 통해 냉전 최대 위기의 내막을 공개하며 역사적 화해에 기여했다.
1944년 7월 비보르크 북방 전투에서 왼팔을 잃고 제대한 24세의 소위는, 13년 뒤 세계 최초의 대륙간탄도미사일 R-7의 주임 설계자가 되어 있었다.
코롤료프의 지명으로 R-7의 주임 설계자가 되어 '세묘르카'의 설계를 이끌었고, 쿠이비셰프(사마라)로 파견되어 항공공장에서 R-7 계열의 양산을 조직했다. 1974년 OKB-1에서 분리된 중앙특수설계국(TsSKB)을 창설해 초대 국장 겸 총설계자가 되었으며, 보스토크·몰니야·소유스 발사체와 정찰·과학 위성군을 개발했다. R-7의 설계·양산·계열화 모두에 걸친 그의 일생은 스푸트니크에서 오늘날의 소유스까지 이어지는 우주 수송의 척추를 세운 작업이었다.
24년간 키르기스스탄을 농업 공화국에서 산업 공화국으로 전환시킨, 흐루쇼프-브레즈네프 시대의 건설자
말년의 회고록에서 그는 자신의 가장 큰 유산이자 짐이었던 프로젝트에 이렇게 썼다. "토크토굴 수력발전소 — 나의 자랑이자 나의 아픔이다."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교사로 출발한 키르기스 정치인으로, 1945년부터 10년간 모스크바 CPSU 중앙위원회 교관으로 근무하며 중앙당 경험을 쌓았다. 1961년부터 1985년까지 키르기스스탄 공산당 제1서기를 지내며, 150개의 대규모 산업 시설(나린 수력발전 캐스케이드, 토크토굴 수력발전소, 마나스 국제공항)을 건설하고 51만 호 이상의 주택을 공급했다. 총공업생산은 5배, 전력 생산은 12배 증가했다. CPSU 중앙위원회 위원(1961~1986)으로 전연방 무대에도 참여했으며, 은퇴 후 독립 키르기스스탄 의회 의원(1993~2005)을 지냈다.
브레즈네프부터 고르바초프까지 소련 검찰을 이끈 법률가, 사하로프에게 추방령을 전달한 검찰총장
1980년 1월 22일, 레쿤코프는 사하로프 앞에서 최고회의 칙령을 낭독했다: 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와 모든 국가 훈장을 박탈하며, 폐쇄도시 고리키로 추방한다.
돈 강 유역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중상을 입은 후 검찰에 투신했다. 로스토프 지역 검사를 거쳐 1976년 소련 검찰 제1부총장, 1981년 루덴코의 후임으로 검찰총장이 되었다. 안드로포프 시기에는 '우즈베크 면화 사건'과 통상부 비리 수사를 진두지휘하며 대규모 반부패 캠페인을 주도했고, 1980년에는 사하로프에게 국가 훈장 박탈과 고리키 추방을 직접 통고했다. 퇴임 후에는 정치적 탄압 피해자 재활 부서에서 일하며 소련 검찰 제도의 복잡한 유산을 몸소 구현했다.
너지가 기록한 10월 31일 결의문에서 노동자평의회는 첫 조항으로 '공장은 노동자의 재산이다'라고 선언했다.
너지 벌라주는 헝가리의 혁명적 사회주의자이자 망명 저술가로, 1956년 혁명에서 노동자평의회가 국가기구와 당 관료제 바깥에서 독자적인 정치·경제 조직을 세운 과정을 기록했다. 그는 11월 4일 이후 부다페스트 중앙노동자평의회의 결성과 파업, 정부와의 협상을 다룬 당사자 기록을 남겼으며, 이 연구는 1961년 브뤼셀에서 프랑스어로 출판되었다. 그의 저술은 노동계급의 자기조직이 혁명의 패배 속에서도 대안적 정치 형태로 작동한 방식과 그 한계를 함께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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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부다페스트 노동자평의회 운동 참여
1956.11부다페스트 중앙노동자평의회 형성과 저항 기록
1961브뤼셀에서 「부다페스트 중앙노동자평의회의 형성」 프랑스어판 출판
1964「International Socialism」에 부다페스트 중앙노동자평의회 기록 게재
1967년 6월 전원회의 연단에서 브레즈네프의 면전에 '수도의 방공은 충분히 신뢰할 수 없다'고 말한 그 순간, 모스크바 시당위원장으로서의 정치 경력은 끝났다.
니콜라이 예고리체프는 1962년부터 1967년까지 모스크바 시당위원회 제1서기를 지낸 소련의 당·국가 지도자이다. 그의 재임기 모스크바에서는 대규모 주택 건설로 300만 명 이상이 새 보금자리를 얻었고, 그의 주도로 알렉산드롭스키 정원의 무명용사 묘가 조성되었으며 트리움프 개선문이 복원되었다. 1967년 6월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모스크바 방공 체계의 취약성을 공개적으로 지적하며 브레즈네프 지도부를 정면으로 비판했고, '콤소몰 그룹'(셸레핀 파벌)의 일원으로 간주되던 그 발언 직후 해임되었다. 이후 덴마크 대사(1970~1984)와 아프가니스탄 대사(1988)를 지내며 소련군 철수 시기 외교 업무를 수행했다.
1953년 재검토반의 결론은 명확했다. “의사 사건은 조작되었고, 의사들은 무죄이므로 석방해야 한다.”
니콜라이 메샤체프는 전후 소련의 콤소몰·국가기관·방송을 거친 관료로, 정치적 명령과 사실 조사 사이의 긴장을 드러내는 인물이다. 1953년 말렌코프의 지시로 의사 사건과 아바쿠모프 사건을 재검토했고, 의사 사건이 조작되었음을 신속히 판정하는 데 관여했다. 그는 훗날 스탈린도 생전에 재검토를 지시했다고 회고했지만, 이 주장은 다른 사료와 함께 검토해야 하는 논쟁적 증언으로 남아 있다. 이후 국가 텔레비전·라디오 위원회를 이끌며 오스탄키노 방송센터 건설과 다중 프로그램 방송 확대를 추진했다.
1941년 포위 중 탈출을 이끌며: "동무들, 나는 군 방첩 요원이다! 내가 돌파를 조직할 것이다. 겁먹고 항복하려는 자는 조국이 내게 준 권한으로 사살하겠다."
소련의 군사방첩 지도자. 의료 교육을 받고 1939년 붉은군대에 입대했으며, 독소전 발발 직전 국가보안기관에 배속되어 전선에서 NKVD 특별부서와 스메르시에서 복무했다. 전후에는 주로 소련군 주독 집단군(GSFG)과 극동군관구에서 군 방첩 요원으로 경력을 쌓았고, 1970년 KGB 제3국장에 올라 소련 전군의 특별부서(오소비스트)를 총괄했다. 1973년 게오르기 치네프 KGB 부의장과의 갈등으로 해임된 뒤 다시 GSFG 특별부서장으로 복귀했으며, 1981년 이후 국가계획위원회 안보 고문을 지냈다. 퇴역 후 군 방첩사에 관한 회고록을 저술했고 100세까지 생존했다.
「나는 곧바로 알아챘다 — 더 가까운 사람을 찾고 있다는 걸. 물론 그랬다. 개인적으로 충성하는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1966년 연방 MOOP 수장 자리에서 밀려난 뒤.
바딤 티쿠노프는 셸레핀의 콤소몰 인맥을 타고 KGB 부의장(1959~1961)을 거쳐 러시아공화국 내무장관(1961~1966)을 지낸 소비에트 국가보안·내무 관료다. 흐루쇼프가 연방 MVD를 폐지한 공백기 속에서, 그는 RSFSR 치안 체계를 실질적으로 이끌며 경찰의 날 제정, 무임승차권, 그리고 소련 경찰 사상 처음으로 고무곤봉·수갑·최루가스 도입을 관철했다. 1966년 브레즈네프가 연방 MOOP을 부활시키며 측근 니콜라이 셸로코프를 수장으로 앉히자 밀려났고, 이후 상부볼타·카메룬 대사로 좌천되었으며 재임 중 야운데에서 사망했다.
「전쟁은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지난 6년의 군대 생활에서 겪은 모든 것은 흥미롭고 창조적이며 아름다운 삶을 위한 밑거름이 되어야 한다」 — 전후 출간된 『전선 일기』에서.
소련의 국제관계학자이자 역사가. 1966년부터 1982년 사망할 때까지 소련 최고의 외교정책 싱크탱크인 세계경제국제관계연구소(IMEMO) 소장을 지냈다. 그의 연구소는 소련의 군축 협상 입장을 뒷받침하는 비밀 분석, 서방 경제에 대한 예측, 그리고 '선진사회주의' 외교정책의 이론적 토대를 생산했다. 1981년부터 CPSU 중앙위원회 정위원으로서 데탕트 시기 소련 외교정책의 실질적 방향을 결정하는 데 직접 관여했으며, 서방과의 건설적 관계의 필요성을 당 지도부에 일관되게 주장했다.
1986년 12월 16일, 고리키의 감시 아파트에 전화가 놓인 지 하루 만에 벨이 울렸다. 수화기 너머는 고르바초프였다. "모스크바로 돌아오십시오." 사하로프는 감사 인사와 동시에 정치범 석방을 꺼냈다. 7년 가까운 유형을 끝낸 그 순간에도 그는 양심의 의제를 내려놓지 않았다.
소련 수소폭탄의 아버지이자 32세의 최연소 정회원 원사(院士) — 그리고 그 모든 특권을 내려놓은 반체제의 양심. 1968년 프라하 진압 즈음 체제와 공개적으로 갈라섰고,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비판하다 1980년 고리키로 유형당했다. 1986년 고르바초프의 전화 한 통으로 돌아와, 인민대의원 자격으로 연단에서 싸우다 죽었다.
1968년 8월 21일 아침, 두브체크는 '인드라 동지가 이끄는 노동자·농민 정부의 이름으로' 체포되었다. 그러나 인드라의 내각은 단 하루도 현실이 되지 못했고, 그가 서명한 초청장은 1990년대에야 공개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의 네오스탈린주의 정치인. 1968년 프라하의 봄 당시 보수파 핵심으로, 바르샤바조약군 개입을 요청한 '초청 편지'에 서명한 5인 중 하나였으며 침공 직후 소련의 후원 아래 '노동자·농민 정부' 수반으로 내정되었다. 후사크 체제에서도 정치국원과 연방의회 의장으로서 '정상화' 숙청을 추진했고, 1989년 벨벳 혁명으로 축출되어 이듬해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