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1985

해빙과 정체의 사람들 445명

스탈린의 관 뚜껑을 연 해빙과 그것을 다시 덮은 정체 사이에서, 우주와 개혁과 반체제의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

알렉산드르 두브체크

Alexander Dubček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체코 슬로바키아 1921–1992 ↓ 실각 1969

인간의 얼굴을 꿈꾸다 산림청으로 보내진 사람

1968년 8월 21일 새벽, 소련군 장교들이 두브체크의 사무실로 들이닥쳐 전화선을 끊고 수갑을 채웠다. 한 장교가 말했다: '필요하다면 체코인 백만 명을 죽여서라도 반혁명을 끝장낼 것이다.'

프라하의 봄을 이끈 슬로바키아 개혁공산주의자. 소련에서 소년기를 보내고 1968년 검열 폐지와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추진했으나, 바르샤바조약군 침공 후 실각해 산림청 직원으로 15년을 보냈다. 1989년 하벨과 함께 발코니에 다시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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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38소련 이주 노동자 가정에서 성장
  • 1944슬로바키아 민족봉기 참가
  • 1963–68슬로바키아 당 제1서기
  • 1968.1체코슬로바키아 당 제1서기: 프라하의 봄
  • 1968.8모스크바로 연행, 의정서 서명 강요
  • 1969–70해임, 터키 대사를 거쳐 산림청으로
  • 1989.12연방의회 의장으로 복귀

올드르지흐 체르니크

Oldřich Černík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체코 체코 1921–1994 ○ 교통사고 후 사망

프라하의 봄을 이끈 광부 출신 기술관료 총리

1968년 7월, 「2000개의 말」 선언을 둘러싼 논란 속에서 체르니크는 의회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선언은 결코 반혁명의 표현이 아니라 당의 한 분파의 의견일 뿐이다.'

체코슬로바키아의 개혁공산주의 총리(1968~1970). 광산 노동자 출신 기술관료로, 연료·에너지 장관과 국가계획위원회 의장을 거쳐 1968년 4월 행동강령을 채택한 당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총리로 임명되었다. 두브체크와 함께 프라하의 봄을 이끌었고, 8월 침공 후 소련에 연행되어 모스크바 의정서에 서명했다. 귀국 후 개혁 지속을 약속했으나, 후사크 체제 아래 1970년 해임·제명되고 20년간 연구소 부소장으로 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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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오스트라바 광산 노동자 가정에서 출생, 선반공으로 일함
  • 1945~49KSČ 입당, 오스트라바 고등광산학교 졸업
  • 1956~60KSČ 중앙위원회 서기
  • 1960~63연료·에너지 장관
  • 1963~68부총리 겸 국가계획위원회 의장
  • 1968.4~70.1체코슬로바키아 총리: 행동강령, 프라하의 봄, 모스크바 의정서
  • 1970~71해임, KSČ 제명
  • 1970~89프라하 연구소 경제 부소장

블라디미르 미하일로비치 비노그라도프

Владимир Михайлович Виноградов
외교 소련 러시아 1921–1997 ○ 자연사

1973년 전쟁과 이란 혁명을 내부에서 목격한 소련 중동 외교관

1979년 6월, 호메이니는 비노그라도프를 불러 직접 경고했다. "우리는 당신들이 아프가니스탄 무슬림들에게 가하는 일을 보고 있다. 소련은 이슬람에 적대적이다."

무역 외교에서 출발해 브레즈네프 시대 소련 중동 외교의 핵심 현장을 두루 거친 외교관이다. 주일 대사와 외무차관을 지낸 뒤, 1970년 이집트 대사로 부임하여 나세르 말기부터 사다트의 서방 전환기까지 카이로에 주재했고, 1973년 10월 전쟁 당시 소련의 대응을 현장에서 조율했다. 1977년 이란 대사로 테헤란에 도착한 지 2년 만에 팔레비 왕조의 붕괴와 이슬람 혁명을 목격했으며, 호메이니와의 긴장된 대면을 통해 혁명 정권과 소련의 복잡한 관계를 관리했다. 이후 러시아공화국 외무장관으로 8년간 재임하며 소련 외교의 제도적 연속성을 유지했고, 퇴임 후에도 중동 평화정착을 위한 비공식 채널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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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43붉은 군대 복무
  • 1948–1950주영 소련 무역대표부 부장
  • 1950–1952주영 소련 무역대표부 부대표
  • 1952–1956대외무역부 대서방무역국 부국장
  • 1956–1962대외무역부 대서방무역국장
  • 1962–1967주일 소련 대사
  • 1967–1970소련 외무차관
  • 1970–1974주이집트 소련 대사
  • 1974–1977소련 외무부 특명대사
  • 1977–1982주이란 소련 대사
  • 1982–1990러시아공화국 외무장관
  • 1990–1997모스크바국제관계대학 강의, 중동평화위원회 위원장

빅토르 게오르기예비치 쿨리코프

Виктор Георгиевич Куликов
군사 · 국방 소련 러시아 1921–2013 ○ 자연사

12년간 바르샤바 조약군을 지휘한 최장수 총사령관

1941년 6월 중순, 폴란드 접경 블라디미르볼린스크의 하숙집 주인이 갓 임관한 쿨리코프 중위에게 말했다. "중위님, 저쪽에서 그러는데 22일에 전쟁이 시작된답니다."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전차장교로 대조국전쟁의 첫날부터 베를린까지 싸웠다. 1971년 참모총장 겸 국방제1차관에 올라 소련군의 현대화를 이끌었고, 1977년부터 1989년까지 바르샤바 조약 통합군 총사령관을 지내며 냉전 후기 동구권 군사 교리를 총괄했다. 1981년 폴란드 계엄령 위기 당시 소련 군사 개입을 반대해 역사의 분수령에 섰다. 소련 원수, 영웅 칭호와 레닌상을 받았으며, 퇴역 후 러시아 하원의원으로 베테랑 복지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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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붉은 군대 입대, 그로즈니 보병학교에서 훈련
  • 1941–1945전차부대 소대장·중대장에서 제143전차여단 참모장까지, 모스크바~베를린 전역 참전
  • 1953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기계화연대·사단장 역임
  • 1959참모본부 군사아카데미 졸업, 제5근위전차군 부사령관
  • 1964제6제병연합군 사령관 (레닌그라드 군관구)
  • 1967–1969키예프 군관구 사령관
  • 1969–1971주독 소련군 총사령관
  • 1971–1977소련군 참모총장 겸 국방제1차관
  • 1977–1989바르샤바 조약 통합군 총사령관 겸 국방제1차관
  • 1999–2003러시아 국가두마 의원 (통합 러시아), 재향군인위원회 위원장

표트르 스테파노비치 플레샤코프

Пётр Степанович Плешаков
중공업 · 군수공업 소련 러시아 1922–1987 ○ 자연사

소련 전파전자전의 설계자

1972년 헬싱키 SALT I 회담에서 소련 대표단의 일원으로 미국 측에 '우리 미사일은 당신들 미사일방어 체계를 버터 자르듯 뚫고 지나갈 것'이라고 말했고, 미국은 곧바로 조약에 서명했다.

1974년부터 1987년까지 소련 라디오공업부 장관을 지낸 군수 행정가로, 소련 전파전자전(RЭБ)과 방공 레이더 체계의 기술적 토대를 구축했다. TsNII-108 소장 시절 소련 최초의 광대역 항공 자동 무선정찰 스테이션 '롬-1'과 대레이더 수동탐지 유도 미사일 체계를 개발했으며, 장관으로서 탄도미사일의 미사일방어 돌파용 전자대응책과 우주 조기경보 시스템을 총괄했다. 미국의 전략방위구상(SDI)에 대응하는 '반SDI' 프로그램을 주도하며 냉전기 전자전 경쟁의 핵심 축을 형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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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4–1945붉은군대 통신연구소(NIIIS) 기술자, 제3벨로루시·자바이칼 전선 파견
  • 1945–1950TsNII-108 선임연구원·연구실장
  • 1950–1952소련 군부 제5총국(무선정찰·전파방해) 장교, 한국전쟁 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두 차례 파견
  • 1952–1958TsNII-108 부서장·섹터장, '롬-1' 정찰 스테이션·대레이더 미사일 유도 체계 개발
  • 1958–1964TsNII-108 소장, 공병대령
  • 1964–1968국가무선전자위원회 부위원장, 라디오공업 차관
  • 1968–1974라디오공업부 제1차관
  • 1974–1987라디오공업부 장관, 대장 진급

게오르기 니키토비치 볼샤코프

Георгий Никитович Большаков
군사 · 국방 소비에트 러시아인 1922–1989 ○ 사망

흐루쇼프와 케네디 사이의 비밀 배후 채널을 운용한 GRU 장교

로버트 케네디는 회고록에서 볼샤코프가 전한 흐루쇼프의 '방어용 무기' 보증을 떠올리며 "그 모든 것이 하나의 거대한 거짓의 직물이었음을 깨달았다"고 썼다.

모스크바 출신의 GRU 장교. 1951년 TASS 특파원으로 첫 미국 파견을 시작해, 1959년부터는 잡지 「소비에트 라이프」 부편집장 신분으로 워싱턴에서 활동했다. 1961년 5월 프랭크 홀먼의 주선으로 로버트 케네디를 만난 이후 약 1년 반 동안 50여 차례 독대하며 흐루쇼프-케네디 간 비밀 배후 채널을 운용했고, 베를린 위기와 쿠바 미사일 위기 국면에서 소련의 의도를 백악관에 전달하는 핵심 창구였다. 쿠바 위기 당시 모스크바의 지시에 따라 소련의 쿠바 군사 지원이 순수 방어용이라고 거듭 보증했으나, 미사일 발사대가 적발되며 신뢰가 붕괴되었고 1962년 12월 본국으로 소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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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3군사 통역 장교, 연대 통역 및 사단 정보과 보좌관으로 카렐리야·북서 전선에서 복무
  • 1943–1950고등정보학교 및 군사외교 아카데미에서 수학
  • 1951–1955TASS 특파원 신분으로 뉴욕·워싱턴 주재 (첫 미국 파견)
  • 1955–1957주코프 국방장관 특별임무 장교
  • 1957–1959GRU 중앙기관 선임 장교
  • 1959–1962잡지 「소비에트 라이프」 부편집장 신분으로 워싱턴 주재, 로버트 케네디와 약 50회 비밀 접촉
  • 1962–1989노보스티 통신사 근무, 잡지 「소비에트 연방」 편집장 역임

빅토르 그리고리예비치 아파나시예프

Виктор Григорьевич Афанасьев
이념 · 선전 소련 러시아인 1922–1994 ○ 자연사 (암)

프라우다 최장기 편집장이자 브레즈네프 시대 인쇄 정통의 수문장

그는 우리 역사의 더러운 빨래를 들추어볼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출신으로, 1976년부터 1989년까지 13년간 당 기관지 《프라우다》 편집장을 맡아 브레즈네프 시대 인쇄 정통의 최종 수문장으로 군림했다. 재임 중 《프라우다》 발행부수는 1,060만 부로 정점을 찍었고, 소련 언론인연맹 의장과 중앙위원회 위원을 겸하며 당의 공식 입장을 신문 지면에 충실히 구현했다. 1989년 옐친의 음주 의혹을 다룬 이탈리아 기사를 전재했다가 사상 초유의 사과문을 게재하고 해임되었으며, 이는 글라스노스트 시대에 구시대적 편집 노선이 붕괴했음을 상징하는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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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1953적군 복무, 공수부대 및 SMERSH 방첩 장교
  • 1953–1960첼랴빈스크 사범대학 철학 강사·학과장
  • 1960–1968CPSU 중앙위 부설 사회과학아카데미 교수
  • 1968–1974《프라우다》 부편집장·제1부편집장
  • 1974–1976《콤무니스트》 편집장
  • 1976–1989《프라우다》 편집장 (역대 최장기)
  • 1976–1990소련 언론인연맹 의장, 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90–1994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주임연구원

무함메트나자르 가푸로비치 가푸로프

Мухамедназар Гапурович Гапуров
사회주의권 지도자 소련 투르크메니스탄 1922–1999 ○ 자연사

16년간 브레즈네프 시대 투르크메니스탄을 이끌며 면화·가스 경제를 통합한 공화국 지도자

1943년 2월 26일, 북서전선에서 상급병사 가푸로프는 총알이 다리를 꿰뚫고 파편 세 개가 오른팔을 찢는 중상을 입었다. 그 부상이 그를 교단에서 당 기구로 밀어 올린 인생의 분기점이었다.

차르조우 근처 마을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교사로 출발한 투르크멘 당 간부로, 1941년 징집되어 북서전선에서 자동소총 분대장으로 싸우다 1943년 2월 중상을 입고 제대했다. 이후 콤소몰과 당 기구를 차근차근 올라 1963년 투르크멘 SSR 각료회의 의장 겸 외무장관이 되었고, 1969년 12월 공산당 제1서기에 올라 16년간 공화국을 이끌었다. 그의 재임기는 투르크메니스탄의 천연가스 개발과 관개 농업 확장이 본격화된 시기로, 공화국은 소련의 면화·에너지 경제에 깊숙이 편입되었으나 동시에 지역 간 파벌 경쟁과 족벌주의도 심화되었다. 1985년 12월 고르바초프가 면화 부패 스캔들을 이유로 그를 전격 해임했고, 이후 회고록을 집필하다 1999년 별장에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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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차르조우주 8년제 학교 교사
  • 1941–1943소련군 자동소총 분대장, 북서전선 참전, 중상으로 제대
  • 1943–1944학교 교무주임·교장, 차르조우주
  • 1944–1947차르조우 지역당 위원회 선전선동부장
  • 1948–1951차르조우주 콤소몰 제1서기
  • 1951–1955투르크멘 SSR 콤소몰 중앙위원회 선전선동 담당 서기
  • 1959–1962차르조우주 당위원회 제1서기
  • 1962–1963투르크메니스탄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 1963–1969투르크멘 SSR 각료회의 의장 겸 외무장관
  • 1969–1985투르크메니스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71–1986CPSU 중앙위원회 위원 (1966–1971 후보위원)

언드라시 헤게뒤시

Hegedüs András
정부 수반 헝가리 헝가리인 1922–1999 ○ 자연사

혁명의 문턱에서 책임을 짊어진 젊은 총리

그는 훗날 총리직 수락을 두고 “나쁜 결정이었다”고 회고했다.

헤게뒤시 언드라시는 헝가리 공산주의 정치가이자 사회학자로, 라코시 체제의 충실한 간부에서 체제 비판적 연구자로 이동했다. 라코시와 게뢰의 후원으로 총리가 되었지만, 1956년 혁명 때 소련군 개입 요청서에 서명하며 마비된 지도부의 정치적 책임을 떠안았다. 모스크바로 피신했다가 귀국한 뒤 사회학 연구를 이끌었고,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에 항의한 뒤 당에서 축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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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불법 헝가리 공산당 가입
  • 1945–1947MADISZ 전국 서기
  • 1951–1953농업 관련 장관
  • 1953–1955각료회의 제1부의장
  • 1955–1956헝가리 각료회의 의장
  • 1956혁명 중 소련군 개입 요청서 서명
  • 1963–1968헝가리 과학아카데미 사회학 연구그룹 창립·소장
  • 1973헝가리 사회주의노동자당 제명

니콜라이 겐나디예비치 바소프

Николай Геннадиевич Басо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922–2001 ○ 자연사

메이저와 레이저의 기초를 세우고 양자전자공학을 미사일 방어로 확장한 노벨상 물리학자

1985년, 미국의 SDI 계획에 맞서 바소프는 "소련이 제안된 어떤 기술에도 대응할 수 있다"고 공개 선언했다. 냉전 말기의 기술 경쟁에서 노벨상 수상자의 말은 단순한 과학적 견해가 아니라 국가 전략의 일부였다.

소련의 라디오물리학자이자 양자전자공학의 창시자 중 한 명이다. 1952년 알렉산드르 프로호로프와 함께 암모니아 분자빔을 이용한 전자기파 증폭·발진 원리를 확립했고, 1954년 최초의 메이저를 제작했다. 이후 3준위 레이저, 반도체 레이저, 고출력 가스·화학 레이저로 연구를 확장했으며, 레이저 핵융합 가능성을 세계 최초로 제안했다. 이 공로로 1964년 프로호로프, 찰스 타운스와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1973년부터 15년간 레베데프 물리학연구소장을 맡으며 소련 레이저 물리학의 제도적 중심을 이끌었고, 그의 연구는 소련의 미사일 방어 계획에 직접 기여했다. 1985년 미국의 SDI 구상에 대해 소련도 동등한 기술력으로 대응할 수 있다고 공개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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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붉은 군대 징집, 쿠이비셰프 군사의학아카데미 입교
  • 1943–1945제1우크라이나 전선에서 야전 군의관 보조로 복무
  • 1945–1950모스크바 공학물리연구소(MEPhI) 입학 및 졸업
  • 1950–1953레베데프 물리학연구소(FIAN) 대학원생, 1953년 이학후보 학위
  • 1956이학박사 학위 취득, 논문 「분자 발진기」
  • 1958–1972레베데프 물리학연구소 부소장
  • 1959프로호로프와 함께 레닌상 수상
  • 1962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선출
  • 1963FIAN 양자라디오물리학 연구실 창설 및 초대 실장
  • 1964노벨 물리학상 수상 (프로호로프, 타운스와 공동)
  • 1966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아카데미크) 선출
  • 1967–1990소련 과학아카데미 상임위원회 위원
  • 1969첫 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
  • 1973–1988레베데프 물리학연구소장
  • 1974소련 최고회의 연방회의 대의원 (제9~11기)
  • 1982두 번째 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
  • 1989소련 국가상 수상

바딤 알렉세예비치 키르피첸코

Вадим Алексеевич Кирпиченко
국가보안 기관 소련 러시아인 1922–2005 ○ 자연사

소련 대외정보 작전을 12년간 지휘한 KGB 제1총국 부국장

1979년 12월 카불, 슈토름-333 작전 개시 후 상황을 전혀 몰랐던 주아프간 소련 대사 타베예프가 전화로 해명을 요구하자, 키르피첸코는 "지금 너무 바빠서 통화할 수 없습니다. 아침에 보고드리겠습니다"라고 답하고 끊었다.

키르피첸코는 KGB 제1총국(대외정보)의 첫 번째 부국장으로서 1979년부터 소련 붕괴까지 12년간 소련의 해외 첩보 활동을 실질적으로 지휘한 인물이다. 모스크바 동양학대학 아랍어과를 수석 졸업한 후 1954년 이집트 부주재관으로 정보 경력을 시작했으며, 수에즈 위기와 욤키푸르 전쟁을 카이로 현장에서 목격했다. 1979년 12월에는 카불에 직접 파견되어 하피줄라 아민 축출 작전의 정보 부문을 지휘했고, 이후 고르바초프 시기 글라스노스트가 외국 정보기관의 활동을 용이하게 만들고 있다고 경고했다. 은퇴 후 6권 분량의 《러시아 대외정보사》 편찬을 주도하며 소련 정보기관의 공식 기억을 정리하는 작업에 헌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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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5–1946제103근위소총사단 복무 (헝가리·오스트리아·체코슬로바키아 전선)
  • 1947–1952모스크바 동양학대학 아랍어과
  • 1952–1953KGB 제101정보학교
  • 1953–1954KGB 제1총국 동방부
  • 1954–1960KGB 주이집트 부주재관
  • 1962–1964KGB 주튀니지 주재관
  • 1967–1970KGB 제1총국 아프리카부장
  • 1970–1974KGB 주이집트 주재관
  • 1974–1979KGB 제1총국 부국장 겸 'S'국장 (비합법정보)
  • 1979–1991KGB 제1총국 제1부국장
  • 1988–1989KGB 제1총국장 권한대행
  • 1991–1997러시아 대외정보국(SVR) 고문단장

올레그 겐리호비치 이바놉스키

Олег Генрихович Ивановский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계 1922–2014 ○ 자연사

초기 우주선의 조립과 시험을 이끈 설계자

가가린은 해치 수리를 마친 이바놉스키에게 말했다. ‘그때 네 얼굴을 봤어야 해, 녹슨 금속의 온갖 색이 지나가더군.’

올레그 이바놉스키는 전쟁 경험 뒤 로켓·우주기술 설계자가 되어 소련 우주계획의 초기 체계를 현장에서 구현했다. 그는 미하일 호먀코프의 대리로 스푸트니크 1호의 조립과 시험을 이끌었고, 이어 달·행성 자동정거장과 보스토크 유인우주선 개발을 담당했다. 가가린의 첫 비행을 준비한 뒤 라보치킨 설계국에서 달 탐사와 행성 연구용 기체를 지휘했으며, 은퇴 후에는 우주기술 박물관에서 그 역사를 보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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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1946붉은군대 국경·기병부대 복무, 대조국전쟁 참전
  • 1947–1954NI-88 기술자·선임기술자, 모스크바 동력공학대학 졸업
  • 1954–1957OKB-1 설계자, 초기 인공위성 개발
  • 1957–1961스푸트니크 1호·2호 및 달 탐사선 설계 책임, 보스토크 수석설계자
  • 1961–1965소련 각료회의 군산문제 국가위원회 우주부문장
  • 1965–1983라보치킨 설계국 달·행성 부문 부총괄·총괄설계자
  • 1983–2014라보치킨 우주기술박물관장 및 과학고문

레오니트 미트로파노비치 자먀틴

Леонид Митрофанович Замятин
이념 · 선전 소련 러시아 1922–2019 ○ 자연사

브레즈네프 체제의 정보 설계자

자먀틴은 카터 행정부를 향해 '미국은 세계 헌병 역할에 나서고 있다'고 맹렬히 비난하며, 하피줄라 아민이 CIA 요원이었다는 주장을 소련 고위 관리로서는 처음으로 공개 제기했다. — FRUS, 1980년 1월 28일

소련의 외교관이자 당 선전 책임자로, TASS 사무총장과 중앙위 국제정보부장을 거치며 브레즈네프 시기 소련의 해외 정보·선전 체계를 총괄했다. 브레즈네프 회고록 3부작의 집필진을 이끌어 레닌상을 수상했으며, 말년에는 주영 대사로 부임했다가 1991년 8월 쿠데타를 규탄하기를 거부하여 해임되었다. 냉전기 소련의 대외 이미지와 정보 통제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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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4–1946모스크바 항공대학·고등외교학교 졸업, 외무부 입부
  • 1946–1962외무부에서 UN·IAEA 대표부 근무, IAEA 상임대표 역임
  • 1962–1970외무부 공보국장, 대외 발표와 언론 브리핑 총괄
  • 1970–1978TASS 사무총장, 소련 공식 통신사의 수장
  • 1978–1986중앙위 국제정보부장, 당의 대외 선전·정보 활동 총괄
  • 1978브레즈네프 회고록 3부작 집필진 지휘, 레닌상 수상
  • 1986–1991주영 소련 대사, 8월 쿠데타 규탄 거부로 해임

빅토르 미하일로비치 글루시코프

Виктор Михайлович Глушко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923–1982 ○ 병사

OGAS라는 전국 실시간 네트워크로 계획경제를 관리하려 한 소련 사이버네틱스의 아버지

1964년 코시긴이 OGAS 비용을 묻자 글루시코프는 200억 루블과 3차 5개년 계획을 답했다. 경제학자들은 '개혁에는 결의문 인쇄용 종잇값밖에 안 들고 결과는 더 좋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코시긴은 시장 개혁을 택했고, 소련은 컴퓨터로 계획경제를 구할 기회를 잃었다.

소련 사이버네틱스의 아버지. 1962년 키예프 사이버네틱스 연구소를 창설하고, 실시간 컴퓨터 네트워크 OGAS로 전국 경제의 최적 계획을 구상했다. 당 관료들은 통제권 상실을 우려해 이를 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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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8로스토프 대학 졸업, 우랄 산림공과대학 교편
  • 1951–1955물리수학 박사 (모스크바 대학) — 힐베르트 제5문제 연구
  • 1956–1962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계산센터 소장 — MESM 실험실 계승
  • 1962–1982사이버네틱스 연구소 창설 소장 겸 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부원장
  • 1963–1982국가과학기술위 산하 전산기술·경제수학 도입 위원회 의장
  • 1966–1982키예프 대학 이론사이버네틱스 학과장, 사이버네틱스 학부 공동 창설
  • 1967–1982모스크바 물리기술연구소(MFTI) 키예프 분과 창설·지도
  • 1971–1982소련 최고회의 대의원 (제8~10대)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 콜두노프

Александр Иванович Колдунов
군사 · 국방 소련 러시아 1923–1992 ○ 자연사

독소전 최고의 Yak 에이스에서 방공군 총사령관으로, 루스트 사건 한 방에 퇴장한 항공 총원수

1944년 11월 니시 상공. 미군 P-38 편대의 오인 공격에 콜두노프 대위가 Yak-9로 미군 선도기 옆에 붙어 날개를 흔들며 적색 별을 보여주었다. 제2차 세계대전 유일의 미소 직접 교전은 그렇게 15분 만에 끝났다.

독소전쟁에서 412회 출격, 96회 공중전을 치르며 46기를 격추한 Yak 전투기 최고의 에이스로 두 차례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1944년 니시 상공에서 소련 부대를 오인 공격한 미군 P-38 편대와의 교전을 직접 종결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전후 방공군으로 전환해 1978년 방공군 총사령관에 올랐고, 1984년 항공 총원수 계급을 받았다. 1987년 마티아스 루스트의 경비행기가 방공망을 뚫고 붉은 광장에 착륙하자 해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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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3–1945866전투항공연대 조종사 → 비행대장 — 412회 출격, 46기 격추, 두 차례 소비에트연방영웅
  • 1952–1960공군사관학교·참모아카데미 졸업, 전투항공연대장·사단장
  • 1962–1968바쿠 방공군구 전투항공 사령관 → 제11방공군 사령관 (극동)
  • 1970–1975모스크바 방공군구 사령관
  • 1975–1978방공군 제1부총사령관
  • 1978–1987방공군 총사령관, 1984년 항공 총원수 진급
  • 1987.6마티아스 루스트 붉은 광장 착륙 사건으로 해임

빅토르 미하일로비치 체브리코프

Виктор Михайлович Чебриков
국가보안 기관 소련 러시아 1923–1999 ↓ 해임 1988

정체 말기와 페레스트로이카 초의 KGB 의장

체브리코프는 죽기 1년 전 러시아 TV 인터뷰에서 KGB 시절을 이렇게 변호했다. "나는 과거를 얼려버리는 시각에 반대합니다."

2차대전에서 세 차례 부상당하며 대대장까지 오른 전투 장교 출신으로, 드니프로페트로우시크 당 간부를 거쳐 1967년 안드로포프의 부름으로 KGB에 합류했다. 1982년부터 6년간 KGB 의장을 맡아 알드리치 에임스의 정보를 활용한 대미 첩보전과 우즈베키스탄 부패 수사를 동시에 진두지휘했다. 1985년 정치국 정위원이 되었으나 페레스트로이카의 속도에 반대하며 리가초프 계열에 섰고, 1988년 해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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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7–1982안드로포프 휘하 KGB에서 승진, 방첩·보안 행정 경험 축적
  • 1982–1988KGB 의장, 정체 말기와 페레스트로이카 초기 보안기관 지휘
  • 1983–1985안드로포프-체르넨코기 반부패·규율 캠페인과 보안 통제 유지
  • 1985–1988고르바초프 초기 개혁 속에서도 한동안 보안기관 대표로 정치국에 잔류
  • 1988개혁 속도와 맞지 않아 KGB 의장에서 교체

블라디미르 표도로비치 웃킨

Владимир Фёдорович Уткин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923–2000 ○ 자연사

'사탄' 미사일의 아버지: 냉전 핵균형의 기술적 초석을 놓은 설계자

1966년 바이코누르. 사일로에서 R-36이 솟아오르자 드골은 '콜로살!'을 연발했다. 웃킨은 훗날 회고했다. '그래도 진짜 전투발사로는 이어지지 않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미하일 얀겔의 후계자로서 1971년부터 1990년까지 KB 유즈노예를 이끈 수석설계자. 얀겔의 저장성 추진제 로켓 노선을 계승하여 역대 가장 강력한 대륙간탄도미사일 R-36M(나토명 SS-18 '사탄')을 완성했고, 철도기동형 RT-23 몰로데츠와 우수한 중형 발사체 제니트를 개발했다. 두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레닌상과 국가상을 수상했으며 소련 과학아카데미와 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CPSU 중앙위원(1976~1990)을 지냈다. 냉전 후기 소련 전략로켓군의 핵심 전력을 설계하며 미소 간 핵균형을 기술적으로 뒷받침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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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KB 유즈노예 입사, 엔지니어·선임엔지니어
  • 1967KB 유즈노예 수석설계자 제1대리
  • 1971KB 유즈노예 수석설계자 겸 소장
  • 1976우크라이나 SSR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CPSU 중앙위원
  • 1979KB 유즈노예 총설계자 겸 소장
  • 1984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86NPO 유즈노예 총괄국장 겸 총설계자
  • 1990–2000TsNIIMASh 소장

필리프 티모페예비치 예르마시

Филипп Тимофеевич Ермаш
문화 · 문학예술 통제 소련 러시아 1923–2002 ○ 자연사

소비에트 할리우드를 꿈꾼 정체기 영화 총책

안드로폰프가 《시베리아다》를 보고 "이거 반소비에트 영화 아니냐"고 묻자, 예르마시는 "나도 시베리아인입니다, 그게 현실이었습니다"라고 답하며 영화를 지켰다.

1972년부터 1986년까지 소련 국가영화위원회(고스키노) 의장을 지내며 정체기 영화계를 총괄한 당 관료이다. 시베리아 농민 출신으로 공병으로 참전했고, 콤소몰과 스베르들롭스크 당 기구를 거쳐 1962년 중앙위원회 문화부 영화 부문 책임자가 되었다. 고스키노 의장으로서 이념 통제와 대중 흥행을 병행해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 《승무원》 등 블록버스터와 타르콥스키·콘찰롭스키의 작품을 모두 관리하며 소련판 스튜디오 시스템을 추구했다. 1986년 영화인대회의 비판 속에 물러났으나, 임기 중 소련 영화는 오스카 2개를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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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5붉은 군대 복무, 공병, 적성훈장·용기메달 수훈
  • 1951–1956스베르들롭스크 시 콤소몰 제2서기 → 제1서기
  • 1956–1962스베르들롭스크 주당위 과학·학교·문화부장
  • 1962–1972중앙위 문화부 영화 부문 책임자 → 문화부 부장
  • 1972–1986국가영화위원회(고스키노) 의장
  • 1976–1989중앙위원회 위원 후보

헤이다르 아리르자 오글루 알리예프

Heydər Əlirza oğlu Əliyev
사회주의권 지도자 아제르바이잔 아제르바이잔 1923–2003 ○ 자연사

KGB에서 크렘린까지 오른 아제르바이잔의 실용주의자

KGB 제1부의장 표도르 보브코프가 "3년 동안 무엇을 해냈습니까?"라고 묻자 알리예프는 이렇게 답했다. "제가 장담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는 뇌물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소련 국가보안기관에서 28년간 복무한 아제르바이잔인으로, KGB 의장을 거쳐 1969년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가 되었다. 브레즈네프 시기 동안 공화국 경제를 급성장시키고 포도·석유·면화 생산을 대폭 확대했으며, 1982년에는 비슬라브인으로서는 드물게 소련 각료회의 제1부의장 겸 정치국 정위원에 올랐다. 1993년 독립 아제르바이잔의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세기의 계약'으로 불리는 대규모 카스피해 석유 개발 협정을 체결하고, 취약한 신생국을 안정시켜 건국의 아버지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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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4–1967아제르바이잔 SSR 국가보안위원회(KGB) 요원·간부, 방첩부장·부의장 역임
  • 1967–1969아제르바이잔 SSR 각료회의 산하 KGB 의장 (소장)
  • 1969–1982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76–1982CPSU 중앙위원회 정치국 후보위원 → 정위원 (1982)
  • 1982–1987소련 각료회의 제1부의장 (기계·경공업·운송·문화·교육 담당)
  • 1993–2003아제르바이잔 공화국 제3대 대통령

보리스 이바노비치 스투칼린

Борис Иванович Стукалин
문화 · 문학예술 통제 소련 러시아 1923–2004 ○ 자연사

브레즈네프기 출판·검열의 최고 책임자

불가코프 작품에 대한 긍정적 평론을 실은 출판사들을 질책하며 그가 남긴 말: '소비에트 권력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은 작가를 왜 출판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브레즈네프 시대 12년간 소련 출판·인쇄·서적 유통 전체를 관장한 고스코미즈다트 의장으로, 모든 책·신문·잡지의 출간 여부를 결정하는 실질적 검열 최고 책임자였다. 언론인 출신으로 지역 신문 편집장에서 시작해 『프라우다』 부주필을 거쳐 1970년 국가출판위원회 수장에 올랐으며, 200권 『세계문학전집』과 같은 대규모 출판 기획을 진두지휘하며 소련을 1인당 도서 출간 세계 1위로 올려놓는 한편, 불가코프 같은 '소비에트 권력을 받아들이지 않은 작가'의 출판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이념적 보수성을 견지했다. 안드로포프 집권 후에는 중앙위 선전부장으로 승진했으나, 고르바초프 등장과 함께 헝가리 대사로 전출되며 중앙 무대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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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1941보로네시주 지역 신문 『노바야 지즌』 문예부원
  • 1942–1946서부전선·제2벨로루시전선 통신대대 무선기술병, 베를린 입성
  • 1948–1960보로네시주 지역신문 편집장 → 주(州) 당 기관지 『콤무나』 편집장
  • 1960–1963CPSU 중앙위 선전부 RSFSR 담당 지도원 → 출판·방송·TV 섹터장
  • 1963–1965RSFSR 각료회의 출판위원회 의장
  • 1965–1970『프라우다』 부주필 → 제1부주필
  • 1970–1982소련 각료회의 출판위원회 의장 → 국가출판·인쇄·서적유통위원회(고스코미즈다트) 의장
  • 1982–1985CPSU 중앙위 선전부장
  • 1985–1990주 헝가리 소련 특명전권대사

마르쿠스 볼프

Markus Wolf
국가보안 기관 독일민주공화국 독일 1923–2006 ○ 자연사

냉전 정보전의 장기 설계자

1984년 8월 RYaN 회의에서 그는 서방의 핵공격 징후보다 ‘실제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는 문제를 제기했다.

마르쿠스 볼프는 나치 박해를 피해 소련으로 망명한 뒤 독일민주공화국의 대외정보기관을 이끈 공산주의 관료이자 정보 책임자였다. 그는 1952년부터 1986년까지 슈타지 해외정보국 HVA를 지휘하며 서독 정치·군사·경제를 겨냥한 첩보와 공작을 조직했다. 1980년대 초 소련이 핵 선제공격 공포 속에서 RYaN 작전을 확대하자, 볼프는 협력을 유지하면서도 현장 정보가 실제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는 긴장을 드러냈다. 독일 통일 뒤 그는 해외 망명과 재판을 거쳤고, 자신의 국가보안 활동에 대한 책임과 사회주의의 개혁 가능성을 회고록과 공개 발언으로 다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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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1933슈투트가르트에서 성장
  • 1933–1943소련 망명, 모스크바와 코민테른 학교에서 수학
  • 1943–1945모스크바 독일인민방송 편집자·방송원
  • 1949–1951독일민주공화국 모스크바 대사관 초대 참사관
  • 1952–1986대외정보기관 IWF와 HVA 국장
  • 1953–1986국가보안부 장관 제1차관
  • 1986–1990퇴임 후 회고록 집필과 개혁 논쟁 참여
  • 1990–2006망명과 재판을 거쳐 베를린에서 사망

보리스 파블로비치 부가예프

Борис Павлович Бугаев
경제 운영 소련 우크라이나 1923–2007 ○ 자연사

브레즈네프의 개인 조종사에서 항공원수가 된 민간항공 수장

1961년 지중해 상공, 납치된 프랑스 전투기가 브레즈네프의 Il-18기에 발포했을 때 조종간을 잡은 부가예프는 급선회로 공격을 회피했다. 착륙 후 브레즈네프는 "네 덕분에 살았다"고 말했다.

브레즈네프의 개인 조종사로 발탁되어 1970년부터 17년간 민간항공부 장관을 지내며 아에로플로트를 제트기 중심의 세계적 항공사로 성장시켰다. 1977년 항공원수로 진급하여 모든 병종을 통틀어 소련 최후의 원수 계급 보유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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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3항공훈련대대 생도, 악튜빈스크 항공학교 교관
  • 1943–1947215항공대 조종사·편대장, 당파운동 중앙참모부 임무 수행
  • 1948–1957브누코보 공항 기장·교관 조종사, 아에로플로트 최초 장거리 노선 개척
  • 1957–1966제235특별항공대대장, 브레즈네프 전용기 조종사
  • 1966–1970민간항공부 차관, 제1차관
  • 1970–1987민간항공부 장관, 아에로플로트 제트화·세계적 확장 주도
  • 1987–1992국방부 감찰총감

그리고리 바실리예비치 로마노프

Григорий Васильевич Романов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 1923–2008 ↓ 강제은퇴 1985

레닌그라드에서 모스크바로, 마지막 한 걸음에서 멈춘 후계자

«아무도 고르바초프를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가 다음 날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모든 일을 끝내 놓았다. 정치국 규칙이 요구하는 대로 우리를 기다리지도 않고. 그토록 빨랐다! 이미 그들 모두와 비밀리에 거래를 마친 것이다.» — 1985년 3월 체르넨코 사후 승계 과정을 회고하며.

레닌그라드 조선기술자 출신으로, 1970년부터 13년간 레닌그라드 주 당 제1서기를 지내며 대규모 주택 건설, 지하철 확장, 레닌그라드 원전 및 방조제 착공 등 도시 기반을 재편했다. 군수공업을 관장하는 중앙위 서기와 정치국 위원까지 올랐고, 브레즈네프안드로포프 모두 그를 차기 서기장 후보로 주목했다. 1985년 체르넨코 사후 고르바초프와의 승계 경쟁에서 밀려난 것은 소련 말기 역사의 결정적 분기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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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45통신병으로 레닌그라드·발트 전선 복무, 부상
  • 1946–54조선소 설계기사 → 당위 비서·파르토르그
  • 1957–61레닌그라드 키로프 구 당 제1서기
  • 1963–70레닌그라드 주 당 제2서기
  • 1970–83레닌그라드 주 당 제1서기
  • 1973–76정치국 후보위원
  • 1976–85정치국 정위원
  • 1983–85중앙위 서기, 군수공업 담당

미하일 미트로파노비치 자이체프

Михаил Митрофанович Зайцев
군사 · 국방 소련 러시아 1923–2009 ○ 자연사

동독 주둔 소련군 총사령관이자 아프가니스탄 작전을 지휘한 대장

전차군 사령관 리발코가 부상당한 자이체프 대위의 병실을 찾았다. "자네, 아직 한참 더 싸워야 하네." 그리고 자신의 권한으로 붉은기 훈장을 수여했다. 소련영웅 칭호는 40년 뒤에야 따라왔다.

위대한 조국전쟁에 자원입대해 쿠르스크에서 프라하까지 싸운 전차부대 장교로, 전후 기갑군 사령관과 벨로루시 군관구 사령관을 거쳤다. 1980년부터 1985년까지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최전선인 주동독 소련군(GSFG) 총사령관을 맡아 하급 장교의 주도성을 강조하는 훈련 개혁을 단행했고, 1983년 소련영웅 칭호를 받았다. 1985년 남부전략방향 총사령관으로 전임되어 아프가니스탄 내 소련군 작전을 지휘했으며, 산악전에 부적합한 BMP-1을 대체할 BMP-2의 대량생산을 중앙에 직접 요구해 관철시켰다. 2미터에 가까운 거구에 막강한 체력으로 '훈련장 장군'이라 불린 그는, 냉전 말기 소련 지상군의 작전 교리와 장비 현대화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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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5자원입대, 전차여단·군단 참모 장교로 종전까지 복무, 6개 전투훈장 수훈
  • 1945–1965공수·전차사단 참모, 육군참모대학 졸업(1965)
  • 1965–1969제17근위전차사단장, 제120근위차량화소총사단장
  • 1969–1972제5근위전차군 사령관
  • 1972–1980벨로루시 군관구 제1부사령관, 이어 사령관(1976)
  • 1980–1985주동독 소련군(GSFG) 총사령관, 육군대장 진급(1980), 소련영웅(1983)
  • 1985–1989남부전략방향 총사령관, 아프가니스탄 작전 지휘
  • 1989–1992국방부 감찰총감단, 퇴역(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