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1985

해빙과 정체의 사람들 445명

스탈린의 관 뚜껑을 연 해빙과 그것을 다시 덮은 정체 사이에서, 우주와 개혁과 반체제의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

게오르기 아르카디예비치 아르바토프

Георгий Аркадьевич Арбатов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소련 러시아 1923–2010 ○ 자연사

데탕트를 설계한 소련 최고의 미국 전문가, 아카뎀고로도크가 아닌 아르바트 거리에 연구소를 세우다

「우리의 진정한 비밀무기는 당신들에게서 적을 빼앗는 것이다」 — 아르바토프가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냉전 종식을 설명하며, 1988년 12월

브레즈네프부터 고르바초프까지 소련 지도자들의 대미 외교정책을 설계한 최고의 미국 전문가. 1967년 미국·캐나다연구소(ISKAN)를 창설해 28년간 이끌며 SALT와 데탕트의 지적 토대를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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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4근위박격포대대 정찰대장, 포대장, 연대 참모차장보 — 칼리닌·보로네시·제1·2우크라이나 전선군, 드네프르 도하
  • 1949–1960외국문학출판사 편집자, 《보프로시 필로소피》 부장, 《노보예 브레먀》 부장, 《콤무니스트》 자문역
  • 1960–1963《세계평화와 사회주의의 제문제》 논설위원 (프라하)
  • 1962–1964IMEMO 분야장, 이념투쟁 연구
  • 1964–1967CPSU 중앙위 국제부 자문그룹장, 브레즈네프 외교정책 자문
  • 1967–1995소련과학원 미국·캐나다연구소(ISKAN) 창설 소장, 아카데미크(1974)
  • 1971–1991중앙감사위원 → 중앙위 후보위원 → 중앙위 위원, 최고소비에트 대의원
  • 1995–2010ISKAN 명예소장, 러시아과학원 고문, 회고록 《체제》 《나의 시대》 집필

세르게이 이오시포비치 마냐킨

Сергей Иосифович Манякин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인 1923–2010 ○ 자연사

26년간 옴스크를 통치한 소련 최장수 지역당 서기

1961년 10월 볼셰레치예에서 아침 일찍, 당위원회 앞 광장에서 파란색 운동복 차림으로 체조를 하던 남자—그가 바로 옴스크 주의 새 제1서기, 39세의 마냐킨이었다.

소련 역사상 가장 오래 지역당 제1서기를 지낸 인물로, 1961년부터 1987년까지 26년간 옴스크 주당위원회 제1서기를 역임했다. 흐루쇼프가 농업 위기에 대응해 직접 임명했으며,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옴스크는 정유·중공업·농공복합단지를 갖춘 시베리아의 주요 산업도시로 성장했다. 1987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소련 인민통제위원회 의장으로 발탁되어 개혁기 국가 감독 기구를 이끌었고, 이후 당통제위원회 제1부의장을 지냈다. 1961년부터 1990년까지 29년간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재임하며 흐루쇼프·브레즈네프·고르바초프 3대를 관통한 전형적인 브레즈네프기 지역당 보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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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3붉은군대 병사, 부상으로 제대
  • 1948–1957농업경제인: 농업기사 → MTS 소장 → 콜호즈 의장 (스타브로폴)
  • 1957–1960스타브로폴 지방당위 농업부장
  • 1960–1961스타브로폴 지방집행위원회 의장
  • 1961CPSU 중앙위원회 감찰관
  • 1961–1987옴스크 주당위원회 제1서기
  • 1987–1989소련 인민통제위원회 의장
  • 1989–1990CPSU 중앙위 당통제위원회 제1부의장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예피모프

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Ефимов
군사 · 국방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인 1923–2012 ○ 심장마비

Il-2 에이스 출신 소련 공군 총사령관, 두 번의 소비에트 연방 영웅

2012년 8월 31일, 평생의 친구 세르게이 소콜로프 원수의 부고를 듣고 심장마비로 쓰러졌다. 두 노장은 같은 날 세상을 떠났다.

Il-2 공격기 조종사로 222회 출격하여 적기 85대를 지상에서 격파한 위대한 조국전쟁 최고의 공격기 에이스로, 스물한 살에 소비에트 연방 영웅 금성훈장을 두 번 받았다. 1969년부터 15년간 공군 제1부사령관으로 Su-25 공격기 개발을 강력히 추진했고, 1984년 공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에 올라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Su-25 실전 운용을 지휘하며 소련 공군을 사상 최대 규모로 이끌었다. 퇴역 후에도 러시아 재향군인위원회 위원장으로 군 원로의 영향력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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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1945Il-2 공격기 조종사 → 198공격항공연대 비행대장, 222회 출격
  • 1957–1959제339전폭항공사단장 → 제6근위폭격항공사단장
  • 1964–1969제57(후 제14)공군군단장, 프리카르파티아 군관구
  • 1969–1984소련 공군 제1부총사령관
  • 1984–1990소련 공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
  • 1990–1993국가공역이용·항공교통관제위원회 위원장
  • 2006–2010러시아 연방 시민회의소 위원, 러시아 재향군인위원회 위원장

에발트 바실리예비치 일리옌코프

Эвальд Васильевич Ильенков
이념 · 선전 소련 러시아 1924–1979 ✕ 자살

마르크스의 『자본』에서 변증법적 논리를 발굴한 소비에트 유럽인

“관념론은 순진한 학생이 유령을 상상한 기본적인 실수가 아니다. 관념론은 이상적 형식의 객관성 — 개인의 의지와 의식으로부터 독립하여 인간 문화의 공간에 존재한다는 사실 — 에 대한 사변적 해석이다.” — 『이상적인 것의 변증법』, 1976년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 철학에서 가장 독창적인 사유를 남긴 철학자. 『자본』의 논리에서 추상에서 구체로 상승하는 변증법적 방법을 정식화했고, '이상적인 것'이 개별 뇌의 산물이 아니라 문화·언어·기호 속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인간 활동의 형식임을 논증하여 격렬한 학술 논쟁을 촉발했다. 빌헬름 다비도프의 발달교육 이론과 메시체랴코프의 자고르스크 농맹아 실험에 철학적 기초를 제공했으며, 주저 『변증법적 논리』(1974)로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을 인식론에서 문화철학으로 확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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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1945포병소위, 제1·2벨로루시 전선군에서 베를린까지 진격
  • 1950모스크바대학 철학과 우등 졸업, 대학원 진학
  • 1953소련 과학아카데미 철학연구소 연구원 (종신)
  • 1955모스크바대학에서 '헤겔주의'로 교수직 박탈
  • 1960『『자본』에서 추상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의 변증법』 출간
  • 1962「철학백과사전」에 「이상적인 것」 논문 발표
  • 1968박사학위 논문 통과, 『우상과 이상에 관하여』 출간
  • 1974주저 『변증법적 논리: 역사와 이론』 출간

라도반 리흐타

Radovan Richta
이론가 체코슬로바키아 체코인 1924–1983 ○ 지병으로 사망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라는 말을 만든 체코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말년에 리흐타는 예측 연구팀을 만들려 했으며, 자신의 말로는 "우리를 정치적 저주에서 벗어나게 하고 사회를 공식적으로 탐구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체코슬로바키아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로, '과학기술혁명' 개념을 정립하고 60인의 공동연구를 이끌어 『갈림길에 선 문명』(1966)을 출간했다. 이 저작은 중앙집권적 계획은 과학기술 시대에 낡은 방식이라 주장하며 프라하의 봄 행동강령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고, 그가 만든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는 1968년 개혁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바르샤바조약군 침공 이후 리흐타는 후사크의 '정상화'에 순응하여 철학·사회학 연구소장으로 동료 학자들의 숙청을 주도했고, 1977년에는 헌장 77과 얀 파토치카를 공격하는 언론 캠페인에 가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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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4게슈타포 체포, 판크라츠·테레진 수감
  • 1945–1953카렐대학교 철학부·자연과학부 수학, PhDr. 취득
  • 1949–1954『트보르바』 부편집장, 『루데 프라보』 편집위원
  • 1954–1966체코슬로바키아 과학아카데미 철학연구소 연구원
  • 1966–1968과학기술혁명 학제간 연구팀장, 『갈림길에 선 문명』 출간
  • 1967체코슬로바키아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선출
  • 1969–1982체코슬로바키아 과학아카데미 철학·사회학 연구소장
  • 1972체코슬로바키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아카데미크) 선출

빅토르 페트로비치 마케예프

Виктор Петрович Макее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924–1985 ○ 자연사

CIA가 '우랄의 용'이라 부른 해양전략로켓의 창시자

1955년, 코롤료프가 우랄 지부 부수석설계자 자리를 제안하자 서른 살 마케예프는 "수석설계자로만 가겠다. 대리는 안 한다"고 답했다. 코롤료프는 그 배짱에 놀랐지만, 결국 그를 SKB-385 수석설계자로 임명했다.

항공기 공장의 제도공으로 시작해 코롤료프의 눈에 띄어 31세에 SKB-385 수석설계자가 된 로켓 기술자. 30년간 단 한 조직을 이끌며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3세대를 개발: 수중발사, 공장연료주입, 대륙간사거리, MIRV 탑재를 차례로 실현하며 냉전기 해양핵억지력의 전략적 균형을 완성했다. 서방 정보기관은 그의 정체를 몰라 '우랄의 용'이라 불렀고, 그가 만든 R-17은 NATO 코드명 '스커드'로 전 세계에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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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44모스크바 및 카잔 항공기 공장에서 제도공·설계사로 Pe-2 생산 참여
  • 1947–55OKB-1/NII-88 주임설계사: R-11 및 최초 해군탄도미사일 R-11FM 개발
  • 1955–85SKB-385 수석·총괄설계자: SLBM 3세대(R-21, R-27, R-29, R-29R, R-39, R-29RM) 개발
  • 1962R-17(스커드) 작전전술미사일 실전 배치
  • 1965기술과학 박사
  • 1976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CPSU 중앙위원
  • 1960–85체랴빈스크공대 및 모스크바물리기술연구소 교수·학과장

알렉세이 이바노비치 아주베이

Алексей Иванович Аджубей
문화 · 문학예술 통제 소련 러시아 1924–1993 ↓ 실각 1964 · 자연사

흐루쇼프의 사위이자 해빙기 이즈베스티야를 소련 최고의 신문으로 만든 편집인

“100루블을 가지지 말고, 아주베이처럼 결혼하라” — 1950년대 모스크바를 떠돌던 이 말은 그의 출세가 흐루쇼프의 사위라는 지위와 얼마나 깊이 얽혀 있었는지를 웅변한다.

알렉세이 아주베이는 흐루쇼프 해빙기 소련 저널리즘의 얼굴이었다. 1959년부터 1964년까지 이즈베스티야 편집장으로서 관료적 기관지를 생동감 있는 일간지로 탈바꿈시켰고 발행부수를 160만 부에서 600만 부 이상으로 끌어올렸다. 1959년 소련 언론인 연맹 창설을 주도했고, 1960년 『미국과 정면으로』로 레닌상을 수상했으며, 1961년 존 F. 케네디 대통령과의 단독 인터뷰를 성사시켰다. 1963년 알렉산드르 트바르돕스키의 금지된 시 「저승의 묘르킨」을 이즈베스티야에 과감히 게재한 판단은 그가 단순한 흐루쇼프의 사위 이상의 언론인임을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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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3–1945모스크바 군관구 적군가무단 복무
  • 1947–1952모스크바 국립대학 저널리즘 학부
  • 1951–1957콤소몰스카야 프라브다 편집위원
  • 1957–1959콤소몰스카야 프라브다 편집장
  • 1959–1964이즈베스티야 편집장
  • 1959소련 언론인 연맹 창설 주도
  • 1960『미국과 정면으로』 공저, 레닌상 수상
  • 1961–1964CPSU 중앙위원회 위원, 최고 소비에트 대의원
  • 1963트바르돕스키 금지 시 「저승의 묘르킨」 이즈베스티야 게재
  • 1964흐루쇼프 실각 후 전 직위 해임, 「소비에트 연방」지 부서장 좌천
  • 1992–1993「제3신분」 편집장

미하일 표도로비치 레셰트뇨프

Михаил Фёдорович Решетнё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924–1996 ○ 자연사

시베리아 밀림에서 소련 위성통신·항법 제국을 세운 수석설계자

1987년 바이코누르. 고르바초프가 위성들을 보며 물었다. "이걸 다 시베리아에서 합니까?" 레셰트뇨프가 답했다. "시베리아에서 합니다. 하지만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그리고 200개 도시와 함께 일합니다."

코롤료프의 부수석 설계자로 출발해 1961년 시베리아 밀폐도시 크라스노야르스크-26에서 독자 설계국 OKB-10을 창립한 우주공학자. 몰니야, 스트렐라, 라두가, 에크란 등 통신·방송 위성 계열을 차례로 완성했고, 측지·구난·항법 위성으로 영역을 넓혀 1982년에는 GLONASS 전지구 위성항법 시스템을 궤도에 올렸다. 그가 이끈 NPO PM(응용역학 과학생산연합)은 30여 종의 우주 시스템과 1,000기 이상의 위성을 제작해 소련 전체 위성의 3분의 2를 책임졌으며, 오늘날 ISS 레셰트뇨프 사로 이어져 러시아 위성산업의 중추로 남아 있다. 사회주의노동영웅, 레닌상 수상자이며 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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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42모스크바 항공대학(MAI) 입학, 전쟁으로 알마아타 피난
  • 1942–46세르푸호프 항공정비사 학교 수료, 제26예비전투항공연대 정비사 복무
  • 1950MAI 우등 졸업, 티호미로프 지도로 로켓 주제 졸업논문
  • 1950–57OKB-1(코롤료프) 기술사 → 선임기술사 → R-11 미사일 수석설계자
  • 1958–59OKB-1 부수석설계자, CPSU 입당(1951)
  • 1959–61OKB-1 동부지부장(크라스노야르스크-26), 얀겔로부터 경량발사체 인수
  • 1961–67OKB-10 수석설계자, 코스모스 발사체·스트렐라 위성 첫 발사(1964)
  • 1967–77KB PM(응용역학 설계국) 총설계자, 몰니야·라두가 위성 계열 개발
  • 1977–96NPO PM 총설계자 겸 총괄국장, GLONASS(1982)·에크란·고리존트·루치 등 완성
  • 1974사회주의노동영웅 수훈
  • 1980레닌상 수상
  • 1984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아카데미크)
사회주의권 지도자 폴란드 폴란드인 1924–1997 ○ 자연사

양보로 위기를 봉합한 당 관료

1980년 8월 22일, 그는 파업 요구안의 서면 접수를 인정하며 정부와 그단스크 사업장간 파업위원회의 공식 협상을 열었다.

미에치스와프 야기엘스키는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공산당 관료이자 경제 관료로, 농업 정책과 국가 계획을 담당했다. 1980년 노동자 파업이 확산되자 그는 정부의 협상 대표로 나서 루블린의 7월 파업을 정리하고, 그단스크에서는 독립 노조 인정으로 이어진 합의를 체결했다. 그의 경력은 사회적 요구를 제한된 양보로 관리하려 한 체제가 결국 공개적인 노동자 대표성과 마주한 과정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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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6–1949농민자조조합 중앙위원회 간부
  • 1953–1956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중앙위원회 농업부장
  • 1959–1970농업부 장관
  • 1970–1981폴란드 인민공화국 부총리
  • 1971–1975각료회의 계획위원회 위원장
  • 1971–1981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정치국원
  • 1980루블린 7월 파업 및 그단스크 8월 협상 정부 대표
  • 1980–1981그단스크 협정 정부 서명자

블라디미르 예피모비치 세미차스트니

Владимир Ефимович Семичастный
국가보안 기관 소련 러시아 1924–2001 ↓ 해임 1967

흐루쇼프 축출을 지켜본 KGB 의장

1958년 콤소몰 40주년 대회에서 파스테르나크를 두고 “돼지는 자신이 먹는 곳에 더럽히지 않는다. 파스테르나크는 돼지도 하지 않을 짓을 했다”라고 연설했다. 이 발언으로 파스테르나크는 노벨문학상을 거부했다.

콤소몰에서 두각을 드러낸 셸레핀의 측근으로, 37세에 소련 사상 최연소 KGB 의장이 되었다. 1958년 파스테르나크를 '돼지'에 비유한 연설로 악명을 얻었고, 1964년 흐루쇼프 축출에서 보안·통신·경호를 장악해 쿠데타의 물리적 기반을 제공했다. 이후 브레즈네프가 셸레핀 계열을 약화시키며 우크라이나 직책으로 밀려났고, 결국 변방의 대중교육 단체에서 경력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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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s콤소몰과 당 청년조직에서 셸레핀 계열로 성장
  • 1961–1967KGB 의장, 흐루쇼프 말기와 브레즈네프 초기 보안기관 지휘
  • 1964흐루쇼프 축출 과정에서 보안기관 수장으로 핵심 현장에 있음
  • 1967브레즈네프가 셸레핀 계열을 약화시키며 해임
  • 1967 이후우크라이나와 노동조합 직책으로 이동

블라디미르 레오니도비치 고보로프

Владимир Леонидович Говоров
군사 · 국방 소련 러시아인 1924–2006 ○ 자연사

원수의 아들로 태어나 체르노빌 대응을 지휘하고 소련 민방위를 평시 체제로 전환한 대장

1938년, 14세 소년 블라디미르 고보로프는 학교 친구와 함께 스페인 공화군에 입대하러 모스크바를 떠나 투압세 항구에서 스페인행 화물선에 몰래 올라탔다. 바다 한가운데서 발각되어 송환된 두 소년은 ‘국제여단’에 닿지도 못했다.

소련 원수 레오니트 고보로프의 아들로, 14세 때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러 가출했다가 배에서 발각된 이력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포병 장교로 레닌그라드 전선에서 싸웠고, 전후 프룬제 사관학교와 참모대학을 금메달로 졸업하며 승진을 거듭해 1972년 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이 되었고 1977년 대장으로 진급했다. 1986년 소련 민방위 사령관으로 부임한 직후 체르노빌 원전 사고와 1988년 아르메니아 지진 대응을 지휘했으며, 민방위를 전시 중심 조직에서 평시 비상사태 대응 체제로 재편해 훗날 러시아 비상사태부의 토대를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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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붉은 군대 징집, 랴잔 포병학교 졸업
  • 1943–1945포병 소대장·포대장, 레닌그라드 및 제2발트 전선
  • 1946–1949고등장교포병학교 졸업 후 포병대대장; 프룬제 사관학교 졸업
  • 1963참모대학 금메달 졸업; 주독 소련군 집단 참모장·제1부사령관
  • 1967–1969제2근위전차군 사령관 (주독 소련군)
  • 1971–1972발트 군관구 사령관
  • 1972–1980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 겸 모스크바 주둔군 사령관
  • 1980–1984극동군 총사령관
  • 1984–1986국방차관 겸 국방부 총감찰관
  • 1986–1991소련 민방위 사령관 겸 국방차관

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 피로시코프

Владимир Петрович Пирожков
국가보안 기관 소련 러시아 1924–2009 ○ 자연사

KGB 부의장 20년, 4대 의장을 보좌한 보안기관의 상수

옐친 회고록: KGB 국장이 '당과 우호 협력한다'고 하자 피로시코프가 '코르닐로프 장군, 일어서! 당 기관의 지도 아래 일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오.'

1942년 18세에 자원입대하여 민스크·바르샤바 해방과 베를린 공방전을 거쳐 베를린 전승 퍼레이드에 참가한 전쟁 세대. 전후 알타이 지역에서 콤소몰과 당 간부로 올라 1968년 제2서기까지 지낸 뒤, 정치국의 결정으로 KGB에 배치되어 인사국장과 당위원회 서기를 거쳐 1971년부터 1991년까지 부의장직을 수행했다. 안드로포프·페도르추크·체브리코프·크류치코프 4대 의장 아래에서 거의 20년간 자리를 지킨 유례없는 장기 재임자로, KGB 인사정책과 구조 정비, 대테러 작전(알파 그룹 지휘·감독)을 총괄했으며 퇴역 후에는 FSB 재향군인회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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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1945자원입대, 316근위박격포연대에서 민스크·바르샤바·베를린 전투, 베를린 전승 퍼레이드 참가
  • 1946–1968알타이 지방 콤소몰·당 간부, 알타이 크라이콤 제2서기까지 승진
  • 1968–1970KGB 인사국장
  • 1970–1971KGB 당위원회 서기
  • 1971–1991KGB 부의장 — 인사·구조·대테러(알파 그룹) 총괄
  • 1991–2009FSB 재향군인회 의장

카렌 네르세소비치 브루텐츠

Карен Нерсесович Брутенц
이념 · 선전 소련 아르메니아 1924–2017 ○ 자연사

브레즈네프 시대 제3세계 정책을 설계한 국제부 이론가

브루텐츠와 국제부 전문가들은 1979년 아프가니스탄 파병이 '어리석은 짓'이라고 판단했다. 그 의견을 전달할 부서장 포노마료프는 중대한 12월 회의에서 아예 배제되었다.

아르메니아계 소비에트 정치가이자 이론가. 바쿠에서 정신과 의사로 출발해 역사학으로 전환, 1958년 '신식민주의 이데올로기 비판'으로 학위를 받았다. 1961년부터 중앙위 국제부에서 활동하며 '민족민주주의' 개념을 정립하는 특별작업반을 이끌었고, 제1부부장으로 승진해 브레즈네프-고르바초프 시기 소련의 제3세계 정책을 실무적으로 설계했다. 아프가니스탄 파병 결정 당시 내부에서 반대 의견을 냈으며, 소련 해체 후 러시아 외교정책협회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회고록 『스타라야 광장에서의 30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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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6–1948바쿠 정신병원 의사
  • 1950–1954바쿠 시당 위원회 강사
  • 1954–1958사회과학아카데미 대학원생, 1958년 학위 취득
  • 1961–1969『평화와 사회주의의 제문제』(프라하) 민족해방운동부장
  • 1961–1976중앙위 국제부 책임직, 제3세계 정책 기획
  • 1976–1986중앙위 국제부 제1부부장
  • 1986–1990중앙위 후보위원
  • 1997–2017러시아 외교정책협회 부회장

블라디미르 이바노비치 돌기흐

Владимир Иванович Долгих
중공업 · 군수공업 소련 러시아 1924–2020 ○ 자연사

브레즈네프 시대 16년간 중공업·에너지를 총괄한 당 서기

노릴스크 콤비나트 사장 시절, 국가 광물매장량 심의위원회의 결론을 기다리지 않고 탈나흐 광구 우안에 산업 건설을 강행했다. '노릴스크는 그 규모에 충격적이었습니다: 탄광, 지하 갱도, 거대한 노천광 두 개, 세 개의 공장 — 니켈, 코발트, 구리, 그리고 거대한 도시.' 광구 '마야크'는 1965년 첫 광석을 냈다.

야금기술자 출신으로 노릴스크 콤비나트 사장 시절 탈나흐 광상을 과감히 개발해 소련 니켈·백금 생산을 비약시켰고, 36세에 사회주의노동영웅을 받았다. 1972년 중앙위 서기로 발탁된 뒤 16년간 중공업·에너지 부문을 총괄하며 서시베리아 유전 개발과 소련 연료-에너지 복합체의 골격을 설계했다. 정치국 후보위원(1982–1988)으로서 브레즈네프 체제 후기 경제정책의 실무를 관장했으며, 페레스트로이카 개시 3년 뒤인 1988년 전원 퇴진 속에 은퇴했다. 소련 붕괴 후에도 모스크바 시의원·연방평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며 95세까지 공적 생애를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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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4붉은군대 자원입대, 모스크바 방어·브랸스크 전선에서 중상 후 제대
  • 1949–1958크라스노야르스크 정련공장 기술자·주임기사, 귀금속 제련 특허 다수
  • 1962–1969노릴스크 광산·야금 콤비나트 사장, 탈나흐 광상 개발로 생산 10배 증대
  • 1969–1972크라스노야르스크 변경주 당 제1서기, 지역 종합개발 계획 수립
  • 1972–1988중앙위 서기, 중공업·에너지 담당 — 서시베리아 유전·연료복합체 총괄
  • 1976–1984중공업·에너지부장 겸임
  • 1982–1988정치국 후보위원
  • 2011–2018국가두마 의원 → 연방평의회 의원

유리 표도로비치 오를로프

Юрий Фёдорович Орлов
이념 · 선전 소련 러시아 1924–2020 → 국적 박탈 · 강제 추방 1986

소련이 서명한 헬싱키 인권 약속을 내부에서 감시한 물리학자

1978년 5월 폐쇄 재판의 최후 진술에서 그는 말했다: "이런 재판으로는 헬싱키 그룹의 문서가 증언하는 사회의 병폐와 결함을 없앨 수 없습니다."

입자가속기 물리학자에서 소련 최초의 인권감시 조직을 세운 반체제 운동가로 선 인물. 1956년 당 회의에서 스탈린과 베리야를 '권력을 쥔 살인자'라 칭해 제명·해고당했고, 그로부터 20년 뒤인 1976년 5월 헬싱키 최종의정서의 인권 조항 이행을 감시하는 모스크바 헬싱키 그룹을 창립했다. 이는 소련 스스로 서명한 제3바스켓의 약속을 내부에서 뒤집어 맞대결시키는 일이었다. 1977년 2월 체포되어 7년 수용소와 5년 유형을 선고받고, 1986년 국적을 박탈당한 채 미국으로 추방되어 코넬대 물리학 교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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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56보안 원자력 연구소(훗날 이테프) 물리학자
  • 1956스탈린·베리야를 격렬히 비판, 당 제명과 해고
  • 1956–72예레반 물리연구소, 1963년 이학박사
  • 1968아르메니아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 1973소련 최초 국제앰네스티 그룹 창립 참여
  • 1976.5모스크바 헬싱키 그룹 창립, 초대 의장
  • 1977–86체포, 7년 수용소와 5년 유형 선고
  • 1986국적 박탈·미국 추방, 코넬대 교수

루보미르 슈트로우갈

Lubomír Štrougal
사회주의권 지도자 체코슬로바키아 체코 1924–2023 ○ 자연사 (재판 중단)

18년간 '정상화' 내각을 이끈 후사크의 오른팔

정치적 패배의 이유를 묻자, 슈트로우갈은 이렇게 답했다: '나는 반체제 인사들을 과소평가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주의 정치인으로, 1970년 1월 올드르지흐 체르니크를 대신해 총리에 오른 뒤 18년간 '정상화' 내각을 이끌었다. 법학을 전공하고 농업장관과 내무장관을 거친 당 관료였으며, 프라하의 봄 시기 부총리를 지내다 소련 침공 후 후사크의 반개혁 노선에 합류했다. 1980년대 후반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를 지지하며 강경파 야케시 당 총서기와 충돌해 실각했고, 벨벳 혁명 후 KSČ에서 제명되었다. 말년에는 국경 사망 사건으로 기소되었으나 치매로 중단된 채 2023년 98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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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베셀리나트루주니치 출생, 부친은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사망한 공산주의자
  • 1945~48KSČ 입당, 카렐대학교 법학 졸업
  • 1959~61농업·임업·수자원 장관
  • 1961~65내무장관, 국가보안(StB) 관할
  • 1968체르니크 내각 부총리 겸 경제위원회 의장
  • 1968.11~70.1KSČ 중앙위 서기·상임위원, 후사크의 '정상화' 노선 합류
  • 1970.1~88.10체코슬로바키아 연방 총리, 18년 재임
  • 1988~90야케시와 충돌 후 사임, 벨벳 혁명 후 KSČ 제명

파벨 이바노비치 벨랴예프

Павел Иванович Беляе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925–1970 ○ 복막염 사망

최초의 우주유영을 지휘한 전투조종사

자동유도장치가 죽었다. 벨랴예프는 좌석에 비스듬히 누워 보조르 항법기를 들여다보며 캡슐의 자세를 손으로 바로잡았다. 레오노프가 그의 몸을 붙잡고 있었다. 인류 최초의 완전 수동 재진입이었다.

태평양함대 전투조종사 출신으로, 1960년 최초의 우주비행사단에 선발되었을 때 서른넷의 최고령이자 최고 계급(소령)으로 단장이 되었다. 1965년 3월 18일 보스호트 2호의 선장으로서 알렉세이 레오노프의 인류 최초 우주유영을 지휘했고, 귀환 시 자동유도장치가 고장나자 누운 자세로 수동 재진입을 수행해 사상 처음으로 우주선을 사람 손으로 착륙시켰다. 2,000km나 빗나간 착륙 지점은 페름 밀림이었고, 구조대가 도착하기까지 이틀을 영하의 숲속 캡슐에서 버텼다. 소련 영웅 칭호를 받고 이후 소유스 계획 훈련을 지휘했으나, 위궤양 수술 후 복막염으로 1970년 마흔넷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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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5태평양함대 전투조종사, 소일전 참전
  • 1959공군사관학교 졸업, 흑해함대 비행대대장
  • 1960제1기 우주비행사단 선발, 초대 단장
  • 1965.3.18–19보스호트 2호 선장: 인류 첫 우주유영, 수동 재진입
  • 1966–67소유스·알마즈 계획 훈련 지휘
  • 1969우주비행사훈련센터 제1국장

안드레이 도나토비치 시냡스키

Андрей Донатович Синявский
작가·예술가 소비에트 러시아 1925–1997 ○ 자연사

『노비 미르』의 비평가에서 반체제 운동의 상징이 된 아브람 테르츠

1966년 2월 재판에서 시냡스키는 무죄를 주장했다 — 소비에트 정치 재판에서는 드문 일이었다. 역사가 프레드 콜먼은 이 재판을 "현대 소비에트 반체제 운동의 탄생"이라 불렀다.

소비에트 문학학자, 비평가, 작가. 필로로기야 학위 후보(1952년)로, 고리키 세계문학연구소 연구원 및 모스크바 국립대·예술극장 학교 강사였다. 알렉산드르 트바르돕스키의 『노비 미르』에서 주요 비평가로 활약했으며, 당시 가장 자유주의적인 소비에트 합법 출판물이었다. 아브람 테르츠 필명으로 서방에 풍자 소설과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란 무엇인가」(1959)를 발표했다. 1966년 율리 다니엘과 함께 순수 창작물로만 유죄 판결을 받은 최초의 소비에트 작가가 되었고, 이 재판은 근대 소비에트 반체제 운동의 출발점으로 평가된다. 6년간 수용소 복역 후 1973년 프랑스로 망명, 소르본에서 러시아 문학 교수로 재직하며 『신탁시스』를 창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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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모스크바 국립대 문헌학부 졸업
  • 1952필로로기야 학위 후보 취득; IMLI 연구원
  • 1955–1965아브람 테르츠 필명으로 서방에 소설·에세이 발표
  • 1950년대 말–1965『노비 미르』 주요 문학비평가
  • 1960소비에트 작가동맹 가입
  • 1966반소비에트 선동 혐의로 7년형 선고; 두브라블라크 수감
  • 1971조기 석방
  • 1973–1997소르본 대학 러시아 문학 교수; 『신탁시스』 공동 창간

게오르기 마르코비치 코르니옌코

Георгий Маркович Корниенко
외교 소련 우크라이나 1925–2006 ○ 지병으로 자연사

그로미코의 대미정책 실무 책임자, 아프간 침공과 거짓말에 맞섰던 외교관

1979년 가을, 코르니옌코는 부하들에게 아프가니스탄 파병 반대 의견서를 작성하게 했다. 그로미코는 서명을 거부하고 중앙위원회에 올리지 않았다.

게오르기 코르니옌코는 40년 넘게 소련의 대미 외교를 실무에서 이끈 외교관으로, 안드레이 그로미코 외무장관 아래에서 제1차관(1977–1986)을 지내며 1970~80년대 미소 군축 협상의 핵심 의제를 설계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워싱턴 대사관 참사관으로 냉전의 최전선에 섰으며, 이후 소련 외무부 미국국장으로서 닉슨·카터·레이건 행정부와의 모든 정상회담을 준비했다. 1979년 아프가니스탄 침공 결정에 내부 반대했고, 1983년 KAL 007기 격추 사건 때는 진실 공개가 국제적 고립보다 낫다고 주장했으나 모두 묵살되었다. 냉전 후에는 회고록 『냉전: 한 참여자의 증언』을 남겨 소련 외교정책 결정 과정의 내막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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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소련 외무부 산하 정보위원회에서 외교 경력 시작
  • 1960–1964주미 소련 대사관 참사관, 이후 공사참사관
  • 1965–1975소련 외무부 미국국장
  • 1975–1977소련 외무차관
  • 1977–1986소련 외무제1차관
  • 1981–1989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86–1988CPSU 중앙위 국제부 제1부장

유리 이바노비치 드로즈도프

Юрий Иванович Дроздов
국가보안 기관 소련 벨라루스 1925–2017 ○ 자연사

KGB 불법정보국을 12년간 지휘한 소련의 전설적 첩보장교

작전 직전 유리 안드로포프가 전화로 말했다. "우리도 원하지 않네. 하지만 해야만 하네." — 1979년 12월 27일, 아민 궁전 습격을 앞두고

소련의 대표적 정보장교로, 1956년 KGB에 입문한 후 동독·중국·미국에서 활동하며 냉전기 소련의 해외정보망을 구축했다. 1979년부터 1991년까지 KGB 제1총국 산하 불법정보국(S국)을 지휘하며 위장 신분으로 침투한 '불법 요원' 네트워크를 총괄했다. 1979년 12월 아프가니스탄 아민 대통령궁을 43분 만에 제압한 특수작전 '폭풍-333'을 지휘해 소련-아프간 전쟁의 서막을 열었고, 이 경험을 바탕으로 1981년 KGB 정예 특수부대 '빔펠'을 창설했다. 1962년 글리니케 다리에서 루돌프 아벨과 프랜시스 게리 파워스의 포로 교환을 성사시키기 위해 아벨의 '독일인 사촌'으로 위장한 일화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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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3–1945붉은 군대 복무, 제1벨로루시 전선군에서 베를린 입성
  • 1945–1952주독 소련군 및 발트 군관구 포병장교
  • 1952–1956군사외국어대학 졸업, 독일어·영어 전공
  • 1956–1957KGB 전입, 불법정보요원 훈련
  • 1957–1963동베를린 KGB 연락장교, 슈타지와 협력하며 불법요원으로 활동
  • 1964–1968KGB 베이징 주재원 (문화대혁명 시기)
  • 1968–1975PGU 중앙기구 근무, S국 부국장
  • 1975–1979KGB 뉴욕 주재원, 유엔 소련 부대표로 위장
  • 1979–1991PGU 부국장 겸 S국장 (불법정보 총괄), 빔펠 창설

보리스 이바노비치 아리스토프

Борис Иванович Аристов
경제 운영 소련 러시아인 1925–2018 ○ 자연사

27년 장기 집권 장관의 뒤를 이어받았으나, 자기 임기 안에 부처 자체가 사라진 마지막 대외무역장관

1985년 10월, 27년간 소련의 대외무역을 관장해온 니콜라이 파톨리체프의 뒤를 이어 대외무역장관에 취임한 아리스토프는 불과 2년 3개월 만에 부처 자체가 페레스트로이카 개혁으로 폐지되는 순간을 맞았다.

소련의 당·국가 관료이자 외교관. 레닌그라드 공장 기술자로 출발하여 당 기구에서 경력을 쌓은 후, 1971년부터 1978년까지 레닌그라드 시당 제1서기를 지냈다. 이후 외교 경력으로 전환하여 주폴란드 대사(1978–1983)와 외무차관(1983–1985)을 거쳐, 1985년 니콜라이 파톨리체프의 뒤를 이어 소련 대외무역장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임기 중 페레스트로이카 개혁의 일환으로 1988년 1월 대외무역부가 폐지되고 대외경제관계부로 통합되면서, 그는 소련의 마지막 대외무역장관이 되었다. 이후 주핀란드 대사(1988–1992)로 전임되어 소련 붕괴기를 헬싱키에서 지켰으며, 소련 해체 후에도 러시아연방 대사로 잠시 유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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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2야로슬라블주 집단농장 회계사
  • 1942–1943야로슬라블주 보병학교 사관생도
  • 1943–1946공병여단 분대장 → 모스크바 공병대대 서기
  • 1947–1952레닌그라드 '스베틀라나' 공장 기술자 → 조립구역장
  • 1952–1963비보르크 구당 산업운수부 지도원 → 부장 → 레닌그라드 주당 산업운수부 차장
  • 1963–1969레닌그라드 비보르크 구당 제1서기
  • 1969–1971레닌그라드 시 집행위원회 부의장
  • 1971–1978레닌그라드 시당 제1서기
  • 1978–1983주폴란드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83–1985소련 외무차관
  • 1985–1988소련 대외무역장관
  • 1988–1992주핀란드 소련·러시아연방 대사

조레스 알렉산드로비치 메드베데프

Жорес Александрович Медведев
이론가 소련 그루지야 1925–2018 ○ 런던에서 자연사

스탈린의 유대인 추방 계획을 기록 부재로 반박한 반체제 생물학자

1970년 정신병원 석방 후: "어떤 정직하고 원칙 있는 학자도 그러한 근거로 정신병원 무기한 수용이라는 탄압이 가능하다면 자신의 안전을 확신할 수 없다."

소련의 생물학자이자 반체제 역사가. 트빌리시에서 태어나 티미랴제프 농업아카데미에서 생물학을 전공하고 노화의 분자생물학적 기전을 연구했다. 1962년 리센코의 유사과학을 폭로한 사미즈다트 원고 「생물학과 개인숭배」를 집필했고, 이는 1969년 《리센코의 흥망》으로 미국에서 출간되며 국제적 반향을 일으켰다. 1970년 강제로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가 사하로프·솔제니친 등의 항의로 석방되었고, 1973년 런던 체류 중 소련 시민권을 박탈당했으며, 말년의 저작 《스탈린과 유대인 문제》(2003)에서는 의사들의 음모 사건이 유대인 추방 계획으로 이어지려 했다는 통설을 기록 부재로 반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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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트빌리시(티플리스) 출생, 프랑스 사회주의자 장 조레스의 이름을 따서 명명
  • 1943붉은 군대 징집, 타만 반도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제대
  • 1950티미랴제프 농업아카데미 졸업, 식물생리학 후보학위 취득
  • 1962사미즈다트 「생물학과 개인숭배」로 티미랴제프 아카데미에서 해고
  • 1963–1969오브닌스크 의학방사선연구소 분자방사선생물학 연구실장
  • 1970강제 정신병원 수용, 국내외 학자·작가들의 항의로 3주 만에 석방
  • 1973런던 국립의학연구소 초청 연구 중 소련 시민권 박탈, 영국 망명
  • 1990–1992소련 시민권 회복, 체르노빌 출입금지구역 방사선생물학 조사 참여

필리프 데니소비치 봅코프

Филипп Денисович Бобков
국가보안 기관 소련 러시아인 1925–2019 ○ 자연사

KGB 이념방첩의 설계자, 12명의 수장 아래 45년간 살아남은 체키스트

「우리 KGB가 페레스트로이카에 상당히 기여했다. 그것 없이는 소련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소련 국가보안기관에서 45년간 12명의 기관장 아래 근무한 봅코프는 KGB 제5총국장으로서 반체제 인사·종교·민족주의 운동을 감시·탄압하는 이념방첩 체계를 설계했다. 만년에는 사하로프 추방에 대한 책임을 인정했으며, 소련 붕괴 후 올리가르흐 구신스키의 모스트 그룹 분석부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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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1945붉은 군대 복무, 서부·발트 전선, 두 차례 부상
  • 1946레닌그라드 스메르시 학교 졸업, MGB 배치
  • 1956KGB 제4국(이념방첩) 부장
  • 1961KGB 제2총국 부국장
  • 1969–1983KGB 제5총국장(이념방첩 → 헌법질서 수호)
  • 1983–1985KGB 부의장
  • 1985–1991KGB 제1부의장
  • 1992–2001모스트 그룹 분석국장

로이 알렉산드로비치 메드베데프

Ро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Медведев
이론가 소련 그루지야 1925–2026 ○ 자연사

스탈린주의를 마르크스주의자로 심판한 역사가

《역사의 심판대에》 서문에서: "나는 젊은 시절의 신념과 이상을 결코 배반한 적이 없다. 그것이 아버지의 영향이며, 사회주의에 대한 나의 생각은 물론 변했지만, 깊은 확신 없이는 이 책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소련의 마르크스주의 역사가이자 공산주의자 출판인. 1960년대부터 반체제 운동에 참여하며 사미즈다트 저널 《정치일기》를 편집했고, 20년 가까이 집필한 대작 《역사의 심판대에》에서 스탈린주의의 기원과 결과를 방대한 사료로 분석했다. 이 책으로 1969년 제명되었으나 사회주의적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고, 1989년 복당 후 인민대표·최고회의 의원·중앙위원을 지냈다. 평생 35권 이상의 저작을 남기며 사회주의 내부에서의 자기비판적 역사학을 개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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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트빌리시(티플리스) 출생, 인도 공산주의자 M. N. 로이의 이름을 따서 명명
  • 1946–1951레닌그라드대 철학부 우등 졸업, 콤소몰 서기 활동
  • 1958교육학 후보학위 취득 (모스크바 국립사범대)
  • 1960s사미즈다트 저널 《정치일기》 편집, 반체제 운동 참여
  • 1969《역사의 심판대에》 집필로 공산당 제명
  • 1970사하로프·투르친과 브레즈네프 지도부에 개방서한 발표
  • 1989–1991소련 인민대표·최고회의 의원, 복당 후 중앙위원
  • 1991–2002러시아연방 노동자사회당 공동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