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1985

해빙과 정체의 사람들 445명

스탈린의 관 뚜껑을 연 해빙과 그것을 다시 덮은 정체 사이에서, 우주와 개혁과 반체제의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

알렉산드르 예브게니예비치 보빈

Александр Евгеньевич Бовин
이론가 소련 러시아 1930–2004 ○ 자연사

브레즈네프의 외교 연설문 작성자, 데탕트의 문장을 쓴 언론인

한 파티에서 누군가 물었다. '브레즈네프의 최근 연설 읽어보셨나요?' 보빈이 답했다. '읽다뇨? 제가 썼는데요.' 다음 날 그는 『이즈베스티야』로 전보되었다.

브레즈네프 시대 소련 외교 수사의 핵심 설계자로, 1963년부터 1972년까지 CPSU 중앙위 국제부 컨설턴트 그룹을 이끌며 데탕트·평화공존·군축 담론의 문장을 직접 썼다. 그가 만든 '경제는 절약해야 한다' 같은 문구들은 브레즈네프의 공식 어록이 되었다. 1968년 프라하의 봄 당시 바르샤바조약군 개입에 회의적 입장을 견지해 당 기구에서 『이즈베스티야』 정치평론가로 옮겨갔고, 이후 20년간 TV '국제 파노라마'의 얼굴로 소련에서 가장 신뢰받는 국제문제 해설자가 되었다. 1991년 소련 최초의 이스라엘 대사로 임명되어 일주일 뒤 러시아 연방 대사로 이어지는 독특한 외교 경력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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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1956하디젠스크시 인민판사 (소련 최연소 판사)
  • 1959–1963잡지 『콤무니스트』 철학부 과학 컨설턴트
  • 1963–1972CPSU 중앙위 국제부 컨설턴트 그룹 책임자 · 브레즈네프 연설문 작성
  • 1968체코슬로바키아 체르나 협상에 소련 대표단 자문으로 참여
  • 1970–1982브레즈네프 서기장 연설문 작성 (비공식 외부직으로 지속)
  • 1972–1991『이즈베스티야』 정치평론가 · TV '국제 파노라마' 진행자
  • 1981–1986CPSU 중앙감사위원회 위원
  • 1991.12소련 이스라엘 대사 (1주일 후 러시아 대사로 전환)
  • 1991–1997러시아 연방 이스라엘 대사
  • 1997–2000『이즈베스티야』 정치평론가 복귀 · TV·라디오 진행

파벨 로마노비치 포포비치

Павел Романович Попович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우크라이나 1930–2009 ○ 뇌졸중

보스토크 4호로 첫 동시 유인 비행에 나선 4번째 우주인

비행 중 코롤료프의 요청으로 우크라이나 민요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네」를 불러, 인류가 우주에서 노래한 첫 순간을 만들었다.

소련의 4번째 우주인이자 최초의 우크라이나 출신 우주인으로, 보스토크 1호의 교신 담당관을 맡은 뒤 1962년 8월 보스토크 4호 조종사로 안드리얀 니콜라예프와 세계 최초의 동시 유인 궤도 비행을 수행했다. 두 우주선은 6.5 km까지 접근했고, 포포비치는 궤도상에서 우크라이나 민요를 불러 우주 최초의 음악 공연을 남겼다. 1974년 소유스 14호 사령관으로서 첫 군사 유인 정거장 알마즈에 도킹하는 두 번째 우주 비행을 마치고 두 차례 소비에트연방영웅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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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1마그니토고르스크 공업전문학교·비행클럽 졸업
  • 1954군사 항공학교 졸업, 공군 복무
  • 1960제1기 우주비행사단 선발
  • 1961.4보스토크 1호 교신 담당관 (가가린 비행)
  • 1962.8.12–15보스토크 4호: 첫 동시 유인 비행, 니콜라예프와 6.5 km 접근
  • 1966–68소련 달 착륙 계획 훈련
  • 1974.7.3–19소유스 14호 사령관: 살류트 3호(알마즈) 도킹
  • 1978–89가가린 우주비행사 훈련센터 부센터장

리차르트 이바노비치 코솔라포프

Ричард Иванович Косолапов
이념 · 선전 소련 러시아 1930–2020 ○ 자연사

브레즈네프 시대 '발전된 사회주의' 교리의 주요 설계자

1986년 1월, 고르바초프에게 "당신이 시작한 뻬레스트로이까는 필연적 실패를 맞을 것"이라고 경고하는 편지를 보냈다. 며칠 후 그는 《꼼무니스트》 편집장에서 해임되었다.

소련의 사회철학자이자 이론가로, 1976년부터 1986년까지 CPSU의 핵심 이론지 《꼼무니스트》의 편집장을 지냈다. 브레즈네프 시대의 공식 이념인 '발전된 사회주의' 개념을 체계화한 주역으로, 소련이 사회주의의 성숙한 단계에 도달했으며 공산주의로의 급속한 이행보다는 장기적 공고화가 필요하다는 논리를 정립했다. 그의 정통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은 아나톨리 부텐코, 알렉산드르 찌쁘꼬 등 개혁 성향 이론가들과 충돌했고, 고르바초프가 뻬레스트로이까를 개시하자 가장 먼저 숙청 대상이 되었다. 1986년 1월 고르바초프에게 개혁의 실패를 예측하는 편지를 보낸 직후 《꼼무니스트》 편집장에서 해임되었으며, 이후 모스크바 대학에서 연구와 강의를 이어가며 스탈린 전집의 속간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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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모스크바 국립대학교 철학과 졸업
  • 1955–1958브랸스크주 콤소몰 위원회
  • 1958–1959아르마비르 사범대학 강사
  • 1961–1964모스크바 국립대학교 철학과 강사
  • 1966–1974CPSU 중앙위 선전선동부 컨설턴트 → 부장
  • 1974–1976《쁘라우다》 제1부편집장
  • 1976–1986《꼼무니스트》 편집장
  • 1976–1986CPSU 중앙위원회 정위원
  • 1979–1987소련 최고회의 대의원 (타지크 SSR)
  • 1986–2015모스크바 국립대학교 교수 · 주임연구원

빅토르 세르게예비치 마카렌코

Виктор Сергеевич Макаренко
사회주의권 지도자 소련 우크라이나 1931–2007 ○ 자연사

크림의 당 관료이자 마산드라를 지킨 실무 정치가

반알코올 운동 때 셰르비츠키와 함께 마산드라의 와이너리와 에노테카를 지키는 데 개입했다.

빅토르 마카렌코는 공장 노동자에서 출발해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의 지역 당 지도자로 올라선 당 관료였다. 세바스토폴과 크림에서 산업·농업·관광을 조정하며, 중앙의 지시와 지역의 생산·문화 유산 사이의 긴장을 다뤘다. 1980년대 반알코올 운동 때 그는 블라디미르 셰르비츠키와 함께 마산드라 와이너리와 그 에노테카를 보존하는 쪽에 섰다. 그의 회고는 후기 소비에트 지역 통치가 중앙 정책을 그대로 집행하는 일만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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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7크리보이로크 지역 주택관리국 노동자
  • 1955드니프로페트롭스크 금속공업대학 졸업, 크리보이로크 제철소 근무
  • 1967–1969크리보이로크 시 당위원회 제2서기
  • 1969–1972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감찰관
  • 1972–1977세바스토폴 시 당위원회 제1서기
  • 1977–1987우크라이나 공산당 크림주위원회 제1서기
  • 1982–1989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
  • 1987–2007연금 생활, 회고록 집필

보리스 사르키소비치 케보르코프

Բորիս Սարգսի Կևորկով
민족문제 · 연방 관리 소련 아르메니아인 1932–1998 ○ 자연사

나고르노-카라바흐에서 바쿠의 통제를 집행한 아르메니아계 당료

자치주는 아르메니아 공화국과 가깝지만, 높은 산으로 분리되어 있다. (1977년 국제 저널 인터뷰에서)

아제르바이잔 샤마흐 태생의 아르메니아인 당료로, 1973년 헤이다르 알리예프에 의해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 당 제1서기로 임명되어 1988년까지 재임했다. 카라바흐 외부 출신으로 알리예프에게 전적으로 충성하며, 지역 아르메니아인들의 민족적 요구를 억압하고 바쿠의 통제력을 강화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1977년 국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카라바흐가 '높은 산으로 아르메니아와 분리되어 있다'고 주장해 동족의 분노를 샀고, 1988년 2월 소비에트가 아르메니아 통합 결의안을 통과시키자 해임되었다. 1992년 바쿠에서 체포·투옥되었다가 1993년 알리예프의 사면으로 석방된 뒤 모스크바로 이주해 중학교 역사 교사로 일하다 1998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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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바쿠 시 콤소몰 강사·선전부 차장
  • 1954–1961바쿠 제르진스키·나리마노프 구 콤소몰 제1서기
  • 1961–1970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 조직·당기관부 책임조직원·감찰관
  • 1970–1973바쿠 키로프 구 당위원회 제1서기
  • 1973–1988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 당위원회 제1서기
  • 1974–1989소련 최고회의 민족회의 대의원 (9~11기)
  • 1988당에서 제명
  • 1993–1998모스크바 중학교 역사 교사

카렌 세로보비치 데미르찬

Карен Серобович Демирчян
민족문제 · 연방 관리 소련 아르메니아 1932–1999 ✕ 의회 총격으로 암살

아르메니아를 14년간 이끌며 현대화하고, 카라바흐에 동조해 실각한 후 복귀했으나 의회 총격으로 암살당하다

1975년 4월 23일, 데미르찬은 소비에트 아르메니아 지도부로서는 처음으로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의 조직자들을 공식 규탄하며 공화국의 이름으로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예레반 전기기술공장에서 기술자로 출발해 당비서·주임기사·공장장을 거쳐 1974년 아르메니아 공산당 제1서기로 취임하여 14년간 공화국을 이끌었다. 재임 중 메차모르 원자력발전소와 예레반 지하철을 비롯한 현대적 기반시설을 건설했고, 1975년 소비에트 아르메니아 지도부로서는 최초로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을 공식 규탄했다. 1978년 공화국 헌법에 아르메니아어를 국어로 명기하는 성과를 이끌어냈다. 1988년 나고르노-카라바흐 문제에서 민중 시위에 동조한 이유로 모스크바에 의해 '건강상 사유'로 해임되었다. 소련 붕괴 후 1998년 대선에 출마해 결선에서 40%를 득표하고 1999년 국민의회 의장으로 선출되었으나, 같은 해 10월 의회 총격 사건으로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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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1966예레반 전기기술공장: 기술자·당비서·주임기사·공장장
  • 1959–1961CPSU 중앙위 고등당학교 수료
  • 1966–1972예레반 시당위 서기 → 제1서기
  • 1972–1974아르메니아 공산당 중앙위 서기
  • 1974–1988아르메니아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1976–1988 아르메니아 SSR 최고소비에트 의장 겸임)
  • 1976–1989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91–1999아름엘렉트로마시나(하이엘렉트로메케나) 전기기기 공장 총지배인
  • 1998–1999아르메니아 인민당 창당·의장
  • 1999아르메니아 국민의회 의장 (6월–10월)

에를렌 키리코비치 페르비신

Эрлен Кирикович Первышин
중공업 · 군수공업 소련 러시아인 1932–2004 ○ 자연사

군사통신 인프라를 총괄한 통신장비공업 장관

1976년 4월, 전자공업부 전시회에서 동료 장관 발렌틴 프롤레이코는 페르비신을 이렇게 평했다: "자기 쪽 작업이 뒤처진 데에 불만을 품고, 기회만 있으면 빈정거리며 오직 불평만 늘어놓았다."

모스크바 전기통신대학을 졸업한 통신기사 출신으로, 시베리아의 설치 현장에서 경력을 시작해 전소련 설계·조립 트러스트 총책임자까지 올랐다. 1974년부터 1989년까지 15년간 소련 통신장비공업부 장관을 지내며 군사령·통제·통신(C3) 체계의 중추인 보안통신, 무선중계, 레이더 장비 생산을 총괄했고, 1976년 중앙위원 후보를 거쳐 1986년 정위원이 되었다. 1989년 통신부 장관으로 자리를 옮겨 통합 통신망 구축을 추진했으며, 소련 해체 후에는 텔레콤 기업체를 이끌며 러시아 통신 산업의 민영화 전환기에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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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1957제5설계·조립트러스트 톰스크 설치구역 기사
  • 1957–1959제5설계·조립트러스트 크라스노야르스크 설치구역 책임자
  • 1959–1961제5설계·조립트러스트 부수석기사 (모스크바)
  • 1965–1969소련 무선공업부 전소련 설계·조립트러스트 총책임자
  • 1970–1974소련 무선공업 차관
  • 1974–1989소련 통신장비공업부 장관
  • 1989–1990소련 통신부 장관
  • 1991–1992통신기업 콘체른 '텔레콤' 이사회 의장

예브게니 알렉산드로비치 옙투셴코

Евген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Евтушенко
작가·예술가 러시아 러시아 1933–2017 ○ 자연사

시인은 러시아에서 시인보다 크다: 스타디움을 채운 해빙기 시인의 빛과 그림자

「바비 야르」는 '바비 야르 위에는 아무 기념비도 서 있지 않다'로 시작해, 홀로코스트를 집단적 소련 시민의 희생으로만 말하던 국가 서사에 정면으로 균열을 냈다.

해빙기 대표 시인. 「바비 야르」(1961)로 소련의 홀로코스트 침묵을 깼다. 스타디움을 채운 낭독회로 대중적 인기를 얻었으며, '시인은 러시아에서 시인보다 크다'는 시구로 문학의 공적 사명을 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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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소비에트 스포츠〉지에 첫 시 발표
  • 1952첫 시집 『미래의 정찰병들』 출간, 최연소 소련 작가동맹 가입
  • 1952–1957고리키 문학대학 수학, 두딘체프 옹호로 제적
  • 1961「바비 야르」 발표 — 소련의 홀로코스트 침묵을 깨다
  • 1962「스탈린의 후계자들」을 『프라우다』에 발표
  • 1962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3번 〈바비 야르〉에 가사 제공, 초연
  • 1968「프라하로 진격하는 탱크」 발표 후 공연 금지·해외여행 제한
  • 1986–1991소련 작가동맹 이사회 서기
  • 1989–1991하리코프 선거구 소련 인민대의원
  • 1991–2017미국 털사대학 교수로 러시아·유럽 시와 영화사 강의

보리스 니콜라예비치 파스투호프

Борис Николаевич Пастухов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비에트 러시아 1933–2021 ○ 자연사

콤소몰의 마지막 거물이자 고스코미즈다트 수장

1967년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예고리체프브레즈네프의 국방 정책을 공개 비판한 다음 날, 파스투호프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신이 자랑스럽습니다." 예고리체프가 답했다. "보랴, 왜 그랬나? 네 인생을 망쳤어."

1977년부터 1982년까지 콤소몰 중앙위원회 제1서기를 지내며 4천만 대원의 청년 조직을 이끈 소비에트 당-국가 간부이다. 재임 중 바이칼-아무르 간선철도(BAM) 건설과 북극점 스키 횡단 등 대규모 청년 동원 사업을 총괄했고, 1978년 CPSU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82년부터 1986년까지 소련 국가출판·인쇄·서적거래위원회(고스코미즈다트) 의장으로서 검열 체계와 출판 산업을 관장했으며, 이후 덴마크(1986–1989)와 아프가니스탄(1989–1992) 주재 대사를 지냈다. 소련 해체 후에도 러시아 외무차관, CIS 담당 장관, 국가두마 의원을 역임하며 후기 소비에트 엘리트의 연속성을 대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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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바우만 고등기술학교 졸업 (기계공학), 바우만 구 콤소몰 제2비서
  • 1959–1961바우만 구 콤소몰 제1비서
  • 1961–1962모스크바 시 콤소몰 제2비서
  • 1962–1964모스크바 시 콤소몰 제1비서
  • 1964–1977콤소몰 중앙위원회 서기
  • 1977–1982콤소몰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82–1986소련 국가출판·인쇄·서적거래위원회 의장
  • 1986–1989주덴마크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89–1992주아프가니스탄 소련/러시아 특명전권대사
  • 1992–1996러시아 연방 외무차관
  • 1996–1998러시아 연방 외무제1차관
  • 1998–1999러시아 연방 CIS 담당 장관

발렌티나 레오니도브나 포노마료바

Валентина Леонидовна Пономарёва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933–2023 ○ 자연사

가장 뛰어난 여성 우주인 후보였으나 비행하지 못한 시험비행사

테레시코바에게 「너는 콤소몰과 당이 돌이킬 수 없이 망쳐 놓았어」라고 말했다고 카마닌이 일기에 기록했다.

모스크바 항공대학을 졸업하고 320시간의 비행 경력을 가진 유일한 여성 조종사 출신 우주인 후보였다. 1962년 여성 우주비행사단에 선발되어 최종 시험에서 최고 점수를 받았고, 의료 책임자 야즈돕스키는 그녀를 1순위로 추천했다. 그러나 카마닌은 그녀의 독립적인 태도를 '오만'으로, 담배와 음주를 '도덕적 불안정'으로 기록했고, 코롤료프는 노동계급 출신 여성이 필요하다며 테레시코바를 선택했다. 이후 보스호트 계획의 여성 우주유영 임무를 준비했으나 프로그램이 취소되면서 끝내 우주비행을 하지 못했고, 1969년 여성 그룹 해체와 함께 퇴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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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1–57모스크바 여자 156학교 금메달 졸업, 모스크바 항공대학(MAI) 졸업 (액체로켓엔진 전공)
  • 1957–62OKB-1 배치 후 소련 과학아카데미 응용수학부 연구원 (켈디시 산하)
  • 1962.4여성 우주비행사단 선발 (5인), 공군 입대
  • 1962–63보스토크 6호 훈련, 최종시험 최고점. 테레시코바의 제2후보로 배정
  • 1965–66보스호트 4호 여성 우주유영 임무 훈련 (취소)
  • 1969–88우주비행사훈련센터 선임연구원, 궤도역학·우주비행사 교육
  • 1988–2023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자연과학기술사연구소 선임연구원, 우주비행사학사 그룹장

그리고리 그리고리예비치 넬류보프

Григорий Григорьевич Нелюбо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인 1934–1966 ✕ 자살

가가린의 두 번째 예비였으나 한 번도 우주에 닿지 못한 우주비행사

1966년 2월 18일, 집을 나서며 아내에게 남긴 마지막 쪽지: 「지노크! 넌 언제나 최고였어. 너 같은 여자는 찾아야만 해. 용서해.」

1961년 1월 국가위원회는 첫 유인비행 탑승 순위를 가가린, 티토프, 넬류보프로 확정했다. 보스토크 1호의 두 번째 예비였고 보스토크 3·4호 백업으로도 훈련했으나, 1963년 3월 치칼롭스카야 역에서 군 순찰대와의 충돌로 우주비행사단에서 제적됐다. 극동으로 좌천된 뒤 알코올 의존과 우울증에 빠졌고, 1966년 2월 18일 기차에 뛰어들어 서른한 살에 죽었다. 그의 존재는 글라스노스트까지 은폐됐고, 집단사진에서도 지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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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예이스크 해군항공학교 졸업, 해군 항공대 복무
  • 1960.03제1차 우주비행사단 선발 (뱅가드 6인)
  • 1961.01국가위원회, 탑승 순위 3위로 확정 (가가린, 티토프, 넬류보프)
  • 1961.04보스토크 1호 두 번째 예비 (가가린)
  • 1962.06건강 문제로 보스토크 3·4호 훈련에서 제외
  • 1963.04치칼롭스카야 역 사건으로 우주비행사단 제적
  • 1963–66극동 방공부대 전투기 조종사

유리 알렉세예비치 가가린

Юрий Алексеевич Гагарин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934–1968 ✕ 추락사

인류 최초로 지구를 벗어난 미소

재진입 돌입, 캡슐 밖은 3천 도의 플라스마에 휩싸이고 10G의 압력이 몸을 짓눌렀다. 가가린은 그 안에서 입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 쇼스타코비치의 「조국은 듣는다, 조국은 안다」. 후일 회고록에 그는 이렇게 적었다: 「나는 지구로 낙하하면서 내내 그 노래를 불렀다.」

집단농장 목수의 아들이 1961년 4월 12일, 108분 만에 지구를 한 바퀴 돌았다: 「파예할리!(갑시다!)」. 냉전의 한복판에서 두 진영이 함께 사랑한 유일한 사람이 되었고, 우주로 돌아갈 날을 준비하며 훈련하다 1968년 미그기 추락으로 죽었다. 서른네 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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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57공군 조종사
  • 1960제1기 우주비행사단 선발
  • 1961.4.12보스토크 1호: 인류 첫 우주비행 108분
  • 1961–67세계 순방, 우주비행사 훈련 부책임자
  • 1968.3미그-15 훈련비행 중 추락

발레리 표도로비치 비콥스키

Валерий Фёдорович Быковский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인 1934–2019 ○ 자연사

5일 동안 혼자 궤도를 돌며 아직도 깨지지 않은 단독 비행 기록을 세운 우주비행사

보스토크 5호가 지구를 돌고 있던 1963년 6월 18일, 중앙위원회는 그의 입당 청원을 심의하여 후보 기간 없이 그를 당원으로 받아들였다.

소련의 5번째 우주비행사. 1963년 6월 14일 보스토크 5호로 발사되어 약 5일 동안 지구를 81바퀴 돌았고, 이 단독 우주 체류 기록은 오늘날까지 깨지지 않았다. 당초 보스토크 계획은 두 여성을 동시에 발사할 예정이었으나 한 명의 여성과 한 명의 남성으로 변경되면서 비콥스키가 테레슈코바보다 이틀 먼저 발사됐다. 이후 소유스 22호(1976)와 동독 최초 우주인 지그문트 옌과 함께한 소유스 31호(1978)까지 총 세 차례 우주 비행을 수행했으며, 보스토크·보스호트 계열 우주비행사 중 유일하게 3회 비행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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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카친스크 군사항공학교 졸업, 전투기 조종사
  • 1960제1차 우주비행사대 선발
  • 1962.08보스토크 3호 백업 조종사
  • 1963.06.14–19보스토크 5호 탑승, 81회 궤도, 4일 23시간 6분, 단독 우주 체류 기록
  • 1976.09.15–23소유스 22호 사령관, 지구 관측 임무, 블라디미르 악쇼노프와 동행
  • 1978.08.26–09.03소유스 31호 사령관, 동독 우주인 지그문트 옌과 살류트 6호 방문
  • 1988–1990베를린 소비에트 과학문화관 관장
  • 1990은퇴

알렉세이 아르히포비치 레오노프

Алексей Архипович Леоно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934–2019 ○ 자연사

인류 최초로 우주의 문을 열고, 붓으로 우주를 그린 사관

「너무 고요해서 내 심장박동 소리까지 들렸다. 나는 별들에 둘러싸여 통제를 벗어난 채 떠 있었다.」 — 1965년 3월 18일, 인류 최초의 우주유영 12분.

시베리아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1965년 3월 18일 인류 최초로 우주 공간으로 걸어나갔다. 보스호트 2호 밖으로 몸을 내민 12분 동안 우주복이 팽창해 에어록으로 돌아오지 못할 위기에 처했으나, 산소를 빼내며 간신히 귀환했다. 우주에서 색연필로 궤도 일출을 스케치한 최초의 우주 화가이기도 하다. 1975년 소유스 19호 선장으로서 아폴로-소유스 시험 계획을 지휘해 미소 최초의 우주 도킹을 성사시켰고, 이후 1976년부터 1982년까지 가가린 우주비행사훈련센터 부소장 겸 우주비행사단장으로 후배들을 길러냈다. 평생 200점이 넘는 우주화를 남긴 독보적 예술가-우주인으로, 두 차례 소련 영웅 칭호를 받고 공군 소장으로 전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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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추게프 공군비행학교 졸업, 전투기 조종사
  • 1959동독 주둔 소련 공군 정찰연대 배속
  • 1960제1기 우주비행사단 선발 (유리 가가린과 동기)
  • 1965.3.18보스호트 2호: 인류 최초 우주유영 12분 9초
  • 1968소련 유인 달착륙 계획 사령관 후보, 계획 취소
  • 1971소유스 11호 주승무원 사령관, 의료 문제로 교체 — 백업 승무원 전원 사망
  • 1975.7소유스 19호 사령관: 아폴로-소유스 시험 계획, 미소 최초 도킹
  • 1976–1982가가린 우주비행사훈련센터 부소장 겸 우주비행사단장
  • 1991공군 소장으로 퇴역
  • 2002–2019통합러시아당 최고위원회 위원

게르만 스테파노비치 티토프

Герман Степанович Титов
군사 · 국방 소련 러시아인 1935–2000 ○ 심장마비

우주에 오른 두 번째 인간이자 군사우주체계 건설자

우주에서 첫 잠을 청하며 그는 교신했다. "팔과 다리만 잘 정리하면 우주 수면은 훌륭하다… 아기처럼 잤다."

소련의 우주비행사이자 군사우주 지휘관. 1961년 8월 6일 보스토크 2호를 타고 인류 역사상 두 번째로 지구 궤도를 비행했으며, 17바퀴·25시간의 첫 장기 체류로 인간이 우주에서 먹고 자고 일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 25세의 최연소 궤도비행사 기록은 오늘날까지 깨지지 않았다. 우주에서 최초로 수동 조종과 영화 촬영을 수행했으며, 최초로 우주멀미를 겪은 인물이기도 하다. 비행 후 스피랄 우주왕복선 계획의 조종사 훈련을 이끌었고, 1979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 국방부 우주수단총국(ГУКОС/УНКС)의 제1부국장으로서 군사우주체계 시험·개발을 총괄했다. 소련 해체 후 러시아 연방공산당 소속으로 국가두마 의원(1993~2000)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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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스탈린그라드 군사항공학교 졸업, 전투기 조종사
  • 1960제1차 우주비행사대 선발
  • 1961.04보스토크 1호 백업 조종사 (유리 가가린)
  • 1961.08보스토크 2호 탑승 — 17회 지구 궤도, 25시간 18분
  • 1965–1968스피랄 우주왕복선 조종사 훈련대장
  • 1968주콥스키 공군공학아카데미 졸업
  • 1972참모본부 군사아카데미 졸업, 우주지휘통제 부대 부사령관
  • 1973–1979ГУКОС 연구·개발 담당 부국장
  • 1979–1991국방부 우주수단총국(УНКС) 제1부국장, 중장 → 상장
  • 1993–2000러시아 국가두마 의원 (공산당)

세르게이 니키티치 흐루쇼프

Сергей Никитич Хрущё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 미국 (이중국적) 러시아인 1935–2020 ○ 자연사

흐루쇼프의 아들이자 첼로메이의 유도체계 엔지니어

1969년 아폴로 11호 달 착륙 당시, 흐루쇼프는 우크라이나에서 KGB 장교와 함께 망원경으로 달을 바라보며 역사적 순간을 지켜보려 했다.

소련의 로켓 엔지니어이자 전산학자. 니키타 흐루쇼프의 아들로, 블라디미르 첼로메이 설계국(OKB-52)에서 순항미사일과 프로톤 우주발사체의 유도체계를 개발했다. 이 시기 크릴라티예 로켓, 군사위성, 달 탐사선, 프로톤 부스터의 핵심 기술에 기여했으며, 1963년에는 28세의 나이로 사회주의 노동영웅과 레닌 훈장을 받았다. 이후 제어컴퓨터연구소(INEUM) 제1부소장으로 옮겨 연구를 이끌었고, 1991년 미국으로 이주해 브라운대학교 왓슨연구소에서 냉전사와 소련 우주개발을 강의하며 저술 활동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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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모스크바전력공학연구소 졸업, OKB-52(첼로메이 설계국) 입사
  • 1958–1968OKB-52 기술자 → 부문장 대리 — 유도체계 개발 (순항미사일, 군사위성, 달 탐사선, 프로톤 로켓)
  • 1959레닌상 수상
  • 1963–1964OKB-52 수석 설계자 겸 부설계국장
  • 1963사회주의 노동영웅 · 레닌 훈장 수훈
  • 1968–1991제어컴퓨터연구소(INEUM) 부문장 → 제1부소장
  • 1991–2020미국 이주, 브라운대학교 왓슨연구소 선임연구원 · 교수

얀 루드비차크

Jan Ludwiczak
비소련 혁명가 폴란드 폴란드인 1937–2023 ○ 자연사

체포로 우제크 파업을 촉발한 노동조합 지도자

1981년 12월 13일 그의 체포 소식이 우제크 광산에 전해지자 광부들은 그가 돌아올 때까지 일하지 않기로 했다.

얀 루드비차크는 광부이자 폴란드 독립자치노동조합 연대의 우제크 광산 사업장위원회 위원장이었다. 그의 체포는 광부들이 계엄령에 맞서 파업하고 체포된 동료들의 석방을 요구하게 만든 직접적 계기였다. 석방 뒤에도 그는 강등과 감시를 견디며 광산 안에서 지하 출판물을 배포했고, 1989년 연대 재건을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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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포즈난 인근 페크나 출생
  • 1954포즈난 철도학교 졸업
  • 1958–1959카토비체 광산군단에서 군 복무
  • 1965–1990카토비체 우제크 탄광 노동자
  • 1980우제크 연대 창립위원회 부위원장
  • 1980–1981우제크 연대 사업장위원회 위원장
  • 1981–1982체포·구금, 1982년 12월 석방
  • 1989우제크 연대 임시창립위원회 위원장

블라디미르 세묘노비치 비소츠키

Владимир Семёнович Высоцкий
작가·예술가 소련 러시아 1938–1980 ○ 심근경색

검열된 방송 대신 백만 개 테이프로 퍼져나간 목소리

1980년 7월 28일, 모스크바 올림픽 기간. 비소츠키의 시신이 타간카 극장 로비에 안치되자 십만 인파가 수 킬로미터 줄을 섰다. 경찰 추산 10만8천 명. 『햄릿』 공연 취소에도 단 한 명도 환불을 요구하지 않았다.

타간카 극장의 배우이자 소련 최고의 음유시인. 700곡이 넘는 노래를 7현 기타로 불렀고, 공식 매체에서 배제되었으나 릴 테이프 복제로 전국에 퍼졌다. 1971년 타간카 『햄릿』에서 검은 스웨터의 지식인 반항아로 한 세대의 상징이 되었으며, 범죄자·최전선 병사·알코올 중독자 같은 가면을 빌려 소비에트 사회의 금기를 거리 언어로 노래했다. 브레즈네프마저 병상에서 전화로 그의 노래를 듣기를 원했을 만큼 당과 민중을 동시에 사로잡은 유일무이한 문화적 현상이었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중 42세로 사망했을 때, 십만 인파가 타간카 광장에 모여 당국이 감추려 했던 존재의 진정한 무게를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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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56모스크바 토목공학대학 입학 후 중퇴, 연기 전향
  • 1956–60모스크바 예술극장 부속학교 졸업
  • 1961첫 자작곡 「타투이로프카」 — 범죄 언더월드 연작 시작
  • 1964타간카 극장 입단, 브레히트 『사천의 선인』으로 데뷔
  • 1967영화 『수직』 주연·주제가로 전국적 스타덤, 마리나 블라디와 만남
  • 1971타간카 『햄릿』 초연 — 소련 연극사의 전설적 무대
  • 1979TV 시리즈 제글로프 역으로 전국적 신드롬
  • 19807월 25일 심근경색으로 사망, 십만 인파 운집 장례

안드레이 알렉세예비치 아말리크

Андрей Алексеевич Амальрик
작가·예술가 소련 러시아 1938–1980 ✕ 교통사고

1984년 소련 붕괴를 예견한 역사가이자 극작가

“이 재판은 나에게 두려움조차 일으키지 못한다. 이미 시작된 사상 해방의 과정은 되돌릴 수 없다.” — 1970년 11월 스베르들롭스크 법정 최후 진술

역사가이자 부조리극 작가로, 「소련은 1984년까지 존속할 것인가」(1970)에서 소련 체제의 내재적 붕괴를 예견했다. 반체제 활동으로 두 차례 수감, 1976년 강제 이주 후 서방에서 저술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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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9–1963모스크바 국립대학교 역사학부 재학, 노르만 기원론 학위논문으로 퇴학
  • 1963–1965부조리극 희곡 창작 및 아방가르드 미술 수집
  • 1965–1966무위도식 혐의로 체포, 시베리아 톰스크주 유형 2년 6개월 선고
  • 1966–1968조기 석방 후 모스크바 귀환, 노보스티 통신사 프리랜서 근무
  • 1969「소련은 1984년까지 존속할 것인가」 집필 및 해외 출판
  • 1970–1975반소 선전 혐의 체포·수감, 3년 노동교화형 후 추가 3년형, 항의 끝에 마가단 유형으로 감형
  • 1976모스크바 헬싱키 그룹 구상 참여, 강제 이주로 네덜란드행
  • 1976–1980위트레흐트대 연구원, 미국 강연, 프랑스 저술 활동

올레크 안토노비치 고르디옙스키

Олег Антонович Гордиевский
국가보안 기관 소련 러시아 1938–2025 → 1985년 망명 · 궐석 사형 선고

서방에 망명한 최고위 KGB 장교이자 1983년 전쟁 공포의 결정적 증언자

PR 계열 동료들은 랴얀(РЯН) 작전에 회의적이었지만, 아무도 제1총국의 평가에 이의를 달아 중앙에서 체면을 잃고 싶어 하지 않았다.

서방으로 망명한 KGB 장교 중 최고위 인물로, 제1총국 대령이자 1974년부터 11년간 MI6의 정보원 '오베이션(Ovation)'으로 이중 활동했다. 런던 주재관으로서 랴얀(РЯН) 작전과 1983년 에이블 아처 훈련에 대한 소련 지도부의 경계를 영국·미국 정보기관에 전달한 핵심 정보원이었고, 이 증언은 1983년 핵전쟁 위기를 낮추는 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CIA 내통자 올드리치 에임스에게 배신당해 모스크바로 소환되어 약물 심문을 받다가 1985년 외교 차량 트렁크에 실려 탈출했고, 궐석 재판에서 반역죄 사형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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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2모스크바 국제관계대학(MGIMO) 졸업, KGB 제1총국 S국(비합법 첩보) 입직
  • 1966–1970코펜하겐 KGB 레지덴투라 장교 (영사부 위장)
  • 1972–1978코펜하겐 부레지던트(정치정보), 1976년 레지던트 대행
  • 1978–1982제1총국 영국·스칸디나비아부 근무
  • 1982–1985런던 레지덴투라 (대사관 참사관 위장), 1984년 부레지던트, 1985년 레지던트 대행
  • 1974–1985MI6 정보원 '오베이션'으로 이중 활동
  • 1985망명, 소련에서 궐석 사형 선고

발레리 미하일로비치 사블린

Валерий Михайлович Саблин
좌익 반대파 소련 러시아 1939–1976 ✕ 처형

브레즈네프 시대에 레닌주의 원칙을 내걸고 반란을 일으킨 해군 장교

처형 직전 아들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강인하게 살아라. 그리고 인생은 아름답다는 것을 믿어라. 긍정적으로 살아라. 그리고 혁명은 언제나 승리한다는 것을 믿어라."

소련 해군 3등 대위이자 정치장교(잠폴리트)로, 1975년 11월 대잠호위함 스토로제보이호에서 반란을 주도했다. 브레즈네프 시대의 부패와 정체를 비판하며 레닌주의 원칙으로의 복귀와 새로운 혁명을 촉구하는 방송을 송출하기 위해 함선을 리가에서 레닌그라드로 향하게 했으나, 소련 공군의 공습으로 진압되었다. 반란은 실패했고 사블린은 반역죄로 총살형에 처해졌으나, 훗날 톰 클랜시의 소설 《붉은 10월》에 영감을 준 이 사건은 체제 내부에서 제기된 가장 극적인 레닌주의적 저항 중 하나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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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레닌그라드에서 해군 장교 가문의 아들로 출생
  • 1956–1960M.V. 프룬제 고등해군학교에서 수학, 우등 졸업 및 입당
  • 1960–1969북방함대 및 흑해함대에서 구축함·초계함 장교로 복무
  • 1963흐루쇼프에게 당내 부패를 비판하는 서한 발송, 무르만스크 당위원회로부터 견책
  • 1969–1973V.I. 레닌 군사정치아카데미에서 수학, 우등 졸업
  • 1973발트함대 대잠호위함 스토로제보이호 정치부함장(잠폴리트)으로 부임
  • 1975.11.8–9스토로제보이호 반란 주도, 레닌그라드 항해 중 소련 공군에 진압됨
  • 1976.7소련 대법원 군사합의부에서 반역죄로 사형 선고
  • 1976.8.3레포르토보 교도소에서 총살형 집행
  • 1994러시아 대법원 군사합의부, 반역죄를 군사범죄로 재분류하여 부분 복권

스타니슬라프 예브그라포비치 페트로프

Станислав Евграфович Петров
군사 · 국방 소련 러시아인 1939–2017 ○ 자연사 · 폐렴

핵전쟁을 막은 소련 방공군 중령, 세르푸호프-15의 오경보를 직감으로 간파한 당직 장교

경보 사이렌이 울부짖었지만, 나는 '발사'라고 적힌 커다란 붉은 화면을 몇 초 동안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소련 방공군 중령. 1983년 9월 26일 세르푸호프-15 조기경보사령부에서 오코 위성이 미 본토에서 발사된 ICBM 5기를 탐지했다고 경보했으나, 1차 타격치고는 규모가 너무 작고 지상레이더가 이를 확인하지 못한다는 점을 근거로 오경보로 판단했다. 상부에 보고하지 않고 시스템 오류로 처리하여 소련의 핵 보복 발사를 막았으며, 훗날 '세계를 구한 사람'으로 불렸다. 사건 후 불명예도 표창도 받지 못했고 1984년 조기 퇴역했으며, 2017년 폐렴으로 사망할 때까지 모스크바 교외에서 은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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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키예프 방공무선기술학교 입학
  • 1957–1967방공군 복무, 레이더 체계 정비
  • 1967–1972키예프 방공 고등공병무선기술학교 수학
  • 1973세르푸호프-15 조기경보사령부 배치
  • 1983.09.26오코 위성 오경보 당직 근무, 핵 보복 발사 저지
  • 1984중령으로 퇴역
  • 1984–1990s조기경보체계 개발 연구소 근무

아나톨리 미하일로비치 코르누코프

Анатолий Михайлович Корнуков
군사 · 국방 소련 러시아인 1942–2014 ○ 사망

KAL 007 격추를 직접 지시하고 러시아 공군 총사령관이 된 방공 장성

「옳은 명령을 내렸다고 나는 영원히 확신한다」 KAL 007 격추에 대한 그의 변함없는 입장.

우크라이나 광부의 아들로 자란 아나톨리 코르누코프는 1983년 9월 사할린 방공 지휘소에서 대한항공 007편 격추 명령을 내린 방공 장성이다. 상부가 책임을 거부하자 그는 오시포비치 소령에게 '목표 파괴'를 직접 지시했고, 죽을 때까지 이를 국제법과 소련법에 부합하는 정당한 명령이라 주장했다. 격추 사건으로 상도 벌도 받지 않았고 승진을 계속해 1998년 러시아 공군 초대 총사령관이 되어 공군과 방공군의 통합을 주도했다. 그 결정은 민간인 269명의 죽음과 맞물렸고, 그는 훗날 '옳은 명령을 내렸다고 영원히 확신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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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9소련군 입대, 비행학교 입교
  • 1964전투기 조종사 자격 취득, 제54근위전투항공연대 배속
  • 1974–1976제777전투항공연대장(사할린)
  • 1980–1985제40전투항공사단장(극동·사할린·쿠릴)
  • 1983.09KAL 007 요격기 오시포비치에게 격추 지시
  • 1985–1988제71전투항공군단장(주동독소련군)
  • 1990–1991제11방공군 사령관(하바롭스크)
  • 1998–2002러시아 공군 총사령관, 공군·방공군 통합 주도

겐나디 니콜라예비치 오시포비치

Геннадий Николаевич Осипович
군사 · 국방 소련 러시아인 1944–2015 ○ 사망

KAL 007을 격추한 소련 방공군 요격 조종사

「민간기인 줄 알았지만 나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1991년 이즈베스티아 인터뷰에서.

소련 방공군의 수호이 Su-15 요격 조종사로, 1983년 9월 1일 사할린 상공에서 대한항공 007편 보잉 747을 격추한 인물이다. 경고 사격은 했지만 기체에 예광탄이 아닌 철갑탄이 장전되어 기장이 이를 보지 못했고, 두 줄의 창문을 보고 민간기임을 알았으면서도 목표를 확인하지 못한 채 미사일을 발사해 탑승자 269명 전원의 죽음을 초래했다. 1991년 이즈베스티아 인터뷰에서 예광탄을 쐈다는 당국 주장이 거짓이었음을 인정했고, 이후 비행에서 물러나 마이코프에서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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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3아르마비르 고등군사항공학교 입교
  • 1967졸업, 중위 임관 후 극동 제530전투항공연대 배속
  • 1976사할린 제777전투항공연대 편대 지휘관
  • 1983.09.01KAL 007 보잉 747 격추
  • 1983.09제761훈련항공연대 선임 항법사 전임
  • 1984.08적성훈장 수훈
  • 1986MiG-21 탈출 중 척추 부상으로 비행 중단
  • 1989.11예비역 전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