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1985

해빙과 정체의 사람들 445명

스탈린의 관 뚜껑을 연 해빙과 그것을 다시 덮은 정체 사이에서, 우주와 개혁과 반체제의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

오토 빌레 쿠시넨

Otto Wille Kuusinen
코민테른 소련 핀란드 1881–1964 ○ 자연사

코민테른의 마지막 생존자에서 흐루쇼프의 이론가로

1920년 2월, 핀란드와 러시아의 노동운동 지도부는 쿠시넨의 사망 소식을 듣고 추도 연설을 올렸다. 페트로그라드의 핀란드 공산주의자들은 집회 장소를 '쿠시넨 클럽'이라 명명했다. 그러나 그는 살아 있었고, 헬싱키에 은신 중이었다.

핀란드 사회민주당 출신으로, 코민테른 서기로 18년간 국제공산운동을 이끌었다. 흐루쇼프 시기 '전인민국가' 테제를 정식화한 탈스탈린화 이론가로, 코민테른 간부 중 유일하게 CPSU 최고 지도부에 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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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핀란드 사회민주당 입당
  • 1905알렉산드로프 대학 철학사
  • 1908–1917핀란드 의회 의원 (SDP)
  • 1911–1917핀란드 사회민주당 의장
  • 1918핀란드 혁명정부 교육담당 인민위원
  • 1918핀란드 공산당 창립 참여
  • 1921–1939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서기
  • 1939–1940핀란드 민주공화국 정부 수반 겸 외무장관
  • 1940–1956카렐로-핀 SSR 최고회의 간부회의 의장
  • 1940–1958소련 최고회의 간부회의 부의장
  • 1952–1953, 1957–1964CPSU 중앙위 상임간부회 위원
  • 1957–1964CPSU 중앙위 서기
  • 1959《마르크스-레닌주의 기초》 편집 책임

안나 안드레예브나 아흐마토바

Анна Андреевна Ахматова
작가·예술가 소련 러시아 1889–1966 ○ 병사

감옥 바깥에서 기다린 시인

1946년 8월, 즈다노프는 아흐마토바를 두고 "반은 수녀, 반은 창녀"라고 공개 비난했다. 그녀는 회의장에서 일어나 조용히 자리를 떴고, 이후 10년 가까이 출판 금지 상태에 놓였다.

아크메이즘의 대표 시인으로, 초기 시집 『저녁』(1912)과 『묵주』(1914)로 러시아 문단의 정상에 섰다. 체포된 아들과 친구들을 기다리며 스탈린 시대의 공포를 『레퀴엠』에 응축했고, 오랫동안 출판을 금지당하고 1946년 즈다노프의 공식 비난을 받았지만 떠나지 않은 채 기억과 애도의 언어를 지켰다. 말년에는 『영웅 없는 시』를 완성하고 옥스퍼드 명예박사 학위를 받으며 국제적 재평가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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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저녁』 발표
  • 1935–1940『레퀴엠』을 비밀리에 집필
  • 1946즈다노프의 공식 비난과 출판 금지
  • 1958–1965시집 재출간과 후기 인정

보리스 레오니도비치 파스테르나크

Борис Леонидович Пастернак
작가·예술가 소련 러시아 1890–1960 ○ 자연사

《닥터 지바고》와 거부된 노벨상의 시인

《닥터 지바고》 사건은 출판·국제정치·작가의 생존이 한 작품을 둘러싸고 충돌한 장면이다.

러시아 시와 번역의 거장이자 소설 《닥터 지바고》의 작가다. 이탈리아에서 먼저 출간된 소설과 1958년 노벨문학상은 소련 당국의 격렬한 비난을 불렀고, 그는 압력 아래 수상을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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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첫 시집 《구름 속의 쌍둥이》 발표
  • 1957《닥터 지바고》 이탈리아에서 첫 출간
  • 1958노벨문학상 수상 뒤 압력 아래 거부

일리야 그리고리예비치 에렌부르크

Илья Григорьевич Эренбург
작가·예술가 소련 러시아 1891–1967 ○ 자연사

전쟁 보도와 《해빙》 사이를 건넌 소련 작가

《해빙》이라는 제목은 작품을 넘어 스탈린 이후의 기대와 한계를 부르는 말이 되었다.

소설가·시인·저널리스트로, 제2차 세계대전기 전선 기자로 널리 읽혔다. 1954년 소설 《해빙》의 제목은 탈스탈린화기의 시대 명칭이 되었고, 그는 문화적 완화의 경계에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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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5적군 기관지 전선 기자
  • 1954소설 《해빙》 발표
  • 1960–1966회고록 《사람들·세월·삶》 연재

빅토르 발렌티노비치 노보질로프

Виктор Валентинович Новожило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892–1970 ○ 자연사

마르크스 가치론과 수리 최적화를 접목한 소비에트 경제수학파의 공동 창시자

1942년, 독일군 점령하의 퍄티고르스크에서 시립극장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리니스트로 등록해 강제노동 이송을 피했다. 독일 측 경제학자 슈타켈베르크가 통계국장직을 제안하자 '현재 4중주단의 제1바이올린 주자로서 떠날 수 없다'며 거절했다.

칸토로비치·넴치노프와 함께 소련 수리경제학파의 창시자. 마르크스 노동가치론에 기초해 자원 희소성을 반영하는 '차등적 비용' 개념을 정식화, 계획경제 최적화 이론의 토대를 세웠다. 1965년 레닌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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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2하리코프 출생 (아버지는 현직 참사관)
  • 1911–1915키예프 대학 법학부 졸업 (금메달), 정치경제학·통계학 강좌 교수장학생으로 잔류
  • 1922–1951레닌그라드 폴리테크닉 연구소 교수, 1938–1951 기계제작 경제학 주임
  • 1941경제학 박사학위: 「계획·설계 변수의 국민경제적 효율 비교측정 방법」
  • 1951–1966레닌그라드 공학경제연구소 통계학 주임
  • 1961레닌 훈장 수훈
  • 1965레닌상 공동 수상 (칸토로비치·넴치노프와 선형계획법·경제모형 개발)
  • 1966–1970TsEMI 레닌그라드 분소 체계적 경제평가 연구실장

콘스탄틴 알렉산드로비치 페딘

Константин Александрович Федин
문화 · 문학예술 통제 소련 러시아 1892–1977 ○ 자연사

세라피온 형제단에서 출발해 18년간 소비에트 문학의 최고 문지기가 된 소설가

20년간 친구이자 이웃이었던 페딘이 처음으로 친구가 아니라 '관리'로서 찾아왔을 때, 파스테르나크는 충격을 받았다 — 그날 페딘은 그에게 노벨상 거부를 요구하러 왔던 것이다.

『도시와 해』(1924), 『형제들』(1928)로 혁명기 지식인의 운명을 형식적 실험과 함께 그려낸 초기 소비에트 문학의 대표적 소설가였다. 1940년대에는 스탈린상 수상작인 3부작 『첫 기쁨』·『이상한 여름』·『모닥불』로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정전을 구축했다. 1959년 작가동맹 제1서기가 된 이후 흐루쇼프·브레즈네프 시기를 관통하며 파스테르나크의 노벨상 거부 설득, 솔제니친의 『암병동』 출판 저지 등 당의 문학 정책을 집행하는 최고 행정가로 군림했다. 젊은 날 '세라피온 형제단'에서 예술의 자유를 주창했던 작가가 소비에트 문학 제도의 수문장이 된 궤적은 해빙기 문화 정치의 모순을 응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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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노비 사티리콘』에 첫 풍자 소품 발표
  • 1914–1918독일에서 민간인 억류자로 1차대전 기간 체류
  • 1919–1921적군 복무, 입당 후 전업 작가를 위해 탈당
  • 1924『도시와 해』 발표 — 초기 소비에트 문학의 기념비적 장편
  • 1934소비에트 작가동맹 이사로 선출
  • 1949『첫 기쁨』과 『이상한 여름』으로 스탈린상 1등급 수상
  • 1959–1971소비에트 작가동맹 제1서기
  • 1971–1977소비에트 작가동맹 이사회 의장

악셀 이바노비치 베르그

Аксель Иванович Берг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핀란드 1893–1979 ○ 자연사

사이버네틱스를 부르주아 사이비과학에서 국가전략으로 되살린 소련 레이더의 아버지

"사이버네틱스의 주된 목표는 인간이 복잡하고 통제하기 어려운 과정의 통제 효율을 높이도록 돕는 것이다 — 인간의 역할은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 1959년 과학아카데미 상임위원회 보고

핀란드계 스웨덴인 장군의 아들로 태어나 제정 해군 장교에서 붉은 함대 잠수함 지휘관이 된 악셀 베르그는 소련에서 레이더 기술의 기초를 닦고 사이버네틱스를 국가 과학정책의 중심으로 끌어올린 과학자-행정가이다. 1937년 체포되어 NKVD 특별설계국에서 군 통신체계를 개발하다 1940년 석방되었으며, 독소전쟁 발발 후 국방위원회 레이더 위원회 부위원장으로서 소련 최초의 조기경보 레이더 체계를 구축했다. 1953년 국방차관에 올라 군수 전자공학과 컴퓨터 센터를 주도했고, 1959년 과학아카데미 사이버네틱스 과학위원회 의장을 맡아 스탈린 시기 '부르주아 사이비과학'으로 낙인찍혔던 사이버네틱스를 복권시키고 생체공학·구조언어학·인공지능 연구를 제도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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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8전함 체사레비치 항해사, 영국 잠수함 E8 연락장교 (제정 러시아 해군)
  • 1918–1922잠수함 판테라 항해사, 잠수함 리스·볼크·즈메야 함장 (붉은 함대); HMS 비토리아 격침 (1919)
  • 1925–1937해군공병학교 교관, 무선연구소 설립 → 해군통신·원격기계연구소장 (NIMIST)
  • 1937–1940체포, NKVD 특별설계국(샤라슈카)에서 군 통신체계 개발; 증거불충분 석방
  • 1943–1944전기공업 부인민위원; 전연방 레이더 과학연구소 창설·초대 소장
  • 1943–1947국방위원회 레이더 위원회 부위원장 (위원장: 말렌코프)
  • 1953–1957소련 국방차관
  • 1953–1955과학아카데미 무선공학·전자공학연구소 초대 소장
  • 1959–1979과학아카데미 사이버네틱스 과학위원회 의장

야니스 에두아르도비치 칼른베르진슈

Ян Эдуардович Калнберзинь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라트비아 1893–1986 ○ 자연사

소비에트 라트비아의 창립자이자 발트 3국 최장기 집권 공화당 제1서기

1939년 라트비아 당국에 체포되어 리가 중앙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1940년 6월 소련군 진주 후 사면으로 석방되자마자 라트비아 공산당 제1서기로 호출되었다. 지하운동가에서 소비에트 공화국 창립 지도자로의 전환은 불과 며칠 사이에 이루어졌다.

라트비아 출신 볼셰비키로, 1940년부터 1959년까지 라트비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를 지내며 소비에트 라트비아의 창립과 제도화를 주도했다.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917년 입당, 붉은 라트비아 소총병으로 내전에 참전했으며 이후 라트비아 지하운동과 모스크바 유학을 오갔다. 1940년 소련군 진주 후 리가 형무소에서 석방되어 곧바로 공화국 당 제1서기로 임명되었고, 전후 집단화와 공업화를 통해 라트비아의 소비에트 체제 편입을 총괄했다. 1957년 CPSU 정치국 후보위원에 올랐으나 1959년 라트비아 민족공산주의자 숙청 때 불충분한 대응을 이유로 제1서기에서 물러났다. 이후 1970년까지 라트비아 SSR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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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라트비아 사회민주당(볼셰비키) 입당
  • 1919–1920적군 라트비아 소총병으로 남부전선에서 내전 참전
  • 1923–1933서방 소수민족 공산대학 및 붉은교수양성소에서 수학
  • 1925–1939라트비아 내 지하 공산주의 운동 활동, 수차례 체포·투옥
  • 1940–1959라트비아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1940–1951라트비아 공산당 리가 시위원회 제1서기 (겸임)
  • 1952–1971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57–1961CPSU 중앙위 정치국(간부회) 후보위원
  • 1959–1970라트비아 SSR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 소련 최고회의 간부회 부의장 겸임

바실리 세르게예비치 넴치노프

Василий Сергеевич Немчино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894–1964 ○ 자연사

수리경제학으로 계획의 과학화를 꿈꾼 학술 조직자

1948년 8월 VASKhNIL 총회. "염색체 유전 이론은 인류 과학의 황금 기금에 들어갔다"고 말한 넴치노프에게 누군가 "사임하시오!"라고 외쳤다. 그가 답했다. "아마도 사임해야겠지요. 나는 내 자리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다음날 그는 정말 해임되었다. 전체 회의장에서 리센코에 맞선 유일한 공개 연설이었다.

소련 수리경제학파의 창시자. 1917년 모스크바 상업대학 졸업 후 1920년대 농촌 계급구조 연구로 주목받았다. 1948년 VASKhNIL 8월 총회에서 리센코의 유전학 탄압에 맞서 유일하게 공개 반대 연설을 했고, 다음날 티미랴제프 농업대학 학장직에서 해임되었다. 1955년 '300인의 편지'에 서명했다. 1958년 소련 최초의 경제-수학 연구실험실을 조직, 1963년 중앙경제수학연구소(TsEMI)로 발전시켰다. 스탈린상(1946)·레닌상(1965) 수상. 칸토로비치·리베르만과 함께 해빙기 경제개혁 논의의 지적 삼각축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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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펜자현 그라보보 마을에서 출생
  • 1917모스크바 상업대학 경제학부 졸업
  • 1917–1922첼랴빈스크 현 젬스트보 통계국장
  • 1923–1926우랄주 통계청장 (스베르들롭스크)
  • 1926–1934소련 중앙통계국·고스플란 인민경제회계 이사국 위원
  • 1940–1948티미랴제프 모스크바 농업대학 학장
  • 1946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경제·통계)
  • 1948VASKhNIL 총회 리센코 반대 연설 — 다음날 학장직 해임
  • 1949–1963소련 과학아카데미 생산력연구회의(SOPS) 의장
  • 1953–1962과학아카데미 상임위원·경제·철학·법학부 학술서기
  • 1958소련 최초의 경제-수학 연구실험실 창설
  • 1962–1964모스크바대학 경제분석 수리방법 학과 창설·학과장
  • 1963중앙경제수학연구소(TsEMI) 창설, 학술지 창간
  • 1964모스크바에서 사망, 노보데비치 묘지 안장

니키타 세르게예비치 흐루쇼프

Никита Сергеевич Хрущёв
당 최고 지도자 소련 러시아 1894–1971 ↓ 실각 1964

관 뚜껑을 연 사람 — 그리고 침대에서 죽은 첫 지도자

1956년 11월 18일, 폴란드 대사관 리셉션에서 서방 대사들을 향해 — 「역사는 우리 편이다. 우리가 당신들을 묻어버릴 것이다!」 열두 NATO 국가 대사와 이스라엘 대사가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스탈린의 궁정에서 광대 역까지 견디며 살아남았고, 1956년 비밀연설로 관 뚜껑을 열었다. 헝가리를 진압했고, 쿠바에서 물러서 세계를 구했으며, 그 후퇴의 값으로 1964년 동료들에게 해임당했다. 실각 후 이렇게 말했다고 전한다: 「그들이 나를 총살이 아니라 표결로 보낼 수 있었다는 것, 그것이 나의 업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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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38모스크바 당 제1서기, 지하철 건설
  • 1938–49우크라이나 당 제1서기
  • 1942–43스탈린그라드 전선 군사위원
  • 1953–64당 제1서기
  • 1954–56처녀지 개간, 비밀연설
  • 1957「반당 그룹」 격퇴
  • 1961제22차 당대회, 스탈린 시신을 묘소에서 이장
  • 1964해임, 연금 생활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 오파린

Александр Иванович Опарин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비에트 러시아 1894–1980 ○ 자연사

원시 수프에서 생명의 기원을 탐구한 소비에트 생화학자

"살아 있는 유기체와 무생명 물질 사이에는 근본적 차이가 없다." — 1922년, 훗날 『생명의 기원』으로 출판된 초기 논고에서.

소비에트 생화학의 제도적 기초를 닦은 생화학자이자 과학행정가이다. 1924년 지구상 생명이 무생물적 화학 진화를 통해 발생했다는 '원시 수프' 가설을 제창하여 생명기원 연구의 패러다임을 열었고, 이는 훗날 밀러-유리 실험으로 이어졌다. 1935년 알렉세이 바흐와 함께 소련 과학아카데미 생화학연구소를 창설하고 1946년부터 34년간 소장으로서 소비에트 생화학의 중심 축을 이끌었다. 1970년 국제생명기원연구학회(ISSOL) 초대 회장으로서 이 분야의 국제적 제도화에도 기여했으나, 한편으로 리센코와 레페신스카야의 유사과학을 지지하여 과학과 정치의 긴장을 자신의 경력 속에 각인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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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모스크바국립대학교 물리수학부 자연과학과 졸업
  • 1925–1942모스크바국립대학교 생화학 강사·교수
  • 1935A. N. 바흐와 함께 소련 과학아카데미 생화학연구소 공동 창설
  • 1935–1946바흐 생화학연구소 부소장
  • 1939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 1942–1960모스크바국립대학교 식물생화학과장
  • 1946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아카데미크)
  • 1946–1980바흐 생화학연구소 소장
  • 1948–1955소련 과학아카데미 생물학부 아카데미크-서기
  • 1951–1958전연방 '즈나니예' 협회 회장
  • 1970–1977국제생명기원연구학회(ISSOL) 초대 회장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불가닌

Никола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Булганин
정부 수반 소련 러시아 1895–1975 ↓ 실각 1958

군복을 입은 총리, 흐루쇼프에게 밀려나다

1941년 서부전선, 독일 폭격기들이 머리 위로 모스크바를 향해 날아가자 불가닌은 안절부절못하며 외쳤다. "왜 저것들을 격추하지 않는 거요?" 지도를 보던 주코프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 "진정하십시오,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여기서 격추하면 아군 진지를 폭격할 테니, 후방의 담당 부대가 처리하게 두는 게 낫습니다."

체카 출신 행정가로 모스크바 시장과 공화국 총리를 거쳐 스탈린의 신임을 얻었다. 전쟁 중 주코프와 함께 복무했고, 종전 후 민간인 최초의 국방장관으로 1,100만 대군의 평시 전환을 주관했다. 군사 전략가가 아니라 충실한 집행자로서 원수 계급을 받은 인물이다.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와 'B&K' 2인 체제를 이루어 해빙기 외교의 얼굴이 되었고, 1955년 총리로서 유고·인도·영국을 방문했다. 그러나 1957년 반당 그룹 사태에서 흐루쇼프에게 등을 돌렸다가 패배한 뒤 총리직과 원수 계급을 모두 빼앗겼다. 독자적 권력 기반 없이 충성만으로 버틴 실무형 인물의 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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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s모스크바 시 행정과 국가은행에서 성장한 행정 관료
  • 1944–1947국가방위위원회와 군 행정에서 전시 관리자로 활동
  • 1947–1949국방부 장관, 전후 군 조직 재편에 관여
  • 1953–1955국방장관, 스탈린 사후 집단지도부의 군사 담당 축
  • 1955–1958각료회의 의장, 흐루쇼프와 함께 말렌코프 이후 정부 운영
  • 1957–1958반당그룹 패배 뒤 흐루쇼프에게 밀려 총리직 상실

아나스타스 이바노비치 미코얀

Анастас Иванович Микоян
국가원수 소련 아르메니아 1895–1978 ○ 자연사

소련의 식탁을 만든 사람. 그리고 「일리치에서 일리치까지」의 협상가

1942년 11월 6일 오후, 붉은 광장 로브노예 메스토. 탈영병이 스탈린의 차로 오인해 미코얀의 정부 차량에 세 발을 쐈다. 그는 한 점 상처 없이 걸어나왔다.

반세기 동안 소련의 먹고 사는 일을 관장한 실무의 거장. 식품공업인민위원으로서 1936년 두 달간 미국의 공장들을 시찰하고 돌아와 통조림·소시지·냉동식품 산업과 대량생산 아이스크림을 이식했고(「미코얀 커틀릿」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있다) 이후 수십 년간 대외무역과 소비재 공급을 맡았다. 정치에서는 1956년 헝가리 무력 개입에 거의 홀로 반대했고, 쿠바 위기 뒷수습으로 아바나에서 카스트로를 3주간 설득했다. 「일리치(레닌)에서 일리치(브레즈네프)까지」 최고 지도부를 통과하고 은퇴를 「허락받은」 드문 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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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30대외·국내상업인민위원, 30대의 최연소 인민위원
  • 1934–38식품공업인민위원, 1936년 미국 시찰, 통조림·냉동식품·대량생산 아이스크림 도입
  • 1938–49대외무역인민위원, 전시 렌드리스 수령 총괄
  • 1953–64무역·소비재 담당 부총리, 흐루쇼프의 해빙 지원
  • 1956/1962헝가리 개입 반대, 아바나에서 카스트로 설득
  • 1964–65최고소비에트 간부회의 의장(명목상 국가원수), 이후 은퇴

루드비크 스보보다

Ludvík Svoboda
사회주의권 지도자 체코 체코 1895–1979 ○ 자연사

두 차례 세계대전을 치른 국민영웅에서 프라하의 봄의 뜻밖의 보루가 된 군인 대통령

1968년 8월 모스크바에서 브레즈네프가 '노동자-농민 정부'를 세우라 요구하자, 스보보다는 두브체크와 개혁파 지도부를 석방하지 않으면 내 머리에 총알을 박겠다고 응수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에서 탈영해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에 합류한 1차대전 참전자로, 2차대전에서는 소련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을 조직해 동부전선을 누비며 국민영웅으로 떠올랐다. 1948년 국방장관으로서 '군대는 인민을 향해 진군하지 않을 것'이라 선언하며 공산당의 2월 쿠데타를 방조했으나, 곧 숙청당해 1950년대를 수감과 은둔으로 보냈다. 1968년 3월 두브체크의 추천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어 프라하의 봄 개혁에 동의했고, 8월 바르샤바조약군 침공 직후 모스크바에서 브레즈네프 앞에서 권총 자살을 위협하며 납치된 개혁파 지도부의 석방을 이끌어냈다. 이후 정상화 국면에서 신문 검열에 협력하고 두브체크 교체를 방조하는 등 소극적 순응으로 일관하다 1975년 헌법 조항으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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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20체코슬로바키아 군단: 즈보로프·바흐마치 전투, 시베리아 철수
  • 1921–1939체코슬로바키아군 장교; 뮌헨 위기 당시 대대장
  • 1939–1945폴란드·소련에서 체코슬로바키아군 편성; 제1군단장으로 키예프·두클라 해방
  • 1945–1950체코슬로바키아 국방장관
  • 1950–1951부총리 겸 체육위원장으로 전보
  • 1951–1954숙청: 체포·수감 후 석방, 고향 협동조합에서 노동
  • 1954–1959클레멘트 고트발트 군사대학 총장
  • 1968–1975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임레 너지

Nagy Imre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헝가리 헝가리 1896–1958 ✕ 처형

13일의 총리

1958년 6월 비공개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뒤 사면을 거부하며 말했다. "유일한 위안은 언젠가 헝가리 민족과 국제 노동계급이 나에 대한 이 중대한 혐의를 벗겨 주리라는 확신이다."

스탈린 사후 헝가리 '새 노선'을 주도한 개혁 공산주의자. 1956년 봉기 때 총리로 복귀해 다당제·중립·바르샤바조약 탈퇴를 선언했다. 소련에 체포돼 58년 처형, 89년 재매장은 체제 전환의 상징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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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21러시아군 포로, 적군 가담, 볼셰비키 입당
  • 1930–44모스크바 망명, 코민테른 농업 연구
  • 1945–46농업장관, 토지개혁 집행
  • 1953–55총리, 「새 노선」: 수용소 해산, 농민 부담 경감
  • 1955실각·출당
  • 1956.10–11봉기의 총리, 다당제·중립 선언
  • 1958/1989비밀 재판 후 처형, 1989년 영웅광장 재매장

안나 미하일로브나 판크라토바

Анна Михайловна Панкратова
이론가 소련 러시아 1897–1957 ○ 자연사

스탈린 사후 역사학의 탈스탈린화를 주도한 노동계급사 권위자: 소련 최초 여성 역사학 아카데미크

1953년 『역사의 제문제』 주필이 된 판크라토바는 스탈린의 『단기 강좌』 도식을 공개 토론에 부치며 역사학의 탈스탈린화를 추진했다. 1957년 3월 중앙위 결정은 그녀의 노선을 '자유주의와 부르주아 객관주의'로 규탄하고 사실상 해임했다.

소비에트 노동계급사와 혁명운동사 연구의 최고 권위자로, 약 200편의 저작을 남겼다. 소련 역사학 분야 최초의 여성 정회원(아카데미크)이자, 카자흐스탄사의 첫 종합적 집필을 지도했다. 스탈린 사후 『역사의 제문제』 주필로서 「소련 공산당사 단기 강좌」의 도식적 서사를 재검토하고 탈스탈린화를 주도했으나, 1957년 중앙위로부터 '자유주의와 부르주아 객관주의'라는 비판을 받고 실질적으로 해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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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내전기 오데사 유격대 활동
  • 1922–1925붉은 교수양성소 수학
  • 1926–1939스베르들로프 공산대학 · 레닌 정치군사아카데미 · 모스크바 국립대 등에서 교편
  • 1939소련 과학아카데미 역사연구소 연구원
  • 1942–1949『카자흐 SSR사』(1949) 집필 지도 — 소련 최초의 공화국 통사
  • 1952제19차 당대회에서 CPSU 중앙위원으로 선출
  • 1953–1957잡지 『역사의 제문제』(Вопросы истории) 주필
  • 1955–1957소련 역사가 전국위원회 의장

미하일 알렉세예비치 샬린

Михаил Алексеевич Шалин
군사 · 국방 소련 러시아 1897–1970 ○ 자연사

스탈린-흐루쇼프 이행기 정보총국(GRU)을 지휘한 참모, 판문점 정전 전 중국인민지원군 고문단장

1근위전차군 사령관 카투코프는 이렇게 회고했다: "샬린은 비정상적으로 일벌레였고, 정확하고 페달틱할 만큼 꼼꼼한 참모였다. 언제 사령부에 들여다봐도 그는 항상 책상 앞이었다. 민머리를 쓰다듬으며 지도 위에서 무언가를 궁리하고 있었다."

오렌부르크 농민 출신으로 교원양성소를 나온 뒤 제정군 소위, 내전기 적군 중대·대대장을 거쳐 소련군 정보총국장까지 오른 상장. 1근위전차군 참모장으로 쿠르스크에서 베를린까지 주요 공세를 기획했고, 종전 후 군사외교아카데미 원장을 지냈다. 1951–1952년 한국전쟁에 파견되어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의 수석 군사고문으로 복무했다. 1952–1956년과 1957–1958년 두 차례 GRU 국장을 지내며 스탈린 말기부터 흐루쇼프 집권 초까지 소련 군사정보를 총괄했고, 1954년에는 주코프 원수가 서방과 접촉해 쿠데타를 모의한다는 보고를 올려 군부 내 긴장을 부채질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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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918제정군 105보병예비연대, 빌나 군사학교 졸업 후 소위 임관, 17시베리아소총예비연대 중대장
  • 1918–1921적군 자원입대, 공산당 입당, 내전 종군 — 오르스크 연대 중대·대대장, 여단장 대리,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및 크론시타트 진압 참가
  • 1922–1931오르스크 현·튜멘 군관구 병무위원, '비스트렐' 과정 수료, 바시키르 자치공화국 영토관구 국장
  • 1931–1936제13소총군단 부참모장, 프룬제 사관학교 동방학부 졸업
  • 1936–1939정보총국(Razvedupr): 일본 주재, 제2(동방)과 과장 대리, 정보지휘관 중앙학교장, 제5국 부국장 대리
  • 1940–1941제16군 참모장 — 스몰렌스크 방어전 참가
  • 1941–1943제22군 참모장 — 모스크바 전투, 르제프 전투
  • 1943–1946제1전차군·제1근위전차군 참모장 — 쿠르스크, 르보프-산도미에시, 비스와-오데르, 베를린 공세
  • 1946–1949군사외교아카데미 원장
  • 1949–1951GRU 제1국장 겸 부국장
  • 1951–1952GRU 제1부국장 겸 한국전쟁 파견 — 중국인민지원군 고문단장
  • 1952–1956GRU 국장 (제1차)
  • 1956–1957GRU 제1부국장 (쉬테멘코 체제)
  • 1957–1958GRU 국장 (제2차)
  • 1958–1960국방부 감찰장군단 군사고문, 이후 질병으로 퇴역

블라디미르 바실리예비치 쿠라소프

Владимир Васильевич Курасов
사회주의권 지도자 소비에트 러시아인 1897–1973 ○ 자연사

참모의 예술로 1발트전선군을 설계한 소비에트 군사 지성

1941년 12월, 바투틴이 작전과장 레드뇨프 대령의 즉결 처형을 명령했을 때 — 독일군이 사단 방어선을 뚫었는데 그가 잠들어 있었다는 이유로 — 쿠라소프는 바투틴의 머리 위로 모스크바에 직접 보고하여 총살 명령을 철회시켰다.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호에서 적군의 해군 파견대 지휘관을 거쳐 대장까지 오른 소비에트 군사 엘리트다. 위대한 조국전쟁에서 제4충격군과 칼리닌·제1발트전선군의 참모장으로 복무하며 스몰렌스크, 벨라루스, 발트 작전을 설계했고, 특히 토로페츠-홀름 공세에서 한 달도 안 되어 300㎞를 진격하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전후에는 중부군집단 총사령관과 참모본부 군사과학 부문 부참모장을 지내며 소비에트 작전술의 이론적 토대를 다듬었고, 두 차례에 걸쳐 참모본부 아카데미 원장으로서 전후 세대의 고급 지휘관들을 양성했다. 1963년부터 바르샤바 조약군 통합사령부 대표로 동독 주둔 국가인민군을 지도하며 냉전기 동맹 체제의 작전적 일관성을 확보하는 데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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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러시아 제국군에 징집, 준위 학교 졸업 후 서부전선에서 소대장 복무
  • 1918붉은 군대 입대, 발트함대 해군 파견대 지휘관으로 페트로그라드 방어전 참가
  • 1921–1932군사교육기관 교관 복무,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후 벨라루스 군관구 참모
  • 1936–1940참모본부 아카데미 수석 전술교관 → 작전국 부국장
  • 1941–1942제4충격군 참모장 → 사령관, 토로페츠-홀름 공세 지휘
  • 1943–1945칼리닌·제1발트전선군 참모장, 스몰렌스크·벨라루스·발트·동프로이센 작전 기획
  • 1946–1949중부군집단 총사령관 겸 주오스트리아 소련 최고위원
  • 1949–1956참모본부 아카데미 원장 (1차)
  • 1956–1961참모본부 부참모장 겸 군사과학국장
  • 1961–1963참모본부 아카데미 원장 (2차), 교수 직함 수여
  • 1963–1968바르샤바 조약군 통합사령부 대표, 동독 국가인민군 지도
  • 1968–1973국방부 총감찰단 감찰고문

옙세이 그리고리예비치 리베르만

Евсей Григорьевич Либерман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소련 러시아 1897–1981 ○ 심장마비

1965년 경제 개혁의 이론적 촉매

「사회에 이로운 것은 모든 기업에도 이로워야 한다」 — 1962년 《프라우다》 논문의 핵심 명제

소련의 경제학자. 1962년 9월 《프라우다》에 발표한 논문 「계획, 이윤, 프리미엄」으로 전연방 경제 토론을 촉발하여 1965년 코시긴 개혁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다. 이윤 지표를 기업 평가의 핵심으로 삼고 '사회에 이로운 것이 개별 기업에도 이로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1920년대 소련 최초의 기계식 회계 스테이션을 창설했고, 1938년 조작된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1939년 말 복권되었다. 아내 레기나 고로비츠는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의 누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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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볼린현 슬라부타에서 산림영지 관리인의 아들로 출생
  • 1920키예프대학교 법학부 졸업
  • 1923–1929우크라이나 노동연구소 실습생, 할키우 공장에 소련 최초 기계식 회계 스테이션 창설
  • 1930–1941하리코프 공학경제연구소 기계제조업 조직·계획 주임
  • 1938–1939NKVD에 간첩·테러 혐의로 체포, 15년형 선고 후 1939년 말 복권
  • 1941–1943키르기스 SSR 재무부 근무
  • 1947–1962하리코프 공학경제연구소 교수, 기계제조업 경제·계획 연구실 창설
  • 1956경제학 박사 (논문: 사회주의 기업의 수익성 제고 방안)
  • 1962《프라우다》에 「계획, 이윤, 프리미엄」 발표 — 전연방 개혁 논쟁 촉발
  • 1962–1981하리코프대학교 통계·회계학과 교수
  • 1981할키우에서 심장마비로 사망

알렉산드르 표도로비치 고르킨

Александр Фёдорович Горкин
국가보안 기관 소련 러시아 1897–1988 ○ 자연사

재활의 최고재판소장, 오렌부르크에서 살아남은 자

1957년 소련 최고재판소장에 취임한 고르킨 앞으로, 스탈린 시대에 총살된 옛 당원들의 명예회복 청원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 자신 오렌부르크에서 동료 전원이 숙청되는 것을 지켜본 사람이었다.

1916년 입당한 농민 출신 볼셰비키. 오렌부르크 주당 제1서기 시절 동료 전원이 숙청된 후, 1957년 소련 최고재판소장이 되어 15년간 사법적 재활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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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RSDRP(볼셰비키) 입당
  • 1917–19트베리 시소비에트 서기, 트베리 현집행위원장
  • 1919쿠르스크 현체카 간부, 펜자 현농촌부장
  • 1934–37오렌부르크 주당위 제1서기
  • 1937–38소련 중앙집행위원회 간부회 서기
  • 1938–53소련 최고소비에트 간부회 서기 (1953–56 부서기)
  • 1956–57소련 최고소비에트 간부회 서기 (재임)
  • 1957–72소련 최고재판소장
  • 1959–61CPSU 중앙감사위원회 의장

로디온 야코블레비치 말리놉스키

Родион Яковлевич Малиновский
군사 · 국방 소련 우크라이나 1898–1967 ○ 자연사

흐루쇼프 시대의 전쟁영웅 국방장관

스탈린그라드 전투 중, 모스크바의 승인을 기다리지 않고 독단으로 제2근위군을 멈춰 세워 만슈타인의 구원군을 요격했다. 이 결단이 코텔니코보 전투의 승리와 파울루스 6군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오데사 빈민가의 사생아로 태어나 열다섯 살에 1차대전에 뛰어들었고, 프랑스 전선과 스페인 내전을 거친 보기 드문 국제 이력의 군인이었다. 스탈린그라드 반격, 우크라이나 해방, 발칸 진격, 만주 작전까지 2차대전의 결정적 전역을 지휘하며 소련 최정상의 야전사령관으로 우뚝 섰다. 프랑스어·스페인어에 능통했던 유일한 소련 원수로, 10년간 국방장관으로서 핵·미사일 시대의 전략적 재편을 관리했고 당 지도부와의 긴장 속에서도 군의 전문성과 자율성을 지켜낸 전후 소련 군부의 중심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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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9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내전 참전, 적군 지휘관으로 성장
  • 1942–1943스탈린그라드 반격과 남부전선 작전에서 핵심 지휘관으로 부상
  • 1944–1945우크라이나·루마니아·헝가리·만주 작전 지휘
  • 1956헝가리 봉기 진압 국면에서 고위 군사지도부로 참여
  • 1957–1967국방장관, 핵·미사일 시대 소련군을 관리

마트베이 바실리예비치 자하로프

Матвей Васильевич Захаров
군사 · 국방 소련 러시아 1898–1972 ○ 자연사

전격전을 예견하고 오데사 군관구를 구한 참모, 냉전 소련군의 총참모장

1941년 6월 21일 밤, 오데사 군관구 참모장 자하로프는 흑해함대로부터 적의 공격이 임박했다는 정보를 받았다. 상부 승인 없이, 그는 관구 전 부대에 전투경계태세 돌입과 항공기의 야전비행장 분산을 명령했다. 새벽에 전쟁이 터졌을 때, 오데사 군관구는 붕괴를 면한 유일한 국경 군관구였다.

트베리 농민 출신으로 1917년 겨울궁전 습격에 참가한 적위대원에서 소련군 총참모장까지 오른 원수. 코네프·말리놉스키 휘하 참모장으로 코르순-셰브첸콥스키 포위전과 야시-키시네프 공세 등 주요 작전을 기획했다. 1960년대 총참모장으로 핵·미사일 시대 소련군의 전략 현대화를 지휘했으며, 흐루쇼프와의 충돌로 1963년 경질되었다가 그가 실각하자 복귀했다. 군사이론 교수이자 다수의 전략 저작을 남긴 학자-군인으로, 1917년 혁명에 참가한 마지막 현역 원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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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적위대원으로 겨울궁전 습격, 볼셰비키 입당
  • 1918–1921적군 포병 지휘관으로 내전 종군, 차리친 전투 참가
  • 1924–1937프룬제 사관학교·참모아카데미 졸업, 벨라루스 군관구 작전과장
  • 1938–1940적군 참모부 부참모장
  • 1940–1941오데사 군관구 참모장 — 6월 21일 자발적 경계태세 명령
  • 1941–1944칼리닌·스텝·제2우크라이나 전선군 참모장, 주요 공세 기획
  • 1945자바이칼 전선군 참모장, 만주 전략작전 기획
  • 1945–1949고등군사아카데미 원장
  • 1949–1952참모부 부참모장 겸 정보총국(GRU) 국장
  • 1953–1957레닌그라드 군관구 사령관
  • 1957–1960주독 소련군 총사령관
  • 1960–1963소련군 총참모장 — 흐루쇼프와 충돌 후 경질
  • 1964–1971총참모장 재임명, 냉전기 전략 현대화 지휘

표트르 니콜라예비치 포스펠로프

Пётр Николаевич Поспелов
이념 · 선전 소련 러시아 1898–1979 ○ 자연사

스탈린의 전기를 쓰고, 그 신화를 해체한 역사가

1953년 스탈린 장례식에서 포스펠로프는 주체할 수 없이 흐느꼈다. 베리야가 그의 어깨를 흔들며 "무슨 일이야? 그만해!"라고 외쳤다. 불과 3년 뒤, 바로 그가 흐루쇼프 비밀연설의 기초가 된 포스펠로프 위원회 보고서를 작성했다.

스탈린 공식 전기를 집필하고 『프라우다』를 9년간 이끈 당 역사가. 흐루쇼프 시기에는 포스펠로프 위원회 보고서로 스탈린 신화 해체의 기초를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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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918볼셰비키 입당, 트베리에서 노동조합·당 활동, 첼랴빈스크에서 백군 점령 하 지하운동, '죽음의 열차'로 알렉산드롭스크 중앙형무소 수감 후 탈출, 시베리아 파르티잔 활동
  • 1924–1930중앙위 선전선동부 교관, 붉은 교수양성소 경제학부 졸업
  • 1931–1939잡지 『볼셰비키』 및 『프라우다』 편집, 당통제위원회 출판 담당, 「볼셰비키 전연방공산당사 단기강좌」 집필 참여, 아지트프로프 부책임자 (1937–1939), 제1부책임자 (1939–1940)
  • 1940–1949『프라우다』 주필, 전시 스탈린상 수상금을 국방기금에 기부, 증보판 「이오시프 스탈린 약전」 편찬 참여
  • 1949–1952, 1961–1967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 소장 (두 차례), 다권본 「소비에트 연방 대조국전쟁사」·「레닌 전기」 편집 주도
  • 1953–1960중앙위 서기, '포스펠로프 위원회' 위원장으로 스탈린 시대 대량 탄압 조사 — 보고서는 1956년 흐루쇼프 비밀연설의 기초가 됨
  • 1957–1961중앙위 간부위원회 후보위원, 1959년 제21차 당 대회에서 말렌코프 반당 그룹 비판 연설
  • 1972–1979소련 과학아카데미 역사학부 아카데미크 서기 대행, 1973년 사하로프 규탄 서한 서명, 말년에 『볼셰비키』 지를 통해 트로츠키주의에 맞선 스탈린의 역할을 옹호하는 복합적 입장 견지

알렉세이 블라디미로비치 스네고프

Алексей Владимирович Снегов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소련 러시아계 1898–1989 ○ 자연사

굴라크 생존자로서 탈스탈린화를 밀어붙인 구볼셰비키

미코얀이 소치행을 권했지만, 스네고프는 당원증을 돌려받기 전에는 떠날 수 없다고 버텼다.

알렉세이 스네고프는 초기 소비에트 당 사업을 거친 구볼셰비키였지만, 대숙청의 조작된 혐의로 15년 넘게 굴라크에 갇혔다. 1954년 석방과 복권 뒤 그는 수감 경험을 바탕으로 니키타 흐루쇼프아나스타스 미코얀에게 스탈린 체제의 폭력과 재활 문제를 알리는 자문자가 되었다. 올가 샤투노프스카야와 함께 희생자들의 복권을 추진하고 제20차 당대회에서 스탈린과 개인숭배를 비판하도록 흐루쇼프를 설득했다. 이후에도 더 깊은 탈스탈린화를 주장하다가 감시와 비판을 받았으며, 1967년 잠시 당에서 제명되었다가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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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볼셰비키파 가입
  • 1918–1921빈니차·포돌리아 지하 당조직과 포돌리아 губер니아 당위원회 책임서기
  • 1930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
  • 1931–1937자캅카스·이르쿠츠크·첼랴빈스크·차파옙스크·무르만스크의 당·정치 부문 간부
  • 1937–1954대숙청으로 체포되어 굴라크와 유형지에서 15년 이상 복역
  • 1954–1960석방·복권 후 내무부 굴라크 정치부장
  • 1956제20차 당대회에서 스탈린 비판과 희생자 복권을 촉구
  • 1967잠시 당에서 제명되었으나 곧 복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