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1985

해빙과 정체의 사람들 445명

스탈린의 관 뚜껑을 연 해빙과 그것을 다시 덮은 정체 사이에서, 우주와 개혁과 반체제의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

예핌 파블로비치 슬라프스키

Ефим Павлович Славский
중공업 · 군수공업 소련 러시아 1898–1991 ○ 자연사

29년간 소련 핵무기·원자력 산업 전체를 지휘한 '위대한 예핌'

사고가 날 때마다 슬라프스키는 가장 먼저 위험 구역으로 들어갔다. 훗날 의사들이 그의 누적 피폭량을 추산해보니 약 1,500뢴트겐, 치사량의 세 배였다. 동료들은 그를 '위대한 예핌'이라 불렀다.

도네츠크 탄광 소년 광부 출신으로 남북전쟁에 참전한 후 엔지니어가 된 슬라프스키는, 알루미늄 공장장을 거쳐 1946년 원자폭탄 계획에 투입되었다. 첼랴빈스크-40 비밀 복합체 책임자로서 1949년 첫 핵실험의 플루토늄을 생산했고, 수소폭탄과 차르봄바 개발을 지휘하며 세 차례 사회주의 노동 영웅이 되었다. 1957년부터 29년간 중형기계공업 장관으로 핵무기·원자력 산업 전체를 총괄했고, 소련의 폐쇄 원자력 도시들과 거의 모든 원전을 세웠다. 1,500뢴트겐의 방사선을 견디며 현장을 지킨 거구의 지휘관으로 '위대한 예핌'이라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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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1928도네츠크 탄광 소년 광부, 적위대·제1기병군 복무 후 제대
  • 1933–1941모스크바 비철금속연구소 졸업, 엘렉트로친크 공장장, 드네프르 알루미늄 공장장
  • 1941–1945우랄 알루미늄 공장장, 전시 알루미늄 생산 총괄로 레닌 훈장 3회
  • 1946–1953제1총국 부국장 겸 콤비나트 817호(마야크) 책임자, 첫 원자폭탄 플루토늄 생산
  • 1953–1957중형기계공업 제1차관, 수소폭탄 개발 참여
  • 1957–1986중형기계공업 장관(29년), 차르봄바·핵잠수함·원전·폐쇄 원자력 도시 건설 총괄
  • 1986체르노빌 사고 수습 지휘 후 강제 퇴임

알렉산데르 자바츠키

Aleksander Zawadzki
사회주의권 지도자 폴란드 폴란드계 1899–1964 ○ 자연사

전후 폴란드 국가기구를 이끈 공산주의자

비에루트의 장례식에서 그는 “비에루트는 죽었지만, 단결된 우리 당은 살아 있다”고 선언했다.

알렉산데르 자바츠키는 노동자 출신으로 공산주의 운동에 들어가 전후 폴란드의 당·군·국가기구를 구축한 지도자였다. 그는 소련에서 조직된 폴란드 군대의 정치사업과 국내 권력 재편을 잇는 역할을 맡았고, 실레지아 행정 책임자로서 전후 복구와 주민 보호 문제에도 관여했다. 국가평의회 의장으로서 비에루트 사후 당 지도부 경쟁에서 오하프와 맞선 유력 후보였지만 제6차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패했으며, 이후에도 체제의 보수적 안정 노선을 대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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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1939폴란드 공산당 활동가, 투옥
  • 1943–1945소련 편성 폴란드군 정치장교, 정치교육 담당 부사령관
  • 1944–1948폴란드 노동자당 정치국 위원
  • 1945–1948실레지아-돔브로바 주지사
  • 1948–1954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중앙위원회 서기, 정치국 위원
  • 1949–1952각료회의 부의장
  • 1952–1964폴란드 국가평의회 의장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네스메야노프

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Несмеяно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899–1980 ○ 자연사

원소유기화학을 창시한 과학아카데미 총재

말렌코프가 과학아카데미 총재직을 제안하자, 네스메야노프는 채식주의 신념, 체포된 형제의 행방불명, 당원 자격을 이유로 사양하려 했다. 말렌코프는 모든 이유를 묵살했다. '이미 결정된 일이었다.'

네스메야노프는 유기금속화학의 세계적 권위자로, '네스메야노프 반응'으로 알려진 디아조법을 개발하고 원소유기화학이라는 새 학문 분야를 창시했다. 모스크바대학 총장(1948–1951) 시절 레닌 언덕의 상징적 캠퍼스 건설을 주도했고, 1951년 S. I. 바빌로프 사후 과학아카데미 총재가 되어 10년간 소련 기초과학의 방향을 총괄했다. 핵·우주 개발이 가속화되던 시기 연구기관 간 협력 체계를 정비했으며, 총재직 사임 후 인공식품 합성 연구에 전념해 블랙 캐비어 합성법을 확립했다. 생애 후반까지 학문 조직가로서 소련 과학제도의 중추를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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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54유기화학연구소 소장 · AN SSSR
  • 1943화학 부문 정회원(아카데미크) · AN SSSR
  • 1946–1951화학 부문 아카데미크-서기 · AN SSSR
  • 1948–1951모스크바 국립대학 총장
  • 1951–1961과학아카데미 총재 · AN SSSR
  • 1954–1980원소유기화합물연구소(INEOS) 창설 소장
  • 1950–1962소련 최고회의 대의원
민족문제 · 연방 관리 소련 리투아니아 1899–1980 ○ 자연사

리투아니아 소비에트화의 얼굴

1939년 10월 빌뉴스 반환 경축식에서 팔레츠키스는 연단에 올라 스메토나 대통령의 퇴진을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그 발언으로 강제노동수용소에 수감된 그는 불과 8개월 뒤 소련의 후원 아래 리투아니아의 새 지도자가 되어 돌아왔다.

리투아니아의 소비에트화 과정에서 지도자가 되었고, 이후 민족소비에트 의장을 지냈다. 발트 공화국 대표제의 상징적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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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s–1930s리투아니아 좌파 언론인·정치인으로 활동
  • 1940소련의 리투아니아 병합 과정에서 인민정부 수반이 됨
  • 1940–1967리투아니아 SSR 최고소비에트 간부회 의장, 공화국의 공식 얼굴
  • 1966–1970민족소비에트 의장, 발트 공화국 대표제의 상징
  • 1970 이후명예직과 회고의 영역으로 물러남

아르비트 야노비치 펠셰

Арвид Янович Пельше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 1899–1983 ○ 자연사

브레즈네프 시대의 당 규율 수호자, 라트비아 출신 정치국원

1918년 모스크바 레온티옙스키 골목에서 체카 청사 폭발 사건이 발생했을 때, 당시 체카 직원이었던 펠셰는 현장에서 부상자 가운데 포함되어 있었다. 혁명 초기 비밀경찰 본부를 뒤흔든 이 폭발 사건은 그가 이후 소비에트 권력의 중심으로 나아가는 경로에 자리한 초기 위기 중 하나였다.

라트비아 출신 볼셰비키. 브레즈네프 시대 정치국원 겸 당통제위원장으로 17년간 당 규율을 총괄했다. 비러시아계로 소련 최고지도부에 오른 드문 인물이며, 라트비아 공산당 제1서기로 공화국 산업화를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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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라트비아 사회민주당(볼셰비키) 입당
  • 19176차 당대회 대의원, 10월혁명 참가
  • 1918모스크바 체카 직원
  • 1919–1929적군 및 해군에서 정치·교육 업무
  • 1941–1959라트비아 공산당 중앙위 선전·선동 담당 서기
  • 1959–1966라트비아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1966–1983정치국 정위원 겸 당통제위원회 의장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수르코프

Алексе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Сурков
문화 · 문학예술 통제 소련 러시아 1899–1983 ○ 자연사

〈젬랸카〉를 썼고 파스테르나크 탄압을 지휘한 작가동맹 집행자

1941년 11월 이스트라 전선에서 포화 속 외투가 파편에 찢긴 채 탈출한 수르코프는 말했다. '연대 본부에서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죽음까지는 네 걸음.' 그 말이 〈젬랸카〉가 되었다.

러시아 소비에트 시인이자 문학 관료로, 소비에트 작가동맹 제1서기(1953–1959)를 지냈다. 2차대전의 상징적 노래 〈젬랸카〉의 작가이자 두 차례 스탈린상 수상자로서, 《닥터 지바고》 사건 당시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에 대한 공식 탄압을 주도하고 1957년 이탈리아로 건너가 출판사 펠트리넬리에게 출판 중단을 압박했다. 경직된 문학정치의 집행자이면서도 1937년 빈곤에 시달리던 오시프 만델슈탐의 주머니에 몰래 300루블을 넣어주고, 즈다노프 시기 안나 아흐마토바를 은밀히 후원했던 모순적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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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2붉은 군대 복무, 내전 참전
  • 1926–1928『세베르니 콤소몰레츠』 편집장
  • 1934–1939『리테라투르나야 우초바』 부편집장, 문학대학 강사
  • 1940–1941『노비 미르』 편집장
  • 1941–1945종군기자, 전선 신문 특파원
  • 1944–1946『리테라투르나야 가제타』 편집장
  • 1949–1953『오고뇨크』 편집장
  • 1953–1959소비에트 작가동맹 제1서기
  • 1956–1966CPSU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보리스 알렉산드로비치 차긴

Борис Александрович Чагин
이론가 소련 러시아인 1899–1987 ○ 노환으로 사망

숙청당한 동료들 사이에서 홀로 살아남은 소련 마르크스주의 철학사 연구의 대부

1930년대 레닌그라드 철학연구소에서 차긴을 제외한 모든 연구원이 체포되었고, 대다수는 총살되었다.

레닌그라드 철학연구소 동료들이 스탈린 숙청으로 전원 처형될 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이후 게오르기 플레하노프 연구의 최고 권위자로 그의 철학 저작 선집 편집을 주도했고, 이 공로로 플레하노프상을 수상했으며 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으로 선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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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1921남북전쟁 및 크론슈타트 봉기 진압 참전, RKP(b) 입당
  • 1922–1931교편 생활 시작, 붉은교수양성소 철학과 졸업
  • 1930s붉은군대 교육기관·레닌그라드 공산아카데미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 강의
  • 1940–1941레닌그라드대학 철학학부 학장
  • 1946철학박사 학위 취득
  • 1956–1967레닌그라드대학 철학사 교수주임
  • 1960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선출
  • 1963–1987소련 과학아카데미 레닌그라드 철학부문 선임연구원·주임

게오르기 니콜라예비치 자루빈

Георгий Николаевич Зарубин
외교 소련 러시아 1900–1958 ○ 자연사

캐나다·영국·미국, 냉전기 서방 3대 수도에서 소련을 대표한 외교관

1958년 1월 27일 워싱턴에서 자루빈은 윌리엄 레이시와 함께 문서에 서명했다. 소련과 미국이 영화, 음악, 과학, 스포츠 교류를 정부 간 협정으로 제도화한 것은 양국 관계 사상 처음이었다.

소련 외교관으로, 1944년부터 1958년까지 캐나다, 영국, 미국 대사를 차례로 역임하며 초기 냉전기 소련 외교의 핵심적인 대서양 창구였다. 1958년 1월 27일 윌리엄 레이시와 함께 「미소 문화·기술·교육 교류 협정」(레이시-자루빈 협정)에 서명하여 양국 간 최초의 정부 간 문화교류 틀을 수립했으며, 이 협정은 소련 붕괴 시까지 연장되며 볼쇼이 발레단과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등 냉전 문화외교의 상징적 장면을 만들어냈다. 1952년부터 1958년까지 CPSU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을 지냈으며, 말년에는 외무부 차관으로 임명되어 모스크바로 복귀한 지 10개월 만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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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4붉은 군대 복무
  • 1919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31–1935산업아카데미 원장
  • 1935–1938경공업인민위원부 교육기관 총국장
  • 1938–1940뉴욕 세계박람회 소련관 부총감독·예술위원회 의장
  • 1940–1941외무인민위원부 영사국장
  • 1941–1944외무인민위원부 중남미국장
  • 1944–1946주캐나다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46–1952주영국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52–1958주미국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52–1958CPSU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 1958소련 외무부 차관

콘스탄틴 안드레예비치 베르시닌

Константин Андреевич Вершинин
군사 · 국방 소비에트 러시아인 1900–1973 ○ 자연사

소련 공군을 제트·핵 시대로 이끈 두 번의 공군 총사령관

쿠반 공중전에서 베르시닌은 항공자산을 분산 배속하던 기존 교리를 깨고, 전선 항공대를 결정적 축선에 집중시켰다. 에이스 포크리시킨은 베르시닌이 주재한 전투기 조종사 전군 회의를 '전쟁 2년 동안 전례가 없던 일'이라고 회고했다.

소련 공군 총사령관을 두 차례(1946~1949, 1957~1969) 역임하며 항공전력을 제트기와 핵무장 체제로 재편한 군사 지도자다. 빈농 출신으로 1919년 붉은 군대에 입대해 보병 장교로 내전을 겪었고, 1930년 항공대로 강제 전속된 후 급속히 성장했다. 독소전쟁에서는 제4항공군을 지휘하며 쿠반 공중전에서 전선 항공대를 결정적 축선에 집중시키는 혁신적 운용으로 승리를 이끌었고, 벨라루스 공세에서의 공로로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전후에는 공군 총사령관으로서 제트기 전환과 핵폭격기 부대 창설을 진두지휘했으나, 1949년 돌연 강등되어 바쿠 방공군 사령관으로 좌천되었다가 1957년 흐루쇼프에 의해 복귀해 1969년까지 재임하며 전략항공 역량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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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2남부전선 공군 사령관
  • 1942–1943제4항공군 사령관
  • 1943북캅카스전선 공군 사령관
  • 1943–1945제4항공군 사령관 (재임)
  • 1946–1949소련 공군 총사령관 · 국방부 차관
  • 1953–1954소련 방공군 사령관
  • 1957–1969소련 공군 총사령관 · 국방부 차관 (재임)
  • 1969–1973국방부 감찰총감단 감찰관

미하일 클라프디예비치 티혼라보프

Михаил Клавдиевич Тихонраво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900–1974 ○ 자연사

패킷 로켓으로 우주 가는 길을 연 이론적 개척자

1948년 여름, 학술회의에서 '1000킬로미터가 로켓 사거리의 한계'라는 통념을 깨고 패킷 로켓으로 인공위성을 쏠 수 있다고 발표하자 회의장은 조소와 야유로 들끓었다. 9년 후 스푸트니크 1호가 궤도에 올랐다.

소련 우주개발의 이론적 아버지. 1933년 최초의 소련 액체연료 로켓 GIRD-09를 설계하고, 1948년 여러 로켓을 묶은 '패킷' 방식으로 궤도 도달이 가능함을 수학적으로 입증했다. 당시엔 조롱받았으나 코롤료프의 지지로 연구를 이어 스푸트니크·보스토크·루나 계획의 설계 기반을 닦았다. 1956년 OKB-1 제9설계국장을 맡아 인공위성과 유인우주선 설계를 총괄했으며, 라틴어에 능통한 고전적 교양인으로 '코스모넛'이라는 용어를 처음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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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1933GIRD 여단장, 최초의 소련 액체연료 로켓 GIRD-09 설계
  • 1934–1938반응연구소(RNII) 부서장, 액체연료 로켓·상층대기 연구
  • 1940–1943로켓 요격기 '302' 및 카추샤 발사체 설계팀 지휘
  • 1946–1956NII-4 부소장 겸 과학고문, '티혼라보프 그룹' 지도 — 패킷 로켓 궤도 도달 이론 입증(1948)
  • 1956–1974OKB-1 제9설계국장, 스푸트니크·보스토크·루나·행성 탐사선 설계 총괄
  • 1962–1974모스크바 항공대(MAI) 교수

니콜라이 데먀노비치 프수르체프

Николай Демьянович Псурцев
경제 운영 소비에트 러시아인 1900–1980 ○ 자연사

모스크바 전투 통신을 책임지고 27년간 소련 통신 인프라를 총괄한 최장수 체신장관

1945년 9월 2일, 스탈린은 대일전 승리 명령에서 '프수르체프 휘하 통신부대'를 특별히 지목했다. 3년 뒤 스탈린이 그를 체신장관으로 직접 지명했다.

니콜라이 프수르체프는 1948년부터 1975년까지 27년간 소련 체신장관을 지내며 전화·전신·우편·방송 인프라를 총괄한 최장수 장관이다. 키예프의 러시아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0대에 전신기사가 되었고, 내전기에는 제9군과 제12군의 통신을 책임졌다. 위대한 조국전쟁 당시 서부전선 통신부장으로서 벨로루시아·스몰렌스크·모스크바 전투에서 사령부 통신망을 유지했으며, 1945년 대일전에서는 극동 소련군 총사령부 통신을 지휘했다. 체신장관 시절 모스크바-블라디보스토크 케이블 간선과 세계 최초의 위성 TV 방송망 '오르비타'를 건설하고 국제위성통신기구 '인테르스푸트니크' 창설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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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1붉은 군대 통신병, 제9군 및 제12군 통신국 위원
  • 1924고등군사통신학교 졸업, 시베리아 군관구 통신 부책임자
  • 1927–1930제10독립통신연대장 겸 정치위원
  • 1934군사전자공학아카데미 졸업, 적군 통신국 보좌역
  • 1936–1937국방인민위원부 통신소장
  • 1937–1939체신인민위원부 시외전화전신국장, 극동지방 전권대표
  • 1939–1940소련-핀란드 전쟁: 북서전선 통신부장
  • 1940–1941적군 통신국 부국장
  • 1941–1944서부방면 및 서부전선 통신부장 (벨로루시아·스몰렌스크·모스크바·르제프)
  • 1944–1946적군 통신총국 제1부국장
  • 1945대일전: 극동 소련군 총사령부 통신국장
  • 1946–1948참모본부 통신부장
  • 1947–1948소련 체신장관 제1차관
  • 1948–1975소련 체신장관 (27년 최장수 재임)
  • 1961–1976CPSU 중앙위원회 위원 후보
  • 1975–1980연방급 개인연금 수급자

미하일 알렉세예비치 라브렌티예프

Михаил Алексеевич Лаврентье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900–1980 ○ 자연사

시베리아에 아카뎀고로도크를 세운 수학자이자 폭발물 응용의 개척자

대학생들 앞에서 푸앵카레가 항해 과목을 면제받은 이야기를 꺼내며 "우리도 몇 과목은 면제해줘도 되지 않겠나"라고 말하자, 강의실 전체가 "공산당사!"를 외쳤다.

소련 수학자·유체역학자로서 1957년부터 1975년까지 시베리아 과학아카데미 분원의 창립 의장을 지내며 노보시비르스크의 과학도시 아카뎀고로도크를 건설했다. 준등각사상 이론과 유체역학에서 근본적 성과를 냈고, 제2차 세계대전 중 폭발 물리학 연구로 성형작약탄 이론에 기여했으며 이후 통제폭파를 건설에 응용하는 분야를 개척했다. 1953~1955년 아르자마스-16 핵무기 연구소의 부과학책임자를 맡아 원자폭탄 개발에 참여했고, 소련 최초의 전자계산기 개발과 모스크바 물리기술연구소 설립을 주도했다. 흐루쇼프 해빙기 과학의 동진(東進)을 상징하는 인물로, 20개 연구소와 대학이 하나의 숲속 공동체를 이루는 모델을 현실화한 과학 행정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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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41, 1945–1948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수학연구소장
  • 1945–1948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부총재
  • 1950–1953정밀기계·계산기술연구소장
  • 1953–1955KB-11(아르자마스-16) 부과학책임자
  • 1957–1975소련 과학아카데미 시베리아 분원 창립 의장
  • 1957–1976소련 과학아카데미 부총재
  • 1961–1976CPSU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 1959–1966노보시비르스크 국립대학 교수

니콜라이 그리고리예비치 이그나토프

Николай Григорьевич Игнатов
국가원수 소련 러시아 1901–1966 ○ 자연사

흐루쇼프를 구하고, 흐루쇼프를 무너뜨린 크렘린의 두 얼굴

1964년 가을, 이그나토프가 자신의 다차에서 고주파 전화로 흐루쇼프 축출 음모를 논의하는 동안, 그의 경호원이 창가에 서서 모든 대화를 들었다. 경호원이 흐루쇼프의 아들 세르게이에게 경고했지만 흐루쇼프는 웃어넘겼다. «그 애송이들이 나한테 맞서? 말도 안 돼!»

목수 아들로 태어나 체카-OGPU에서 11년 복무하고 대숙청 시기 쿠이비셰프 당 책임자로 급부상했다. 1957년 6월 전원회의에서 중앙위원들을 조직해 반당그룹의 흐루쇼프 축출 시도를 저지했고, 그 대가로 중앙위 서기와 당 간부국(프레지디움) 정위원이 되었다. 이후 흐루쇼프에게 밀려나자 1964년 음모의 핵심 조직자로 돌아서 흐루쇼프 축출을 주도했다. 러시아공화국 최고소비에트 간부회 의장으로서 해빙기 최고 권력투쟁의 양면에 모두 깊이 관여한 역설적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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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21적위대 및 붉은군대 복무
  • 1921–1932체카-OGPU에서 돈 지역 및 중앙아시아 근무, 바스마치 진압 참여
  • 1937–1940쿠이비셰프 주당위 제1서기, 포스티셰프 공격으로 부상
  • 1943–1948오룔 주당위 제1서기, 전시 파르티잔 운동 지휘
  • 1949–1952크라스노다르 변강당위 제1서기
  • 1952–1953CPSU 중앙위 서기, 간부국(프레지디움) 후보위원, 소련 조달장관
  • 1955–1957보로네시·고리키 주당위 제1서기, '고리키식 주택건설' 추진
  • 1957–1960CPSU 중앙위 서기, 간부국(프레지디움) 정위원
  • 1959, 1962–1966러시아공화국 최고소비에트 간부회 의장
  • 1960–1962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조달위원회 의장
  • 1964흐루쇼프 축출 음모의 핵심 조직자로 활동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오르가노프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Органов
국가원수 소비에트 러시아인 1901–1982 ○ 자연사

NKVD 트로이카에 이름을 올렸던 러시아 공화국 국가원수

1937년, 야로슬라블 주당 제2서기 대행이던 오르가노프는 NKVD 특별트로이카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 법정도, 변호도, 항소도 없는 세 사람의 서명이 곧 사형선고였다.

니콜라이 오르가노프는 1959년부터 1962년까지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RSFSR) 최고소비에트 상임위원회 의장을 지내며 명목상 러시아 공화국의 국가원수로 활동한 소련의 당·국가 관료이다.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925년 볼셰비키당에 입당한 후 프리모르스키와 크라스노야르스크 지역당 제1서기를 거쳐 당내에서 꾸준히 승진했다. 대숙청 시기인 1937년에는 NKVD 특별트로이카 위원으로 임명되어 약식재판과 즉결처형에 가담했으며, 이는 훗날 국가원수 자리에 오른 인물의 전력으로서 냉혹한 모순을 남겼다. 흐루쇼프 시기 말에는 불가리아 주재 소련 대사로 전출되었고, 이후 당 중앙위원회 산하 해외여행위원회 위원장을 끝으로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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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3붉은 군대 복무
  • 1924–1925유리예프-폴스키 현 콤소몰 위원회 서기
  • 1925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34–1937네코우스키 구당위원회 제1서기 (야로슬라블 주)
  • 1937–1938야로슬라블 주당위원회 제2서기 대행 · NKVD 특별트로이카 위원
  • 1943–1947프리모르스키 지방당위원회 제3서기 → 제2서기
  • 1947–1952프리모르스키 지방당위원회 제1서기
  • 1952–1958크라스노야르스크 지방당위원회 제1서기
  • 1952–1971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58–1959RSFSR 각료회의 부의장
  • 1959–1962RSFSR 최고소비에트 상임위원회 의장
  • 1961–1962RSFSR 담당 CPSU 중앙위원회 뷰로 위원
  • 1963–1967주불가리아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67–1973CPSU 중앙위원회 해외여행위원회 위원장
작가·예술가 체코슬로바키아 체코인 1901–1986 ○ 자연사

개혁의 순간마다 검열과 권력에 맞선 시인

1968년 9월 침공을 비판하며 그는 프라하에 들어온 첫 전차와 마지막 전차를 비교해 말했다.

야로슬라프 셰이페르트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시인이자 기자로, 프라하의 노동계급 문화와 아방가르드 시를 연결한 작가였다. 그는 1929년 공산당의 관료화와 스탈린주의적 전환에 항의해 당을 떠났지만 좌파적 사회 감각을 버리지 않았다. 1948년 이후 작가 탄압을 조사한 위원회를 이끌었고, 1968년 작가대회에서 검열 폐지와 문화적 개방을 뒷받침했으며, 침공 뒤에도 공개적으로 저항했다. 1984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지만 정상화 체제에서는 작품과 공적 발언이 제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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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첫 시집 『눈물의 도시』 출간,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입당
  • 1922–1929데베치실 창립에 참여, 공산주의 언론과 아방가르드 잡지 편집
  • 1929「일곱 작가 선언」 서명 뒤 공산당에서 제명
  • 1930–1948사회민주주의·노동조합 언론에서 기자와 문화 편집자로 활동
  • 1949–1956언론을 떠나 전업 작가가 되었고, 출판 제한을 겪음
  • 1956작가대회에서 불편한 작가들에 대한 문화정책을 비판
  • 1968–1970체코슬로바키아 작가연맹 의장, 뒤이어 체코 작가연맹 의장
  • 1984노벨 문학상 수상

바실리 세르게예비치 예멜랴노프

Василий Сергеевич Емельяно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901–1988 ○ 자연사

전시 탱크 장갑에서 평화적 원자력 외교까지 이끈 핵행정가

첫 원자폭탄 실험 후 방사능 낙진을 측정하기 위해 세미팔라틴스크에서 바람을 따라 동쪽으로 움직이며, 대중의 공황을 막기 위해 브루셀라증을 조사하는 의사 행세를 했다.

소련 원자력 프로그램의 핵심 행정가로, 군수 금속공학에서 출발해 핵무기 개발과 민간 원자력 이용을 잇는 제도적 가교 역할을 했다. 금속공학자로서 전쟁 중에는 T-34 전차의 주조 포탑 기술로 스탈린상을 받았고, 1945년 원자력 프로젝트에 투입되어 반니코프의 제1총국에서 과학기술 부문을 총괄했다. 1957년부터 원자력이용총국(글라바톰)을 지휘하며 소련의 평화적 원자력 정책과 IAEA 외교를 주도했고, 흐루쇼프 시기 국가원자력이용위원회 의장으로서 사회주의권 원자로 건설과 방사선 기술 보급을 진두지휘했다. 저서 『시간과 동지와 나 자신에 대하여』를 통해 스탈린의 의사결정 과정을 생생히 증언한 회고록 작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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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8–1931모스크바 광산아카데미 조교·중앙기계제조기술연구소 연구실장
  • 1932–1934독일 에센·베를린 크루프 공장 소련 중공업인민위원부 전권대표
  • 1935–1937첼랴빈스크 페로합금공장 기술이사
  • 1937–1939방위산업인민위원부 제7총국장 (장갑강)
  • 1940–1946소련 인민위원회의 표준화위원회 부의장·의장
  • 1946–1953제1총국 과학기술부장·부국장 (원자력 프로젝트)
  • 1953–1955중형기계공업부 과학기술국장
  • 1955–1957중형기계공업부 차관 (신기술 담당)
  • 1957–1960소련 각료회의 원자력이용총국(글라바톰) 국장 · IAEA 소련 상임대표
  • 1960–1962소련 각료회의 국가원자력이용위원회 의장
  • 1962–1965소련 각료회의 국가원자력이용위원회 부의장
  • 1966–1988소련 과학아카데미 군축과학문제위원회 의장

바실리 바실리예비치 쿠즈네초프

Василий Васильевич Кузнецов
국가원수 소련 러시아 1901–1990 ○ 자연사

세 번의 권력 공백기를 메운 임시 국가원수, 그로미코의 22년 1차관

1982년 11월 브레즈네프 사망 직후, 81세의 쿠즈네초프는 임시 국가원수로서 소련 국민에게 신년사를 낭독했다. 안드로포프체르넨코가 연이어 사망할 때마다 같은 역할을 반복하며 말년 소련 권력 이양의 얼굴이 되었다.

농민 출신의 금속공학자로 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과 노조 중앙평의회 의장을 거쳐 소련 외교의 실무 책임자가 되었다. 외무부 제1차관으로 22년간 쿠바 미사일 위기 비밀협상, 중소 국경교섭, 유엔 군축외교를 이끌었다. 1977년 최고회의 간부회 제1부의장이 된 후 브레즈네프·안드로포프·체르넨코 사망으로 이어진 세 차례의 권력 공백기마다 임시 국가원수를 지내며 말년 소련을 상징하는 원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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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1930마케옙카 제철소 연구기사·평로공장장
  • 1931–1933카네기공과대학 연수 (미국)
  • 1937–1940중공업인민위원부 기술국장·주임기사
  • 1940–1944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
  • 1944–1953전소비에트노조 중앙평의회 의장
  • 1953주중 소련 대사
  • 1955–1977소련 외무부 제1차관
  • 1977–1986최고회의 간부회 제1부의장

올가 그리고리예브나 샤투놉스카야

Ольга Григорьевна Шатуновская
작가·예술가 소련 아제르바이잔 1901–1990 ○ 자연사

스탈린의 범죄를 끝까지 추적한 흐루쇼프의 수석 조사관

「니키타 세르게예비치, 당신은 제가 인민의 적이 아님을 알고 계십니다.」 — 유형지에서 흐루쇼프에게 보낸 단 한 줄의 편지, 1954년

1916년 15세로 입당한 구볼셰비키. 흐루쇼프 시기 시베르니크 위원회 수석 조사관으로 키로프 암살·모스크바 재판·카틴 학살이 스탈린의 조작임을 64권으로 입증했다. 콜리마 8년을 견디고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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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5세로 RSDLP(b) 입당
  • 1918바쿠 코뮌에서 샤우먄 비서; 터키군에 사형 선고, 극적 사면
  • 1918–20자캅카스 지하운동, 레닌에게 밀서 전달
  • 1920–37바쿠·브랸스크·모스크바 당 간부, 모스크바 시당 조직부장, 중앙통제위원회 위원
  • 1937–46체포, 8년형 — 콜리마 수용소
  • 1949–54재체포, 무기한 유형 — 크라스노야르스크
  • 1956–62KPK 위원, 시베르니크 위원회 수석 조사관 — 키로프 암살·모스크바 재판·카틴 조작 규명
  • 1962스탈린의 오흐란카 협력 의혹 공개 요구, 흐루쇼프의 거부로 은퇴

표도르 바실리예비치 콘스탄티노프

Фёдор Васильевич Константинов
이념 · 선전 소련 러시아 1901–1991 ○ 자연사

『철학 백과사전』 주필이자 마르크스-레닌주의 철학 교과서의 설계자

「이건 그들에 대해 쓴 겁니까, 아니면 우리에 대해 쓴 겁니까?!」 — 레바다의 『철학 백과사전』 '파시즘' 표제어 원고에 친필로 남긴 결재 의견

해빙기 소련 철학의 공식 교리를 수호한 이념 관료. 5권 『철학 백과사전』 주필로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경계를 설정했고, 동료들 사이에선 흔들림 없는 '스탈린주의자'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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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니제고로드 현 노보숄키 마을의 농민 가정에서 출생
  • 1917–192010월혁명·시베리아 내전 참전, 1918년 RKP(b) 입당
  • 1932적색교수양성소 철학과 졸업, IMEL 선임연구원(1932~1933)
  • 1933–1941공산아카데미 철학연구소 학술비서(1933~1935), 『책과 프롤레타리아 혁명』 주필 겸 『프라우다』 부장(1935~1941), 1935년 교수·철학박사
  • 1941–1945중앙위 선전선동국 강사(1941~1942), 자원입대해 제84소총군단 전리품 부서장, 중령, 적성훈장 2회
  • 1945–1954철학연구소 선임연구원·부소장·당위 비서(1945~1951), 『철학의 제문제』 주필(1952~1954), 모스크바대학 철학부 주임(1953~1954), 사회과학아카데미 총장(1954~1955)
  • 1955–1958중앙위 선전선동부장(1956년부터 연방공화국 담당), 중앙위원 후보(1956~1961)
  • 1958–1967『콤무니스트』 주필(1958~1962), 철학연구소장(1962~1967), 과학아카데미 정회원(1964)
  • 1960–19705권짜리 『철학 백과사전』 주필 — 소련 철학의 공식 지식 총서 총괄
  • 1967–1991과학아카데미 철학·법학부 학술비서(1967~1975), 소련철학회 창립 회장(1971~1987), 『지식』협회 부회장(1968~1987), 노환으로 사망, 트로예쿠로보 묘지 안장

미트로판 이바노비치 네델린

Митрофан Иванович Неделин
군사 · 국방 소련 러시아 1902–1960 ✕ R-16 발사대 폭발로 사망

전략로켓군을 창설하고 R-7 개발을 주도한 포병총사령관, 발사대에서 산화하다

폭발이 가라앉은 뒤 녹아내린 금성훈장, 어깨 견장 한 짝, 그리고 폭발 순간에 멈춰버린 손목시계만이 남았다.

소련 전략로켓군(RVSN) 초대 총사령관으로 R-7 ICBM 개발을 군사적으로 주도하여 스푸트니크 발사와 초기 우주 경쟁을 가능케 한 군사 지휘관이다. 포병 장교로 스페인 내전, 겨울전쟁, 독소전쟁을 거쳐 1945년 소비에트연방영웅이 되었다. 1959년 포병총사령관으로 진급한 뒤 신설된 전략로켓군을 처음부터 조직했다. 1960년 10월 바이코누르에서 R-16 시험발사 중 2단 엔진 오점화로 폭발이 일어나 현장에서 사망했으며, 참사는 소련 붕괴까지 공식 부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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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붉은군대 자원입대, 러시아 내전 참전
  • 1937–1939스페인 내전 공화국측 지원병
  • 1941–1943제18군·제37군 포병사령관
  • 1943–1945제3우크라이나전선군 포병사령관
  • 1945소비에트연방영웅
  • 1950–1952, 1953–1955소련군 포병총사령관
  • 1955–1959국방차관 (특수무장·로켓기술)
  • 1959–1960전략로켓군(RVSN) 초대 총사령관

주마바이 샤야흐메토비치 샤야흐메토프

Жумабай Шаяхметович Шаяхметов
민족문제 · 연방 관리 소련 카자흐스탄 1902–1966 ↓ 실각 1954

카자흐 SSR 출신 민족소비에트 의장

1946년 여름 투시노 항공 퍼레이드에서 스탈린이 참석자들에게 "동지들, 이것이 주마바이 샤야흐메토프 — 카자흐스탄 최초의 민족 서기다"라고 소개하며 그를 "동방의 독수리"라 불렀다.

카자흐 당 지도부에서 올라와 민족소비에트 의장을 맡았다. 스탈린 말기와 흐루쇼프 초의 공화국 대표제 라인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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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s카자흐 공화국 NKVD와 당 행정에서 성장
  • 1946–1954카자흐 공산당 제1서기, 스탈린 말기 공화국 지도자
  • 1950–1954민족소비에트 의장, 카자흐 대표로 공식 연방 라인에 진입
  • 1954처녀지 개간과 흐루쇼프 노선 속에서 실각
  • 1966중앙권력 복귀 없이 사망

니콜라이 일리치 카모프

Николай Ильич Камов
중공업 · 군수공업 소련 러시아 1902–1973 ○ 자연사

동축반전로터를 고집한 소련 해군 항공의 설계자

카모프와 스크르진스키는 자신들이 만든 새로운 비행 기계를 가리키는 말로 "베르탈료트(вертолёт)"를 제안했다. 회전익기를 뜻하는 이 러시아어 단어는 그들의 설계와 함께 탄생했다.

소련의 항공기 설계자로, 동축반전로터 헬리콥터의 선구자이자 카모프 설계국(OKB Kamov)의 창립자. 1929년 니콜라이 스크르진스키와 함께 소련 최초의 오토자이로 KASKR-1을 제작했고, 1940년 헬리콥터 전문 설계국을 맡아 Ka-8, Ka-15, Ka-25 함상헬기, Ka-27, Ka-50 "블랙샤크" 공격헬기 등 Ka 계열기를 개발하여 소련 해군 항공대의 중추를 구축했다. 단일로터 방식이 지배하던 시대에 기술적으로 더 까다로운 동축반전로터를 고집했고, 그 선택은 소형·고기동 기체로 결실을 맺었다. 1972년 사회주의노동영웅 및 소련 국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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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톰스크 공과대학 기계공학과 졸업, 최연소 졸업생·기술자로 기록
  • 1924–27도브롤료트에서 융커스 Ju-13 역설계 및 날개 개량
  • 1927–29그리고로비치 설계국, 이어 리샤르 설계국에서 해상항공기 설계
  • 1929스크르진스키와 소련 최초 오토자이로 KASKR-1 제작
  • 1931–39TsAGI 오토자이로 설계반장, A-7 정찰·포병교정 오토자이로 개발
  • 1940–73헬리콥터 설계국(OKB Kamov) 수석설계자 겸 국장
  • 1948–68Ka-8, Ka-10, Ka-15, Ka-18, Ka-25 함상헬기, Ka-22 винтокрыл, Ka-26
  • 1972사회주의노동영웅, 소련 국가상 수상

스타니스와프 길랴로비치 포프와프스키

Станислав Гилярович Поплавский
군사 · 국방 소비에트 연방 폴란드인 1902–1973 ○ 모스크바 사망

포즈난 봉기를 진압한 폴란드계 소비에트 장군

1956년 6월 28일 오후 2시 포즈난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보안국 청사 앞 상황을 장악하라고 명령했다.

우크라이나 포돌리아의 폴란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열여덟 살까지 글을 몰랐던 그는 붉은군대에 징집된 뒤 소비에트 장군으로 성장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폴란드 제1군을 지휘해 베를린 공방전을 치르고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받았다. 전후에도 폴란드군 최고 지휘부에 남아 소련의 감독 역할을 맡았으며, 1956년 6월 국방차관으로서 포즈난 봉기 진압 작전을 현장에서 지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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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붉은군대 징집, 병사로 복무
  • 1935–1938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 1944–1945폴란드 제1군 사령관, 베를린 공방전
  • 1945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
  • 1949–1956폴란드 국방성 차관
  • 1956포즈난 6월 봉기 진압 지휘
  • 1956–1963소련 국방성 복귀, 육군대장으로 퇴역

세르게이 알렉세예비치 레베데프

Сергей Алексеевич Лебеде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인 1902–1974 ○ 자연사

MESM·BESM의 창설자, 소련 컴퓨터 산업의 아버지

1970년대 초 IBM 호환 노선이 소련 컴퓨터 산업을 장악해가자, 이미 병상에 있던 레베데프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그들의 길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길을 가야 한다."

소련 컴퓨터 공학의 창시자. 1951년 키예프 외곽 폐허 수도원에서 유럽 대륙 최초의 저장프로그램 전자계산기 MESM을 완성했고 1953년 BESM-1을 가동했다. 이후 20년간 ITMiVT 소장으로 BESM-6 등 15종의 컴퓨터를 개발했으며, 그의 기계들은 핵무기 계산과 우주비행 궤도 산출, 최초의 작전용 탄도미사일 요격 시스템을 떠받쳤다. 1953년 과학아카데미 최초의 '계산장치' 전공 정회원, 사회주의 노동영웅(1956), 레닌·스탈린·국가상을 받았다. IBM 호환 노선에 맞서 독자 병렬 아키텍처를 고수했고 제자들은 엘브루스 슈퍼컴퓨터로 계승했다. 사후 IEEE 컴퓨터 파이어니어 상(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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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8–1946전연방 전기공학연구소(AEI) 연구원·자동화부장, 모스크바전력공학대학 교수
  • 1946–1950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전력공학연구소장 → 전기공학연구소장
  • 1948–1951MESM(소형 전자계산기) 개발 총괄 — 소련 및 유럽대륙 최초의 저장프로그램 전자계산기 완성
  • 1950–1953정밀기계·컴퓨터공학 연구소(ITMiVT) 연구실장, BESM-1 개발 완료
  • 1953–1973ITMiVT 소장 — BESM-2, M-20, BESM-6 등 15종 컴퓨터 개발 지휘
  • 1953–1974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계산장치 전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