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1985

해빙과 정체의 사람들 445명

스탈린의 관 뚜껑을 연 해빙과 그것을 다시 덮은 정체 사이에서, 우주와 개혁과 반체제의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

예브게니 표도로비치 코제브니코프

Евгений Фёдорович Кожевников
경제 운영 소련 러시아 1906–1979 ○ 자연사

소련 운송건설부를 창설해 흐루쇼프-브레즈네프 시대 내내 이끈 초대 장관

동료들의 회고에 따르면, 코제브니코프는 “국가 자금은 아껴야 한다”며 관리 기구를 팽창시키는 대신 기존 간부들의 적재적소 배치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고, 열 개 건설부처 중 분기 계획까지 유일하게 완수하는 부처를 만들었다.

철도기사 출신으로 소련 운송건설부(민트란스스트로이)의 초대 장관을 1954년부터 1975년까지 20년 넘게 역임하며, 철도·항만·고속도로·지하철·공항 등 소련 산업팽창의 물적 기반을 총괄 건설한 행정가다. 그가 이끈 운송건설부는 카자흐스탄 처녀지 개간 철도망, 볼가-발트 수로, 바니노-홀름스크 해상철도 연락선 등 굵직한 국가 프로젝트를 수행했고 바이칼-아무르 철도(BAM) 착공을 주도했다. 몽골·시리아·이라크·베트남 등 해외 운송 인프라 건설에서도 소련의 기술적 진출을 진두지휘했다. 예하 트러스트로 직결되는 2단계 관리 체계를 도입해 열 개 연방 건설부처 중 가장 안정적인 계획 달성률을 기록했으며, 1975년 퇴임과 함께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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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7중앙아시아철도 관리국 궤도부 기사 (아시가바트)
  • 1928–1930투르크시브 철도 구간장·공사구역 부책임자 (알마아타)
  • 1930–1936쿠즈네츠크 제철 콤비나트 신선건설 기술지도자 → 젬젤도르스트로이 책임자 → 쿠즈네츠크 기관차·차량 공장 건설 총책임자
  • 1936–1940니켈스트로이·오르메디스트로이·유주랄탸시스트로이 주임기사 (남우랄)
  • 1941–1943유주랄탸시스트로이 트러스트 주임기사 → 관리자 — 방산공장 건설
  • 1943–1944주미 소련 정부구매위원회 전문위원
  • 1944–1945소련 건설인민위원부 특수건설총국장
  • 1945–1949국가계획위원회 건설산업 계획국장 → 국가계획위 부의장
  • 1949–1953소련 각료회의 연료·운수 담당 부의장 보좌관 → 각료회의 건설부장
  • 1954소련 건설부 제1차관
  • 1954–1963소련 운송건설부 장관 (초대)
  • 1963–1965소련 국가운송건설생산위원회 의장 – 소련 장관
  • 1965–1975소련 운송건설부 장관 (재임)

이반 알렉산드로비치 그리슈마노프

Иван Александрович Гришманов
경제 운영 소련 러시아 1906–1979 ○ 자연사

소련 건축자재 산업을 14년간 이끈 공사판 출신 장관

1924년, 열여덟 살의 이반 그리슈마노프는 레닌그라드 보로프스키 시멘트 공장에서 목수로 일을 시작했다. 반세기 뒤, 그가 장관으로 이끄는 소련의 시멘트 산업은 연간 1억 2,700만 톤을 생산하며 세계 1위에 올랐다.

트베리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열여덟에 망치를 잡은 그리슈마노프는, 레닌그라드 건설현장의 목수·십장·기사장을 거쳐 전후 도시재건을 지휘한 실무형 관료였다. 흐루쇼프의 대규모 주택 프로그램이 본격화되던 1956년부터 당 중앙위 건설부장으로 소련 전역의 건설정책을 조율했고, 이어 고스스트로이 의장으로 국가 건설 기준을 총괄했다. 브레즈네프 시기 내내 건설자재공업 장관(1965–1979)으로 재임하며 시멘트 생산량을 5,440만 톤 끌어올려 소련을 세계 1위 시멘트 생산국으로 만들었다. 그가 구축한 대규모 시멘트 공장망은 흐루쇼프카에서 브레즈네프카까지 소련의 도시 풍경을 물리적으로 떠받친 산업 토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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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6–1949레닌그라드 건설현장의 공사감독·기사장·트러스트 관리자
  • 1944–1949프스코프스트로이 등 전후 복구 트러스트 책임자
  • 1949–1955레닌그라드 키로프 구집행위원장 → 시집행위 제1부위원장
  • 1956–1961CPSU 중앙위원회 건설부장
  • 1961–1962고스스트로이 소련 의장
  • 1963–1965고스플란 산하 건설자재공업 국가위원회 의장
  • 1965–1979소련 건설자재공업 장관

레오니트 일리치 브레즈네프

Леонид Ильич Брежнев
당 최고 지도자 소련 러시아 1906–1982 ○ 자연사

흔들지 않는 것을 통치로 삼은 사람

1979년 10월 7일, 동독 30주년 기념식. 브레즈네프가 호네커와 나눈 '사회주의 형제의 키스'는 베를린 장벽의 가장 유명한 벽화가 되었다.

흐루쇼프를 밀어낸 「안정」의 얼굴. 프라하와 아프가니스탄에 군대를 보냈고, 국내에서는 아무것도 흔들지 않았다: 간부들은 종신이 되었고, 문제들은 이월되었다. 말년의 훈장 수집벽과 노쇠는 농담의 소재가 되었지만, 그 18년의 청구서는 후임들에게 넘어갔다. 그의 장례식은 정체(застой) 그 자체의 장례식으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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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52몰다비아 당 제1서기
  • 1954–56카자흐스탄에서 처녀지 개간 지휘
  • 1964.10흐루쇼프 해임을 주도하고 제1서기로
  • 1968체코슬로바키아 침공, 브레즈네프 독트린
  • 1972–79데탕트: SALT I·II, 헬싱키 협정
  • 1977신헌법 제정, 국가원수 겸임
  • 1979아프가니스탄 침공 승인

블라디미르 니키포로비치 말린

Владимир Никифорович Малин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인 1906–1982 ○ 자연사

당 중앙 문서 흐름을 11년간 통제한 총무부장

1964년 10월 흐루쇼프 실각 직후 브레즈네프 보좌관들이 총무부를 우회해 문서를 유통시키자 말린은 일기에 썼다: "이중 지휘계통이 생겨서 어느 문서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게 된다."

1954년부터 1965년까지 CPSU 중앙위 총무부장으로 정치국과 중앙위를 오가는 모든 문서를 통제한 당 기구의 핵심 관리자였다. 전쟁 시기에는 중앙 빨치산운동 사령부 정치국장 겸 부사령관으로 점령지 파르티잔 활동을 조직했고, 벨라루스 공산당 제3서기를 지냈다. 쿠바 미사일 위기와 흐루쇼프 실각 직후 정치국 회의에서 직접 속기록을 작성한 그의 노트는 소련 지도부 의사결정의 내부를 보여주는 사료다. 1965년 브레즈네프가 측근 체르넨코를 후임에 앉히며 아카데미 사회과학원 총장으로 전출된 것은 브레즈네프식 후원 인사의 전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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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33레닌그라드 공산대학 졸업
  • 1938–1939벨라루스 공산당 모길료프 주당위 제1서기
  • 1939–1941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 선전선동 서기
  • 1942–1944중앙 빨치산운동 사령부 정치국장 겸 부사령관
  • 1943–1947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 제3서기
  • 1949–1952레닌그라드 시당위원회 서기
  • 1952–1954CPSU 중앙위원회 인스펙터
  • 1954–1965CPSU 중앙위 총무부장
  • 1965–1970CPSU 중앙위 부설 아카데미 사회과학원 총장

아나톨리 이바노비치 코스토우소프

Анатолий Иванович Костоусов
중공업 · 군수공업 소련 러시아인 1906–1985 ○ 자연사

소련 공작기계 공업을 세계 1위로 이끈 최장수 공업장관

1972년, 12년 전 거래가 무산되었던 미국 브라이언트사의 정밀 연삭기가 마침내 소련에 도착하자, 코스토우소프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12년 동안 이 기계들을 기다려왔다.'

아나톨리 코스토우소프는 소련에서 가장 오래 재임한 공업 장관 중 하나로, 1949년부터 1980년까지 공작기계·공구공업을 이끌며 소련을 세계 최대 공작기계 생산국으로 올려놓은 생산 행정가였다. 농민 출신으로 콤소몰에서 시작해 모스크바 공작기계대학을 졸업하고 레닌그라드·크라스노다르·노보시비르스크 공장에서 엔지니어로 성장했다. 그의 지휘 아래 소련은 1962년부터 금속절삭 공작기계 생산량 세계 1위를 차지했고, 1970년대에는 CNC 공작기계의 독자 생산 체계를 갖추었다. 1972년 미국 브라이언트사의 정밀 연삭기를 12년 만에 수입하게 되자 '12년 동안 이 기계를 기다렸다'고 말한 일화는 기술 격차 속에서도 국산화를 밀어붙인 그의 집요함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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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1939레닌그라드 스베르들로프 공작기계공장: 기사 → 부감독
  • 1939–1946크라스노다르 세딘 공장 → 노보시비르스크 중공작기계공장 주임기사
  • 1946–1949소련 공작기계공업 차관
  • 1949–1953소련 공작기계공업 장관
  • 1954–1957소련 공작기계·공구공업 장관
  • 1957–1959모스크바주 국민경제회의 의장
  • 1959–1965국가 자동화·기계제조 위원회 의장 → 국가계획위 부속 기계제조위 의장
  • 1965–1980소련 공작기계·공구공업 장관

로만 브란트슈테터

Roman Brandstaetter
작가·예술가 폴란드 폴란드계 1906–1987 ○ 자연사

유대교와 가톨릭의 기억을 잇고 광장의 기억을 조직한 작가

로만 브란트슈테터는 폴란드어로 시와 소설, 희곡을 쓰고 히브리어 성서와 셰익스피어를 번역한 폴란드 작가였다.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나 시온주의와 동화의 문제를 탐구했으며, 로마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뒤에도 유대 전통과의 긴장을 문학의 중심에 남겼다. 전후에는 포즈난에 정착해 성서적 상상력과 역사적 기억을 결합한 작품을 썼다. 1980년에는 포즈난 1956년 6월 희생자 기념비 건립 사회위원회 위원장으로서 노동자 봉기의 기억을 공공 기념물로 만드는 조직 작업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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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시와 평론으로 문단 데뷔
  • 1929–1932파리 유학, 아담 미츠키에비치 연구로 철학박사 취득
  • 1933–1935시온주의 폴란드어 잡지 《오피니아》 문예부장
  • 1940–1946팔레스타인에서 폴란드 전신통신사 근무
  • 1947–1948로마 주재 폴란드 대사관 문화참사관
  • 1948–1950포즈난 폴란드극장과 대극장 문예 책임자
  • 1960–1987포즈난에서 전업 작가로 활동, 성서 번역과 《나사렛 예수》 집필
  • 1980포즈난 1956년 6월 기념비 건립 사회위원회 위원장

스테판 스타셰프스키

Stefan Staszewski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폴란드 폴란드 1906–1989 ○ 자연사

흐루쇼프 비밀연설을 수만 부 찍어내 당의 통제 밖으로 퍼뜨린 바르샤바 당위원회 개혁파 제1서기

1956년 3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휴식 시간, 흐루쇼프에게 스탈린의 반유대주의를 따져 묻자 흐루쇼프는 손을 떨며 스탈린이 소련 유대인에 대한 포그롬을 계획하고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바르샤바 유대인 상인 가정에서 태어나 14세에 공산청년운동에 가담했고, 국제레닌학교에서 수학한 후 폴란드 지하당 활동과 소련 체류를 오갔다. 1938년 NKVD에 체포되어 콜리마 수용소에서 8년을 보낸 뒤 1945년 폴란드로 돌아와 선전·언론·농업 부문에서 스탈린주의 노선을 집행했다. 1955년 바르샤바 당위원회 제1서기가 된 후 제20차 당대회를 계기로 개혁파로 전환, 당원들이 비밀연설을 학습하도록 제안하고 1만 5천여 부의 비공식 인쇄본을 찍어내 연설문이 폐쇄된 당 문서에서 세계적 문서가 되는 결정적 통로를 열었다. 폴란드 10월 후 고무우카와 충돌해 1957년 해임되고 1968년 반유대 캠페인으로 축출되었으며, 이후 반체제 운동을 지지하며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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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청년공산주의동맹(KZMP) 가입
  • 1926–1929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 수학
  • 1930–1932폴란드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국 활동
  • 1938–1945NKVD에 체포, 콜리마 강제수용소 8년형
  • 1945–1948카토비체주 선전비서, 『트리부나 로보트니차』 편집장
  • 1948–1954PZPR 중앙위원회 출판·언론부장
  • 1955–1957PZPR 바르샤바 위원회 제1서기
  • 1957–1958폴란드 통신사(PAP) 사장
  • 1968반유대 캠페인으로 PZPR에서 축출
사회주의권 지도자 폴란드 폴란드 1906–1989 ○ 사망

흐루쇼프 비밀연설을 전사회적으로 확산시킨 1956년 폴란드 해빙기의 과도기적 제1서기

1956년 10월, 흐루쇼프가 군사개입을 위협하자 오하프는 폴란드군을 바르샤바 방어태세에 배치하며 맞섰고, '이 상황에서 고무우카가 국가를 이끌 최선의 선택'이라고 소련 지도부에 말했다.

크라쿠프 출신의 폴란드 공산주의자로, 1929년 폴란드 공산당에 입당해 사나치아 정권하에서 6년 반을 정치범으로 복역했다. 1943년 소련에서 베를링군 정치위원으로 활약한 후 폴란드 노동자당 중앙위원, 공공행정부 장관, 국방차관, 정치국원을 지냈다. 1956년 3월 비에루트 사망 후 제1서기가 되어 흐루쇼프 비밀연설의 폴란드어 번역본을 전국 당 조직과 공공집회를 통해 유포했고, 수천 부가 바르샤바 시장에서 팔릴 정도로 확산시켜 비밀연설의 전세계적 유출을 촉발했다. 포즈난 봉기 진압을 승인했으나 10월에는 소련의 군사개입 위협에 맞서 폴란드의 주권을 지켰고, 이후 고무우카에게 권력을 넘긴 후 1968년 반유대 캠페인에 항의하며 모든 공직에서 사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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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폴란드 공산당(KPP) 입당
  • 1939바르샤바 방어전 참전 후 소련으로 이동
  • 1943베를링군 제1사단 정치위원, 레니노 전투 참전
  • 1944–1946PPR 중앙위원, 공공행정부 장관
  • 1949–1950국방차관 겸 군 정치총국장
  • 1956.3–10PZPR 제1서기, 흐루쇼프 비밀연설 대량 유포 결정
  • 1964–1968국가평의회 의장(국가원수)
  • 1968반유대 캠페인에 항의해 전직 사퇴

레오니트 표도로비치 일리초프

Леонид Фёдорович Ильичёв
이념 · 선전 소련 러시아 1906–1990 ○ 자연사

흐루쇼프의 수석 이데올로그: 프라우다와 이즈베스티야를 모두 편집하고 반종교 캠페인을 설계한 철학자

1952년, 스탈린은 정치국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프라우다 편집장 일리초프는 약하다. 그 일에는 너무 작다. 더 강한 사람을 임명하고, 이 사람은 좀 더 배우게 하라."

흐루쇼프 시대의 수석 이데올로그. 프라우다와 이즈베스티야 편집장을 지내며 반종교 캠페인을 설계하고 라디오 마야크를 창설했다. 이후 24년간 외무차관으로 중국과의 국경협상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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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북캅카스 공산대학 졸업
  • 1937적색교수양성소 졸업 (철학)
  • 1938–1944잡지 《볼셰비크》 책임비서
  • 1944–1948《이즈베스티야》 편집장
  • 1951–1952《프라우다》 편집장
  • 1953–1958소련 외무부 출판국장, 《메주두나로드나야 지즌》 편집장 겸임
  • 1958–1961CPSU 중앙위 선전선동부장 (연방공화국 담당)
  • 1961–1965CPSU 중앙위원회 서기, 이념위원회 의장, 이념부장
  • 1965–1989소련 외무차관
  • 1962소련 과학원 학술원 회원 (철학)

안드레이 파블로비치 키릴렌코

Андрей Павлович Кириленко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 1906–1990 ↓ 은퇴 1982

브레즈네프 시대의 간부 담당 선임서기

1981년 당 대회에서 중앙위원 후보 명단을 낭독하며 거의 모든 이름을 잘못 발음했고, 브레즈네프를 포함한 상임간부석마저 공공연히 웃음을 터뜨렸다. 한때 '3인자'로 불리던 후계자의 공개적 몰락이었다.

항공기술자 출신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제18군 군사평의회에서 브레즈네프와 함께 복무하며 정치적 동반자가 되었다. 중앙위 서기국에서 소련 군산복합체 전체를 총괄하는 실력자로, 브레즈네프·수슬로프와 함께 당의 '3인자'로 불리며 후계자로 거론되었다. 정체기 당 관료제의 승진 통로와 충성 네트워크를 상징했으나, 1970년대 후반 뇌 기능 저하로 쇠퇴하다 안드로포프 집권 직후 축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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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55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 주 당 제1서기
  • 1966–76중앙위 간부 담당 선임서기
  • 1982안드로포프 집권 직후 은퇴

미하일 알렉세예비치 야스노프

Михаил Алексеевич Яснов
국가원수 소비에트 러시아인 1906–1991 ○ 자연사

브레즈네프 시대 러시아 공화국의 20년짜리 국가원수

“그에게는 단호한 행정가의 손길이 있었고, 건설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 동시대인의 평가

가죽 공장 노동자와 인민위생위원회 배달원으로 출발한 미하일 야스노프는 소비에트 체제가 길러낸 행정 실무자였다. 모스크바 시 집행위원회 의장(1950–1956)으로서 스탈린식 고층건물 완공, 남서부 주택단지 착공, 지하철 대순환선 개통 등 제2차 모스크바 재건계획을 진두지휘했으며, 주택 건설량을 두 배로 늘렸다. 1956년부터 1957년까지 러시아공화국 각료회의 의장을 지냈고, 1966년부터 1985년까지 19년간 러시아 최고소비에트 상임회의 의장으로서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의 형식적 국가원수직을 수행했다. 모스크바 전투 당시 방어선 구축을 지휘한 건설 전문가로서, 동시대인들로부터 거칠지만 확실한 행정 수완을 가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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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2인민위생위원회 배달원
  • 1922–1928가죽 공장 노동자
  • 1925모스크바국립대 노동자학부 졸업, 전연방공산당 입당
  • 1928–1930붉은 군대 복무
  • 1930–1938모스크바 건설 신탁 관리직 역임
  • 1938–1949모스크바 시 집행위원회 부의장(1942년부터 제1부의장), 모스크바 전투 시 방어선 구축 지휘
  • 1949–1950소련 도시건설부 차관
  • 1950–1956모스크바 시 집행위원회 의장, 연방회의 의장(1950–1954) 겸임
  • 1956–1957러시아공화국 각료회의 의장
  • 1957–1966러시아공화국 각료회의 제1부의장
  • 1966–1985러시아 최고소비에트 상임회의 의장 (공화국 국가원수)
  • 1976사회주의 노동 영웅 수훈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 스트루예프

Александр Иванович Струев
경제 운영 소련 러시아인 1906–1991 ○ 자연사

18년간 소비에트 상업을 총괄한 무역장관

“일은 사람보다 높아야 한다. 그래야 그것을 알고자 하는 열망이 생기고, 그로부터 자연스럽게 기술과 경험이 생겨난다.”

소련의 국내 상업 유통 체계를 18년간 총괄한 무역장관이다. 도네츠크(스탈리노) 지역당 제1서기와 페름 지역당 제1서기를 지내며 전후 재건과 공업화를 진두지휘했고, 1965년부터 1983년까지 소련 무역부 장관으로서 브레즈네프 시기 소비재 유통 정책 전반을 관장했다. 2차 세계대전 중에는 남부전선·북캅카스전선·제4우크라이나전선 군무역국장으로 복무하며 전시 보급 체계를 책임졌다. 1976년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으며, 1956~1961년과 1966~1986년 두 차례에 걸쳐 CPSU 중앙위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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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41도네츠크주 소비자협동조합연합 회장
  • 1941스탈리노(도네츠크)주 집행위 부위원장
  • 1942–1943남부·북캅카스·제4우크라이나전선 군무역국장
  • 1944–1947스탈리노주 집행위원장
  • 1947–1953스탈리노주 당위원회 제1서기 (우크라이나 공산당)
  • 1954–1958페름주 당위원회 제1서기
  • 1958–1962러시아SFSR 각료회의 부의장 (무역 담당)
  • 1962–1965소련 국가무역위원회 의장
  • 1965–1983소련 무역장관

안드라니크 멜코노비치 페트로샨츠

Андраник Мелконович Петросьянц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아르메니아 1906–2005 ○ 자연사

핵 프로그램의 민간 얼굴, 24년간 원자력 국가위원회 이끈 창립 세대

1986년 체르노빌 기자회견에서 '과학은 희생을 요구합니다'라고 말했다.

안드라니크 페트로샨츠는 소련 원자력 산업의 창립 세대를 대표하는 과학자·행정가로, 원자폭탄 개발을 관리한 제1총국에서 시작해 1962년부터 1986년까지 국가원자력이용위원회 의장으로서 소련 핵 프로그램의 민간 얼굴이자 평화적 이용의 국제적 대변인이었다. 1986년 체르노빌 참사 직후 기자회견에서 '과학은 희생을 요구합니다'라고 발언한 인물로도 기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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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1939우랄중공업기계(UZTM)에서 작업반장·기술부장·수석기사 대리 역임
  • 1939–1941중공업기계제조 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 1941–1943전차공업 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 1943–1945국방위원회(GKO) 전차산업 담당 부위원
  • 1947–1953소련 각료회의 제1총국 부국장 — 원자력 프로젝트
  • 1955–1962중형기계공업부 차관
  • 1962–1986국가원자력이용위원회 의장

세르게이 파블로비치 코롤료프

Сергей Павлович Королё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우크라이나 1907–1966 ○ 자연사

수용소에서 우주로. 이름조차 국가기밀이었던 설계자

1961년 4월 12일, 바이코누르 발사대. 코롤료프의 무선 음성: "예비단계… 중간단계… 주단계… 발사!" 가가린: "출발이다!(Поехали!)" — 한 사람의 목소리와 다른 한 사람의 대답으로 인류 우주시대가 열렸다.

1938년 숙청에 걸려 콜리마 금광에서 건강과 이를 잃은 로켓 기술자. 살아 돌아와 스푸트니크와 가가린을 쏘아 올린 로켓을 만들었지만, 생전에 그의 이름은 기밀이었다. 노벨상 위원회의 문의에 소련은 「수석설계자」라고만 답했다. 수용소가 망가뜨린 몸은 1966년의 수술을 견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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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제트추진연구그룹(GIRD) 출신으로 로켓연구소 창설 참여
  • 1938–40체포, 콜리마 금광
  • 1940–44옥중 설계국(샤라시카)에서 항공기 설계
  • 1946–57수석설계자: R-7 대륙간탄도미사일
  • 1957/1961스푸트니크, 보스토크(가가린) 발사
  • 1966수술 중 사망, 사후에야 실명 공개

알렉산드르 바실리예비치 코로보프

Александр Васильевич Коробов
이론가 소련 러시아 1907–1967 ○ 자연사

고스플란에서 30년 가까이 일하며 전후 복구와 코시긴 개혁 준비에 참여한 계획경제 관료

1944년 봄, 해방된 소련 영토의 공장·철도·주택을 목록화하고 복구 우선순위를 매기는 고스플란 특별부서가 신설되자, 코로보프가 그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소련 계획경제의 중추에서 30년 가까이 근무한 경제관료로, 고스플란 내부에서 실무자에서 부의장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해방지역 경제복구를 담당하는 고스플란 부서를 이끌었고, 전후에는 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으로서 흐루쇼프 시기 경제개혁 논의에 참여했다. 1963년부터 1965년까지 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 겸 소련 각료로 재임하며 코시긴의 1965년 경제개혁 준비 작업에 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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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1951고스플란에서 그룹장, 부서차장, 부서장, 국장 역임
  • 1951–1953고스플란 부의장, 소련 각료회의 의장 보좌관
  • 1953–1958소련 각료회의 사무국장
  • 1958–1960소련 재무부 차관
  • 1960–1963국가경제위원회 부의장, 고스플란 종합계획부장
  • 1963–1965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 겸 소련 각료

알렉세이 키릴로비치 코르투노프

Алексей Кириллович Кортунов
중공업 · 군수공업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1907–1973 ○ 자연사

소련 통합가스공급체계를 건설한 영웅-장관

“우리는 우리 목숨은 걸 수 있어도 교두보와 우리에게 맡겨진 임무는 걸 수 없었다.” — 비스와 강 도하 후, 1944년

소련 가스 산업의 실질적 창설자. 1957년부터 1973년 사망할 때까지 글라브가스를 이끌며 연중무휴 시공 기술과 1420mm 대구경 파이프라인으로 거의 10만 km에 달하는 통합가스공급체계를 구축했다. 대조국전쟁에서는 629소총연대를 지휘해 비스와 강 도하 작전을 성공시켜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1965년 샤임-튜멘 송유관으로 서시베리아 원유의 경제성을 입증하며 튜멘 유전 개발의 돌파구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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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1938아조프스탈 제철소 · 중앙공기유체역학연구소(TsAGI) 건설 기술자
  • 1943–1945제629소총연대장 · 소비에트연방영웅 (1945)
  • 1948–1953투이마지 건설국장 → 석유공업부 건설담당 차관
  • 1955–1957소련 석유공업기업건설장관
  • 1957–1965글라브가스(가스공업총국) 국장 · 통합가스공급체계 설계
  • 1965–1972소련 가스공업장관
  • 1972–1973소련 석유·가스공업기업건설장관

바실리 미하일로비치 랴비코프

Василий Михайлович Рябиков
중앙계획 기관 소련 러시아 1907–1974 ○ 자연사

레닌 훈장 9회: 전시 무기생산에서 스푸트니크까지, 소련 군산복합체를 35년간 떠받친 조직자

R-7 발사가 성공하자 누군가 연회를 넌지시 꺼냈다. 랴비코프는 국가 예산이 아닌 각출로 자리를 마련하게 한 뒤, 손풍금을 집어 들고 러시아 왈츠와 「카튜샤」를 신나게 연주했다. 코롤료프가 코냑을 따르며 건배를 청하자, 그는 활짝 웃으며 외쳤다. "노래하고 싶지만 시간이 없군!"

이바노보 직물공장 노동자로 출발해 소련 군수산업의 핵심 행정가로 올라선 인물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무장인민위원부 제1부위원으로서 공장 동부 이전과 무기 증산을 지휘했고, 1945년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전후에는 대공미사일 방어체계 S-25 건설을 이끌었고, 1957년 R-7 미사일 및 스푸트니크 1호 발사를 승인한 국가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소련 우주시대의 문을 열었다. 이후 13년간 고스플란 제1부의장으로 군수-민수 자원 배분을 조율하며 브레즈네프기 계획경제의 핵심 축으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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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1929이바노보주 직물공장 노동자, 이후 콤소몰·당 지역 간부
  • 1929–1937레닌그라드 기술원·군사기계연구소·해군사관학교에서 공학 수학
  • 1937–1939볼셰비크 공장 설계기사, 당위원회 서기, 전연방공산당 중앙위원회 당조직자
  • 1939–1950무장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이후 제1부위원 — 전시 공장 이전·무기 증산 지휘
  • 1950–1953소련 각료회의 제3총국장 — 모스크바 대공미사일 방어체계 S-25 건설 주도
  • 1955–1957각료회의 특별위원회 의장 — R-7 및 스푸트니크 1호 국가위원회 주재
  • 1961–1962, 1965–1974고스플란 제1부의장 — 군수-민수 자원 배분과 경제 계획 조율

보리스 예프스타피예비치 부토마

Борис Евстафьевич Бутома
중공업 · 군수공업 소련 우크라이나계 1907–1976 ○ 사망 · 자연사

19년간 소련 조선을 지휘한 핵잠수함 함대의 설계자

1959년 7월 23일, '특수장비 제작에 관한 정부 과업 수행'이라는 비밀 포고령으로 부토마는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그 '특수장비'란 K-3 '레닌스키 콤소몰' — 소련 최초의 원자력 잠수함이었다.

소련의 조선 기술관료이자 당·국가 지도자로, 1957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19년간 소련 조선산업을 총괄했다.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 두 시대를 관통하며 국내 최초의 원자력 잠수함(프로젝트 627, K-3 '레닌스키 콤소몰'), 세계 최초의 탄도미사일 잠수함(프로젝트 V611), 그리고 전략미사일 잠수함 667B형의 건조를 진두지휘하여 소련 해군을 대양함대로 탈바꿈시켰다. 그의 지휘 아래 220여 개 조선·선박기계 공장이 신설·재건되었고, 민간 부문에서도 원자력 쇄빙선과 초대형 유조선 건조가 본격화되었다. 스탈린상(1949), 사회주의노동영웅(1959), 레닌상(1974)을 수상했으며, 1966년부터 사망 시까지 CPSU 중앙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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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6레닌그라드 조선연구소 졸업
  • 1936–1944블라디보스토크 달자보트 조선소에서 정비공·진수기사·수석기사 역임
  • 1944–1948젤레노돌스크 제340조선소 수석기사, 이후 소장
  • 1948–1952소련 조선공업부 본부장
  • 1952–1953, 1954–1957소련 조선공업부 차관
  • 1957–1965소련 각료회의 국가조선위원회 의장
  • 1965–1976소련 조선공업부 장관

얀 파토치카

Jan Patočka
이론가 체코슬로바키아 체코인 1907–1977 ○ 국가보안기관 조사 뒤 자연사

진실의 책임을 시민적 행동으로 옮긴 현상학자

1977년 3월 3일, 그는 헌장 77 대변인으로 말하겠다며 불러낸 국가보안기관의 장시간 조사를 받았다.

얀 파토치카는 후설과 하이데거에게 배운 체코 철학자로서 현상학과 역사철학을 발전시켰고, 유럽의 위기와 인간의 영혼 돌봄을 탐구했다. 공산당 가입을 거부한 뒤 여러 차례 대학 강단과 출판에서 배제되었지만, 연구와 가정 세미나를 이어 갔다. 1977년 그는 바츨라프 하벨, 이르지 하예크와 함께 헬싱키 최종의정서와 시민권 보장을 요구한 헌장 77의 첫 대변인이 되었다. 반복된 국가보안기관 조사 뒤 건강이 악화되었고, 그는 3월 13일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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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1931프라하 카렐대학교에서 철학·슬라브어문학·로망스어문학을 공부하고 철학 박사학위를 받음
  • 1933프라이부르크대학교에서 에드문트 후설과 마르틴 하이데거에게 현상학을 배움
  • 1936–1939카렐대학교에서 강의 자격을 취득하고 철학 저널 《체코의 정신》 편집을 맡음
  • 1945–1950전후 카렐대학교와 마사리크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쳤으나 공산당 가입 거부 뒤 대학을 떠남
  • 1964–1972체코슬로바키아 과학아카데미 철학연구소에서 일하고 1968년 카렐대학교 교수로 복귀했으나 1972년 퇴직당함
  • 1973–1976가정 세미나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플라톤과 유럽》과 《역사철학의 이단적 에세이》를 발전시킴
  • 1977바츨라프 하벨·이르지 하예크와 함께 헌장 77의 첫 대변인으로 활동

표트르 바실리예비치 데멘티예프

Пётр Васильевич Дементьев
중공업 · 군수공업 소련 러시아 (추바시) 1907–1977 ○ 자연사

추바시 출신으로 24년간 소련 항공공업을 이끈 '표트르 대제'

1953년 3월, 베리야가 항공공업성을 국방공업성에 통합하면서 데멘티예프는 자리를 잃었다. 8월 베리야가 체포되자마자 그는 항공공업 장관으로 복귀했고, 이후 24년간 소련 항공산업을 지휘했다.

추바시 교사 가정에서 태어나 공장 노동자로 시작해 소련 항공공업을 거의 24년간(1953~1977) 이끈 산업 행정가. 전시에는 항공공업 제1부인민위원으로서 전투기 대량 생산을 총괄했고, 종전 후 장관으로서 MiG 전투기에서 Tu-144 초음속 여객기에 이르기까지 소련 군용·민간 항공기 생산 전반을 지휘했다.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 두 시대에 걸쳐 항공산업을 관장한 유일한 인물로, 설계자들 사이에서는 '표트르 대제'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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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2–1927공장 노동자, 심비르스크 직업기술학교 졸업
  • 1927–1931모스크바 기계연구소 → 주콥스키 공군공학아카데미 졸업
  • 1931–1934민간항공함대 연구소 선임기사·운용기술부장
  • 1934–1941모스크바 제81·제1항공공장 작업반장 → 주임기사 → 공장장
  • 1941–1953항공공업 제1부인민위원(제1부장관) — 전시 항공기 대량생산 총괄, 사회주의노동영웅(1941)
  • 1953–1977소련 항공공업 장관 — 제트기 전환·Tu-144·Il-76·Il-86 주도, 사회주의노동영웅 재수훈(1977)

로만 안드레예비치 루덴코

Роман Андреевич Руденко
국가보안 기관 소련 우크라이나 1907–1981 ○ 자연사

뉘른베르크의 소련 수석검사, 소련 검찰을 28년간 이끈 최장수 검찰총장

1946년 2월 8일 뉘른베르크 법정에서 루덴코는 나치 지도부를 향해 그들이 '식인종의 도덕과 강도의 탐욕'을 독일 민족에게 주입했다고 규탄하며 소련 검찰의 개시 진술을 시작했다.

우크라이나 코사크 가문 출신으로 1926년 입당, 1944년 우크라이나 검사장이 되었다. 1945~1946년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소련 수석검사로 괴링을 신문하며 나치 전쟁범죄의 실체를 법정에 세웠다. 1953년부터 사망 시까지 28년간 소련 검찰총장으로 재임하며 베리야 재판을 주도하고 정치범 재활위원회를 이끌어 흐루쇼프 해빙기의 사법 복권을 추진했다. 브레즈네프 시기에는 안드로포프와 함께 반체제 인사에 대한 '예방적 경고' 제도를 도입하고 1979년 소련 검찰법 제정으로 검찰 제도의 법적 기반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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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체르니고프 지역 검찰청 수사관
  • 1937–1938도네츠크 주 검사
  • 1938–1940스탈리노 주 검사
  • 1942–1944우크라이나 SSR 부검사장
  • 1944–1953우크라이나 SSR 검사장
  • 1945–1946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소련 수석검사
  • 1953–1981소련 검찰총장
  • 1961–1981CPSU 중앙위원회 위원

바를람 티호노비치 샬라모프

Варлам Тихонович Шаламов
작가·예술가 소련 러시아 1907–1982 ○ 자연사

콜리마 수용소를 산문의 형식으로 증언한 작가

《콜리마 이야기》는 수용소를 교정이나 영웅주의가 아닌 인간성의 파괴로 묘사한다.

좌익 반대파와 가까웠던 젊은 시절부터 체포와 수용소를 겪었고, 1937년부터 콜리마에서 장기간 복역했다. 이후 《콜리마 이야기》로 수용소의 비인간화를 압축된 산문으로 기록했으나, 작품은 생전에 소련에서 거의 출간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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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좌익 반대파 관련 활동으로 첫 체포
  • 1937–1951콜리마 수용소 복역
  • 1954–1973《콜리마 이야기》 여섯 연작 집필
  • 1988–1989《콜리마 이야기》 소련에서 본격 출간

파벨 바실리예비치 코바노프

Павел Васильевич Кованов
경제 운영 소련 러시아 1907–1986 ○ 자연사

인민통제 초대 의장, 셸레핀의 대리인에서 브레즈네프 체제의 감사관으로

1965년 브레즈네프가 당-국가통제위원회를 분할했을 때, 셸레핀은 의장직에서 물러났지만 그의 부하였던 코바노프가 신설 인민통제위원회 의장으로 임명되었다 — 경쟁자의 부하를 승진시키며 우두머리를 무력화하는 브레즈네프식 관료정치의 전형이었다.

아지트프롭 부서에서 출발하여 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2서기를 거친 당 기구의 산물이었다. 이후 알렉산드르 셸레핀 휘하에서 당-국가통제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고, 1965년 브레즈네프가 셸레핀의 권력을 견제하기 위해 통제 기구를 분할했을 때 신설된 소련 인민통제위원회 의장에 임명되었다. 그의 재임기는 수백만 명의 자원봉사 감독관이 정부와 기업의 실적을 감사하는 대중 참여형 통제 기구로 전환되던 초기 브레즈네프 시기와 맞물린다. 이전에는 시골 교사, 집단농장 위원장, 3개 전선의 종군기자로도 활동했으며, 퇴임 후에는 석유·가스 건설 연구소의 과학 고문으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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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41교사, 집단농장 위원장, 인민교육위원회 산하 교육학 실험실·연구소 소장
  • 1941–1942러시아 인민교육위원회 초등·중등학교 관리국장
  • 1942–1944칼리닌 전선·북카프카스 전선·제2우크라이나 전선 종군기자
  • 1944–1956전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에서 지도원, 부문장, 부부장으로 승진
  • 1956–1962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2서기
  • 1962–1965당-국가통제위원회 부의장 (셸레핀의 보좌)
  • 1965–1971소련 인민통제위원회 의장
  • 1971–1986연금 생활, 석유·가스 산업 건설부 산하 연구소 과학 고문

페트로 그리고리예비치 그리고렌코

Пётр Григорьевич Григоренко
군사 · 국방 소련 우크라이나 1907–1987 ○ 망명 중 뇌졸중

소련 장성에서 인권·민족 권리 옹호로 전향한 반체제 인사

"지하에서는 쥐밖에 만날 수 없다" — 반체제 활동은 공개적으로 해야 한다는 그의 신념을 담아 회고록 제목이 된 말.

소련군 소장(1959) 출신의 반체제 인사로, 크림 타타르인의 귀환 권리 투쟁을 이끌고 모스크바·우크라이나 헬싱키 그룹 창립에 모두 참여한 인권운동가다.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공개 규탄하고 두 차례 정치적 정신병원에 강제 수감(1964–65, 1969–74)되면서 소련의 정신의학 정치적 남용을 상징하는 사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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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7–1929콤소몰 간부 · 우크라이나 콤소몰 중앙위원
  • 1934–1939군사공학 아카데미 및 참모 아카데미 우등 졸업
  • 1939–1943할힌골 전투 · 극동전선 참모 · 여단장
  • 1943–1945독소전: 제10근위군 부참모장 · 제8소총사단 참모장 (부상)
  • 1945–1961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교수 · 군사사이버네틱스 학과장 (1959 소장 진급)
  • 1961–1964정치 연설로 해임 · 극동 좌천 · '레닌주의 부활 동맹' 결성
  • 1964–1974정치적 정신병원 강제 수감 (1964–65, 1969–74)
  • 1976–1977모스크바 헬싱키 그룹 · 우크라이나 헬싱키 그룹 창립 멤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