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1985

해빙과 정체의 사람들 445명

스탈린의 관 뚜껑을 연 해빙과 그것을 다시 덮은 정체 사이에서, 우주와 개혁과 반체제의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

블라디미르 표도로비치 프로미슬로프

Владимир Фёдорович Промыслов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비에트 러시아 1908–1993 ○ 자연사

브레즈네프 시대 모스크바의 얼굴을 만든 23년 집권 시장

모스크바 시당 제1서기 빅토르 그리신은 프로미슬로프를 두고 이렇게 평했다: "그는 대체로 대표 기능을 수행하는 데 바빴다. 수많은 해외 출장이 시간을 잡아먹었고, 시 집행위 업무와 도시 문제를 해결할 시간은 늘 부족했다."

토목 기술자 출신으로 1963년부터 1986년까지 모스크바 시 집행위원회 의장(사실상 시장)을 지내며 오스탄키노 타워, 로시야 호텔, 노비 아르바트, 수십 개 지하철역, 1980년 올림픽 경기장 등 전후 수도의 스카이라인을 바꾸었다. 모스크바 시당 제1서기 빅토르 그리신은 회고록에서 그가 형식적 대외 활동과 해외 출장에 치중하고 실무를 보좌진에게 떠넘겼다고 비판했으며, 자신의 저서에 과도한 인세를 받은 스캔들도 남았다. 1986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교체될 때까지 소비에트 수도 최장기 행정 수반으로서 도시 발전과 노멘클라투라 정치를 동시에 체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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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4–38건설 현장 감독, 글라브기드로에네르고스트로이 부서장
  • 1938–41모스크바 시당 기구 → 중공업인민위원부
  • 1941–45탱크공업인민위원부 → 국방공업건설총국
  • 1946–51모스크바 시당 → 모스크바 시 집행위 부의장
  • 1955–59글라브모스스트로이 국장 겸 시집행위 제1부의장
  • 1959–63RSFSR 건설위 의장 → RSFSR 부수상 겸 건설장관
  • 1963–86모스크바 시 집행위원회 의장 (사실상 시장)

페트로 예피모비치 셸레스트

Пётр Ефимович Шелест
민족문제 · 연방 관리 소련 우크라이나 1908–1996 ↓ 해임 1972

우크라이나 문화투자로 밀려난 공화국 제1서기

수슬로프가 "그대의 카자크는 시대착오요!"라고 외치자, 셸레스트는 "카자크가 없었다면 자네도 여기 없었을 것이네. 그들은 유목민 무리로부터 국경을 가슴으로 막아냈어." 하고 받아쳤다.

1963년부터 1972년까지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를 지내며 흐루쇼프에서 브레즈네프로 넘어가는 전환기와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위기를 관통했다. 호르티차 역사보호구, 피로히우 민속건축박물관, 26권짜리 『우크라이나 도시와 마을의 역사』 등 우크라이나 문화유산 사업에 대규모 재정을 배정했다. 소비에트 연방 틀 안에서 우크라이나의 경제·문화적 이해를 대변하다가 1972년 브레즈네프 파벌에 의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혐의로 해임되었으며, 그의 몰락은 소비에트 연방제에서 공화국 자율성과 중앙 통제 사이의 긴장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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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1954하르키우·첼랴빈스크·사라토프 당 간부, 키예프 항공공장장
  • 1954–1957키예프 주당위 제2서기
  • 1957–1962키예프 주당위 제1서기
  • 1963–1972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1964–1973CPSU 중앙위 정치국(상무회) 위원
  • 1972–1973소비에트연방 각료회의 부의장
  • 1974–1984모스크바 교외 항공공장 설계국장

바실리 바실리예비치 보이초프

Василий Васильевич Бойцов
중공업 · 군수공업 소련 러시아 1908–1997 ○ 자연사

GOST 체계와 ISO 9000의 기초를 닦은 표준화 관료

베리야가 항공산업을 쪼개려 하자 그는 버텼다. 산업은 지켰고, 자신은 좌천됐다.

모스크바 근교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바우만 모스크바 고등기술학교에서 용접을 전공한 항공 엔지니어다. 전시에는 항공공장 주임기사와 공장장으로 전선 수리 임무를 수행했고, 1947년 항공공업 차관에 올랐으나 베리야의 항공산업 분할 구상에 반대했다가 좌천되어 항공기술연구소(NIAT) 소장으로 옮겼다. 1963년부터 21년간 소련 국가표준위원회(Gosstandart) 의장을 맡아 GOST 표준 체계를 현대화하고 전연방 계측·품질관리 인프라를 구축했으며, 1977~1979년 국제표준화기구(ISO) 회장으로서 ISO 9000 시리즈의 착수를 권고해 오늘날 전 세계 170개국에서 사용되는 품질경영 표준의 단초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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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40모스크바 제39항공공장 기술자·작업장장
  • 1940–1942콤소몰스크-나-아무레 제130항공공장장
  • 1942–1943제156항공공장 주임기사
  • 1943–1944항공공업인민위원부 제17공군 대표, 야전 항공기 수리
  • 1944–1946사라토프 제292항공공장 주임기사 (Yak-3 생산)
  • 1947소련 항공공업 차관
  • 1947–1963항공기술연구소(NIAT) 소장
  • 1963–1984소련 국가표준위원회(Gosstandart) 의장
  • 1977–1979국제표준화기구(ISO) 회장
  • 1984–1997바우만 MVTU 학과장, 연금 생활

알렉세이 블라디미로비치 로마노프

Алексей Владимирович Романов
문화 · 문학예술 통제 소련 러시아 1908–1998 ○ 자연사

매주 월요일 지도부 전화를 수확하던 정체기 영화 총책

로마노프는 월요일 출근길마다 마음이 무거웠다. 주말 별장에서 영화를 본 지도부의 전화가 쏟아졌기 때문이다. "한 분은 이렇게 말하고 다른 분은 정반대로 말한다. 같은 영화인데. 내가 어쩌란 말인가?"

1963년부터 1972년까지 소련 국가영화위원회(고스키노) 의장을 지낸 당 관료이자 언론인이다. 툴라현 벨료프 출신으로, 고리키주와 벨로루시의 신문 편집국을 거쳐 1955년부터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에서 일했으며, 1961년에는 중앙위원 후보와 러시아공화국 당뷰로 위원이 되었다. 고스키노 의장으로서 타르콥스키의 《안드레이 루블료프》 검열, 흐루쇼프 해빙기 말부터 브레주네프 정체기로 이행하는 시기의 영화 정책을 총괄했으며, '온건하지만 지나치게 규율적인' 인물로 평가받았다. 1972년 필리프 예르마시에게 자리를 넘기고 《소비에트 문화》 신문 주필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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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1929건설 노동자 → 고등국립문학과정 수료(3년)
  • 1929–1944신문 《스텝의 진리》(악튜빈스크), 《고리키 코뮌》 기자·부장·책임비서·부편집장
  • 1944–1946《프라우다》 고리키주 특파원
  • 1946–1949《고리키 코뮌》→《소비에트 벨로루시》 책임편집자
  • 1949–1955부쿠레슈티 발행 공산당 기관지 부주필
  • 1955–1963중앙위 선전선동부 컨설턴트 → 부부장 → 이념부 제1부부장
  • 1961–1986중앙위원회 위원 후보
  • 1963–1972국가영화위원회(고스키노) 의장
  • 1972–1983《소비에트 문화》 주필

보리스 바실리예비치 페트롭스키

Борис Васильевич Петровский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비에트 러시아 1908–2004 ○ 자연사

브레즈네프 아래 15년간 소련 보건을 이끈 심장혈관외과의

브레즈네프가 보건장관직을 제안하자 페트롭스키는 수술을 계속하고 싶다며 망설였다. 브레즈네프는 정치국이 이미 승인했다고 답했다. 페트롭스키는 회고했다: "잠시 생각한 뒤, 나는 당의 의지에 거스르지 않겠다고 말했다."

소련 보건장관(1965–1980)으로 15년간 재임하며 브레즈네프 시대 의료체계를 총괄한 외과의사이자 과학자였다. 1964년 소련 최초 승모판 기계 인공판막 치환술, 1965년 소련 최초 신장 이식 수술을 집도한 심장혈관외과의 선구자였다. 핀란드 전선과 대조국전쟁에서는 경동맥과 흉부대동맥에 직접 혈액을 주입하는 수혈법을 개발해 대량 출혈 환자를 구했다. 전연방외과학연구소를 설립·이끌며 미세수술과 마취과학을 독립 전문분야로 정착시켰고, 150명 이상의 의학박사를 배출했다. 1971년 소비에트 의사 선서와 인테르나투라(전문의 수련제도)를 도입했으며, 둘 다 체제 붕괴 후에도 러시아 의료교육의 근간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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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32모스크바주 포돌스크 구역병원 외과의
  • 1932–1937모스크바 종양학연구소 연구원 (P.A. 게르첸 지도)
  • 1939–1945핀란드 전선 및 대조국전쟁 야전병원 선임 외과의
  • 1948–1956제2모스크바의대 일반외과학 교수; 크렘린병원 수석외과의 (1953–1965)
  • 1956–1965제1모스크바의대(세체노프) 병원외과학 주임
  • 1963–1988전연방외과학연구소 설립자 겸 소장
  • 1965–1980소련 보건장관
  • 1966–1981CPSU 중앙위원 후보위원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코텔니코프

Владими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Котельнико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비에트 러시아인 1908–2005 ○ 자연사 (97세)

표본화 정리를 발견하고 금성 레이더 탐사를 이끈 과학자-국가원수

1999년 에두아르트 라인 재단이 66년 전 젊은 공학도의 논문에 기초연구상을 수여하자, 91세의 코텔니코프는 말했다: “나는 그저 내 앞에 놓인 문제를 풀었을 뿐입니다.”

정보이론과 레이더 천문학의 선구자. 1933년 표본화 정리(코텔니코프 정리)를 공식화했고, 1941년 일회용 암호 패드의 절대적 안전성을 독자 증명했으며, 최적 잡음 면역 이론을 창시했다. 1961년 금성, 1962년 수성 레이더 탐사를 지휘해 행성 레이더 천문학을 열었다. 2차대전 중 정부용 암호 음성 통신 장비를 개발했고, 종전 후 MPEI 무선공학부 학장으로 소련 전자공학 인재 세대를 키웠다. 1954년부터 IRE 소장, 1970년부터 과학아카데미 부총재, 1973년부터 러시아공화국 최고소비에트 의장을 지냈다. 두 차례 사회주의 노동 영웅, 레닌상, IEEE 벨 메달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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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41MPEI 졸업, 통신연구소 엔지니어, MPEI 강사·연구실장
  • 1933표본화 정리(코텔니코프 정리) 발표
  • 1939–1942정부용 암호 음성 통신 장비 '소볼-P' 개발 주도
  • 1941–1944통신산업 개발자로 대전 지원
  • 1944–1980MPEI 정교수, 무선공학부 학장(1947–1953), OKB MPEI 소장(1948–1953)
  • 1954–1988과학아카데미 무선공학·전자공학 연구소(IRE) 소장
  • 1970–1988소련 과학아카데미 부총재(제1부총재)
  • 1973–1980러시아공화국 최고소비에트 의장 (공화국 국가원수)
  • 1981–1992인테르코스모스 위원회 의장

게오르기 막시모비치 푸시킨

Георгий Максимович Пушкин
외교 소련 러시아 1909–1963 ○ 자연사

흐루쇼프에게 베를린 위험을 경고한 소련 외교관

1958년 당 중앙위 정보부장 푸시킨이 흐루쇼프에게 서베를린 '자유도시' 구상의 위험을 경고했다. 흐루쇼프는 "말도 안 돼! 군대를 들여보내도 전쟁은 안 난다"며 그를 끊고 정보부를 해체했다.

전시 슬로바키아, 전후 헝가리, 동독, 소련의 동유럽 위성국 형성기 세 수도에 차례로 대사를 지낸 경력 외교관이다. 1945년 헝가리 연합국 통제위원회 정치고문으로서 스탈린식 체제 이식의 주요 창구였으며, 1949–1952년과 1954–1958년 두 차례 동독 주재 대사로 재임하며 동독 국가 건설을 소련 측에서 감독했다. 1958년 신설된 당 중앙위 대외정보부장으로서 흐루쇼프에게 국제정세를 직접 브리핑했으나, 서베를린 '자유도시' 구상이 무력충돌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가 해임되었다. 1959년 외무차관으로 복귀해 1961–1962년 라오스 중립화 제네바 회의 소련 대표단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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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39외무인민위원부 제2서방부·중앙유럽부 근무
  • 1940–41주슬로바키아 전권대표·대사
  • 1942–44우루무치(중국) 총영사
  • 1944–45헝가리 연합국 통제위원회 정치고문
  • 1945–49주헝가리 공사, 1948년 대사로 승격
  • 1949–52주동독 공사·대사
  • 1952–53소련 외무차관
  • 1954–58주동독 대사 겸 소련 최고위원
  • 1958–59CPSU 중앙위 대외정보부장
  • 1959–63외무차관, 라오스 제네바 회의 수석대표

블라디미르 알렉세예비치 쿠체렌코

Владимир Алексеевич Кучеренко
중공업 · 군수공업 소련 러시아 1909–1963 ○ 자연사

전후 복구에서 국가건설위까지 건설 행정을 총괄한 기술관료

전쟁이 끝난 폐허에서 마케옙카·하리코프·도네츠크의 공장들을 다시 세웠다. 흐루쇼프는 그에게 국가건설위원회를 맡기며 소련 전역의 건설 기준과 주택 공급을 일임했다.

전후 우크라이나와 우랄에서 산업시설 복구를 지휘한 소련 건설 행정의 기술관료. 1955년 국가건설위원회(Gosstroy) 초대 의장 겸 각료회의 부의장으로서 흐루쇼프 시기 대규모 주택·산업 건설 계획을 총괄했으며, 유해는 크렘린 벽에 안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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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1929로조바야 역 작업장 노동자·십장
  • 1929–1933하리코프 토목공학대학 학생
  • 1936–1939인두스트로이 트레스트 공장 건설 수석기사
  • 1939–1950우크라이나·우랄 지역 건설 트레스트 관리자
  • 1950–1952소련 기계제조 기업건설 차관
  • 1955–1956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 1955–1961소련 각료회의 국가건설위원회 의장
  • 1961–1963소련 건축·건설 아카데미 원장

미하일 레온티예비치 밀

Михаил Леонтьевич Миль
중공업 · 군수공업 소련 러시아 1909–1970 ○ 뇌졸중

Mi-1부터 Mi-24까지: 세계 헬리콥터 역사를 다시 쓴 밀 설계국의 창립자

1941년 독일군이 진격해오자 밀은 특수구조부 기록보관소를 파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수년간 쌓아온 연구 자료를 차마 불태울 수 없었던 그는 문서를 연구실에서 몰래 빼내 탈출 행렬에 실었다. 훗날 그 자료들은 소련 헬리콥터 설계의 토대가 되었다.

소련 헬리콥터 산업의 창시자. 이르쿠츠크 유대계 가정 출신으로 ЦАГИ에서 카모프의 조수로 오토자이로를 연구했고, 1947년 독자 설계국을 세워 Mi-1을 탄생시켰다. Mi-4, Mi-6, Mi-8, Mi-10, Mi-12, Mi-24를 연달아 개발하며 60개 세계기록을 수립했고, Mi-8은 역사상 가장 많이 생산된 쌍발 헬리콥터가 되었다. 단일 로터 방식으로 카모프의 동축 반전 로터와 경쟁하며 소련 헬리콥터의 주류를 장악했고, 시코르스키의 아들로부터 중량물 분야에서 미국을 추월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사회주의노동영웅, 세 차례 레닌 훈장을 받고 1970년 뇌졸중으로 사망했으며, 사후 Mi-24는 100개국 이상에서 운용되며 '세계에서 가장 많이 싸운 헬리콥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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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31톰스크→노보체르카스크에서 항공공학 전공, 카모프 초청으로 첫 오토자이로 실습
  • 1931–41ЦАГИ 특수구조부에서 오토자이로 А-7, А-12, А-15 개발
  • 1940–41제290호 회전익기 공장 부수석 설계자 (카모프 보좌)
  • 1941–43징집, 서부전선 오토자이로 정찰대대 복무; 전투기 안정성 개량
  • 1943–47ЦАГИ 제5연구소장, 헬리콥터 연구 주도, 박사학위 (1945)
  • 1947–64국가 헬리콥터 설계국 수석설계자 — Mi-1, Mi-4, Mi-6 탄생
  • 1964–70밀 설계국 총설계사 — Mi-8, Mi-10, Mi-12, Mi-24, 60개 세계기록

아담 라파츠키

Adam Rapacki
외교 폴란드 폴란드계 1909–1970 ○ 자연사

동서 긴장 속에서 협상 공간을 넓힌 외교가

1964년 그는 유럽안보회의가 국가 안보를 보장하고, 그 장애물이 제거되면 유럽 국가들의 경제 협력이 자연스럽게 발전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담 라파츠키는 전후 폴란드의 사회주의 정치가이자 경제학자, 외교관으로서 사회주의권의 안보 요구를 국제 협상의 언어로 번역한 인물이다. 그는 1957년 중부 유럽 비핵지대안을 제시했고, 1964년에는 유럽안보회의 소집을 제안해 훗날 헬싱키 프로세스로 이어질 의제 형성에 기여했다. 동시에 PZPR 지도부와 정부에서 활동한 공산주의 정치가였으며, 1968년 유대계 인사 박해에 항의해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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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독립사회주의청년동맹 가입
  • 1939–1945독일군 포로수용소에서 교육·정치 활동
  • 1947–1950폴란드 해운장관
  • 1950–1956고등교육·과학 및 고등교육 장관
  • 1956–1968폴란드 외무장관
  • 1964유럽안보회의 소집 제안
  • 19683월 사태 뒤 정치 활동에서 이탈

알렉산드르 콘스탄티노비치 코로부슈킨

Александр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Коровушкин
경제 운영 소련 러시아 1909–1976 ○ 자연사

10:1 화폐개혁을 단행하고 흐루쇼프에게 모자를 던진 은행가

흐루쇼프가 욕설을 퍼붓자, 코로부슈킨은 조용히 모자를 벗더니 땅에 침을 뱉고는 그것을 당 제1서기의 어깨를 향해 집어던졌다.

볼로그다 농민 가정 출신으로, 회계원과 촌소비에트 의장을 거쳐 레닌그라드 재정경제연구소를 졸업하고 소련 금융계에 진입했다. 1940년부터 고스방크에서 두각을 나타내 1953년 재무차관, 1958년 국가은행 총재가 되었으며, 1959년 은행체계를 개편하고 1961년 10:1 디노미네이션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1963년 현금 부족 해소를 위한 초과 발권을 놓고 흐루쇼프와 직접 충돌해 해임되었으나, 이후 러시아공화국 재무부에서 산업금융을 담당하며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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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1936회계원·클럽 관리자·촌소비에트 의장을 거쳐 레닌그라드 재정경제연구소 졸업
  • 1936–1940레닌그라드 시·주 공동은행 관리자, 시 재정과장
  • 1940–1953고스방크 중앙기구 각 국장, 잡지 《화폐와 신용》 편집장, 이사, 부총재
  • 1950–1955대외무역은행(브네슈토르그방크) 이사장
  • 1953–1958소련 재무차관
  • 1958–1963국가은행 총재 — 1959년 은행체계 개편, 1961년 10:1 화폐개혁 단행
  • 1963–1976러시아공화국 재무부 국장(국가수입·산업금융), 콜레기움 위원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사하롭스키

Александр Михайлович Сахаровский
국가보안 기관 소련 러시아 1909–1983 ○ 자연사

15년간 KGB 대외정보를 지휘한 냉전의 그림자 설계자

그가 외무정보를 지휘한 15년은 체카 이래 어느 누구도 넘지 못한 기록이었다. 흐루쇼프, 브레즈네프, 안드로포프 — 세 명의 지도자를 거치며 그는 냉전 소련 첩보의 얼굴이자 그늘 그 자체였다.

레닌그라드 조선소 용접공에서 KGB 외무정보 수장까지 오른 인물로, 소련과 러시아 역사상 가장 오랜 15년간 제1총국을 이끌며 냉전기 소련의 대외 첩보활동을 총괄했다. 헝가리 봉기, 베를린 위기, 쿠바 미사일 위기, 6일 전쟁, 프라하의 봄 등 전후 결정적 국면마다 KGB의 해외 공작을 지휘했으며, 루마니아 세쿠리타테 창설을 지원하고 북유럽·발칸·중동에서 '불법' 요원망을 정비했다. 전시에는 레닌그라드 봉쇄 속에서 40여 개 정찰·파괴 공작조를 독일군 후방에 침투시킨 현장형 정보장교였다. 안드로포프의 선임 고문으로 물러난 뒤에도 KGB의 전략 방향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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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1931발트 조선소 및 북부 조선소 용접공·선체 표시공
  • 1931–1934적군 복무, 레닌 군사정치대학 야간 코무즈 졸업
  • 1934–1939콤소몰·당 정치활동가, 발트해운회사 당위원회 서기
  • 1939–1941NKVD 레닌그라드국 수상부서 근무, 해외 정찰 임무
  • 1941–1945NKVD/NKGB 레닌그라드국 제1(정찰)과장, 40여 개 공작조를 독일군 후방에 침투
  • 1946–1952MGB 중앙기구, 스칸디나비아·발칸·중동 임무, 루마니아 세쿠리타테 고문
  • 1952–1955MGB/MVD/KGB 제1총국 부국장, 제1부국장
  • 1956–1971KGB 제1총국장, 냉전기 전략적 해외첩보 총괄
  • 1971–1975KGB 의장 선임 고문

미하일 압크센티예비치 레세치코

Михаил Авксентьевич Лесечко
정부 수반 소련 러시아 1909–1984 ○ 자연사

소련의 대외경제 통합을 주도한 18년차 부총리

그의 18년 부총리 재임 기간 동안 소련의 코메콘 블록 내 무역 비중은 절반을 넘어섰다.

모스크바 항공대학 출신으로 항공기 공장 작업장장을 거쳐 소련 최초 전자식 고속 계산기계 개발을 지휘, 1954년 스탈린상 1등급을 받았다. 1956년 계기제조·자동화부 초대 장관, 이후 우크라이나와 연방 고스플란에서 계획경제 실무를 쌓았고, 1962년부터 1980년까지 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코메콘 상주대표(1962~1977)를 지냈다. 흐루쇼프·코시긴·티호노프 3대 정부에 걸쳐 소련 블록 대외경제의 제도적 틀을 설계한 핵심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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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1932헤르손 제2인터내셔널 공장 선반공
  • 1934–1942항공기 공장 작업장장·주임기사
  • 1942–1946항공공업인민위원부 총국 부국장
  • 1948–1954모스크바 계산분석기계 공장장 겸 SKB-245 소장
  • 1954–1956기계제조·계기제조부 제1차관
  • 1956–1957계기제조·자동화부 장관
  • 1957–1958우크라이나 국가계획위 부의장 겸 장관
  • 1958–1962소련 국가계획위 제1부의장 겸 장관 · 대외경제위원장
  • 1962–1980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 1962–1977소련 코메콘 상주대표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랴잔스키

Михаил Сергеевич Рязанский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909–1987 ○ 자연사

소련 우주로켓의 '라디오맨': 모든 로켓과 위성의 무선 시스템을 책임진 수석설계자

1928년, 열아홉 살 랴잔스키는 자작 단파무전기 앞에 앉아 있었다. 북극에서 비행선 이탈리아 호가 추락하고 쇄빙선 크라신이 구조에 나섰다. 전파가 대기를 가르자 연결이 이루어졌다 — 소련 최초의 단파구조교신이었다. 그는 이 순간을 평생 가장 자랑스러워했다.

위대한 조국전쟁 중 모스크바 방공의 핵심이 된 페그마티트 레이더를 개발했고, 1946년부터 NII-885 수석설계자로서 R-7 대륙간탄도미사일, 스푸트니크, 보스토크, 소유스, 달·금성·화성 탐사선의 무선유도·원격측정·추적 시스템을 설계했다. 코롤료프·글루시코·바르민·필류긴·쿠즈네초프와 함께 '6인 수석설계자회의'를 구성했으며, 동료들 사이에서는 갈등을 중재하는 '평화주의자'로 불렸다. 1987년 사망할 때까지 소련 로켓에 그의 무선 장비가 실리지 않은 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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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8소련 최초 단파교신: 쇄빙선 크라신과 통신 성공
  • 1929–31니즈니노브고로드 무선연구소, 군용 무선국 개발
  • 1935–41오스테흐비우로: 무선조종 전차·항공기·어뢰정 개발
  • 1941–45페그마티트(P-2) 레이더 주임설계자 — 모스크바 방공, 스탈린상
  • 1946–54NII-885 수석설계자: R-1부터 R-7까지 탄도미사일 무선유도체계
  • 1957–65스푸트니크·보스토크·소유스·달·금성·화성 탐사선 무선시스템, 레닌상
  • 1965–86NIIP(후일 RNII KP) 수석설계자 겸 과학지도자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 쇼킨

Александр Иванович Шокин
중공업 · 군수공업 소련 러시아 1909–1988 ○ 자연사

소련 전자산업을 창설하고 20년간 이끈 군수 전자공학의 설계자

쇼킨은 즐겨 말했다. "포드 사는 '포드' 자동차를 만든다. 그러니 MEP(전자공업부)는 '엘렉트로니카'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

소련 전자산업의 창설자로, 1961년 전자기술 국가위원회 의장으로 발탁된 뒤 1965년부터 1985년까지 전자공업부 장관을 지내며 소련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의 토대를 닦았다. 그가 구상한 젤레노그라드는 '소련의 실리콘밸리'로 불렸으나,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서방과의 격차는 오히려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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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4–1938조선공업 분야 기술자, 공장장, 설계국장
  • 1938–1943국방공업인민위원부 → 조선공업인민위원부 주임기사
  • 1943–1949레이더위원회 공업부장 → 각료회의 제3위원회 부의장
  • 1949–1955통신장비공업 차관 → 무선기술공업 차관
  • 1955–1961무선기술공업 제1차관 → 라디오전자 국가위원회 제1부의장
  • 1961–1965소련 각료회의 전자기술 국가위원회 의장
  • 1965–1985소련 전자공업부 장관

안드레이 안드레예비치 그로미코

Андрей Андреевич Громыко
외교 소련 벨라루스 1909–1989 ○ 자연사

「미스터 니예트」, 마지막 수로 개혁가를 추천하다

1985년 3월 11일, 정치국. 침묵 끝에 75세의 그로미코가 가장 먼저 일어나 고르바초프의 이름을 불렀다. "미소는 부드럽지만 이빨은 강철." 28년간 '미스터 니에트'로 불리던 그가 페레스트로이카의 문을 직접 열어젖힌 순간이었다.

28년간 외무장관: 얄타에서 쿠바 위기, 데탕트, 헬싱키 협정까지 냉전 외교의 결정적 순간마다 소련을 대표했다. '미스터 니예트'는 안보리 20여 차례 거부권에서 비롯된 별명이었고, 그의 신조는 '10년 협상이 하루 전쟁보다 낫다'였다. 브레즈네프 시대 군축을 주도했으며 체코슬로바키아(1968)와 아프가니스탄(1979) 개입 결정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1985년 3월, 최고참 보수파로서 고르바초프를 추천하며 페레스트로이카의 문을 열었다: '이 사람은 미소가 부드럽지만 이빨은 강철입니다.' 자신이 만든 개혁가가 여는 시대를 지켜보다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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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3–4630대의 워싱턴 주재 대사
  • 1944–45덤바턴오크스·얄타·샌프란시스코: 유엔 창설 실무
  • 1957–85외무장관 28년
  • 1962쿠바 위기의 협상 창구
  • 1970s데탕트 조약들의 서명자
  • 1985고르바초프 추천 연설, 명목상 국가원수로 이동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보골류보프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Боголюбо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909–1992 ○ 자연사

동구권 최대 국제연구소를 이끈 이론물리학의 제도적 거인

노버트 위너는 이렇게 물었다. '보고류보프라는 사람이 여러 명 있는 겁니까? 수학, 역학, 물리학 모두에 일급 전문가인 사람이 한 명일 리 없잖아요.'

14세에 첫 논문, 21세에 박사학위를 받은 신동으로, 니콜라이 크릴로프와 비선형역학의 키예프 학파를 세웠다. BBGKY 위계, 초유동체 미시 이론, 보고류보프 변환, 재규격화군, 쿼크 색전하, 초전도 미시 이론을 연달아 제시하며 통계역학과 양자장론의 기초를 다시 썼다. 1956년 두브나 JINR 이론물리연구실을 설립하고 1966년부터 1988년까지 소장으로 동구권 최대 국제과학기관을 이끌었으며, 스테클로프 연구소 이론물리부장을 겸해 소련 이론물리학의 제도 전체를 조직했다. 비당원 정교회 신자로서, 노버트 위너가 '보고류보프가 여러 명인가'라고 물을 만큼 수학·역학·물리학을 아우른 다재다능한 이론과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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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6–1941키예프 대학 수리물리학 교수
  • 1947–1992스테클로프 수학연구소 이론물리부장
  • 1953–1992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56–1965JINR 이론물리연구실장
  • 1966–1973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이론물리연구소장
  • 1966–1988JINR 소장
  • 1983–1988스테클로프 수학연구소장
  • 1966–1992모스크바 대학 양자통계 및 장이론 학과장

피오트르 야로셰비치

Piotr Jaroszewicz
정부 수반 폴란드 폴란드계 1909–1992 ✕ 자택 피살, 미해결

차관료적 성장 노선의 총리

1976년 가격 인상안은 노동자들의 봉기 뒤 하루 만에 철회되었다.

피오트르 야로셰비치는 전후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군인 출신 공산주의 정치가로, 국가 경제 운영과 당·정부 기구를 연결한 인물이었다. 에드바르트 기에레크의 차관과 서방 차관에 의존한 성장 정책을 집행했지만, 소비 확대와 부채 증가는 식량 가격과 공급의 위기를 키웠다. 1976년 급격한 식료품 가격 인상을 발표한 뒤 라돔과 우르수스에서 노동자 봉기가 일어났고, 정부는 가격안을 철회했으며 탄압은 노동자와 지식인 반대파의 결합과 KOR 결성으로 이어졌다. 1980년 총리직에서 밀려났고, 1992년 아내와 함께 자택에서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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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1939초등학교 교사·학교장
  • 1943–1945소련 내 폴란드군 정치교육 장교
  • 1945–1952폴란드군 고급 지휘·정치교육 보직
  • 1952–1970폴란드 정부 부총리
  • 1954–1956광업부·석탄광업부 장관
  • 1956–1970상호경제원조회의 폴란드 대표·경제위원회 부위원장
  • 1970–1980폴란드 인민공화국 각료회의 의장
  • 1981–1992정계 은퇴, 1981년 계엄 뒤 internment

블라디미르 파블로비치 바르민

Владимир Павлович Бармин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909–1993 ○ 자연사

카튜샤에서 부란까지: 모든 소련 로켓의 발사대를 설계한 엔지니어

그는 로켓을 발사대에 '매달린 상태'로 고정하는 방식을 제안했다. 코롤료프는 탐탁지 않아 했지만 실험 결과 바르민의 안이 최적이었다. 훗날 그를 '바이코누르의 아버지'라 불렀다.

모스크바 출신, 바우만 공대에서 냉동·압축기 공학을 전공하고 1935~36년 미국을 방문해 기술을 시찰했다. 콤프레소르 공장 수석설계자로 독소전 발발 직후 카튜샤 다연장로켓 발사대를 개발했다. 1946년부터 GSKB 스페츠마시를 이끌며 R-1에서 R-7, 프로톤, 에네르기야-부란까지 소련의 거의 모든 로켓 발사대와 사일로를 설계했다. 코롤료프의 수석설계자회의 일원으로 달·금성 토양채취 장치도 개발했으며, 실현되지 못한 달 기지 '즈베즈다'를 구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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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바우만 모스크바공대 졸업, 냉동·압축기 전공
  • 1935–36미국 방문, 오르조니키제 후원으로 냉장 기술 시찰
  • 1940–45콤프레소르 공장 수석설계자, BM-13 카튜샤 발사대 개발
  • 1946–57GSKB 스페츠마시 수석설계자: R-1, R-2, R-5M, R-7 발사대
  • 1957/1961스푸트니크·보스토크 발사 — R-7 발사대가 우주개발의 관문이 되다
  • 1960s–1970sR-12·R-14·R-9A·UR-100 사일로, 프로톤 발사대, 달·금성 토양채취기
  • 1970s–1988에네르기야-부란 발사대 및 달 기지 즈베즈다(바르민그라드) 프로젝트
  • 1959–1993바우만 공대 '발사 로켓 복합체' 학과 창설·주임

콘스탄틴 빅토로비치 루사코프

Константин Викторович Русаков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 1909–1993 ○ 자연사

사회주의권 당 대 당 외교를 관장한 브레즈네프의 비서

1979년 12월, 루사코프는 아프가니스탄 개입 결정을 담은 정치국 문서에 서명했다. 그가 관장하던 '사회주의 국가' 범주 안에는 이제 군사적 현상 변경까지 포함되었다.

레닌그라드 공과대학을 졸업한 토목기술자 출신으로, 1930년대 육류·어류 가공공장 건설 현장에서 경력을 시작해 1950년 소련 수산공업장관까지 올랐다. 1957년 흐루쇼프의 스탈린 시대 간부 숙청 때 폴란드 대사관 참사관으로 밀려났다가, 1964년 브레즈네프 시대에 중앙위 기구로 복귀해 사회주의 국가 공산당·노동자당 연락부를 이끌었다. 1977년 중앙위 서기로 겸직하면서 9년간 바르샤바 조약 동맹국과 몽골·베트남·쿠바 등 사회주의권 집권당과의 관계를 총괄했고, 1979년 아프가니스탄 개입 결정에도 참여했다. 1986년 고르바초프가 집권한 직후 '구시대 인물'로 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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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39육류·어류 가공공장 건설 현장의 기술자·현장소장
  • 1939–1946수산공업인민위원부에서 건설·기술 간부로 승진
  • 1946–1957수산공업 차관·제1차관·장관(1950–1952) 역임
  • 1958–1960주폴란드 소련 대사관 참사관
  • 1962–1963주몽골 소련 대사
  • 1964–1972중앙위 사회주의국가 공산당·노동자당 연락부 차장 → 제1차장 → 부장
  • 1972–1977브레즈네프 중앙위 서기장 보좌관
  • 1977–1986중앙위 서기 겸 사회주의국가 공산당 연락부장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 마츠케비치

Владимир Владимирович Мацкевич
농업 소련 러시아 1909–1998 ○ 자연사

처녀지 이후 농정을 맡은 농업장관

1955년 아이오와 농장 시찰, 더위를 호소하는 이들에게 장관이 현지식으로 응수했다: "그래도 옥수수엔 아주 좋은 날씨."

우크라이나 출신 축산기술자로,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 시기 농업장관을 두 차례 맡았다. 처녀지 개간을 주관했으나 이후 현장으로 좌천되었고, 복권 후 1972년 미국과의 대규모 곡물 거래를 성사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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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1960, 1965–1973농업장관 · 처녀지 이후 농정

이반 그리고리예비치 파블롭스키

Иван Григорьевич Павловский
군사 · 국방 소련 우크라이나 1909–1999 ○ 자연사

체코를 침공하고 아프가니스탄을 반대한 지상군 총사령관

1979년 아프가니스탄에서 돌아온 파블롭스키는 국방장관 우스티노프와 참모총장 오가르코프에게 소련군의 아프가니스탄 파병에 단호히 반대하는 서면 보고서를 제출했고, 수개월 후 지상군 총사령관직에서 해임됐다.

우크라이나 농촌 출신으로 농업학교를 나와 붉은 군대에 입대, 독소전쟁에서 코카서스에서 베를린까지 진군한 소총사단을 지휘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1967년 지상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에 올라 13년간 소련 지상군을 지휘했으며, 1968년에는 바르샤바조약군 통합군 사령관으로서 체코슬로바키아 침공(다뉴브 작전)을 현장 지휘했다. 1979년에는 아프가니스탄에서 귀환한 후 국방장관 우스티노프와 참모총장 오가르코프에게 소련군 파병을 단호히 반대하는 서면 보고서를 제출했고, 수개월 뒤 해임됐다. 소련 최대의 지상군을 13년간 이끈 육군대장으로서 군사개입을 공개 반대한 이력은 브레즈네프 말기 군사 엘리트 내부의 균열을 드러낸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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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5328소총사단장으로 코카서스에서 베를린까지 진군, 바르샤바 해방
  • 1952–1955북카프카스 군관구 제6소총군단장
  • 1955–1958자카프카스 군관구 제7근위군 사령관
  • 1961–1963볼가 군관구 사령관
  • 1963–1967극동 군관구 사령관
  • 1967–1980소련 지상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 1968년 다뉴브 작전 지휘
  • 1979아프가니스탄 사절단 파견, 소련군 파병 반대 보고서 제출
  • 1980–1992국방부 총감찰단 군사고문, 이후 퇴역

표트르 이바노비치 이바슈틴

Пётр Иванович Ивашутин
군사 · 국방 소련 러시아 1909–2002 ○ 자연사

24년간 GRU를 이끈 KGB 출신 군사첩보 수장

1963년 3월 18일, KGB 대장 이바슈틴은 비류조프 원수로부터 GRU 간부들에게 새 국장으로 소개되었다. 펜콥스키 사건 수습을 위해 온 KGB 요원 — 모두 잠시 머물다 떠날 것이라 생각했으나, 그는 24년을 더 있었다.

항공 조종사로 출발해 NKVD 방첩대로 옮긴 후,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남서부전선과 제3우크라이나전선 SMERSH 방첩국장을 맡았다. 1956년 KGB 제1부의장이 되었고 1961년 11월 KGB 의장 대행을 지냈다. 1963년 펜콥스키 배신 사건 이후 GRU 국장으로 전격 기용되어 24년간 재임하며 실시간 위협경보 지휘소, 쿠바 루르데스 기술첩보 기지, 우주정찰 부서를 구축했다. 냉전기 소련 군사첩보의 제도적 토대를 닦은 인물로 1985년 영웅소비에트연방 칭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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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39항공학교 졸업 → 조종사 → 주콥스키 공군사관학교 → NKVD 전출
  • 1939–41NKVD 특별과 근무 (제23소총군단), 소련-핀란드 전쟁 참전
  • 1941–43NKVD 특별과 부과장 (자캅카스·크림·북캅카스 전선군)
  • 1943–45SMERSH 방첩국장 (남서부전선 → 제3우크라이나전선)
  • 1945–52방첩국장 (남부군집단 → 독일주둔군 → 레닌그라드 군관구)
  • 1952–54우크라이나 MGB 장관 → MVD 차관 → MVD 제3총국 부국장
  • 1954–63KGB 부의장 → 제1부의장 (1961.11 의장 대행)
  • 1963–87GRU 국장 겸 총참모부 차장 — 24년간 군사첩보 총괄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스미르튜코프

Михаил Сергеевич Смиртюков
정부 수반 소련 러시아 1909–2004 ○ 자연사

25년간 소비에트 정부의 제도적 기억이 된, 폴리트뷰로 밖의 실세

1979년, 70세의 그에게 관례대로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가 올라갔지만 브레즈네프는 '정부와 당 중앙위 대립의 주요 인물'이라며 질질 끌었다. 코시긴이 폴리트뷰로에 직접 상정했고 티호노프셰르비츠키의 지지로 통과되었다.

1930년 스물한 살로 인민위원회의 기구에 들어가 1990년까지 60년간 크렘린에 몸담은, 소비에트 정부기구의 살아 있는 화신이었다. 미코얀의 보좌관으로서 전시 국가방위위원회(GKO)의 적군 보급을 담당했고, 1964년부터 25년간 각료회의 업무관리국장으로 코시긴·티호노프·리시코프를 보좌했다. 폴리트뷰로 위원이 아니면서도 유일하게 가장 비밀스러운 당 지도부 결정문을 받아보았고, 중앙위 부서장들도 주요 안건을 그와 조율하라는 지시를 받을 정도로 막후 실세였다. 그의 경험과 기억은 지도자가 바뀌어도 국가가 작동하게 만든 제도적 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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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27농촌소비에트 서기 · 협동조합 서기 · 클럽장
  • 1927–31모스크바국립대 소비에트법학부
  • 1930–41인민위원회의 기구: 선임보좌관·컨설턴트·부문장
  • 1941–46인민위원회의 사무국 부국장 · 미코얀의 GKO 보급 보좌관
  • 1946–53각료회의 사무국 부국장
  • 1953–64각료회의 부업무관리국장
  • 1964–89각료회의 업무관리국장
  • 1989–90각료회의 업무관리국장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