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야에게 밤마다 전화로 공장 상황을 보고할 때면, 차관임에도 전화기 앞에서 차렷 자세로 서 있었다.
소련의 중공업 행정가로, 1965년부터 1983년까지 중공업·에너지·수송기계부 장관을 역임하며 브레즈네프 시대 군수산업과 민간 중공업의 핵심 축을 담당했다. 레닌그라드의 이조르스키 공장 노동자로 출발해 '크라스니 메탈리스트' 공장 책임자까지 오른 현장형 기술관료였으며, 1940년대에는 라브렌티 베리야의 직접 지휘 아래 노보크라마토르스크 중기계공장(NKMZ)의 방산 생산을 현장에서 감독했다. 중앙위원회 위원(1964~1986)과 최고회의 대의원(6~10기)을 지냈고, 1977년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그의 장기 집권은 소련 군산복합체가 당-국가 체제 안에서 제도화된 안정적 관리 구조를 확립했음을 보여준다.
소련 각료 중 31년 이상 단일 장관직을 유지한 인물은 옐류틴이 유일하다. 고등교육부는 1954년부터 1985년까지 단 한 번도 주인이 바뀌지 않았다.
사라토프의 철도원 가정에서 태어나 모스크바 제강연구소를 졸업한 금속공학자로, 전기제강·페로합금 기술을 개척해 1952년 스탈린상을 수상했다. 1945년 모교 소장이 되어 연구 중심 공과대학으로 탈바꿈시켰고, 1954년 고등교육부 장관에 임명된 후 31년간 소련의 대학·전문학교 체계를 총괄했다. 재임 기간 고등교육기관과 재학생 수는 두 배 이상 확대되었고, 공학·자연과학 분야의 대규모 인력 양성 체계는 우주 개발과 군수산업을 뒷받침했다. 과학아카데미 준회원(1962)이자 당 중앙위원(1961–1986)으로서 연구·행정·정치를 연결하는 소련 테크노크라트의 전형이었다.
“러시아인은 곰이 아니라 코끼리다. 우리는 기억이 길기 때문이다.” — 1980년 레이크플래시드 동계올림픽에서 미국의 보이콧 위협에 답하며.
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건설위원회(고스스트로이) 의장으로 21년간 소련의 건설·에너지 인프라를 총괄한 경제 관료이자,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의 드네프로제르진스크 동창. 크레멘추크 수력발전소 건설로 1961년 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를 받았고,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조직위원장으로 미국 주도의 보이콧 위기 속에서 대회를 성사시켰으나, 브레즈네프 사후 안드로포프 주도로 1983년 모든 직책에서 해임되었다.
1937년 6월 20일, 북극 상공에서 치칼로프가 저산소증으로 코피를 흘리자 바이두코프가 조종간을 잡았다. 그는 마지막 13시간을 홀로 비행해 ANT-25기를 밴쿠버 피어슨 비행장에 내려놓았다.
소련의 시험비행사, 군사 지휘관, 그리고 소비에트 훈장 최다 수훈자(21개). 1936년과 1937년 발레리 치칼로프의 ANT-25기 부조종사로서 모스크바–우드 섬 및 모스크바–북극–밴쿠버 무착륙 비행에 참여해 소비에트 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위대한 조국전쟁에서는 항공사단과 항공군단을 지휘했고, 전후 민간항공단 총국장(1947–1949)을 지냈다. 1957년부터 1972년까지 국방부 제4총국장으로서 방공군(PVO)의 무기 조달을 총괄하며 소련 방공무기 체계 건설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작가동맹 회원으로 치칼로프 전기를 비롯한 여러 저서를 남겼으며, 1988년까지 PVO 최고사령관 과학고문으로 복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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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1928레닌그라드 군사항공이론학교·카차 군사비행학교 수료, 전투기 조종사
1931–1934NII VVS 시험비행사, 계기비행 방식 개발 참여
1935–1937ANT-25기 부조종사 — 모스크바–우드 섬(1936)·모스크바–북극–밴쿠버(1937) 무착륙 비행, 소비에트 연방영웅
1941–1945제4근위돌격항공사단장, 제4돌격항공군단장 — 모스크바·르제프·베를린 작전 참가
장군은 배신하지 않는다 — 20년 뒤 체포된 CIA 이중간첩 폴랴코프에 대한 첫 경고가 왔을 때 치뇨프가 한 말이다.
브레즈네프가 드네프로페트로우스크 당 시절부터 신임한 야금 기술자 출신 KGB 간부로, 부의장 자리에서 15년간 안드로포프 의장의 움직임을 총비서에게 직접 보고한 'KGB 안의 브레즈네프의 눈'이었다. 육군대장·사회주의노동영웅까지 올랐으나 음모와 전횡으로 동료들의 평판은 나빴다.
스카치코프가 이끈 GKES는 25년 동안 단 다섯 명의 수장만을 두었고, 같은 기간 미국은 12명의 원조기관장을 교체했다.
하리코프 기계제작연구소를 졸업한 공장 기술자 출신으로, 독소전쟁 시기 우랄바곤자보드의 당 조직자(파르토르크)로서 3만 5천 대의 전차 생산을 뒷받침했다. 전후 주요 중공업 공장장을 거쳐 1958년 국가대외경제관계위원회(GKES) 의장에 임명되었고, 이후 25년간 소련의 대외 경제·기술 원조 전체를 관장하며 75개국에 걸친 산업 플랜트 수출과 군사기술 공여를 지휘했다. 그의 재임 기간은 소련 대외원조 체제가 제도적으로 가장 안정되고 규모가 컸던 시기와 정확히 겹친다. 1977년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고 1983년 은퇴할 때까지 단 한 번의 조직도 개편 속에서도 자리를 지킨, 소련 관료제의 지속성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1984년 12월 베이징, 15년 만의 최고위 소련 방문에 중국은 그를 '라오펑유'(옛 친구)라 불렀다. 9일간의 방문은 3건의 경제협정과 중소관계 정상화의 첫걸음으로 이어졌다.
14세 선반공에서 소련 각료회의 제1부의장까지 오른 경제 관료로, 1950년 스탈린의 지시로 중국에 파견되어 156개 중공업 프로젝트의 소련 기술 지원을 총괄하며 중소 경제협력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1980년부터 브레즈네프·안드로포프·체르넨코·고르바초프 4대 서기장을 보좌하며 소련 경제를 실무에서 지휘했고, 1984년 15년 만의 최고위 소련 대표로 베이징을 방문해 관계 정상화의 물꼬를 텄다.
1954년, 예고로프는 로켓 설계자 세르게이 코롤료프와 함께 수상함과 잠수함에 미사일 무장을 배치하는 원칙을 공동 개발했다 — 소련 해군을 미사일-핵 해양함대로 탈바꿈시킨 기술적 전환점이었다.
소련의 조선 기술관료이자 군사·국가 지도자로, 1976년부터 1984년까지 소련 조선공업부 장관을 지내며 소련 해군의 대양함대화를 완성한 인물이다. 1930년 해군 공병학교 졸업 후 연구기관에서 선박의 항해성능을 연구했고, 1939년 조선공업인민위원회 제13총국장으로 발탁되어 전시에는 설계국 재배치와 함정 재무장을 진두지휘했다. 1954년 세르게이 코롤료프와 수상함·잠수함 미사일 탑재 원칙을 공동 수립했으며, 첫 원자력 쇄빙선 '레닌'과 중항공순양함 개발을 주관했다. 장관 재임 8년 동안 전략원잠 941형, 원자력 미사일순양함 1144형, 항공순양함 '바쿠' 등을 진수시켜 소련의 해군 전략적 균형을 확보했고, 상선톤수도 세계 3위로 끌어올렸다.
1942년 6월 3일, 최고회의 상임간부회 포고령: '생산 조직과 신형 포병·소화기 무기의 숙달, 공장의 능숙한 지휘에서 탁월한 공로.' 34세의 노비코프는 반니코프, 우스티노프와 함께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이제프스크 군수공장 기술자로 출발해 1942년 34세의 나이로 사회주의노동영웅이 된 방위산업 테크노크라트. 레닌그라드 소브나르호스 의장과 러시아공화국 고스플란 의장을 거쳐 1960년 흐루쇼프에 의해 소련 국가계획위원회 의장 겸 각료회의 부의장에 임명되었으나 소브나르호스 개혁으로 분권화된 경제 속에서 2년 만에 물러났고, 이후 브레즈네프 아래서 15년간 각료회의 부의장으로 남아 군수·경제 분야에서 조용히 영향력을 행사한 내구력 있는 실무 관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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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1939이제프스크 방위공장: 기술자·설계사·주임기술자·기사장
1939–1941제74공장(무장인민위원부) 소장, 이제프스크
1941–1948소련 무장인민부위원·무장차관; 공병포병소장 (1944)
1948–1957레이더위원회·방위공업부·일반기계제조부 지도부
1957–1960레닌그라드 소브나르호스 의장; 러시아공화국 각료회의 제1부의장·고스플란 의장
1959년 7월 13일, 미국 『타임』지는 코즐로프의 사진을 표지에 싣고 「흐루쇼프의 후계자?」라는 제목을 달았다. 그로부터 4년 뒤 뇌졸중으로 모든 것이 바뀌었다.
랴잔 농가 출신의 금속공학자로, 이젭스크 군수공업 현장에서 올라와 전후 레닌그라드 당을 장악했다. 1957년 반당그룹 사건에서 흐루쇼프를 결정적으로 지지한 뒤 중앙위 서기 겸 상임위원회 위원이 되었고, 1960년부터는 흐루쇼프의 공인된 후계자로서 서기국과 상임위원회를 사실상 지휘했다. 당·군·보안기관의 인사권을 독점할 정도로 권력이 집중되었으나, 1963년 4월 뇌출혈로 쓰러지면서 흐루쇼프의 후계 구도 전체가 붕괴했고, 그의 빈자리는 브레즈네프가 차지했다.
프라하의 봄에서 내무장관으로 보안기관 개혁을 시도했으나 KGB의 내부 교란으로 좌절된 인물
1968년 8월 침공 당일, 파벨이 해임한 부하 샬고비치는 KGB와 함께 두브체크를 체포했고, 내무부는 장관의 손을 떠났다.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원으로 스페인 내전에 의용군으로 참전했고, 1948년 쿠데타에서는 민병대를 지휘했다. 내무차관으로 공포정치에 가담했으나 1951년 체포되어 슬란스키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고문과 25년형을 받았고, 1955년 무죄 석방되었다. 1968년 프라하의 봄에서 내무장관으로 복귀해 국가보안대(StB) 개혁을 추진하고 KGB 연락장교 6명의 존재를 폭로했으나, 부하인 빌리암 샬고비치가 KGB와 공모해 침공 당일 두브체크 체포를 지원하면서 개혁은 무너졌다.
소련 라디오·전자공업을 20년간 창설·지휘하며 우주 비행과 미사일 방어의 전자적 기반을 구축한 군수 행정가
1961년 6월 17일, 가가린의 우주 비행을 가능케 한 전자 시스템의 공로로 비공개 포고령에 의해 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1954년부터 사망까지 20년간 소련 라디오·전자공업을 지휘한 군수 행정가로, 부처 명칭이 세 차례 바뀌는 동안 단 한 번도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로스토프나도누 전기기술자로 출발해 모스크바 동력대학 야간부를 졸업하고, 조선공업 연구소에서 해군 레이더와 유도무기를 개발하며 스탈린상을 두 차례 수상했다. 1954년 신설 무선기술공업부 장관에 취임한 뒤 그가 구축한 전자산업 체계는 유인 우주 비행의 통신·유도 장비와 세계 최초의 작전 배치형 탄도미사일 방어 체계인 모스크바 A-35의 핵심 기반이 되었다. 가가린 비행의 전자 장비 공로로 1961년 사회주의 노동영웅을 받았으며, 7개의 레닌 훈장을 받은 몇 안 되는 인물이다.
1957년 6월 반당 그룹과의 대결에서 키리첸코는 논거를 고르는 수고도 없이 모든 비난을 거칠게 쳐내며 흐루쇼프 편에 섰다. 흐루쇼프 없이는 자신에게도 미래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우크라이나 당 역사상 첫 우크라이나인 제1서기로, 1957년 반당 그룹에 맞서 흐루쇼프를 결사적으로 지지하며 모스크바 중앙위 서기로 발탁되었다. 1958년 사실상 당 제2서기로서 서기국을 주재하고 인사권을 장악했으나, 거친 성격과 독자적 행보로 동료들의 반감을 사고 흐루쇼프의 신임마저 잃었다. 1960년 실각 후 공장장으로 전락했다가 연금 생활자로 완전히 밀려났다.
모스크바에서 브레즈네프 앞에 선 크리겔은 이렇게 말했다: '쏘든지 시베리아로 보내든지, 나는 서명하지 않겠다.'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주의 정치인이자 의사. 스페인 내전에서 국제여단 군의관으로 복무하고, 1968년 프라하의 봄에서 KSČ 상임간부회 위원 겸 민족전선 의장으로 개혁을 이끌었다. 바르샤바조약군 침공 당일 체포되어 모스크바로 연행되었고, 26명의 체코슬로바키아 정치인 중 유일하게 모스크바 의정서 서명을 거부했다. 이후 당에서 축출되고 의사 면허도 박탈당했으나, 1977년 헌장 77에 최초 서명하며 생애 마지막까지 반체제 인사로 남았다.
1946년 코롤료프가 젊은 필류긴을 찾아와 "로켓이 어디로 가야 할지 아는 뇌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필류긴은 자이로스코프 하나로 시작해 35년간 소련의 모든 우주비행을 조종하는 두뇌를 설계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근교 군인 가정에서 태어나 바우만 공대를 졸업하고 ЦАГИ에서 정밀기계공으로 일했다. 전후 독일에서 V-2 잔해를 연구하고 1946년 코롤료프의 추천으로 NII-885 자율제어계 수석설계자가 되었다. 그의 유도·항법·제어 시스템은 R-1과 R-7(스푸트니크·가가린), 프로톤, 행성간 탐사선, 부란 왕복선까지 소련 로켓의 거의 모든 계보를 관통했다. 코롤료프·글루시코·바르민과 함께 수석설계자회의에서 소련 우주개발 방향을 결정했으며, 1975년 사하로프의 노벨평화상을 비난한 아카데미 성명에 서명한 72인 중 하나였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가장 안전했던 것은 가가린의 비행이었다. 지금까지 가장 위험했던 것은 보스호트 2호였다.” — 1966년 일기
소련 최초의 우주비행사 훈련 책임자(1960–1971). 1934년 첼류스킨호 빙상 캠프에서 34명을 구조해 최초의 7인 소련영웅 중 하나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Il-2 공격기 군단을 이끌며 스탈린그라드, 쿠르스크, 리비우, 부다페스트, 프라하 전역을 누볐다. 1960년 공군 원수 베르시닌으로부터 유인궤도비행 군사책임자로 지명되어 가가린, 티토프, 테레슈코바, 레오노프 등 1세대 우주비행사들을 모집·훈련시키고 보스토크 1호 탑승자로 가가린을 추천한 심사위원장이었다. 코롤료프 사후 후임 미신과 수동조종권을 둘러싸고 격렬히 대립했으며 소유즈 1호와 가가린 사망을 모두 현장에서 겪었다. 사후 출판된 비밀 일기 『숨겨진 우주』는 소련 우주개발사의 결정적 1차 사료이다.
스탈린 앞에서 빈 공장 사진을 들이민 조사위원회에 맞서, 우스티노프는 이틀 뒤 찍은 사진을 내밀었다 — 모든 장비가 가동 중이었다. 33세에 병기인민위원이 된 그를 스탈린은 '빨간 머리'라 불렀다.
33세에 병기인민위원이 되어 독소전쟁 중 군수공장의 우랄 대피를 지휘한 공병 출신 국방장관. 전후에는 소련 로켓·핵·우주 산업의 기반을 닦았고, 1976년 민간인으로는 처음 국방장관에 올라 소련 원수까지 진급했다. 브레즈네프 후기 '소규모 정치국'의 핵심 원로로서 1979년 아프가니스탄 파병을 강력히 주장했으며, 군산복합체의 이익을 대변하며 냉전 말기 소련 군사력의 정점을 이끌었다. 1984년 그의 사망으로 원로 그룹의 균형이 무너지며 고르바초프 등장의 길이 열렸다.
"많은 사람들은 '무언가'로 들어간 제트 기류가 '무언가'에서 나와 어떻게 비행기를 움직이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 1930년대 후반, 률카가 최초의 터보제트 엔진 구상을 처음 설명했을 때 마주한 반응.
우크라이나 태생의 소련 항공엔진 설계자. 1941년 세계 최초의 터보팬 엔진 설계 특허를 출원했고, 독일 포획 장비를 모방하기를 거부하며 독자적인 연구로 1947년 소련 최초의 터보제트 엔진 TR-1을 완성했다. OKB-165(후일 NPO 사투른)의 총설계자로서 AL-7, AL-21, AL-31F 등 AL 시리즈 엔진을 개발하여 수호이·미그·투폴레프 전투기 세대를 추진했으며, AL-31F는 오늘날까지 Su-27 계열의 심장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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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키예프 공과대학 졸업, 하리코프 터보발전기 공장
1933–39하리코프 항공연구소 강사, 가스터빈 연구
1939–41키로프 공장 SKB-1, RD-1 설계, 세계 최초 터보팬 특허
1941–43첼랴빈스크 전차공장 디젤 엔지니어
1946–57OKB-165 수석설계자; TR-1 소련 최초 터보제트 국가시험 통과 (1947)
그는 말했다: "누가 당신들의 진실을 필요로 하는가, 그게 우리 삶에 방해된다면?" — 스탈린 시기 실패와 탄압에 대한 모든 언급을 봉쇄하며.
소련군·해군 총정치국(GlavPUR)을 1962년부터 1985년까지 이끈 최장수 국장으로, 군대에 대한 당의 사상적 통제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흐루쇼프가 군부에 대한 당 우위를 재확립하기 위해 소장에서 육군대장으로 파격 승진시켜 기용했으며, 이후 글라브푸르를 CPSU 중앙위원회 부서처럼 운용하며 국방장관조차 통제할 수 없는 정치장교 네트워크를 유지했다. 1968년 프라하의 봄 당시 소련 고위 관료 중 처음으로 군사개입 가능성을 공개 시사했고, 1979년 아프가니스탄 침공 직전에는 군사대표단을 이끌고 카불을 방문했다. "누가 당신들의 진실을 필요로 하는가, 그게 우리 삶에 방해된다면?"이라는 그의 말은 체제 정통성을 위해 역사적 사실마저 억압한 독단성의 단면을 보여준다.
1964년 흐루쇼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것은 가장 정직한 사람이며 위대한 과학자입니다. 리센코 동지를 더러운 중상의 흐름으로부터 보호해야 합니다."
소련의 농학자·육종학자로, 목화 품종 개량 연구로 스탈린상을 두 차례 수상한 후 소비에트 농업과학 행정의 정점에 올랐다. 1951년부터 10년간 전연방농업과학아카데미(VASKhNIL) 부총재로 재직하다가 1960년 말 흐루쇼프에 의해 농업장관에 임명되었으나, 1962년 농업 위기 속에서 물러나 VASKhNIL 총재로 복귀했다. 트로핌 리센코의 가장 충실한 동료 중 한 명으로, 1964년 안드레이 사하로프와 조레스 메드베데프의 리센코 비판에 맞서 흐루쇼프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리센코를 '위대한 과학자'로 옹호했다.
1924년 3월, 열다섯 살 글루시코가 치올콥스키에게 보낸 첫 편지: "행성 간 통신은 제 이상이자 평생의 목표입니다. 이 위대한 일에 인생을 바치겠습니다."
오데사 출신으로 열여섯 살에 치올콥스키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우주비행 책을 썼다. 1929년 GDL에서 세계 최초의 전기열로켓을 시험한 후 소련 액체로켓엔진의 기초를 세웠다. 1938년 체포되어 8년형을 받고 샤라시카에서 설계를 이어갔으며, 1944년 석방·복권되었다. OKB-456(현 에네르고마시) 수석설계자로서 R-7의 RD-107/108 엔진을 개발해 스푸트니크와 가가린을 우주로 보냈다. 코롤료프 사후 1974년 NPO 에네르기야의 총괄설계자가 되어 15년간 소련 유인우주계획을 이끌었고, 세계 최강 액체로켓 RD-170과 에네르기야-부란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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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가스역학연구소(GDL) 입소, 전기열로켓·액체로켓 개발 주도
1933–38로켓연구소(RNII)에서 ORM 계열 엔진 개발
1938–44체포·8년형, 카잔 샤라시카에서 항공기용 보조로켓 RD-1 설계
1946–74OKB-456 수석설계자: R-7 계열 엔진(RD-107/108), 프로톤 엔진(RD-253) 개발
1973년 세계 최초의 BMD-1 승무원 탑승 낙하산 강하 시험에서 아들 알렉산드르를 지켜보며, 마르겔로프는 실패 시 자결할 권총을 손에 쥐고 있었다.
바실리 마르겔로프는 소련 공수군(VDV)을 23년간 지휘하며 현대 공수부대의 아버지로 불리는 군사 지도자다. 1944년 드네프르 강 도하로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은 정예 장교로, 1954년 VDV 사령관 취임 후 경보병이던 공수군을 중무장 기동타격군으로 탈바꿈시켰다. 그의 주도로 BMD-1 공수장갑차, 중량물 투하 플랫폼, 켄타브르·레악타브르 승무원 탑승 강하 시스템이 개발되고 An-22·Il-76 대형 수송기가 도입되었다. 65세까지 60회 이상 직접 낙하산 강하를 수행했고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시 VDV 작전을 지휘했다. 퇴역 무렵 VDV는 소련군 최정예 부대로 '바샤 삼촌의 군대'라 불렸다.
1973년 사하로프 규탄 공개서한에서, 페도세예프를 비롯한 소련 과학아카데미 학자들은 사하로프가 '소련의 국가 체제와 대내외 정책을 비방하는 일련의 발언을 했다'고 규정하며 그의 활동을 '소비에트 과학자의 명예와 존엄을 훼손하는 것'으로 낙인찍었다.
소련의 철학 행정가로, 농민 출신에서 과학아카데미 부총재까지 올라 30년 가까이 인문사회과학 전반을 관리한 당 이념의 수호자였다. 철학연구소장,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장, 중앙위원(1961~1989)을 지내며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경계를 감시했고, 1973년 사하로프를 공개 규탄한 과학아카데미 서한에 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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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고리키 사범대학 졸업, 동 대학 철학 강사
1936모스크바 역사철학연구소 대학원 수료, 철학 후보박사
1936–1941소련 과학아카데미 철학연구소 연구원
1941–1947전연방공산당 중앙위 선전선동국 제1부국장
1945–1949당 중앙 기관지 『볼셰비키』 주필 (1949년 7월 중앙위 결정으로 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