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10월 19일, 비류조프 원수는 20년 전 자신이 해방 작전을 기획했던 베오그라드로 향하던 중, 짙은 안개 속에서 탑승기 Il-18이 아발라 산에 충돌했다. 탑승자 전원 사망. 그는 자신이 해방시킨 도시의 하늘에서 최후를 맞았다.
랴잔 노동자 가정 출신으로 1922년 적군에 자원입대, 독소전쟁 첫해에만 다섯 차례 부상을 입으면서도 사단장으로 싸웠다. 이후 톨부힌 휘하에서 돈바스·크림·야시-키시네프·베오그라드 공세의 작전기획을 주도해 우크라이나·불가리아·유고슬라비아 해방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전후 방공군 총사령관, 전략로켓군 총사령관을 거쳐 1963년 총참모장에 올랐으며, 1964년 베오그라드 해방 2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러 가던 중 아발라 산 항공사고로 사망했다. 티토는 그를 유고 인민영웅으로 추서했다.
한 번은 '인민의 적'과 사냥을 갔다는 이유만으로 당적을 박탈당하고 형사입건되었다. 바시키르 중앙집행위원회가 직접 나서 그의 무죄를 입증했다.
우파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열한 살부터 일하며 바시키르 재정인민위원부 세무사로 공직에 들어간 후 평생 금융계에 몸담았다. 레닌그라드 재정경제연구소 졸업 후 우파 시·주 재정과장을 거쳐 1940년 러시아공화국 재정차관, 이듬해 재정인민위원이 되었고, 전후 소련 재무차관·제1차관으로 즈베레프와 가르부조프를 보좌했다. 1963년 8월 고스방크 총재로 취임하여 코시긴의 1965년 경제개혁(이윤 지표, 국영농장 독립채산제, 콜호스 보장임금제(1966))의 신용·결제 측면을 집행했고 러시아공화국 고스방크를 신설했다. 1937년 사냥 동행을 이유로 '인민의 적' 연루 혐의를 받았으나 바시키르 중앙집행위원회 개입으로 복권된 이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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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1919제본소 견습공, 약국 창고 노동자
1919–1923붉은군대 복무, 제재소 노동자, 공장위원회 지도원
1923–1931바시키르 재정인민위원부 세무사·과장·차장·재정감독국장, 콜레기움 위원
1931–1934레닌그라드 재정경제연구소 수학, 경제·재정 전공
1934–1939우파 시 재정과장 → 바시키르 재정인민위원부 선임감사관
1939–1940칼리닌주 재정과장
1940–1941러시아공화국 재정부인민위원
1941–1945러시아공화국 재정인민위원
1945–1960소련 재무차관 · 콜레기움 위원
1960–1963소련 재무제1차관
1963–1969국가은행 총재 — 1965년 개혁 신용·결제 집행, 국영농장 독립채산제, 콜호스 보장임금제, 러시아공화국 고스방크 신설
1965년 메이데이 집회 직후 즉석 인터뷰에서 "고기가 곧 나올 겁니다!"(Maso bude vbrzku!)라고 선언했다. 국민들은 "그 '곧'이라는 곳이 도대체 어디냐"고 물으며 온 나라가 웃었다.
1921년 KSČ 창립 당원이자 자물쇠공 출신으로, 슬란스키 숙청 과정에서 당 기구를 타고 부상했으며, 고트발트 사후 제1서기(1953–1968)와 대통령(1957–1968)을 겸직하며 15년간 체코슬로바키아를 통치했다. 스탈린주의 정통을 고수하며 중앙계획·검열을 강화하고 1950년대 정치재판 청산을 거부했으나, 경제 침체와 슬로바키아의 불만이 누적되며 정권 기반이 잠식되었다. 1968년 1월 두브체크에게 당직을 내주며 강제 사임함으로써 개혁의 최대 장애물이 제거되었고, 이는 곧바로 프라하의 봄을 촉발했다. 1971년 정상화 국면에서 중앙위원으로 재선되었으나 실질적 영향력은 없었고, 1975년 프라하에서 사망했다.
≪적은 강하고 교활하다. 그러니 너희가 더 교활하고 더 영리해져라. 약점을 찾아내 예상치 못한 강한 일격을 가해라.≫ — 부하들을 훈련시키며.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5세에 붉은 군대에 자원입대한 소련 군사 지휘관이다. 대조국전쟁에서 티흐빈, 스탈린그라드, 크림, 동프로이센 전역을 지휘하며 사푼산 탈환과 쾨니히스베르크 함락으로 두 차례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전후에는 시베리아·키예프 군관구 사령관을 거쳐 1965년 주독 소련군 총사령관에 올랐고, 1968년 소련군 원수로 진급했다. 재임 중 바르샤바 조약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진압 작전에 주독 소련군 부대를 투입했으며, 1969년 해임될 때까지 동독 주둔 소련군의 전투태세를 강화했다. 1961년부터 1971년까지 CPSU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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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붉은 군대 자원입대, 제8적기카자크기병사단에서 복무
1927우크라이나 기병학교 졸업, 소대장 보임
1939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제15기병사단 참모장
1940제65소총병사단 사단장 (자바이칼 군관구)
1941–1942티흐빈·류반 작전에서 제65소총병사단 지휘
1942–1943제24근위소총병사단장으로 스탈린그라드·북카프카스 전투
1943–1944제63소총병군단장 — 돈바스·멜리토폴·크림 공세, 사푼산 탈환
1944첫 번째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 수여 (5월 16일)
1944–1945제71소총병군단장, 이후 제36근위소총병군단장 — 동프로이센 공세, 쾨니히스베르크 함락
1945두 번째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 수여 (4월 19일), 승리 퍼레이드에서 제3벨로루시전선 연대 지휘
1969년 9월 11일, 국경 충돌이 전면전으로 번질 위기. 코시긴은 베이징 공항에 내렸다. 저우언라이와 3시간 반 동안 마주 앉아 긴장을 풀고 국경 협상 재개에 합의했다 — 냉전기 가장 위험했던 중소 대치를 중재한 단 한 번의 공항 회담.
레닌그라드 봉쇄의 「생명의 길」 수송을 지휘하고 소련 역사상 가장 오래(16년) 총리직을 지킨 테크노크라트. 1965년 이윤·자율 지표의 경제개혁을 발의해 제8차 5개년 계획(1966–1970)에서 전후 최고 성장을 이끌었으나, 프라하의 봄 이후 브레즈네프에게 주도권을 빼앗기며 개혁은 무력화되었다. 타슈켄트에서 인도-파키스탄 중재, 다만스키 사태 후 저우언라이와 베이징 회담 등 외교 무대에서도 독자적 역할을 했다. 1979년 아프가니스탄 파병에 반대한 유일한 정치국원(「파병만은 안 된다」) 실각 두 달 뒤 죽었다.
1961년 10월 30일, 수데츠가 지휘하는 장거리항공대의 Tu-95V 폭격기가 노바야제믈랴 상공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50메가톤 수소폭탄 차르봄바를 투하했다. 충격파는 지구를 여러 바퀴 돌았다.
소비에트 공군원수로, 독소전쟁에서 제17항공군을 지휘하며 쿠르스크·드네프르-카르파티아·야시-키시뇨프·프라하 공세에 항공지원을 제공했고 1945년 소비에트연방영웅이 되었다. 전후 공군 주참모장 겸 부총사령관(1946~1949)으로 제트기 전환을 추진했고, 장거리항공대 사령관(1955~1962)으로 Tu-95K 전략폭격기와 Tu-22 초음속폭격기 배치를 주도하며 1961년 차르봄바 투하를 관할했다. 방공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1962~1966)으로 저고도 방공능력을 확충하고 쿠바 위기 시 아나디리 작전의 방공을 지원했다. 유고슬라비아 인민영웅과 몽골 인민공화국 영웅 칭호도 받은 드문 소련 군사지도자다.
«인생에 운, 불운, 행복 중 무엇이 더 많았는지 가리기는 어렵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히 안다. 극복해야 할 것이 무척 많았다는 것을.»
1934년 방사성 용액 속 푸른 빛을 목격한 한 실험물리학자가 입자물리학의 새 장을 열었다. 바빌로프의 지도 아래 체렌코프가 발견한 그 발광은 진공 속 광속보다 빠르게 매질을 통과하는 하전입자가 내는 '체렌코프 복사'로 밝혀졌고, 타므와 프랑크가 이론적으로 해명했다. 이 발견은 체렌코프 검출기라는 입자물리학의 표준 장비로 이어져 스푸트니크 3호에도 탑재되었으며, 1958년 세 사람에게 노벨 물리학상을 안겼다. 레베데프 물리연구소(FIAN)에서 평생을 바친 그는 고에너지물리학부를 창설해 이끌었고, 싱크로트론 건설과 광핵반응 연구에도 기여했다.
한때 주코프의 군사평의회 위원이었던 젤토프는 1957년 10월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주코프를 가장 맹렬히 비난한 정치장교가 되었다.
알렉세이 젤토프 상장은 1953년부터 1958년까지 소비에트 육해군 총정치국(GlavPUR) 국장을 지내며 스탈린 사후 전환기 소비에트 군대의 최고 정치위원이었다. 위대한 조국전쟁 동안 카렐리야·돈·남서·제3우크라이나 전선군 군사평의회 위원으로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우크라이나·발칸 해방 작전에서 당정치사업을 지휘했다. 1957년에는 흐루쇼프를 도와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를 국방장관직에서 축출하는 반주코프 운동의 가장 적극적인 참여자로 나섰다. 이후 군·KGB·내무성·검찰·사법 기관을 총괄하는 CPSU 중앙위 행정부장을 거쳐, 12년간 레닌 군사정치아카데미 원장으로 정치장교 교육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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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1927붉은 군대 입대, 제2모스크바 보병학교 졸업 후 소대장
1937–1939제24소총병사단 군사위원 → 프리볼시스크 군관구 군사평의회 위원
1941–1944극동·카렐리야 전선군, 제63군, 돈·남서·제3우크라이나 전선군 군사평의회 위원
«우리에겐 다른 숫자가 없습니다. 스타롭스키 동무는 아주 신중한 사람입니다. 나는 그에게서 숫자를 받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연방 회계부서입니다. 나는 그를 신뢰합니다.» — 흐루쇼프, 중앙위원회 상임간부회, 1964년 8월 19일.
1940년부터 1975년까지 소련 중앙통계국(ЦСУ)을 이끌며 35년간 국가 통계를 총괄했다. 1939년 인구총조사를 시작으로 소련의 모든 공식 인구·경제 통계를 관장했으며, 고스플란이 국가계획을 세우는 기초 데이터를 생산하는 기관의 수장으로서 명령경제의 정보 기반을 구축했다. 경제학 박사이자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으로서 수리통계 방법론의 기초를 닦았고, 흐루쇼프가 공개적으로 신뢰를 선언한 유일한 통계 책임자였다. 그러나 1960년대에는 글루시코프의 국가전산망(OGAS) 구상을 저지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여 소련 정보기술의 경로에 논란의 여지가 큰 전환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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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1923우스티시솔스크 현 통계국 사무원·통계사
1924–1926최고경제회의(VSNKh) 통계사, 모스크바국립대 법학부 졸업
1926–1930소련 중앙통계국(ЦСУ) 통계사·연구원; RANION 경제연구소 대학원 수료
1956년 10월 폴리트뷰로에서 — 「총검으로 통치할 수는 있지만, 그렇게 통치하는 자는 모든 것을 잃는다는 것도 알게 될 것입니다」
노동자 출신으로 폴란드 공산당에 입당해 나치 점령기에는 지하당을 이끌며 인민군과 민족평의회를 조직했다. 1948년 '민족주의적 일탈'로 숙청되어 1951년 체포·투옥되었으나, 1956년 노동자·지식인의 봉기 속에 제1서기로 복귀해 집단농장 해체·노동자평의회·문화 자유화를 추진했다. 흐루쇼프의 개입 위협을 협상으로 막아내며 폴란드의 주권 공간을 일시 확보했지만, 1968년 반지식인·반유대 캠페인과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지지로 개혁 연합은 붕괴했고, 1970년 가격 인상에 맞선 노동자 총파업 끝에 실각했다.
1978년 '어류 마피아' 사건으로 부하 리토프가 총살형을 선고받았지만, 브레즈네프가 직접 개입했다. 이시코프는 그저 연금으로 보내졌다.
소련 수산업을 거의 40년간 이끈 정치인으로, 1940–1950년과 1954–1979년 수산장관을 지내며 소련 수산업 역사상 최장수 수장을 기록했다. 그의 지도 아래 소련은 북극에서 남극까지 전 해역을 누비는 원양 어선단을 구축했고 연간 어획량을 130만 톤에서 930만 톤으로 끌어올려 세계 최대 수산국이 되었다. 대형 냉동 트롤 어선(BMRT) 도입, 오케안(Okean) 전문 판매망, 수산업자의 날 제정도 그의 작품이다. 말년에 부하 블라디미르 리토프가 '어류 마피아' 스캔들로 처형됐지만 브레즈네프의 비호로 무사히 은퇴했다.
1943년 8월, 세로프는 스탈린의 전쟁 중 유일한 전선 시찰을 주선하고 3일간 그와 단둘이 동행했다. 수많은 장군 중 스탈린이 자신의 안전을 맡긴 인물은 포병 출신의 이 보안장교였다.
포병장교 출신으로 1939년 NKVD에 투신해 우크라이나 NKVD 인민위원, 전시 NKVD 부인민위원을 지냈다. 베를린 함락에 참여하고 독일 항복 조인식에 입회했으며, 종전 후 소련군정청 민간행정을 담당했다. 1953년 베리야 체포에 가담한 뒤 흐루쇼프의 신임으로 초대 KGB 의장이 되어 대규모 정치범 재활성화를 주도하며 탈스탈린화기 보안기관을 재편했다. 1956년 헝가리 봉기 진압을 현장 지휘했고, 이후 GRU 총국장을 지냈으나 1963년 펜콥스키 사건으로 몰락해 모든 직위와 계급, 영웅칭호를 박탈당했다.
흐루쇼프 시대의 레닌그라드 당 수장, 스탈린 시신 이장을 제안하고 당 기구의 충성 시험에 걸려 넘어진 인물
중앙위 간부회의에서 흐루쇼프가 사임 의사를 내비치자 침묵이 흘렀다. 스피리도노프가 일어나 "동지들, 니키타 세르게예비치의 바람을 지지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흐루쇼프의 얼굴이 굳었고 며칠 뒤 그는 모든 당직을 잃었다.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야간 공업학교를 마친 후 공장 노동자로 출발해 레닌그라드에서 기업 간부로 성장한 소련의 당·국가 지도자이다. 1957년 프롤 코즐로프의 후임으로 레닌그라드 지역당 제1서기에 올라 대규모 주택 건설(소위 '흐루쇼프카')과 과학·방위 산업 단지 확장을 주도했다. 1961년 제22차 당대회에서 레닌그라드 대표단장으로서 스탈린 시신의 레닌 묘역 이장을 공식 제안해 흐루쇼프의 탈스탈린화를 극적으로 추동했다. 곧 중앙위원회 서기로 발탁되었으나, 중앙위 간부회의에서 흐루쇼프의 위장 사임 제의를 진심으로 지지하는 실수를 범해 실각, 1962년부터 1970년까지 연방회의 의장이라는 의전적 직책으로 밀려났다.
「낡은 지시적 규범에 기초한 경제 관리 방식을 떠나 더 단순하고 저렴하며 효과적인 경제 규제로 나아갈 때다」
바딤 트라페즈니코프는 전기공학자이자 자동화 과학자로, 소련의 생산기술과 관리체계를 함께 바꾸려 했다. 그는 자동화의 성과가 경직된 계획 지표 아래에서는 현장에 뿌리내리기 어렵다고 보았고, 1964년 《프라우다》에 기존의 지시적 경제 운영을 비판하는 글을 발표했다. 이 개입은 자동화 연구를 기업 운영의 문제와 연결하며 코시긴 개혁의 사상적 분위기를 넓혔다.
1957년 6월 간부회. 흐루쇼프가 셰필로프의 비판을 자르며 물었다: 「자넨 얼마나 공부했나?」 셰필로프가 답했다: 「저는 김나지움에 중등학교, 적색교수학원 3년에 대학 4년입니다.」 「나는 팝 앞에서 감자 한 포대 값으로 두 겨울 배웠네.」 「그런데 어떻게 모든 분야의 전문가 행세를 하십니까?!」
소련 최초의 정치경제학 교과서 편찬을 주도한 경제학자 출신 당 이론가. 1941년 병역 면제임에도 민병대에 자원해 소장으로 종전한 보기 드문 지식인이었다. 전후 선전선동부와 프라우다 편집장을 거쳐 흐루쇼프의 핵심 이론가로 부상했고, 말렌코프 비판에서 비밀연설에 이르는 탈스탈린화의 이념적 언어를 제공했다. 1956년 외무장관으로 제3세계 외교의 물꼬를 텄지만, 이듬해 반당그룹에 가담했다가 「그들에게 가담한 셰필로프」라는 조롱 속에 몰락했다. 이후 키르기스 경제연구소와 문서보관소에서 수십 년 조용히 살았고, 사후 회고록 『불가담자』로 재평가되었다.
1984년, 포노마료프는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이 국제공산주의운동에 미칠 파장을 경고했던 자글라딘의 메모를 금고에서 꺼내며 말했다. "당신이 옳았어, 바딤 발렌티노비치!" 그리고는 다시 금고에 넣었다.
1919년 14세로 입당한 소비에트 정치가이자 사상가. 흐루쇼프 해빙기부터 페레스트로이카 직전까지 30년 넘게 중앙위 국제부장을 지내며 세계 공산당 및 민족해방운동과의 관계를 총괄했다. 1961년 중앙위 서기, 1972년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승격해 소련 외교정책의 핵심 설계자로 활동했다. 외교부가 국가 대 국가 외교를 담당했다면, 포노마료프는 당 대 당 외교와 이념 네트워크를 주도하며 소련 공산당의 국제적 영향력을 유지했다. 브레즈네프 시대 지도부 안에서 드문 반스탈린주의자였으며, 1986년 고르바초프의 개혁 속에 31년 만에 퇴장했다.
사망 직전 옐친에게 '저축이 없으니 국비로 장례를 치러 달라'고 썼다. 5년간 소련 경제를 이끈 총리는 평생 방 세 칸 아파트에서 살며 월급으로 버스를 사서 학교에 기증했다.
드니프로페트로우시크 출신의 실무형 경제 관료로, 75세에 코시긴의 뒤를 이어 각료회의 의장이 되었다. 정치적 야심과는 거리가 먼 정직한 기술자였으며, 브레즈네프·안드로포프·체르넨코 3대에 걸쳐 총리로 재임했다. 정체기 말기의 관료적 연속성을 상징했지만, 1984년에는 기업 자율과 '사회주의 시장'을 검토한 개혁위원회를 주재해 페레스트로이카 구상의 단초를 마련했다.
1978년 7월, 28년간 에스토니아를 이끈 캐빈은 중앙위원회에서 해임 통보를 받았다. 후임으로는 러시아에서 태어나 에스토니아어조차 서툰 카를 바이노가 임명되었다 — 민족 간부에 대한 브레즈네프 중앙의 신뢰 상실을 상징하는 장면이었다.
1950년부터 1978년까지 에스토니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를 지내며 소련 에스토니아를 실질적으로 이끈 정치인으로, 이후 1983년까지 에스토니아 SSR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을 역임했다. 스탈린주의자로 출발했으나 점차 온건·실용 노선으로 전환하여 '라비림(laveerimine)'이라 불리는 균형 정책(모스크바의 요구와 에스토니아 민족 이익 사이의 절충)을 구사했다. 28년간 재임하며 공화국 역사상 최장기 집권자가 되었고, CPSU 중앙위원(1952–1986)으로서 전연방 차원에서도 에스토니아의 이해를 대변했다. 1970년대 후반 브레즈네프 시기 러시아화 정책이 강화되자 중앙과 마찰을 빚었고, 결국 1978년 카를 바이노에게 자리를 내주며 교체되었다.
1941년 6월 17일, 독일 정찰기가 북방함대 기지 상공에 잇따라 출현하자 골롭코는 상부의 승인 없이 스스로 책임지고 함대 전투태세를 2호로 격상시켰다. 나흘 뒤 독일군이 침공했을 때 북방함대는 이미 전시 체제로 움직이고 있었다.
전시 내내 소련 북방함대를 지휘한 해군 제독. 테레크 코사크 출신으로 1925년 콤소몰 동원으로 해군에 입대해 프룬제 고등해군학교를 졸업하고 스페인 내전에서는 카르타헤나 해군기지 고문으로 참전했다. 1940년 34세로 북방함대 사령관에 취임해 1941년 6월 17일 독일 정찰기 출현 증가를 포착하고 스스로 책임지고 함대 전투태세를 상향 조치했으며, 전쟁 기간 내내 무르만스크 방어와 북극 호송대 호위를 지휘해 연합군의 보급로를 사수했다. 종전 후 해군 주력참모부장과 해군 제1부총사령관을 지내며 소련 해군의 원양 작전역량을 구축했고, 1955년 전후 최초로 소련 함대의 영국 공식 방문을 이끌었다.
1959년 라트비아 민족공산주의자 숙청 때, 빌리스 라치스는 후임으로 베르클라우스를 밀었지만 모스크바는 페이베를 선택했다. 라트비아의 자율적 노선을 꺾고 임명된 그는 이후 라트비아를 떠나 모스크바의 과학행정가로 남은 생을 보냈다.
라트비아인 소작농 가정에서 태어난 농화학자로, 식물 미량원소 연구의 선구자였다. 전후 라트비아 농업대학 총장과 과학아카데미 원장을 거쳐 민족소비에트 의장과 라트비아 SSR 각료회의 의장을 동시에 역임하며 흐루쇼프 시기 발트 민족 간부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1959년 라트비아 민족공산주의자 숙청 국면에서 베르클라우스 대신 정부 수반으로 발탁되었고, 이후 모스크바로 완전히 이동하여 소련 과학아카데미에서 생애를 마감했다.
1959년, 두도로프는 밀리치야의 정보원·도발자 제도를 단계적으로 철폐하라는 명령에 서명했다. 소련 경찰 역사상 거의 유일한 이 시도는 곧바로 저지되었고, 이듬해 그가 해임되면서 묻혔다.
흐루쇼프가 스탈린 시대 NKVD 출신들을 몰아내고 임명한 민간인 내무장관(MVD, 1956–1960). 화학기술자 출신으로 건설·공업 관료로 경력을 쌓았으며, 1954년 당 중앙위 건설부장을 거쳐 내무장관이 되었다. 굴라그 체제를 소규모 교정식민지 중심으로 재편하려 했고, 1959년에는 밀리치야의 정보원·도발자 활용을 단계적으로 폐지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의 임기는 정치경찰(KGB)과 분리된 내무기관의 위상이 급격히 약화되던 시기였고, 1960년 MVD 자체가 해체되면서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