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1985

해빙과 정체의 사람들 445명

스탈린의 관 뚜껑을 연 해빙과 그것을 다시 덮은 정체 사이에서, 우주와 개혁과 반체제의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

레오니트 가톱스키

Лев Маркович Гатовский
경제 운영 소련 러시아 1903–1997 ○ 자연사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을 학문으로 정초한 편집자

1949년 여름, 보즈네센스키의 『소련 전시경제』를 '중대한 마르크스-레닌주의 저작'이라 평했다는 이유로 당 중앙위 결정에 따라 《볼셰비키》 잡지에서 해임되었다.

소련의 경제학자,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보프로시 예코노미키》 주필(1957–1965)로서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을 학문으로 정초했다. 1929년 곡물 시장 연구로 집단화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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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민스크에서 의사의 아들로 출생 (유대계)
  • 1924플레하노프 국민경제연구소 졸업
  • 1927전연방 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28–1931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 가격 부문 책임자, 제1·2차 5개년 계획 작성 참여
  • 1931–1936공산주의 아카데미 경제연구소, 소비에트 무역 부문 주임
  • 1933–1937중앙국민경제회계국(TSUNKHU) 무역회전·국민경제균형 부서장
  • 1939–1949소련 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 《볼셰비키》 잡지 편집위원
  • 1949보즈네센스키 저서 호평으로 《볼셰비키》·고등당학교에서 해임
  • 1957–1965《보프로시 예코노미키》 주필
  • 1960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선출 (정치경제학)
  • 1965–1971소련 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 소장
  • 1971–1997경제연구소 주임연구원
  • 1997모스크바에서 사망, 바간코보 묘지에 안장

세르게이 세묘노비치 비류조프

Сергей Семёнович Бирюзов
군사 · 국방 소련 러시아 1904–1964 ✕ 항공사고

우크라이나·발칸 해방을 기획하고 전략로켓군을 지휘한 원수

1964년 10월 19일, 비류조프 원수는 20년 전 자신이 해방 작전을 기획했던 베오그라드로 향하던 중, 짙은 안개 속에서 탑승기 Il-18이 아발라 산에 충돌했다. 탑승자 전원 사망. 그는 자신이 해방시킨 도시의 하늘에서 최후를 맞았다.

랴잔 노동자 가정 출신으로 1922년 적군에 자원입대, 독소전쟁 첫해에만 다섯 차례 부상을 입으면서도 사단장으로 싸웠다. 이후 톨부힌 휘하에서 돈바스·크림·야시-키시네프·베오그라드 공세의 작전기획을 주도해 우크라이나·불가리아·유고슬라비아 해방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전후 방공군 총사령관, 전략로켓군 총사령관을 거쳐 1963년 총참모장에 올랐으며, 1964년 베오그라드 해방 2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러 가던 중 아발라 산 항공사고로 사망했다. 티토는 그를 유고 인민영웅으로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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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2적군 자원입대, 보병·기관총 과정 수료
  • 1926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통합군사학교 졸업, 소대장
  • 1937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제30소총사단 참모장
  • 1939–1942제132소총사단장 — 첫해 5회 부상, 스몰렌스크·모스크바 방어전
  • 1942–1943제2근위군 참모장 — 스탈린그라드 포위 후 소토성 작전
  • 1943–1944남부전선·제4우크라이나전선군 참모장 — 돈바스·크림 해방
  • 1944제3우크라이나전선군 참모장 — 야시-키시네프·베오그라드 공세 기획
  • 1944–1946제37군 사령관, 불가리아 주둔 소련군사절단장
  • 1955–1962소련 방공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 1955년 소련원수 진급
  • 1962–1963전략로켓군 총사령관
  • 1963–1964소련군 총참모장 겸 국방제1차관

알렉세이 안드레예비치 포스코노프

Алексей Андреевич Посконов
경제 운영 소련 러시아 1904–1969 ○ 재임 중 자연사

코시긴 개혁기 고스방크를 이끈 바시키르 출신 재정 엘리트

한 번은 '인민의 적'과 사냥을 갔다는 이유만으로 당적을 박탈당하고 형사입건되었다. 바시키르 중앙집행위원회가 직접 나서 그의 무죄를 입증했다.

우파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열한 살부터 일하며 바시키르 재정인민위원부 세무사로 공직에 들어간 후 평생 금융계에 몸담았다. 레닌그라드 재정경제연구소 졸업 후 우파 시·주 재정과장을 거쳐 1940년 러시아공화국 재정차관, 이듬해 재정인민위원이 되었고, 전후 소련 재무차관·제1차관으로 즈베레프와 가르부조프를 보좌했다. 1963년 8월 고스방크 총재로 취임하여 코시긴의 1965년 경제개혁(이윤 지표, 국영농장 독립채산제, 콜호스 보장임금제(1966))의 신용·결제 측면을 집행했고 러시아공화국 고스방크를 신설했다. 1937년 사냥 동행을 이유로 '인민의 적' 연루 혐의를 받았으나 바시키르 중앙집행위원회 개입으로 복권된 이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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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19제본소 견습공, 약국 창고 노동자
  • 1919–1923붉은군대 복무, 제재소 노동자, 공장위원회 지도원
  • 1923–1931바시키르 재정인민위원부 세무사·과장·차장·재정감독국장, 콜레기움 위원
  • 1931–1934레닌그라드 재정경제연구소 수학, 경제·재정 전공
  • 1934–1939우파 시 재정과장 → 바시키르 재정인민위원부 선임감사관
  • 1939–1940칼리닌주 재정과장
  • 1940–1941러시아공화국 재정부인민위원
  • 1941–1945러시아공화국 재정인민위원
  • 1945–1960소련 재무차관 · 콜레기움 위원
  • 1960–1963소련 재무제1차관
  • 1963–1969국가은행 총재 — 1965년 개혁 신용·결제 집행, 국영농장 독립채산제, 콜호스 보장임금제, 러시아공화국 고스방크 신설
  • 1966–1969CPSU 중앙감사위원회 위원
사회주의권 지도자 체코 체코 1904–1975 ↓ 실각 1968

스탈린주의 정통을 고수하다 프라하의 봄 개혁운동에 의해 축출된 체코슬로바키아 지도자

1965년 메이데이 집회 직후 즉석 인터뷰에서 "고기가 곧 나올 겁니다!"(Maso bude vbrzku!)라고 선언했다. 국민들은 "그 '곧'이라는 곳이 도대체 어디냐"고 물으며 온 나라가 웃었다.

1921년 KSČ 창립 당원이자 자물쇠공 출신으로, 슬란스키 숙청 과정에서 당 기구를 타고 부상했으며, 고트발트 사후 제1서기(1953–1968)와 대통령(1957–1968)을 겸직하며 15년간 체코슬로바키아를 통치했다. 스탈린주의 정통을 고수하며 중앙계획·검열을 강화하고 1950년대 정치재판 청산을 거부했으나, 경제 침체와 슬로바키아의 불만이 누적되며 정권 기반이 잠식되었다. 1968년 1월 두브체크에게 당직을 내주며 강제 사임함으로써 개혁의 최대 장애물이 제거되었고, 이는 곧바로 프라하의 봄을 촉발했다. 1971년 정상화 국면에서 중앙위원으로 재선되었으나 실질적 영향력은 없었고, 1975년 프라하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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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KSČ) 창립 당원으로 입당
  • 1937–1938KSČ 호도닌 지역위원회 서기
  • 1941–1945나치 점령 하 지하활동으로 체포, 마우트하우젠 수용소 수감
  • 1945–1951KSČ 프라하 시당 제1서기
  • 1951–1953KSČ 정치서기국 위원 겸 부총리
  • 1953–1968KSČ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57–1968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 1971정상화 국면 KSČ 중앙위원 재선

표트르 키릴로비치 코셰보이

Пётр Кириллович Кошевой
군사 · 국방 소련 우크라이나 1904–1976 ○ 자연사

사푼산과 쾨니히스베르크를 함락시킨 두 번의 영웅

≪적은 강하고 교활하다. 그러니 너희가 더 교활하고 더 영리해져라. 약점을 찾아내 예상치 못한 강한 일격을 가해라.≫ — 부하들을 훈련시키며.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5세에 붉은 군대에 자원입대한 소련 군사 지휘관이다. 대조국전쟁에서 티흐빈, 스탈린그라드, 크림, 동프로이센 전역을 지휘하며 사푼산 탈환과 쾨니히스베르크 함락으로 두 차례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전후에는 시베리아·키예프 군관구 사령관을 거쳐 1965년 주독 소련군 총사령관에 올랐고, 1968년 소련군 원수로 진급했다. 재임 중 바르샤바 조약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진압 작전에 주독 소련군 부대를 투입했으며, 1969년 해임될 때까지 동독 주둔 소련군의 전투태세를 강화했다. 1961년부터 1971년까지 CPSU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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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붉은 군대 자원입대, 제8적기카자크기병사단에서 복무
  • 1927우크라이나 기병학교 졸업, 소대장 보임
  • 1939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제15기병사단 참모장
  • 1940제65소총병사단 사단장 (자바이칼 군관구)
  • 1941–1942티흐빈·류반 작전에서 제65소총병사단 지휘
  • 1942–1943제24근위소총병사단장으로 스탈린그라드·북카프카스 전투
  • 1943–1944제63소총병군단장 — 돈바스·멜리토폴·크림 공세, 사푼산 탈환
  • 1944첫 번째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 수여 (5월 16일)
  • 1944–1945제71소총병군단장, 이후 제36근위소총병군단장 — 동프로이센 공세, 쾨니히스베르크 함락
  • 1945두 번째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 수여 (4월 19일), 승리 퍼레이드에서 제3벨로루시전선 연대 지휘
  • 1946–1948제6근위군 사령관, 이후 보로실로프 고등군사아카데미 과정 수료
  • 1948–1954제5군 사령관 (극동)
  • 1954–1955제11근위군 사령관 (발트 군관구)
  • 1955–1957주독 소련군 제1부총사령관
  • 1957–1960시베리아 군관구 사령관
  • 1960–1965키예프 군관구 사령관
  • 1961–1971CPSU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 1965–1969주독 소련군 총사령관
  • 1968소련군 원수 진급 (4월 15일)
  • 1969–1976국방부 감찰총감 그룹에서 명예직 수행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코시긴

Алексей Николаевич Косыгин
정부 수반 소련 러시아 1904–1980 ○ 자연사

계획에 이윤을 심으려 한 총리

1969년 9월 11일, 국경 충돌이 전면전으로 번질 위기. 코시긴은 베이징 공항에 내렸다. 저우언라이와 3시간 반 동안 마주 앉아 긴장을 풀고 국경 협상 재개에 합의했다 — 냉전기 가장 위험했던 중소 대치를 중재한 단 한 번의 공항 회담.

레닌그라드 봉쇄의 「생명의 길」 수송을 지휘하고 소련 역사상 가장 오래(16년) 총리직을 지킨 테크노크라트. 1965년 이윤·자율 지표의 경제개혁을 발의해 제8차 5개년 계획(1966–1970)에서 전후 최고 성장을 이끌었으나, 프라하의 봄 이후 브레즈네프에게 주도권을 빼앗기며 개혁은 무력화되었다. 타슈켄트에서 인도-파키스탄 중재, 다만스키 사태 후 저우언라이와 베이징 회담 등 외교 무대에서도 독자적 역할을 했다. 1979년 아프가니스탄 파병에 반대한 유일한 정치국원(「파병만은 안 된다」) 실각 두 달 뒤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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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40섬유공업인민위원
  • 1941–42레닌그라드 소개위원회: 「생명의 길」 보급선 운영
  • 1943–46러시아공화국 총리
  • 1949「레닌그라드 사건」 숙청에서 살아남다
  • 1964–80각료회의 의장(총리)
  • 1965이윤·자율 지표의 경제개혁 발의
  • 1966–70제8차 5개년 계획: 전후 최고 성장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수데츠

Владими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Судец
군사 · 국방 소비에트 러시아인 1904–1981 ○ 자연사

17항공군을 이끌고 프라하까지 진격한 공군원수, 소련 방공군 총사령관

1961년 10월 30일, 수데츠가 지휘하는 장거리항공대의 Tu-95V 폭격기가 노바야제믈랴 상공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50메가톤 수소폭탄 차르봄바를 투하했다. 충격파는 지구를 여러 바퀴 돌았다.

소비에트 공군원수로, 독소전쟁에서 제17항공군을 지휘하며 쿠르스크·드네프르-카르파티아·야시-키시뇨프·프라하 공세에 항공지원을 제공했고 1945년 소비에트연방영웅이 되었다. 전후 공군 주참모장 겸 부총사령관(1946~1949)으로 제트기 전환을 추진했고, 장거리항공대 사령관(1955~1962)으로 Tu-95K 전략폭격기와 Tu-22 초음속폭격기 배치를 주도하며 1961년 차르봄바 투하를 관할했다. 방공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1962~1966)으로 저고도 방공능력을 확충하고 쿠바 위기 시 아나디리 작전의 방공을 지원했다. 유고슬라비아 인민영웅과 몽골 인민공화국 영웅 칭호도 받은 드문 소련 군사지도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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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2제51군 공군 · 볼가군관구 공군 사령관
  • 1942–1943제1폭격항공군단장
  • 1943–1946제17항공군 사령관
  • 1946–1949공군 주참모장 · 공군 부총사령관
  • 1953–1955제26항공군 사령관
  • 1955–1962장거리항공대 사령관
  • 1962–1966방공군 총사령관 · 국방차관
  • 1966–1981국방부 감찰총감단 감찰관

파벨 알렉세예비치 체렌코프

Павел Алексеевич Черенков
이론가 소련 러시아 1904–1990 ○ 자연사

체렌코프 효과를 발견한 소련의 노벨 물리학자

«인생에 운, 불운, 행복 중 무엇이 더 많았는지 가리기는 어렵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히 안다. 극복해야 할 것이 무척 많았다는 것을.»

1934년 방사성 용액 속 푸른 빛을 목격한 한 실험물리학자가 입자물리학의 새 장을 열었다. 바빌로프의 지도 아래 체렌코프가 발견한 그 발광은 진공 속 광속보다 빠르게 매질을 통과하는 하전입자가 내는 '체렌코프 복사'로 밝혀졌고, 타므와 프랑크가 이론적으로 해명했다. 이 발견은 체렌코프 검출기라는 입자물리학의 표준 장비로 이어져 스푸트니크 3호에도 탑재되었으며, 1958년 세 사람에게 노벨 물리학상을 안겼다. 레베데프 물리연구소(FIAN)에서 평생을 바친 그는 고에너지물리학부를 창설해 이끌었고, 싱크로트론 건설과 광핵반응 연구에도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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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8보로네시 국립대 물리수학부 졸업
  • 1930레베데프 물리연구소(FIAN) 연구원
  • 1934체렌코프 복사 발견
  • 1940물리수학 박사학위 취득
  • 1946스탈린상 1급 수상, CPSU 입당
  • 1948모스크바 동력공학연구소(MEI) 교수
  • 1951스탈린상 2급 수상, MIFI 교수
  • 1958노벨 물리학상(타므, 프랑크와 공동 수상)
  • 1959FIAN 광중간자과정 연구실장
  • 1964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 1970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원사)
  • 1977소비에트 국가상 수상
  • 1984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 수여

표트르 파데예비치 로마코

Пётр Фаддеевич Ломако
중앙계획 기관 소련 러시아 1904–1990 ○ 자연사

소련 비철금속공업의 창설자이자 고스플란 의장

1988년 기네스북이 46년 장관직을 기록할 때, 로마코는 이미 2년 전 은퇴한 상태로 모스크바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소련 비철금속공업의 창설자로 46년간 장관직을 수행한 금속공학자다. 알루미늄·타이타늄 산업의 기초를 닦고 전시 우라늄 공급으로 핵개발을 뒷받침했으며, 고스플란 의장으로 계획경제 재중앙화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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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39콜추기노 비철금속가공공장장
  • 1939–1940비철금속공업 부인민위원, 알루미늄·마그네슘 총국장
  • 1940–1948비철금속공업 인민위원·장관, 전시 공장 이전과 우라늄 공급 총괄
  • 1948–1950금속공업부 제1차관으로 통합 부처에서 실무 지휘
  • 1950–1953, 1954–1957비철금속공업 장관, 알루미늄·희귀금속 생산 확대 주도
  • 1957–1961크라스노야르스크 소브나르호스 의장, 지역경제 개혁 실무
  • 1962–1965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고스플란 의장, 계획체계 재중앙화 주도
  • 1965–1986비철금속공업 장관, 브레즈네프기 산업 확장과 다이아몬드·타이타늄 생산 개시

알렉세이 세르게예비치 젤토프

Алексей Сергеевич Желтов
군사 · 국방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인 1904–1991 ○ 자연사

스탈린 사후 소비에트 군대의 최고 정치위원이자 주코프를 무너뜨린 정치장교

한때 주코프의 군사평의회 위원이었던 젤토프는 1957년 10월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주코프를 가장 맹렬히 비난한 정치장교가 되었다.

알렉세이 젤토프 상장은 1953년부터 1958년까지 소비에트 육해군 총정치국(GlavPUR) 국장을 지내며 스탈린 사후 전환기 소비에트 군대의 최고 정치위원이었다. 위대한 조국전쟁 동안 카렐리야·돈·남서·제3우크라이나 전선군 군사평의회 위원으로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우크라이나·발칸 해방 작전에서 당정치사업을 지휘했다. 1957년에는 흐루쇼프를 도와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를 국방장관직에서 축출하는 반주코프 운동의 가장 적극적인 참여자로 나섰다. 이후 군·KGB·내무성·검찰·사법 기관을 총괄하는 CPSU 중앙위 행정부장을 거쳐, 12년간 레닌 군사정치아카데미 원장으로 정치장교 교육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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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1927붉은 군대 입대, 제2모스크바 보병학교 졸업 후 소대장
  • 1937–1939제24소총병사단 군사위원 → 프리볼시스크 군관구 군사평의회 위원
  • 1941–1944극동·카렐리야 전선군, 제63군, 돈·남서·제3우크라이나 전선군 군사평의회 위원
  • 1945–1950중앙군집단 군사평의회 위원·소련 최고위원 대리 (오스트리아)
  • 1951–1953소비에트군 총간부국장
  • 1953–1958소비에트 육해군 총정치국(GlavPUR) 국장
  • 1958–1959CPSU 중앙위 행정부장
  • 1959–1971레닌 군사정치아카데미 원장
  • 1971–1991국방부 총감찰단 고문, 1981–87년 참전용사위원회 의장

블라디미르 니코노비치 스타롭스키

Владимир Никонович Старовский
중앙계획 기관 소련 러시아 1905–1975 ○ 자연사

소련 통계를 35년간 관장한 인물

«우리에겐 다른 숫자가 없습니다. 스타롭스키 동무는 아주 신중한 사람입니다. 나는 그에게서 숫자를 받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연방 회계부서입니다. 나는 그를 신뢰합니다.» — 흐루쇼프, 중앙위원회 상임간부회, 1964년 8월 19일.

1940년부터 1975년까지 소련 중앙통계국(ЦСУ)을 이끌며 35년간 국가 통계를 총괄했다. 1939년 인구총조사를 시작으로 소련의 모든 공식 인구·경제 통계를 관장했으며, 고스플란이 국가계획을 세우는 기초 데이터를 생산하는 기관의 수장으로서 명령경제의 정보 기반을 구축했다. 경제학 박사이자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으로서 수리통계 방법론의 기초를 닦았고, 흐루쇼프가 공개적으로 신뢰를 선언한 유일한 통계 책임자였다. 그러나 1960년대에는 글루시코프의 국가전산망(OGAS) 구상을 저지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여 소련 정보기술의 경로에 논란의 여지가 큰 전환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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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3우스티시솔스크 현 통계국 사무원·통계사
  • 1924–1926최고경제회의(VSNKh) 통계사, 모스크바국립대 법학부 졸업
  • 1926–1930소련 중앙통계국(ЦСУ) 통계사·연구원; RANION 경제연구소 대학원 수료
  • 1931–1937고스플란 ЦУНХУ 연구원, 인사부 차장
  • 1937–1939ЦУНХУ 전연방인구총조사국 차장
  • 1940–1941고스플란 ЦУНХУ 국장
  • 1941–1948고스플란 ЦСУ 국장 겸 고스플란 부의장
  • 1948–1975소련 각료회의 직속 ЦСУ 국장 (1957년부터 각료 급)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

Władysław Gomułka
사회주의권 지도자 폴란드 폴란드 1905–1982 ○ 폐암

1956년 폴란드 10월로 복귀해 '폴란드식 사회주의 길'을 실험한 민족공산주의자

1956년 10월 폴리트뷰로에서 — 「총검으로 통치할 수는 있지만, 그렇게 통치하는 자는 모든 것을 잃는다는 것도 알게 될 것입니다」

노동자 출신으로 폴란드 공산당에 입당해 나치 점령기에는 지하당을 이끌며 인민군과 민족평의회를 조직했다. 1948년 '민족주의적 일탈'로 숙청되어 1951년 체포·투옥되었으나, 1956년 노동자·지식인의 봉기 속에 제1서기로 복귀해 집단농장 해체·노동자평의회·문화 자유화를 추진했다. 흐루쇼프의 개입 위협을 협상으로 막아내며 폴란드의 주권 공간을 일시 확보했지만, 1968년 반지식인·반유대 캠페인과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지지로 개혁 연합은 붕괴했고, 1970년 가격 인상에 맞선 노동자 총파업 끝에 실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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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폴란드 공산당 입당
  • 1934–35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 수학
  • 1943–48폴란드 노동자당 서기장
  • 1948–51'민족주의적 일탈'로 숙청·해임, 1951년 체포
  • 1954–56석방·복권, 폴란드 10월로 복귀
  • 1956–70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제1서기
  • 1970.12가격 인상 반대 파업 속 심장발작으로 사임

알렉산드르 아키모비치 이시코프

Александр Акимович Ишков
경제 운영 소련 러시아 1905–1988 ○ 자연사

소련 원양어선단의 설계자, '어류 마피아'로 퇴장하다

1978년 '어류 마피아' 사건으로 부하 리토프가 총살형을 선고받았지만, 브레즈네프가 직접 개입했다. 이시코프는 그저 연금으로 보내졌다.

소련 수산업을 거의 40년간 이끈 정치인으로, 1940–1950년과 1954–1979년 수산장관을 지내며 소련 수산업 역사상 최장수 수장을 기록했다. 그의 지도 아래 소련은 북극에서 남극까지 전 해역을 누비는 원양 어선단을 구축했고 연간 어획량을 130만 톤에서 930만 톤으로 끌어올려 세계 최대 수산국이 되었다. 대형 냉동 트롤 어선(BMRT) 도입, 오케안(Okean) 전문 판매망, 수산업자의 날 제정도 그의 작품이다. 말년에 부하 블라디미르 리토프가 '어류 마피아' 스캔들로 처형됐지만 브레즈네프의 비호로 무사히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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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39아조프-흑해·볼가-카스피 국영어업트러스트 관리직
  • 1939–1940소련 수산공업 부인민위원
  • 1940–1946소련 수산공업 인민위원 → 수산공업장관
  • 1946–1948소련 서부지역 수산공업장관
  • 1948–1950소련 수산공업장관
  • 1950–1954수산공업 차관·유역관리국장
  • 1954–1957소련 수산공업장관
  • 1957–1965국가계획위원회 수산부문 책임자 (장관급)
  • 1965–1979소련 수산장관

이반 알렉산드로비치 세로프

Иван Александрович Серов
국가보안 기관 소련 러시아 1905–1990 ↓ 해임 1963

초대 KGB 의장

1943년 8월, 세로프는 스탈린의 전쟁 중 유일한 전선 시찰을 주선하고 3일간 그와 단둘이 동행했다. 수많은 장군 중 스탈린이 자신의 안전을 맡긴 인물은 포병 출신의 이 보안장교였다.

포병장교 출신으로 1939년 NKVD에 투신해 우크라이나 NKVD 인민위원, 전시 NKVD 부인민위원을 지냈다. 베를린 함락에 참여하고 독일 항복 조인식에 입회했으며, 종전 후 소련군정청 민간행정을 담당했다. 1953년 베리야 체포에 가담한 뒤 흐루쇼프의 신임으로 초대 KGB 의장이 되어 대규모 정치범 재활성화를 주도하며 탈스탈린화기 보안기관을 재편했다. 1956년 헝가리 봉기 진압을 현장 지휘했고, 이후 GRU 총국장을 지냈으나 1963년 펜콥스키 사건으로 몰락해 모든 직위와 계급, 영웅칭호를 박탈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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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41서우크라이나·발트 지역 병합과 강제이주 실무에 관여
  • 1941–1945전시 NKVD 보안·후방통제 업무 수행
  • 1953–1954베리야 몰락 뒤 보안기관 재편에 참여
  • 1954–1958초대 KGB 의장, 탈스탈린화기 보안기관을 재정비
  • 1958–1963GRU 총국장, 이후 펜콥스키 사건 여파로 몰락

이반 바실리예비치 스피리도노프

Иван Васильевич Спиридонов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 1905–1991 ○ 자연사

흐루쇼프 시대의 레닌그라드 당 수장, 스탈린 시신 이장을 제안하고 당 기구의 충성 시험에 걸려 넘어진 인물

중앙위 간부회의에서 흐루쇼프가 사임 의사를 내비치자 침묵이 흘렀다. 스피리도노프가 일어나 "동지들, 니키타 세르게예비치의 바람을 지지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흐루쇼프의 얼굴이 굳었고 며칠 뒤 그는 모든 당직을 잃었다.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야간 공업학교를 마친 후 공장 노동자로 출발해 레닌그라드에서 기업 간부로 성장한 소련의 당·국가 지도자이다. 1957년 프롤 코즐로프의 후임으로 레닌그라드 지역당 제1서기에 올라 대규모 주택 건설(소위 '흐루쇼프카')과 과학·방위 산업 단지 확장을 주도했다. 1961년 제22차 당대회에서 레닌그라드 대표단장으로서 스탈린 시신의 레닌 묘역 이장을 공식 제안해 흐루쇼프의 탈스탈린화를 극적으로 추동했다. 곧 중앙위원회 서기로 발탁되었으나, 중앙위 간부회의에서 흐루쇼프의 위장 사임 제의를 진심으로 지지하는 실수를 범해 실각, 1962년부터 1970년까지 연방회의 의장이라는 의전적 직책으로 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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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41오룔 직물기계 공장장
  • 1941–1944쿠즈네츠크 직물기계 공장장 (전시 소개)
  • 1944–1950레닌그라드 국영계측기 공장장
  • 1950–1952레닌그라드 모스크바 구당위 서기
  • 1952–1954레닌그라드 주집행위 부의장
  • 1954–1956레닌그라드 주당위 서기
  • 1956–1957레닌그라드 시당위 제1서기
  • 1957–1962레닌그라드 주당위 제1서기
  • 1961–1962CPSU 중앙위원회 서기
  • 1962–1970소련 최고소비에트 연방회의 의장

알렉세이 마트베예비치 루먄체프

Алексей Матвеевич Румянцев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소련 러시아 1905–1993 ○ 자연사

흐루쇼프의 경제 토론을 연 정치경제학자, 소련 사회학의 제도적 창립자

「모든 사회구성체는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났는데, 사회주의 구성체만은 조직화된 대중행동으로 생겨났다. 우리의 모든 문제가 여기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 연구소 간부 회의에서 (V.A. 야도프 회고)

흐루쇼프 해빙기의 경제학자. 1962년 리베르만 논문을 프라우다에 실어 경제개혁 논쟁을 촉발했고, 소련 최초 사회학 연구소를 창립했다. 코무니스트·프라우다 주필을 지냈으나 자유주의 성향으로 해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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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하리코프 국민경제연구소 졸업
  • 1925–1943우크라이나 SSR 농업·법무인민위원부 근무 후 하리코프대학·기계제조연구소 정치경제학 교수
  • 1940경제학 후보학위 취득, 지도교수 오스트로비탸노프, 심사 셰필로프
  • 1943–1949하리코프 주 당위원회 서기 — 흐루쇼프의 우크라이나 당 조직에서 활동
  • 1950–1952우크라이나 SSR 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 소장, 사회과학부 책임자
  • 1952–1955중앙위 경제·역사과학부장, 과학·문화부장
  • 1955–1958『콤무니스트』 주필 — 흐루쇼프 해빙기의 당 이론지
  • 1958–1964『평화와 사회주의의 문제들』(프라하) 주필 — 유럽공산주의 네트워크의 중심지
  • 1962흐루쇼프 후원으로 리베르만 논문을 『프라우다』에 게재 — 경제개혁 논의 촉발
  • 1964–1965『프라우다』 주필 — 솔제니친 게재 시도 후 해임
  • 1965–1967과학아카데미 경제학부 학술서기
  • 1967–1971과학아카데미 부원장 겸 ИКСИ 소장 — 소련 사회학의 제도화
  • 1972ИКСИ의 '지나친 자유주의'로 부원장·소장직 사임, 연구소 재편
  • 1971–1993과학아카데미 상임위원회 위원, 『정치경제학』 교과서 편집

바딤 알렉산드로비치 트라페즈니코프

Вадим Александрович Трапезников
이론가 소련 러시아 1905–1994 ○ 자연사

자동화와 경제 개혁을 잇댄 학자

「낡은 지시적 규범에 기초한 경제 관리 방식을 떠나 더 단순하고 저렴하며 효과적인 경제 규제로 나아갈 때다」

바딤 트라페즈니코프는 전기공학자이자 자동화 과학자로, 소련의 생산기술과 관리체계를 함께 바꾸려 했다. 그는 자동화의 성과가 경직된 계획 지표 아래에서는 현장에 뿌리내리기 어렵다고 보았고, 1964년 《프라우다》에 기존의 지시적 경제 운영을 비판하는 글을 발표했다. 이 개입은 자동화 연구를 기업 운영의 문제와 연결하며 코시긴 개혁의 사상적 분위기를 넓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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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8–1933전러시아 전기기술연구소 연구자
  • 1933–1938오르그에네르고 자동화 공방 수석기사
  • 1938–1941면방직 중앙연구소 자동화 연구실장
  • 1941–1951자동화·원격제어연구소 연구자 및 연구실장
  • 1951–1987자동화·원격제어연구소 소장
  • 1960–1990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모스크바대학교 제어 일반문제 학과 책임자
  • 1965–1978국가과학기술위원회 제1부위원장

드미트리 트로피모비치 셰필로프

Дмитрий Трофимович Шепилов
이념 · 선전 소련 투르크메니스탄 1905–1995 ↓ 실각 1957

흐루쇼프의 이론가에서 「그들에게 가담한 셰필로프」가 된 사람

1957년 6월 간부회. 흐루쇼프가 셰필로프의 비판을 자르며 물었다: 「자넨 얼마나 공부했나?」 셰필로프가 답했다: 「저는 김나지움에 중등학교, 적색교수학원 3년에 대학 4년입니다.」 「나는 팝 앞에서 감자 한 포대 값으로 두 겨울 배웠네.」 「그런데 어떻게 모든 분야의 전문가 행세를 하십니까?!」

소련 최초의 정치경제학 교과서 편찬을 주도한 경제학자 출신 당 이론가. 1941년 병역 면제임에도 민병대에 자원해 소장으로 종전한 보기 드문 지식인이었다. 전후 선전선동부와 프라우다 편집장을 거쳐 흐루쇼프의 핵심 이론가로 부상했고, 말렌코프 비판에서 비밀연설에 이르는 탈스탈린화의 이념적 언어를 제공했다. 1956년 외무장관으로 제3세계 외교의 물꼬를 텄지만, 이듬해 반당그룹에 가담했다가 「그들에게 가담한 셰필로프」라는 조롱 속에 몰락했다. 이후 키르기스 경제연구소와 문서보관소에서 수십 년 조용히 살았고, 사후 회고록 『불가담자』로 재평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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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모스크바대 법학부 졸업, 야쿠츠크 검찰 업무
  • 1931–1933적색교수학원, 농업경제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연구
  • 1937–1941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 학술서기, 경제학 교육·연구
  • 1941–1946전쟁기 정치장교, 소장 계급으로 종전
  • 1946–1949군 선전부와 당 선전선동부 실무
  • 1949–1952중앙위 선전부장, 스탈린 말기 이념 장치 운영
  • 1952–1956『프라우다』 주필, 스탈린 말기와 흐루쇼프 초기의 이론가
  • 1955–1956중앙위 서기, 흐루쇼프 노선의 이론적 지원
  • 1956–1957외무장관, 수에즈 위기와 제3세계 외교
  • 1957반당그룹 가담으로 실각
  • 1957–1960키르기스 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로 좌천
  • 1960–1982모스크바 국가문서보관소 하급직, 정치적 주변화

보리스 니콜라예비치 포노마료프

Борис Николаевич Пономарёв
이념 · 선전 소련 러시아 1905–1995 ○ 자연사

국제공산주의 노선을 관리한 당 국제부장

1984년, 포노마료프는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이 국제공산주의운동에 미칠 파장을 경고했던 자글라딘의 메모를 금고에서 꺼내며 말했다. "당신이 옳았어, 바딤 발렌티노비치!" 그리고는 다시 금고에 넣었다.

1919년 14세로 입당한 소비에트 정치가이자 사상가. 흐루쇼프 해빙기부터 페레스트로이카 직전까지 30년 넘게 중앙위 국제부장을 지내며 세계 공산당 및 민족해방운동과의 관계를 총괄했다. 1961년 중앙위 서기, 1972년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승격해 소련 외교정책의 핵심 설계자로 활동했다. 외교부가 국가 대 국가 외교를 담당했다면, 포노마료프는 당 대 당 외교와 이념 네트워크를 주도하며 소련 공산당의 국제적 영향력을 유지했다. 브레즈네프 시대 지도부 안에서 드문 반스탈린주의자였으며, 1986년 고르바초프의 개혁 속에 31년 만에 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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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s–1943코민테른 기관에서 활동, 국제공산주의 네트워크 실무를 익힘
  • 1943–1955코민테른 해산 뒤 중앙위 국제 라인에서 각국 공산당 관계 관리
  • 1955–1986중앙위 국제부장, 세계 공산당과 민족해방운동 지원 노선 관리
  • 1960s–1970s중소분쟁과 유로코뮤니즘 속에서 모스크바의 정통 노선을 방어
  • 1986 이후고르바초프의 외교·당 개혁 속에서 퇴장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티호노프

Никола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Тихонов
정부 수반 소련 러시아 1905–1997 ↓ 퇴임 1985

브레즈네프 말기의 보수적 총리

사망 직전 옐친에게 '저축이 없으니 국비로 장례를 치러 달라'고 썼다. 5년간 소련 경제를 이끈 총리는 평생 방 세 칸 아파트에서 살며 월급으로 버스를 사서 학교에 기증했다.

드니프로페트로우시크 출신의 실무형 경제 관료로, 75세에 코시긴의 뒤를 이어 각료회의 의장이 되었다. 정치적 야심과는 거리가 먼 정직한 기술자였으며, 브레즈네프·안드로포프·체르넨코 3대에 걸쳐 총리로 재임했다. 정체기 말기의 관료적 연속성을 상징했지만, 1984년에는 기업 자율과 '사회주의 시장'을 검토한 개혁위원회를 주재해 페레스트로이카 구상의 단초를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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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0–1985각료회의 의장

요한네스 구스타보비치 캐빈

Иван Густавович Кэбин
민족문제 · 연방 관리 소련 에스토니아 1905–1999 ○ 자연사

모스크바와 에스토니아 사이를 28년간 조종한 실용적 민족공산주의자

1978년 7월, 28년간 에스토니아를 이끈 캐빈은 중앙위원회에서 해임 통보를 받았다. 후임으로는 러시아에서 태어나 에스토니아어조차 서툰 카를 바이노가 임명되었다 — 민족 간부에 대한 브레즈네프 중앙의 신뢰 상실을 상징하는 장면이었다.

1950년부터 1978년까지 에스토니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를 지내며 소련 에스토니아를 실질적으로 이끈 정치인으로, 이후 1983년까지 에스토니아 SSR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을 역임했다. 스탈린주의자로 출발했으나 점차 온건·실용 노선으로 전환하여 '라비림(laveerimine)'이라 불리는 균형 정책(모스크바의 요구와 에스토니아 민족 이익 사이의 절충)을 구사했다. 28년간 재임하며 공화국 역사상 최장기 집권자가 되었고, CPSU 중앙위원(1952–1986)으로서 전연방 차원에서도 에스토니아의 이해를 대변했다. 1970년대 후반 브레즈네프 시기 러시아화 정책이 강화되자 중앙과 마찰을 빚었고, 결국 1978년 카를 바이노에게 자리를 내주며 교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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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5에스토니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출판부문장, 이후 선전선동부문 제1부부장
  • 1946–1948에스토니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설 당역사연구소 소장
  • 1948–1950에스토니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 담당 서기
  • 1950–1978에스토니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52–1986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78–1983에스토니아 SSR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 (국가원수)

아르세니 그리고리예비치 골롭코

Арсений Григорьевич Головко
군사 · 국방 소련 러시아 1906–1962 ○ 자연사

북극 호송대를 지킨 북방함대 사령관, 소련 해군 대서양 작전역량의 설계자

1941년 6월 17일, 독일 정찰기가 북방함대 기지 상공에 잇따라 출현하자 골롭코는 상부의 승인 없이 스스로 책임지고 함대 전투태세를 2호로 격상시켰다. 나흘 뒤 독일군이 침공했을 때 북방함대는 이미 전시 체제로 움직이고 있었다.

전시 내내 소련 북방함대를 지휘한 해군 제독. 테레크 코사크 출신으로 1925년 콤소몰 동원으로 해군에 입대해 프룬제 고등해군학교를 졸업하고 스페인 내전에서는 카르타헤나 해군기지 고문으로 참전했다. 1940년 34세로 북방함대 사령관에 취임해 1941년 6월 17일 독일 정찰기 출현 증가를 포착하고 스스로 책임지고 함대 전투태세를 상향 조치했으며, 전쟁 기간 내내 무르만스크 방어와 북극 호송대 호위를 지휘해 연합군의 보급로를 사수했다. 종전 후 해군 주력참모부장과 해군 제1부총사령관을 지내며 소련 해군의 원양 작전역량을 구축했고, 1955년 전후 최초로 소련 함대의 영국 공식 방문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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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콤소몰 동원으로 해군 입대
  • 1928프룬제 고등해군학교 졸업
  • 1937–1938스페인 내전: 카르타헤나 해군기지 고문
  • 1938–1939카스피 소함대 사령관, 이후 아무르 소함대 사령관
  • 1940–1946북방함대 사령관
  • 1947–1950해군 주력참모부장·해군총사령관 부사령관
  • 1952–1956제4함대 사령관, 이후 발트함대 사령관
  • 1956–1962해군 제1부총사령관

야니스 볼데마로비치 페이베

Ян Вольдемарович Пейве
민족문제 · 연방 관리 소련 라트비아 1906–1976 ○ 자연사

미량원소에서 연방 정치까지: 라트비아 농화학자가 민족소비에트 의장이 되다

1959년 라트비아 민족공산주의자 숙청 때, 빌리스 라치스는 후임으로 베르클라우스를 밀었지만 모스크바는 페이베를 선택했다. 라트비아의 자율적 노선을 꺾고 임명된 그는 이후 라트비아를 떠나 모스크바의 과학행정가로 남은 생을 보냈다.

라트비아인 소작농 가정에서 태어난 농화학자로, 식물 미량원소 연구의 선구자였다. 전후 라트비아 농업대학 총장과 과학아카데미 원장을 거쳐 민족소비에트 의장과 라트비아 SSR 각료회의 의장을 동시에 역임하며 흐루쇼프 시기 발트 민족 간부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1959년 라트비아 민족공산주의자 숙청 국면에서 베르클라우스 대신 정부 수반으로 발탁되었고, 이후 모스크바로 완전히 이동하여 소련 과학아카데미에서 생애를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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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티미랴제프 농업대학 졸업, 전연합 아마연구소에서 연구 경력 시작
  • 1940농업학 박사 학위 취득, 볼셰비키당 입당
  • 1944–1950라트비아 농업대학 초대 총장
  • 1951–1959라트비아 SSR 과학아카데미 원장
  • 1958–1966소련 최고소비에트 민족소비에트 의장
  • 1959–1962라트비아 SSR 각료회의 의장
  • 1966–1971소련 과학아카데미 간사장, 이후 일반생물학부 학술서기
  • 1969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 수여, 레닌상(1964) 등 다수 훈장

니콜라이 파블로비치 두도로프

Николай Павлович Дудоров
국가보안 기관 소련 러시아 1906–1977 ○ 자연사

흐루쇼프의 민간인 내무장관, 정보원 제도를 폐지하려다 좌초되다

1959년, 두도로프는 밀리치야의 정보원·도발자 제도를 단계적으로 철폐하라는 명령에 서명했다. 소련 경찰 역사상 거의 유일한 이 시도는 곧바로 저지되었고, 이듬해 그가 해임되면서 묻혔다.

흐루쇼프가 스탈린 시대 NKVD 출신들을 몰아내고 임명한 민간인 내무장관(MVD, 1956–1960). 화학기술자 출신으로 건설·공업 관료로 경력을 쌓았으며, 1954년 당 중앙위 건설부장을 거쳐 내무장관이 되었다. 굴라그 체제를 소규모 교정식민지 중심으로 재편하려 했고, 1959년에는 밀리치야의 정보원·도발자 활용을 단계적으로 폐지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의 임기는 정치경찰(KGB)과 분리된 내무기관의 위상이 급격히 약화되던 시기였고, 1960년 MVD 자체가 해체되면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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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2–1929모스크바 칼리닌 크리스탈 공장 견습공·기능공
  • 1929–1934모스크바 화학기술연구소(멘델레예프 대학) 학생
  • 1934–1937모스크바 아브토스테클로 공장 '트리플렉스' 작업장장
  • 1937–1949중공업·건설자재 인민위원부에서 생산·당위원회·관리직 역임
  • 1950–1952모스크바 시당 건설부장, 이후 모스크바 시소비에트 부의장
  • 1954–1956CPSU 중앙위원회 건설부장
  • 1956–1960소련 내무장관(MVD): 굴라그 개편, 밀리치야 정보원제 폐지 시도
  • 1960–19721967년 세계박람회 총감독, 이후 모스크바 건설자재 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