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들이 생명을 구하려 애쓰는 병상에서 팔라흐는 말했다: '내 행동은 이미 목적을 달성했다.' 그리고 동료 학생들에게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말고 살아서 투쟁하라고 당부했다.
1969년 1월 16일, 바르샤바조약군 점령 5개월 만에 체코 사회가 체념으로 빠져드는 것을 막기 위해 바츨라프 광장에서 분신한 카렐대학교 학생. 검열 폐지와 소련군 기관지 발행 중단을 요구하며 자신을 '인간횃불 1호'라 부른 그는 사흘 만에 사망했다. 20만 명이 운집한 장례식은 정상화 직전 체코슬로바키아의 마지막 항의였고, 20년 후 그의 기일 시위는 벨벳 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시베리아 튜멘주 출신의 빅토르 바클라노프는 1967년 열여덟 살에 우크라이나 콜호스 '기간트'의 기계화공이 되었고, 37년간 한 농장에서 일하며 노동영예훈장 3개 등급을 모두 받아 완전 수훈자가 되었다.
소련의 농업 노동자이자 국가·정치 인물로, 드네프로페트롭스크주 콜호스 '기간트'에서 기계화공으로 평생 일하며 전연방·공화국 차원의 수확 경쟁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노동영예훈장 3급(1975), 2급(1982), 1급(1987)을 차례로 받아 완전 수훈자가 되었고,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에는 콜호스 조합 대표로 소련 인민대의원(1989~1991)에 선출되었다.
폭발 직전 동료에게 전화를 걸어 "22번 펌프 하부 급수를 재충전해야 해… 좋아, 잠깐만…"이라고 말했다. 그게 그의 마지막 목소리였다.
키이우주 크라피브냐에서 태어나 1978년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에 입사해 주순환펌프(GCN) 운전원으로 일했다. 1986년 4월 26일, 4호기 안전시험 중 폭발이 일어났을 때 그는 북쪽 GCN 펌프실에 있었고, 건물 잔해에 매몰되어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시신은 지금도 석관 내부 잔해 속에 남아 있으며, 3호기와 4호기 사이 격벽에는 그의 기념 명판이 설치되어 있다.
동료들이 무너진 계측실에서 그를 끌어냈지만, 그는 끝내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오전 6시 프리피야티 병원에서 숨졌다.
블라디미르 샤셰노크는 원자력발전소의 계측·자동화 설비를 조정하고 시험하던 기술자였다. 체르노빌 4호기 시험에 참여하던 중 폭발로 척추와 갈비뼈가 부러지고 중화상과 방사선 화상을 입었으며, 동료들에게 구조되어 프리피야티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의식을 되찾지 못한 채 사망했다. 그는 사고 당일 숨진 두 사람 가운데 한 명으로, 발전소의 기술 노동이 재난의 최전선에 놓였음을 보여 준다.
그는 이렇게 썼다: "소련 VPK의 역사는 전쟁과 전쟁 준비의 연속이었고, 바로 그것이 소련 경제 전체의 역사이기도 하다."
소련 군산복합체(VPK)의 형성과 작동을 처음 체계적으로 밝혀낸 러시아의 역사가·경제사가. 1996년 출간된 『1920~1950년대 소련의 군산복합체』는 이 분야의 기본 문헌이며, 케임브리지 대학의 존 바버, 마크 해리슨과의 공동 연구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키로프 농촌 출신으로 교사로 일하다 모스크바 국립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했고, 1988년 CPSU 중앙위 산하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에서 연구를 시작했다. 소련 붕괴 후 러시아 과학아카데미에서 연구를 이어갔으며, 대통령 행정실 자문과 스베르방크 금융 실무를 거치며 학문과 현실 사이를 오갔다.
1965년 3월 18일, 알렉세이 레오노프는 발사 때 접혀 있던 볼가 에어록이 궤도에서 부풀어 오른 뒤 그 문을 열고 우주로 나갔다.
보리스 미하일로프는 모스크바 근교 토밀리노의 제918공장(훗날 NPO 즈베즈다)에서 수석 설계자로 일하며 1964년 중반, 단 9개월 만에 팽창식 에어록 '볼가'를 설계·제작·시험한 인물이다. 보스호트 우주선에 금속제 에어록을 탑재할 공간이 없었기에, 발사 시에는 접혀 있다가 궤도에서 부풀어 오르는 그의 유연 구조물 설계가 유일한 해법이었다. 1965년 3월 18일 알렉세이 레오노프는 바로 이 에어록을 통해 인류 최초로 우주 공간으로 걸어 나갔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벨라루스의 작가이자 기자로, 러시아어로 전쟁과 사회적 격변을 겪은 사람들의 증언을 엮어 집단적 기억의 문학을 만들었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와 《아연 소년들》에서 공식 영웅담이 가린 여성과 병사의 경험을 드러냈고, 《체르노빌의 기도》에서는 1986년 재난 뒤 생존자와 유가족, ликвидатор들의 목소리로 기술 재난의 인간적 결과를 기록했다. 그녀의 작업은 사실의 기록과 문학적 구성 사이의 긴장을 감수하면서도 개인의 목소리를 역사 이해의 중심에 놓았으며, 2015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테레슈코바의 예비 우주비행사, 카마닌이 신체적 최고라 했지만 대중역할엔 내성적이었던 낙하산 국가대표
「우리는 해볼 가치가 있다고 결정했다」: 비밀경찰로부터 우주비행사단 입단 제의를 받고, 약혼자와 함께 단골 카페에서 문 닫을 때까지 고민한 끝에.
우랄 공과대학을 졸업한 기계공학자이자 국가대표 낙하산 선수로, 1962년 소련 최초 여성 우주비행사단 5인에 선발되었다. 1963년 보스토크 6호 비행에서 발렌티나 테레슈코바의 주예비 비행사로 훈련받았으며, 니콜라이 카마닌은 그녀를 신체적으로 가장 우수하다고 평가했으나 대외 선전에 필요한 외향성이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이후 포노마료바와 함께 보스호트 계획 최초 여성 우주유영 임무를 준비했으나 계획 취소로 무산되었고, 1969년 여성 비행사단 해체 후 우주비행사훈련센터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며 심리학 후보학위를 취득했다.
1980년 7월, 그는 미에치스와프 야기엘스키와 함께 파업 중인 루블린으로 파견된 정부 대표단에 합류했다.
즈지스와프 쿠로프스키는 폴란드 통일노동자당의 청년조직에서 성장해 당·국가 기구의 중견 간부가 된 정치가였다. 그는 비아위스토크 지역 당 지도부와 중앙위원회에서 활동하며 농업·청년·경제 행정을 연결했다. 1980년 루블린 노동자들의 파업이 확산되자 미에치스와프 야기엘스키와 함께 정부 대표단으로 파견되어 임금과 생활 조건을 둘러싼 요구를 협상했다. 이후에도 대외경제 관료로 일하며 인민공화국 체제의 관리자로 남았다.
그는 파업 첫날 국가보안기관의 보고가 믿을 수 없다며 즉시 현장 정보를 모으라고 지시했다.
타데우시 피슈바흐는 폴란드 통일노동자당의 당료이자 외교관으로, 1975년부터 그단스크 당 제1서기를 지냈다. 1980년 8월 그는 파업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데 반대하며 노동자 대표들과 초기 협상에 나섰고, 미에치스와프 야기엘스키가 도착한 뒤에도 정부 측 협상에 관여했다. 그러나 그의 온건한 조정은 독립 노조를 통제하려는 당의 전략과 충돌했고, 계엄 이후 중앙 정치에서 밀려났다. 이후 의회 부의장과 핀란드·라트비아 주재 대사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