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초, 아우에스페르크는 프라하의 자기 사무실에서 밀란시르·리흐타·시크와 함께 행동강령 초안을 써 내려갔다.
프라하의 봄을 이끈 행동강령의 제5장을 직접 집필하고 실무그룹을 이끈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이념간부였다. 노보트니의 비서실장으로 정치 경력을 쌓았고, 1965년부터 이념부장으로 문화·학문 영역에 대한 검열을 주도했다. 1968년 4월 행동강령 초안을 완성했으나 침공 직후에는 드레스덴의 친소 방송에 참여했고, 후사크 체제에서 국제정치부장과 네덜란드 대사를 지내며 정상화를 충실히 집행했다.
소련 해군 중장.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잠수함 B-59에서 핵어뢰 발사를 저지한 장교로, 두 명의 지휘관이 발사에 동의했으나 아르히포프만이 거부하여 핵전쟁을 막았다. 1961년 K-19 원자력 잠수함의 방사능 누출 사고에서도 승무원으로 복무하며 피폭을 입었다. 이후 69여단장, 37사단장을 거쳐 카스피 고등해군학교 교장을 지냈으며, 1981년 중장으로 진급했다.
1981년 직접위성방송 시스템 '에크란'이 가동되자, 시베리아와 극동의 오지에서도 안테나만 있으면 모스크바 TV를 시청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공로로 샴신은 레닌상을 받았다.
통신 공학자 출신으로, 1965년부터 세계 최초의 위성TV 배급망 오르비타와 직접위성방송 시스템 에크란 개발에 핵심적 역할을 했으며, 에크란으로 1981년 레닌상을 받았다. 1980년부터 1989년까지 소련 통신장관으로서 통합자동통신망(EASS)을 구축하고 전국 간선 케이블망을 확장했으며, 디지털 교환기 도입의 기초를 마련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소련 인구의 98%가 TV 1채널, 95%가 2채널을 시청할 수 있게 되었다. 퇴임 후에도 로스텔레콤 이사회 의장을 지내며 러시아 통신 산업에 기여했다.
상세 이력 보기
1949통신부 산하 NII-100 연구소 기술자, 선임설계자, 선임연구원
1958원거리무선통신연구소(NIIDAR) 연구실장, 탄도미사일 초장거리탐지 레이더 시스템 개발 참여
1965국립무선연구소(NIIR) 과학담당 부소장 — 오르비타 및 에크란 위성 시스템 개발 주도
20년간 단 하나의 인간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다고 선언하고 「이천 마디 말」로 저항한 체코의 작가
「지난 20년 동안 이 나라에서는 단 하나의 인간적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다」고 1967년 작가대회에서 선언한 바출리크 앞에서 당 대표단은 퇴장했고 청중은 긴 박수를 보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작가이자 공산당원이었다가 1967년 제4차 체코슬로바키아 작가대회에서 노보트니 정권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연설로 당에서 축출되었다. 1968년 6월 대표작 「이천 마디 말」을 발표하여 시민의 자발적 행동과 개혁 심화를 촉구했고, 이는 프라하의 봄을 상징하는 문헌이 되었으나 소련의 개입 구실로도 이용되었다. 침공 이후 출판이 전면 금지되었으나, 지하 출판사 페틀리체를 설립하여 하벨·클리마 등 금지 작가들의 작품을 17년간 펴냈다. 1977년 헌장 77의 서명자로서 체제 비판을 이어갔고, 1989년 이후 『리도베 노비니』의 고정 칼럼니스트로 매주 체코 사회를 논평하며 2015년까지 활동했다.
「나는 태양을 향해 우주선을 지향시킬 수 없다」 — 소유즈 1호의 잇단 고장 속에서도 코마로프는 끝까지 수동 조작을 시도하며 지상에 상황을 보고했다.
소련 공군의 시험비행사이자 항공우주공학자로, 1964년 보스호트 1호 사령관으로서 세계 최초의 다인승 우주비행을 지휘했다. 주콥스키 공군공학아카데미를 졸업한 몇 안 되는 우주비행사 중 한 명으로, 보스토크·보스호트 우주선 설계와 우주비행사 훈련 평가에 핵심적 기여를 했다. 1967년 소유즈 1호의 첫 유인 시험비행에서 단독 조종사로 나섰으나, 재진입 후 주낙하산 미전개로 귀환선이 추락하여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 사망자가 되었다. 그의 희생은 소련 유인우주계획의 설계 검증과 안전 절차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게 한 전환점이었다.
"브레즈네프의 총애를 받은 인물은 포노마료프의 제1부부장 바딤 자글라딘이었다. 사냥 트로피를 선물받고, 공식 사진에서 항상 총비서 바로 뒤에 자리했다." — 경제학자 스타니슬라프 멘시코프
중앙위 국제부에서 24년, 그중 13년을 보리스 포노마료프 아래 제1부부장으로 지내며 서유럽 공산당을 상대한 소련의 핵심 창구였다. 유로코뮤니즘 시대에 미테랑, 브란트, 나폴리타노와 교류하며 사회민주주의에 수렴하는 개혁된 공산주의를 주창했고, 고르바초프 '신사고' 외교의 이론적 토대를 이반 프롤로프와 함께 개발했다.
1971년 3월, '5개년 계획의 석유 채굴 과제 수행과 높은 기술·경제 지표 달성에 대한 탁월한 공로'로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마이코프 출신의 석유 기술자로, 타타르·페름 유전에서 경력을 쌓아 소련 석유공업 장관(1977~1985)까지 오른 인물. 발렌틴 샤신의 사망으로 공석이 된 장관직을 이어받아, 브레즈네프 후기 서시베리아 유전의 집중 개발을 지휘하며 소련을 세계 최대 산유국 지위로 이끌었다. 1981년부터 1986년까지 CPSU 중앙위원 후보위원을 지냈고, 고르바초프 집권 직전인 1985년 2월 퇴임했다. 사회주의노동영웅(1971) 수훈자이며, 퇴임 후 모스크바에서 여생을 보냈다.
레프 페옥티스토프는 소련의 핵·열핵무기 개발을 이끈 이론물리학자이자, 훗날 핵군축과 원자로 안전을 주장한 과학자였다. 아르자마스-16에서 슬로이카를 바탕으로 한 열핵무기 연구에 참여했고, ‘제3의 아이디어’로 불린 2단계 설계의 돌파를 목격한 증언을 남겼다. 그는 무기 개발의 성과를 인정하면서도 핵실험과 군비경쟁의 무의미를 공개적으로 문제 삼았고, 말년에는 레이저 핵융합과 본질적으로 안전한 원자로를 연구했다.
1989년 제1차 인민대표대회에서 소비에트 권력 사상 처음으로 각료 인준 투표가 실시되었을 때, 카멘체프는 거부된 극소수 부총리 중 한 명이었다.
모스크바 의사 집안에서 태어나 14세에 강선박 화부로 노동을 시작했다. 모스크바 수산공업연구소를 졸업하고 무르만스크의 트롤어선 기지에서 엔지니어로 성장하여, 1979년 소련 수산장관에 올랐다. 재임 7년간 소련 원양어업은 세계 최대 어획량을 기록했고, 어획·가공·선단 건조를 아우르는 수직 통합 체계를 확립했다. 1986년 페레스트로이카가 시작되자 대외경제 담당 부총리로 승진했으나, 1989년 제1차 인민대표대회에서 각료 인준이 거부된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가 되었다.
그의 이름 '제르멘'은 아버지가 근무했던 국가정치보안부(OGPU)의 두 수장 — 펠릭스 제르진스키와 뱌체슬라프 멘진스키 — 의 이름 첫 음절을 조합한 것이다.
소련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 경영 이론가. 알렉세이 코시긴의 사위로, 1965년부터 1985년까지 국가과학기술위원회(GKNT) 부의장을 지내며 소련의 과학기술 정책을 조율했다. 로마 클럽 회원이자 오스트리아 국제응용시스템분석연구소(IIASA)의 공동 설립자로서, 냉전기 소련 계획과학과 서구 시스템 분석 사이의 드문 가교 역할을 수행했다. 1976년 전연방시스템연구소(VNIISI)를 설립하여 소장을 맡았으며, 이 연구소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학문 분위기 속에서 시장 지향적 개혁 아이디어를 배양하여 페레스트로이카 시대 경제 논쟁의 산실이 되었다.
소설 속 '만쿠르트' — 기억과 정체성을 빼앗긴 채 어머니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노예 — 는 소비에트 지식인들 사이에서 역사적 기억상실의 대명사가 되었다.
칭기즈 아이트마토프는 키르기스인으로 러시아어로 주로 쓴 소비에트 대표 작가로, 중앙아시아 민속과 구전 전통을 현대적 서사에 녹여냈다. 중편 『자밀라』(1958)로 세계적 명성을 얻고 『굴사리여 안녕』 『하얀 배』로 레닌상(1963)과 세 차례 소련 국가상을 받았다. 대표작 『백 년보다 긴 하루』(1980)는 초원의 외딴 역을 배경으로 전설과 SF를 엮어, 기억을 빼앗긴 '만쿠르트'를 소비에트 지성사의 상징적 개념으로 만들었다. 고르바초프의 문화 고문으로 페레스트로이카를 지지했고, 룩셈부르크 대사(1990~1993)와 키르기스스탄의 EU·NATO·유네스코 대사(2000~2008)를 지냈다. 175개 언어로 번역된 그의 작품은 중앙아시아의 목소리를 세계문학에 각인시켰다.
사하로프의 이론 부서에서 출발해 RDS-6s, RDS-37, 차르 봄바 개발에 참여하고 메가톤급 신형 전하 설계를 제안한 소련의 핵물리학자다. 냉전 후기 옐친 정부 아래 소련 핵무기 문서고의 수석 해제자로서 다권본 『소련 원자력 프로젝트』를 편찬했으며, 클라우스 푹스의 1948년 보고서와 '제3의 아이디어'의 기원을 분석한 논문으로 역사학적 논쟁의 중심에 섰다. 그의 기록 작업은 1955년 방사선 내파 설계가 독자적 성취인지 간첩 정보에 힘입은 것인지를 둘러싼 논쟁의 실증적 토대가 되었다.
옐친의 정치적 후견인, 국방산업을 관장한 당 서기, 우스티노프를 꺾고 T-72를 관철시킨 실무형 관료
T-72 전차가 시속 70킬로미터로 질주하며 불꽃을 튀기자, 그레치코 원수가 말했다. "보고할 것도 없네. 생산에 들어가야 해." 곧바로 브레즈네프에게 전화를 걸어 덧붙였다. "우스티노프? 엿이나 먹으라지, 그 작자 헛소리랑 같이!"
야코프 랴보프는 스베르들롭스크 주당위 제1서기(1971–1976)와 CPSU 중앙위원회 서기(1976–1979)로서 소련 군수산업을 총괄한 당-국가 관료다. 우랄 기술자 출신으로 키릴렌코의 발탁을 받아 스베르들롭스크 당 조직을 장악했고, 보리스 옐친을 발굴해 후계자로 추천했다. 중앙당 서기로 옮겨 국방을 담당하자 우스티노프와 T-72 전차 채택을 두고 정면 충돌했으며, 그레치코 원수의 지지로 T-72를 소련 주력 전차로 관철시켰다. 이후 국가계획위 제1부의장, 대외경제관계위 의장, 각료회의 부의장, 주프랑스 대사를 역임하고 페레스트로이카 말기 고르바초프 및 리즈코프와의 갈등으로 물러났다.
안드로포프가 서기장이 되자 탸젤니코프는 브레즈네프에게 통했던 방식을 그대로 따랐다. 젊은 안드로포프가 카렐리야에서 썼다는 시를 찾아 나선 것이다. 안드로포프는 그런 찬양이 필요 없었다. 탸젤니코프는 루마니아 대사로 떠났다.
브레즈네프 시대에 콤소몰 중앙위원회 제1서기(1968–1977), CPSU 중앙위원회 선전부장(1977–1982), 주루마니아 소련 대사(1982–1990)를 지낸 소비에트 당-국가 엘리트의 전형이다. 콤소몰 지도자로서 바이칼-아무르 간선철도(BAM) 건설을 비롯한 대규모 청년 동원 사업을 총괄했으며, 1971년부터 19년간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첼랴빈스크 교육대학 총장에서 지역 당 이념비서를 거쳐 전국 청년 조직의 수장으로 발탁된 그의 경로는 후기 소비에트 노멘클라투라의 표준 궤적을 보여준다. 브레즈네프에 대한 개인적 충성으로 승진했으나, 안드로포프 집권 후에는 같은 방식이 통하지 않아 루마니아 대사로 전출되었고 차우셰스쿠 정권 말기까지 부쿠레슈티에 머물렀다.
밤중에 브레즈네프가 직접 전화를 걸었다: "들어봐, 심판이 왜 '니스트루'를 편파 판정한 거야? 조치를 취해." 또 다른 고위 인사가 전화해 말했다: "프라하에 연결돼 있나? 당장 전화해서 하키 선수들에게 골대를 향해 슛을 날리라고 해."
셸레핀의 후원 아래 30세에 콤소몰 제1서기가 되어 9년간 청년동맹을 이끌었다. 흐루쇼프의 탈스탈린화에 맞서 ≪프라우다≫를 통해 솔제니친·에렌부르크를 공개 공격하고, 1930년대를 어두운 색으로만 그리는 풍조를 비판한 강경파였다. 1968년 브레즈네프가 셸레핀 계열을 숙청할 때 체육위원회 의장으로 밀려났으나, 오히려 15년간 소련 스포츠의 황금기를 진두지휘하며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과 1972년 슈퍼시리즈를 성사시켰다. 안드로포프 집권 후 몽골·버마 대사로 전출되어 사실상 은퇴했다.
보스토크 3호가 궤도에 오르자 니콜라예프는 의자에서 몸을 풀고 기내에 떠올랐다: 가가린도 티토프도 해내지 못한, 인간이 우주에서 처음으로 중력의 속박을 벗어난 순간이었다.
추바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소련 3호 우주비행사. 1962년 8월 보스토크 3호로 64회 지구궤도를 선회, 4일간의 인류 첫 다중일수 우주비행을 실현했다. 파벨 포포비치의 보스토크 4호와 첫 동시비행을 이루어 이후 여성 우주비행 임무의 이중발사 선례를 세웠고, 이 비행으로 3일 이상 체공이 가능함을 입증했다. 1970년 소유즈 9호로 18일간 우주에 머물며 장기체류의 생리적 한계('니콜라예프 효과')를 드러냈고, 발렌티나 테레슈코바와의 결혼(1963)은 흐루쇼프가 주례한 냉전기의 대표적 선전극이었다.
1990년 6월, 흐리스토라드노프는 러시아 정교회 지방공의회에서 소비에트 정부를 대표해 연단에 섰다. 그가 인사말을 전한 바로 그 공의회는 알렉시 2세를 새 총대주교로 선출했다.
유리 흐리스토라드노프는 브레즈네프 시대 고리키(니즈니노브고로드) 주 당위원회 제1서기로 14년간 재임하며 도시의 대규모 주택 건설과 지하철 착공을 주도한 소련의 지역 당 간부였다. 고리키 자동차 공장의 주물 공장에서 노동자로 출발하여 당 기구를 따라 승진했고, 1976년부터 1990년까지 CPSU 중앙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에는 최고소비에트 연방회의 의장(1988~1989)을 거쳐 소련 각료회의 산하 종무위원회의 마지막 의장(1989~1991)으로서 고르바초프 치하의 종교 자유화 국면에서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관장했다. 1990년 러시아 정교회 지방공의회에서 소비에트 정부를 대표하여 인사말을 전했으며, 이 공의회는 알렉시 2세 총대주교를 선출했다.
페레스트로이카가 한창이던 1988년, 그는 당대회 연단에서 이렇게 말했다: "노동조합은 더 이상 국가 기구의 부속물이어서는 안 됩니다."
모르드바 출신의 임업 기술자로, 1951년 모스크바 임업기술대학을 졸업한 뒤 임업·제지·목재가공 산업 현장에서 경력을 쌓았다. 1963년 임업노조 중앙위원장으로 노동조합 활동에 들어서 1968년 전소비에트 중앙노동조합평의회(VTsSPS) 서기가 되어 국가사회보험 예산을 관장했다. 1980년 임업·제지·목재가공공업 장관을 지냈고, 1982년부터 1990년까지 VTsSPS 의장으로서 1억 3천만 조합원을 거느린 소련 노동조합 체제를 이끌었다.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당 중앙위원이자 최고회의 간부회의 위원으로서 노동조합의 행정명령 체계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했으며, 1990년 자발적 사임으로 소비에트 노조 체제의 마지막 장을 닫았다.
상세 이력 보기
1951–1963임업·목재가공 산업 현장에서 기술자로 성장, 여러 레스프롬호스의 주임기사·소장 역임
다른 사람들은 자식을 대사관에 두는데, 왜 아들을 알단으로 보냈냐는 질문에 — 「7년 후에 그 현장 학교를 거친, 진짜 지질학자가 되게 하려는 겁니다.」
예브게니 코즐롭스키는 소련 지질학의 '황금기'를 이끈 최장수 지질장관(1975–1989)으로, 재임 기간 소련의 광물자원 기반을 두 배로 확장하고 서시베리아·카스피·중앙아시아에서 대규모 유전과 가스전 개발을 주도했다. 달동 출신으로 부시추조수에서 출발해 극동 솔네치노예 주석광산의 조기 탐사를 성공시켜 레닌상을 수상했으며, 이후 과학기술 혁신을 중시하는 경영자로 성장했다. 그의 지휘 아래 추진된 콜라 초심층 시추는 12,620미터로 기네스 세계기록에 올랐고, 소련은 400척 규모의 지질탐사선단을 보유하게 되었다. 소련 붕괴 후에도 러시아 광물자원 정책의 이론가로 활동하며, 지질학을 국가안보의 기초로 재정립하려는 작업을 마지막까지 이어갔다.
1968년 12월 『리스티』지에 실린 「체코의 운명」에서: "프라하의 봄은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을 세계사의 중심으로 옮겨 놓았으며, 우리 민족은 자신의 위대함을 목도했다."
체코-프랑스 소설가. 청년기 공산당 입당 후 두 차례 제명되었고, 1967년 작가동맹 대회에서 검열 철폐 연설로 프라하의 봄의 서막을 열었다. 침공 직후 「체코의 운명」(Český úděl)을 발표, 프라하의 봄이 사회주의와 민주주의를 양립시키려 한 보편적 시도라고 주장하며 바츨라프 하벨과 역사적 논쟁을 벌였다. 1975년 프랑스로 망명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1984)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고, 2023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즈데녜크 믈리나르시는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주의 정치가이자 법률가로, 사회주의를 민주적 통제와 시민의 능동성에 결합하려 했다. 그는 1968년 프라하의 봄에서 중앙위원회 서기로 일하며 알렉산데르 두브체크 주변의 개혁 지도부에 참여했고, 행동강령을 만든 정치·법률 연구팀의 핵심 인물이었다. 그러나 바르샤바조약군의 침공 뒤 모스크바 의정서에 서명했고 곧 개혁 노선의 한계와 점령의 현실에 부딪혀 당과 공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헌장 77에 서명하고 오스트리아로 망명해 정치학자이자 프라하의 봄을 성찰한 저술가로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