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고스방크 총재에 오른 직후 부하를 불러 말했다: "자, 그동안 자네를 충분히 굴렸으니, 이제 은행을 굴려 보세."
니주니노브고로드 현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4세에 기업 부기계원으로 일하기 시작했고, 1929년 은행에 들어가 스베르들롭스크주 고스방크 지점들의 수석회계사와 지배인을 거쳤다. 중앙기구로 발탁된 후 카자흐 공화국 고스방크 지배인과 고스방크 부총재를 역임하며 핵심 간부로 성장했고, 1960년부터 대외무역은행 총재로서 소련의 대외결제를 관장했다. 1969년 고스방크 총재에 올라 코시긴 개혁 후반기부터 브레주네프 체제 초기까지 통화·신용 정책을 총괄했으며, 재임기는 1965년 개혁의 신용 레버리지 실험이 퇴조하고 중앙집권적 재정 규율로 복귀한 전환기였다.
볼가-돈 운하 건설 현장에서, 제1서기 그리신은 수감자 노동력으로 공사를 서두르라는 모스크바의 압박 속에서도 둑 높이를 둘러싼 기술 논쟁을 끝까지 밀어붙였다.
이반 티모페예비치 그리신은 1911년 랴잔현 농가에서 태어나, 1931년 당에 입당한 후 콤소몰과 당 통제 기관에서 경력을 쌓았다. 1942년부터 노보시비르스크주 집행위원장을 맡았고, 전후에는 스탈린그라드 주당위원회 제1서기(1949–1955)로서 볼가-돈 운하 건설을 지휘했다. 1955년 체코슬로바키아 주재 대사로 외교 무대에 진출한 뒤, 1959년부터 사망하는 1985년까지 소련 대외무역성 차관으로 재직하며 서방 산업 설비와 기술 도입 협상에서 핵심 역할을 수행했다. 26년간 차관직을 지키며 흐루쇼프에서 체르넨코까지 네 명의 지도부를 거친 그는 소련 대외경제 관계의 제도적 연속성을 체현한 관료였다.
25년간 소련 예산을 쥐고 흔든 그가 남긴 말: "예산이란 국가경제계획이라는 엉덩이에 난 뾰루지다. 불편해도 앉을 수는 있다."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목수 견습공으로 일하다 하리코프 재정경제대학을 졸업했다. 키예프 재정경제대학 학장과 우크라이나 국가계획위원회 의장을 거쳐, 1960년부터 1985년 사망할 때까지 25년간 소련 재무장관을 지냈다, 소련 역사상 최장 재임이다. 1965년 코시긴 경제개혁의 구상에 참여했으며, 브레즈네프 시대 내내 보수적 예산 운용으로 재정 안정을 유지했다. 당 중앙위원과 최고회의 대의원을 지냈고, 1981년 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1966년 2월, RSFSR 최고재판소장 스미르노프는 가명으로 서방에 소설을 발표한 두 작가에게 반소비에트 선동·선전 혐의로 7년과 5년의 강제노동형을 직접 선고했다.
레닌그라드대학 법학부 출신으로 1934년 검찰에 투신,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루덴코 소련 수석검사의 보좌관으로 나치 점령지 전쟁범죄 공소를 담당하고 도쿄재판에서 소련 대표단 부검사를 지냈다. 1962년 RSFSR 최고재판소장이 되어 시냡스키-다니엘 재판을 직접 주재했으며, 1972년부터 12년간 소련 최고재판소장으로 재임하며 브레즈네프 시대 사법부를 대표했다. 국제법정에서 파시즘을 기소한 법률가가 국내에서는 정치범을 단죄하는 소련 법조계의 이중적 성격을 체현한 인물이다.
탐보프와 크라스노다르를 거쳐 14년간 소련 곡물 조달을 총괄한 브레즈네프 시대의 농업 관료
흐루쇼프가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탐보프 제1서기 졸로투힌을 두고 이렇게 조롱했다: "저 탐보프 서기 졸로투힌은 바지를 벗고 매를 맞아야 한다고 자꾸 우겼습니다. 이게 무슨 즐거움입니까!"
농업전문학교를 졸업한 현장 농학자 출신으로, 전쟁 직후 탐보프주 당 기관에서 두각을 드러내 1955년부터 10년 넘게 제1서기로 탐보프를 이끌었다. 흐루쇼프 해임 직후인 1966년 크라스노다르 변경당위원회 제1서기로 옮겨 소련 최대 곡창지대를 7년간 통치했고, 1973년 브레즈네프의 신임 속에 소련 조달장관으로 발탁되어 1987년까지 14년간 곡물·사료·제분을 포함한 식량조달 체계 전반을 관장했다. 이 시기는 소련이 대규모 곡물 수입국으로 전환된 때로, 국내 수매와 수입 물류를 동시에 관리해야 했던 무거운 자리였다. 1973년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와 5개의 레닌 훈장을 받았으며, 22년간 중앙위원 후보·위원을 지낸 브레즈네프 체제의 핵심 지역 간부였다.
회고록 『기억의 계산』(1983)에서 통계청장으로서의 평생을 돌아보며: 「숫자는 침묵하지 않는다 — 다만 우리는 그것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소련 국가통계청(ЦСУ СССР) 청장(1975~1985)으로서 브레즈네프 후기와 고르바초프 초기 소련 계획경제의 통계 인프라를 총괄한 경제학자. 레닌그라드 공학경제연구소 출신으로 고스플란에서 경력을 쌓은 후 30년 가까이 ЦСУ에서 부청장·제1부청장을 거쳐 청장에 올랐다. 그의 재임 기간 소련 통계는 체계적 왜곡과 대외 신뢰도 하락이라는 구조적 문제에 직면했으며, 그는 『통계가 말하다』(1982)와 영문 회고록 『기억의 계산』(1983)을 통해 통계의 사회적 역할을 대중적으로 옹호했다. 1918년 암살된 페트로그라드 선전 인민위원 V. 볼로다르스키의 친동생으로, 혁명 순교자의 유산과 소비에트 테크노크라시의 접점에 선 인물이다.
상세 이력 보기
1926–29레닌그라드 제1소비에트학교 콤소몰 책임비서
1934레닌그라드 공학경제연구소 졸업
1934–40레닌그라드 지방공업 계획 부문에서 선임 경제기사 → 계획부장
1940–42레닌그라드 주재 고스플란 전권위원
1942–48고스플란 소련 부서장 → 국장
1948–67ЦСУ 소련 부청장(1948~53, 1956~67), 통계출판사 주필(1953~55), 공업통계국장(1955~56)
1956년 6월 29일 포즈난 라디오에서 그는 인민정부에 손을 드는 자의 손을 잘라버리겠다고 경고했다.
유제프 치란키에비치는 전쟁 전 사회주의 운동가이자 아우슈비츠 수용소 저항조직의 지도자였지만, 전후에는 소련과 결합한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핵심 정치가가 되었다. 그는 장기간 총리를 지내며 공산당의 통치와 국가 재건을 조율했고, 독립 사회주의의 소멸과 당의 국가화를 뒷받침했다. 1956년 포즈난 노동자 봉기와 1970년 해안 노동자 시위에서 정부의 강경 진압을 지지한 일은 저항의 경험과 권력의 책임이 충돌한 그의 정치적 유산을 드러낸다. 1970년 실각 뒤에도 평화운동과 공식 기구에서 활동했다.
비더 페렌츠는 불법 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했다가 투옥된 뒤 전후 헝가리의 사법·당 관료로 올라선 공산주의 법률가였다. 그는 1956년 혁명 뒤 국가가 조직한 보복 재판에서 가장 많은 사형을 선고한 법관 가운데 한 명이었다. 1958년 너지 임레 재판에서 대법원 인민법정회의를 주재하며 피고인의 발언과 변호 측 증거 신청을 거듬없이 제한했고, 너지 임레와 기메시 미클로시, 말레테르 팔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는 1989년에도 판결의 불법성을 인정하거나 뉘우치지 않았다.
1976년 당 대회에서: “브레즈네프 동지의 심오하고 지혜로운 보고서는, 마치 전선을 타고 흐르듯 사람들의 가슴에 뛰어들어 노동과 위대한 성취로 이끄는 거대하고 헤아릴 수 없는 영감의 에너지를 담고 있습니다.”
톰스크 근교 사냥꾼 집안의 13번째 아이로 태어나 13세에 콤소몰에 가입, 신문기사로 글쓰기를 시작했다. 『스트로고프 일가』 『소금의 땅』 『시베리아』 등 시베리아 농민과 자연을 서사화한 대하소설로 스탈린상과 레닌상을 받았다. 1971년 작가동맹 제1서기가 되어 15년간 소련 문학정책을 총괄하며 솔제니친·파스테르나크 탄압을 주도했고 브레즈네프 회고록에 레닌상을 수여할 정도로 체제와 밀착했다. 그의 책은 수백만 부 발행되고 TV 드라마로 각색됐지만 지식인들 사이에선 아무도 읽지 않는 책으로 조롱받았으며, 페레스트로이카에 반대하다 1989년 사임했다.
1953년 6월 동독 봉기 당시 정치국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 명령을 내리자, 세묘노프는 '소련은 독일 노동자에게 총을 쏘지 않는다'며 거부했다.
23년간 소련 외무차관을 지내며 냉전기 소련의 대독일 정책을 거의 40년간 주무른 외교관이다. 2차대전 후 소련군정 정치고문으로 동독 수립과 베를린 봉쇄의 핵심 설계자였으며, 1953년 동독 노동자 봉기 진압 당시 정치국의 발포 명령을 거부했다. 흐루쇼프·브레즈네프 시기 차관으로 서독과의 동방정책을 뒷받침하고 SALT 전략무기제한협상을 이끌었다. 1978년 주서독 대사로 부임해 말년까지 본에서 근무했으며, 러시아 아방가르드 회화 컬렉터로도 알려져 있다.
N-1 달로켓 계획이 취소된 뒤 쿠즈네초프는 NK-33 엔진 수십 기를 폐기 명령을 어기고 사마라 창고에 보관했다. 30년 후 미국 엔지니어들이 시험해 보고 '지금까지 만들어진 가장 효율적인 로켓 엔진'이라 평했다.
소련의 항공기·로켓 엔진 총설계자로, OKB-276을 이끌며 세계 항공사에 남을 터보프롭·터보팬·액체로켓 엔진을 개발했다. 그의 NK-12는 오늘날까지 세계 최강 터보프롭으로 Tu-95 전략폭격기와 An-22 수송기에 동력을 공급하며, NK-32는 Tu-160 초음속 전략폭격기의 심장이 되었다. 세르게이 코롤료프의 요청으로 소련 달로켓 N-1의 1단용 NK-33 엔진을 개발했으며, 폐쇄회로 방식을 채택한 이 고효율 엔진은 계획 취소 후 보존되었다가 1990년대 미국 안타레스 로켓에 사용되었다. 두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레닌상, 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에 올랐고, RSFSR 최고소비에트 의원(1963–1990)으로 과학·산업 정책에도 참여했다.
1952년 11월 19일, 건설이 지연되던 쿠이비셰프 수력발전소 간부회의에서 사회를 본 예프레모프는 현 상황을 "가장 수치스러운 일"이라 규정하고, "성공의 열쇠는 동지적 지원, 즉 팔꿈치 감각에 있다"고 선언했다.
사마라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11세에 아버지를 잃고 고아원에서 자란 예프레모프는 기술학교와 산업대학을 거쳐 전기기술자로 출발했다. 1942년 쿠이비셰프 당 기구에 들어간 뒤 10년 만에 제1서기로 도약했고, 볼가 수력발전소 건설을 진두지휘하며 지역경제 지도자로 입지를 굳혔다. 1959년 중앙위 러시아공화국 당기관부장으로 발탁되어 연방 차원의 간부 인사를 관장했고, 첼랴빈스크와 고리키(니즈니노브고로드)의 제1서기를 거쳐 1965년 코시긴의 각료회의 부의장으로 임명돼 6년간 경제행정을 총괄했다. 말년에는 동독과 오스트리아 대사를 지내며 외교무대로 전환했고, 75세까지 현역으로 일하다 은퇴했다.
함께 일했던 이들이 배신하고 나를 '인민의 적'으로 몰아가려 했다. 그 더러운 수사를 피해 붉은 군대로 도망쳤다.
바쿠 유전 지대에서 성장한 석유 기술자로, 30대에 소련 석유산업을 이끌며 '바이바코프 공법'으로 불리는 고압 시멘트 주입 기술을 개발했다. 전시에는 코카서스 유전 방어의 극적인 임무를 수행했고, 전후에는 로마슈키노 유전 개발을 주도하며 소련의 산유 대국화에 기여했다. 1965년부터 20년간 고스플란 의장으로 코시긴 개혁 이후의 중앙계획경제를 상징했으며, 브레즈네프 시대 계획 관료제의 핵심 축으로서 고르바초프 초기까지 버텼다.
1941년 모길료프 포위망 안에서, 야쿠봅스키의 전차대대는 시가로 진입하는 독일 오토바이 부대를 전차로 들이받아 분쇄했다.
벨라루스 농민 가정 출신으로 1932년 적군에 입대했다. 독소전쟁 내내 전차부대를 지휘하며 민스크·모길료프 방어전, 스탈린그라드, 쿠르스크, 키예프 해방, 베를린·프라하 공세까지 종전 직전까지 최전선에 서서 소련영웅 칭호를 두 번 받았다. 1967년 국방 제1차관 겸 바르샤바조약군 총사령관·소련원수에 올랐고,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지휘했으며 사망할 때까지 동유럽 군사동맹의 실무적 최고 지휘관으로 재임했다.
상세 이력 보기
1939–1940폴란드 동부 진주·겨울전쟁에 전차중대장으로 참전
1941–1945독소전에서 전차대대장에서 근위전차군단 부사령관까지, 두 차례 소련영웅 수훈
1942년, 30세의 공장 수석기사였던 즈베레프는 전시 광학장비 생산 공로로 첫 훈장인 적성훈장을 받았다. 36년 뒤 그가 사망했을 때, 노동자로 출발했던 크라스노고르스크 공장은 그의 이름을 따 '즈베레프 공장'으로 개칭되었다.
광학기사로 출발해 소련 국방공업장관(1965–1978)까지 오른 군수 행정가다. 전시에는 카잔과 요시카르올라 공장에서 붉은군대의 조준경과 광학장비 생산을 이끌었고, 종전 후 군비부 본부장과 차관을 거쳐 국방기술 국가위원회 위원장으로 고체연료 로켓무기와 우주체계 개발까지 관장했다. 1965년 국방공업부 재창설과 함께 장관에 올라 전차·화포·소화기·탄약 등 재래식 무기 생산 전체를 13년간 지휘하며 냉전 군비경쟁의 물적 토대를 관리했다. 국가 과제에서는 원칙에 단호했지만 부하에게는 한결같이 정중했으며, 사회주의노동영웅·레닌상·국가상을 수상하고 레닌 훈장만 6회 받았다.
1973년, 우렌고이 예정지의 맨땅에 내린 오루제프가 말했다. "나는 표트르 대제가 아니지만 그의 말을 빌리겠소. 여기에 도시가 세워질 것이오." 이 한마디에서 오늘날 '러시아의 가스 수도' 노비 우렌고이가 시작되었다.
바쿠 노동자 가정 출신으로 소련 가스 산업을 세계 최대로 키운 아제르바이잔인 공학자. 1972년 가스공업부 장관에 취임해 서시베리아 우렌고이·메드베지예 초거대 가스전을 개발하고 통합가스공급시스템(ЕСГ)을 구축했으며, 이 시스템은 오늘날까지 러시아 가스 산업의 골간이다.
1982년 11월 23일, 브레즈네프 사망 13일 만에 최고회의 회의장에 참석했다가 자리에서 쓰러져 사망했다. 25년의 행정적 연속성이 한 순간에 끊어졌다.
소비에트 최고회의 상무회 서기(1957–1982)로서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 시대 네 명의 국가원수 아래 모든 법령에 공동 서명한 행정 중심축이다. 그루지야 농민 가정 출신으로 농업 공학을 전공했고, 조국전쟁에서 중상을 입었다. 그루지야 공산당 제2서기와 각료회의 제1부의장을 거쳐 모스크바로 올라가 25년간 최고회의 상무회의 제도적 연속성을 체현했다. CPSU 중앙위원회 위원 후보(1961–1982)로서 당과 국가 기구 사이의 조용하지만 필수적인 고리였다.
블라디미르 바카리치는 크로아티아 공산주의 운동의 지도자이자 유고슬라비아 연방 정치의 핵심 조정자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파르티잔 조직과 해방 권력 건설에 참여했고, 전후에는 크로아티아의 국가·당 기구를 이끌었다. 1948년 2월 에드바르드 카르델리와 함께 모스크바에 파견되어 스탈린의 압박을 직접 마주했으며, 이후 티토의 독자 노선을 지지했다. 그는 공화국의 권한 확대와 자기관리 사회주의를 옹호했지만, 티토의 후원과 당의 권력 구조 안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신중한 지도자이기도 했다.
상세 이력 보기
1932–1935자그레브 대학에서 혁명적 노동운동에 참여하고 1933년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에 입당
1966년 아카데미 정회원 선거에서 역사학부는 그를 통과시켰지만, 총회에서 노벨상 수상자 이고리 탐이 반대 연설을 하자 표결은 부결되었다. 10년 뒤 통신회원 선출은 '절대 정회원 후보로 나서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서야 가능했다.
1965년부터 1983년까지 18년간 중앙위 과학·교육기관부장을 지내며 소련 학계의 인사·교과과정·출판을 통제한 브레즈네프 시대 이념 관료였다. 박사 학위 논문과 주요 저작들은 집단화의 공식 역사서술을 형성했고, 1960년대 중반 스탈린 복권 캠페인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했다. 모스크바 고등당학교 부학장과 몰도바 공화당학교 교장을 거쳐 브레즈네프의 개인 비서관을 지냈으며, 그 인연으로 과학·교육 부문의 최고 행정직에 올랐다. 지식인 사회에서는 1966년 아카데미 정회원 선거에서 노벨상 수상자 이고리 탐의 반대로 낙선할 정도로 불신을 샀으나, 10년 후 통신회원으로 선출되며 학계 내 입지를 유지했다.
“과학이 무슨 상관이오!?” 제자에게서 부서에 무능한 동료를 왜 채용했느냐는 질문을 받고 크론로트는 화를 냈다. 잠시 침묵한 뒤 덧붙였다: “17일 동안 안치시킨이 우리 사단을 포위에서 빼냈소. 우리 부대의 정치위원이었는데, 지휘관은 전사했소.” — 모스크바 전투, 1941년 겨울
소련 정치경제학 '상품학파'를 이끌며 사회주의에서 가치법칙과 기업 자율성을 주장한 이론가. 1971–72년 학파가 분쇄·해임되었고, 말년에 소련 체제를 '사회과두제'로 분석한 원고를 남겼다.
상세 이력 보기
1930–1934모스크바대학 철학과 졸업, 이삭 루빈의 제자로 자처
1934–1940소련 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 모스크바주계획위, 중앙통계청 근무
1940소련 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 연구원
1941–1945의용군 입대(1941.7.6.), 모스크바 전투 참전, 동프로이센까지 진격, 소령으로 종전
1945–1971경제연구소 정치경제학 부문장, '상품학파' 형성 및 1960년대 경제개혁 논쟁 주도
1941년 12월, 레닌그라드 포위전 속에서 칸토로비치는 라도가 호수 얼음 위를 직접 걸으며 얼음 두께와 기온에 따른 차량 간 최적 거리를 계산했다. '생명의 길'이었다.
소련 유일의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1975). 1939년 합판 공장의 배분 문제를 풀며 선형계획법의 기초를 정립했고, 최적해에서 도출되는 '해소 승수'가 계획경제 내 객관적 가격 신호로 기능할 수 있음을 수학적으로 증명했다. 22세에 레닌그라드 대학 교수, 1935년 무방어로 물리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그림자 가격 이론은 중앙계획 아래 분권화된 의사결정을 위한 이론적 토대였으나, 마르크스 노동가치론과 충돌하여 소련 경제관료에게 오래 배척당했다. 1960년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수리경제연구소를 창설하며 계획경제의 수학적 합리화를 평생 과제로 삼았다.
1970년 레닌 탄생 100주년 테제에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 문구를 레닌의 말로 잘못 인용한 사건은 스테파코프가 아지트프롭에서 축출되는 공식 명분이자 셸레핀 계열 숙청의 신호탄이었다.
브레즈네프 초기 5년간 중앙위 선전선동부장을 맡아 당의 일상적 이념 장치를 운영했다. 수슬로프·데미체프가 서기국에서 이념을 총괄하는 동안 레닌 탄생 100주년과 프라하의 봄 대응 선전을 지휘한 실무자였다. 역사학 박사로서 마르크스-레닌주의 선전론을 체계화했으며, 셸레핀 계열로 분류되어 1970년 레닌 테제 오류 사건으로 축출된 후 유고슬라비아 대사로 옮겼다.
1956년 6월 27일, 그는 포즈난 ZISPO 노동자들 앞에서 전날 바르샤바에서 약속했던 내용을 철회했다.
폴란드 공산당 출신의 기계공학 배경 기술관료로 1955년 기계공업부 장관에 올랐다. 1956년 6월 26일 바르샤바에서 포즈난 ZISPO 노동자 대표단에게 임금 인상과 체납 세금의 환급을 약속했다가 이튿날 포즈난 현장에서 이를 번복했고, 이 파기가 6월 28일 봉기의 직접적 불씨가 되었다. 이후 계획경제 기구에서 계속 근무하며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산업 관료로 은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