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1985

해빙과 정체의 사람들 445명

스탈린의 관 뚜껑을 연 해빙과 그것을 다시 덮은 정체 사이에서, 우주와 개혁과 반체제의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

야노시 카다르

Kádár János
사회주의권 지도자 헝가리 헝가리 1912–1989 ○ 자연사

구야시 코뮤니즘의 설계자, 32년의 온정적 실용주의자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 편이다」(1961년)

피우메에서 하녀의 사생아로 태어나 14세에 인쇄소 견습공이 되었고, 16세 체스 대회 우승 상품인 엥겔스 『반뒤링론』이 마르크스주의로 이끌었다. 1931년 불법 공산당 입당 후 지하운동·투옥·레지스탕스를 겪었고, 전후 내무장관이었으나 라코시에게 '티토주의자'로 몰려 3년간 수감되었다. 1956년 혁명 진압 후 집권했지만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 편'이라는 노선으로 전환해 대사면·경제개혁·관광개방을 추진, 헝가리를 동구권 최고 소비사회로 만들었다. 소련 영웅 칭호를 받은 몇 안 되는 동구권 지도자로서, 그의 32년 통치는 사회주의권 최대 자유화 실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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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불법 헝가리 공산당(KPV) 및 공산청년동맹 입당, 지하활동
  • 1933–34체포되어 2년간 투옥, 중형교도소에서 라코시와 마주침
  • 1942–44KPV 중앙위원·서기, 반파시스트 '헝가리 전선' 창설 주도
  • 1948–50내무장관 — 라이크 라슬로 체포 관여, 이후 당 조직부장으로 좌천
  • 1951–54'티토주의자'로 체포, 무기징역 → 1954년 7월 석방
  • 1956.10–11너지 내각 장관 → 소련과 협상, 새 정부 수립
  • 1956–88MSZMP 서기장 ― 32년간 헝가리 실질적 국가원수
  • 1956–58, 61–65총리 겸임 — 경제개혁·대사면, '구야시 코뮤니즘' 확립

세르게이 게오르기예비치 라핀

Сергей Георгиевич Лапин
문화 · 문학예술 통제 소련 러시아인 1912–1990 ○ 자연사

브레즈네프 시대 15년간 소련 TV·라디오를 장악한 방송 총책

“나는 어제 레오니트 일리치와 점심을 함께 했네.” — 라핀이 부하와 동료들에게 무언가 지시하기 전에 건네던 상투적인 첫마디로, 이 말이 나온 뒤에는 브레즈네프와 아침이나 저녁을 함께한 사람 외에는 아무도 감히 반대하지 못했다.

1970년부터 1985년까지 소련 국가방송위원회(고스텔레라디오) 의장을 지내며 브레즈네프 시대 방송을 총괄한 언론 관료다. 레닌그라드 신문기자로 출발해 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국에서 훈련받았고, 외교관으로 전환하여 오스트리아·중국 대사와 외무차관을 거쳐 TASS 사장을 지냈다. 고스텔레라디오 의장 재임 동안 올림픽 텔레비전센터 건설과 위성 방송망 확충으로 기술적 기반을 크게 넓혔으나, 동시에 생방송을 철폐하고 유대계 예술가들을 체계적으로 배제하는 엄격한 이념 검열을 시행했다. 브레즈네프의 개인적 신임을 등에 업고 당 선전부의 지시조차 거부할 만큼 독자적인 권력을 행사했으며, 고르바초프 집권 직후인 1985년 12월 해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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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1944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선전선동국 출판부 선임지도원·부문장
  • 1944–1949전연방 방송위원회 정치방송 주필
  • 1949–1953소련 각료회의 방송위원회 부의장
  • 1953–1955주동독 소련대사관 참사관
  • 1955–1956소련 외무부 제3유럽국장·당위원회 서기
  • 1956–1960주오스트리아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60–1962러시아소비에트연방공화국(RSFSR) 외무장관
  • 1962–1965소련 외무차관
  • 1965–1967주중국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67–1970TASS(타스) 사장
  • 1970–1985소련 각료회의 방송·텔레비전 국가위원회 의장(1978년부터 고스텔레라디오)

레프 니콜라예비치 구밀료프

Лев Николаевич Гумилёв
이론가 소련 러시아 1912–1992 ○ 사망

민족발생론과 파시오나르노스트 이론으로 유라시아주의를 재창조한 역사학자

“나는 러시아인이지만, 평생 타타르인들을 비방으로부터 지켜왔다” — 카잔의 구밀료프 흉상 받침대에 새겨진 문구.

소련의 역사학자·민족학자·고고학자로, 민족 집단의 발생과 쇠퇴를 우주적 에너지 '파시오나르노스트'로 설명하는 민족발생론을 제창했다. 시인 니콜라이 구밀료프안나 아흐마토바의 아들로, 1938년부터 1956년까지 세 차례 체포되어 14년간 수용소에서 복역했으며 베를린 전투에 참전했다. 그의 저작은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폭발적 인기를 얻어 중앙아시아와 타타르스탄에서 민족 정체성 담론의 기초가 되었고, 카자흐스탄에는 그의 이름을 딴 구밀료프 유라시아 국립대학교가 설립되었다. 학계에서는 유사과학이라는 비판도 받았으나,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정치 엘리트의 유라시아주의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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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4레닌그라드 대학교 역사학부 입학
  • 1938–1943노릴스크 수용소 복역 (1차 수감)
  • 1944–1945붉은 군대 복무, 베를린 전투 참전
  • 1948역사학 후보학위 취득
  • 1949–1956카자흐스탄·알타이·시베리아 수용소 복역 (2차 수감)
  • 1956–1962에르미타주 박물관 연구원
  • 1961역사학 박사학위 취득
  • 1962–1987레닌그라드 대학교 지리학부 연구원

딘무하메드 아흐메트울리 쿠나예프

Дінмұхамед Ахметұлы Қонаев
사회주의권 지도자 소련 카자흐스탄 1912–1993 ○ 자연사

24년간 카자흐스탄을 브레즈네프의 동반자로 이끌고, 해임으로 젤톡산 봉기를 촉발한 공화국 건설자

1986년 2월, 나자르바예프의 비판 보고가 있은 후 쿠나예프는 고르바초프를 찾아가 나자르바예프의 해임을 요청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가 오히려 쿠나예프 자신에 대한 불만을 전하자, 24년간 카자흐스탄을 이끌어온 노지도자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럴 필요 없소. 내가 직접 물러나겠소."

광산 기술자로 출발하여 카자흐스탄 공산당 제1서기로 24년 가까이 재임한, 소련 공화국 지도자 중 가장 오래 권좌에 있던 인물이다. 브레즈네프와의 친교를 바탕으로 카자흐스탄을 소련 3대 경제권으로 끌어올렸고, 흐루쇼프의 남부 영토 이전 시도를 저지하여 공화국의 영토 보전을 지켰다. 전연방 정치국 정위원(1971–1987)으로서 중앙 무대에도 진출했으나, 1986년 12월 고르바초프에 의해 전격 해임되면서 알마아타에서 대규모 민중 시위: 젤톡산(12월) 사건이 촉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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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6–1939프리발하시스트로이 광산 수석기사
  • 1942–1952카자흐 SSR 인민위원회/각료회의 부의장
  • 1952–1955카자흐 SSR 과학아카데미 총재
  • 1955–1960카자흐 SSR 각료회의 의장 (1차)
  • 1960–1962카자흐스탄 공산당 제1서기 (1차)
  • 1962–1964카자흐 SSR 각료회의 의장 (2차)
  • 1964–1986카자흐스탄 공산당 제1서기 (2차, 22년)
  • 1971–1987CPSU 정치국 정위원

알렉세이 파블로비치 시티코프

Алексей Павлович Шитиков
민족문제 · 연방 관리 소련 러시아 1912–1993 ○ 자연사

하바롭스크 변경당 위원장에서 연방회의 의장으로: 브레즈네프 시대 연방 입법의 제도적 얼굴

1965년 하바롭스크 변경에 레닌훈장이 수여되자 시티코프는 말했다. '변경의 훈장 수훈을 우리는 중앙위원회와 소비에트 정부가 극동인들에게 베푼 큰 관심의 표현으로 받아들입니다.'

코스트로마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축산기술자로 출발한 소련의 당·국가 지도자이다. 하바롭스크 변경당 기구에서 25년간 근무하며 캄차카·유대자치주 당서기를 거쳐 1957년 하바롭스크 변경당 제1서기에 올랐고, 재임 13년간 도시 기반시설과 공업화를 추진했다. 1970년 소련 최고소비에트 연방회의 의장에 선출되어 14년간 재임하며 브레즈네프 시대 연방 입법의 제도적 중심을 형성했고, 소비에트 유럽안보협력위원회 의장으로서 데탕트와 헬싱키 프로세스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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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6–1939축산기술사 → 아르다토프 콤소몰 지구위 제1서기
  • 1941–1945붉은 군대 복무 (소령)
  • 1945–1952하바롭스크 변경당 기구 → 캄차카 주당위 서기
  • 1952–1955유대자치주 당위원회 제1서기
  • 1955–1957하바롭스크 변경당위 서기 → 제2서기
  • 1957–1970하바롭스크 변경당위원회 제1서기
  • 1970–1984소련 최고소비에트 연방회의 의장
  • 1984–1991재외동포문화교류 소비에트협회 상임위 의장

보리스 표도로비치 브랏첸코

Борис Фёдорович Братченко
중공업 · 군수공업 소련 러시아 1912–2004 ○ 자연사

브레즈네프 시대 20년간 소련 탄광을 이끈 석탄공업 장관

『나는 석탄공업을 사랑한다. 내 의식적인 삶 전부를 거기에 바쳤고, 다른 길은 상상할 수도 없다.』 — 브랏첸코, 2004년 마지막 인터뷰에서.

쿠반 카자크 후손으로 모스크바 광산대학을 졸업한 광산기사-경제학자로, 키젤·로스토프 탄광 갱도에서 출발해 카라간다 콤비나트 수석기사, 카자흐 공화국 국가계획위원회 의장을 거쳐 1965년 소련 석탄공업장관이 되었다. 1985년까지 20년간 재임하며 라스파드스카야·보르가쇼르스카야 탄광, 보가티리 노천광, 칸스크-아친스크·에키바스투스·남야쿠티아 연료에너지 콤플렉스 등을 진두지휘해 소련 석탄 생산량을 7억 1,800만 톤까지 끌어올렸다. 강력한 채탄기 개발로 1949년 스탈린상을 받았고 1982년 사회주의 노동 영웅 칭호를 받았으며, 1971년부터 1986년까지 CPSU 중앙위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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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1942키젤·로스토프 탄광에서 광산기사, 구역장, 수석기사로 승진
  • 1942–1943석탄공업인민위원부 및 인민위원회의 사무국에서 근무
  • 1943–1949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 탄광장, 샤흐탄트라치트 트러스트 수석기사
  • 1949–1953카라간다우골 콤비나트 수석기사
  • 1953–1957소련 석탄공업 차관
  • 1957–1959카멘스크·로스토프 소브나르호스 의장, 고스플란 석탄부장
  • 1959–1961카라간다 소브나르호스 의장
  • 1961–1965카자흐 SSR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계획위원회 의장
  • 1965–1985소련 석탄공업장관

레오니트 니콜라예비치 예프레모프

Леонид Николаевич Ефремов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 1912–2007 ○ 자연사

고르바초프에게 스타브로폴을 넘겨주고 그를 배신자라 부른 당원

은퇴 후 그는 『배신자 고르바초프』라는 회고록에서, 자신이 스타브로폴에서 길을 열어준 후임자를 향해 "양면적인 자들의 동맹"이라 쏘아붙였다.

농업기계화 기술자로 출발한 예프레모프는 전시 항공공업과 쿠이비셰프 당 기구를 거쳐 흐루쇼프 시기 쿠르스크·고리키·스타브로폴 당 조직을 차례로 이끈 지역 간부로 성장했다. 전성기에는 CPSU 상임위 후보위원과 중앙위 러시아공화국 뷰로 제1부의장을 지내며, 연방 구조 안에서 러시아 공화국을 별도 관리하려는 당 구도 중심에 섰다. 흐루쇼프 실각 후 스타브로폴로 되돌아갔고, 1970년 그 자리를 미하일 고르바초프에게 넘겨준 것이 가장 역사적인 순간이 되었다. 훗날 그는 회고록 『배신자 고르바초프』에서 후임자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후 18년간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제1부의장으로 일하다 1988년 연방급 연금생활자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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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41보로네시 농업기계화연구소 졸업 → 항공공장 기술자, 독일 통상대표부 장비 인수원
  • 1941–46보로네시 제18항공공장 주임기사, 당 조직자 (Il-2 생산)
  • 1946–52쿠이비셰프 당 간부 → 주 집행위원장
  • 1952–58쿠르스크 주당 제1서기 (1957년 주에 레닌훈장 수여)
  • 1958–62고리키 주당 제1서기
  • 1962–65중앙위 러시아공화국 뷰로 제1부의장 · 상임위 후보위원
  • 1964–70스타브로폴 지방당 제1서기 (후임: 미하일 고르바초프)
  • 1970–88국가과학기술위원회 제1부의장

바실리 필리모노비치 샤우로

Василий Филимонович Шауро
문화 · 문학예술 통제 소련 벨라루스 1912–2007 ○ 은퇴 1986 · 자연사

21년간 소련 문화의 당 문지기로 군림한 '위대한 무언가'

그는 전축 옆에 서서 천장에 시선을 고정한 채 하이든 소나타의 마지막 화음을 듣고 있었다. 음악이 멈추자 '신성한 작품이군요'라고 중얼거리며 손님들에게 자리를 권했다.

바실리 샤우로는 21년간 브레즈네프 체제 아래서 중앙위 문화부장으로 소련의 문학·영화·미술·음악 검열을 총괄한 인물이다. 비쳅스크 교사 출신으로 중앙위 선전선동국, 민스크 주당위 제1서기, 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 서기를 거쳐 1965년 모스크바로 발령되어 정체기 문화 정통성의 문지기가 되었다. 공개 석상에 전혀 나서지 않아 '위대한 무언가'라는 별명을 얻었고, 보수적 작가·학계의 지원을 받아 선전부장 대행 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를 1973년 중앙위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해 고르바초프 등장까지 이념 개혁을 지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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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42비쳅스크 지역 교사·학교장
  • 1942–1947중앙위 선전선동국 지도원·분과장
  • 1948–1956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 기구 → 민스크 주당위 제1서기
  • 1960–1965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 서기 겸 최고회의 간부회의 의장 (1963–1965)
  • 1965–1986중앙위 문화부장
  • 1986연금 은퇴

표트르 안드레예비치 아브라시모프

Пётр Андреевич Абрасимов
외교 소련 벨라루스 1912–2009 ○ 자연사

냉전 베를린을 관리한 소련의 '통치 대사'

1971년 9월 3일, 아브라시모프가 베를린 4국 협정에 서명한 뒤 남긴 말: '가시 없는 장미는 없다.' 브란트의 동방정책을 향한 말이자, 냉전 최전선에서 10년 가까이 협상해온 외교관의 솔직한 표현이었다.

벨라루스 출신의 소련 직업 외교관이자 당 관료. 조국전쟁에서 벨라루스 파르티잔 정치장교로 복무했고, 전후 벨라루스 각료회의 제1부의장과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를 지냈다. 1957년 외교로 전환하여 동독 주재 대사를 두 차례(1962–1971, 1975–1983) 역임하며 냉전기 소련의 대독 정책에서 핵심 역할을 수행했다. 1966년 서베를린 시장 빌리 브란트와 비밀 회담을 가졌고, 1971년 9월 베를린 4국 협정에 소련 대표로 서명했다. 두 번째 동독 임기 중 동독 내정에 적극 개입하여 '통치 대사'라 불렸고, 결국 호네커의 요청으로 1983년 소환되었다. 국가대외관광위원회 의장과 주일 대사를 끝으로 1986년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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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6–1948벨라루스 SSR 각료회의 소련 각료회의 상임대표
  • 1948–1950벨라루스 SSR 각료회의 제1부의장
  • 1950–1952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 1952–1955벨라루스 SSR 각료회의 제1부의장
  • 1955–1957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 1957–1961주폴란드 소련 대사
  • 1961–1962스몰렌스크 주당위원회 제1서기
  • 1962–1971주동독 소련 대사 (1차)
  • 1971–1973주프랑스 소련 대사 (마다가스카르 겸임)
  • 1973–1975CPSU 중앙위원회 해외간부·출국 담당 부장
  • 1975–1983주동독 소련 대사 (2차)
  • 1983–1985소련 국가대외관광위원회 의장
  • 1985–1986주일본 소련 대사

보리스 옙세예비치 체르토크

Борис Евсеевич Черток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폴란드 1912–2011 ○ 자연사

스푸트니크의 두뇌를 설계하고 소련 우주사를 기록한 코롤료프의 대리인

1945년 5월 2일, 붉은군대 소령 보리스 체르토크는 베를린 함락 직후 독일의회 의사당 벽에 자기 이름을 써넣었다. 평생 그 순간을 '가장 행복한 성취'라 불렀다. 석 달 뒤 그는 독일의 V-2 로켓 잔해 속에서 소련 우주 프로그램의 첫 페이지를 열고 있었다.

코롤료프의 최측근 대리인으로, 대륙간탄도미사일 R-7부터 스푸트니크·보스토크·소유스·미르까지 소련 우주 로켓의 유도제어 시스템을 50년간 설계했다. 사회주의노동영웅(1961)이자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으로, 은퇴 후 회고록 『로켓과 사람들』 4권을 펴내 소련 우주 프로그램의 속내를 생생히 기록했으며 99세까지 집필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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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38제22항공공장 전기기사, 항공기 특수장비·무장 설계
  • 1940–45볼호비티노프 설계국(OKB)에서 군용기 전기·무선 장비 담당
  • 1945–47독일 파견: V-2 유도제어 연구, 라베 연구소·노르트하우젠 연구소 근무
  • 1946–56NII-88 제어시스템 부서장 → 부수석 엔지니어, 코롤료프와 협업 시작
  • 1956–74OKB-1 부수석 설계자: R-7, 스푸트니크, 보스토크, 소유스 제어계 설계
  • 1974–92NPO 에네르기야 부총설계자: 미르 정거장, 에네르기야 로켓 제어계
  • 1994–994권의 회고록 『로켓과 사람들』 출간, NASA 영역본 발행
  • 2000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академик) 선출

니콜라이 로마노비치 미로노프

Николай Романович Миронов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 1913–1964 ✕ 항공사고 사망

흐루쇼프 축출을 조직한 당의 '권력 부처' 담당자

KGB 의장 세미차스트니는 훗날 회고했다: “내가 맡고 있던 KGB 의장 자리는 원래 니콜라이 로마노비치 미로노프를 위해 준비된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당 조직 출신으로 브레즈네프의 청년기 친구였으며, 중앙위원회 행정기관부장(1959–1964)으로서 KGB·내무·군·검찰·법원을 총괄 감독한 흐루쇼프 시대 후기의 실세였다. 1964년 반흐루쇼프 음모에서 중앙위원과 군·보안 간부들을 직접 포섭하며 쿠데타의 실무를 조직했고, 브레즈네프 집권 후 KGB 의장으로 내정되었으나 취임 직전 베오그라드 근교 아발라 산 항공사고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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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1945정치장교·군 선전선동 담당, 255소총병사단에서 복무하며 부상, 소령으로 종전
  • 1945–1951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당 선전부, 키로보그라드 주당 서기 등 우크라이나 당직 역임
  • 1951–1956MGB·KGB 제3총국(군 방첩) 부국장, 소장 진급
  • 1956–1959레닌그라드주 KGB 국장
  • 1959–1964중앙위 행정기관부장 — KGB·내무·군·검찰·법원 감독

미하일 드미트리예비치 밀리온시코프

Михаил Дмитриевич Миллионщиков
국가원수 소련 러시아 1913–1973 ○ 자연사

핵무기를 만들고 핵군축을 외친 과학자-정치가

1968년 국제 파그워시 운동 의장으로 선출된 그는 소련 과학자의 입장에서 핵군축을 주창했지만, 동시에 쿠르차토프연구소에서 핵무기용 우라늄 농축 원심분리기 개발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소련의 물리학자이자 과학행정가. 그로즈니 출신으로 쿠르차토프 원자력연구소에서 기체 원심분리법에 의한 우라늄 농축 기술을 개발해 소련 핵무기 계획에 결정적 기여를 했으며, 세계 최초의 핵반응로-변환기 '로마시카'(1964)의 과학적 책임자였다. 1962년 과학아카데미 부총재로 선출되어 사망할 때까지 소련 과학의 제도적·국제적 좌표를 설정했고, 1964년부터 소비에트 파그워시 위원회 의장을 맡아 1968~1969년 국제 파그워시 운동 의장으로서 핵군축과 과학 협력에서 소련을 대표했다. 쿠르차토프연구소 부소장으로 핵기술 개발을 지휘하면서도 1967년 러시아공화국 최고회의 의장에 선출되어 과학자와 정치가를 겸한 독특한 경력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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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1960제813콤비나트 부과학지도자 · 가스원심분리 농축
  • 1960–1973쿠르차토프 원자력연구소 연구부소장
  • 1962–1973소련 과학아카데미 부총재
  • 1964세계 최초 핵반응로-변환기 '로마시카' 과학책임자
  • 1964–1973소비에트 파그워시 위원회 의장
  • 1967–1973러시아공화국 최고회의 의장
  • 1968–1969국제 파그워시 운동 의장

자보르 라술로비치 라술로프

Джабар Расулович Расулов
사회주의권 지도자 소련 타지키스탄 1913–1982 ○ 자연사

21년간 타지키스탄을 이끈 농학자 출신 지도자, 검소와 청렴의 공산주의자

라술로프 사후 금고를 열자 저축 통장에 4,200루블과 수년치 개인 경비 영수증 뭉치가 나왔다. 보좌관은 '자동차 한 대 값도 안 되는 돈으로 21년간 공화국을 다스렸다'고 회고했다.

후잔트 노동자 가정 출신으로 타슈켄트 중앙아시아면화대학을 졸업한 농학자다. 바흐시 계곡 개간에서 출발해 타지크 SSR 농업인민위원(1941~1945)과 각료회의 의장(1946~1955)을 지내며 전후 복구를 지휘했고, 소련 농업부 제1차관과 초대 주토고 대사를 역임한 뒤 1961년 4월 타지크 공산당 제1서기에 올라 사망까지 21년간 공화국을 이끌었다. 재임기 누레크 수력발전소, 알루미늄 제련소 등 400여 개 공업 기업이 세워져 농업 중심 구조가 다부문 산업 구조로 전환했다. 9개 레닌 훈장을 받았으나 평생 양복 두 벌만 소유하고 출장에 도시락을 싸 다닌 청렴한 인물로 동시대인의 기억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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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4–1938타지크 SSR 바흐시 계곡 면화 재배 농업국 농학자
  • 1938–1940타지크 SSR 농업인민위원부 곡물관리국장
  • 1940–1941타지크 SSR 농업부인민위원
  • 1941–1945타지크 SSR 농업인민위원
  • 1946타지크 SSR 공예작물인민위원
  • 1946–1955타지크 SSR 각료회의 의장, 외무장관 겸임
  • 1955–1958소련 농업부 제1차관
  • 1958–1960타지크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 1960–1961주토고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61–1982타지크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 포크리시킨

Александр Иванович Покрышкин
군사 · 국방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1913–1985 ○ 자연사

소련 전투기 전술을 다시 쓴 에이스, 전시에 세 번의 영웅 금성을 단 유일한 군인

참모 아카데미에서 한 동기가 1941년 아군 Su-2를 격추한 소련 전투기 이야기를 하자 포크리시킨이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그게 나였소."

제2차 세계대전 연합군 최고 득점 에이스이자 최초의 세 차례 소비에트 연방 영웅. 항공 정비사로 입대해 39통의 전입 신청 끝에 조종사가 된 집요함으로, 1941년 구식 전술에 무너지는 공군을 보며 공중전 데이터를 기록·분석해 '고도-속도-기동-사격' 공식과 3층 '쿠반 계단' 편대, 진자 순찰 등 수직 전투 교리를 정립했다. 1943년 쿠반 공중전에서 입증된 이 전술은 소련 전투기 교리의 전환점이 되었다(공식 전과 650회 출격 53기 격추). 솔직하고 완고해 상관과 평생 마찰을 겪었고 스탈린 사후에야 장성 진급. 방공군 부총사령관·DOSAAF 의장을 지냈으며 브레즈네프의 전쟁 역할 과장을 끝내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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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1933제3페름 항공기술학교 졸업, 항공 정비사
  • 1934–1938제74소총병사단 항공통신대 선임 항공기술사
  • 1939카친 군사항공학교 졸업, 제55전투항공연대 전입
  • 1941–1944제55(→제16근위)전투항공연대 비행대장·부연대장
  • 1944–1945제9근위전투항공사단장, 베를린·프라하 작전 참가
  • 1948프룬제 군사대학 졸업
  • 1949–1955제33(→제88)전투항공군단 부사령관·사령관 (르제프)
  • 1955–1956북캅카스 방공군 전투항공 사령관
  • 1957참모 아카데미 졸업
  • 1958–1968제52전투항공군 사령관 → 제8독립방공군 사령관 겸 키예프 군관구 방공부사령관
  • 1968–1972소련 방공군 부총사령관
  • 1972–1981DOSAAF 중앙위원회 의장
  • 1976–1985CPSU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 1979–1984소비에트 연방 최고회의 간부위원회 위원
  • 1981–1985국방부 감찰총감단 감찰관·고문

페렌츠 도나트

Donáth Ferenc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헝가리 헝가리인 1913–1986 ○ 사후 복권, 1989년

혁명과 개혁을 잇고 독재의 상처를 짊어진 정치가

1956년 11월 4일, 나지 임레와 함께 소련의 공격을 규탄하는 성명을 작성한 뒤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으로 피신했다.

도나트 페렌츠는 헝가리 공산주의 운동과 농업정책에 참여한 정치가이자 농업경제 연구자였다. 전후 토지개혁과 집단화 추진에 관여했지만, 1951년 숙청 재판으로 투옥된 뒤 복권되어 당 노선과 국가 폭력의 긴장을 직접 겪었다. 1956년 나지 임레를 지지하며 혁명을 해석하고 소련의 군사 개입을 비판한 그는 나지 임레 재판에서 12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960년 석방되었다. 이후 농업경제를 연구하고 1980년대 민주 야당의 대화를 조직했으며, 1989년 법적으로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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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4헝가리 공산당 입당, 지하 활동
  • 1937–19393월 전선 조직 참여, 국민농민당 창립 참여
  • 1945–1948국가토지정착위원회 부위원장, 농업부 정치차관
  • 1948–1951헝가리 노동인민당 중앙위원회 사무국·농촌부문 지도
  • 1951–1954숙청 재판으로 15년형, 1954년 복권·석방
  • 1956나지 임레 주변 개혁파, 헝가리 사회주의 노동자당 임시집행위원
  • 1958–1960나지 임레 재판에서 12년형, 1960년 특별사면 석방
  • 1976–1985협동조합 연구자, 민주 야당 연대와 모노르 회의 조직
  • 1989나지 임레 재판 판결 무효화로 사후 복권

세르게이 미트로파노비치 코발료프

Сергей Митрофанович Ковалёв
이념 · 선전 소비에트 러시아인 1913–1990 ○ 사망

프라우다 지면에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정식화한 소련 이념가

각 공산당은 자기 인민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모든 사회주의 나라들과 전 세계 공산주의 운동에 대해서도 책임을 진다.

모스크바철학문학역사연구소와 고등당학교를 거쳐 전연방공산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국 선전부장을 지낸 소련의 철학자이자 당 이론가이다. 1965년부터 『프라우다』 선전부문 편집위원으로 재직하며 1968년 9월 26일 「사회주의 나라들의 주권과 국제적 의무」를 기고, 바르샤바조약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사회주의 공동체 수호'라는 국제주의적 의무로 정당화하는 논리를 제시했다. 이 글은 브레즈네프 독트린의 최초이자 가장 권위 있는 정식화로 받아들여졌으며, 이후 그는 『소비에트 대백과사전』 제1부편집장과 중앙위 부설 사회과학아카데미 교수를 역임하며 윤리학·공산주의 교양론 분야의 저작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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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8전연방공산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국 선전부장
  • 1948–1951전연방공산당 쿠르스크주위원회 서기
  • 1951–1956국영정치출판사(고스폴리티즈다트) 사장
  • 1960–1965『평화와 사회주의의 제문제』(프라하) 편집자
  • 1965–1971『프라우다』 선전부문 편집위원
  • 1971–1980『소비에트 대백과사전』 제1부편집장
  • 1980–1990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설 사회과학아카데미 교수

빅토르 이바노비치 쿠즈네초프

Виктор Иванович Кузнецо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913–1991 ○ 자연사

'위대한 6인' 중 가장 키 크고 말 없는, 소련 로켓의 눈을 만든 자이로스코프의 아버지

동시대인의 회고: "좁은 자리에서 친구들은 그를 '비챠-크로슈카(꼬마 비챠)'라 불렀다 — 그는 여섯 명의 수석설계자 중 가장 키가 컸다. 그리고 아마 가장 말이 없었다." — 야로슬라프 골로바노프

레닌그라드 공업대학 출신의 자이로스코프 공학자. 2차대전 중 함포 사격통제용 자이로 안정화 장치로 스탈린상을 받았고, 1946년 코롤료프의 '위대한 6인'에 합류해 소련 로켓의 관성항법을 확립했다. R-7(스푸트니크·가가린), R-16, R-36, UR-100 등 모든 소련 대륙간탄도미사일과 살류트·미르 우주정거장, 에네르기야-부란까지, 그의 자이로스코프 없이 발사된 소련 우주로켓은 없다. 1956년부터 이끈 NII-944은 현재 그의 이름을 딴 응용역학연구소(НИИ ПМ)로 남아 러시아 우주항법의 핵심이다. 가장 키가 컸지만 가장 말이 없었던 그를 동료들은 '비챠-크로슈카(꼬마 비챠)'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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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40레닌그라드 제212공장(전기계기) 연구기사, 함선용 자이로컴퍼스 개발
  • 1940–43모스크바 NII-10 자이로스코프 부장, 함포 사격통제 안정화 장치로 스탈린상(1943)
  • 1943–46MNI-1 특별설계국 수석설계자, 전차 주포용 안정기 개발
  • 1946–56NII-10 수석설계자, '위대한 6인' 합류 — R-1·R-2·R-5 유도장치 개발
  • 1956NII-944(현 응용역학연구소) 주임기사 겸 수석설계자 — R-7 유도장치, 사회주의노동영웅(1차)
  • 1957/1961스푸트니크·보스토크(가가린) 발사 성공, 레닌상, 사회주의노동영웅(2차)
  • 1960s–80sR-16·R-36·UR-100 ICBM, 루나·베네라·마스 탐사선, 살류트·미르·에네르기야-부란 유도장치
  • 1968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1958 준회원, 1949 포병과학아카데미 준회원)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사빈킨

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Савинкин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 1913–1993 ○ 1987년 연금 퇴직 · 자연사

브레즈네프 시기 19년간 소련 전력 기관들의 인사 문지기

사빈킨이 3년 넘게 부장 대행에 머물자 부서 평직원들조차 조바심을 냈다. 경찰 중장 치간니크는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 같은 평범한 직원들조차 그의 임명이 이례적으로 지연되는 데 지쳐 초조하게 결정을 기다렸습니다."

1968년부터 1987년까지 CPSU 중앙위 행정기관부장을 지내며 KGB·내무부·국방부·검찰·법원의 고위 간부 임명을 통제한 군사정치 간부다. 1935년 붉은 군대 입대 후 정치장교로 참전했고, 1950년부터 중앙위 기구에서 행정기관 부문 경력을 쌓았다. 1964년 전임자 미로노프의 급사로 부장 대행이 되었고, 3년 넘는 대행 끝에 1968년 정식 부장으로 임명되었다. 지나치게 신중한 성격으로 기억되며, 국방부 인사에 집중했고 1987년 퇴직할 때까지 브레즈네프·안드로포프·체르넨코 세 서기장을 거치며 전력 기관 인사 시스템의 보이지 않는 기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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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붉은 군대 입대, 무선통신대대 사병 및 하급 지휘관
  • 1937적군 화학연구소 콤소몰 서기
  • 1939–1941군사정치 아카데미 수학, 서부전선 제33군 정치부 선전담당 고등교관
  • 1942–1944자바이칼 전선: 여단 정치부장, 전선 정치부 간부부 차장, 총정치국 간부국 고등교관
  • 1947–1950군사정치 아카데미 복학 및 졸업
  • 1950전연방 공산당 중앙위 행정부 교관
  • 1952–1959중앙위 행정부문 육군 부문장, 부문 차장 등 역임
  • 1959–1968중앙위 행정기관부 차장 → 제1차장, 1964년 10월부터 부장 대행
  • 1968–1987CPSU 중앙위원회 행정기관부장

지리 하예크

Jiří Hájek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체코슬로바키아 체코인 1913–1993 ○ 자연사

국제법의 언어를 시민권 투쟁으로 돌린 외교관

1968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소련의 침공을 “점령”이라고 규정하며 항의했다.

지리 하예크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정치가이자 외교관으로, 프라하의 봄 개혁과 그 좌절을 모두 경험했다. 1968년 소련 주도의 침공을 유엔에서 점령이라고 규정하며 항의한 뒤 관직과 공산당 지위를 잃었고, 국제적 약속이 국내 권력보다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보여 주었다. 그는 1977년 바츨라프 하벨, 얀 파토치카와 함께 샤르타 77의 첫 대변인이 되어 헬싱키 최종의정서의 인권 조항을 시민적 책임의 근거로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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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45나치 독일에 투옥
  • 1945–1948체코슬로바키아 사회민주당 의원·노동운동 간부
  • 1950–1953정치·경제과학대학 총장
  • 1955–1958영국 주재 대사
  • 1958–1965외무차관·유엔 주재 대표
  • 1965–1968교육부 장관·외무부 장관
  • 1977–1979샤르타 77 첫 대변인
  • 1988–1990체코슬로바키아 헬싱키위원회 창립자·의장

블라디미르 알렉세예비치 키릴린

Владимир Алексеевич Кириллин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913–1999 ○ 자연사

과학기술혁명기 소련 민간 R&D의 총괄 설계자

1980년 1월, 15년간 이끌어온 GKNT 의장직에서 스스로 물러나 과학아카데미 고온연구 부문으로 돌아갔다. 정치적 축출이 아닌, 연구 현장으로의 자발적 복귀였다.

열물리학자로 스탈린상(1951)과 레닌상(1959)을 수상한 키릴린은, 1965년부터 15년간 국가과학기술위원회(GKNT) 의장 겸 각료회의 부의장으로서 소비에트 민간 R&D 전체를 총괄했다. CPSU 중앙위 과학부장(1955–1962)과 과학아카데미 부총재를 거친 그는, 과학기술혁명기 소련의 국가혁신전략을 입안·집행한 핵심 인물이었다. GKNT가 군산복합체의 R&D 예산을 통제하지 못하는 구조적 한계 속에서도, 아카데미·산업·정부를 잇는 전방위 조정자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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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6–1954모스크바동력학원(MPEI) — 기술자, 대학원, 교수, 부원장
  • 1954–1955소련 고등교육부 차관
  • 1955–1962CPSU 중앙위원회 과학·고등교육·학교부장
  • 1963–1965소련 과학아카데미 부총재
  • 1965–1980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과학기술위원회(GKNT) 의장
  • 1980–1988과학아카데미 물리기술학·에너지학부 아카데미크-서기, 이후 상임간부회 고문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 알렉세예프

Александр Иванович Алексеев
외교 소련 러시아 1913–2001 ○ 자연사

카스트로의 신뢰를 얻은 소련 정보장교 출신 초대 주쿠바 대사

1962년 5월 크렘린에서 흐루쇼프가 물었다. '카스트로가 핵미사일 배치를 받아들일까?' 알렉세예프는 회고했다. '당혹감을 애써 누르며 나는 피델이 그 제안에 동의하지 않으리라는 의심을 말했다.'

본명은 알렉산드르 시토프. 모스크바대학 역사학부를 졸업하고 1939년 NKVD에 들어가 이란·프랑스·아르헨티나에서 정보장교로 활동했다. 1959년 TASS 특파원 신분으로 쿠바에 도착해 피델 카스트로 및 체 게바라와 개인적 신뢰를 쌓았고, 1962년 5월 소련의 초대 주쿠바 대사로 임명되었다. 임명 직후 흐루쇼프에게 카스트로가 핵미사일 배치를 거부할 것이라고 경고했으나 흐루쇼프는 이를 무시했으며, 쿠바 미사일 위기 동안 카스트로의 핵 선제타격 주장을 진정시키고 모스크바와 아바나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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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1939스페인 내전 소련 군사고문단 통역
  • 1941–1943이란 주재 NKVD 정보장교
  • 1944–1951파리 주재 NKVD/KI 레지던트 (공식 직함: 대사관 아타셰)
  • 1954–1958아르헨티나 주재 KGB 레지던트 겸 대사관 1등서기관
  • 1959–1960쿠바 주재 TASS 특파원 겸 KGB 레지던트
  • 1960–1962주쿠바 소련 대사관 문화고문
  • 1962–1968주쿠바 소련 대사
  • 1974–1980주마다가스카르 소련 대사
사회주의권 지도자 폴란드 폴란드 1913–2001 ○ 진폐증

서방 차관으로 현대화 10년을 이끌었으나 부채 위기와 연대로 막 내린 PZPR 제1서기

1971년 1월 노동자 집회에서 — 「자, 그럼 동지들, 도와주시겠습니까?」 (약한 박수)

프랑스·벨기에 탄광 노동자 출신, 1970년 노동자 봉기 후 PZPR 제1서기가 되어 서방 차관으로 '사회주의적 소비사회'를 추진했다. 생활수준이 올랐으나 외채 위기와 1980년 파업으로 실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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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프랑스 공산당 입당, 랑스 탄광 지구에서 활동
  • 1934레포레스트 탄광 점거 파업 주도, 폴란드로 강제 추방
  • 1937–46벨기에 이주, 벨기에 공산당 및 대독 레지스탕스 '백색여단' 활동
  • 1948–54귀국, PZPR 카토비체 주당 서기, 이후 중앙위 중공업부장
  • 1957–70PZPR 카토비체 주당 제1서기 — '카토비체 공국'의 실리적 통치
  • 1970–80PZPR 중앙위 제1서기 — '기에레크의 10년'
  • 1976–80국가평의회 위원 겸임
  • 1981PZPR 제명, 계엄령 하 인터닝 (1981.12–1982.12)

티혼 니콜라예비치 흐레니코프

Тихон Николаевич Хренников
문화 · 문학예술 통제 소련 러시아인 1913–2007 ○ 자연사

43년간 소비에트 음악의 문지기

BBC와의 인터뷰에서 외쳤다: "나는 스탈린의 인민위원이었다. 내가 '안 돼!'라고 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소비에트 작곡가 동맹 서기장(1948–1991)으로 43년간 소련 음악계를 통제한 작곡가. 1948년 지하노프의 '형식주의 반대' 캠페인에서 프로코피예프·쇼스타코비치를 비판하는 연설로 스탈린의 신임을 얻어 발탁되었다. 흐루쇼프 시기 1948년 결정을 철회시키는 한편 젊은 음악가들을 후원한 이중적 인물로, 만년에는 페레스트로이카를 '배신'으로 규탄했다. 오페라 8편·교향곡 3편·영화음악 30편과 유행가 '모스크바의 창가'를 남겼으며, 사회주의 노동 영웅·레닌상·스탈린상 3회를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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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1932그네신 음악전문학교 작곡·피아노 전공
  • 1932–1936모스크바 음악원 셰발린(작곡)·네이가우스(피아노) 사사
  • 1935교향곡 1번 초연, 스토코프스키·토스카니니 해외 연주
  • 1941–1967붉은군대 중앙극장 음악감독
  • 1948–1991소비에트 작곡가 동맹 서기장 (1957년까지 총서기, 이후 제1서기)
  • 1961–2007모스크바 음악원 교수 (1966년부터 정교수)
  • 1962–1989소비에트 최고회의 대의원
  • 1976–1990CPSU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솔로멘체프

Михаил Сергеевич Соломенцев
정부 수반 소련 러시아 1913–2008 ○ 자연사

러시아 공화국을 12년간 이끈 브레즈네프 시대의 산업 테크노크라트

브레즈네프가 솔로멘체프를 러시아 각료회의 의장에 임명하며: "러시아에는 별도 공산당이 없으니, 내가 러시아 당 조직을 직접 이끌고 자네는 러시아 연방 담당 내 대리 역할을 해주게."

레닌그라드 공업대학 출신 기계기사로 방위공업 현장에서 시작해 1971년부터 12년간 러시아 공화국 각료회의 의장을 지내며 소련 최대 공화국의 경제를 관장했고, 브레즈네프로부터 '러시아 연방 담당 부사령탑'이라는 비공식 위임을 받은 인물이다. 1983년 정치국원 겸 당통제위원장이 되어 1930~50년대 탄압 희생자 재활 위원회를 이끌었으나, 1988년 9월 고르바초프의 정치국 숙청으로 전격 해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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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레닌그라드 공업대학 졸업, 방위공업 공장 배치
  • 1941–1948우랄 대피 공장에서 당 조직원으로 활동
  • 1948–1954즐라토우스트·첼랴빈스크 공장 주임기사 → 공장장
  • 1955–1959첼랴빈스크 주당위 서기 → 제2서기 → 소브나르호스 의장
  • 1959–1962카자흐스탄 카라간다 주당위 제1서기
  • 1962–1964카자흐스탄 공산당 중앙위 제2서기
  • 1964–1966로스토프 주당위 제1서기
  • 1966–1971CPSU 중앙위 서기 겸 중공업부장
  • 1971–1983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각료회의 의장
  • 1983–1988CPSU 중앙위 당통제위원장, 정치국 정위원
  • 1987–1988정치국 1930~50년대 탄압 희생자 재활 위원회 위원장
  • 19889월 중앙위 총회에서 전격 해임, 은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