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1985

해빙과 정체의 사람들 445명

스탈린의 관 뚜껑을 연 해빙과 그것을 다시 덮은 정체 사이에서, 우주와 개혁과 반체제의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

세르게이 블라디미로비치 미할코프

Сергей Владимирович Михалков
문화 · 문학예술 통제 소련 러시아 1913–2009 ○ 자연사

스탈린부터 푸틴까지 국가를 쓴 시인

2009년 임종을 앞두고 아내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 "이제 됐다. 안녕." 그리고 눈을 감았다.

소련 아동문학의 거장이자, 1944년판·1977년판 소련 국가와 2000년 러시아 국가 가사를 쓴 시인이다. 장편시 〈스표파 아저씨〉로 수십 년간 소련 어린이들의 사랑을 받았고, 풍자 뉴스릴 《피틸》의 창간자 겸 편집장으로도 이름을 남겼다. 1970년부터 1990년까지 러시아공화국 작가동맹 의장으로서 소비에트 문학 행정의 정점에 서 있었으며, 사회주의노동영웅·레닌상·세 차례 스탈린상을 받았다. 파스테르나크솔제니친 배척 운동에 가담한 문학 관료로서 비판도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수많은 작가의 주거·구직·의료·구금 문제를 뒤에서 해결해 준 후원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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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장편시 〈스표파 아저씨〉 발표
  • 1937소련 작가동맹 가입
  • 1941–1945군사통신원으로 복무, 오데사·세바스토폴 방어전 참전
  • 1944엘레기스탄과 공동으로 소련 국가 가사 집필 (스탈린판)
  • 1950CPSU 입당
  • 1962–2008풍자 뉴스릴 《피틸》 창간·편집장
  • 1965–1970소련 작가동맹 모스크바 지부 제1서기 · 소련 작가동맹 이사회 서기
  • 1970–1990러시아공화국(RSFSR) 작가동맹 의장
  • 1977소련 국가 가사 개정판 집필 (스탈린 언급 삭제)
  • 2000러시아 연방 국가 가사 집필 (푸틴판)

게오르기 니콜라예비치 바바킨

Георгий Николаевич Бабакин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914–1971 ○ 심장발작으로 급서

루나 9호·루노호트의 수석설계자, 달과 금성에 최초로 닿은 자동탐사선을 만든 사람

1966년 2월 3일, 루나 9호가 인류 최초로 달에 연착륙하자 바바킨은 환호했다. "어떻게 착륙했는지 봤어?! 요람에 내려놓듯이!"

라보치킨 설계국(OKB-301) 수석설계자(1965–1971). 코롤료프에게서 무인 달·행성 탐사선 프로그램을 이관받아 세계 최초의 달 연착륙(루나 9호), 최초의 월면 로버(루노호트 1호), 최초의 로봇 월면 표본 귀환(루나 16호), 최초의 금성 착륙(베네라 7호)을 잇달아 성공시켰다. 라디오 기술자로 출발해 43세에야 학위를 받은 늦깎이였지만, 철저한 지상시험으로 코롤료프도 이루지 못한 탐사선 신뢰성을 이끌어냈다. 1971년 심장발작으로 급서. 달과 화성의 크레이터에 그의 이름이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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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모스크바 시 전화국 라디오 서비스 기술자
  • 1937전연방 통신기술학교 연구원
  • 1943자동화연구소(VSNITO) 레이더·유도체계 연구실장, 수석기술자
  • 1949NII-88 체르톡 부서 지대공미사일·유도체계 연구
  • 1952OKB-301(라보치킨) 순항미사일 부랴·V-300 대공미사일 개발
  • 1965OKB-301 / NPO 라보치킨 수석설계자 — 무인 달·행성 탐사선 총괄
  • 1966루나 9호 세계 최초 달 연착륙, 루나 10호 최초 달 인공위성
  • 1970루나 16호 로봇 표본 귀환, 루노호트 1호 월면 로버, 베네라 7호 금성 착륙
  • 1971마르스 2·3호 발사 — 8월 3일 심장발작으로 급서

블라디미르 니콜라예비치 첼로메이

Владимир Николаевич Челомей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폴란드 1914–1984 ○ 자연사

흐루쇼프의 후원으로 코롤료프를 넘었으나, 후원자가 몰락하자 밀려난 미사일 설계자

1958년 3월 8일, 첼로메이는 흐루쇼프의 아들 세르게이를 OKB-52의 엔지니어로 채용했다. 이 한 건의 인사로 그는 소련 최고 권력자의 눈과 귀를 직접 확보했고, 이후 6년간 코롤료프조차 넘볼 수 없는 정치적 후원 아래 소련 우주 계획의 정점으로 치솟았다.

소련의 대표적 로켓·우주기술 설계자로, OKB-52(후일 NPO 마시노스트로예니야)를 이끌며 프로톤 발사체, UR-100 대륙간탄도미사일, 알마즈 군사우주정거장, TKS 우주선을 만들었다. 1961년 코롤료프를 대신해 수석설계자회의 의장이 되었으나, 흐루쇼프의 아들 세르게이가 첼로메이 밑에서 일했던 인연 덕에 정치적 후원이 단단했다. 흐루쇼프 실각 후 우스티노프에게 밀려났고, 1981년에는 그의 우주 사업이 전면 중단되었다. 프로톤 로켓은 지금도 운용 중이며, UR-100은 소련 역사상 가장 많이 배치된 ICB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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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키예프 항공대학 졸업, 진동 이론 논문으로 주목
  • 1941중앙항공발동기연구소(CIAM) 입소, VKP(b) 입당
  • 1944–53OKB-51 소장 겸 수석설계자: V-1 기반 순항미사일 10Х 개발
  • 1955OKB-52(현 NPO 마시노스트로예니야) 수석설계자
  • 1961–64수석설계자회의 의장으로 코롤료프 계승
  • 1965프로톤 발사체 첫 비행, UR-100 ICBM 배치 시작
  • 1970s알마즈 군사우주정거장 · TKS 수송선 개발
  • 1981–84우주 사업 중단 명령; 모교에서 강의하며 조용히 말년을 보냄

유리 블라디미로비치 안드로포프

Юрий Владимирович Андропов
국가보안 기관 소련 러시아 1914–1984 ○ 자연사

KGB에서 개혁가를 길러 낸 역설

1956년 부다페스트, 대사관 창밖으로 헝가리 비밀경찰 장교들이 가로등에 목이 매달리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 공포는 그를 평생 따라다녔고, 프라하와 카불과 바르샤바에서도 그가 본 해답은 오직 무력뿐이었다.

1956년 부다페스트 주재 대사로 탱크를 부른 사람, 15년간 KGB 의장으로 프라하의 봄을 진압하고 반체제를 짓밟은 사람 — 그러나 체제의 실상을 가장 정확히 알았기에 고르바초프를 발탁해 키우고 페레스트로이카의 경제 청사진을 그리게 한 사람. 시를 쓰고 영어를 독학하며 미국 정세를 직접 읽은 소비에트 지도자로서, 아프간 개입을 결정한 3인 협의체의 일원이었고 서기장 15개월 동안 부패 숙청과 규율 캠페인을 밀어붙이다 신부전으로 쓰러졌다. 전신원 청년에서 KGB 수장을 거쳐 최고 권좌에 오른 궤적 자체가 소비에트 체제의 모순을 응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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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57부다페스트 주재 대사: 1956년 개입의 현장
  • 1957–67중앙위 사회주의국가 관계 부장
  • 1967–82KGB 의장: 반체제 단속, 제5국 신설
  • 1979아프가니스탄 개입 결정의 핵심 3인
  • 1982–84서기장: 규율 캠페인, 고르바초프 등 신진 발탁

파벨 스테파노비치 쿠타호프

Павел Степанович Кутахов
군사 · 국방 소비에트 러시아인 1914–1984 ○ 뇌졸중

소련 공군 최장기 총사령관, 냉전기 공군력을 정점으로 이끈 에이스 출신 지휘관

겨울전쟁 중 쿠타호프의 I-15bis 전투기가 아군기에게 핀란드기로 오인되어 피격됐다. 그는 만신창이가 된 기체를 소련 영토까지 끌고 와 불시착했고, 기체는 수리 불능이었지만 곧 다시 비행에 복귀했다.

파벨 쿠타호프는 1969년부터 사망한 1984년까지 15년간 소련 공군 총사령관을 지낸 최장기 재임자다. 독소전쟁에서 367회 출격, 79회 공중전을 치르며 13기 이상을 격추한 에이스로 1943년 소비에트연방영웅이 되었고, 북극 호송선단 호위 공로로 영국 대영제국 훈장을 받았다. 총사령관으로서 MiG-23, MiG-25, Su-24, Tu-22M3, Tu-160 등 신형기를 도입하고 장거리 레이더 체계를 구축해 소련 공군을 전투기 13,000여 대 규모로 키웠다. 60세까지 직접 비행했고 1984년 70세 생일에 두 번째 영웅 칭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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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40제7전투항공연대 비행중대장 — 겨울전쟁 131회 출격
  • 1941–1944제19근위전투항공연대 비행중대장 → 연대 부지휘관 — 367회 출격, HSU 1943
  • 1944–1948제20근위전투항공연대장
  • 1954–1957제71전투항공군단장 (주독 소련군)
  • 1961–1967제48항공군 사령관
  • 1967–1969소련 공군 제1부총사령관
  • 1969–1984소련 공군 총사령관 · 국방부 차관

알렉산드르 다비도비치 나디라제

Александр Давидович Надирадзе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그루지야 1914–1987 ○ 심장마비

소련 이동식 ICBM 전력의 창시자, 그루지야 태생의 비밀 설계자

1987년 12월, 고르바초프레이건이 INF 조약으로 그의 Pioneer 728기 폐기를 결정했을 때 나디라제는 세상을 떠난 지 석 달이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설계한 Topol은 소련보다 오래 살아남아 지금도 러시아 핵전력의 중심에 서 있다.

그루지야 고리 출신의 로켓 공학자. 모스크바 열기술연구소(MITT)에서 세계 최초의 고체연료 이동식 ICBM 전력을 창시해 RT-21 Temp-2S(SS-16), RSD-10 Pioneer(SS-20), RT-2PM Topol(SS-25)을 설계했다. 그의 Topol은 INF 조약으로 Pioneer가 폐기된 뒤에도 살아남아 오늘날 러시아 핵억지력의 근간이며 Topol-M, RS-24 Yars로 계보가 이어진다. 두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1976, 1982)과 레닌상(1966)을 수훈했고 1981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1987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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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6–41TsAGI에서 항공기 착륙장치 연구, Tu-2 개발 참여
  • 1941–45대전차탄 개발, 로켓 설계로 전환
  • 1945–53OKB 수석설계자: 소련 최초 기상로켓 MR-1, 유도폭탄 '차이카'
  • 1958–61NII-1 수석설계자, 고체연료 전술미사일 Temp-S
  • 1961–76MITT 소장 겸 수석설계자: Temp-2S(SS-16), Pioneer(SS-20) 실전 배치
  • 1976–82사회주의노동영웅 2회, Pioneer-UTTH,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77–87Topol(SS-25) 설계, 국가상 수상, 심장마비로 사망

블라디미르 표도로비치 톨룹코

Владимир Фёдорович Толубко
군사 · 국방 소련 우크라이나 1914–1989 ○ 자연사

소련 전략로켓군을 대미 전략적 균형으로 이끈 사령관

1983년 3월 25일, 톨룹코는 중간 계급인 포병원수를 건너뛰고 대장에서 포병주력원수로 직접 진급했다. 소련 역사상 유일한 사례다.

독소전에서 전차장교로 단련되고 1972년부터 1985년까지 전략로켓군(RVSN)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으로 재임하며 MIRV 탑재 3세대 대륙간탄도미사일과 이동식 미사일 «피오네르»의 실전 배치를 주도하여 소련의 대미 전략적 균형을 완성한 군인이다. 1983년 대장에서 포병주력원수로 바로 진급한 유일한 사례로, 1962년 쿠바 미사일 배치 작전 「아나디리」 조직에도 핵심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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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5독소전 참전, 전차여단 지휘 및 4근위기계화군단 작전과장
  • 1951–1960주동독 제19근위기계화사단장 → 제1근위전차군 → 제8근위군 사령관
  • 1960–1968전략로켓군 제1부사령관, 작전 「아나디리」(쿠바 미사일 배치) 조직 참여
  • 1968–1972시베리아·극동 군관구 사령관
  • 1972–1985전략로켓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 3세대 미사일 배치 주도
  • 1983대장에서 포병주력원수로 직접 진급 (소련 역사상 유일)

키릴 트로피모비치 마주로프

Кирилл Трофимович Мазуров
사회주의권 지도자 소련 벨라루스 1914–1989 ○ 자연사

파르티잔 출신 벨라루스 지도자, 브레즈네프 정치국원 겸 연방 부총리

오늘날 내가 같은 작전을 지휘하라는 제안을 받는다면, 나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체코인들에게 우리를 용서해 달라고 부탁한다.

벨라루스 파르티잔 지도자로 1956년 벨라루스 공산당 제1서기, 1965년부터 소련 정치국 정위원 겸 제1부총리로 13년간 경제를 총괄했으며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의 정치감독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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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1936파리치 지역 도로부 기술자, 고멜 자동차도로기술학교 졸업
  • 1936–1938붉은 군대 복무, 이후 벨라루스 철도 정치부 근무
  • 1940–1941고멜 시 콤소몰 비서 → 브레스트 주 콤소몰 제1서기
  • 1942–1943중앙유격대본부 대표로 벨라루스 파르티잔 운동 지도 (중령 → 대령)
  • 1943–1947벨라루스 콤소몰 중앙위 제2서기 → 제1서기
  • 1949–1950민스크 시당위 제2서기 → 제1서기
  • 1950–1953민스크 주당위 제1서기
  • 1953–1956벨라루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각료회의 의장
  • 1956–1965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1957–1965CPSU 중앙위 간부회 후보위원
  • 1965–1978CPSU 정치국 정위원 겸 소련 각료회의 제1부의장 —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진입 작전 현장 정치감독관
  • 1986–1989전연방 전쟁·노동 재향군인회 초대 의장

게오르기 알렉산드로비치 튤린

Георг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Тюлин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인 1914–1990 ○ 자연사

테레시코바, 레오노프, 루노호트의 발사에 'Go'를 내린 사람

보스토크 5호 발사 직전, 3단 'Go' 신호등이 들어오지 않자 위원회는 발사 중지 쪽으로 기울었다. 튤린은 코롤료프 편에 섰다 — 계측 오류다. 카운트다운을 재개했고, 발사는 완벽했다.

소련의 로켓우주 과학자이자 중장으로, GKOT 제1부의장(1963–1965)과 일반기계공업부 제1차관(1965–1976)을 지냈다. 국가위원회 의장으로서 테레시코바의 보스토크 6호, 레오노프의 첫 우주유영(보스호트 2호), 세계 최초 달 연착륙(루나 9호)과 루노호트(루나 17호) 등 역사적 발사마다 최종 발사 명령을 내렸다. 1974~1975년 아폴로-소유즈 계획의 소련 측 정부 책임자로서 공동 임무의 최종 책임을 맡았다. 14세 선반공으로 출발해 카추샤 로켓부대에서 복무한 포병장교 출신으로, 소련 로켓 프로그램을 제도화된 국가 역량으로 전환시킨 군사기술 관리자 중 한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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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4카추샤 로켓부대 포대장에서 근위박격포부대 작전반장까지, 서부·북서·제2발트 전선
  • 1945–1946독일서 V-2 로켓 기술 회수팀 지휘 ('튤린 경영')
  • 1948–1955NII-4 탄도연구소장 → 과학담당 부소장 → 제1부소장
  • 1959–1961NII-88 (후일 TsNIIMash) 소장
  • 1961–1965국방기술국가위원회(GKOT) 부의장 → 제1부의장
  • 1965–1976일반기계공업부 제1차관 (S. A. 아파나시예프 장관 아래)
  • 1974–1975아폴로-소유즈 시험계획(EPAS) 소련 측 조정위원회 의장
  • 1977–1990모스크바국립대학교 기계수학부 파동역학연구실 조직·지도

빅토르 바실리예비치 그리신

Виктор Васильевич Гришин
당 서기국 · 조직인사 러시아 러시아 1914–1992 ○ 자연사

18년간 모스크바를 통치하고 연금 재신청 중 사망한 브레즈네프 시대의 얼굴

1964년 10월, 흐루쇼프 실각 당시 그리신은 일리초프와 함께 흐루쇼프의 사임 성명 초안을 작성했다. 흐루쇼프는 자신의 정치적 죽음이 담긴 그 서류에 서명했고, 이후 브레즈네프 시대가 열렸다.

브레즈네프 시대 보수파의 모스크바 시당 제1서기로 18년간(1967~1985) 수도를 통치했다. 1971년 정치국 정위원이 되었고, 브레즈네프와 체르넨코 사후 두 차례 서기장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1985년 고르바초프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모스크바 인근 원전 건설을 저지해 체르노빌 이후 선견지명을 인정받았고, 1980년 올림픽 인프라를 총괄했다. 1992년 연금 재등록을 위해 구청 사회보장과를 찾았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하여 후기 소비에트 체제의 안정과 정체를 동시에 체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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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38측량기사, 기관차 차량기지 부책임자
  • 1941–50세르푸호프 시당 제2서기 → 제1서기
  • 1950–52모스크바 주당 기계제조부장 → 제2서기
  • 1956–67전소비에트 중앙노동조합평의회(VTsSPS) 의장 · 세계노조연맹 부의장
  • 1967.06–1985.12모스크바 시당 제1서기
  • 1971.04–1986.02정치국 정위원 (1961년부터 후보위원)
  • 1980모스크바 올림픽 인프라 건설 총괄
  • 1986–87최고소비에트 상무회 국가고문, 이후 연금 생활

비탈리스 페트로비치 루벤스

Виталий Петрович Рубен
민족문제 · 연방 관리 소비에트 라트비아 1914–1994 ○ 자연사

브레즈네프 시기 민족소비에트를 10년간 이끈 라트비아인

1983년 12월 8일, 인권의 날 기자회견에서 루벤스는 고리키에 유배된 사하로프에 대해 "재능은 있지만 아픈 사람"이며 유배가 "무엇보다도 그 자신의 정신적 평화를 위해 필요했다"고 말했다.

모스크바 출신의 라트비아계 소비에트 정치인으로, 라트비아 SSR 각료회의 의장과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을 거쳐 브레즈네프 시기 소련 민족소비에트 의장(1974~1984)을 10년간 지냈다. 비러시아 공화국 출신 간부가 연방 의회 핵심직을 안정적으로 장기 수행한 보기 드문 사례로, 1959년 라트비아 민족공산주의자 숙청 이후 아르비트 펠셰가 발탁한 충성파 기술관료의 전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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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4–1941농업전문학교 졸업 후 농학자로 근무
  • 1942–1943리빈스크 지구신문 《스타하노프 노동》 편집장
  • 1947–1948라트비아 공산당 다우가프필스 군위원회 제2서기
  • 1958–1960라트비아 SSR 국가계획위 농업·조달부장
  • 1960–1961라트비아 공산당 중앙위 농업부장
  • 1962–1970라트비아 SSR 각료회의 의장
  • 1970–1974라트비아 SSR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 · 소련 최고회의 간부회 부의장
  • 1974–1984소련 최고회의 민족소비에트 의장

미하일 바실리예비치 지먀닌

Михаил Васильевич Зимянин
이념 · 선전 소련 벨라루스 1914–1995 ○ 자연사

브레즈네프 시대 '2인자 당 이데올로그'

1964년 10월, 프라하의 소련 대사관. 지먀닌은 모스크바에서 막 돌아와 수화기를 들고 크렘린 쿠데타의 성공을 자랑했다. 상대는 흐루쇼프의 아내 니나였다. '친애하는 레오니트 일리치가 제1서기에 취임했습니다!' 답이 없는 수화기 너머로, 니나는 그 순간 남편의 실각을 알게 되었다.

벨라루스 출신의 당 관료로, 11년간 『프라우다』 편집장을 지내며 소련 언론의 방향을 통제했다. 1976년 중앙위 서기에 올라 수슬로프의 지휘 아래 과학·교육·문화·체육·매체 전반을 관장하는 이념 제2인자가 되었다. 브레즈네프기 후반 보수적 이념 통제의 핵심 집행자였으며, 고르바초프 집권 2년차인 1987년 퇴진할 때까지 당 선전 기구의 연속성을 체현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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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1946벨라루스 공산청년동맹(콤소몰) 중앙위 제1서기, 전시 파르티잔 활동 지도
  • 1946–1953벨라루스 공산당 제2서기 겸 교육장관, 당내 간부로 급성장
  • 1956–1965주베트남 대사, 외교부 극동국장, 주체코슬로바키아 대사 역임
  • 1965–1976『프라우다』 편집장 겸 소련 언론인동맹 이사장 — 최장 재임
  • 1976–1987중앙위 서기, 수슬로프 아래 이념 전반 총괄
  • 1987건강 사유로 퇴진, 연금 생활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시콜니코프

Алексей Михайлович Школьников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 1914–2003 ○ 자연사

흐루쇼프 시절 3개 주를 지배하고 인민통제로 간 실무자

보로네시 제1서기 시절, 흐루쇼프의 시찰을 앞두고 국영농장과 콜호스에 명령을 내렸다. 노동자들은 예비선로의 레일을 뜯어내 트랙터 뒤에 묶고 들판을 가로질러 끌며 수확이 끝난 것처럼 연출했다.

페름 공장에서 10년간 엔지니어로 일한 뒤 전쟁 중 당 기구에 진입했다. 흐루쇼프 시절 탐보프·보로네시·볼고그라드(스탈린그라드) 3개 주에서 1서기를 지내며 지역 산업과 농업을 지휘했고, 보로네시에서는 수확 과시를 위해 들판에 레일을 끌게 한 일화로 유명하다. 1964년 10월 중앙위 전체회의에서 흐루쇼프의 농업 정책과 당 기구 분할을 비판하며 그의 축출에 한몫했다. 이후 RSFSR 각료회의 제1부의장(1965~1974)을 거쳐 소련 인민통제위원회 의장(1974~1987)으로 국가 감독 기구를 13년간 이끌며 브레즈네프 체제의 행정 통제를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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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1943페름 공장에서 교대장·직장·동력책임자로 근무
  • 1943–1945몰로토프(페름) 주당위 부서장
  • 1945–1947중앙당통제위원회 전권위원(블라디미르·보로네시 주)
  • 1947–1949칼루가 주당위 제2서기
  • 1952중앙위 지도원·부부장
  • 1952–1955탐보프 주당위 제1서기
  • 1955–1960보로네시 주당위 제1서기
  • 1960–1965스탈린그라드·볼고그라드 주당위 제1서기
  • 1965–1974RSFSR 각료회의 제1부의장
  • 1974–1987소련 인민통제위원회 의장

레오니트 아르카디예비치 코스탄도프

Леонид Аркадьевич Костандов
중공업 · 군수공업 소련 아르메니아계 1915–1984 ○ 심장마비

브레즈네프 시대 화학화 계획을 지휘한 최장수 화학공업 장관

1984년 라이프치히 박람회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지기 직전까지 동독 측과 화학 플랜트 협상을 진행했다. 그의 유골은 크렘린 벽 묘지에 안치되었는데, 이는 드미트리 우스티노프 바로 앞, 대략 마지막에서 두 번째로 그곳에 묻힌 인물이 되었다.

소련 화학공업의 최장수 책임자로서, 15년간 장관직을 수행하며 비료·고분자·석유화학을 축으로 한 전면적 화학화 계획을 지휘했다. 치르치크 전기화학 콤비나트의 현장 엔지니어로 출발해 질소비료·중수소 생산 기술로 스탈린상과 레닌상을 받았고, 이후 각료회의 부의장으로서 화학·석유·가스 산업 전반을 총괄했다. 아르메니아계로 투르크메니스탄에서 태어나 전연방 산업 관료로 성장했으며, 아르망드 해머와의 협력을 통해 서방 기술 도입 창구 역할도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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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치르치크 전기화학 콤비나트 기사·직장장·주임기사·공장장
  • 1953소련 화학공업부 질소공업 총국장
  • 1958국가화학위원회 부위원장 → 1961년 제1부위원장
  • 1963국가화학·석유기계제조위원회 의장 — 소련 장관
  • 1965–1980소련 화학공업부 장관
  • 1971CPSU 중앙위원회 위원 (1966년부터 후보위원)
  • 1980–1984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마리안 리비츠키

Marian Rybicki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폴란드 폴란드계 1915–1987 ○ 자연사

노동자 봉기 앞에서 질서를 세운 법률 관료

1956년 7월 17일, 그는 수사에서 파업 노동자와 ‘말썽꾼, 범죄자, 도발자’를 구별하겠다고 밝혔다.

마리안 리비츠키는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법률가이자 공산주의 정치인으로, 당과 국가의 법률·행정 기구를 오가며 전후 체제의 제도화를 담당했다. 1956년 포즈난 노동자 봉기 뒤 그는 검찰총장으로서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와 ‘말썽꾼, 범죄자, 도발자’를 가르는 ‘두 흐름’ 논리를 공개적으로 제시했다. 이 구분은 국가가 노동자의 경제적 요구와 형사적 책임을 분리해 다루려 한 방식이었지만, 뒤이은 수사와 재판의 틀도 규정했다. 이후 법무장관과 법학 연구자로 활동하며 사회주의 국가의 법과 통치 문제에 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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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바르샤바대학교 법학 과정 졸업
  • 1945–1947국가민족회의 의장단 법률부 근무
  • 1947–1948폴란드 사회당 중앙집행위원회와 서기국 참여
  • 1948–1954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중앙위원회 조직국 위원
  • 1952–1956국가평의회 초대 서기
  • 1956–1957폴란드 인민공화국 검찰총장
  • 1957–1965법무장관
  • 1965–1983폴란드 과학아카데미 국가·법 연구소 법학 교수 및 전국민족통일전선 서기

보리스 빅토로비치 라우셴바흐

Борис Викторович Раушенбах
이론가 소련 독일계 1915–2001 ○ 자연사

수용소에서 보스토크까지: 우주비행 제어의 개척자

내 인생에서 상관은 코롤료프켈디시 단 두 사람뿐이었다. 두 사람 모두 고결한 분들이었다. 그게 중요하다.

소련 우주개발의 기초를 닦은 물리학자이자 로켓 공학자. 코롤료프의 OKB-1에서 우주선 방향제어 및 유도체계를 설계하여 루나 3호의 달 뒷면 촬영(1959)과 가가린의 보스토크 1호 비행(1961)을 기술적으로 가능하게 했다. 볼가 독일인 가계 출신으로 1942년 민족 기준으로 강제수용되었으나 수용 중에도 계산을 계속했고, 켈디시의 도움으로 복귀하여 우주 프로그램의 핵심 설계자가 되었다. 후기에는 회화의 원근법에 대한 수학적 연구와 정교회 신학으로 전환하여 독창적인 학제적 업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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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1937레닌그라드 민간항공대학 수학 및 글라이더 연구
  • 1937–1941RNII (로켓연구소) 엔지니어 — 코롤료프 휘하 유도탄 비행제어
  • 1942–1946타길라그 강제수용소 수감 — 볼호비티노프 설계국에 계산 제공
  • 1946–1948니즈니타길 특별정착 — 켈디시 산하 계산국 근무
  • 1948–1954NII-1 연구원 — 켈디시 지도하 진동 연소 이론 연구
  • 1955–1959OKB-1 — 코롤료프 지도하 우주선 방향제어 선구적 연구
  • 1960–1973OKB-1 부서장 — 루나·보스토크·화성·금성·소유즈 유도체계 총괄
  • 1959–1978모스크바 물리기술연구소(MFTI) 교수 및 이론역학 주임
  • 1978–2001과학아카데미 우주개척자 유산위원회 위원장 · 예술이론·신학 연구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 랴시코

Александр Павлович Ляшко
민족문제 · 연방 관리 소련 우크라이나 1915–2002 ○ 자연사

브레즈네프 시대 우크라이나 정부를 15년간 이끈 도네츠크 출신의 소비에트 경제관리자

«폭발이 중앙 당국에 보고된 것은 몇 시간 이내였지만, 사태의 전모는 이틀이 지나서야 분명해졌습니다.» — 1986년 5월 8일 키예프 기자회견에서 체르노빌 초기 대응의 정보 지연을 설명하며.

도네츠크 공업지대에서 기술자로 출발하여 당 기구를 따라 승진한 랴시코는, 1972년부터 1987년까지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의 각료회의 의장으로서 공화국 경제를 총괄했다. 15년의 임기는 이 직책 사상 최장기 재임이었으며, 브레즈네프 안정기 전체와 페레스트로이카 출범기를 관통했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 직후에는 공화국 정부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사고 수습을 지휘했으며, 사고 발생 수 시간 내에 중앙에 보고했으나 전모 파악에는 이틀이 걸렸다고 기자회견에서 밝혔다. 셰르비츠키와 함께 우크라이나 당·정을 분담하며 중앙의 정책을 충실히 집행하는 제도적 안정성을 대표했고, 퇴임 후에는 4권의 회고록 《기억의 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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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5하리코프 전차학교 졸업, 전차소대장으로 북캅카스 전선 참전, 이후 사마르칸트 전차학교 교관
  • 1945–1952노보크라마토르스크 기계제작공장 기술자·부공장장·당조직자
  • 1952–1954크라마토르스크 시당위 제1서기
  • 1954–1960스탈리노(도네츠크) 주당위 서기 → 제2서기
  • 1960–1963도네츠크 주당위 제1서기
  • 1963–1966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서기·공업건설국 의장
  • 1966–1969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제2서기
  • 1969–1972우크라이나 SSR 최고소비에트 상임위원회 의장·소련 최고소비에트 상임위원회 부의장
  • 1972–1987우크라이나 SSR 각료회의 의장
  • 1986체르노빌 원전 사고 공화국 정부위원회 위원장

이반 바실리예비치 카피토노프

Иван Васильевич Капитонов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 1915–2002 ○ 자연사

브레즈네프 시기 노멘클라투라를 21년간 운영한 인사 책임자

1976년, 당대회 보고서 초안을 본 브레즈네프가 격노했다 — 「카피토노프 자신은 아무것도 쓸 줄 모른다. 그런데도 서기다. 그의 지시로 이 잡담을 꾸며낸 것이다. 당장 불러서 뼈저리게 야단쳐라!」 체르냐예프의 일기 속 한 장면이다.

모스크바 시·주 당 제1서기를 거쳐 1965년 중앙위 서기 겸 조직당사업부장에 올랐고, 이후 21년간 소련 간부 임명 체계 전체를 실무적으로 관장했다. 흐루쇼프, 브레즈네프, 안드로포프, 체르넨코를 거치며 당 서기국을 지킨 최장수 서기였으나, 정작 정치국원 후보에도 오르지 못했고 브레즈네프는 그를 공개적으로 질책했다. 정체기 당관료제의 충성 네트워크와 인사 정체를 가장 오래 떠받친 기술자형 인사관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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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1954모스크바 시당 제1서기
  • 1954–1959모스크바 주당 제1서기
  • 1959–1964이바노보 주당 제1서기
  • 1965–1983중앙위 조직당사업부장
  • 1965–1986중앙위 서기 (조직·간부 담당)
  • 1986–1988중앙감사위원회 의장

스테판 바실리예비치 체르보넨코

Степан Васильевич Червоненко
외교 소련 우크라이나 1915–2003 ○ 자연사

중소분쟁·프라하의 봄·데탕트를 관통한 24년 임기 소련 대사

1968년 8월 21일, 지시보다 두 시간 앞서 스보보다 대통령을 찾아간 체르보넨코는 체코슬로바키아군의 무저항 전문을 이끌어냈다. 그레치코 원수의 회고: 「그 공으로 대사에게 레닌훈장을 두 개 줘야 한다고 누군가 말하더군.」

소련 외교관으로 중소 분열기 주중 대사(1959~1965), 프라하의 봄 당시 주체코슬로바키아 대사(1965~1973), 주프랑스 대사(1973~1982)를 지냈다. 1968년 8월 21일 모스크바 지시보다 두 시간 앞서 스보보다 대통령을 찾아가 체코슬로바키아군에 무저항 명령을 설득해 대규모 유혈 충돌을 막았으며, 소련 지도부는 이 공로에 「레닌훈장 두 개를 줘야 한다」고 말했다. 1961~1989년 CPSU 중앙위원, 5개 레닌훈장 수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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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41중학교 교사·교장, 키예프주·수미주
  • 1941–1944붉은군대 복무, 위대한 조국전쟁 참전
  • 1944–1949체르카시 사범대학 마르크스-레닌주의 학과장·부학장
  • 1949–1951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선전부 강사단장
  • 1951–1956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과학·고등교육 부장
  • 1956–1959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서기(이념 담당)
  • 1959–1965주중국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65–1973주체코슬로바키아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73–1982주프랑스 소련 특명전권대사 (마다가스카르 겸임 1973~1974)
  • 1982–1988CPSU 중앙위 해외간부·출국관리 부장
  • 1989–1993소련·러시아 외무부 고문

빅토르 니콜라예비치 폴랴코프

Виктор Николаевич Поляков
중공업 · 군수공업 소련 러시아 1915–2004 ○ 자연사

볼가 강변에 소련의 자동차 대중화를 세운 VAZ의 초대 총책임자

“저는 평생 어떤 자리도 구하려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번만은 예외였습니다. 제가 직접 타라소프 장관을 찾아가, 공장장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 건설 중인 VAZ의 총책임자 자리를 자원하며.

볼가 자동차 공장(VAZ)의 건설을 지휘하고 자동차공업부 장관으로 11년간 소련 자동차 산업을 이끈 행정가다. 톰스크 출신으로 MADI를 졸업하고 모스크바 소형차 공장에서 엔지니어로 출발해 1958년 공장장이 되었다. 1966년 타라소프 장관에게 스스로 VAZ 총책임자 자리를 자원해, 피아트와 협력한 세계적 규모의 공장을 3년 만에 가동시키고 1973년까지 100만 대를 생산했으며 '니바' 개발을 시작했다. 장관 시절 연간 200만 대 생산 체제를 완성했고 퇴임 후에도 엘라부가·KAMAZ·AVTOVAZ의 고문으로 평생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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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38견습 정비공 → 모스크바 자동차수리 공장 부책임자, MADI 야간부 졸업
  • 1938–1946서부·카렐리야 전선 자동차부대 복무, 공병소좌 전역 — 1941년 중상
  • 1946–1963MZMA(모스크바 소형차 공장) 기술자 → 연구소장 → 부수석설계사 → 수석기사 → 공장장(1958)
  • 1963–1965모스크바 국민경제회의 제1부의장 → 의장
  • 1965–1966소련 자동차공업부 차관
  • 1966–1975볼가 자동차 공장(VAZ) 초대 총책임자 — 건설부터 연산 66만 대 체제 완성, '니바' 개발 착수
  • 1975–1986소련 자동차공업부 장관 — 연간 200만 대 생산, 세계 6위 도달
  • 1986–2004NAMI 전문위원 → 엘라부가·KAMAZ·AVTOVAZ 고문, 90세로 사망

지야 누리예비치 누리예프

Зия Нуриевич Нуриев
농업 소련 바슈키르 1915–2012 ○ 자연사

브레즈네프 시기 농업을 총괄한 바슈키르 출신 각료회의 부의장

루돌프 누리예프의 망명 후 KGB가 그의 가족을 압박하자, 누리예프는 전화를 걸어 말했다. “가족을 내버려두시오, 그들이 무슨 반소비에트 분자란 말이오!” 그 후로 괴롭힘은 멈췄다.

바슈키르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교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누리예프는 1957년부터 12년간 바슈키르 주당위 제1서기로 공화국을 이끌며 우파와 체르니콥스크를 통합하고 대규모 주택 건설을 추진했다. 1969년 소련 조달장관으로 중앙에 진출한 뒤 1973년부터 1985년까지 각료회의 부의장 겸 농공복합체위원회 의장으로 브레즈네프 시기 농업·식량 정책의 실무 책임자 역할을 했다. 25년간 중앙위원과 8회 연속 최고소비에트 대의원을 지낸 그는 소수민족 간부가 연방 차원의 경제 관료로 자리 잡은 드문 사례였으며, 퇴임 후 회고록 『아울에서 크렘린까지』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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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1935집단농장 청년학교 교사
  • 1935–1938부라옙스키 지역 교육국장
  • 1938–1940적군 복무: 포병연대 콤소몰 서기
  • 1940–1942부조뱌조프스키 지역 교육국장
  • 1942–1944MTS 정치부장 → 부조뱌조프스키 지역당 제2서기
  • 1944–1945키긴스키 지역당 제1서기
  • 1945–1957바슈키르 주당위: 농업부장 → 서기 → 제2서기
  • 1957–1969바슈키르 주당위 제1서기
  • 1969–1973소련 조달장관
  • 1973–1985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 농공복합체위원회 의장
  • 1985–1988소련 각료회의 국가고문

발렌틴 드미트리예비치 샤신

Валентин Дмитриевич Шашин
중공업 · 군수공업 소련 러시아 1916–1977 ○ 자연사

세계 1위 산유국을 만들고도 '무리한 증산'을 경고한 장관

암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고도 병실에서 석유부 장관 업무를 계속했다. 마지막까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더 많은 석유를'이라는 압박에 맞섰다.

바쿠 출신의 석유 기술자로, 12년간 소련 석유부 장관을 지내며 서시베리아 유전의 집중 개발을 통해 소련을 세계 최대 산유국으로 올려놓은 인물. 타트네프티에서 터빈 시추 방식과 대형 블록 조립 공법을 도입해 로마슈킨스코예 유전 개발을 이끌었고, 이후 장관으로서 석유 생산량을 두 배 이상 끌어올렸다. 그러나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더 많은 석유를'이라는 당의 압박에 맞서 합리적 채굴을 주장했으며, 암으로 입원 중에도 병실에서 업무를 계속했다. 레닌상 수상자, 네 차례 레닌 훈장을 받았으며, 타트네프티는 지금도 그의 이름을 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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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6스테를리타마크 석유전문학교 졸업, 이심바이네프티 검층반 근무
  • 1943모스크바 석유연구소 졸업, 바시키르 유전에서 시추 기술자
  • 1947–1953바쉬네프테라즈베드카 트러스트 수석기술자 → 관리자
  • 1953–1956타트네프티 시추 담당 부책임자
  • 1956–1960타트네프티 책임자
  • 1960–1965RSFSR 국민경제회의 석유·가스공업 총국장
  • 1965–1970소련 석유채굴공업 장관
  • 1970–1977소련 석유공업 장관

바실리 알렉산드로비치 카자코프

Васил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Казаков
중공업 · 군수공업 소련 러시아 1916–1981 ○ 재임 중 사망

공장 기술자에서 항공공업 장관까지 오른 군수산업 행정가

1977년 6월, 24년간 항공공업을 이끈 표트르 데멘티예프가 사망하자 카자코프가 후임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취임 후 4년도 못 되어 임기 중 사망했고, 생전에 일했던 모스크바 계기공장은 그의 이름을 따랐다.

모스크바 근교 마을에서 태어나 16세에 제도공으로 노동을 시작한 소련 항공공업 행정가. 항공기 계기·유도장치 분야의 핵심 연구소였던 NII-923 소장 시절 로켓무장과 핵잠수함 생산에 기여해 1963년 사회주의노동영웅을 받았고, 12년간 차관과 제1차관을 거쳐 1977년 표트르 데멘티예프의 후임으로 항공공업 장관에 올랐다. 기술자에서 장관까지 항공공업의 모든 단계를 거친 유일한 전후 세대 지도자로, 브레즈네프 시기 소련 항공생산 체계의 실무적 안정성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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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1937모스크바 '엘렉트로스베트' 공장 제도공 → 모스크바 기계기술학교 졸업
  • 1937–1944제213항공공장: 기술자 → 작업장장 → 부서장 → 주임기술자
  • 1944–1951제122항공공장 주임기술자 → 제10국가설계연구소 부서장
  • 1951–1960제122공장 수석기술자 (1955년 전소연방통신기계제조대학 졸업)
  • 1960–1965NII-923 소장 — 항공기 계기·관성유도체계 개발 주도, 사회주의노동영웅(1963)
  • 1965–1974소련 항공공업 차관
  • 1974–1977소련 항공공업 제1차관
  • 1977–1981소련 항공공업 장관 — 재임 중 사망, 레닌상(1976)·소련국가상(1967)

블라디미르 바실리예비치 바히레프

Владимир Васильевич Бахирев
중공업 · 군수공업 소련 러시아인 1916–1991 ○ 자연사

냉전기 소련 재래식 탄약 대량생산 체계를 19년간 지휘한 군수 행정가

그는 자신의 전직 공장인 데그탸레프 공장의 젊은 설계사에게 이렇게 설득했다. "대포도, 로켓도 언젠가는 안 만들게 될 날이 온다. 하지만 사람이 살아 있는 한 따뜻함은 필요하고, 원자력은 핵무기만이 아니라 평화로운 에너지이기도 하다."

소련의 군수 산업 지도자로, 1968년부터 1987년까지 기계공업장관을 지내며 재래식 탄약·폭탄·신관·로켓 추진제 생산을 총괄했다. 모스크바 대학 수리역학부 졸업 후 코브로프의 데그탸레프 공장에서 엔지니어로 출발해 항공기관포·대전차유도탄 개발을 주도했고 1960년 공장장에 올랐다. 드미트리 우스티노프의 신임으로 1965년 방위공업부 제1차관, 1968년 신설 기계공업부 장관에 발탁되어 19년간 소련군의 포탄·폭탄·기뢰·고체연료를 책임지는 거대 군수 부문을 지휘했으며, 세계 최초의 수중고속로켓 '시크발(Шквал)' 개발에도 기여했다. 군수 생산과 함께 소비재·원자력 평화 이용까지 아우르며 군수 공업의 합리화를 추구했으나, 1987년 페레스트로이카 세대교체로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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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제2공장(데그탸레프 공장) 설계국 엔지니어
  • 1948OKB-2 부소장(경험 업무)
  • 1950–1952제575공장 수석 설계자
  • 1952–1954OKB-2 소장
  • 1954–1960데그탸레프 공장 수석 엔지니어·부공장장
  • 1960–1965데그탸레프 공장장
  • 1965–1968소련 방위공업부 제1차관
  • 1968–1987소련 기계공업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