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1985

해빙과 정체의 사람들 445명

스탈린의 관 뚜껑을 연 해빙과 그것을 다시 덮은 정체 사이에서, 우주와 개혁과 반체제의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

민족문제 · 연방 관리 소련 라트비아 1916–1994 ↓ 퇴임 1989

라트비아 당 지도자 출신 민족소비에트 의장

1988년 5월 28일, 라트비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제19차 전연방 당대회 대표 선출이 진행되었다. 보스는 가장 많은 반대표를 받았지만 어쨌든 당선되었다. 모스크바로 항의 편지가 쇄도했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라트비아 공산당 제1서기를 지낸 뒤 민족소비에트 의장이 되었다. 정체 말기 발트 공화국 관리의 한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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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s–1950s라트비아 공산당 조직에서 성장
  • 1966–1984라트비아 공산당 제1서기, 정체기 발트 공화국 관리 담당
  • 1984–1989민족소비에트 의장, 말기 소련 연방대표제의 보수적 얼굴
  • 1988–1989발트 민족운동과 페레스트로이카 속에서 영향력 약화
  • 1989 이후중앙정치에서 퇴장

레오니트 바실리예비치 스미르노프

Леонид Васильевич Смирнов
중공업 · 군수공업 소련 러시아 1916–2001 ○ 자연사

22년간 소련 군산복합체를 조율한 VPK 의장, 군수공업의 숨은 설계자

R-12를 살피던 흐루쇼프가 설계자 얀겔에게 "뭘 만든 거요, 소시지인가?" 하고 소리치자, 스미르노프가 나서 조용히 말했다. "니키타 세르게예비치, 이게 바로 쿠바에서 미국을 겨눌 물건입니다."

드네프로페트로우스크 로켓공장(유즈마시) 사장 시절 R-12·R-16 대륙간탄도미사일 양산을 지휘하며 전략로켓군의 산업 기반을 구축한 공병 출신 군수 행정가. 1963년부터 22년간 군사산업위원회(VPK) 의장 겸 각료회의 부의장으로 미사일·핵·우주·전자 분야 군산복합체 전체를 조율했고 SALT-I 준비에도 참여했다. 드미트리 우스티노프와 함께 브레즈네프기 소련 군사력의 정점을 관리했으며, 군수 영역을 넘어 면역학 연구소 설립을 정부에 설득한 개방적 기술 관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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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1948노보체르카스크 광산장비 공장에서 부생산책임자→화력발전소장→수석 에너지 엔지니어로 승진
  • 1949–1951중앙자동화·유압연구소(TSNII-173) 소장, 무기성 산하
  • 1951–1952소련 무기성 로켓·우주기술 총괄국장
  • 1952–1957드네프로페트로우스크 기계제작공장(유즈마시) 사장, R-1·R-12·R-16 미사일 양산 지휘
  • 1957–1961국방기술 국가위원회(GKOT) 총괄국장
  • 1961–1963소련 각료회의 국방기술 국가위원회 의장 (장관급)
  • 1963–1985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군사산업위원회(VPK) 의장, 군수 전 분야 총괄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프로호로프

Александр Михайлович Прохоров
이론가 소비에트 러시아인 1916–2002 ○ 사망 · 자연사

노벨상 수상 레이저 공동 발명가이자 소련 대백과사전의 얼굴

프로호로프는 연구실 방향을 마이크로파에서 레이저로 전환하기로 결심했을 때, 직접 옛 장비를 부수었다. 연구원 절반이 분노하며 떠났지만, 남은 팀은 노벨상을 받았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태어난 소비에트 물리학자로, 니콜라이 바소프와 메이저-레이저 원리를 공동 창안해 1964년 바소프 및 찰스 타운스와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붉은 군대 보병으로 복무하며 두 차례 부상을 입었고, 전후 레베데프 물리학연구소에서 개방형 공진기와 기체역학 레이저를 개척했다. 일반물리학연구소장(1982–1998)으로서 광섬유·레이저 핵융합·우주 통신 연구를 총괄했으며, 30년 이상 《소비에트 대백과사전》 편집장을 지내며 소련의 대표적 지식 총서를 이끌었다. 두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다섯 차례 레닌 훈장을 받았고 조레스 알표로프를 비롯한 한 세대의 물리학자를 길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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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레닌그라드 국립대 물리학과 우등 졸업; 레베데프 물리학연구소 입소
  • 1941–1944붉은 군대 보병 복무, 두 차례 부상
  • 1954레베데프 물리학연구소 진동연구실장
  • 1959레닌상 수상; 모스크바 국립대 교수
  • 1964바소프·타운스와 노벨 물리학상 공동 수상
  • 1966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아카데믹)
  • 1969–2001《소비에트 대백과사전》 편집장
  • 1982–1998소련/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일반물리학연구소장

블라디미르 이바노비치 테레빌로프

Владимир Иванович Теребилов
이론가 소련, 이후 러시아 러시아인 1916–2004 ○ 자연사

사라졌던 법무부를 되살려 소비에트 법전 편찬을 지휘한 법률가

“정의를 뜻하는 라틴어 유스티티아(justitia) — 그것이 곧 공정함이다.” 그는 이 원칙을 평생의 지침으로 삼았다.

소련 법무부가 1956년 폐지된 후 14년 만에 부활했을 때, 그 재건을 맡은 인물이 바로 테레빌로프였다. 1970년부터 1984년까지 법무장관으로 재임하며 40만 건이 넘는 현행 법령을 검토해 50권짜리 《소련 현행법 집성》과 11권짜리 《소련 법전》 편찬 작업을 총괄했고, 1979년 《소련 변호사법》 제정을 주도해 변호사 제도의 법적 지위를 처음으로 정립했다. 이후 1984년 소련 대법원장에 취임해 사법의 독립성을 강화하고 무고한 탄압 희생자들의 재심에 힘썼으나, '목화 스캔들' 수사 과정에서 제기된 뇌물 의혹으로 1989년 사임했다. 말년에는 모스크바대학에서 형사절차의 도덕적 기초를 강의하며 법조인 양성에 헌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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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레닌그라드주 파르골로보 지구 검사
  • 1941노동자 분견대 정치위원 (레닌그라드 방어전 참전)
  • 1945레닌그라드 프리모르스키 지구 검사
  • 1949전연방 범죄수사연구소 선임연구원
  • 1957소련 검찰총장 수석보좌관·수사국 부국장
  • 1962소련 대법원 부원장
  • 1970소련 법무장관
  • 1984소련 대법원장
  • 1989모스크바국립대학교 법학부 도첸트

비탈리 라자레비치 긴즈부르크

Виталий Лазаревич Гинзбург
이론가 소련 러시아 1916–2009 ○ 심부전

수소폭탄의 '제2의 아이디어'에서 노벨상까지, 한 세기를 가로지른 이론물리학자

나는 수소폭탄 덕분에 살아남은 아주 드문—아마도 유일무이한—사람이다.

소련 이론물리학의 거장으로, 1948년부터 1952년까지 이고리 쿠르차토프가 이끄는 수소폭탄 개발 프로젝트에 이고리 탐의 이론팀 일원으로 참여해 중수소화리튬-6(LiD)을 열핵연료로 사용하는 '제2의 아이디어'를 제안했으며, 이는 1953년 소련 최초의 열핵무기 실험 성공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1950년 레프 란다우와 함께 초전도 현상을 설명하는 긴즈부르크-란다우 이론을 정립했고, 이 공로로 2003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1971년부터 1988년까지 레베데프 물리연구소(FIAN) 이론물리학부장을 지냈으며, 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1966)으로서 소련 물리학의 제도적 중심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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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모스크바 국립대학에서 물리학 후보박사 학위 취득
  • 1942모스크바 국립대학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 취득, FIAN 이론부 연구원
  • 1945–1961고리키 국립대학 방사물리학부 학과장
  • 1948–1952소련 수소폭탄 개발 참여 — 중수소화리튬-6 아이디어 제안
  • 1953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 1966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아카데미크)
  • 1968–2009모스크바 물리기술연구소(MFTI) 물리·천체물리 문제 학과장
  • 1971–1988레베데프 물리연구소(FIAN) 이론물리학부장
  • 1989–1991소련 과학아카데미 대표 인민대의원
  • 1998–2009«우스페히 피지체스키흐 나우크» 편집장

게저 로손치

Losonczy Géza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헝가리 헝가리인 1917–1957 ○ 옥사, 사후 복권

개혁 공산주의 언론인

1956년 11월 4일, 소련군이 공격하자 그는 가족과 함께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으로 피신했다.

로손치 게저는 헝가리 공산주의 운동에서 출발해 당국의 억압과 교조주의를 비판한 언론인이자 정치가였다. 그는 나지 임레의 개혁파와 함께 다당제와 민중운동의 문제를 둘러싼 격변에 개입했고, 1956년 혁명 정부에서 국가장관으로 활동했다. 소련의 개입 뒤 체포되어 재판을 기다리며 단식하다가 감옥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죽음은 나지 임레 집단에 대한 국가 탄압의 일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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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1936학생 잡지 「토바브」 편집
  • 1939–1941헝가리 공산당 가입 및 네프서바 기자
  • 1945–1949「서버드 네프」 국내정치부장
  • 1949–1951레바이 요제프 문화교육부 차관급 보좌관
  • 1951–1954정치 재판으로 수감
  • 1954–1956「머저르 넴제트」 기자, 페퇴피 서클 조직자
  • 1956-10–1956-11나지 임레 제2·제3 정부 국가장관
  • 1957나지 임레 재판 피고 예정, 수감 중 단식 사망

미클로시 기메시

Gimes Miklós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헝가리 헝가리 1917–1958 ✕ 교수형

너지 임레와 함께 교수형에 처해진 개혁파 언론인

《머저르 서버처그》 창간호에서 '오직 이 길로만 우리는 독립되고 자유로우며 민주적인 헝가리를 세울 수 있다'고 썼다.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난 유대계 헝가리 언론인으로, 불법 공산주의 운동에 뛰어들어 종전 후 당 기관지 《사바드 네프》의 기자가 되었고, 초기에는 라코시 체제에 충실한 논객이었다. 슬란스키 재판과 모스크바 의사 사건을 목격하며 신념이 흔들렸고, 1955년 라이크 라슬로의 복권을 요구했다가 당에서 제명되었다. 1956년 혁명 당시 너지 임레 측근 중 가장 급진적인 인물로 《머저르 서버처그》를 창간·편집했으며, 소련군 개입 후에도 카다르 정권을 거부하고 지하 신문과 민주독립운동을 이끌다 체포되어 너지, 말레테르와 함께 사형당했다. 1989년 복권되어 같은 날 엄숙히 재매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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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불법 공산주의 운동 가담, 노동봉사대 소집
  • 1944노동봉사대 탈주,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합류
  • 1945–1954《사바드 네프》 기자
  • 1954취리히·빈·파리 특파원
  • 1955라이크 복권 요구로 MDP 제명, 코르비나 출판사 번역가
  • 1956 summerMDP 재입당, 너지 임레 측근
  • Oct–Nov 1956《머저르 서버처그》 창간·편집
  • Nov–Dec 1956민주독립운동 결성, 지하신문 발행, 12월 5일 체포

요제프 실라지

Szilágyi József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헝가리 헝가리 1917–1958 ✕ 교수형 (.4.24)

법정 침묵으로 사건이 분리되어 너지보다 두 달 먼저 교수형에 처해진 혁명가

1958년 4월 법정 최후 진술: "10월이 다른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했다 해도, 헝가리 민중은 사회주의라는 옷을 입은 폭정도 용납하지 않으며 자유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데브레첸 출신의 공산주의 법률가로, 1949년 라이크 라슬로 재판의 근거를 의심했다가 모든 당직에서 해임된 후 너지 임레의 개혁파에 합류했다. 1956년 혁명기에는 너지의 개인 비서 겸 총리 비서실장으로 활동했으며, 11월 4일 소련군 진압 후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으로 피신했다가 루마니아로 끌려갔다. 1년 넘게 취조에 협력하지 않고 단식 투쟁을 벌여 너지 재판에서 분리 심리되었고, 1958년 4월 24일 너지보다 두 달 먼저 교수형에 처해졌다. 1989년 6월 16일 영웅광장에서 너지·말레테르 등과 함께 재매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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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39불법 공산당 입당, 데브레첸대학 법학박사
  • 1940–44체포되어 3년형 선고, 1944년 석방 후 지하 활동
  • 1945–46데브레첸 경찰서장, 국가경찰본부 조직
  • 1947–49당 중앙 군사·치안부서장, 중앙통제위원
  • 1949라이크 재판 의문 제기로 해임
  • 1953–56너지 개혁파 합류, 1956년 초 출당
  • 1956.10–11너지 개인 비서 겸 총리 비서실장
  • 1958분리 재판 후 사형, 4월 24일 교수형

팔 말레테르

Maléter Pál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헝가리 헝가리인 1917–1958 ✕ 처형, 1989년 복권

협상과 무장 저항 사이에 선 군인

“가야 합니다. 목숨을 잃더라도 나라가 제 도움을 요구합니다.”

말레테르 팔은 제2차 세계대전의 포로이자 반나치 투쟁을 거친 헝가리 장교로, 전후 공산당에 가입했다. 1956년 혁명에서 그는 킬리안 병영에 파견된 뒤 저항 세력과 휴전하고 병영 방어에 합류했으며, 군인과 시민 무장세력 사이의 조정에 관여했다. 너지 임레 정부의 국방장관이 된 그는 소련군과 철수 협상을 시도하다 체포되었고, 1958년 너지와 함께 처형되었다. 1989년 그는 복권되어 혁명의 순교자로 재매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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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군 입대
  • 1940루도비카 사관학교 생도
  • 1944–1945소련군 포로, 반독일 유격대원
  • 1945임시정부 경비대대 지휘관, 헝가리 공산당 입당
  • 1956.10대령, 킬리안 병영 방어 지휘
  • 1956.11너지 임레 정부 국방장관, 소장
  • 1956.11.3퇴역 협상 대표, 퇴켈에서 체포
  • 1958처형
  • 1989복권, 추서 및 재매장
  • 1956.10.23라디오 방송국 건물에 파견된 기갑부대 지휘
  • 1956.10.25킬리안 병영 구원을 위해 전차부대 지휘
  • 1956.10.29–31무장세력과 휴전·협상, 국민위병 조직 논의 참여

세묜 쿠지미치 츠비군

Семён Кузьмич Цвигун
국가보안 기관 소련 우크라이나 1917–1982 ✕ 권총 자살

브레즈네프안드로포프 옆에 심은 감시자

1982년 1월 19일, 수슬로프와의 격렬한 대면 후 다차 서재에서 권총 한 발. 당일 소집된 의사들은 심장마비로 사망진단서를 썼다.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 출신으로 역사 교사에서 NKVD에 입문해 몰다비아에서 브레즈네프의 신임을 얻었고, 1967년 KGB 제1부의장 겸 제5국장으로서 반체제 인사 탄압을 총괄했다. 1982년 1월 의문의 권총 사망은 수슬로프의 급서와 안드로포프의 당직 이동, 브레즈네프의 사망으로 이어지며 크렘린 권력 구도의 분수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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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39역사 교사 · 중학교 교장
  • 1939NKVD 입대
  • 1941–45남서부·남부 전선 및 SMERSH 복무 (전선 기록 논란)
  • 1951–53몰다비아 MGB 부장관: 브레즈네프와 인연
  • 1957–63타지크 KGB 의장
  • 1963–67아제르바이잔 KGB 의장
  • 1967–82KGB 제1부의장 · 제5국장: 반체제 탄압 총괄

알렉산드르 바실리예비치 시도렌코

Александр Васильевич Сидоренко
중공업 · 군수공업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1917–1982 ✕ 교통사고

사막과 선캄브리아기를 횡단한 소련 지질학의 제도적 설계자

알제리 출장길에 탄 승용차가 낙타와 충돌했다. 사막을 연구하고 지하 수 킬로미터를 시추했던 지질학자의 삶을 마감한 것은, 뜻밖에도 길 위의 동물 한 마리였다.

알렉산드르 시도렌코는 13년간 소련 지질장관(1962–1975)을 지내며 서시베리아·야쿠티아·중앙아시아의 광물자원 탐사를 지휘했고, 이후 과학아카데미 부총재로서 지구과학 전반을 총괄한 지질학자이다. 중앙아시아 사막의 풍화 과정을 규명하는 데서 출발해, 변성퇴적암의 원래 퇴적환경을 복원하는 '선캄브리아기 퇴적-변성암석학'이라는 새 분야를 개척했으며, 코브도르 운모광상 발견으로 1966년 레닌상을 수상했다. 그의 주도로 시작된 콜라 반도 초심층 시추는 지구 지각 연구의 획기적 프로젝트가 되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중상을 입은 참전용사이기도 한 그는, 알제리 출장 중 차량이 낙타와 충돌하는 사고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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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1941보로네시 대학 광물학과 조교·대학원생
  • 1941–1943붉은군대 소대장·포대장, 스탈린그라드 전투 참전·중상
  • 1943–1950소련 과학아카데미 투르크멘 분소 지질연구소: 선임연구원 → 부장
  • 1950–1961콜라 분소 부의장 → 상임간부회 의장, 지질연구소장 겸임
  • 1961–1962러시아공화국 각료회의 과학연구조정 국가위원회 제1부의장
  • 1962–1975소련 지질·지하자원보호장관 → 국가지질위원회 의장 → 지질장관
  • 1975–1982소련 과학아카데미 부총재 겸 지구과학부문 의장
  • 1979–1982소련 과학아카데미 암석권연구소 창설 소장

샤라프 라시도비치 라시도프

Шараф Рашидович Рашидов
사회주의권 지도자 소련 우즈베키스탄 1917–1983 ○ 심장마비

24년간 우즈베키스탄을 이끌며 산업화와 문화 부흥을 진두지휘한 작가 출신 지도자

1962년 5월, 라시도프는 흐루쇼프의 비밀 지시로 소련 대표단을 이끌고 아바나로 날아갔다. 공식 임무는 농업·관개 협력이었지만, 실제로는 피델 카스트로에게 쿠바 핵미사일 배치 계획을 전달하는 것이었다. 이 비밀 접촉은 카리브 위기의 서막이 되었고, 라시도프와 카스트로의 평생 우정을 열었다.

가난한 농가 출신 교사·신문 편집자·작가로 활동하다 1959년 우즈베키스탄 공산당 제1서기에 올라 24년간 공화국을 이끌었다. 타슈켄트 지진 복구, 지하철 건설, 무룬타우 금광 개발, 항공·트랙터 공업 육성으로 경제 구조를 전환했다. 사마르칸트 2500주년 기념과 문화유산 보존 정책으로 우즈벡 민족 정체성을 고양시켰다. 사후 안드로포프의 면화 스캔들 수사로 부패 정치의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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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1937중학교 교사
  • 1937–1941사마르칸트 지역지 《레닌 욜리》 기자·편집자
  • 1941–1943소련군 소위, 모스크바 전투·볼호프 전선 참전, 중상
  • 1944–1947사마르칸트 주당위원회 서기
  • 1947–1949공화국 일간지 《키질 우즈베키스톤》 편집장
  • 1949–1950우즈베키스탄 작가동맹 이사장
  • 1950–1959우즈베크 SSR 최고소비에트 간부회의 의장
  • 1959–1983우즈베키스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61–1983CPSU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 후보

티혼 야코블레비치 키셀료프

Тихон Яковлевич Киселёв
사회주의권 지도자 소련 벨라루스 1917–1983 ○ 암

벨라루스 20년 총리에서 당 제1서기로 올랐다가 2년 만에 암으로 세상을 떠난 실무자

그는 민스크 메트로 아이디어에 매달려 모스크바를 끈질기게 설득했고, 결국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훗날 그가 직접 첫 돌을 놓았다.

고멜의 옛신자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벨라루스어·문학 교사로 출발한 키셀료프는, 1959년부터 거의 20년간 벨라루스 공화국 각료회의 의장으로서 전후 복구와 공업화를 주도한 실무형 경제 관료였다. 민스크 메트로와 즐로빈 제철소를 모스크바 관료들을 상대로 끈질기게 설득해 관철시켰으며, 1978년 소련 각료회의 부의장으로 승진한 뒤 1980년 마셰로프의 후임 벨라루스 공산당 제1서기 겸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당 지도부에 복귀했다. 개혁보다 안정적 관리를 중시했으나, 취임 2년여 만에 암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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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6–1941옐스크 지역 중학교 벨라루스어·문학 교사
  • 1941–1944스탈린그라드주 크라스냔스크 학교 교장 (대피)
  • 1944–1952고멜 주당위 지도원 → 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 선전선동부장
  • 1952–1955브레스트 주당위 제1서기
  • 1955–1959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 서기 → 제2서기
  • 1959–1978벨라루스 공화국 각료회의 의장
  • 1978–1980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 1980–1983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CPSU 정치국 후보위원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자바바힌

Евгений Иванович Забабахин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917–1984 ○ 자연사

소련 제2핵무기설계국의 과학지도자

"문제를 피하는 최상의 방법은 상관에게 허락을 구하는 것이다. 열이면 아홉은 안 된다고 한다. 그러니 진짜 해결하고 싶으면 스스로 결정하고 보고하라. 뒤집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소련 핵무기 물리학의 핵심 설계자로서, 1960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제2핵무기설계국(VNIITF, 첼랴빈스크-70)의 과학지도자를 지냈다. 1947년 충격파 수렴에 관한 논문으로 젤도비치의 눈에 띄어 원자폭탄 계획에 합류했고, 첫 소련 핵실험(RDS-1)에 기여했으며, 최초의 완전 독자 설계 핵전하(RDS-2)의 이론적 토대를 세웠다. 1955년 신설된 우랄 제2센터의 이론부문 책임자로 옮겨 1957년 소련군 최초의 실전배치 열핵전하 개발을 이끌었다. 과학지도자로서 25년간 이끈 VNIITF는 소련 핵탄두 대부분을 설계했고, 평화적 핵폭발 기술을 개척해 가스 유정 화재 진압과 지각 탐사에 응용했으며, 말년에는 무제한 누적 현상에 관한 논문으로 켈디시 금메달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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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8–1955KB-11(아르자마스-16) 이론물리학자
  • 1955–1960NII-1011 부과학지도자·이론부문장
  • 1960–1984VNIITF(첼랴빈스크-70) 과학지도자
  • 1968–1984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세묜 콘스탄티노비치 쿠르콧킨

Семён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Куркоткин
군사 · 국방 소련 러시아 1917–1990 ○ 자연사

소련군 후방을 16년간 지휘한 마지막 원수들 중 하나

1944년, 14근위전차여단장이 전사하자 부하였던 쿠르콧킨이 지휘를 인수했다. 군단장 폴루보야로프는 이렇게 적었다: "쿠르콧킨이 여단을 맡아 복잡한 전투임무를 훌륭히 수행했으며, 적에게 큰 타격을 입혔고 자군은 단 한 대의 전차도 잃지 않았다."

농민 출신으로 정치장교에서 출발해 독소전에서 전차여단장으로 두각을 나타낸 탱크 지휘관이었다. 1972년부터 1988년까지 16년간 국방차관 겸 소련군 후방(Тыл) 책임자로 재임하며, 1970년대 말 후방 구조를 기동성 있고 효율적인 현대 물류체계로 전환하는 대대적 개혁을 주도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소련 파견군의 모든 물자 보급을 직접 지휘했고, 체르노빌 원전 사고와 스피타크 지진 등 재난 대응에서도 후방 조직을 총괄했다. 1983년 소비에트 연방 원수로 진급, 1981년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받았으며 브레즈네프기부터 페레스트로이카까지 당 중앙위원으로 군 물류의 제도적 중추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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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41오룔 전차학교 졸업, 정치장교로 복무
  • 1941–1945독소전 참전: 정치지도원에서 전차대대장, 14·13근위전차여단장으로 승진, 프라하까지 진격
  • 1951–1958기갑·기계화군사아카데미와 참모아카데미 졸업, 전차사단장
  • 1959–1968군단장, 근위전차군·야전군 사령관, 주독소련군 제1부사령관
  • 1968–1971자캅카스 군관구 사령관
  • 1971–1972주독소련군 총사령관
  • 1972–1988국방차관 겸 소련군 후방 책임자: 후방 개혁, 아프간·체르노빌·스피타크 대응
  • 1988–1990국방부 총감찰단에서 복무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오가르코프

Николай Васильевич Огарков
군사 · 국방 소련 러시아 1917–1994 ○ 자연사

군사혁명을 예견한 참모총장, 아프간 파병에 맞서다

참모총장 오가르코프는 아프가니스탄 파병 논의에서 우스티노프 국방장관과 정면으로 맞섰다. "폭탄과 포탄으로 아프가니스탄에 질서를 세울 수 없습니다. 이 문제는 오직 정치적 방법으로만 해결해야 합니다."

1977~84년 소련군 참모총장을 지낸 원수. 농민 출신으로 독소전에 공병장교로 참전했고, SALT 협상에서 군사전문가로 활약했다. 정밀유도무기·자동화지휘체계를 중심으로 '군사문제의 혁명' 이론을 정립해 소련 군사교리에 큰 영향을 남겼으며, 아프가니스탄 파병에 현실주의적 반대 입장을 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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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1941군입대, 군사공학아카데미 졸업 후 요새화 공사에 배치
  • 1941–1945독소전 참전: 카렐리야·우크라이나 전선에서 공병장교로 복무, 부다페스트 공세에서 부상
  • 1947–1968극동·벨로루시 군관구 참모, 사단장, 군관구 사령관으로 승진
  • 1968–1974참모총장 제1차장, 전략무기제한협상(SALT)에 군사전문가로 참여
  • 1974–1977국방차관 겸 국가기술위원회 의장, 군사기술 현대화 추진
  • 1977–1984참모총장·국방제1차관, '군사혁명' 이론 정립, 대규모 작전훈련 '서방-81' 주관
  • 1984–1992서방방면군 총사령관으로 좌천된 뒤 국방부 총감찰단에서 복무
  • 1992–1994러시아 국방부 및 CIS 합동군 참모총장 고문

바딤 알렉산드로비치 마트로소프

Вадим Александрович Матросов
국가보안 기관 소련 러시아 1917–1999 ○ 자연사

17년간 KGB 국경군을 지휘한 군사적 축

소련 국경군 사상 최초로 대장 계급에 오른 수장이었던 마트로소프는, 아프가니스탄 전쟁 중 직접 국경 부대를 방문해 작전을 조율했다. 훗날 국경군 원로들은 그를 '국경군 역사상 가장 뛰어난 지휘관'으로 꼽았다.

스몰렌스크 지방 시골 교사 가정 출신으로, 1938년 NKVD 국경군에 입대해 이란 접경에서 복무하다 독소전쟁 발발 후 카렐리야 전선에서 핀란드군 후방으로 10차례의 장거리 정찰을 감행했다. 1972년부터 1989년까지 KGB 국경군 총사령관을 지내며 소련 국경수비대 역사상 최장기 지휘관으로 군 복무했고, 국경군 수장 최초로 대장 계급에 올랐다. 안드로포프·페도르추크·체브리코프 3대 KGB 의장 아래에서 아프가니스탄 북부 국경 작전을 직접 지휘했으며, 소련 전 국경의 군사화를 총괄한 국가보안 기관의 핵심 군사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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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1941NKVD 국경군 입대, 아제르바이잔 렌코란 분견대에서 이란 국경 경비
  • 1941–1944모스크바 방어전 참전 후 카렐리야 전선에서 정찰 장교로 10차례 핀란드군 후방 정찰
  • 1948–1963국경군 본부에서 참모 경력, 북부·자캅카스 국경관구 근무
  • 1967–1972국경군 참모장 겸 제1부사령관
  • 1972–1989KGB 국경군 총사령관 (1984년부터 KGB 부의장 겸직), 아프가니스탄 국경 작전 지휘
  • 1981–1989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89–1992국방부 감찰총감단에서 퇴역까지 근무

드미트리 스테파노비치 폴랸스키

Дмитрий Степанович Полянский
농업 소련 우크라이나 1917–2001 ↓ 전보 1976

농업과 정부 부문을 오간 브레즈네프 시대 관료

1973년 2월, 브레즈네프는 상임간부회에서 폴랸스키의 농업장관 전보를 통보했다. 몸을 떨며 일어선 폴랸스키가 "아무도 나와 상의하지 않았다"고 하자, 브레즈네프는 "자, 지금 상의하고 있잖나"라고 응수했다.

정치국원·제1부수상을 지내며 1964년 흐루쇼프 축출을 위한 '폴랸스키 보고서'를 작성한 소련 고위 관료. 이후 농업장관을 거쳐 일본·노르웨이 대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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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3–1976농업장관

바실리 파블로비치 미신

Василий Павлович Мишин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러시아 러시아 1917–2001 ○ 자연사

코롤료프를 이어 소유즈·살류트·N-1을 책임진 실천적 우주설계자

1966년 1월 14일, 코롤료프가 수술대에서 사망했다. 크렘린은 미신에게 전화를 걸었고, 해질녘에는 그가 소련 우주계획 전체를 짊어지고 있었다.

모스크바 근교 이탄촌에서 태어나 ЦАГИ 견습공으로 출발했다. 1945년 독일에서 V-2를 조사하며 코롤료프를 만난 후 오랜 제1부수석설계자로 일했고, 1966년 코롤료프 사후 OKB-1(ЦКБЭМ) 수석설계자가 되었다. 그의 지휘 아래 소유즈 우주선, 살류트 우주정거장, 달로켓 N-1이 개발되었다. N-1은 네 차례 발사 모두 실패했고, 1974년 동료들의 서한으로 해임되면서 소련 달탐사 계획도 함께 종결되었다. 이후 모스크바항공대학에서 30년간 교수로 후학을 길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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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35ЦАГИ 공장 견습공, 야간반 거쳐 МАИ 입학
  • 1941–45볼호비티노프 항공설계국: 첫 로켓전투기 БИ-1 무장 설계
  • 1945–46독일 파견, V-2 조사단에서 코롤료프와 평생의 동료가 됨
  • 1946–66OKB-1 제1부수석설계자: Р-1부터 Р-7, 스푸트니크, 보스토크까지
  • 1956Р-5 개발 공로로 사회주의노동영웅 수훈
  • 1966–74OKB-1/ЦКБЭМ 수석설계자: 소유즈, 살류트, N-1 달로켓
  • 1974N-1 실패와 내부 서한으로 해임, 달탐사 계획 폐기
  • 1974–2001МАИ 교수·학과장, 교과서 《장거리유도탄탄도학》 등 저술

바실리 세르게예비치 톨스티코프

Василий Сергеевич Толстиков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1917–2003 ○ 자연사

해빙기 레닌그라드를 이끈 당 지도자이자 주중 대사

1970년, 아무런 외교 경력도 없던 레닌그라드 당 수장이 갑자기 주중 대사로 발령받았다. 브레즈네프는 그의 독립적 성향과 전쟁 영웅으로서의 권위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레닌그라드 철도기술원을 졸업한 토목기사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뒤 전후 레닌그라드 복구사업에 투신했다. 1962년 흐루쇼프에 의해 레닌그라드 주당위원회 제1서기로 발탁되어 1965년 경제개혁의 도시 적용을 주도하고 대규모 건설 사업을 추진했다. 1970년 느닷없이 주중 소련 대사로 전출되었는데, 이는 그의 독자적 권위를 견제하려는 브레즈네프의 의중이 작용한 결과로 평가된다. 외교 경험이 전무했음에도 베이징에서 중소관계 정상화를 위한 실무적 대화 통로를 유지했으며, 이후 주네덜란드 대사를 끝으로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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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4–1940건설 기술직 후 레닌그라드 철도기술원 졸업, 군 건설현장 주임기사
  • 1941–1946붉은군대 복무, 카렐리야 전선 참전, 주독 점령군 수송부서장
  • 1948–1960레닌그라드에서 건설·소비에트·당 직책 역임, 레닌그라드 주당위 제2서기까지 승진
  • 1962–1970레닌그라드 주당위원회 제1서기 · CPSU 중앙위 러시아공화국 뷰로 위원(1962–1966)
  • 1962–1971소련 최고회의 간부회의 위원
  • 1970–1978주중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79–1982주네덜란드 소련 특명전권대사

케림 알리예비치 케리모프

Керим Алиевич Керимо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아제르바이잔 1917–2003 ○ 자연사

오랫동안 이름이 숨겨진 유인우주비행 관리자

1961년 4월 12일, 가가린은 인류 최초 우주비행을 앞두고 편안히 잠들었다. 침대 센서로 이를 확인하던 케리모프는, 로켓에 오를 남자보다 더 긴장된 밤을 보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카추샤 로켓을 검수하고 독일에서 V-2 로켓 정보를 수집하며 경력을 시작했다. 스푸트니크 1호와 보스토크 계획의 국가위원회 위원을 거쳐, 1966년부터 1991년까지 25년간 국가위원회 의장으로서 소련의 모든 유인우주선 발사를 승인했다. 살류트, 소유스-아폴로, 미르까지 소련 유인우주비행 전성기의 관문을 지킨 행정가였으나 페레스트로이카 이전까지 그의 존재는 철저히 비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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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6–1991국가위원회 의장 · 유인우주비행

니콜라이 프로코피예비치 페도렌코

Николай Прокофьевич Федоренко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917–2006 ○ 자연사

수학으로 계획경제를 재설계한 CEMI의 창립자이자 SOFE의 설계자

1960년대 말, CEMI는 소련 경제의 성장 둔화를 예측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고스플란 의장은 폴리트뷰로 송부를 거부했고, '이데올로기적 이단' 혐의를 피하기 위해 연구소는 네스쿠치니 정원에서 보고서를 모닥불에 태웠다.

소련 계획경제에 수학적 최적화 방법론을 제도화한 경제학자. 1963년 넴치노프의 추천으로 중앙경제수학연구소(CEMI)의 초대 소장에 취임하여 22년간 이끌며, 칸토로비치의 선형계획법을 전국 계획 체계로 확장한 '경제의 최적 기능 체계(SOFE)'의 이론적 토대를 수립했다. 과학아카데미 경제학부 아카데믹-서기(1971–1986)로서 수리경제학을 소련 경제과학의 공식 의제로 격상시켰고, 고스플란의 자동화된 계획계산체계(ASPR)의 과학적 지도를 맡아 프로그램-목표·부문별·지역 계획을 통합하는 방법론을 추진했다. 2차대전에 화학부대 장교로 참전해 베를린에서 종전을 맞았고, 1970년 화학공업 경제학 연구로 국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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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1956모스크바 정밀화학기술대학(MITKhT) 화학공업 경제학 강사·부교수·교수·학과장
  • 1953–1958모스크바 정밀화학기술대학(MITKhT) 부총장
  • 1962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 1963–1985중앙경제수학연구소(CEMI) 창립·초대 소장
  • 1964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아카데믹)
  • 1965–1988학술지 《경제학과 수리방법》 초대 편집장
  • 1967–1983소련 과학아카데미 상임위원
  • 1971–1986소련 과학아카데미 경제학부 아카데믹-서기
  • 1987–2006소련·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상임위원회 고문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우즈베키스탄 1917–2008 ↓ 중앙직 사임 1961

중앙아시아 출신 첫 프레지디움 위원, 민족 정책 실무자

1956년 10월 타슈켄트 제1차 우즈베크 지식인대회에서 소련 최초로 스탈린 시기 대량 탄압의 실상과 피해자 이름을 공개석상에서 밝혔다. 흐루쇼프의 '비밀연설'이 아직 공개되지 않았던 시점이었다.

우즈베크 농민 가정 출신으로, 통신으로 협동조합대학을 졸업하고 붉은군대에서 정치·무선정찰 장교로 복무하며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참전했다. 전후 우즈베키스탄 당에서 급속히 승진해 1955년 우즈베크 당 제1서기가 되었고, 1957년 중앙아시아 출신 최초로 CPSU 프레지디움 정위원 겸 중앙위 서기에 올랐다. 흐루쇼프 해빙기 동안 우즈베크 내 대규모 정치 재활, 강제이주 민족 귀환, 타슈켄트 핵물리연구소 설립을 주도하며 민족정책을 현장에서 실행했다. 1961년 흐루쇼프와의 정책적 이견으로 중앙직을 떠난 뒤 시리아 대사 등을 지내고 90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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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46붉은군대 복무, 정치·무선정찰 업무
  • 1948–1950나망간 주당위 제1서기
  • 1951–1953우즈베크 SSR 각료회의 의장
  • 1954–1955우즈베크 SSR 각료회의 의장 (복직)
  • 1955–1957우즈베키스탄 당 중앙위 제1서기
  • 1957–1961CPSU 중앙위 서기 겸 프레지디움 위원
  • 1968–1977주시리아 소련 대사
  • 1986–2008우즈베키스탄 역사문화기념물보호협회 의장

표트르 닐로비치 데미체프

Пётр Нилович Демичев
이념 · 선전 소련 러시아 1917–2010 ○ 자연사

문화정책을 관리한 브레즈네프 시대 관료

1961년 10월, 모스크바 시당 국 회의에서 데미체프는 단호히 말했다. '스탈린의 시신을 마우솔레움에 두는 것은 신성모독입니다.' 며칠 뒤 10월 31일 밤, 시신은 비밀리에 옮겨져 크렘린 벽 아래 묻혔다.

흐루쇼프의 보좌관에서 출발해 24년간 정치국 후보위원을 지낸 핵심 이념 관료였다. 1961년 스탈린 시신의 마우솔레움 철거를 직접 발의한 탈스탈린화의 주역이었으나, 브레즈네프기 문화장관으로서는 보수적 통제를 행사했다. 셸레핀 계열로 분류되면서도 글라주노프·솔로우힌 같은 향토주의 문인들을 후원하는 복합적 면모를 지녔으며, 소련 말기까지 문화·이념 영역의 핵심 관리자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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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s모스크바 당 조직과 중앙위 선전 라인에서 성장
  • 1961–1974중앙위 서기, 이념·문화 담당으로 해빙 이후 문화통제 관리
  • 1974–1986문화장관, 정체기 공식 예술·공연·출판 행정 총괄
  • 1986 이후고르바초프기 문화정책 변화 속에서 중앙 무대에서 물러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