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당 선언』 제3장은 그를 푸리에·오언과 함께 계급 투쟁이 덜 발전한 시기에 나온 비판적·공상적 사회주의 체계의 창시자로 꼽는다.
파리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해 요크타운 포위전에 참여했다. 혁명기에 국유재산 투기로 돈을 모았고 공포정치 시기에 투옥되었다. 『산업』, 『조직자』, 『산업가의 교리문답』 등에서 과학자·기업가·노동자를 아우르는 생산적 ‘산업가’가 무위도식하는 계급 대신 사회를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만년의 『새 그리스도교』에서는 가장 가난한 계급의 처지 개선을 내세웠다. 『공산당 선언』이 그를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자적 정치 운동을 보지 못한 비판적·공상적 사회주의자로 분류한 것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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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9–1783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해 요크타운 포위전에 참여했다.
1793–1794공포정치 시기 생트펠라지와 뤽상부르에 갇혔다가 테르미도르 9일 뒤 풀려났다.
『사회에 관한 새로운 견해』(1816)에서 “적절한 수단을 적용하면 어떤 공동체에도 어떤 일반적 성격이든 부여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이 원리를 뉴래너크와 뉴하모니에서 시험했다.
웨일스에서 태어난 영국의 제조업자이자 사회 개혁가다. 뉴래너크에서 노동과 생활·교육 환경을 개선하려 했으며, 『사회에 관한 새로운 견해』에서 인간의 성격이 환경과 교육에 의해 형성된다고 주장했다. 이후 협동과 공동체 실험에 참여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오언을 공상적 사회주의로 분류한 것은 후대의 논쟁적 평가다. 초기 오언의 개혁 구상과 노동자 자신의 해방을 강조한 국제노동자협회의 입장을 구별해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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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2맨체스터 피카딜리 방적공장 관리자가 되었다.
18001799년 동업자들과 뉴래너크 방적공장을 사들여 1800년 1월부터 경영했다.
1824–1827미국 인디애나주 뉴하모니 공동체 실험을 이끌었으나 이 실험은 1827년 해산되었다.
상업 문명을 비판하고, 사람들이 저마다의 정념에 맞게 일하는 협동 공동체 ‘팔랑스테르’를 구상했다. 『공산당 선언』은 그를 비판적·공상적 사회주의자로 꼽는다.
브장송의 상인 집안에서 태어나 1791년부터 1816년까지 여러 도시에서 외판원·서신 담당 사무원으로 일했다. 1808년 『네 운동의 이론』을 익명으로 낸 뒤, 상업이 사기와 비참을 낳는다고 비판하고, 협동 공동체 ‘팔랑스테르’에서 각자의 정념에 맞게 일하는 ‘매력 있는 노동’을 구상했다. 빅토르 콩시데랑 등 제자들이 그의 사상을 퍼뜨렸고 여러 나라에서 공동체 실험이 있었다. 『공산당 선언』 제3장은 그를 생시몽·오언과 함께 비판적·공상적 사회주의의 창시자로 꼽고, 제자들이 팔랑스테르 같은 실험에 매달려 노동자의 정치 운동에 반대한다고 비판했는데, 이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평가다.
1848년 2월 3일, 카베의 추종자 69명이 르아브르 항구에서 배에 올랐다. '이카리아로 가자!' 그들은 신대륙에 지상의 공산낙원을 세우러 떠났다.
프랑스의 유토피아 사회주의자이자 이카리아 운동의 창시자. 1840년 『이카리아 여행』을 출판하여 노동자 협동조합에 기반한 공산사회의 청사진을 제시했고, '공산주의(communisme)'라는 말을 처음 정치적 용어로 정립했다. 약 40만 추종자를 거느린 당대 가장 대중적인 사회주의 옹호자로, 『진정한 기독교』에서 예수의 가르침을 사회 평등의 복음으로 재해석했다. 1848년 미국으로 건너가 텍사스와 일리노이에 이카리아 공동체를 세웠고, 1898년까지 이어진 미국 최장수 비종교 공동체 실험이 되었다. 계몽주의 유토피아 사상과 노동자 운동을 잇는 교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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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디종 출생. 변호사 자격 취득
1830–18317월혁명 참여 후 바스티아 검찰총장. 코트도르 하원의원 당선
1833–1834『르 포퓰레르』 창간. 반정부 논설로 반역죄 유죄 판결, 영국 망명
1834–1839영국에서 로버트 오웬과 교류하며 공산주의 사상 구상
1840『이카리아 여행』 출판. 스스로 '공산주의자'라고 부른 최초의 인물
1841–1847『르 포퓰레르』 복간. 약 40만 명 독자층 확보, 『진정한 기독교』 출간
1848추종자들과 미국으로 이주. 텍사스·일리노이에 이카리아 공동체 설립
1849–1856노부 이카리아 공동체 지도자. 내부 갈등 속 1856년 세인트루이스에서 사망
1871년 5월 파리 코뮌을 진압한 티에르는 1873년 독일군의 프랑스 영토 철수를 앞당긴 뒤 왕당파 의회의 반대 속에 사임했다.
마르세유 출신 변호사·언론인으로 『프랑스 혁명사』를 써 이름을 알렸고, 1830년 7월 혁명에서 루이 필리프를 옹립한 뒤 7월 왕정의 내무장관과 총리를 지냈다. 1834년 리옹 견직공 봉기와 파리 봉기를 진압했다. 제2제정기에는 자유주의 야당의 지도자였다. 1871년 2월 국민의회가 그를 행정 수반으로 세웠고, 3월 18일 몽마르트르의 대포 회수가 실패하자 정부를 베르사유로 옮겨 5월 피의 주간에 코뮌을 진압했다. 1871년 8월 대통령이 되었고 독일 배상금을 조기에 갚았으나 1873년 왕당파 의회에 밀려 사임했다.
스당에서 포로가 되었다가 베르사유군을 이끌고 파리 코뮌을 진압했으며, 「도덕 질서」의 대통령이 된 원수
1871년 5월 베르사유군 사령관으로 파리 코뮌을 진압했다. 1873년 대통령이 된 뒤 「도덕 질서」 정부를 이끌었고, 1877년 공화파가 의회 다수당이 되자 1879년 사임했다.
아일랜드계 귀족 가문 출신 군인으로 알제리 정복과 크림 전쟁의 말라코프 공격, 1859년 마젠타 전투로 원수와 공작이 되었다. 1870년 샬롱군을 이끌고 메스를 구하러 가다 스당에서 부상당해 황제와 함께 포로가 되었다. 독일에서 풀려난 뒤 티에르의 베르사유군 사령관이 되어 1871년 5월 파리에 진입했고, 피의 주간의 진압과 대량 처형이 그의 지휘 아래 벌어졌다. 1873년 티에르를 이어 대통령이 되어 왕정복고를 기다리는 「도덕 질서」 정부를 이끌었고, 1877년 의회와의 충돌에서 패한 뒤 1879년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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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7프랑스군에 입대했다.
1855크림 전쟁 중 세바스토폴 공방전의 말라코프 전투에서 승리했다.
1859마젠타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승리에 기여해 원수와 마젠타 공작 작위를 받았다.
1864알제리 총독으로 임명됐다.
1870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프랑스군을 지휘하다 스당 전투에서 부상당해 나폴레옹 3세와 함께 포로가 됐다.
1871티에르 대통령 아래 베르사유군 사령관이 되어 5월 파리 코뮌 진압을 지휘했다.
1873프랑스 제3공화국 대통령에 선출돼 「도덕 질서」 정책을 추진했다.
1877–1879의회와의 대립 뒤 공화파가 선거에서 승리하자 1879년 대통령직에서 사임했다.
1830·1848년 혁명을 거쳐 코뮌의 전쟁 대표가 되고 바리케이드에서 죽음을 택한 자코뱅 언론인
1871년 파리 코뮌의 전쟁 대표 들레클뤼즈는 피의 주간 마지막 날인 5월 25일, 무장하지 않은 채 샤토도 광장의 바리케이드로 걸어가 전투 중 총에 맞아 숨졌다.
드뢰 출신으로 1830년 7월 혁명에 가담했고, 1848년 2월 혁명 뒤 공화파 신문을 내며 활동하다 망명했다. 제2제정기에 체포되어 기아나 유형지 카옌에서 복역했고, 1868년 신문 『르 레베유』를 창간했다. 1871년 2월 국민의회 의원으로 뽑혔으나 코뮌에 참여하려고 사퇴했다. 자코뱅계 「독립 혁명가」로 공안위원이 되었고 5월 11일 민간인으로서 전쟁 대표를 맡았다. 5월 25일 패배가 분명해지자 샤토도 광장의 바리케이드 위로 걸어 올라가 총에 맞아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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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07월 혁명에 참여했다.
18482월 혁명 뒤 공화파 언론인으로 활동했고, 이후 망명했다.
1868신문 『르 레베유』를 창간했다.
1871국민의회 의원으로 선출된 뒤 사퇴하고 파리 코뮌에 합류해 공안위원과 전쟁 대표를 맡았다.
1871년 6월 파리 코뮌이 진압된 뒤, 파리 은신 중에 「인터내셔널가」의 가사를 썼다. 미국 망명 중 추방된 코뮌원들과의 연대를 조직했다.
파리의 포장공 가정에서 태어나 직물 도안공으로 일하며 1830년대부터 노래와 시를 썼고, 1848년 6월 봉기에 가담했다. 도안공 조합을 세우고 국제노동자협회에 가입했다. 1871년 4월 2구 보궐선거로 코뮌 의원이 되었고, 피의 주간 뒤인 6월 숨어 지내며 「인터내셔널가」를 썼다. 궐석 사형 선고를 받고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1880년 사면으로 돌아왔다. 1887년 가난 속에 숨졌고, 이듬해 피에르 드제이테르가 곡을 붙인 「인터내셔널가」는 세계 노동운동의 노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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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0첫 노래 「자유 만세」를 지었다.
18481848년 혁명에 참여했다.
1864직물 도안공 조합의 창설을 주도했고, 조합은 이후 제1인터내셔널에 가입했다.
1871파리 코뮌 의원으로 선출되어 공공서비스위원회에서 일했고, 피의 주간 전투에도 참여했다.
트리어의 법률가 집안에서 태어나 『라인신문』 편집장으로 출발했다. 1845년 프로이센 국적을 버린 뒤 죽을 때까지 무국적자였고, 1849년부터는 런던 망명자였다. 엥겔스와 40년을 함께 일하며 『공산당 선언』과 『자본론』을 썼고 제1인터내셔널을 이끌었다. 만년의 『고타강령 비판』(1875)은 독일 노동자 정당의 통합강령에 들어앉은 라살레주의를 조목조목 해부한 문서로, 국가를 사회주의의 도구로 보는 발상에 대한 그의 마지막 답변이다.
1871년 파리 코뮌에서 예술가 연맹 의장과 의원을 맡아 박물관 개방을 추진했다. 코뮌 패배 뒤 방돔 원주 파괴 책임으로 6개월 수감됐고, 재건 비용 판결 후 스위스로 망명했다.
쥐라 지방 오르낭의 부농 가정에서 태어나 「오르낭의 매장」과 「돌 깨는 사람들」로 사실주의를 열었고, 프루동과 가까웠다. 1870년 레지옹 도뇌르를 거절했다. 1871년 코뮌의 예술가 연맹 의장으로 미술관의 자치와 검열 폐지를 요구했고, 6구 보궐선거에서 코뮌 의원이 되어 공안위원회에 반대한 소수파에 섰다. 방돔 원주를 옮기자고 제안한 일 때문에 피의 주간 뒤 6개월 금고를 선고받았고, 1873년 원주 재건 비용을 물라는 판결이 나자 스위스로 망명해 라투르드페이에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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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9–1851「돌 깨는 사람들」과 「오르낭의 매장」 등 일상 장면을 대형 화폭의 사실주의 양식으로 그려 파리 살롱의 관습에 도전했다.
1870정부의 권위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공개적으로 거절했다.
1871파리 코뮌에서 예술가 연맹 의장을 맡고 박물관 개방과 전시회 조직을 추진했으며, 의원으로 활동했다.
1873방돔 원주 재건 비용 32만 3천 프랑을 부담하라는 판결 뒤 스위스로 떠나 라투르드페이에 정착했다.
「국가는 '폐지'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멸한다.」 — 『공상에서 과학으로』(1880)
바르멘의 방적공장주 집안에서 태어나 맨체스터의 가업을 관리하며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1845)를 썼다. 1848년 혁명과 바덴 봉기를 거친 뒤 20년을 상사에 매여 런던의 마르크스 가족을 부양했다. 뒤링을 반박한 『반뒤링론』(1878)에서 세 개 장을 뽑아 만든 소책자가 『공상에서 과학으로』(1880)이고, 이 책은 곧 열 개 언어로 번역되어 마르크스주의 입문서가 되었다. 마르크스 사후에는 『자본론』 2·3권을 편집했고, 1891년 15년간 묻혀 있던 『고타강령 비판』을 당 지도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발표했다.
클뤼세레는 1848년 프랑스군 장교로 6월 봉기 진압에 참여했고, 이후 이탈리아 통일전쟁과 미국 남북전쟁에서 복무했다. 1871년 파리 코뮌에서 전쟁대표로 국민방위군 재편을 추진했으나 지도부와의 갈등 속에 반역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무죄 판결을 받았으며, 코뮌 진압 뒤 해외로 피신했다. 사면 후 귀국해 툴롱에서 사회주의자로 하원의원에 선출되었으나, 이후 사회주의에서 멀어져 반드레퓌스파에 가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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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3프랑스 쉬렌에서 태어났다.
1848프랑스군 장교로 6월 봉기 진압에 참여했다.
1860가리발디 의용군에 합류해 이탈리아 통일전쟁에 참여했다.
1861–1863미국 남북전쟁에서 북군에 복무하고 준장 계급에 올랐다.
1871파리 코뮌의 전쟁대표로 국민방위군 재편을 추진했다. 지도부와 충돌해 5월 1일 체포됐고, 5월 21일 특별법정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철과 같은, 잔혹한 법칙(das eiserne und grausame Gesetz)」 — 임금을 생존 수준에 묶어 둔다며 라살레가 임금철칙에 붙인 이름(1863)
브레슬라우의 유대인 상인 집안에서 태어난 변호사이자 선동가. 1863년 5월 라이프치히에서 전독일노동자협회(ADAV)를 세워 5년 임기의 회장이 되었고, 보통선거권으로 국가를 움직여 국가 보조 생산협동조합을 세우면 사회주의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같은 해 비스마르크와 비밀리에 만나 노동자와 프로이센 왕정의 동맹을 타진해 마르크스의 깊은 의심을 샀다. 1864년 결혼 문제로 벌인 결투에서 총상을 입고 사흘 뒤 제네바 근교에서 죽었다. 그가 남긴 강령은 11년 뒤 고타 통합강령의 뼈대가 되었다.
「국가사회주의와 가장 앞장서 싸워 온 것이 우리 독일 사회주의자들이며, 국가사회주의가 실은 국가자본주의임을 누구보다 분명히 보인 사람이 나다.」 — '우리의 최근 대회'(1896)
기센에서 태어나 1848년 봉기에 가담했다가 스위스를 거쳐 런던으로 망명해 12년간 마르크스·엥겔스의 가까운 동지로 지냈다. 1869년 베벨과 함께 아이제나흐에서 사회민주노동자당(SDAP)을 세웠고, 보불전쟁 전쟁공채에 반대하다 체포되어 1872년 라이프치히 반역죄 재판에서 요새금고형을 받았다. 1875년 고타 통합대회를 성사시킨 주역이자 통합강령의 기초자였으며, 마르크스가 조목조목 해부한 문서가 바로 그것이다. 1890년부터 죽을 때까지 당 기관지 『전진』을 편집했다. 카를 리프크네히트의 아버지다.
브르타뉴 브레스트 출신인 르멜은 파리에서 제본공으로 일하며 노동운동에 참여했다. 1865년 제본공 노동자들의 남녀 동일임금 쟁취에 기여했고, 국제노동자협회에 가입해 외젠 바를랭과 협동조합 식당 라 마르미트를 운영했다. 1871년 파리 코뮌 때 여성 연합의 지도적 활동가로 바리케이드에서 싸웠다. 체포된 뒤 루이즈 미셸과 함께 누벨칼레도니로 유형되었으며 1880년 사면으로 파리로 돌아왔다.
파리 코뮌에서 몽마르트르 여성감시위원회를 이끌고 바리케이드에서 싸운 루이즈 미셸은 패배 뒤 뉴칼레도니아로 유형되었으며, 귀환 후 노동자 집회와 아나키스트 운동에 헌신했다.
오트마른의 성에서 하녀의 딸로 태어나 교사가 되었고, 1850년대 파리 몽마르트르에서 학교를 열며 공화파·사회주의 클럽에 드나들었다. 1871년 3월 18일 몽마르트르에서 대포를 지키러 나섰고, 코뮌 기간 감시위원회와 구급 활동, 방위군 대대에서 활동했다. 피의 주간 뒤 어머니 대신 자수해 법정에서 사형을 요구했으나 뉴칼레도니아 유형을 선고받았다. 그곳에서 카나크인의 1878년 봉기를 지지했다. 1880년 사면으로 돌아와 아나키스트로서 연설과 투옥을 거듭했고 1905년 마르세유에서 강연 여행 중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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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0s–1860s마을에서 교사로 일한 뒤 1856년 파리로 옮겼다. 1865년 파리에 학교를 열고 시를 발표했으며, 블랑키주의 혁명가들과 교류하고 여성의 시민권과 여학생 교육을 위한 활동에 참여했다.
1871파리 코뮌에서 몽마르트르 여성감시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제61 몽마르트르 대대에서 싸우며 구급소를 조직했다. 피의 주간에 어머니를 지키려 프랑스군에 자수했다.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요구했지만 태평양의 프랑스 유형지 뉴칼레도니아로 이송형을 선고받았다.
1873–1880뉴칼레도니아로 유형되어 카나크인과 교류하고 프랑스어를 가르쳤으며 1878년 카나크 봉기를 지지했다. 1880년 코뮌 참여자 사면으로 프랑스로 돌아왔다.
1880–1905프랑스로 돌아온 뒤 노동자 집회와 시위에서 연설했고, 아나키스트로서 여러 차례 투옥되면서도 프랑스와 유럽에서 활동했다. 1883년 실업 노동자 시위를 이끌었고, 세바스티앵 포르와 함께 1895년 아나키스트 잡지 《르 리베르테르》를 창간했다. 1905년 마르세유에서 사망했다.
1863년 폴란드 봉기의 조직자로, 코뮌군 장군이 되어 피의 주간에 몽마르트르에서 전사한 장교
1863년 봉기를 준비하다 체포되어 시베리아 유형형을 선고받았으나 탈출했고, 1871년 파리 코뮌의 장군으로 베르사유군과 싸우다 5월 23일 치명상을 입었다.
지토미르의 폴란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러시아군 참모 장교가 되었으나, 바르샤바에서 1863년 1월 봉기를 준비하다 봉기 직전 체포되었다. 시베리아 유형 도중 탈출해 1865년 파리로 망명했다. 1871년 코뮌은 그를 장군으로 임명해 뇌이·아니에르 등 서부 전선을 맡겼고, 그는 가장 유능한 지휘관으로 꼽혔다. 5월 21일 베르사유군이 성벽 안으로 들어왔다고 코뮌에 처음 알린 이도 그였다. 5월 23일 몽마르트르 부근 미라 거리의 바리케이드에서 치명상을 입고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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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0년대–1862년러시아군 포병 장교로 복무하고 참모 아카데미를 졸업했다. 바르샤바 수비대 참모직에 부임해 비밀 장교 조직과 폴란드 독립 음모에 참여했다.
1862년–1863년바르샤바에서 급진파 ‘적파’의 지도자이자 민족중앙위원회 창설의 주역으로 봉기를 준비했다. 1862년 8월 체포되었고, 1863년 1월 봉기 발발 뒤에도 바르샤바 성채에 수감되었다.
1864년–1865년15년 중노동형을 선고받아 시베리아로 이송되던 중 모스크바에서 탈출했다. 위조 여권으로 러시아를 떠나 프랑스에 정착했다.
1871년파리 코뮌은 그를 장군으로 임명해 북서부 전선을 맡겼고, 이후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가 해임한 뒤 다시 복귀시켰다. 5월 23일 바리케이드 전투에서 복부에 중상을 입고 병원에서 숨졌다.
파리 코뮌의 마지막 바리케이드에서 싸우고 망명지에서 『1871년 파리 코뮌의 역사』를 쓴 언론인
프랑스 혁명적 사회주의 언론인 프로스페르올리비에 리사가레는 파리 코뮌에 참여하고, 생존자 증언과 문서를 모아 『1871년 파리 코뮌의 역사』를 썼다.
툴루즈의 바스크계 가정에서 태어나 제2제정기 공화파 강연가·언론인으로 활동하다 여러 차례 기소되었다. 1870년 전쟁 중 지방 국민방위정부의 군사 조직에 참여했고, 1871년 코뮌 기간 파리에서 신문 『악시옹』과 『트리뷴 뒤 푀플』을 냈다. 피의 주간에는 벨빌의 마지막 바리케이드까지 싸운 뒤 런던으로 탈출해 마르크스 가족과 가까워졌고 엘리너 마르크스와 약혼했다. 1876년 브뤼셀에서 『1871년 파리 코뮌의 역사』를 펴냈다. 1880년 사면 뒤 돌아와 신문 『라 바타유』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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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파리 코뮌에 참여하고 『악시옹』과 『트리뷴 뒤 푀플』을 창간·편집했다.
1876코뮌 생존자들의 증언과 당시 문서를 바탕으로 『1871년 파리 코뮌의 역사』를 처음 출간했다.
제본공 노동조합을 국제노동자협회와 파리 노동자협회 연맹으로 연결하고, 파리 코뮌의 재정과 노동 관계를 맡아 조직했다. 1871년 5월 28일 베르사유군에 붙잡혀 몽마르트르에서 다른 포로들과 총살되었다.
농가 출신으로 파리에서 제본공이 되어 1864년 제본공 파업을 이끌었고, 상호부조 조합과 협동 식당 「라 마르미트」를 세웠다. 국제노동자협회 파리 지부의 중심인물로 1868년 두 차례 재판을 받았고, 노동조합 연합회를 조직했다. 1871년 국민방위군 중앙위원회에 들어갔고 코뮌 의원으로 재정과 식량 공급을 맡았다. 공안위원회 설치에 반대한 소수파에 속했다. 5월 28일 붙잡혀 몽마르트르로 끌려가 군중에게 구타당한 뒤 총살되었다.
「파리에서의 투쟁은 작은 전초전에 불과하다. 유럽의 본안은 아직 앞에 있으며, 수십 년 안에 '궁전에 전쟁을, 오두막에 평화를'은 전 유럽의 구호가 될 것이다.」 — 제국의회, 1871년 5월 25일
목수 도제 출신으로 빌헬름 리프크네히트와 1869년 사회민주노동자당을 창립하고 1875년 고타 통합대회로 독일 사민당(SPD)을 세계 최대 사회주의 정당으로 키웠다. 반사회주의법(1878–1890) 아래 취리히에서 불법 기관지를 발행하며 당을 지하에서 이끌었고, 1891년 에르푸르트 강령 채택을 주도해 유럽 사민주의의 기준을 세웠으며,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 논쟁에서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옹호했다. 《여성과 사회주의》(1879)는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의 고전으로 50여 판을 거듭했고, 1913년 사망 시 장례식은 제2인터내셔널의 국제적 집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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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1867빌헬름 리프크네히트와 작센인민당 공동 창립, 라이프치히 노동자교육협회에서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