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민포름에서 서유럽 공산당을 공격하고, 훗날 『새 계급』으로 공산주의 체제를 해부한 유고슬라비아 반체제 인사
나는 공산주의의 전 길을 걸었다: 젊은 혁명가에서 독실한 스탈린주의자로, 그리고 완전한 환멸에 이르기까지.
몬테네그로 출신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지도자로, 파르티잔 투쟁과 전후 국가 건설에서 티토의 가장 가까운 동지 중 하나였다. 1947년 코민포름 창설 회의에서 카르델리와 함께 프랑스·이탈리아 공산당의 '의회주의적 기회주의'를 신랄히 비판했으며, 그의 회고록은 이 회의의 내부 동학에 관한 핵심 사료로 남아 있다. 당내 민주화와 관료 특권층 비판을 제기하다 1954년 모든 직위에서 축출되었고, 수감 중 밀반출한 『새 계급』에서 공산당 관료가 착취적 지배계급으로 변했다고 주장해 국제적 반향을 일으켰다. 이후 30년 넘게 투옥과 감시 속에서도 저술을 이어간 동유럽 최초의 저명한 공산권 반체제 인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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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2–1936유고슬라비아 공산당 활동, 체포 및 수감
- 1937–1939KPJ 중앙위원 및 정치국 위원
- 1941–1945몬테네그로 파르티잔 봉기 지도, 최고사령부 선전 담당
- 1945–1953유고슬라비아 연방 부통령, 민족의회 의장
- 1953–1954『보르바』에 일당제 비판 연재, 당에서 축출
- 1956–1966반체제 저술로 두 차례 수감, 『새 계급』·『스탈린과의 대화』 해외 출간
- 1966–1995베오그라드에서 감시 속 자유, 저술 활동 지속
동구권 최장 35년 집권, 소련에 가장 충성한 발칸 지도자
「나를 심판하라. 그러나 빵도 명예도 없이 백성이 남게 될 때가 올 것이다」(1990년 체포 당시)
소피아 근교 프라베츠의 빈농 가정에서 태어나 인쇄공으로 일하며 1932년 불가리아 공산당에 입당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파르티잔 '얀코'로 소피아 일대 저항을 조직했고, 1944년 반파시스트 봉기에 참여했다. 전후 체르벤코프의 후원으로 급부상해 1954년 제1서기가 되어 35년간 동구권 최장기 집권했다. 흐루쇼프·브레즈네프와 긴밀히 협력하며 공업화와 생활수준 향상을 이끌었고, 1987년 '7월 구상'으로 제한적 시장개혁을 시도했다. 1984년 투르크계 강제동화 정책으로 큰 논란을 남겼으며, 1989년 11월 당내 쿠데타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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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2불가리아 공산당(BCP) 입당, 국영인쇄소 당조직 책임자
- 1941–44대독 저항 — 소피아 제3당구역 책임자, 파르티잔 여단 '차브다르' 정치지도원
- 1945–49BCP 중앙위 후보위원 → 소피아 시당 제1서기 → 소피아 시장
- 1950–54BCP 중앙위 서기, 정치국 후보위원 — 농업·집단화 담당
- 1954–89BCP 제1서기(1954–81) → 총서기(1981–89) — 35년간 국가 최고지도자
- 1962–71불가리아 인민공화국 각료회의 의장(총리)
- 1971–89국가평의회 의장(국가원수)
- 1989.11.10당내 쿠데타로 전격 해임, 이후 BCP 제명
캄보디아의 반공 저항세력 지도자
1982년 6월 22일 쿠알라룸푸르에서 시아누크·크메르루주와 함께 민주캄푸치아 연합정부를 세우고 총리를 맡아 캄보디아의 유엔 의석 유지에 기여했다.
캄보디아의 정치가이자 반공 저항세력 지도자다. 1911년 프놈펜에서 크메르 크롬 가문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유학하고 1935년 공직에 들어갔다. 1946~48년 부총리와 재정을, 1950~51년 외무를 맡았고 1955~68년 캄보디아 국립은행 총재를 지냈으며 1967~68년 총리가 되었다. 1970년 쿠데타 뒤 가택 연금되었다가 프랑스로 망명해 1978~79년 크메르 인민민족해방전선(KPNLF)을 결성했고 1982년 민주캄푸치아 연합정부의 총리가 되었다. 1992년 불교자유민주당을 창당해 1993년 선거에서 당선되었고 1993년 국회의장을 지낸 뒤 1997년 파리로 떠나 2000년 12월 19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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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6–1948부총리 겸 재정 담당
- 1950–1951외무장관
- 1955–1968캄보디아 국립은행 총재
- 1967–1968캄보디아 총리
- 1978–1979크메르 인민민족해방전선(KPNLF) 결성 및 지도
- 1982–1993민주캄푸치아 연합정부 총리
- 1992불교자유민주당 창당
- 1993국회의장
핵폐기를 진심으로 믿었으나 SDI만은 양보하지 않았던, 냉전의 마지막 미국 대통령
1986년 10월 12일 오후, 레이건과 고르바초프는 모든 핵무기를 2000년까지 폐기한다는 데 합의했다. 그리고 40분 뒤, SDI 연구를 실험실에 가두라는 고르바초프의 조건을 레이건이 거부하면서 협상은 무너졌다.
로널드 레이건은 배우에서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거쳐 미국의 제40대 대통령이 된 인물로, 레이거노믹스와 대규모 군비 증강으로 1980년대를 열었다. 취임 초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 부르며 대결을 고조시켰으나, 핵무기 없는 세상을 진심으로 염원하여 고르바초프와 네 차례 정상회담을 가졌다. 1986년 레이캬비크에서 전면 핵폐기 합의 직전까지 갔지만, 전략방위구상(SDI)을 양보할 수 없다는 이유로 협상은 막판에 결렬되었다. 그로부터 1년 뒤 중거리핵전력조약(INF)에 서명하여 사상 처음 핵무기 한 급을 통째로 폐기했고, 냉전은 그가 퇴임한 지 몇 달 만에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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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1일리노이주 탬피코의 아일랜드계 가정에서 출생
- 1937–1964할리우드 배우, 영화 53편 출연, 영화배우조합 회장 역임
- 1967–1975캘리포니아 주지사, 대학 시위 진압과 복지 개혁 추진
- 1981–1989제40대 대통령, 레이거노믹스·군비 증강·'악의 제국' 연설
- 1986.10레이캬비크 정상회담, 전면 핵폐기 직전까지 갔으나 SDI로 결렬
- 1987.06브란덴부르크문 앞 '이 벽을 허무시오' 연설
- 1987.12INF 조약 서명, 중거리 핵미사일 전량 폐기
- 1994–2004알츠하이머병 진단, 2004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사망
정규 훈련 없이 두 제국을 격파한 역사 교사 출신 장군
하노이 사립학교의 젊은 역사 교사 시절, 그는 칠판에 나폴레옹 전역의 상세한 작전도를 그려내곤 했다. 학생들은 그를 '장군'이라 불렀다. 15년 후, 그는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를 항복시켰다.
정규 군사 교육 없이 게릴라 부대를 창설해 디엔비엔푸 전투(1954)에서 프랑스를 격파하고, 이어진 전쟁에서 미국을 물러나게 한 역사 교사 출신 장군. 제국주의 정규군을 야전에서 무너뜨린 최초의 식민지 해방군 사령관으로, 30년간 인민군을 기계화 연합군으로 키우며 정치적 의지를 꺾는 인민전쟁 전략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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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1–1945비엣민 군사 사령관
- 1946–1947내무장관, 베트남 민주 공화국
- 1946–1980국방장관, 베트남 민주 공화국 /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 1951–1982정치국 위원, 베트남 공산당
- 1955–1991부총리
- 1972현장 지휘관직에서 물러남 (반띠엔중으로 교체), 국방장관직 유지
- 1982–1991중앙위원회 위원
노동자 자주관리의 경제 이론을 설계한 유고슬라비아의 혁명가
자주관리 도입을 앞둔 어느 연설에서, 노동 대중은 '정당의 전위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그리고 매일 발언권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슬로베니아 출신의 유고슬라비아 혁명가이자 정치가로, 제2차 세계대전 중 슬로베니아 해방전선과 파르티잔 저항운동의 주요 조직자였다. 전후 초대 슬로베니아 정부 주석을 지낸 뒤 연방 경제 담당 장관으로서 제1차 5개년 계획을 주도했으나, 1948년 티토-스탈린 결별 이후 소련식 중앙집권 계획에서 노동자 자주관리로의 전환을 설계한 핵심 경제 이론가였다. 그의 1951년 「전환기 경제에 관한 테제」는 상품생산과 가치법칙이 사회주의 경제에서도 작동함을 인정함으로써 소련식 국가사회주의를 비판하고 유고슬라비아의 독자 노선을 정당화한 대표적 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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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1–1945슬로베니아 해방전선 정치서기 겸 파르티잔 총사령부 정치위원
- 1945–1946슬로베니아 인민공화국 초대 정부 주석
- 1946–1953유고슬라비아 연방 경제평의회 의장 겸 산업장관
- 1947–1952제1차 5개년 계획 입안·집행 총괄
- 1948–1953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정치국 위원
공화국의 이해와 연방 사회주의를 조율한 공산주의 지도자
1948년 2월 모스크바에서 스탈린의 유고슬라비아 비난을 직접 들은 대표단의 일원이었다.
블라디미르 바카리치는 크로아티아 공산주의 운동의 지도자이자 유고슬라비아 연방 정치의 핵심 조정자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파르티잔 조직과 해방 권력 건설에 참여했고, 전후에는 크로아티아의 국가·당 기구를 이끌었다. 1948년 2월 에드바르드 카르델리와 함께 모스크바에 파견되어 스탈린의 압박을 직접 마주했으며, 이후 티토의 독자 노선을 지지했다. 그는 공화국의 권한 확대와 자기관리 사회주의를 옹호했지만, 티토의 후원과 당의 권력 구조 안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신중한 지도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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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2–1935자그레브 대학에서 혁명적 노동운동에 참여하고 1933년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에 입당
- 1941–1943크로아티아 파르티잔 해방운동의 정치위원
- 1944–1969크로아티아 공산당 및 공산주의자동맹의 최고 지도자
- 1945–1953크로아티아 인민공화국 집행위원회 의장
- 1948에드바르드 카르델리와 함께 모스크바 회담에 파견
- 1953–1963크로아티아 의회 의장
- 1974–1983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대통령직 위원
유대인 이민을 통상 지위와 묶어 데탕트를 흔든 민주당 매파 상원의원
미국민은 무엇보다도 '인간적인 데탕트', 곧 사람과 사상의 자유로운 이동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노르웨이 이민자의 아들로 워싱턴주에서 태어나 40년 넘게 의회에서 활동한 냉전 자유주의자였다. 민권과 환경 정책에는 앞장섰지만 데탕트에는 회의적이어서, 소련의 유대인 이민을 통상 지위와 연결한 잭슨-배닉 수정안을 주도했다. 1974년 키신저·도브리닌과의 비공식 협상이 소련의 거부로 무산되며 잭슨은 1972년 통상협정을 사실상 좌초시킨 인물로 남았다. 그의 매파 보좌관들은 훗날 신보수주의의 핵심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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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8–1940스노호미시군 검사장
- 1941–1953연방 하원의원
- 1953–1983연방 상원의원
- 1963–1981내무·에너지·천연자원위원회 위원장
- 1972·1976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출마
- 1974잭슨-배닉 수정안 공동 발의
약속을 하루 만에 번복해 포즈난 봉기를 부른 기계공업부 장관
1956년 6월 27일, 그는 포즈난 ZISPO 노동자들 앞에서 전날 바르샤바에서 약속했던 내용을 철회했다.
폴란드 공산당 출신의 기계공학 배경 기술관료로 1955년 기계공업부 장관에 올랐다. 1956년 6월 26일 바르샤바에서 포즈난 ZISPO 노동자 대표단에게 임금 인상과 체납 세금의 환급을 약속했다가 이튿날 포즈난 현장에서 이를 번복했고, 이 파기가 6월 28일 봉기의 직접적 불씨가 되었다. 이후 계획경제 기구에서 계속 근무하며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산업 관료로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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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8바르샤바 공대 졸업, 기계공학자
- 1942–1944마그니토고르스크 제철 공장 기술자
- 1949중공업부 차관
- 1952기계공업부 차관
- 1955–1956기계공업부 장관
- 1958각료회의 사무처 차관, 대외경제과학기술협력위원회 부위원장
- –1968각료회의 산하 계획위원회 부위원장
구야시 코뮤니즘의 설계자, 1956년 진압의 책임자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 편이다」(1961년)
피우메에서 하녀의 사생아로 태어나 이탈리아식으로 체르마니크로 등록되었고, 1927년 타자기 정비공 견습을 시작해 1929년 직인이 되었다. 1931년 불법 공산청년동맹과 당에 입당해 지하활동과 투옥을 겪었다. 1948~50년 내무장관으로서 러이크 라슬로 숙청에 관여했고, 1951년 체포되어 1952년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954년 석방되었다. 1956년 10월 25일 서기장이 되어 11월 1일 소련 측으로 넘어가 진압을 수용하고 너지 임레의 처형을 승인했으며, 수백 명 처형과 수만 명 투옥이 뒤따랐다. 1961년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 편이다'를 제창해 대사면과 개혁을 추진했고, 1988년 사임하고 1989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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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1불법 헝가리 공산당(KPV) 및 공산청년동맹 입당, 지하활동
- 1933–34체포되어 2년간 투옥, 중형교도소에서 라코시와 마주침
- 1942–44KPV 중앙위원·서기, 반파시스트 '헝가리 전선' 창설 주도
- 1948–50내무장관 — 러이크 라슬로 체포 관여, 이후 당 조직부장으로 좌천
- 1951–54'티토주의자'로 체포, 무기징역 → 1954년 7월 석방
- 1956.10–11너지 내각 장관 → 소련과 협상, 새 정부 수립
- 1956–88MSZMP 서기장 ― 32년간 헝가리 실질적 국가원수
- 1956–58, 61–65총리 겸임 — 경제개혁·대사면, '구야시 코뮤니즘' 확립
소련 극동에서 귀환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설자
1945년 10월 14일, 10만 명이 넘는 군중이 평양 운동장에 모여 소련군 해방 환영대회를 열었다. 소련 장군이 '민족의 영웅, 유명한 빨치산 지도자 김일성 동지'를 소개하자, 연단에 오른 것은 33세의 젊은이였다. 군중은 50대쯤 되었을 전설적 게릴라의 실제 모습에 당혹스러워했다.
항일 유격대 지휘관으로 활동하다 1940년대 소련 극동의 제88독립소총여단에 속했고, 1945년 이후 소련 점령 당국의 후원 아래 조선 북부의 권력 중심으로 부상했다.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세운 뒤 당·국가·군의 권력을 장기적으로 집중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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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년대만주 항일 유격대 활동
- 1942–1945소련 제88독립소총여단 복무
- 1945–1948소련 점령기 북부 조선의 권력 기반 형성
- 1948–1972내각 수상·노동당 지도자
- 1961소련과 우호·협조·상호원조 조약
- 1972–199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
장벽의 공화국을 장기 통치한 동독 지도자
1989년 10월의 축출은 동독 체제의 붕괴가 지도부 내부에서도 더는 막을 수 없게 되었음을 드러냈다.
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를 거친 독일 공산주의자로, 전후 동독에서 청년조직과 당의 핵심을 지냈다. 1971년부터 1989년까지 독일사회주의통일당을 이끌며 동독의 장기 통치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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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1931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 수학
- 1971–1989독일사회주의통일당 제1서기·총서기
- 1976–1989독일민주공화국 국가평의회 의장
- 1989대중 시위 속에서 실각
1956년의 장군이자 논쟁적 증언자
“나는 5년의 투옥에서 뼈와 가죽만 남은 채 나왔다.”
키라이 벨러는 헝가리 군인으로 제2차 세계대전과 전후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거쳐 1956년 혁명에 참여했다. 전후 체제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감형·석방된 그는 국민위병을 지휘하며 소련군에 맞선 헝가리 무장세력의 최고위 군인이 되었다. 망명 뒤 미국에서 역사를 연구하고 가르쳤으며, 티토·스탈린 결렬을 다룬 회고와 저술에서 소련의 유고슬라비아 침공 계획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후 공개된 소련권 자료를 바탕으로 한 연구는 그 주장을 반박하거나 수정하며, 그의 증언을 1956년의 경험과 기억 정치 속에서 다시 검토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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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5루도비카 사관학교 졸업, 육군 소위
- 1942–1945헝가리군 참모장교, 동부전선 복무
- 1949–1951헝가리 인민군 보병사령관, 소장
- 1951–1956정치재판으로 수감, 사형에서 종신형으로 감형
- 1956국민위병 총사령관, 부다페스트 군사령관
- 1957–1966미국 망명, 컬럼비아대학교에서 역사학 박사 취득
- 1964–1982브루클린 칼리지 군사사 교수
- 1990헝가리 국회의원
소련에서 온 고려인 장군,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에 서명하다
1953년 7월 27일 판문점, 남일 대장과 해리슨 중장은 서로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18부의 정전협정문에 서명했다. 3년 전쟁을 멈춘 10분, 그는 조선의 얼굴이었다.
러시아 극동에서 태어난 고려인으로, 1937년 강제이주로 중앙아시아로 옮겨갔으며 소련군 장교로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베를린 공방전에 참전했다. 1946년 조선 북부로 파견되어 김일성의 측근으로 부상했고, 한국전쟁 발발 후 인민군 총참모장을 맡았다. 1951년부터 2년간 판문점 휴전회담 공산측 수석대표로서 협상을 이끌었고 1953년 7월 27일 조선인민군 대표로 정전협정에 서명해 전 세계에 조선의 얼굴로 알려졌다. 전후 외무상·부수상을 지내며 소련파 고려인 동료들이 숙청되는 와중에도 살아남았으나, 1976년 원인 불명의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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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9–1946소련에서 교사·교육 공무원으로 근무, 소련군 대위로 독소전 참전
- 1946–1950조선 북부 파견, 교육성 부상까지 승진
- 1950–1953조선인민군 총참모장, 휴전회담 공산측 수석대표
- 19537월 27일 정전협정 조선인민군 측 서명
- 1953–1959외무상
- 1957–1976내각 부수상
- 1966–1972철도상·국가건설위원회 위원장
- 1972–1976정무원 부총리·국가경공업위원회 위원장
캄보디아 군인·정치인으로 크메르 공화국을 이끈 총리 겸 대통령
론 놀은 캄보디아 군과 정부에서 요직을 맡았으며, 1970년 3월 노로돔 시아누크를 축출한 쿠데타의 주요 설계자였다. 총리로 새 정부를 이끌고 시아누크의 중립 노선을 폐기해 미국·남베트남과 밀착했으며, 양국 군대가 캄보디아 영토에서 작전하도록 허용했다. 1972년 권력을 장악해 대통령이 되었고, 크메르루주가 수도에 접근하자 1975년 4월 캄보디아를 떠나 미국으로 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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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7프랑스 식민지 행정에 들어가 치안판사로 근무했다
- 1951지방 총독과 경찰청장을 지냈다
- 1952군에 입대해 캄보디아 내 베트남 공산 게릴라전에 지역 지휘관으로 참전했다
- 1955캄보디아 육군 참모총장이 되었다
- 1960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 1963부총리를 지냈다
- 1966–1967총리를 지냈다
- 1968–1969국방장관을 지냈다
- 1969–1972시아누크 정부의 총리였고, 1970년 3월 쿠데타 뒤 새 정부의 주요 지도자가 되었다
- 1972전권을 장악한 뒤 대통령에 취임했다
- 1975크메르루주가 수도에 접근하자 4월 1일 캄보디아를 떠나 미국에 정착했다
혁명과 개혁을 잇고 독재의 상처를 짊어진 정치가
1956년 11월 4일, 너지 임레와 함께 소련의 공격을 규탄하는 성명을 작성한 뒤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으로 피신했다.
도나트 페렌츠는 헝가리 공산주의 운동과 농업정책에 참여한 정치가이자 농업경제 연구자였다. 전후 토지개혁과 집단화 추진에 관여했지만, 1951년 숙청 재판으로 투옥된 뒤 복권되어 당 노선과 국가 폭력의 긴장을 직접 겪었다. 1956년 너지 임레를 지지하며 혁명을 해석하고 소련의 군사 개입을 비판한 그는 너지 임레 재판에서 12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960년 석방되었다. 이후 농업경제를 연구하고 1980년대 민주 야당의 대화를 조직했으며, 1989년 법적으로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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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4헝가리 공산당 입당, 지하 활동
- 1937–19393월 전선 조직 참여, 국민농민당 창립 참여
- 1945–1948국가토지정착위원회 부위원장, 농업부 정치차관
- 1948–1951헝가리 노동인민당 중앙위원회 사무국·농촌부문 지도
- 1951–1954숙청 재판으로 15년형, 1954년 복권·석방
- 1956너지 임레 주변 개혁파, 헝가리 사회주의 노동자당 임시집행위원
- 1958–1960너지 임레 재판에서 12년형, 1960년 특별사면 석방
- 1976–1985협동조합 연구자, 민주 야당 연대와 모노르 회의 조직
- 1989너지 임레 재판 판결 무효화로 사후 복권
프라하의 봄을 짓밟고 '정상화'를 설계한 체코슬로바키아 최장기 지도자
1989년 12월 10일, 후사크는 41년 만의 첫 비공산 다수 내각을 출범시킨 직후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자신이 구축한 체제의 공식적 종말을 직접 목도한 것이다.
슬로바키아 출신 공산주의 법률가. 반나치 슬로바키아 민족봉기 지도부에서 활동했고, 전후 슬로바키아 행정을 장악했으나 1950년 '부르주아 민족주의' 혐의로 종신형을 받았다. 1963년 복권되어 둡체크의 프라하의 봄에서 부총리를 지냈지만, 소련 침공 후 입장을 선회해 개혁파 숙청을 주도했다. 1969년부터 1987년까지 당 총서기, 1975년부터 1989년까지 대통령으로서 20년간 '정상화' 체제를 이끌며 상대적 생활안정과 비밀경찰 탄압을 병행했다. 1989년 벨벳 혁명으로 41년 만의 비공산 내각에 정권을 넘기고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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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3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입당
- 1944슬로바키아 민족봉기 지도부, 슬로바키아 민족평의회 부의장
- 1946–1950슬로바키아 행정위원회 의장 — 민주당 해체 주도
- 1954–1960부르주아 민족주의 혐의로 종신형, 레오폴도프 교도소 수감
- 1968프라하의 봄 시기 부총리, 소련 침공 후 반개혁 노선으로 전환
- 1969–1987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제1서기·총서기 — 정상화 주도
- 1975–1989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 1989벨벳 혁명으로 사임
분단의 도시에서 화해의 정치를 만든 사회민주주의자
장벽이 세워진 뒤 그는 말했다. “장벽은 무너져야 하지만, 무너지기 전까지 도시는 살아가야 합니다.”
빌리 브란트는 나치 독재에 맞서 망명과 저항을 거친 독일 사회민주주의 정치가였다. 서베를린 시장으로서 장벽 건설 뒤 흔들린 도시의 사기를 지키고 서방의 책임을 촉구했으며, 장벽을 ‘수치의 장벽’이라 부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연방총리로서는 동방정책과 ‘접근을 통한 변화’를 추진해 냉전의 대립을 완화했고 1971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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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3–1945나치 독재에 맞선 망명·저항 활동가
- 1948–1953베를린 주재 독일 사회민주당 대표
- 1957–1966서베를린 정무시장
- 1964–1987독일 사회민주당 의장
- 1966–1969외무장관·부총리
- 1969–1974독일연방공화국 연방총리
- 1976–1992사회주의 인터내셔널 의장
국제법의 언어를 시민권 투쟁으로 돌린 외교관
1968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소련의 침공을 “점령”이라고 규정하며 항의했다.
이르지 하예크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정치가이자 외교관으로, 프라하의 봄 개혁과 그 좌절을 모두 경험했다. 1968년 소련 주도의 침공을 유엔에서 점령이라고 규정하며 항의한 뒤 관직과 공산당 지위를 잃었고, 국제적 약속이 국내 권력보다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보여 주었다. 그는 1977년 바츨라프 하벨, 얀 파토치카와 함께 샤르타 77의 첫 대변인이 되어 헬싱키 최종의정서의 인권 조항을 시민적 책임의 근거로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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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9–1945나치 독일에 투옥
- 1945–1948체코슬로바키아 사회민주당 의원·노동운동 간부
- 1950–1953정치·경제과학대학 총장
- 1955–1958영국 주재 대사
- 1958–1965외무차관·유엔 주재 대표
- 1965–1968교육부 장관·외무부 장관
- 1977–1979샤르타 77 첫 대변인
- 1988–1990체코슬로바키아 헬싱키위원회 창립자·의장
데탕트로 소련과 핵무기 제한의 틀을 열고 워터게이트로 무너진 유일한 사임 대통령
1959년 모스크바 미국 박람회의 모형 주방 앞에서, 닉슨은 흐루쇼프를 향해 "우리도 색채 텔레비전에서는 앞서 있다"고 응수하며 즉흥적인 체제 논쟁을 벌였다.
반공 조사로 전국적 명성을 얻은 하원의원에서 부통령을 거쳐, 두 차례의 낙선을 딛고 1968년 대통령에 오른 집요한 정치인이었다. 냉전의 대표적 반공 인사였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소련 및 중국과의 데탕트를 주도하여, 1972년 모스크바 정상회담에서 브레즈네프와 ABM 조약 및 SALT I 잠정협정에 서명했다. 초강대국 간 핵무기 제한의 첫 국제법적 틀이었다. 베트남전을 '명예로운 평화'로 종결시키고 중국 방문으로 미중 관계의 문을 열었으나,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1974년 8월 9일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사임한 대통령이 되었다. 퇴임 후 외교 원로로서 이미지를 회복했으나, 그의 유산은 데탕트의 성취와 대통령직을 무너뜨린 불법 사이에 영원히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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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6–1950캘리포니아 12구 연방 하원의원; 반미활동위원회에서 앨저 히스 사건으로 전국적 명성
- 1950–1953캘리포니아주 연방 상원의원
- 1953–1961미국 부통령 (아이젠하워 행정부), 1959년 모스크바 '주방 논쟁'
- 1961–1968변호사 개업, 저술, 1962년 주지사 선거 낙선 후 정치적 재기
- 1969–1974제37대 미국 대통령; 1972년 모스크바 정상회담에서 SALT I·ABM 조약 서명, 베트남전 종결, 중국 방문; 1974년 워터게이트로 사임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로 1945년 퇴위했다가 프랑스가 내세운 베트남국의 국가원수가 된 인물
1945년 8월 퇴위한 바오다이는 1949년 베트남국 국가원수로 복귀했지만, 1955년 응오딘지엠 정부의 국민투표로 축출됐다.
응우옌 왕조의 13대이자 마지막 황제로 1926년 즉위해 프랑스 보호령 안남·통킹의 명목상 군주였다. 1945년 3월 일본이 프랑스 행정을 무너뜨리자 일본 아래 베트남 제국의 황제가 되었고, 8월 혁명 뒤 30일 후에에서 퇴위해 호찌민 정부의 「최고 고문」이 되었다. 곧 망명했다가 1949년 엘리제 협정으로 프랑스가 내세운 베트남국의 국가원수가 되었으나, 프랑스와 너무 가깝고 나라 밖에서 지내는 일이 많다는 비판을 받았다. 1955년 국민투표로 응오딘지엠에게 쫓겨났고 1997년 파리에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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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6응우옌 왕조 황제로 즉위했으며,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안남·통킹 보호령을 다스린 명목상 군주였다.
- 1945일본이 비시 프랑스 행정을 축출하고 베트남 제국을 선포하자 황제로 남았으며, 일본 항복 뒤 8월 퇴위했다.
- 1945–1946퇴위 후 베트남민주공화국 정부의 최고 고문을 지냈다.
- 1949–1955프랑스가 지원한 베트남국의 국가원수를 맡았고, 1955년 응오딘지엠 총리가 주도한 국민투표 뒤 자리에서 물러났다.
서방 차관으로 현대화 10년을 이끌었으나 부채 위기와 연대로 막 내린 PZPR 제1서기
1971년 1월 노동자 집회에서 — 「자, 그럼 동지들, 도와주시겠습니까?」 (약한 박수)
프랑스·벨기에 탄광 노동자 출신, 1970년 노동자 봉기 후 PZPR 제1서기가 되어 서방 차관으로 '사회주의적 소비사회'를 추진했다. 생활수준이 올랐으나 외채 위기와 1980년 파업으로 실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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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1프랑스 공산당 입당, 랑스 탄광 지구에서 활동
- 1934레포레스트 탄광 점거 파업 주도, 폴란드로 강제 추방
- 1937–46벨기에 이주, 벨기에 공산당 및 대독 레지스탕스 '백색여단' 활동
- 1948–54귀국, PZPR 카토비체 주당 서기, 이후 중앙위 중공업부장
- 1957–70PZPR 카토비체 주당 제1서기 — '카토비체 공국'의 실리적 통치
- 1970–80PZPR 중앙위 제1서기 — '기에레크의 10년'
- 1976–80국가평의회 위원 겸임
- 1981PZPR 제명, 계엄령 하 인터닝 (1981.12–1982.12)
선거로 뽑히지 않은 채 데탕트의 마지막 국면을 이끈 대통령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기차에서 워싱턴의 눈 치우기가 힘들다는 포드의 말에 브레즈네프가 '우리의 첫 거래는 죽 드리죠, 소련 제설차'라고 받았다.
하원의원 25년과 부통령을 거쳐 1974년 닉슨의 사임으로 대통령이 된 공화당 정치가로, 한 번도 선거로 뽑히지 않고 백악관에 오른 유일한 미국 대통령이다. 닉슨이 연 데탕트를 계승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브레즈네프를 만나 SALT II의 틀, 운반수단 2,400기와 MIRV 1,320기의 상한을 잡았고, 이듬해 헬싱키 최종의정서에 서명하며 잭슨-배닉 수정조항을 법으로 만들었다. 닉슨에 대한 사면이 최대 논란이 되었고, 1976년 카터에게 패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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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9–1973하원의원 (미시간 5선거구)
- 1965–1973하원 소수당 원내대표
- 1973–1974부통령
- 1974–1977제38대 미국 대통령
- 1974.11블라디보스토크 회담, 브레즈네프와 SALT II 기본 틀 합의
이민의 자유를 무역법에 새긴 의원
1974년 그는 잭슨-배닉 수정조항을 하원에 제출해 이민의 자유를 무역 조건으로 만들었다.
찰스 배닉은 클리블랜드 동부의 노동자와 동유럽계 주민을 기반으로 활동한 민주당 하원의원이었다. 그는 조세 형평, 사회보장, 메디케어, 오대호 환경 문제를 다루며 국내 개혁 의제를 외교정책과 연결했다. 1974년 헨리 잭슨과 함께 잭슨-배닉 수정조항을 발의해, 이민을 제한하는 비시장경제 국가에 대한 정상 무역관계 부여를 조건부로 묶었다. 이 법은 소련계 유대인을 비롯한 종교적 소수자의 이주를 압박하는 수단이 되었지만, 데탕트와 무역을 인권 조건에 연계한 미국 의회의 개입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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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8–1939클리블랜드 시의회 의원
- 1940–1942오하이오주 상원의원
- 1942–1945미 해군 예비역 장교, 대서양·태평양 전선 복무
- 1947–1954클리블랜드 시 법원 판사
- 1955–1969미국 하원의원, 오하이오 제21선거구
- 1969–1981미국 하원의원, 오하이오 제22선거구
- 1973–1981하원 세입위원회 무역소위원회 위원장
- 1985–1995Squire Sanders & Dempsey 워싱턴 사무소 변호사, 동유럽 무역 담당
- 2007플로리다주 주피터에서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