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그리튀드 공동 창시자, 식민주의 비판의 선구
「내 차례다. 하나의 등식을 제시하겠다: 식민주의 = 사물화」 『식민주의 담론』(1950)에서 유럽이 나치즘으로 규정한 방법을 이미 식민지 민족에게 써 왔으며 나치즘은 식민주의를 정당화한 문명의 자연적 귀결이라고 논했다.
마르티니크 바스푸앵트에서 세무원의 아들로 태어나 파리에서 상고르·다마스와 함께 네그리튀드 운동을 열었다. 잡지 L'Étudiant noir는 1934~1935년에 창간되었고, 1935년 5~6월호에서 '네그리튀드'가 처음 현재적 의미로 쓰였다. 프란츠 파농을 가르쳤다. 1945년 공산당의 지원으로 당선돼 56년간 포르드프랑스 시장, 47년간 국민의회 의원을 지냈고 1946년 마르티니크를 프랑스 데파르트망으로 만든 법을 통과시켰다. 1956년 10월 24일 『모리스 토레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흐루쇼프 보고와 마그레브 탄압을 들어 공산당과 결별했으며, 영어권 서술은 헝가리 혁명 탄압을 탈당 사유로 든다. 1958년 마르티니크 진보당을 창당하고 2001년 정계에서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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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5파리에서 L'Étudiant noir 창간, '네그리튀드' 개념 최초 제시
- 1939『고향으로의 귀환 수첩』(Cahier d'un retour au pays natal) 출간
- 1941수잔 루시와 함께 Tropiques 창간
- 1945프랑스 공산당 소속 국민의회 의원 및 포르드프랑스 시장 당선
- 1946마르티니크의 프랑스 데파르트망 편입 법안 주도
- 1950『식민주의 담론』(Discours sur le colonialisme) 출간
- 1956헝가리 봉기 탄압에 항의, 『모리스 토레즈에게 보내는 편지』로 PCF 탈퇴
- 1958마르티니크 진보당(PPM) 창당
- 1983–1988마르티니크 지역의회 의장
- 199347년간의 국민의회 의원직 은퇴
- 200156년간의 포르드프랑스 시장직 은퇴
핵시대의 협상가
스미스가 정책기획실장 시절 제안한 모스크바-워싱턴 직통 회선은 국무부와 군부의 반대에 부딪혔지만, 훗날 '핫라인'이 되자 케네디 대통령은 그 구상의 공을 스미스에게 돌렸다.
제라드 C. 스미스는 미국의 변호사이자 핵정책 전문가로, 군비통제와 비확산을 국가정책의 문제로 다룬 외교관이었다. 그는 SALT I에서 미국 대표단을 이끌며 경쟁하는 핵전략 속에서 제한 협상의 실무를 조직했고, 회고록 Doubletalk에 그 과정의 긴장과 판단을 기록했다. 이후에도 핵물질 전용 방지와 탄도탄요격미사일 조약의 보존을 주장하며 군비경쟁의 관리와 한계를 함께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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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5예일대학교 졸업
- 1938예일 법학대학원 졸업, 뉴욕 변호사
- 1942–1945미 해군성 조달 담당관
- 1950–1954원자력위원회 특별보좌관
- 1954–1961국무부 원자력 담당 특별보좌관 및 정책기획국장
- 1969–1973미국 군비통제·군축청장, SALT I 미국 대표단 수석협상가
- 1977–1980대통령 특별대표, 핵확산 방지 담당
- 1981대통령 자유훈장 수훈
전쟁과 망명을 관통한 폴란드 연락장교
1944년 7월 29일 그는 국내군 지도부에 서방의 대규모 지원이 불가능하다고 전했지만, 봉기 결정은 바뀌지 않았다.
얀 노바크예지오란스키는 폴란드 국내군과 런던 망명정부를 잇던 연락장교이자 언론인이었다. 1944년 7월 런던에서 귀환해 국내군 지도부에 서방의 지원이 제한적임을 알렸지만 봉기의 결정을 막지 못했고, 봉기 중에는 라디오 방송을 맡았다. 전후에는 라디오 자유유럽 폴란드어 방송을 이끌며 망명과 반공 정치의 목소리를 냈다. 1989년 귀국한 뒤에도 폴란드의 서방 통합을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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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6포즈난대학교 경제학 조교
- 1941–1943폴란드 국내군 정보·선전망 활동
- 1943–1944런던 망명정부와 국내군 사이의 연락장교
- 1944.07–10바르샤바 봉기에서 라디오 비츠카비차 방송원·편집자
- 1948–1951BBC 폴란드어 방송 편집진
- 1951–1976라디오 자유유럽 폴란드어 방송 초대 국장
- 1979–1996미국 폴란드계 미국인회의 전국 사무국장
- 1989–2005귀국 후 폴란드의 대서방 통합을 옹호한 공적 논객
1964~1968년 남베트남 주둔 미군을 지휘하며 소모전과 사살 집계를 앞세운 미국 육군 장군
웨스트모얼랜드는 베트남전에서 소모전과 ‘수색·섬멸’을 채택하고 적 사살 집계를 성과의 핵심 척도로 삼았다. 미군 병력은 50만 명을 넘었지만, 적은 손실을 보충했고 전쟁 승리라는 그의 낙관적 주장은 1968년 뗏 공세 뒤 신뢰를 잃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출신으로 1936년 웨스트포인트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2차 대전 유럽 전선과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1964년 1월 남베트남에 파견되어 6월 베트남 군사원조사령부를 맡았다. 해병대 상륙 뒤 방어 위주에서 벗어나 미군이 직접 적을 찾아 섬멸하는 소모전을 주장했고, 대규모 포격과 공습을 썼다. 1967년 11월 「끝이 보인다」고 말했으나 1968년 뗏 공세 뒤 20만 명 증파 요청이 알려지면서 3월 교체되었다. 1968~1972년 육군 참모총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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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6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하고 육군 장교로 임관했다.
- 1942–1945제2차 세계대전에서 제34야전포병대대를 지휘하고, 이후 제9보병사단 참모장을 지냈다.
- 1958–1963제101공수사단장에 이어 웨스트포인트 교장을 지냈다.
- 1964–1968베트남 주둔 미군 사령관으로 소모전을 지휘했다. 뗏 공세 뒤 미국으로 돌아와 육군 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
- 1968–1972미 육군 참모총장을 지냈다.
라오스 혁명 지도자·국가주석
1975년 12월 2일 전국인민대표대회는 누학을 라오스인민민주공화국 정부의 부총리 겸 재무장관으로 선출했다. 공화국 수립을 선포한 의장은 누학이 아닌 카이손 폼비한으로 기록되어 있다.
라오스인민혁명당 창당 멤버이자 파테트라오 혁명의 핵심 지도자였다. 시암(현 태국) 무크다한의 라오계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1955년 창당 당시 정치국에서 카이손 다음 서열이었고 1972년 제2차 당대회에서 정치국에 들어가 경제 업무를 맡았다. 1975년 이후 부총리 겸 재무장관을 지냈고, 1992년부터 1998년까지 국가주석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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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라오스 혁명운동 창립 참여
- 1949동부지역 라오 저항위원회 의장
- 1950라오 저항정부 재무장관
- 1954제네바 회담 파테트라오 대표
- 1955창당대회에서 정치국 서열 2위
- 1972제2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진입, 경제 업무 담당
- 1975부총리 겸 재무장관
- 1989제2기 최고인민의회 의장
- 1992국가주석
마르크스주의 틀 안에서 교차성 분석을 선취한 흑인 여성해방 이론가: 노팅힐 카니발의 어머니
「인민의 예술은 그들의 자유의 기원이다」 — 1959년 첫 카리브 카니발 슬로건
트리니다드 출신 마르크스주의-페미니스트 이론가. 1949년 인종·계급·성별 삼중 억압 분석으로 교차성 선구자로 평가된다. 영국 추방 후 흑인 신문 창간, 카리브 카니발 조직해 노팅힐 카니발 기원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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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5트리니다드 포트오브스페인에서 출생 — 8세에 할렘으로 이주
- 1936청년공산동맹 입당 — 『위클리 리뷰』 필진·부편집장·편집장 역임
- 1945–1955CPUSA 여성위원회 간사, 전국위원회 위원(1948), 『데일리 워커』 흑인 담당 편집자
- 1949「흑인 여성 문제의 방기에 대한 종언」 — 마르크스주의 교차성 분석의 선구적 텍스트
- 1948–19554차례 투옥, 스미스법 유죄 — 1955년 영국으로 추방
- 1958–1964『웨스트인디언 가제트』 창간·편집, 1959년 실내 카리브 카니발 조직
- 196412월 24일 심장마비 사망 — 마르크스 묘 왼쪽 하이게이트 묘지 안장
노동자 봉기 앞에서 질서를 세운 법률 관료
1956년 7월 17일, 그는 수사에서 파업 노동자와 ‘말썽꾼, 범죄자, 도발자’를 구별하겠다고 밝혔다.
마리안 리비츠키는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법률가이자 공산주의 정치인으로, 당과 국가의 법률·행정 기구를 오가며 전후 체제의 제도화를 담당했다. 1956년 포즈난 노동자 봉기 뒤 그는 검찰총장으로서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와 ‘말썽꾼, 범죄자, 도발자’를 가르는 ‘두 흐름’ 논리를 공개적으로 제시했다. 이 구분은 국가가 노동자의 경제적 요구와 형사적 책임을 분리해 다루려 한 방식이었지만, 뒤이은 수사와 재판의 틀도 규정했다. 이후 법무장관과 법학 연구자로 활동하며 사회주의 국가의 법과 통치 문제에 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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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7바르샤바대학교 법학 과정 졸업
- 1945–1947국가민족회의 의장단 법률부 근무
- 1947–1948폴란드 사회당 중앙집행위원회와 서기국 참여
- 1948–1954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중앙위원회 조직국 위원
- 1952–1956국가평의회 초대 서기
- 1956–1957폴란드 인민공화국 검찰총장
- 1957–1965법무장관
- 1965–1983폴란드 과학아카데미 국가·법 연구소 법학 교수 및 전국민족통일전선 서기
U-2 정찰사진으로 쿠바 미사일 위기의 문을 연 사진판독의 대부
"내 생애 이보다 옳았으면 싶었던 적은 없다": 1962년 10월 15일, 쿠바 상공 U-2 사진에서 소련 미사일을 확인하며
시카고 출신의 지질학자로 제2차 세계대전 중 해군 사진판독 장교로 경력을 시작했다. 1953년 CIA에 합류해 사진판독부를 이끌었고, 1961년 국가사진판독센터(NPIC)의 초대 소장이 되어 U-2 정찰기와 초기 정찰위성의 영상 분석을 총괄했다. 1962년 10월 15일, NPIC 분석관들이 쿠바 상공 U-2 사진에서 소련 SS-4 중거리탄도미사일 기지를 식별했을 때 룬달이 직접 확인하고 '내 생애 이보다 옳았으면 싶었던 적은 없다'는 말과 함께 CIA 본부에 보고했으며, 다음 날 백악관에서 케네디 대통령에게 이를 브리핑했다. 1973년 퇴임까지 NPIC를 이끌며 냉전기 미국의 영상정보 역량을 구축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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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9–1942시카고 대학 지질학 학사·석사
- 1942–1945미 해군 사진판독 장교
- 1946–1953해군사진판독센터 측량과장
- 1953–1961CIA 사진판독부장
- 1961–1973국가사진판독센터(NPIC) 초대 소장
- 1973국가안보훈장 수상 및 퇴임
핵무기 외교의 실무 설계자
키신저와 함께 소련의 초안을 동맹 의무를 보존하는 반대안으로 돌려세웠다.
토머스 브리멜로는 영국 외교관이자 소련 문제 전문가로, 냉전의 동맹정치와 군비외교 사이에서 활동했다. 그는 1973년 핵전쟁 방지 협정 협상에서 헨리 키신저와 초안을 함께 다듬어, 소련의 무조건적 핵무기 선제사용 포기 구상을 동맹 의무와 제3국을 포함한 보다 제한적인 문안으로 바꾸는 데 기여했다. 이 역할은 영국 외무부 전문성이 미국의 대소 전략에 직접 결합한 사례였지만, 동시에 긴장 완화의 언어가 핵억지와 세력정치를 보존하는 방식으로 작동했음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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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8외무부 입부
- 1966–1969주폴란드 영국 대사
- 1969–1973외무부 차관보급, 상임차관 대리
- 1972키신저와 핵전쟁 방지 협정 반대제안 공동 작성
- 1973–1975외무부 상임차관
- 1976브리멜로 남작 작위 수여
- 1977–1978유럽의회 의원
총구 앞에서 담배를 붙인 유로코뮤니즘의 설계자
1981년 2월 23일, 테헤로 중령의 민위대원 200명이 의사당에 난입해 기관총을 난사했다. 의원 전원이 바닥으로 몸을 던질 때, 66세의 카리요는 자리에 앉아 담배를 꺼내 천천히 불을 붙였다.
스페인공산당(PCE) 서기장(1960–1982)으로, 베를링구에르·마르셰와 함께 유로코뮤니즘을 주도한 핵심 이론가이다. 1968년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이후 모스크바와 단절하고, 『유로코뮤니즘과 국가』(1977)에서 의회 민주주의를 통한 사회주의 이행을 주장하며 프랑코 사후 스페인의 평화적 민주 이행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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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사회주의 청년단 기관지 『레노바시온』 기자
- 1934스페인 사회주의 청년단(JJ.SS.) 서기장
- 1934–19361934년 혁명봉기 참여로 수감
- 1936.11PCE 입당, 마드리드 방위위원회 공공질서 담당 위원
- 1937PCE 정치국 후보위원
- 1939–197638년간 망명 생활 — PCE 재조직
- 1946–1947망명 공화국 정부 무임소장관
- 1960PCE 서기장 — 돌로레스 이바루리 후임
- 1968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반대, 모스크바와 결별
- 1976가발로 위장해 비밀 귀국, 체포 후 석방
- 1977.3베를링구에르·마르셰와 유로코뮤니즘 선언
- 1977–1986스페인 하원의원(마드리드 선거구)
- 1981.2.2323-F 쿠데타 의회 난입 속 자리 지키며 담배
- 1982선거 참패 후 PCE 서기장 사임
- 1985PCE에서 제명, 좌파 분파 결성
- 1991분파 해산, PSOE 합류 제안 거절
마르크스 1844년 수고 첫 영역자에서 디트로이트 혁명의 철학자로
“우리가 바로 우리가 기다려온 지도자다.” — 90대 디트로이트 인터뷰에서
중국 이민 노동자의 딸로 브린마에서 철학 박사를 받았으나 인종차별로 학계에 진출하지 못하고 노동자당에 입당했다. C.L.R. 제임스, 라야 두나옙스카야와 존슨-포레스트 경향의 3인 핵심으로서 소련 국가자본주의론과 『국가자본주의와 세계혁명』을 공저했고, 마르크스 『경제학-철학 수고』를 최초로 영역했다. 1953년 흑인 자동차 노동자 제임스 보그스와 결혼 후 디트로이트에 정착해 트로츠키주의와 결별하고 흑인해방 중심의 공동체 혁명 실천으로 전환, 90대까지 『다음 미국 혁명』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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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5로드아일랜드 프로비던스에서 중국 이민자 식당 주인의 딸로 출생, 중국명 위핑(玉平)
- 1935바너드 칼리지 졸업
- 1940브린마 칼리지에서 조지 허버트 미드 연구로 철학 박사 학위 취득
- 1940–1945시카고 대학 철학 도서관에서 저임금 사서로 근무, 세입자 권리 운동으로 노동자당 입당
- 1945–1947C.L.R. 제임스·두나옙스카야와 존슨-포레스트 경향 결성, 마르크스 『1844년 수고』 첫 영역
- 1947SWP에 합류, 필명 '리아 스톤'으로 존슨-포레스트 경향 저술 활동
- 1950제임스·두나옙스카야와 『국가자본주의와 세계혁명』 공동 저술
- 1951SWP 탈퇴, 코레스폰던스 출판위원회 결성 참여
- 1953흑인 자동차 노동자·정치 활동가 제임스 보그스와 결혼, 디트로이트로 이주
- 1962C.L.R. 제임스와 결별, 부부 독자 노선으로 코레스폰던스 이끌며 디트로이트 공동체 운동 집중
- 1964맬컴 엑스에게 미 상원 출마를 설득하려 시도했으나 무산
- 1970디트로이트 아시아 정치연합 공동 창립
- 1974제임스 보그스와 『20세기의 혁명과 진화』 출간
- 1979전미혁명기구(NOAR) 창립 참여
- 1992다문화 세대 간 청년 프로그램 '디트로이트 서머' 창립
- 1998자서전 『변화를 위한 삶』 출간
- 201195세에 스콧 쿠라시게와 『다음 미국 혁명』 출간
- 2015디트로이트에서 100세로 사망, 오바마 대통령 애도 성명 발표
식민지 군 경력과 전쟁 초기 지휘 실패를 함께 지닌 장성
1950년 6월 28일 새벽, 그의 명령으로 한강교가 폭파되었다.
채병덕은 일본군 장교 경력을 거쳐 해방 뒤 대한민국 군대의 창설과 확대에 참여한 장성이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육군참모총장으로서 전방 경계와 지휘를 제대로 조직하지 못했고, 서울 철수 과정의 한강교 조기 폭파 명령에도 책임이 있었다. 개전 직후 해임된 그는 경남 방어전선에 투입되었고, 7월 하동 전투에서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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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7일본 육군사관학교 졸업, 일본군 포병 장교 임관
- 1940–1945일본군 포공학교 교관, 육군 조병창 공장장
- 1946군사영어학교 졸업, 남조선국방경비대 제1연대장
- 1948통위부 참모총장, 국방부 합동참모총장
- 1949제2대 육군총참모장
- 1950.04–06.30제4대 육군총참모장 겸 육해공군총사령관
- 1950.06.30–07.27경남 지구 편성군 사령관, 하동 전투에서 전사
몽골의 계획경제와 대소 관계
몽골과 소련의 관계를 '큰 형과 작은 동생'(ах дүү) 관계로 규정했던 그는 1953년 스탈린 장례식에서 소련 편입을 청했으나 모스크바는 거절했다.
초이발산 사후 1952년 몽골 정부 수반이 된 지도자다. 소련과의 정치·경제적 연계를 바탕으로 산업화와 협동목축을 추진했다. 장기 집권은 근대화 정책과 당내 반대파 배제, 대외 의존이라는 문제를 함께 남겼으며 1984년 권좌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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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9몽골인민혁명당에 입당하고 재무차관이 되었다.
- 1940당 중앙위원회 총비서로 선출(당내 2인자).
- 1941–1945인민군 정치국장 겸 부사령관.
- 1945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 1952–1974각료회의 의장(정부 수반).
- 1958–1984당 중앙위원회 제1비서 재취임(1981년 총비서 칭호).
- 1974–1984인민대후랄 상임위원회 위원장(국가원수) 겸 인민군 총사령관.
- 1979몽골인민공화국 원수 칭호를 받았다.
1963년 쿠데타를 이끌고 1975년 남베트남의 항복을 명령한 장군
1975년 4월 30일 사이공 함락 때 항복을 명령해 남베트남 전쟁을 끝냈다.
즈엉반민은 베트남공화국군 장군으로 응오딘지엠 정권에서 활동했다. 1963년 군사쿠데타를 이끌어 지엠을 축출하고 군사정권을 이끌었으나 1964년 응우옌카인에게 권력을 빼앗겼다. 1975년 4월 대통령에 취임한 뒤 4월 30일 사이공 함락 때 북베트남군에 항복을 명령했다. 이후 프랑스로 이주했고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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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0프랑스 식민지군에서 군 경력을 시작했다.
- 1952베트남국군으로 옮겼다.
- 1955사이공 전투에서 빈쑤옌 세력을 격파하고, 호아하오 사병 조직을 진압했다.
- 1963쿠데타를 이끌어 응오딘지엠을 축출했으며, 지엠과 동생 응오딘누가 군에 붙잡힌 뒤 살해됐다.
- 1963–1964군사정권의 수장으로 약 석 달 집권했다가 응우옌카인의 쿠데타로 실권했다.
- 19754월 28일 대통령에 취임했고, 4월 30일 북베트남군에 항복을 명령했다.
- 1983프랑스로 이주할 수 있게 됐다.
베트남전을 주도하고 쿠바 위기에서 핵전쟁을 막은, 양적 분석의 국방장관
쿠바 미사일 위기의 가장 큰 교훈: 인간의 오류 가능성과 핵무기의 무기한 결합은 국가들을 파괴할 것이다.
미국 제8대 국방장관(1961–1968)으로, 케네디와 존슨 두 행정부에서 7년 이상 국방을 이끈 최장수 재임자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EXCOMM 내 공습 대신 해상 '격리' 봉쇄를 처음 제시하고 강력히 밀어붙여, 흐루쇼프에게 결의를 보여주면서도 군사 충돌로 번지지 않을 통제된 선택을 관철시켰다. 그러나 베트남전에서는 계량적 분석과 병력 증강을 주도하다 점차 회의에 빠졌고, 퇴임 27년 뒤 회고록에서 그 전쟁이 '잘못됐다'고 고백했다. 이후 세계은행 총재(1968–1981)로 빈곤 퇴치로 은행의 방향을 전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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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3–1946USAAF 통계통제실, 중령 전역
- 1946–1960포드 자동차, 사장(1960)
- 1961–1968제8대 미국 국방장관
- 1968–1981세계은행 총재
개혁 공산주의 언론인
1956년 11월 4일, 소련군이 공격하자 그는 가족과 함께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으로 피신했다.
로숀치 게저는 헝가리 공산주의 운동에서 출발해 당국의 억압과 교조주의를 비판한 언론인이자 정치가였다. 그는 너지 임레의 개혁파와 함께 다당제와 민중운동의 문제를 둘러싼 격변에 개입했고, 1956년 혁명 정부에서 국가장관으로 활동했다. 소련의 개입 뒤 체포되어 재판을 기다리며 단식하다가 감옥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죽음은 너지 임레 집단에 대한 국가 탄압의 일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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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5–1936학생 잡지 「토바브」 편집
- 1939–1941헝가리 공산당 가입 및 네프서바 기자
- 1945–1949「서버드 네프」 국내정치부장
- 1949–1951레버이 요제프 문화교육부 차관급 보좌관
- 1951–1954정치 재판으로 수감
- 1954–1956「머저르 넴제트」 기자, 페퇴피 서클 조직자
- 1956-10–1956-11너지 임레 제2·제3 정부 국가장관
- 1957너지 임레 재판 피고 예정, 수감 중 단식 사망
너지 임레와 함께 교수형에 처해진 개혁파 언론인
《머저르 서버처그》 창간호에서 '오직 이 길로만 우리는 독립되고 자유로우며 민주적인 헝가리를 세울 수 있다'고 썼다.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난 유대계 헝가리 언론인으로, 불법 공산주의 운동에 뛰어들어 종전 후 당 기관지 《사바드 네프》의 기자가 되었고, 초기에는 라코시 체제에 충실한 논객이었다. 슬란스키 재판과 모스크바 의사 사건을 목격하며 신념이 흔들렸고, 1955년 러이크 라슬로의 복권을 요구했다가 당에서 제명되었다. 1956년 혁명 당시 너지 임레 측근 중 가장 급진적인 인물로 《머저르 서버처그》를 창간·편집했으며, 소련군 개입 후에도 카다르 정권을 거부하고 지하 신문과 민주독립운동을 이끌다 체포되어 너지, 말레테르와 함께 사형당했다. 1989년 복권되어 같은 날 엄숙히 재매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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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2불법 공산주의 운동 가담, 노동봉사대 소집
- 1944노동봉사대 탈주,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합류
- 1945–1954《사바드 네프》 기자
- 1954취리히·빈·파리 특파원
- 1955러이크 복권 요구로 MDP 제명, 코르비나 출판사 번역가
- 1956 summerMDP 재입당, 너지 임레 측근
- Oct–Nov 1956《머저르 서버처그》 창간·편집
- Nov–Dec 1956민주독립운동 결성, 지하신문 발행, 12월 5일 체포
협상과 무장 저항 사이에 선 군인
“가야 합니다. 목숨을 잃더라도 나라가 제 도움을 요구합니다.”
말레테르 팔은 제2차 세계대전의 포로이자 반나치 투쟁을 거친 헝가리 장교로, 전후 공산당에 가입했다. 1956년 혁명에서 그는 킬리안 병영에 파견된 뒤 저항 세력과 휴전하고 병영 방어에 합류했으며, 군인과 시민 무장세력 사이의 조정에 관여했다. 너지 임레 정부의 국방장관이 된 그는 소련군과 철수 협상을 시도하다 체포되었고, 1958년 너지와 함께 처형되었다. 1989년 그는 복권되어 혁명의 순교자로 재매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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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9군 입대
- 1940루도비카 사관학교 생도
- 1944–1945소련군 포로, 반독일 유격대원
- 1945임시정부 경비대대 지휘관, 헝가리 공산당 입당
- 1956.10대령, 킬리안 병영 방어 지휘
- 1956.11너지 임레 정부 국방장관, 소장
- 1956.11.3퇴역 협상 대표, 퇴켈에서 체포
- 1958처형
- 1989복권, 추서 및 재매장
- 1956.10.23라디오 방송국 건물에 파견된 기갑부대 지휘
- 1956.10.25킬리안 병영 구원을 위해 전차부대 지휘
- 1956.10.29–31무장세력과 휴전·협상, 국민위병 조직 논의 참여
법정 침묵으로 사건이 분리되어 너지보다 두 달 먼저 교수형에 처해진 혁명가
1958년 4월 법정 최후 진술: "10월이 다른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했다 해도, 헝가리 민중은 사회주의라는 옷을 입은 폭정도 용납하지 않으며 자유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데브레첸 출신의 공산주의 법률가로, 1949년 러이크 라슬로 재판의 근거를 의심했다가 모든 당직에서 해임된 후 너지 임레의 개혁파에 합류했다. 1956년 혁명기에는 너지의 개인 비서 겸 총리 비서실장으로 활동했으며, 11월 4일 소련군 진압 후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으로 피신했다가 루마니아로 끌려갔다. 1년 넘게 취조에 협력하지 않고 단식 투쟁을 벌여 너지 재판에서 분리 심리되었고, 1958년 4월 24일 너지보다 두 달 먼저 교수형에 처해졌다. 1989년 6월 16일 영웅광장에서 너지·말레테르 등과 함께 재매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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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8–39불법 공산당 입당, 데브레첸대학 법학박사
- 1940–44체포되어 3년형 선고, 1944년 석방 후 지하 활동
- 1945–46데브레첸 경찰서장, 국가경찰본부 조직
- 1947–49당 중앙 군사·치안부서장, 중앙통제위원
- 1949러이크 재판 의문 제기로 해임
- 1953–56너지 개혁파 합류, 1956년 초 출당
- 1956.10–11너지 개인 비서 겸 총리 비서실장
- 1958분리 재판 후 사형, 4월 24일 교수형
냉전의 최전선에서 핵전쟁 직전까지 간 최연소 미국 대통령
조국이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묻지 말고, 당신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물으라.
미국 제35대 대통령(1961–1963)으로, 43세의 최연소 당선자이자 최초의 가톨릭 대통령이었다. 1961년 피그만 침공을 승인했으나 실패로 끝났고, 같은 해 흐루쇼프와의 빈 정상회담에서 위협을 느낀 소련은 쿠바에 핵미사일을 배치했다. 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해상 '격리' 봉쇄를 선택하고, 로버트 케네디를 통해 튀르키예의 주피터 미사일 철수라는 비밀 양보로 핵전쟁을 막았다. 1963년 11월 22일 댈러스에서 암살당했으며, 그의 죽음 이후 민권법과 세제 개혁 등 의제가 의회를 통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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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7–1953매사추세츠주 하원의원
- 1953–1960매사추세츠주 상원의원
- 1961–1963제35대 미국 대통령
소련의 군사 개입을 거듭 요청했으나 제자의 손에 죽으면서 결국 소련군을 불러들인 아프간 혁명정권 초대 수반
타라키: '실질적이고 기술적인 지원을, 병력과 무장을, 요청합니다.' 코시긴: '이건 매우 복잡한 문제입니다.' 타라키: '당신들이 협의하는 사이 헤라트는 함락될 것입니다.' (1979년 3월 18일, 헤라트 봉기 와중의 전화 통화)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PDPA)의 창립 서기장이자 1978년 4월 혁명으로 수립된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의 초대 혁명평의회 의장 겸 총리. 소작농 출신으로 봄베이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접했고, 귀국 후 파슈툰어 첫 사회소설 『방의 방랑』을 쓴 작가 출신 정치인이었다. 집권 후 급진적 토지개혁과 세속화 정책을 추진했으나 농촌의 전통적 반발로 무장 봉기가 확산되었고, 소련에 반복적으로 군사 개입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1979년 9월 후계자 하피줄라 아민에게 축출된 뒤 베개에 질식사당했으며, 그의 죽음은 두 달 뒤 소련의 침공을 초래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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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2–1937봄베이에서 무역회사 점원으로 일하며 야학에서 마르크스주의 접함
- 1940s–1958작가·언론인으로 활동, 파슈툰어 첫 사회소설 『방의 방랑』 발표
- 1952–1953주미 아프가니스탄 대사관 공보관
- 1965PDPA 창립, 초대 서기장 선출
- 1967PDPA 분열 후 칼크(민중)파 지도
- 1978.04–124월 혁명으로 혁명평의회 의장·총리 취임, 소련과 20년 우호조약 체결
- 1979.03헤라트 봉기 와중 소련에 군사 개입 요청, 거절당함
- 1979.09–10아민에게 축출되어 베개에 질식사당함
소련을 관료적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하고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을 세운 트로츠키주의 이론가
1950년, 한 줌의 지지자와 함께 《소셜리스트 리뷰》를 내면서 클리프 그룹이 내건 구호: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아닌, 국제 사회주의를.」 냉전의 두 진영을 모두 거부하겠다는 선언이자, 이후 반세기 동안 이 조류를 규정한 문장이었다.
본명 이가엘 글룩슈타인. 팔레스타인의 폴란드계 유대인 이민 가정에서 태어나 십대에 시온주의 좌파를 떠나 트로츠키주의자가 되었고, 반전 활동으로 영국 위임통치 당국에 1년간 수감된 뒤 1947년 영국으로 건너갔다. 1948년 「스탈린주의 러시아의 성격」에서 소련을 「타락한 노동자국가」가 아니라 관료적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하며 제4인터내셔널의 정통과 갈라섰고, 이 분석 위에 서방과 소련의 군비 지출이 전후 호황을 떠받쳤다는 「상시 군비경제」론과, 부르주아지도 노동계급도 아닌 지식인·군부가 혁명을 대행한다는 「빗나간 연속혁명」론을 얹었다. 1950년 《소셜리스트 리뷰》 그룹에서 출발한 그의 조직은 국제사회주의자들(IS)을 거쳐 1977년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이 되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네 권짜리 『레닌』, 네 권짜리 『트로츠키』를 남겼고, 영국 시민권을 끝내 얻지 못해 평생 무국적자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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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7오스만령 팔레스타인 지크론야코브에서 폴란드계 유대인 이민 가정의 이가엘 글룩슈타인으로 출생
- 1931–1933마파이 청년조직을 거쳐 포알레 시온으로, 시온주의 좌파 안에서 정치를 시작
- 1930년대 후반트로츠키주의·반시온주의로 전향, 팔레스타인의 소규모 트로츠키주의 그룹에서 활동
- 1939영국 위임통치 당국에 체포되어 아크레 감옥에서 12개월 복역
- 1945남아프리카 출신 사회주의자 하니 로젠버그와 결혼
- 1947영국으로 이주했으나 체류 허가를 얻지 못해 아일랜드로 밀려나 더블린에서 활동
- 1948「스탈린주의 러시아의 성격」 발표, 소련을 관료적 국가자본주의로 규정
- 1950《소셜리스트 리뷰》 그룹 창립: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아닌」
- 1952영국 재입국 허가를 받아 런던에 정착
- 1959『로자 룩셈부르크』 출간, 토니 클리프라는 필명을 쓰기 시작
- 1962–1963그룹을 국제사회주의자들(IS)로 개편, 「빗나간 연속혁명」론 정식화
- 1977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 창당
- 1975–1993네 권짜리 『레닌』과 네 권짜리 『트로츠키』 집필
- 2000.04.09런던에서 심장 수술 뒤 사망, 무국적자로 생을 마침
1975년 사이공 점령을 지휘하고 1979년 캄보디아 침공과 중국과의 국경 전쟁을 이끈 장군
1975년 4월 사이공·자딘 해방 작전의 사령관으로서 남베트남 정부를 무너뜨린 공세를 지휘했다.
하노이 근교 뜨리엠 출신으로 1936년 공산당에 들어갔다. 디엔비엔푸 전투를 치렀고, 1953~1954년과 1954~1978년 베트남 인민군 총참모장을 지냈다. 1975년 봄 공세를 현지에서 지휘해 사이공 함락을 이끌었다. 이어 크메르루주 캄보디아 침공과 1979년 중국과의 국경 전쟁을 지휘했다. 1980년 보응우옌잡의 뒤를 이어 국방장관이 되어 1987년까지 재임했고, 1976~1986년 정치국원이었다. 2002년 하노이에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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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7인도차이나 공산당에 가입했다.
- 1953–1978베트남 인민군 총참모장을 지냈으며, 1954년 정전위원회 베트남 측 대표단장으로 잠시 직무를 중단했다.
- 1971–19751971년 남부 라오스, 1972년 찌티엔, 1975년 떠이응우옌 작전을 직접 지휘·지도했고, 4월 사이공·자딘 작전 사령관이 되었다.
- 1980–1986국방장관을 지냈다.
자기 나라에 소련 탱크를 불러들인 초대장에 서명한 당 이념 비서
반역 혐의로 기소된 뒤 빌랴크는 "나는 브레즈네프에게 편지를 쓴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초청장은 개인이 아니라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앞으로 보내졌기 때문이라는, 말장난에 가까운 항변이었다.
루신족 출신의 재단사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정치국원이 된 네오스탈린주의자. 1968년 프라하의 봄 당시 보수파 '건전한 세력'의 핵심으로, 바르샤바조약군 개입을 요청하는 초청장에 서명한 5인 중 한 명이었다. 침공 후 후사크 체제의 이념 책임자로서 '정상화'의 교리적 기초가 된 「위기 발전의 교훈」(1970)을 기초하고 반체제 탄압을 정당화했으며, 1989년 벨벳 혁명으로 축출될 때까지 당내 최강경 노선을 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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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7루신족 가정 출생, 재단사 수업
- 1936–45공산계 노조 가입, 재단사 노동, 슬로바키아 민족봉기 참가
- 1954–62당 고등정치학교 졸업, 프레쇼프 지역당 서기, 교육·문화 담당
- 1962–68슬로바키아 공산당 중앙위 이념 담당 서기
- 1968.1–8슬로바키아 당 제1서기, 4월 KSČ 정치국원, 바르샤바조약군 초청 서한 서명
- 1968–88KSČ 정치국원 겸 중앙위 서기: 대외정책·이념 총괄
- 1970「위기 발전의 교훈」 기초, 정상화의 교리적 헌장
- 1988.12정치국·서기직 해임, 1989년 당에서 제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