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프리카인들은 사회주의로 '개종'될 필요도, 민주주의를 '배울' 필요도 없다. 둘 다 우리의 과거 — 우리를 낳은 전통 사회 — 에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 1962년 에세이 「우자마」
탄자니아의 독립운동 지도자, 건국 대통령, 그리고 아프리카 사회주의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이론가. 1954년 TANU를 창당해 비폭력 독립투쟁을 이끌었고, 1961년 독립을 성취했다. 1967년 아루샤 선언으로 전통적 공동체성을 현대 사회주의와 접목한 독자적 발전 모델인 우자마(Ujamaa)를 제시하고 은행·산업 국유화와 무상교육 확대를 추진했다. 집권 기간 내내 남아프리카 해방운동을 후원했으며 비동맹운동의 중심 인물로 활약했다. 1985년 스스로 권좌에서 물러나 아프리카 지도자로서는 드물게 평화적 정권 이양을 실현했고, 말년에는 부룬디 내전 중재에 헌신했다.
헤게뒤시 언드라시는 헝가리 공산주의 정치가이자 사회학자로, 라코시 체제의 충실한 간부에서 체제 비판적 연구자로 이동했다. 라코시와 게뢰의 후원으로 총리가 되었지만, 1956년 혁명 때 소련군 개입 요청서에 서명하며 마비된 지도부의 정치적 책임을 떠안았다. 모스크바로 피신했다가 귀국한 뒤 사회학 연구를 이끌었고,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에 항의한 뒤 당에서 축출되었다.
코파치 샨도르는 금속 노동자와 반나치 저항 활동가 출신의 헝가리 경찰 지휘관으로, 국가기구 안에서 개혁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부다페스트 경찰청장으로서 1956년 10월 23일 비무장 시위대에 발포하라는 명령을 거부했고, 봉기 세력과 협력하며 국가근위대 부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체포되어 너지 임레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1963년 사면으로 석방되었고, 훗날 회고록으로 혁명의 내부 경험을 증언했다.
2007년 BBC 베트남어방송 인터뷰에서 "애국에는 백 가지 길이 있다. 베트남의 조국은 한 사람, 한 당, 한 집단만의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1975년 이후 남부에서 당의 '중대한 실수'를 인정하며 정치범과의 대화와 민족 화해를 촉구했다.
베트남의 정치인·경제 개혁가. 1922년 메콩델타 빈롱 성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939년 인도차이나 공산당에 입당했고, 대프랑스·대미 항쟁에 참전했다. 1976~1982년 호찌민시 당 책임자, 1982~1991년 부총리를 지냈으며 총리 재임기(1991~1997)에 도이머이 개혁을 추진해 베트남의 대외 개방을 이끌었다. 2008년 6월 11일 싱가포르에서 별세했다.
1982년 6월 크메르루주·손산의 KPNLF와 함께 반베트남 연합정부를 세우고 그 수반이 되어 유엔의 캄보디아 대표권을 유지했다.
캄보디아의 국왕·국가원수·총리를 지냈다. 1941년 프랑스 식민지 아래 즉위해 1953년 독립을 이끌었고 1955년 양위한 뒤 정치에 들어갔다. 1970년 축출됐다가 1975~1979년 크메르루주 아래 가택 연금됐고, 1982~1991년 크메르루주와 연합한 저항 정부를 이끌었으며 1993년 왕으로 복위해 2004년 다시 양위했다.
“마르크스주의는 행동의 지침이지 경직된 도그마가 아니다.” — PKI 간부들에게 반복한 말
인도네시아 공산당(PKI) 서기장(1951–1965). 수카르노의 마르해니즘 노선 아래서 노동자·농민·여성·청년·문화 부문 대중조직을 체계적으로 건설했고, 1955년 총선에서 PKI를 인도네시아 최대 정당으로 만들었다. 당원 300만 명에 이르는 세계 3위 공산당을 이끌었으나, 1965년 9·30운동 직후 수하르토의 반공숙청 속에서 당과 함께 처형되었다.
1967~1975년 남베트남 대통령으로 파리 협정에 반대하고 사이공 함락 직전 사임한 장군
1965년 남베트남 군사정권을 이끈 응우옌반티에우는 1967년 대통령이 되어 1975년까지 재임했다. 1975년 4월 21일 사임하며 미국이 남베트남을 배신했다고 비난하고 국외로 떠났다.
판랑 출신으로 1945년 베트민에 들어갔다가 한 해 만에 나와 베트남국 군대에 들어갔다. 1963년 11월 지엠을 무너뜨린 쿠데타에 가담해 장군이 되었고, 1965년 군사정부의 명목상 국가원수가 되었다. 1967년 부정 선거로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1971년에는 경쟁자가 모두 빠진 단독 출마로 재선되었다. 1973년 파리 협정에 반대했으나 서명했다. 1975년 4월 21일 미국이 남베트남을 배신했다고 선언하며 사임해 타이완으로 떠났고, 뒤에 미국 보스턴 근교에서 살다 2001년 숨졌다.
1984년 8월 RYaN 회의에서 그는 서방의 핵공격 징후보다 ‘실제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는 문제를 제기했다.
마르쿠스 볼프는 나치 박해를 피해 소련으로 망명한 뒤 독일민주공화국의 대외정보기관을 이끈 공산주의 관료이자 정보 책임자였다. 그는 1952년부터 1986년까지 슈타지 해외정보국 HVA를 지휘하며 서독 정치·군사·경제를 겨냥한 첩보와 공작을 조직했다. 1980년대 초 소련이 핵 선제공격 공포 속에서 RYaN 작전을 확대하자, 볼프는 협력을 유지하면서도 현장 정보가 실제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는 긴장을 드러냈다. 독일 통일 뒤 그는 해외 망명과 재판을 거쳤고, 자신의 국가보안 활동에 대한 책임과 사회주의의 개혁 가능성을 회고록과 공개 발언으로 다뤘다.
리콴유는 1954년 인민행동당을 공동 창당하고, 1959년부터 1990년까지 싱가포르 총리를 지냈다. 말라야와의 합병을 추진해 1963년 말레이시아 성립에 참여했으나, 싱가포르는 1965년 연방에서 분리되어 독립했다. 그는 산업화와 공공주택·교육 확충을 이끌었고, 동시에 명예훼손법과 재판 없는 구금을 활용하고 언론·집회·노동 활동 및 시민적 자유를 제한했다. 1978년 덩샤오핑과 만나 베트남 문제를 논의했으며, 이후 아세안 내에서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을 반대하는 외교에 관여했다.
1989년 모스크바 협상에서 그는 당의 목표를 “민주적 사회주의, 자치, 의회 민주주의, 경제 민주주의”라고 제시했다.
녜르시 레죄는 헝가리의 경제학자이자 사회주의권 개혁 정치가로, 계획경제를 사회적 통제와 경제적 효율성의 결합으로 바꾸려 했다. 그는 1968년 신경제메커니즘을 이끈 뒤 정통파의 반발로 영향력을 잃었지만, 개혁의 성과와 한계를 함께 안고 1989년 정치 전환의 중심으로 돌아왔다. 1989년 6월 헝가리 사회주의 노동자당 의장으로 선출되어 집단 지도체제를 이끌었고, 10월 창당된 헝가리 사회당의 초대 의장이 되었다. 그의 경력은 사회주의를 민주화하고 시장기제를 도입하려 한 시도가 당의 해체와 다당제 전환으로 이어진 역사적 긴장을 보여 준다.
1972년 파판치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인들은 마차 대열을 홀로 앞서 달리는 카우보이를 좋아합니다. 이 낭만적인 캐릭터는 제게 꼭 맞습니다"라고 말해 닉슨을 격노시켰다.
나치 독일을 피해 15세에 미국으로 이주한 유대인 난민 출신으로, 하버드대에서 현실주의 외교 이론을 정립하고 닉슨·포드 행정부에서 국가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을 지냈다. 소련과의 데탕트를 주도하며 '연계' 전략을 고안, 도브리닌 주미 소련대사와의 비밀 배후채널을 통해 1972년 SALT I과 ABM 조약을 성사시키는 결정적 외교를 펼쳤다. 중국 비밀 방문으로 미중 화해의 문을 열고 파리 평화협정을 중재해 노벨 평화상을 받았으나, 캄보디아 폭격과 제3세계 개입으로 전쟁범죄 논란 역시 끌어안은 복합적 유산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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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1943나치 독일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 시티칼리지에서 회계학 수학 후 미군 입대
1943–194984보병사단 정보장교로 유럽 전선 참전, 방첩대 요원으로 게슈타포 색출 및 탈나치화 임무
1950–1969하버드대 정치학 교수, 국방연구프로그램 소장; 록펠러·닉슨 캠페인 외교 고문
1969–1975국가안보보좌관: 데탕트·대중국 개방·SALT I 협상 주도, 도브리닌과의 배후채널 운영
1971–1972중국 비밀 방문으로 마오쩌둥·저우언라이와 회담, 닉슨 방중 길을 열다
1973–1977국무장관: 파리 평화협정, 노벨 평화상(1973), 중동 셔틀 외교; 칠레 쿠데타 연루
말년에 리흐타는 예측 연구팀을 만들려 했으며, 자신의 말로는 "우리를 정치적 저주에서 벗어나게 하고 사회를 공식적으로 탐구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체코슬로바키아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로, '과학기술혁명' 개념을 정립하고 60인의 공동연구를 이끌어 『갈림길에 선 문명』(1966)을 출간했다. 이 저작은 중앙집권적 계획은 과학기술 시대에 낡은 방식이라 주장하며 프라하의 봄 행동강령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고, 그가 만든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는 1968년 개혁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바르샤바조약군 침공 이후 리흐타는 후사크의 '정상화'에 순응하여 철학·사회학 연구소장으로 동료 학자들의 숙청을 주도했고, 1977년에는 헌장 77과 얀 파토치카를 공격하는 언론 캠페인에 가담했다.
1980년 8월 22일, 그는 파업 요구안의 서면 접수를 인정하며 정부와 그단스크 사업장간 파업위원회의 공식 협상을 열었다.
미에치스와프 야기엘스키는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공산당 관료이자 경제 관료로, 농업 정책과 국가 계획을 담당했다. 1980년 노동자 파업이 확산되자 그는 정부의 협상 대표로 나서 루블린의 7월 파업을 정리하고, 그단스크에서는 독립 노조 인정으로 이어진 합의를 체결했다. 그의 경력은 사회적 요구를 제한된 양보로 관리하려 한 체제가 결국 공개적인 노동자 대표성과 마주한 과정을 보여 준다.
가장 널리 읽힌 작품은 1974년 『마스터 타모다』로, 거만하고 식민지적으로 물든 말쟁이 '타모다 선생'은 앙골라 문학에서 하나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나를 걱정하게 하는 것은 민중의 사회적 처지"라고 말했다.
필명 우안넹가 시투로 알려진 앙골라의 간호 보조원·민족주의자·작가. 1924년 8월 29일 이콜루 이 벵구 주 카롬보로카에서 태어났다. 1947년 딩게에서 노동 조건 개선을 위한 파업을 조직하고 의료 보조원 자격을 취득했으며, 1957년부터 루안다 외곽에서 독립을 위한 비밀 활동을 벌이고 1958년 앙골라 해방군(ELA)에 들어갔다. 1959년 PIDE에 체포되어 징역 12년을 선고받고 1962년부터 1970년까지 카보베르데 타라팔 수용소에 갇혔으며, 그곳에서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1970년 가석방으로 MPLA에 복귀해 루안다 시 조직부를 이끌었고 1974년부터 1988년까지 중앙위원을 지냈다. 2014년 2월 13일 루안다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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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19701942년부터 카테테-루안다에서 위생 요원으로 일했고, 1947년 간호 보조원 자격을 취득한 뒤 딩게·쿠이투·칼룸부·문구·카비리·봉 제주스 두 콴자와 벵겔라·루반구 병원의 보건소에서 근무했다. 1947년 딩게에서 노동 조건 개선을 위한 파업을 조직했고, 1959년 PIDE에 체포되어 재판과 유죄 판결 후 1962년부터 1970년까지 카보베르데 타라팔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1957–1958루안다 외곽에서 당시 태동하던 MPLA와 '에스팔랴 브라자스' 그룹과 연결된 전단 위원회를 통해 앙골라 독립을 위한 비밀 정치 활동을 벌였고, 1958년 앙골라 해방군(ELA)에 들어갔다.
1970–19881970년 가석방 후 MPLA에 복귀해 같은 해 루안다 시 조직부(DOM)를 이끌었고, 1974년 중앙위원이 되어 1988년까지 재임했으며 한때 당 지도위원회 의장을 맡았다. 독립 후 혁명평의회에 임명되었다.
1979–1983루안다 주 위원 1979–1980년, 보건부 장관 1980–1983년.
1983–2000s체코슬로바키아·폴란드·동독 주재 앙골라 인민공화국 대사(동독에서는 정치학도 공부)를 역임했고, MPLA 소속 국민의회 의원을 지냈으며 나이를 이유로 물러났다. 2009년에는 MPLA 소속 최고령 의원으로 보도되었다.
몰타에서 고르바초프와 냉전 종식을 선언했지만, 신중함이 거의 역사를 놓칠 뻔했던 미국 대통령
몰타 공동 기자회견에서 부시는 말했다. '우리는 항구적 평화를 실현할 수 있으며 동서 관계를 지속적 협력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고르바초프 의장과 제가 바로 이곳 몰타에서 시작한 미래입니다.'
조지 H. W. 부시는 제2차 세계대전의 해군 조종사에서 석유 사업가를 거쳐 미국 제41대 대통령이 된 인물로, CIA 국장·유엔 대사·중국 주재 대표를 두루 지낸 외교 경험을 바탕으로 냉전의 마지막 4년을 이끌었다. 1989년 취임 직후 대소 정책 재검토라는 '부시 휴지기'로 고르바초프를 조바심나게 했으나, 그해 12월 몰타 회담에서 두 정상은 냉전의 종식을 공동으로 확인했고, 이듬해 독일 통일을 지지하며 유럽의 새 질서를 다졌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에는 다국적군을 조직해 걸프전으로 응수했으나, 불황 속에 '새로운 세금은 없다'는 공약을 깨면서 1992년 재선에 실패했다.
정치적 패배의 이유를 묻자, 슈트로우갈은 이렇게 답했다: '나는 반체제 인사들을 과소평가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주의 정치인으로, 1970년 1월 올드르지흐 체르니크를 대신해 총리에 오른 뒤 18년간 '정상화' 내각을 이끌었다. 법학을 전공하고 농업장관과 내무장관을 거친 당 관료였으며, 프라하의 봄 시기 부총리를 지내다 소련 침공 후 후사크의 반개혁 노선에 합류했다. 1980년대 후반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를 지지하며 강경파 야케시 당 총서기와 충돌해 실각했고, 벨벳 혁명 후 KSČ에서 제명되었다. 말년에는 국경 사망 사건으로 기소되었으나 치매로 중단된 채 2023년 98세로 사망했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후, 카터는 1980년 1월 국정연설에서 '페르시아만 지역에 대한 외부 세력의 지배 시도는 미합중국의 중대한 이익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루지야 땅콩 농장에서 자란 침례교도로, 해군 핵잠수함 장교를 거쳐 남부의 인종차별 철폐를 공약한 '뉴사우스' 주지사가 되었다. 1976년 워싱턴 아웃사이더를 내세워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캠프 데이비드 협정과 파나마 운하 반환,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국교 정상화를 성사시켰다. 1979년 6월 빈에서 브레즈네프와 SALT II에 서명하며 데탕트를 정점으로 이끌었으나, 같은 해 12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조약 비준을 철회하고 카터 독트린을 선언하며 데탕트의 종막을 알렸다. 퇴임 후 카터 센터를 설립해 인권과 공중보건, 분쟁 중재에 헌신했으며, 200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는 훗날 이렇게 적었다. 〈전면 기습 공격에 반대하는 가장 강력한 논거는, 그것이 역(逆)진주만이 되어 전 세계의 눈에 미국의 이름을 더럽히리라는 점이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남동생이자 가장 신임받는 정치 고문으로, 35세에 법무장관이 되어 조직범죄 소탕과 시민권 보호에 앞장섰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초기에는 침공을 선호했으나, 해상 봉쇄 측으로 전환한 뒤 위기 후반 도브리닌 소련 대사와의 비밀 회담에서 튀르키예 미사일 철수 약속을 전하며 타결의 열쇠가 되었다. 형의 암살 후 상원의원으로 베트남 전쟁 반대와 빈곤 퇴치에 나섰고, 1968년 대선 경선 중 암살당했다.
「감옥에서는 적의 움직임만 보인다. 감옥은 싸움을 하기에 가장 어려운 곳이다.」 — 《117일》(1965)
남아공 공산당과 ANC에서 활동한 백인 반아파르트헤이트 운동가이자 언론인. 진보 매체 《가디언》 편집장으로 인종차별 정책을 고발했고, 자유헌장 기초위원으로 참여했다. 반역죄 재판 피고를 거쳐 90일 구금법 첫 백인 여성 수감자가 되었고, 독방 체험을 《117일》로 남겼다. 망명 후 아프리카 해방운동을 연구했으며, 모잠비크에서 아파르트헤이트 경찰의 소포 폭탄에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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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위트워터스랜드 대학 사회과학 학사, 진보학생연맹 창립 참여
1946–1950s《가디언》 편집장 — 신문 금지 후 《클라리온》《뉴 에이지》 등으로 재창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