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현재

냉전과 탈식민 359명

인민민주주의 국가와 그 개혁가·반체제 인사, 탈식민과 민족해방 운동, 냉전기 각국의 정치가와 반공 정권, 1956·1968·1989년과 그 이후의 사람들.

프라무디아 아난타 투르

Pramoedya Ananta Toer
문학·예술 인도네시아 인도네시아 1925–2006 ○ 자연사

부루 섬에서 입으로만 지은 사부작, 노벨문학상 8회 후보

"모든 부정의는 싸워야 한다, 비록 자기 마음속에서뿐일지라도 — 그리고 나는 싸웠다." — 『망명』, 안드레 블첵·로시 인디라와의 대화

식민지 감옥에서 첫 소설을 쓰고, 독립 후에는 레끄라(Lekra)에서 문화운동을 이끈 인도네시아 최대의 작가. 1965년 쿠데타 뒤 수하르토에 의해 부루 섬에 14년간 수용되었고, 연필조차 금지된 수용소에서 동료 수감자들에게 구술해 「인간의 대지」로 시작되는 부루 사부작을 완성했다. 평생 금서 작가로 살았으나, 그의 작품은 40개 언어로 번역되며 반식민·반권위주의 문학의 기념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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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5–1947독립전쟁에 참전, 자카르타 주둔 — 반식민 선전 활동
  • 1947–1949네덜란드군에 체포, 부킷두리 감옥에서 첫 소설 『도망자』 집필
  • 1950–1964레끄라에서 활동, 『타락』 등 집필 — 소련·중국 문화교류 참여, 고리키·톨스토이 번역
  • 1960중국계 차별을 비판한 『화교』로 수카르노 정권하 9개월 구금
  • 1965–1979수하르토 쿠데타로 체포 — 부루 섬에서 정치범으로 14년 구금, 구술로 부루 사부작 완성
  • 1979–1992석방 후 자카르타 가택연금 — 『해안의 소녀』, 『벙어리의 독백』 출간
  • 1995–2006막사이사이상·후쿠오카 문화상 수상, 노벨문학상 8회 후보

라미즈 알리아

Ramiz Alia

호자 이후의 알바니아

호자가 의사에게 알리아를 소개하며 말했다. "이 친구 같은 젊은 동지가 이어받을 겁니다."

1985년 호자 사후 알바니아 노동당의 지도자가 됐다. 기존 체제를 유지하려 하면서 제한적 대외 개방을 추진했으나 경제위기와 대중 시위 속에서 다당제 전환을 수용했다. 1991년 대통령이 되었고 1992년 퇴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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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3알바니아 공산당 입당
  • 1948중앙위원회 위원
  • 1956정치국 후보위원
  • 1961정치국 정식 위원
  • 1982인민의회 상임위원회(국가원수) 의장
  • 1985알바니아 노동당 제1서기
  • 1991알바니아 공화국 대통령
  • 1992대통령직 사임

체스와프 얀 키슈차크

Czesław Jan Kiszczak
보안·정보·치안 폴란드 폴란드 폴란드 1925–2015 ○ 자연사

계엄령 실행자에서 원탁회의 공동의장이 된 폴란드 내무장관

원탁회의 합의문 서명 후 키슈차크는 '승자도 패자도 없다. 폴란드 국민이 승자다'라고 말했다.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군인·공산당 정치인으로, 1981년 내무장관에 임명되어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와 함께 계엄령을 기획·집행하며 연대노조 탄압을 주도했다. 1989년에는 정부 측 원탁회의 공동의장으로서 레흐 바웬사와 협상하여 연대노조 재합법화와 부분 자유선거의 길을 열었다. 선거에서 연대가 압승한 후 총리로 지명되었으나 연대의 거부로 불과 3주 만에 사임했고, 타데우시 마조비에츠키 내각에서 부총리 겸 내무장관으로 잠시 머문 뒤 정계에서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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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3–1979군사정보부장 (총참모부 제2국)
  • 1979–1981내부군사부장 (WSW)
  • 1981–1990내무장관
  • 1981–1983구국군사평의회 위원
  • 1982–1990폴란드 통일노동당 정치국 위원
  • 1989원탁회의 정부 측 공동의장
  • 1989.8총리 지명 (내각 구성 실패)
  • 1989–1990부총리 겸 내무장관
정부·행정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계 1925–2020 ○ 자연사

냉전 종식기의 신중한 전략가

몰타 회담은 시기상조일 수 있다고 우려했지만, 결국 회담의 핵심 참모로 참여했다.

브렌트 스코크로프트는 미국 공군 장교 출신의 국가안보 관료로, 대통령과 외교·군사 관료 사이의 정책 조정을 중시한 현실주의적 전략가였다. 그는 제럴드 포드와 조지 H. W. 부시 행정부에서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내며 냉전 말기의 군비·유럽 외교를 조율했다. 1989년 몰타 회담에는 성급한 정상회담이 기대만 키울 수 있다며 처음에는 신중한 입장을 보였지만, 회담이 열리자 미소 관계의 전환을 관리하는 핵심 참모로 참여했다. 이후에도 동맹과 국제기구를 중시하며 이라크 침공과 일방주의를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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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7미국 육군사관학교 졸업, 미국 공군 소위 임관
  • 1953컬럼비아 대학교 국제관계학 석사
  • 1967컬럼비아 대학교 국제관계학 박사
  • 1972–1973리처드 닉슨 대통령 군사보좌관
  • 1973–1975국가안보 담당 대통령 부차관보
  • 1975–1977제럴드 포드 대통령 국가안보보좌관
  • 1989–1993조지 H. W. 부시 대통령 국가안보보좌관
  • 2001–2005대통령 외국정보자문위원회 의장

행동강령 초안을 쥔 이념간부, 침공 뒤에는 정상화의 충복

1968년 초, 아우에르스페르크는 프라하의 자기 사무실에서 밀란시르·리흐타·시크와 함께 행동강령 초안을 써 내려갔다.

프라하의 봄을 이끈 행동강령의 제5장을 직접 집필하고 실무그룹을 이끈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이념간부였다. 노보트니의 비서실장으로 정치 경력을 쌓았고, 1965년부터 이념부장으로 문화·학문 영역에 대한 검열을 주도했다. 1968년 4월 행동강령 초안을 완성했으나 침공 직후에는 드레스덴의 친소 방송에 참여했고, 후사크 체제에서 국제정치부장과 네덜란드 대사를 지내며 정상화를 충실히 집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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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1954프라하 정치사회대학 국제관계학부 조교
  • 1956ÚV KSČ 국제문제 담당 컨설턴트
  • 1963–1964안토닌 노보트니 제1서기 비서실장
  • 1965–1968ÚV KSČ 이념부장, ÚV 후보위원
  • 1969–1974ÚV KSČ 국제정치부장, ÚV 정위원
  • 1971–1986연방의회 민족원 의원
  • 1974–1986『평화와 사회주의의 문제들』 편집위원회 KSČ 대표
  • 1986–1987주네덜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대사

미에치스와프 프란치셰크 라코프스키

Mieczysław Franciszek Rakowski
정치·당 지도 폴란드 폴란드 폴란드 1926–2008 ○ 암

1989년 선거에서 국민이 거부한 폴란드의 마지막 공산당 총리

1983년 그단스크 조선소에서 연대노조 노동자들에게 둘러싸여, 바웬사가 '수상, 폴란드인끼리 이야기합시다'라고 하자 라코프스키는 '박사와 박사로서 이야기합시다'라고 답했다.

폴란드 통일노동당(PZPR)의 개혁파 정치인이자 『폴리티카』 주간의 편집장을 24년간 맡은 언론인이다. 1988년 10월 총리가 되어 원탁회의와 경제개혁(일명 빌체크법)을 추진했으나, 1989년 6월 4일 선거에서 전국명부에 올랐음에도 50%를 넘지 못해 낙선하며 체제의 민낯을 드러낸 인물이 되었다. 선거 참패 후 PZPR의 마지막 제1서기가 되어 1990년 1월 당 해산을 주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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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폴리티카』 편집장
  • 1972–1989세임 의원
  • 1981–1985야루젤스키 내각 부총리
  • 1988–1989폴란드 인민공화국 총리
  • 19896월 4일 선거에서 전국명부 낙선
  • 1989–1990PZPR 마지막 제1서기, 당 해산 주재
  • 1990–2008『지시』 월간지 편집장, 회고록 집필

루드비크 바출리크

Ludvík Vaculík
문학·예술 체코슬로바키아 체코인 1926–2015 ○ 자연사

20년간 단 하나의 인간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다고 선언하고 「이천 마디 말」로 저항한 체코의 작가

「지난 20년 동안 이 나라에서는 단 하나의 인간적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다」고 1967년 작가대회에서 선언한 바출리크 앞에서 당 대표단은 퇴장했고 청중은 긴 박수를 보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작가이자 공산당원이었다가 1967년 제4차 체코슬로바키아 작가대회에서 노보트니 정권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연설로 당에서 축출되었다. 1968년 6월 대표작 「이천 마디 말」을 발표하여 시민의 자발적 행동과 개혁 심화를 촉구했고, 이는 프라하의 봄을 상징하는 문헌이 되었으나 소련의 개입 구실로도 이용되었다. 침공 이후 출판이 전면 금지되었으나, 지하 출판사 페틀리체를 설립하여 하벨·클리마 등 금지 작가들의 작품을 17년간 펴냈다. 1977년 헌장 77의 서명자로서 체제 비판을 이어갔고, 1989년 이후 『리도베 노비니』의 고정 칼럼니스트로 매주 체코 사회를 논평하며 2015년까지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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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5–1967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당원
  • 1959–1965체코슬로바키아 방송 청년 프로그램 편집자
  • 1965–1969『리테라르니 노비니』(후에 『리테라르니 리스티』) 편집자
  • 1967제4차 체코슬로바키아 작가대회 연설로 당에서 축출
  • 1968「이천 마디 말」 선언문 작성 및 발표
  • 1969–1989출판 금지, 지하 출판 활동
  • 1973–1990사미즈다트 출판사 페틀리체 설립·운영
  • 1977헌장 77 서명

피델 카스트로

Fidel Castro
정부·행정 쿠바 쿠바 쿠바 1926–2016 ○ 자연사

서반구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을 이끌고 47년간 제국주의에 맞선 지도자

“역사는 나에게 무죄를 선고할 것이다.” — 몬카다 재판 변론(1953)

서반구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킨 쿠바 혁명가. 몬카다 병영 습격으로 바티스타 독재에 맞서 투쟁을 시작했고, 1959년 게릴라전으로 정권을 장악한 후 47년간 미국의 봉쇄와 압력 속에서도 사회주의 쿠바를 지켜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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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몬카다 병영 공격 — "역사는 나에게 무죄를 선고할 것이다"
  • 1954법정 최후진술을 《역사는 나에게 무죄를 선고할 것이다》로 비밀 출간
  • 1956–1959그란마 호 상륙, 시에라마에스트라 게릴라전
  • 1959바티스타 정권 전복 — 혁명정부 수립
  • 1961–1962피그스만 격퇴, 미사일 위기
  • 1976–2008국가평의회 의장
  • 2008–2016라울에게 이양, 2016년 사망

누온 체아

នួន ជា
정치·당 지도 민주 캄푸치아 캄보디아 캄보디아 1926–2019 ○ 복역 중 병사

캄푸치아 공산당 부서기, '2인자'

2018년 11월 참·베트남인 집단학살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항소심 계류 중이던 2019년 8월 4일 복역 중 사망했다. 최고재판부는 판결을 무효로 할 법적 근거가 없다며 원심 판단 기록을 유지했다.

캄보디아의 혁명가로 캄푸치아 공산당(크메르루주) 부서기 겸 최고 이념가였다. 폴 포트의 '2인자'로 불렸고 민주캄푸치아 인민대표의회 의장과 정부수반 대리를 지냈다. 2014년 반인륜범죄로, 2018년 11월 16일 베트남인·참 집단학살과 제네바협약 중대 위반으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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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0–1998캄푸치아 공산당 부서기 겸 최고 이념가
  • 1970북베트남의 캄보디아 개입 교섭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 1976–1979민주캄푸치아 인민대표의회 의장, 정부수반 대리
  • 199812월 캄보디아 정부군에 투항했다
  • 20079월 19일 체포되었다
  • 20148월 7일 사건 002/01에서 반인륜범죄로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2016년 11월 23일 항소가 기각되었다
  • 201811월 16일 사건 002/02에서 참·베트남인 집단학살 등 유죄를 선고받고 두 종신형이 하나로 병합되었다

바실레 밀레아

Vasile Milea
군사·지휘 루마니아 루마니아 루마니아 1927–1989 ✕ 자살

차우셰스쿠의 마지막 국방장관, 그의 죽음이 군대의 혁명 합류를 촉발했다

「나는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로부터 민중에게 발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나는 발포 명령을 내릴 수 없다」

1949년 보병장교로 임관해 루마니아 공산군에서 승진을 거듭, 1985년 차우셰스쿠에 의해 국방장관에 올랐다. 1989년 12월 혁명이 발발하자 티미쇼아라 진압을 지휘했지만 17일 정치집행위원회에서 '실탄을 지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차우셰스쿠에게 '총살형에 처해야 한다'는 공개 질책을 받았다. 22일 아침 차우셰스쿠와의 마지막 대면 직후 CC 청사에서 권총으로 가슴을 쏴 사망했고, 그의 죽음이 보도되자 루마니아군은 일제히 혁명 대열에 합류해 독재 정권 붕괴의 결정적 분수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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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보병장교 임관, 소위
  • 1950–1952군사아카데미 기갑·기계화 학부 수석 졸업
  • 1958재정비리로 사단장 해임·당 제명
  • 1960당 재입당, 전차장교학교 교장
  • 1965–1973제3군 사령관, 소장 → 중장
  • 1973–1978애국근위대 참모장
  • 1980–1985국방제1차관 겸 총참모장
  • 1985–1989국방장관

피터 프라이어

Peter Fryer
문학·예술 영국 영국인 1927–2006 ○ 자연사

당의 침묵과 현장을 맞바꾼 공산주의 저널리스트

노동자평의회 선거에서 “인민민주주의를 위해 우리는 사람을 뽑아 본 경험이 전혀 없습니다”라는 말을 듣고 그는 돌아섰다.

피터 프라이어는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저술가이자 기자로, 공산주의 운동 내부의 진실과 국제적 연대를 함께 추구했다. 1956년 헝가리에서 노동자와 학생의 봉기를 취재했지만 Daily Worker에 보낸 기사는 검열되거나 묵살되었고, 그는 『헝가리의 비극』으로 공식 노선에 맞섰다. 이 충돌은 그의 공산당 제명과 영국 공산주의 운동의 분열에 기여했으며, 이후 그는 흑인 영국사의 중요한 저술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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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청년공산주의자동맹 가입
  • 1943–1947Yorkshire Post 기자
  • 1945영국 공산당 입당
  • 1948–1956Daily Worker 의회·외신 특파원
  • 1956헝가리 혁명 취재, 『헝가리의 비극』 집필
  • 1957–1959The Newsletter 편집자, Socialist Labour League 창립 참여
  • 1984『Staying Power』 출간
  • 2006런던에서 사망

리처드 하이저

Richard Heyser
군사·지휘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927–2008 ○ 뇌졸중

6분 동안 928장을 찍어 세계를 핵전쟁 직전으로 몰아넣은 U-2 정찰 조종사

「나는 내가 이 모든 일을 시작한 사람으로 기억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평판을 원하지 않았다.」, 2005년 AP 통신 인터뷰에서

플로리다주 아팔라치콜라 출신으로 17세에 육군항공대에 입대해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서 전투 임무를 수행한 미 공군 조종사였다. 1962년 10월 14일 일요일 아침 쿠바 상공을 6분 동안 비행하며 촬영한 928장의 사진에서 소련의 SS-4 중거리탄도미사일이 확인되었고, 이 사진이 케네디 대통령의 책상에 올라가며 13일간의 핵전쟁 위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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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4미 육군항공대 입대
  • 1952공군 조종사 훈련 시작, 한국전쟁 전투 출격
  • 1957U-2 기종 전환 훈련 수료 (50번째 U-2 조종사)
  • 1957–1962제4080전략정찰비행단 U-2 조종사
  • 1962.10.14쿠바 상공 정찰비행(임무 3101), 소련 미사일 포착
  • 1960s베트남전쟁 두 차례 전투 배치
  • 1974중령으로 30년 복무 후 퇴역

타데우시 마조비에츠키

Tadeusz Mazowiecki
정부·행정 폴란드 폴란드 폴란드 1927–2013 ○ 자연사

동구권 최초의 비공산 총리가 된 연대노조의 가톨릭 지식인

우리는 최근 과거의 역사를 굵은 선으로 가른다. 우리는 지금부터 이 위기에서 폴란드를 구하기 위해 우리가 한 일에 대해서만 책임질 것이다.

가톨릭 평신도 지식인으로 1958년 독립 월간지 《비엥치》를 창간·주재하고, 1961년부터 1971년까지 '즈나크' 가톨릭 의원단 소속으로 의회에서 양심적 반대를 실천한 폴란드의 정치인이다. 1980년 그단스크 파업에서 연대노조 고문단을 이끌고 《티고드니크 솔리다르노시치》 초대 편집장을 맡았으며, 계엄령 아래 1년간 억류된 뒤 1989년 원탁회의 협상의 핵심 설계자로 활동했다. 1989년 8월 24일 동구권 최초의 비공산당 총리로 취임해 발체로비치 계획을 통한 급진적 시장 개혁을 단행했고, '굵은 선'으로 과거와의 단절을 선언했으며, 1990년 대선에서 바웬사에 패배한 뒤 민주연합을 창당해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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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1981《비엥치》 창간·편집장
  • 1961–1971'즈나크' 의원단 소속 의원
  • 1980그단스크 파업 연대노조 고문단장
  • 1981《티고드니크 솔리다르노시치》 초대 편집장
  • 1981–1982계엄령 아래 억류
  • 1989원탁회의 협상 핵심 인물
  • 1989–1991폴란드 총리
  • 1992–1995유고전범조사 유엔 특별보고관

스타니스와프 카니아

Stanisław Kania
정치·당 지도 폴란드 폴란드 폴란드인 1927–2020 ○ 자연사

타협을 모색하다 당권을 잃은 당 지도자

1981년 10월, 당 중앙위원회는 카니아를 물러나게 하고 야루젤스키를 제1서기로 선출했다.

스타니스와프 카니아는 폴란드 통일노동자당의 지도자로서 당의 통제와 사회적 요구 사이의 균열을 관리하려 했다. 1980년 8월 파업과 연대자유노조의 등장 뒤 그는 노조 및 가톨릭 세력과 대화를 모색했지만, 당 내부의 불신과 경제 위기는 타협의 공간을 좁혔다. 소련 지도부의 압박 속에서 1981년 10월 제1서기직에서 물러났고, 곧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가 뒤를 이었다. 1981년 계엄령 도입 책임으로 기소됐으나 2012년 무죄를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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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5폴란드 노동자당 입당
  • 1948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창립대회 대표
  • 1968–1971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중앙위원회 행정부장
  • 1971–1980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중앙위원회 서기
  • 1975–1981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정치국원
  • 1980–1981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82–1985폴란드 국가평의회 위원

응우옌티빈

Nguyễn Thị Bình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 외무장관으로 파리 협정에 서명한 유일한 여성이자 뒤에 베트남 부주석이 된 외교관

1969년 파리 평화회의에서 민족해방전선 대표단 부단장으로 활동했고, 같은 해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 외무장관이 되어 대표단을 이끌었다. 1973년 파리 협정에 서명했다.

사덱 성 출신으로 민족주의 지도자 판쩌우찐의 외손녀다. 1948년 공산당에 들어갔고 1951~1953년 프랑스 당국에 체포되어 사이공의 치호아 감옥에 갇혔다. 베트남 전쟁 동안 민족해방전선 중앙위원을 지냈고, 1969년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의 외무장관이 되어 파리 협상 대표단을 이끌었다. 1973년 파리 협정에 서명한 유일한 여성이다. 통일 뒤 교육부 장관을 지냈고, 1992~2002년 두 차례 베트남 국가부주석으로 선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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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베트남 공산당에 가입하고 풀뿌리 조직가로 활동했다.
  • 1951–1954프랑스 경찰에 체포되어 치호아 구금시설에 수감되었다가 건강이 악화된 채 석방되었다.
  • 1969민족해방전선 파리 대표단 부단장을 맡았고, 뒤이어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 외무장관 겸 파리 대표단장을 지냈다.
  • 1973파리 협정에 서명한 유일한 여성이었다.
  • 1976–1987교육부 장관을 지냈다.
  • 1992–2002베트남 국가부주석으로 두 차례 선출되어 재임했다.

체 게바라

Ernesto "Che" Guevara
군사·지휘 7월 26일 운동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1928–1967 ✕ 처형

청진기를 소총으로 바꾼 국제주의 혁명의 아이콘

“둘, 셋, 더 많은 베트남을 만들어라.” — 삼대륙회의에 보낸 메시지(1967)

아르헨티나 출신 마르크스주의 혁명가. 쿠바 혁명의 게릴라 사령관으로서 1959년 바티스타 정권 전복에 핵심 역할을 했다. 이후 국제 혁명 투쟁에 투신, 볼리비아에서 게릴라전을 이끌다 1967년 체포·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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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8–1953의대생 — 라틴아메리카 종단 여행
  • 1955멕시코에서 카스트로와 만남, 7·26 운동 합류
  • 1956–1959쿠바 게릴라전 사령관 — 산타클라라 함락
  • 1959–1965국립은행 총재, 산업부 장관
  • 1960《게릴라전》 출간
  • 1965–1967콩고·볼리비아 게릴라전
  • 1965논문 《쿠바에서의 사회주의와 인간》 발표
  • 1967.10볼리비아에서 생포, 이튿날 총살

스타니스와프 마티야

Stanisław Matyja
사회운동·조직 소속 미확정 폴란드 폴란드인 1928–1985 ○ 병사

포즈난 6월의 비공식 지도자가 된 목수

그는 후일 회고했다: "나는 분노한 나머지 가구용 칼을 들고 스피커 기둥에 올라가 전선을 끊으려 했다."

스타니스와프 마티야는 포즈난 체겔스키(ZISPO) 공장의 목수로, 동료들의 신임을 얻어 노동자 권리 수호의 대변인이 된 인물이다. 1956년 6월 바르샤바 협상에 나선 27인 대표단의 수장으로서 임금 인상과 세금 환급 약속을 받아 냈으나, 정부가 이를 하루 만에 번복하자 6월 28일 봉기의 비공식 지도자로 떠올랐다. 진압 후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겪고 공장에서 해고당했지만, 1980년 연대노조의 명예 회원이 되어 1981년 포즈난 십자가 추모비를 제막한 상징적 인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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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6–1949포즈난 건축공예학교에서 학업 재개
  • 1951체겔스키(ZISPO) 공장에 목수로 입사
  • 1953ZISPO 노동자 권리 침해에 최초로 항의하고 공장위원회 대표로 선출
  • 1956.06바르샤바 협상 27인 대표단 수장, 포즈난 6월 봉기의 비공식 지도자
  • 1958위조 혐의로 해고되며 '이리의 전표'를 받음
  • 1980연대노조 명예 회원
  • 1981.06.28포즈난 십자가 추모비 제막식 주역

테드 소렌슨

Ted Sorensen
정부·행정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928–2010 ○ 뇌졸중

쿠바 위기에서 케네디의 펜을 잡은 연설문 작성자, '격리'라는 길을 낸 사람

'그 유명한 구절을 당신이 썼습니까?'라는 질문에 소렌슨의 평생 대답은 '묻지 마시라(Ask not)'였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수석 연설문 작성자이자 측근 보좌관으로, 케네디는 그를 '나의 지적 혈액은행'이라 불렀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합동참모본부의 공습 주장에 맞서 해상 봉쇄를 지지했고, 10월 22일 대국민 TV 연설을 초안하며 '봉쇄(blockade)' 대신 '격리(quarantine)'라는 용어를 선택해 전쟁 선포의 법적 함정을 피했다. 후일 이 연설을 '지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케네디의 연설'이라고 평했으며, 흐루쇼프와의 비밀 서한 초안도 작성했다. 케네디 암살 후 린든 존슨의 '계속 나아갑시다' 연설을 기초하고 1964년 사임, 이후 변호사와 저술가로 활동하며 2008년 버락 오바마를 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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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1961존 F. 케네디 상원의원 수석 입법 보좌관
  • 1961–1964대통령 특별고문 겸 수석 연설문 작성자
  • 1964–1966저술가 (『케네디』 출간, 국제적 베스트셀러)
  • 1966–2010국제 변호사, Paul, Weiss 로펌
  • 1977CIA 국장 지명자 (인준 철회)

빅토르 아타나시에 스턴쿨레스쿠

Victor Atanasie Stănculescu
군사·지휘 루마니아 루마니아 루마니아 1928–2016 ○ 살인죄 15년형, 2014년 가석방

혁명의 아침에 편을 바꿔 독재자를 무너뜨린 장군

12월 22일 아침, 그는 절친한 군의관에게 부탁해 멀쩡한 왼쪽 다리에 깁스를 감고 혁명 진압에서 빠지려 했다.

루마니아 공산군 포병장교 출신으로 1986년 국방차관에 올랐다. 1989년 12월 22일 차우셰스쿠로부터 국방장관에 임명된 직후 군에 병영 복귀 명령을 내려 혁명의 흐름을 결정적으로 바꾸었고, 12월 25일 차우셰스쿠 부부의 즉결재판과 처형을 조직·집행했다. 혁명 후 국방장관과 국가경제장관을 지냈으나, 티미쇼아라 유혈 진압 책임으로 2008년 살인죄가 확정되어 15년형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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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시비우 포병장교학교 졸업
  • 1952–1981포병·군수 참모, 대령까지 승진
  • 1981–1986국방차관
  • 1986–1989국방제1차관
  • 1989.12.17–20티미쇼아라 봉기 진압 지휘차 파견
  • 1989.12.22국방장관 임명 직후 「명령 38호」로 군 병영 복귀, 혁명 합류
  • 1989.12.25차우셰스쿠 부부 즉결재판·처형 조직
  • 1990–1991국가경제장관 → 국방장관

소련을 아프간 늪으로 끌어들인 카터의 국가안보보좌관

그 비밀 작전은 탁월한 발상이었다. 그것은 러시아인들을 아프간 덫으로 끌어들였다… 소련이 국경을 넘던 날 나는 카터 대통령에게 썼다: 우리는 지금 소련에게 베트남 전쟁을 선사할 기회를 가졌다.

폴란드 출신의 미국 정치학자이자 외교 전략가로, 카터 행정부(1977–1981)에서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냈다. 소련 견제를 위한 인권 외교와 대중국 관계 정규화, 캠프데이비드 협정을 주도했으며, 카터 독트린으로 페르시아만 군사 개입 의지를 천명했다. 1979년 7월 3일, 소련 개입을 유발할 위험을 알리는 메모를 대통령에게 보내면서도 무자헤딘 비밀 원조 지시에 서명했으며, 훗날 "소련에게 베트남 전쟁을 선사할 기회"라 평했다. 냉전 후에는 《거대한 체스판》(1997)으로 유라시아 지정학과 NATO 확장을 주창하며 미국 외교에 지속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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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7–1981국가안보보좌관
  • 1973–19763극위원회 디렉터
  • 1966–1968국무부 정책기획위원회 위원
  • 1960–1972컬럼비아대학교 교수, 공산권연구소 소장
  • 1953–1960하버드대학교 교수
  • 1981–2017존스홉킨스대학교 SAIS 교수, CSIS 고문

하피줄라 아민

حفیظ‌الله امین

4월 혁명을 설계하고 3개월 만에 소련군의 총구 앞에 쓰러진 칼크파 실세

아민이 부관에게 소련군에 경고하라 명하자 부관은 '쏘는 쪽이 소련군입니다'라고 답했다. 아민은 재떨이를 집어던지며 외쳤다. '거짓말이다, 그럴 리 없어!'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PDPA) 칼크파의 실질적 2인자이자 1978년 4월 혁명의 군사적 설계자. 미국 유학 시절 마르크스주의에 경도된 후 귀국하여 당내 군부 조직책으로 두각을 나타냈고, 부수상·외무장관·국방장관을 거치며 타라키를 제치고 실권을 장악했다. 1979년 9월 타라키를 축출·처형하고 당과 국가의 최고직에 올랐으나, 가혹한 숙청과 반란 확산 속에 소련은 그를 통제 불능으로 판단했다. 12월 27일 KGB 특수부대의 타지베크 궁전 습격으로 살해되었고, 이는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서막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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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1965컬럼비아·위스콘신 대학 유학, 마르크스주의에 경도
  • 1966PDPA 입당, 칼크파 합류
  • 1969칼크파 유일의 국회의원 당선
  • 1973–1978당 군사조직 책임자, 장교망 구축
  • 1978.044월 혁명 지휘
  • 1978–1979부수상 → 외무장관 → 총리 → 국방장관 겸임
  • 1979.09타라키 축출·처형, 총서기·혁명평의회 의장 취임
  • 1979.12.27슈토름-333 작전으로 소련 특수부대에 피살

바브라크 카르말

ببرک کارمل

소련 침공으로 집권했으나 국민적 정당성을 얻지 못한 아프가니스탄 공산정권의 얼굴

"소련 동지들은 나를 한없이 사랑하며, 내 개인적 안전을 위해 내 명령조차 따르지 않는다": 꼭두각시 대통령이 친구에게 털어놓은 자기 유폐의 실상.

바브라크 카르말은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PDPA)의 창립 멤버이자 파르참(깃발) 분파의 지도자로, 1978년 4월 혁명 후 부수상이 되었으나 곧 칼크파의 숙청으로 체코슬로바키아 대사로 좌천되었다. 프라하에서 해임된 뒤 아프간 정권의 암살단을 피해 체코슬로바키아 비밀경찰의 보호 아래 숲속 오두막에서 은신했으며, 1979년 12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함께 대통령으로 복귀했다. 집권 기간 중 사면령, 새 국기 채택, 기본원칙 헌법 제정 등으로 정권의 기반을 넓히려 했으나, 소련의 꼭두각시라는 인식을 벗지 못했고 무자헤딘 반군과의 내전은 교착에 빠졌다. 1986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해임된 뒤 모스크바로 망명하여 간암으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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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5PDPA 창립, 파르참파 결성
  • 1965–1973하원의원
  • 1978.4–6혁명평의회 부의장
  • 1978.7–9주체코슬로바키아 대사
  • 1979.12–1986.11혁명평의회 의장 겸 PDPA 사무총장
  • 1979.12–1981.6각료평의회 의장
  • 1986–1996모스크바 망명

안나 발렌티노비치

Anna Walentynowicz

해고당한 조선소 노동자에서 '독립 폴란드의 어머니'로

파업 3일째 바웬사가 종료를 선언하자, 그는 피엔코프스카와 함께 문을 막고 떠나던 노동자들을 돌려세워 임금 투쟁을 연대 파업으로 바꾸었다.

그단스크 레닌 조선소의 크레인 기사로, 1980년 8월 해고가 연대(Solidarity) 탄생의 불씨가 된 폴란드 노동운동가이다. 16년간 용접공으로 일하며 작업량 기준의 270%를 채운 '노동 영웅'이었지만, 상사의 비자금 횡령을 고발하며 당국과 맞서 반체제 인사가 되었다. 파업 3일째 바웬사가 파업 종료를 선언하자 알리나 피엔코프스카와 함께 문을 막고 노동자들을 돌려세워 임금 투쟁을 연대 파업으로 바꾸었다. 이후 바웬사의 독주와 노조의 변질을 비판하며 거리를 두었고, 2010년 스몰렌스크 항공기 추락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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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그단스크 레닌 조선소 입사, 용접공으로 16년 근무 후 크레인 기사로 전직
  • 1968상사의 비자금 횡령을 고발, 해고 위기를 부서 노동자 전체의 지지로 막아냄
  • 1978자유노조 해안지부(WZZ) 공동 창립, 지하 신문 『해안의 노동자』 편집
  • 1980-08-07불법 노조 활동으로 해고, 정년 5개월을 앞둔 시점
  • 1980-08-14해고가 그단스크 파업을 촉발, 공장간파업위원회(MKS) 간부회 일원으로 8월 협정 서명
  • 1980-09NSZZ 연대 창립위원회 간부회 일원
  • 1981-12계엄령 후 조선소 파업 공동 조직, 이후 총 19개월 구금·연금
  • 1990조선소 복귀 후 1991년 은퇴, 계속해서 바웬사와 포스트연대 정치권을 비판

방 빠오

ວ່າງປາວ
군사·지휘 라오스 라오스 왕국 몽족 1929–2011 ○ 미국에서 병사(폐렴 · 심장 합병증)

라오스 왕국군 장성, 몽족 ‘비밀군대’ 지휘

1975년 5월의 시점을 두고 사료가 갈린다. 한쪽은 5월 5일 수바나 푸마 앞에서 협력을 요구받은 때를, 다른 쪽은 5월 14일 헬리콥터로 롱티엥을 떠나며 포격이 시작된 때를 종결로 본다.

라오스 시엥쿠앙 주 농헷 출신 몽족 군인. 왕국군에서 장성까지 오른 유일한 몽족이었다. 1960~70년대 롱티엥을 근거지로 중앙정보국이 훈련·지원한 비정규 ‘비밀군대’를 지휘하며 파테트라오와 베트남인민군에 맞섰다. 1975년 5월 공산 세력의 장악 속에 태국으로 빠져나온 뒤 미국으로 건너가 몬태나를 거쳐 캘리포니아에 정착했고, 미국 몽족 사회의 지도자로 활동하며 1980~90년대 태국 내 난민 강제 송환 저지에 힘을 보탰다. 1981년 라오스 국가해방통일전선(네오홈) 창립에 참여했다. 2007년 미국에서 라오스 정부 전복 모의 혐의로 기소됐으나 2009년 모든 연방 혐의가 취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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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0년대~1975라오스 왕국군 소장, 롱티엥 근거지의 중앙정보국 지원 ‘비밀군대’ 지휘
  • 1975태국으로 피난 후 미국 이주
  • 1981라오스 국가해방통일전선(네오홈) 창립 참여
  • 2007~2009미국에서 중립법 위반 혐의로 기소, 연방 혐의 전부 취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