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독의 대표적 선전 담당자로, 『노이에스 도이칠란트』 편집장을 거쳐 SED 정치국 위원 겸 동베를린 제1서기에 올랐다. 1989년 11월 9일 기자회견에서 새 여행규정의 발효 시점을 묻는 질문에 '즉시, 지체 없이'라고 답변하여 그날 밤 베를린 장벽 붕괴를 촉발했다. 훗날 자신의 실수가 체제의 '관 속의 마지막 못'이었다고 인정했고, 통일 후에는 국경 사망 사건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동독 체제에 대한 공개적 반성으로 감형됐다.
1977년 5월 27일 분파주의 사건 당시 니투파의 「변론 13개 테제」는 라라를 '사회민주주의자'이자 MPLA의 우경화를 이끈 인물로 비난했다. 이후 대규모 숙청의 책임은 네투의 명령 아래 라라와 이쿠 카헤이라 등에게 귀속된다.
본명 루시우 호드리구 레이테 바헤투 드 라라, 별칭 치웨카. 앙골라의 혁명가·물리수학자이며 MPLA 창립 구성원이자 지도자다. 1955년 앙골라 공산당에 들어갔고 1956년 12월 MPLA 강령에 창립 서명자로 참여해 마르크스-레닌주의 노선의 주된 이데올로그가 되었다. 1962년 조직·간부 담당 서기, 1964~65년 사무총장을 지냈다. 1975년 11월 헌법을 공포하고 아고스치뉴 네투를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시켰다. 네투 사망 후 1979년 9월 10~20일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고, 2003년 건강상 이유로 정계를 떠났다. 1977년 5월 27일 분파주의 사건 이후의 대규모 숙청 책임은 역사가와 증언자들이 네투의 명령 아래 라라·이쿠 카헤이라 등에게 귀속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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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1958리스본 대학에서 수학을 공부해 1952년 졸업하고, 1954년 코임브라 대학에 들어가 물리화학을 배우다 1958년 학업을 중단했다.
1955–1956앙골라 공산당에 입당하고 포르투갈 공산당과 함께 활동했으며, 1956년 12월 MPLA 강령에 창립 서명자로 참여했다.
1959정치경찰 PIDE의 추적을 피해 리스본을 떠나 동·서독과 이탈리아, 튀니지, 모로코를 거쳐 코나크리에 MPLA 최초의 해외 사무소를 마련했다.
1962–19651962년 12월 제1차 전국회의에서 조직·간부 담당 서기와 중앙위원에 선출되었고, 1964~65년 사무총장을 지냈으며 1964년부터 당의 실질적 2인자였다.
1974–19751974년 11월 8일 MPLA 대표단을 이끌고 루안다에 들어갔고, 1975년 11월 10일 헌법을 공포하고 아고스치뉴 네투를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시켰다.
1977–19851977년 12월 10일 MPLA 중앙위원회에 재선되어 네투에 이어 정치국 서열 2위 및 당 부총재로서 조직과 이데올로기 부문을 맡았고, 1985년 주제 에두아르두 두스 산투스에 의해 정치국에서 제외되어 중앙위원으로 남았다.
1979네투 사망 후 9월 10~20일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고, 9월 11일 제2차 MPLA 대회를 소집해 9월 20일 주제 에두아르두 두스 산투스의 선출을 이끌었다.
1975–2003독립 직후부터 2003년까지 앙골라 의회 의원을 지냈고, 2003년 11월 건강상 이유로 의원직을 사퇴했다. 국방부는 2004년 그를 육군 대장으로 예편시켰으나 본인은 이 계급을 쓰지 않았다.
1968년 12월 『리스티』지에 실린 「체코의 운명」에서: "프라하의 봄은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을 세계사의 중심으로 옮겨 놓았으며, 우리 민족은 자신의 위대함을 목도했다."
체코-프랑스 소설가. 청년기 공산당 입당 후 두 차례 제명되었고, 1967년 작가동맹 대회에서 검열 철폐 연설로 프라하의 봄의 서막을 열었다. 침공 직후 「체코의 운명」(Český úděl)을 발표, 프라하의 봄이 사회주의와 민주주의를 양립시키려 한 보편적 시도라고 주장하며 바츨라프 하벨과 역사적 논쟁을 벌였다. 1975년 프랑스로 망명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1984)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고, 2023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매트록은 회고했다. "나는 로널드 레이건보다 더 나은 학생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는 자기가 모르는 게 많다는 것을 알았고, 그걸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잭 매트록은 도스토옙스키를 읽고 러시아에 매료되어 외교관이 된 미국의 대소 전문가로, 1961년 첫 모스크바 근무 시절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케네디와 흐루쇼프 사이의 외교문을 번역했다. 레이건 행정부에서 NSC 유럽·소련 담당 선임국장으로서 CIA와 국무부 분석관들을 동원해 '소비에트 101'이라는 24편의 브리핑 문건을 편성하고 모의 정상회담에서 고르바초프 역을 맡아 레이건을 훈련시켰다. 1987년 소련 주재 대사로 부임하여 소련의 마지막 4년을 목격했고, 은퇴 후 고르바초프가 제네바에서 SDI 공유 약속을 서면화하지 않은 것을 '전략적 실수'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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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노스캐롤라이나주 그린즈버러 출생, 듀크대·컬럼비아대 수학
1956–1971외교관 임관, 빈·모스크바·서아프리카·동아프리카 근무, 쿠바 미사일 위기 시 케네디-흐루쇼프 서신 번역
1971–1974국무부 소련 담당 국장
1974–1978주소 미국대사관 공사 겸 부대사
1981–1983체코슬로바키아 주재 미국 대사
1983–1986NSC 유럽·소련 담당 선임국장, '소비에트 101' 편성, 제네바·레이캬비크 정상회담 준비
1987–1991소련 주재 미국 대사, 소련 마지막 4년 목격
1991–컬럼비아대·프린스턴 고등연구소 교수, 『제국의 부검』·『레이건과 고르바초프』 저술
1977년 에티오피아 주둔 쿠바 원정군 사령관으로서 소련 군사고문단과 함께 소말리아군을 격파한 지지가 전투를 지휘했다. 사료는 지지가 탈환 시점을 1978년 3월 4일과 3월 5일로 각각 기록한다.
아르날도 오초아 산체스(1930~1989)는 쿠바 혁명군(FAR)의 사단장이자 쿠바 공화국 영웅이었다. 카코쿰 출신으로 1958년 카밀로 시엔푸에고스의 제2열에 들어가 시에라 마에스트라에서 싸웠고, 피그스만 침공을 막았으며 쿠바 공산당 중앙위원을 20여 년 지냈다. 1975년 루안다에서 FNLA에 맞섰고 1977년 에티오피아 주둔 쿠바 원정군 사령관으로 오가덴 전쟁을 지휘했다. 1984년 영웅 칭호를 받았으나 1989년 마약 밀매와 반역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7월 13일 총살형에 처해졌다. 사료는 둘째 이름을 토마스와 테오도미로로, 사망 당시 나이를 58~59세와 57세로 각각 기록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정부, 혼돈, 그리고 — 환상은 버려야 한다 — 백색 테러가 만연할 것이다」(1988.11.29)
미슈콜츠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4세에 입당한 후 선전선동 부문을 거쳐 당 기구를 차근차근 올라, 1988년 5월 카다르의 후임으로 헝가리 사회주의노동자당 서기장에 올랐다. '모델 변경'(modellváltás)을 내세우며 공산주의 틀 안에서의 점진적 개혁을 주장했으나, 1988년 11월 '백색 테러'를 경고한 연설은 그가 체제 전환의 속도를 전혀 읽지 못했음을 드러냈다. 이듬해 네메트 미클로시 등 급진 개혁파에 밀려났고, 당이 사회당으로 재편된 후 강경파를 이끌었으나 1990년 총선에서 의석을 얻지 못했다.
1989년 11월 29일 몰타 회담 메모에서 베이커는 부시가 고르바초프보다도 "새로운 속도와 목적"을 이끌어야 한다고 썼다.
제임스 베이커는 변호사 출신의 공화당 정치가로, 조지 H. W. 부시와의 오랜 동맹을 바탕으로 미국 보수정치의 핵심 실무자가 되었다. 재무장관으로 환율과 국제 금융을 다룬 뒤 국무장관이 되어 냉전 말기의 외교, 독일 통일, 걸프 위기를 조정했다. 그는 고르바초프의 개혁을 무조건 신뢰하기보다 미국의 이익과 동맹의 안정을 계산했지만, 부시가 페레스트로이카에 손을 내밀도록 설득하고 1989년 몰타 회담의 의제와 운영을 구체화했다. 그 신중한 현실주의는 대결의 관성을 늦추면서도 변화의 방향을 미국 외교가 관리할 수 있는 협상으로 바꾸었다.
옛 룸메이트 고르바초프를 1967년 찾아가 개혁 구상을 설명했을 때, '그가 내 말을 아주 잘 이해하는 듯했다'고 믈리나르시는 회고했다.
즈데네크 믈리나르시는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주의 정치가이자 법률가로, 사회주의를 민주적 통제와 시민의 능동성에 결합하려 했다. 그는 1968년 프라하의 봄에서 중앙위원회 서기로 일하며 알렉산데르 둡체크 주변의 개혁 지도부에 참여했고, 행동강령을 만든 정치·법률 연구팀의 핵심 인물이었다. 그러나 바르샤바조약군의 침공 뒤 모스크바 의정서에 서명했고 곧 개혁 노선의 한계와 점령의 현실에 부딪혀 당과 공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헌장 77에 서명하고 오스트리아로 망명해 정치학자이자 프라하의 봄을 성찰한 저술가로 활동했다.
1989년 11월 28일, 콜은 동맹국은 물론 자신의 외무장관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연방의회 연단에 섰다. 부시가 그의 10개항 계획 요약 편지를 받은 것은 콜이 이미 연설을 시작한 직후였다.
16년간 서독과 통일 독일의 총리를 지내며 유럽 통합과 독일 재통일을 이끈 기독교민주연합(CDU) 정치인. 1989년 11월 28일, 동맹국과도 협의 없이 독일 통일을 위한 「10개항 계획」을 연방의회에서 발표해 불과 며칠 후 열린 몰타 회담에서 독일 문제의 틀을 결정지었다. 이듬해 10월 3일 독일을 재통일시켰고,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과 함께 마스트리흐트 조약과 유로화 도입을 주도했다. 서독 체제의 동독 확장이라는 방식으로 통일을 완수했으며, 16년 장기 집권 끝에 1998년 선거에서 패배한 뒤 CDU 비자금 스캔들로 당 명예의장직에서 물러났다.
루마니아 공산당 엘리트 출신으로, 1989년 12월 혁명의 와중에 민족구국전선(FSN)을 이끌며 차우셰스쿠 체제를 종식시켰다. 차우셰스쿠 부부의 즉결재판과 처형을 승인했으며, 1990년 85% 득표로 루마니아 최초의 자유선거 대통령이 되었다. 광부를 동원해 반대 시위를 진압한 미네리아드 사태로 평판에 금이 갔고, 훗날 혁명기 살상에 대한 반인도범죄 혐의로 기소되었다. 세 차례 대통령을 지내며 NATO 가입과 EU 가입 협상을 완료했으나, 혁명인가 쿠데타인가를 둘러싼 논쟁은 그를 끝까지 따라다녔다.
“피델은 대체 불가능하다, 우리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함께 그를 대체하지 않는 한.” — 대학생 연설, 2006년
7·26 운동 창립 멤버로 몬카다 병영 습격(1953)과 그란마 상륙에 참가했으며, 프랑크 파이스 동부전선 사령관으로서 오리엔테에 게릴라 해방구를 건설한 쿠바 혁명의 핵심 지휘관. 1959년부터 2008년까지 혁명무력부 장관을 지내며 현대 국가 사상 최장기 국방장관을 기록했고, 쿠바의 군사·보안 기구를 구축하고 공산당 제도화를 주도했다. 2008년 형 피델의 뒤를 이어 국가평의회 의장과 2011년 당 제1서기에 취임, 신중한 시장 개혁을 추진하며 2018년과 2021년 차례로 퇴진하기까지 반세기 넘게 쿠바 혁명의 없어서는 안 될 2인자로 군림했다.
1977년 2월 3일 그는 수도 밖에서 민병 부대에 깃발을 수여하고 있었고, 관측자들은 그 일이 목숨을 구했다고 보았다. 11월 11일 데르그 본부에서 체포돼 이튿날 총살형에 처해졌다.
에티오피아 군인으로 1974년 황제를 축출한 군사위원회 데르그의 창설 세대다. 제4사단 소령으로 데르그 부의장에 선출됐고 1975년 4월 이후 중령이 됐다. 1976년 에리트레아 전선에 보낼 수만 명의 농민 민병 모집을 맡았고 보수적·민족주의적·종교적 성향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1977년 2월 3일 총격에서 살아남아 제1부의장이 됐으나 같은 해 11월 12일 멩기스투의 명령으로 처형됐다.
1986년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은 바레를 대신해 수개월간 사실상의 국가원수 역할을 맡았다.
프룬제군사아카데미 출신 장성으로, 시아드 바레 정권의 핵심 인물이자 오가덴 전쟁의 최고 사령관이었다. 1970년부터 국방장관, 1971년부터 부통령을 맡았고, 평의회 해산 뒤 1976년 혁명사회당 창립대회에서 정치국원 겸 부서기장으로 선출되어 군부의 정당 장악을 상징했다. 1987년 쿠데타 이후 첫 총리가 되었으나, 이삭족 학살 지휘 책임으로 미국 법원에서 2100만 달러 배상 판결을 받았다.
1982년 6월 시아누크·손산과 반베트남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외무를 맡아, 서방의 지지로 캄보디아의 유엔 의석이 유지되게 했다.
캄보디아의 정치가·경제학자다. 스바이리엥주 출신으로 프놈펜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1959년 귀국해 대학 교수로 일했으며 시아누크 정부 각료를 지냈다. 1967년 좌익 탄압 뒤 은신하다 크메르루주에 합류해 1976~1979년 국가상임위원회 주석으로 국가원수를 맡았고, 1985년 폴 포트를 계승해 1998년까지 크메르루주를 이끌었다. 2007년 체포되어 2014년 반인륜범죄로 종신형을, 2018년에는 베트남인 집단학살 유죄를 선고받았고 2022년 9월 22일 항소가 기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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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1967귀국해 프놈펜 대학 교수로 활동하고 시아누크의 상쾌 정부 각료를 지냈다
1967좌익 탄압을 피해 은신하다 크메르루주에 합류했다
1973–1974FUNK·GRUNK 대표단을 이끌고 북베트남·중국·조선·알바니아·유고슬라비아·루마니아·알제리 등을 순방했다
1976–1979민주캄푸치아 국가상임위원회 주석으로 국가원수를 지냈다
1976비동맹 정상회의에 민주캄푸치아 대표로 참석했다
1982–1993민주캄푸치아 연합정부에서 부주석 겸 외무를 맡아 유엔 의석 유지를 주도했다
1985–1998폴 포트를 공식 계승해 크메르루주 지도자가 되었다
1997폴 포트를 비난하고 크메르 민족연대당을 창당해 크메르루주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199812월 누온 찌어와 함께 캄보디아 정부군에 투항했다
2007체포되었고, 국제적 압력에도 훈 센 총리는 그를 기소하지 않았다
20148월 7일 반인륜범죄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201811월 16일 베트남인 집단학살 유죄를 선고받았고, 참 집단 학살 관여는 무죄로 인정됐다
1977년 응구아비 암살의 공모 혐의로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가봉의 오마르 봉고가 개입해 총살형을 면했다.
농작물 유전학을 전공한 생물학자 출신 정치인으로, 1963년 32세에 마삼바데바 정권의 총리가 됐다. 콩고인민공화국 시절 응구아비 암살 연루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석방돼 프랑스에서 망명했고, 1991년 주권 국민회의의 과도 총리 선거에서 초반 투표를 선두로 달리다 4차 투표에서 밀롱고에게 패했다. 1992년 사회민주주의 정당 UPADS를 이끌고 사수응게소를 꺾어 콩고 최초의 민주 선거 대통령이 됐으나, 1997년 내전에서 패해 다시 망명했다.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주소 대사에서 『아프간츠이』의 저자까지, 소련을 가장 깊이 이해한 영국 외교관
「우리가 여전히 우스꽝스러운 모자를 쓰고 민스 파이를 먹고 있을 때, 고르바초프가 텔레비전에 나와 자신이 소련 대통령직을 사임했다고 세계에 알렸다」, 1991년 크리스마스 모스크바에서.
영국 외교관이자 작가로, 페레스트로이카와 소련 붕괴의 결정적 시기인 1988년부터 1992년까지 주소 영국 대사를 지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개인적 신뢰를 쌓으며 1991년 8월 쿠데타와 옐친의 부상, 소련 해체를 현장에서 목격했고, 이후 존 메이저 총리의 외교정책 보좌관과 합동정보위원회 의장을 역임했다. 2011년 출간한 『아프간츠이』(Afgantsy)는 소련군이 전장에서 패배하지 않고 질서 있게 철수했으며,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군사적 실패가 아니라 정치적·정보적 실패였다고 주장해 '소련판 베트남'이라는 서방의 통념을 근본적으로 뒤흔든 대표적 수정주의 저작이다.
1989년 6월 27일, 호른과 오스트리아 외무장관 알로이스 모크는 헝가리-오스트리아 국경에서 볼트커터로 철조망을 함께 끊으며 '철의 장막'에 첫 구멍을 냈다.
헝가리 사회주의노동자당 개혁파 외교관료에서 민주화 이후 총리까지 역임한 정치가로, 1989년 외무장관으로서 오스트리아와의 국경 철조망을 알로이스 모크와 함께 절단하며 '철의 장막' 붕괴의 상징적 순간을 연출했다. 동독 난민들의 서독 탈출을 위한 헝가리 국경 개방을 주도하여 독일 통일의 물꼬를 텄고, 이는 1989년 동유럽 혁명의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다. 1994년 총선에서 헝가리 사회당을 압승으로 이끌어 총리가 되었고, 보크로시 긴축 개혁으로 시장경제 전환의 틀을 다졌다. 그의 정치 인생은 1956년 혁명 진압 부대 복무라는 깊은 그림자와 1989년 국경 개방의 역사적 공로 사이에서, 20세기 헝가리 좌파의 모순을 온몸으로 체현했다.
카레이라는 1976년 10월 전원회의 뒤 "MPLA에 존재하는 유일한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엥겔스·레닌의 과학적 사회주의뿐"이라고 공식 선언했다.
앙골라 독립 후 초대 국방부 장관으로 인민군(FAPLA)을 창설·지휘한, 네투 다음 가는 MPLA 군사 지도자였다. 1976년 10월 전원회의 뒤 그는 "MPLA에 존재하는 유일한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엥겔스·레닌의 과학적 사회주의뿐"이라고 선언해 당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채택을 증언했다. 1977년 니티스타 봉기 진압과 군사재판을 지휘했으나, 1979년 네투 사망 뒤 실각해 말년엔 조국의 '야만적 자본주의'를 비판했다.
1988년 11월 7일과 1989년 11월 20일, 사수응게소 대통령에게 전국 원탁회의 개최를 제안하는 서한을 보냈다.
풀주의 킨칼라구 음볼로키 출신의 콩고 정치인으로, 일당제 시절에 콩고민주통합발전운동(MCDDI)을 창설하고 다당제 도입을 요구했다. 1991년 주권 국민회의에서 정당 연설을 개막하고 앙드레 밀롱고의 과도 총리 선출을 지지하는 등 민주화 이행의 야당 축이었다. 1992년 대선 결선에서 리수바에게 패했고, 1997년 내전 중 리수바의 민족통합정부 총리가 됐다가 사수응게소 충성 세력에 축출되어 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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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콩고민주통합발전운동(MCDDI) 창설, 당 규약을 내무부에 제출
1991주권 국민회의에서 정당 연설 개막
1992대선 1차 20.32%로 2위, 결선에서 리수바에 패배
1994브라자빌 시장 선출
1997리수바에 의해 민족통합정부 총리로 임명됨, 사수응게소 충성 세력의 점령으로 축출·망명
헝가리 사회주의노동자당(MSZMP) 정치국원이자 개혁파의 이념적 후견자였다. 1989년 1월 28일 라디오에서 1956년 혁명을 '민중봉기'라 규정해 당의 정통성을 스스로 무너뜨렸고, 5월 서베를린에서는 베를린 장벽을 '치욕'이라 부르며 동독 체제를 비판했다. 오토 폰 합스부르크와 함께 범유럽 피크닉을 후원해 철의 장막에 첫 균열을 냈고, 이후 헝가리 사회당 부의장을 거쳐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