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전쟁 직전 모스크바 협상에서 스탈린과 마주 앉은 핀란드의 현실주의 외교관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 모든 지혜의 시작이다: 스탈린에게서 빌려와 평생의 외교 원칙으로 삼은 말.
러시아 제국의 대공국 시절부터 시작해 핀란드 독립·내전·겨울전쟁·계속전쟁·냉전을 모두 통과한 정치가다. 독립 직후인 1918년 첫 총리를 지내며 친독일·군주제 노선을 밀었고, 1920년 타르투 조약으로 소비에트 러시아와 국경을 확정했다. 1939년 가을 스톡홀름 주재 공사에서 소환되어 모스크바에서 스탈린·몰로토프와 직접 협상했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했고, 전쟁이 터지자 무임소장관으로 평화조약 체결을 이끌었다. 1946년 대통령에 오른 뒤로는 '현실 인정이 지혜의 시작'이라며 소련과의 지정학적 공존을 추구했고, 이 파시키비 독트린은 냉전기 핀란드 외교의 근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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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7–1913핀란드 의회 의원 (핀란드당)
- 1908–1909원로원 재무분과장
- 1918.5–11핀란드 총리
- 1914–1934KOP 은행 총재
- 1936–1939주스웨덴 공사
- 1940–1941주모스크바 공사
- 1944–1946핀란드 총리
- 1946–1956핀란드 대통령
무력 북진통일을 주장하고 정전협정 서명을 거부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1950년 7월 트루먼에게 보낸 편지에서: '공세로 전환, 힘겨운 적진을 뚫고 승리의 북진을 시작할 수 있도록 매일 기도합니다.'
이승만은 조선 말기 독립협회 활동으로 투옥되었다가 석방 후 미국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독립운동가로,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제1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반공을 국시로 삼고 국가보안법 제정 등 강력한 반공 체제를 구축했으며, 38도선 이북으로의 무력 북진통일을 공개적으로 주장했다. 한국전쟁 중에도 정전을 거부하고 1953년 반공 포로 2만 7천 명을 일방적으로 석방해 휴전 교섭을 흔들었으며, 정전협정 서명을 끝내 거부했다. 1960년 3·15 부정선거와 4·19혁명으로 하야한 뒤 하와이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 객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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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6–1898독립협회·협성회 활동, 《매일신문》 주필
- 1899–1904한성감옥 투옥, 옥중 《독립정신》 집필
- 1905–1910도미, 프린스턴대 정치학 박사
- 1919–1925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 1948제헌국회의장,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당선
- 1948–1960대한민국 제1·2·3대 대통령, 발췌개헌과 사사오입 개헌으로 장기집권
- 1960–19654·19혁명으로 하야, 하와이 망명
스파르타쿠스단에서 동독 국가원수까지, 독일 공산주의의 전 생애를 살아낸 유일한 생존 창립자
1919년 1월 15일 밤, 피크는 룩셈부르크·리프크네히트와 함께 체포되어 에덴 호텔로 끌려갔다. 그는 동지들의 마지막 신문에 입회한 유일한 생존자가 되었다.
마부의 아들로 가구공을 거쳐 1895년 사민당에 입당, 룩셈부르크의 영향을 받아 좌파로 성장했다. 1차대전 반전 활동으로 군사법정에 회부되었고, 스파르타쿠스단과 KPD 창립에 참여했다. 1919년 1월 룩셈부르크·리프크네히트와 함께 체포되었으나 유일하게 생존했다. 코민테른 집행위원(1921)과 상임위원(1931)을 거쳐, 나치 집권 후 모스크바에서 KPD 망명 지도부를 이끌며 코민테른 서기를 지냈다. 전후 귀국해 사민당과의 합당으로 SED를 창출했고, 1949년 동독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사망까지 국가 원수직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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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5독일 사회민주당(SPD) 입당
- 1915징집 후 반전 활동으로 군사법정 회부, 암스테르담 망명
- 1918–1919스파르타쿠스단 및 독일공산당(KPD) 창립 참여, 중앙위원
- 1921코민테른(IC) 집행위원회 위원, 프로이센 란트타크 의원
- 1928–1933라이히스타크 의원
- 1931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상임위원회 위원
- 1934–1946KPD 의장 (망명 지도부)
- 1935–1943코민테른 서기
- 1943자유독일 국가위원회(NKFD) 공동 설립
- 1946–1950독일사회주의통일당(SED) 공동의장
- 1949–1960독일민주공화국(GDR) 대통령
잠정 국가를 지속 질서로 만든 정치가
의회평의회 의장 아데나워는 분단된 독일의 기본법을 최종 헌법이 아닌 잠정적 합의로 제시하는 데 앞장섰다.
콘라트 아데나워는 나치즘의 붕괴와 독일 분단 뒤 연방공화국의 틀을 세운 가톨릭 보수 정치가였다. 의회평의회 의장으로서 영구 헌법 대신 통일의 가능성을 열어 둔 잠정적 기본법을 지지하면서 서부 점령지에 민주 제도를 마련했다. 초대 연방총리로는 서방 결속과 유럽 통합, 사회적 시장경제를 추진했지만 반공 노선으로 냉전의 분단도 굳혔다. 그의 정치적 유산은 잠정성을 내세운 국가 건설이 장기적 질서로 정착한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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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6–1909쾰른 부시장
- 1917–1933쾰른 시장
- 1921–1933프로이센 국가평의회 의장
- 1948–1949의회평의회 의장
- 1949–1963독일연방공화국 초대 연방총리
- 1951–1955연방 외무장관
- 1950–1966기독교민주연합 의장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하고 합참의 만장일치 반대를 꺾은 유엔군 사령관
「전쟁에서 승리를 대신할 것은 없다.」 1951년 4월 19일 의회 고별연설에서 한 말.
더글러스 맥아더는 태평양 전쟁에서 연합군을 승리로 이끌고, 일본 점령을 사실상 통치한 미국의 5성 원수였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후 유엔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합동참모본부의 만장일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천상륙작전을 밀어붙여 전세를 역전시켰다. 그러나 중공군 개입 이후 만주 폭격과 확전을 주장하며 트루먼 행정부와 충돌했고, 1951년 4월 해임되었다. 그의 해임은 민간 통제와 군부의 관계를 둘러싼 냉전기 가장 첨예한 헌정적 논쟁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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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1935미국 육군 참모총장
- 1935–1941필리핀군 원수 겸 군사고문
- 1941–1945미 극동군 사령관 / 남서태평양방면 연합군 최고사령관
- 1945–1951연합군 최고사령관, 일본 점령통치
- 1950–1951유엔군 사령관, 한국전쟁
- 1952–1964레밍턴 랜드 이사회 의장
세계 최대 면화상을 일군 자유무역론자, 유럽 붕괴를 경고한 메모로 마셜 플랜을 촉발한 국무차관
1947년 5월 27일 마셜 국무장관에게 보낸 메모에서 클레이턴은 이렇게 썼다: '즉각적이고 대규모인 미국의 원조 없이는 경제·사회·정치적 붕괴가 유럽을 뒤덮을 것입니다.'
클레이턴은 13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속기사로 출발해 앤더슨·클레이턴 사를 세계 최대 면화 무역회사로 키운 사업가였다. 자유무역을 신봉한 민주당원으로서 1944년 국무부 경제담당 차관보, 1946년 경제담당 차관에 임명되었고, 1947년 5월 전후 유럽의 참상을 목격한 후 조지 마셜에게 보낸 「유럽의 위기」 메모에서 '즉각적이고 대규모인 미국의 원조 없이는 경제·사회·정치적 붕괴가 유럽을 뒤덮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 메모는 마셜 플랜 발표의 직접적 촉매가 되었고, 찰스 볼런은 연설문 초안을 쓸 때 클레이턴의 문장을 대거 인용했다. 퇴임 후에도 자유무역과 대서양 동맹을 옹호하며 1961년 크리스천 허터와 애틀랜틱 카운슬을 공동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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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0미시시피주 투펄로 인근 면화 농장에서 출생
- 1904앤더슨·클레이턴 사 공동 창업, 오클라호마시티에서 면화 중개 시작
- 1916본사를 휴스턴으로 이전, 이후 세계 최대 면화 무역회사로 성장
- 1918전시산업위원회 면화분배위원으로 제1차 세계대전 정부 봉사
- 1940–1944재건금융공사·수출입은행·잉여전쟁자산청에서 연이어 근무
- 1944–1946국무부 경제담당 차관보, 포츠담 회담 경제 고문
- 1946–1947국무부 경제담당 차관, 「유럽의 위기」 메모로 마셜 플랜 촉발
- 1961크리스천 허터와 애틀랜틱 카운슬 공동 설립
노동조합에서 전후 외교로 나아간 현실주의자
1946년 모스크바 회담에서 몰로토프의 공세가 이어지자 그는 "이제 지긋지긋하다"고 외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니스트 베빈은 가난한 노동자에서 영국 최대 노동조합의 지도자로 성장한 노동운동가이자 노동당 정치가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노동력 동원을 조직한 경험은 전후 영국의 외교와 유럽 재건을 노동과 국가 역량의 문제로 보게 했다. 외무장관으로서 그는 조르주 비도와 함께 마셜의 하버드 연설에 대한 유럽의 대응을 조직하고, 영국의 안보와 서유럽 협력을 미국의 원조 및 대서양 동맹과 결합했다. 동시에 그의 강한 반공주의와 제국적 이해관계는 전후 질서의 국제주의가 해방과 지배를 함께 품었음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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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0브리스틀 항만·부두·강변 노동자노조 브리스틀 지부 서기
- 1914항만·부두·강변 노동자노조 전국 조직가
- 1922–1940운수·일반노동자노조 초대 전국서기장
- 1940–1945전시 연립정부 노동·국민역무부 장관
- 1945–1951애틀리 내각 외무장관
- 1947조르주 비도와 유럽경제협력위원회 조직, 마셜 원조 대응 주도
- 1949북대서양조약기구 창설에 기여
왕국의 의회주의에서 해방전선으로 건너간 정치가
1943년 제2차 AVNOJ 회의를 주재해 신유고슬라비아의 수립 결정을 이끌었다.
이반 리바르는 크로아티아계 변호사이자 유고슬라브주의 정치가로, 왕국의 의회정치와 반파시스트 해방운동을 잇는 제도적 인물이었다. 그는 1920년 제헌의회 의장으로서 통일 뒤 국가의 헌정 질서를 다루었고, 독재기에는 공산주의 피고인들을 변호했다. 전쟁 중에는 AVNOJ 의장으로 민족해방운동의 대표성을 조직했으며, 전후에는 공화국의 집단적 국가원수인 연방 국민의회 상임위원회 의장을 맡았다. 두 아들을 전쟁에서 잃은 그의 경력은 서로 다른 정치 전통이 해방과 국가 재건의 국면에서 결합한 과정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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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6크로아티아 진보민주당 창립에 참여, 변호사 활동 시작
- 1918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세르비아 국민평의회 중앙위원
- 1919세르비아인·크로아티아인·슬로베니아인 왕국 임시 국민대표부 부의장
- 1920–1922세르비아인·크로아티아인·슬로베니아인 왕국 제헌의회 및 국민의회 의장
- 1942–1945유고슬라비아 인민해방 반파시스트 평의회(AVNOJ) 의장
- 1945–1953유고슬라비아 연방 국민의회 상임위원회 의장, 집단적 국가원수
- 1960정치 활동에서 은퇴
루스벨트의 '보조 대통령'이자 포츠담 배상안을 설계한 국무장관
번스의 국무장관 취임 선서 직후, 트루먼이 말했다. "지미, 성경에 입 맞춰." 번스가 그러고 나서 성경을 트루먼에게 건네며 말했다. "대통령님도 입 맞추시죠." 트루먼이 그렇게 하자 자리 전체가 웃음바다가 되었다.
제임스 F. 번스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출신의 민주당 정치인으로, 뉴딜 입법을 주도한 상원의원, 전시 동원을 총괄하며 '보조 대통령'으로 불린 루스벨트의 오른팔, 그리고 트루먼 행정부의 국무장관으로서 포츠담 회담에서 독일 배상의 틀을 설계한 인물이다. 포츠담에서 번스는 각 점령국이 자국 점령지역에서 배상을 취하되 소련에는 서방 지역 산업설비의 15%를 식량·원자재와 교환하고 10%를 무상 제공하는 절충안을 몰로토프와 협상해 타결시켰다. 루스벨트의 후계 구도에서 밀려난 뒤 트루먼과의 관계도 점차 냉각되었으나, 이후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로 당선되어 인종 분리 교육 체제를 고수하며 '분리하되 평등하게' 노선을 추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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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1–1925사우스캐롤라이나주 하원의원
- 1931–1941사우스캐롤라이나주 상원의원
- 1941–1942미국 연방대법원 대법관
- 1942–1943경제안정국 국장
- 1943–1945전시동원국 국장
- 1945–1947미국 국무장관
- 1951–1955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
고당 조만식, 반탁으로 1946년 북부 정치무대에서 사라진 조선민주당 당수
1945년 12월 30일 조만식은 소련군사령부의 압력 속에서도 반탁 결의문을 채택했고, 1946년 1월 5일 고려호텔에 감금되었다. 이 시기를 분수령으로 그를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이 북부 정치무대에서 사라지고 김일성 등 좌익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조만식(曺晩植, 호 고당, 1883~1950)은 평안남도 강서 출신의 교육자·개신교 장로·언론인·정치인이다. 1913년 메이지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오산학교 교사(1915년 교장), 평양기독교청년회 총무·산정현교회 장로, 조선물산장려회 회장, 조선일보 사장을 역임했다. 일제에 대해서는 간디의 비폭력·불복종 노선으로 항일운동을 폈다. 해방 후 평안남도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이어 평남 건준과 평남 조공을 통합한 평남인민정치위원회(좌우합작 기구) 위원장이 되었다. 1945년 11월 3일 조선민주당을 창당해 당수가 되었고 12월 30일 반탁 결의문을 채택했다. 1946년 1월 5일 고려호텔에 감금되었고 2월 최용건이 당을 장악했다. 이후 사망은 확정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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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3~19151913년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그해 오산학교 교사가 되어 1915년 교장이 되었으며 민족교육에 종사
- 1920~30년대평양기독교청년회 총무·산정현교회 장로로 기독교·사회운동을 조직하고 조선물산장려회 회장, 신간회 평양지회장, 조선일보 사장을 지냄
- 1945.8평안남도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이어 좌우합작 기구인 평남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을 맡음
- 1945.10~11토지개혁·소작제 7·3제 논쟁으로 입장이 드러나 우파 위원들이 위원회를 떠나 월남했고, 11월 24일 명칭에서 '정치'가 빠지며 위원회가 좌파 기구로 바뀜
- 1945.11.3조선민주당을 창당하고 당수로 선출되어 반탁 노선을 폄
- 1945.12.30조선민주당 중앙위원회에서 신탁통치를 절대 찬성할 수 없다는 반탁 결의문을 채택
- 1946.1.5소련군사령부에 의해 고려호텔에 감금되어 정치무대에서 제거됨
- 1946.2최용건이 당을 장악하고 2월 24일 제1차 당대회에서 당수로 선출됨
- 1948~1950재판 없이 구금이 이어졌고 교환 협상은 결렬됨. 행방이 확인되지 않으며 사망은 전언·추정으로 시점·경위가 확정되지 않음
포츠담 회담 도중에 처칠을 대체해 등장한, 말수 적은 전후 개혁의 설계자
1945년 선거 승리 후 버킹엄궁에서 조지 6세를 만난 애틀리는 침묵을 깨며 "제가 선거에서 이겼습니다"라고 말했고, 왕은 "압니다. 6시 뉴스에서 들었습니다"라고 답했다.
클레멘트 애틀리는 1945년 포츠담 회담 도중 노동당의 압승으로 윈스턴 처칠을 대신해 영국 총리가 된 인물이다. 전시 연립내각에서 부총리로 처칠을 보좌했으나, 유권자들은 전쟁 영웅 대신 복지국가를 약속한 무채색의 그를 선택했다. 그의 정부는 국민보건서비스(NHS)를 창설하고 주요 산업을 국유화했으며 인도와 파키스탄의 독립을 단행해 대영제국의 해체를 시작했다. 대외적으로는 마셜 플랜과 NATO 창설을 주도하며 미국 편에 서서 냉전의 초기 윤곽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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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5–1955노동당 당수
- 1940–1942국새상서 (전시 연립내각)
- 1942–1945부총리 (전시 연립내각)
- 1945–1951영국 총리
- 1951–1955야당 당수
사직서 한 장으로 정부를 무너뜨리려 했으나 고트발트의 손을 들어준 마지막 민주 대통령
1948년 2월 25일, 베네시는 공산당 민병대가 프라하 거리를 장악하고 내전이 임박한 가운데 비공산당 장관 12명의 사직서를 수리했다.
체코슬로바키아 독립운동의 핵심 인물로, 1차 대전 중 마사리크·슈테파니크와 함께 민족평의회를 창설했다. 1918년부터 17년간 외무장관으로서 국제연맹과 소협상을 주도하며 프랑스·소련과의 동맹 체계를 구축했다. 뮌헨 협정으로 사임 후 런던 망명정부를 이끌었고, 전후 귀환해 대통령에 복귀했다. 1948년 2월 쿠데타에서 비공산당 장관들의 사직서를 수리하고 고트발트의 공산당 정부를 승인함으로써 체코슬로바키아의 소비에트 블록 편입을 결정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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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5–1918체코슬로바키아 민족평의회 서기
- 1918–1935체코슬로바키아 외무장관
- 1921–1922체코슬로바키아 총리
- 1935–1938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 1940–1945체코슬로바키아 망명정부 대통령
- 1945–1948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노동조합 중앙평의회를 이끌고 1948년 2월 사건 뒤 총리, 1953년 대통령이 된 체코슬로바키아 공산주의자
공산당 조직과 노동조합을 구축하고, 1948년 정권 장악 뒤 총리, 고트발트 사후 1953년 대통령이 되어 1957년까지 재임했다.
보헤미아 자콜라니 출신의 석공으로 사회민주당을 거쳐 공산당 창립에 참여했다. 독일 점령기에 체포되어 판크라츠 감옥과 드레스덴을 거쳐 1940년부터 작센하우젠 수용소에 갇혔다. 해방 뒤 귀국해 노동조합 중앙평의회 의장과 공산당 간부회 위원이 되었고, 1946년 제헌의회 의장을 잠시 지냈다. 1948년 6월 대통령이 된 고트발트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되었고, 1953년 고트발트가 죽자 대통령이 되었다. 보다 온건한 통치를 원했으나 노보트니에게 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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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1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창립에 참여해 당 언론·노동조합·협동조합 조직에 힘썼다.
- 1929–1939공산주의 노동조합 총서기를 지냈다.
- 1945전후 결성된 혁명적 노동조합운동 의장이 되었다.
- 1948공산당 정권 장악 뒤 정치서기국 위원과 체코슬로바키아 총리가 되었다.
- 1953–1957고트발트 사후 대통령직을 이어받아 사망할 때까지 재임했다.
공산당원이 아닌 지주 변호사로 공산 정권의 첫 총리와 국가원수를 지낸 「붉은 부르주아」
1945년 3월 초 비신스키는 부쿠레슈티로 날아와 미하이 국왕에게 두 시간 안에 그로자를 총리로 임명하라고 요구했고, 거부하면 루마니아의 독립 국가 존속을 보장할 수 없다고 말했다. 러데스쿠 정부는 무너졌고 3월 6일 그로자 정부가 들어섰다.
트란실바니아 후네도아라의 정교회 사제 집안에서 태어나 부다페스트·베를린·라이프치히에서 법학을 공부한 변호사이자 지주였다. 헝가리 의회 시절 루마니아 민족당에서 출발해 1920년대 아베레스쿠 정부의 장관을 두 번 지냈고, 1933년 데바에서 농민 조직 「농민전선」을 세워 1935년 체베아 협정으로 공산당과 손을 잡았다. 1944년 8월 23일 뒤 부총리를 거쳐 1945년 3월 6일 소련 외무부 부인민위원 비신스키가 왕궁에서 강요한 대로 총리가 되었고, 곧바로 토지개혁을 공포해 대지주의 땅을 나누었다. 1945년 여름 미하이 국왕이 그의 사임을 요구하며 법령 서명을 거부하는 「국왕 파업」에 들어갔지만 그는 소련의 지지를 믿고 버텼다. 1946년 선거 조작과 1947년 국민농민당 해산을 거쳐 그해 12월 30일 게오르기우데지와 함께 국왕에게 퇴위를 강요했다. 1952년 6월까지 총리로 있다가 대국민의회 간부회 의장, 곧 명목상 국가원수가 되어 죽을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끝내 공산당에 들지 않은 부유한 지주로서 트란실바니아 헝가리인 소수민족에 우호적이었고, 스스로를 「붉은 부르주아」라고 부르는 재담으로 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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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1921아베레스쿠 정부 장관
- 1926–1927아베레스쿠 정부 장관
- 1933농민전선 창설
- 1935체베아 협정, 공산당과 제휴
- 1944–1945부총리
- 1945–1952총리
- 194712월 30일 미하이 국왕 퇴위 강요
- 1952–1958대국민의회 간부회 의장(국가원수)
트루먼 독트린과 마셜 플랜으로 냉전의 미국 틀을 세운 33대 대통령
트루먼의 집무실 책상에는 '책임은 여기서 끝난다(The buck stops here)'라는 문구가 놓여 있었고, 원자폭탄에서 맥아더 해임까지 그는 그대로 살았다.
트루먼은 루스벨트 사망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한 뒤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투하를 명령한 미국의 33대 대통령이다. 1947년 3월 '무장 소수파나 외부 압력에 저항하는 자유민을 지원한다'는 트루먼 독트린을 선언했고, 1948년 4월 마셜 플랜에 서명해 서유럽 재건과 소련 봉쇄의 제도적 기반을 구축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유엔군 파병을 주도했고 중국과의 전면전을 우려해 맥아더를 해임함으로써 민간 통제 원칙을 재확인했다. 퇴임 당시 역대 최저 지지율로 떠났으나 냉전 승리와 함께 '위대에 가까운' 대통령으로 사후 재평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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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4미주리주 라마에서 농부의 아들로 출생
- 1917–1918제1차 세계대전, 프랑스 전선 포병대 대위로 참전
- 1935–1945미주리주 상원의원, 트루먼 위원회로 전시 계약 부패 조사
- 1945.01–04부통령, 루스벨트 사망으로 4월 12일 대통령 승계
- 1945–1953제33대 대통령, 원자폭탄 투하·트루먼 독트린·마셜 플랜·NATO 창설·한국전쟁
- 1947.03.12트루먼 독트린 선언, 그리스·터키 군사원조 요청
- 1948.04.03마셜 플랜(경제협력법) 서명
- 1951.04.11맥아더 극동사령관 해임
1948년 2월 장관 사임을 이끌고 망명해 자유 체코슬로바키아 평의회를 이끈 국민사회당 의장
1948년 2월 공산당의 헌정 질서 변경을 막으려 비공산당 장관들과 사임했다. 쿠데타 뒤 감시를 피해 서방으로 탈출해 망명 정치를 이끌었다.
보헤미아 타보르의 소상인 집안에서 태어나 교사가 되었고, 1937~1939년 프라하 시장을 지냈다. 독일 점령 뒤 체포되어 다하우와 부헨발트에 갇혔다가 1945년 미군에 의해 풀려났다. 전후 국민사회당 의장으로 다시 프라하 시장이 되었고, 1946년 선거에서 제2당을 이끌어 부총리가 되었다. 1947년 9월 마사리크·드르티나와 함께 폭발물 상자를 받았다. 1948년 2월 다른 비공산당 장관들과 함께 사임했고, 쿠데타 뒤 감시를 피해 망명해 1949~1974년 자유 체코슬로바키아 평의회 의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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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7–1939프라하 시장을 지냈다.
- 1945–1946프라하 시장으로 복귀하고 체코슬로바키아 국민사회당 의장이 되었다.
- 1946–1948부총리를 지냈다.
- 1949–1974망명 자유 체코슬로바키아 평의회 의장을 지냈다.
3·1운동을 변론한 민족인권변호사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최고인민회의 의장이 된 진보적 민족주의자
3·1운동 재판에서 '공소불수리론'을 제출하자 일제 검사들이 법정에서 반발했고, 그 광경은 전국 신문에 보도되어 허헌을 항일변호사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일제강점기 '3대 민족인권변호사'의 한 사람으로, 3·1운동 민족대표 47인을 변론하고 노동자와 독립운동가의 무료 변론을 도맡은 대표적 항일변호사였다. 1927년 좌우합작 단체 신간회의 중앙집행위원장으로 항일민족전선을 이끌었고, 해방 후 조선인민공화국 국무총리와 남조선로동당 위원장을 거쳐 월북하여 조선 근대 민족운동이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가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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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7대한제국 제1회 변호사시험 합격
- 19193·1운동 민족대표 변론, 조선변호사회 회장
- 1927신간회 중앙집행위원장
- 1945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 조선인민공화국 국무총리
- 1946남조선로동당 위원장
- 1948최고인민회의 의장, 김일성대학 총장
아직-아닌 것의 철학자: 『희망의 원리』로 인간 해방의 구체적 유토피아를 사유하다
“진정한 기원은 시작이 아니라 끝에 있다. 사회와 존재가 스스로를 뿌리에서 파악할 때 비로소 시작된다.” — 『희망의 원리』
『희망의 원리』(Das Prinzip Hoffnung)로 '아직-아닌 것'(Noch-Nicht)과 구체적 유토피아의 철학을 정립한 독일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루카치·벤야민·아도르노·브레히트와 교류하며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한 축을 형성했다. 1948년 동독으로 귀환해 라이프치히 대학 철학 교수와 국가상을 받았으나, 1956년 헝가리 봉기 후 인본주의적 마르크스주의를 고수하여 강제 은퇴당했고 1961년 서독으로 망명했다. 그의 사상은 해방신학과 1968년 학생운동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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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5–1908뮌헨·뷔르츠부르크에서 철학·물리학·음악 수학, 『리케르트 비판』으로 박사
- 1912–1914하이델베르크에서 막스 베버·짐멜·루카치와 교류
- 1918『유토피아의 정신』 출간 — 초기 주저
- 1921『혁명의 신학자 토마스 뮌처』 출간
- 1920s베를린에서 자유기고가로 활동, 브레히트·벤야민·아도르노와 교류
- 1933–1938나치 집권 후 스위스·오스트리아·체코슬로바키아 망명
- 1935『이 시대의 유산』 출간 — 비동시성 개념으로 파시즘의 대중적 매력 분석
- 1938–1947미국 망명 중 『희망의 원리』 3부작 집필
- 1949–1957라이프치히 대학 철학 교수, 동독 국가상(1955), 독일 과학아카데미 회원
- 1957헝가리 봉기 후 인본주의적 마르크스주의 교수로 강제 은퇴
- 1961베를린 장벽 건설 후 서독 망명 — 튀빙겐 대학 객원교수
- 1967독일 서적상 평화상 수상
- 1968–1970s68운동과 해방신학에 영향, 루디 두치케와 교류
레닌·쑨원과 만나고 좌우합작을 택한, 분단 직전 조선의 마지막 통일주의자
“혁명가는 침상에서 죽는 법이 없다. 나는 거리에서 죽을 것이다.” 수차례 테러를 겪으며 자식들에게 남긴 말. 1947년 7월 19일, 혜화동 로터리에서 백의사의 총에 쓰러졌다.
1918년 신한청년당을 결성, 3·1운동의 도화선이 된 2·8독립선언을 주도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창립에 참여하고, 1922년 모스크바에서 레닌·트로츠키와 면담했으며 쑨원의 권유로 중국국민당에 가입했다. 1945년 8월 총독부로부터 평화적 치안권 이양을 받아내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 조선인민공화국 부주석이 되었다. 1946~47년 김규식과 좌우합작운동을 이끌며 통일정부를 추진했으나, 극우단체 백의사에 암살당했다. 남북 모두가 공식 추모한 유일한 정치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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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8상하이에서 신한청년당 결성, 당수 취임
- 19192·8독립선언 주도;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부 차장
- 1920–1922고려공산당 상하이파 입당; 모스크바 원동피압박민족대회 참석, 레닌·트로츠키 면담
- 1925–1929쑨원 권유로 중국국민당 입당, 국공합작 참여
- 1933–1936조선중앙일보 사장; 조선체육회 회장
- 1944비밀결사 건국동맹 결성, 전국 조직화
- 1945.8–9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조선인민공화국 부주석
- 1946–1947좌우합작운동 전개, 근로인민당 위원장
고트발트 정부에 남아 '합법성'을 부여하고 쿠데타 2주 만에 체르닌 궁전 아래에서 죽은 비공산당 외무장관
1947년 7월 모스크바에서 마셜 플랜 거부를 강요받고 돌아온 마사리크는 '나는 주권국의 장관으로 떠났다가 스탈린의 하인으로 돌아왔다'고 말했다.
체코슬로바키아 초대 대통령 토마시 마사리크의 아들로, 1925년부터 13년간 주영 공사를 지내고 2차 대전 중 런던 망명정부 외무장관으로 BBC 방송을 통해 점령지 조국과 매주 연결된 상징이 되었다. 1947년 7월 스탈린에게 마셜 플랜 참여 거부를 강요받은 뒤 '나는 스탈린의 하인으로 돌아왔다'고 토로했으며, 1948년 2월 공산당 쿠데타 때 사임하지 않고 고트발트 정부의 유일한 비공산당 장관으로 남아 체제 이행에 형식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쿠데타 2주 후 체르닌 궁전에서 투신 또는 피살된 시신으로 발견되었고, 자살인지 타살인지 반세기 넘게 결론이 나지 않은 그의 죽음은 서방에 충격을 주어 마셜 플랜 의회 통과를 촉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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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9–1922주미 체코슬로바키아 대리공사
- 1922–1925외무장관 보좌관
- 1925–1938주영 체코슬로바키아 전권공사
- 1940–1945체코슬로바키아 망명정부 외무장관
- 1945–1948체코슬로바키아 외무장관
알바니아의 의사·정치인, 인민공화국의 공식 첫 국가수반
제헌의회는 1946년 1월 11일 개회해 같은 날 인민공화국을 선포했고, 3월 16일 인민의회로 전환되었다. 다른 기록은 선출 1월 10·12일(저신뢰 계보), 퇴임 7월 31일로 적는다.
알바니아의 의사·정치인. 1887년 2월 5일 오스만 제국 지로카스트라에서 태어나 이스탄불에서 의학을 공부했고, 1924년 조구 암살 시도로 2주간 수감되고 판 놀리의 6월 혁명을 지지했으며, 1925년 망명지에서 반조구 KONARE를 함께 세웠다. 1939년 이탈리아 침공 후 점령정부 국가평의회에 참여했다가 이를 실책으로 여기고 민족해방운동에 합류해 1944년 페르메트 회의에서 반파시즘 민족해방평의회 의장이 되었다. 1946년 제헌의회 의장이 되었고 인민의회 상임간부회 의장으로 1953년까지 공식 국가수반을 지냈으나, 실제 권력은 노동당 제1서기 엔베르 호자에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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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4–1920알바니아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1914년 지로카스트라 대대과 블로러에서 근무하고 빈에 파견되었으며, 1915~1918년 발시 시의, 1920년 티라나 병원 의사
- 1923–1924두러스 시의사
- 1924조구 암살 시도로 2주간 수감, 판 놀리의 6월 혁명 지지 후 망명, 궐석 재판에서 사형 선고
- 1925–1932반조구 KONARE 공동 창립에 참여, 제네바에서 기관지 《리리아 콤베타레》 운영(1926년부터 주필)
- 1933–1939그리스 잔테에서 정치 망명, 1939년 이탈리아 침공 후 귀국
- 1940–1943점령정부 국가평의회 위원(1944년 1월 13일까지 명부에 남음), 1943년 8월 전선 합류; 이후 민족해방운동 참여
- 1943.9민족해방 총평의회 상임위원회 의장
- 1944.5페르메트 회의에서 반파시즘 민족해방평의회 의장(외교 담당)
- 1944.10–1946호자 의장의 민족해방 반파시즘 위원회에서 외무장관(사료에 따라 1946년 2월 9일 또는 3월 22일까지)
- 1946–1954지로카스트라 대의원(1945년 12월 2일·1950년 5월 28일 선거)
- 1946.1–1953제헌의회 의장, 인민의회 전환 후 상임간부회 의장으로 공식 국가수반(영어 위키백과는 제헌의회 의장, ShtetiWeb은 1월 12일 선출·7월 31일까지로 기록)
- 1952–1953동생 베심 니샤니가 인민정부에 대한 선전 혐의로 체포되고(1952년 10월 1일 체포·8개월 예심구금) 부인과 결별; 1953년 우익지 보도는 부인의 강제퇴거·가택연금과 니샤니의 사실상 포로 상태를 전함
- 1953.7공식적으로는 7월 24일 건강을 이유로 사임을 요청하고 8월 1일 하지 레시가 후임했으며, 호자가 강제로 사임시켰다는 기록도 있다
동맹망으로 냉전을 밀어붙인 미국 외교가
1954년 베를린 회의에서 그는 자유선거 없는 전독일 정부 구상을 거부하고 서방의 선거 절차를 내세웠다.
존 포스터 덜레스는 변호사 출신의 미국 외교가로, 전후 국제질서를 동맹과 군사적 억지의 틀로 재편하려 했다. 그는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국무장관으로서 대소 봉쇄를 넘어 공산주의 세력의 후퇴를 압박하는 노선을 폈고, NATO를 중심으로 서방의 결속을 강화했다. 1954년 베를린 회의에서 그는 몰로토프의 집단안보 구상과 전독일 정부 제안에 맞서 자유선거를 거친 통일을 주장했으며, 그해 서독의 NATO 가입을 관철해 유럽 분단의 제도화를 선택했다. 이 노선은 서방 진영의 안정과 미국의 영향력을 넓혔지만, 이란·과테말라 정권 전복 지원과 핵 위협을 포함한 개입주의라는 책임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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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8프린스턴대학교 졸업
- 1911설리번 앤드 크롬웰 국제변호사
- 1919파리 강화회의 미국 대표단 법률고문
- 1945–1950유엔 회의·총회 미국 대표 및 외교 고문
- 1950–1952트루먼 대통령 대일 강화조약 특별고문
- 1953–1959미국 국무장관
- 1954베를린 회의 참가, 서독 NATO 가입 협상 주도
- 1959국무장관 사임, 5월 24일 사망
독립운동가이자 언어학자로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국가원수를 지낸 연안파 지도자
1948년 7월, 북조선인민회의에서 인공기를 채택한 날, 김두봉이 직접 태극기를 내리고 새 국기를 게양했다. 1년 전만 해도 그는 소련 장군에게 태극기의 철학적 의미를 열정적으로 설명하던 사람이었다.
주시경 문하의 한글학자 출신 독립운동가로, 옌안에서 조선독립동맹을 이끌었다.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국가원수에 올랐으나 실권은 김일성에게 있었고, 1958년 8월 종파 사건으로 숙청·실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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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8–1916주시경 문하에서 한글 연구, 《말모이》 편찬 참여
- 19193·1 운동 참가 후 상하이 임시정부 망명
- 1920–1930년대상하이에서 공산주의 운동과 언어학 연구 병행
- 1942–1945옌안에서 조선독립동맹 결성, 옌안파 지도
- 1946.2–1946.8조선신민당 위원장
- 1946.8–1949.6북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 1948.9–1957.9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 초대 국가원수
- 1957–19588월 종파 사건 연루로 모든 직위 해임, 실종
분단 베를린의 목소리가 된 사회민주주의자
“세계의 민족들이여, 이 도시를 보십시오. 이 도시와 이 민족을 저버려서는 안 됩니다!”
에른스트 로이터는 사회민주주의와 공산주의를 오가며 20세기 유럽의 격변을 직접 겪은 독일 정치가였다. 나치의 박해와 터키 망명을 거친 뒤 베를린으로 돌아와 도시 행정과 사회민주주의를 결합한 지도력을 보여 주었다. 베를린 봉쇄 때 그는 서베를린 시민의 결의를 국제사회에 호소했고, 분단된 도시를 자유와 자치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그의 경력은 혁명적 급진주의에서 민주적 지방정치로 이동한 한 세대의 긴장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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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2독일 사회민주당 입당
- 1918–1919볼가 독일인 자치 소비에트 공화국 초대 의장
- 1921독일 공산당 베를린 지구 제1서기
- 1926–1931베를린 교통 담당 시의원
- 1931–1933마그데부르크 시장
- 1935–1946앙카라대학교 도시계획 강사·터키 정부 고문
- 1947베를린 시장 당선, 소련 점령당국의 승인 거부
- 1948–1953서베를린 시장, 1951년부터 통치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