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미국 국제질서를 설계한 실무가
흐루쇼프는 미국의 군비 증강이 전쟁 위협이라고 경고했다.
존 J. 매클로이는 법률가 출신의 미국 외교·안보 관료이자 금융가로, 전쟁 수행과 전후 국제질서 구축을 잇는 통로였다. 그는 일본계 미국인 강제수용과 독일 전범 사면·감형 같은 결정에 관여하며 미국 권력의 폭넓은 책임과 그 모순을 드러냈다. 1961년 존 F. 케네디의 군비축소 고문으로서 소련과 시험금지 및 군비축소를 협상했고, 7월 모스크바 회담에서 베를린 위기를 둘러싼 군사적 긴장을 직접 다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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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7–1919미 육군 포병 장교, 프랑스 전선 복무
- 1921–1940뉴욕 변호사, 월스트리트 법률가
- 1941–1945전쟁부 차관보, 전시 동원·정보·안보 정책 담당
- 1947–1949세계은행 제2대 총재
- 1949–1952미국 독일 고등판무관
- 1953–1960체이스맨해튼은행 회장
- 1953–1970외교협회 이사회 의장
- 1961케네디 대통령 군비축소 고문
1948년 2월 쿠데타로 체코슬로바키아를 인민민주주의 체제로 전환시킨 공산당 지도자
우리는 체코슬로바키아 프롤레타리아트의 당이며 우리 최고 사령부는 바로 모스크바다. 우리는 러시아 볼셰비키에게서 당신들의 목을 비트는 법을 배우러 모스크바에 간다. 그 웃음보는 찢어 놓겠다! 1929년 12월 21일 체코슬로바키아 국회 첫 연설에서
모라비아의 가난한 농가 출신으로 1921년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KSČ) 창립에 참여했고, 1929년 제5차 대회에서 서기장이 되어 사망까지 당을 이끌었다. 코민테른 서기(1935–1943)를 지내며 인민전선 노선을 추진했고, 1945년 5월 프라하로 돌아와 부총리와 민족전선 의장을 맡았다. 1946년 총선에서 KSČ가 38%를 얻은 뒤 총리가 되었고, 1948년 2월 정변으로 권력을 장악해 그해 6월 14일 체코슬로바키아 최초의 공산당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대통령으로서 산업 국유화와 농업 집단화를 밀어붙이며 밀라다 호라코바(1950년 처형), 루돌프 슬란스키와 블라도 클레멘티스(1952년 처형) 등의 재판을 만들었고, 1953년 3월 14일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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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1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KSČ) 창립 참여
- 1929–1945KSČ 중앙위원회 서기장
- 1935–1943코민테른 서기
- 1938–1945모스크바 망명, 체코슬로바키아 공산주의 저항 지도
- 1945–1946체코슬로바키아 부총리
- 1946–1948체코슬로바키아 총리
- 1948–1953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13일의 총리
1958년 6월 비공개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뒤 사면을 거부하며 말했다. "유일한 위안은 언젠가 헝가리 민족과 국제 노동계급이 나에 대한 이 중대한 혐의를 벗겨 주리라는 확신이다."
헝가리의 공산주의자. 제1차 세계대전 중 러시아군 포로로 볼셰비키에 가담했고, 모스크바 망명기에 농업 문제 전문가가 되었다. 1945년 농업장관으로 토지개혁을 집행했으나 1948~49년 집단화 속도를 두고 라코시·게뢰와 맞섰다가 밀려났다. 1953년 7월 총리가 되어 '새 노선'으로 투자 축소, 개인 농가 보장, 억류수용소 폐쇄를 추진했으나 1955년 해임되었다. 1956년 혁명 때 총리로 복귀해 다당제·중립을 선언했고, 1958년 비공개 재판 뒤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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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6–21러시아군 포로, 적군 가담, 볼셰비키 입당
- 1930–44모스크바 망명, 코민테른 농업 연구
- 1945–46농업장관, 토지개혁 집행
- 1953–55총리, 「새 노선」: 수용소 해산, 농민 부담 경감
- 1955실각·출당
- 1956.10–11봉기의 총리, 다당제·중립 선언
- 1958/1989비밀 재판 후 처형, 1989년 영웅광장 재매장
37년간 프랑스 공산당의 2인자, 의회와 지하를 오간 스탈린주의자
「기회주의, 합법주의, 의회 환상이 있었다… 우리가 당 앞에서 용기 있게 이 자기비판을 수행한다면 대중 사이에 투쟁에 유리한 분위기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1947년 9월 코민포름 창립 회의에서
20구 파리에서 레옹 블룸을 꺾고 국회의원이 된 이후 37년간 프랑스 공산당 지도부에서 모리스 토레즈의 2인자로 활동한 정치인. 제2차 세계대전 중 점령 하 프랑스에서 지하당을 지휘했으며, 전후 국민의회 부의장을 지냈다. 1947년 코민포름 창립 회의에서 PCF의 참여 정부 노선을 '의회 환상'이었다고 자인하며 마셜 플랜에 대한 투쟁적 반대로의 전환을 상징했다. 1969년 대통령 선거에서 21.3%를 득표, 프랑스 공산당 사상 최고 득표율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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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5–19171차 대전 참전, 베르됭에서 부상 후 포로
- 1920–1926PCF 창립 당원 → 중앙위원회, 국회의원 당선
- 1928–1936레옹 블룸을 꺾고 재선, 정치국 입성, 국회 부의장
- 1940–1944지하 PCF 책임자, 프랑스 레지스탕스 지도
- 1945–1947제헌의회·국민의회 의원 및 부의장, 3당 연정 참여
- 1947–1953코민포름에서 자기비판 → 마셜 플랜 반대 투쟁, 토레즈 병중 당 대행
- 1959–1975상원 의원 및 공산당 원내대표, 1969년 대선 21.3% 득표
- 1975몽트뢰유에서 사망, 페르 라셰즈에 안장
억압을 집행하고 스탈린의 숙청에 쓰러진 불가리아 2인자
재판에서 그는 예심 자백을 철회했고, 최후 진술에서 그 자백이 고문으로 짜낸 것임을 밝히려 했다.
불가리아 공산당 정치국원·부총리로, 지하운동 시절부터 게오르기 디미트로프에 이은 당의 실질 2인자였다. 1944년 9월 조국전선 정권에서 중앙위원회 서기를 맡아 인민재판소 설립을 주도하며 억압의 집행자였지만, 소련의 담배 매입가에 맞서 경제 독자성을 지키려다 스탈린과 충돌했다. 1949년 체포되어 영국 간첩·티토 결탁 혐의로 기소됐고, 법정에서 자백을 철회한 유일한 동유럽 전시재판 피고로 12월 16일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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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불가리아 공산당 입당
- 1924공산 출판 배포로 8년형 선고
- 1931당 중앙위원회 위원, 당 기관지 편집
- 1937정치국원 겸 중앙위원회 서기
- 1942지하 저항 조직 중 종신형 선고
- 1945–48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46–49부총리 · 전력화부 장관, 경제 정책 총괄
- 1949해임·체포·재판 후 교수형
통화 개혁과 사회적 시장경제를 설계한 서독 경제정치가
1948년 6월 21일, 그는 라디오를 통해 일부 공산품의 가격 통제와 강제 배급을 폐지한다고 발표했다.
루트비히 에르하르트는 전후 서독의 경제 질서를 자유로운 경쟁과 사회적 안전의 결합으로 구상한 경제학자이자 정치가였다. 1948년 비조네 경제행정 책임자로서 통화 개혁을 준비하고 독일마르크 도입과 맞물려 가격·생산 통제를 단계적으로 풀어 서독 경제 회복의 제도적 출발을 열었다. 그의 역할은 흔히 ‘경제 기적’의 단독 설계자로 신화화되지만, 연합국의 개혁과 국제 경기, 노동자와 기업의 생산 회복이 함께 작용한 결과였으며 가격 자유화는 초기 생활비 상승과 노동계급의 저항도 낳았다. 이후 경제부 장관과 수상으로서 그 질서를 서독의 국가 정체성으로 굳혔으나, 경기 침체와 연정 붕괴 속에서 1966년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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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9–1922뉘른베르크 상과대학에서 경영학 수학
- 1925프랑크푸르트대학교 경제학 박사
- 1947비조네 ‘화폐·신용 특별기구’ 위원장
- 1948–1949비조네 경제행정청장
- 1949–1963서독 경제부 장관, 1957년부터 부수상 겸임
- 1963–1966서독 제2대 연방수상
- 1966–1967기독교민주연합 당수
- 1949–1977독일 연방의회 의원
전쟁과 탈식민화의 영국 외교가
1945년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 네 연합국 외무장관이 본회의 의장을 교대로 맡았고, 이든도 그 의장단에 포함됐다.
앤서니 이든은 제1차 세계대전 참전 경험을 바탕으로 국제연맹과 집단안보를 중시한 영국 보수 정치가였다. 그는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부상 속에서 세 차례 외무장관을 지냈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윈스턴 처칠의 핵심 외교 보좌역으로 소련 및 연합국과의 전후 질서를 협상했다. 1945년 얄타 회담과 샌프란시스코 국제기구회의에서 영국을 대표하며 전후 국제기구 형성에 참여했지만, 총리 재임 중 수에즈 침공을 추진해 영국 제국의 한계와 미국 의존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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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5–1919영국 육군 장교, 서부전선 복무
- 1923–1957워릭·리밍턴 지역 하원의원
- 1931–1934외무차관
- 1935–1938외무장관
- 1940–1945외무장관, 전쟁내각 각료
- 1945얄타 회담 및 샌프란시스코 회의 영국 대표
- 1951–1955외무장관
- 1955–1957영국 총리, 보수당 당수
서베를린 봉쇄에 공수로 맞서 324일을 버텨낸 미군 지구 군정장관
봉쇄 하루 만인 1948년 6월 25일, 클레이는 트루먼의 공식 승인을 기다리지 않고 공수 작전을 스스로 명령했고, 살아남은 베를린 시민들은 그를 '도시의 아버지'라 부르며 무덤에 '우리 자유의 수호자'라는 감사 비문을 새겼다.
그루지야 출신의 공병 장교로, 전시 보급 지휘로 두각을 나타낸 뒤 1947년 점령 독일 미군 지구 군정장관이 되었다. 1948년 소련이 서베를린을 봉쇄하자 무력 호송대 대신 공수를 택해 직접 명령을 내렸고, 베를린 방위가 곧 미국의 명예이자 서유럽의 운명이라고 주장하며 324일의 공수를 끝까지 이끌었다. 1949년 퇴역한 뒤 사업가와 역대 대통령의 고문을 지냈고, 1961년 베를린 장벽 위기 때 케네디의 특사로 돌아와 체크포인트 찰리의 미군 전차를 소련 전차와 대치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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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7그루지야주 메리에타에서 알렉산더 스티븐스 클레이 상원의원의 아들로 출생
- 1918웨스트포인트 졸업, 공병 장교로 임관
- 1942최연소 준장으로 승진, 아이젠하워 휘하 물자국장
- 1945–1946아이젠하워 부관, 독일 연합군 정부 부군정장관
- 1947–1949미군 지구 군정장관 겸 유럽 주둔 미군 사령관
- 1948.06.25베를린 공수 작전 개시 명령
- 1949–1962퇴역, 컨티넨털 캔 사 회장
- 1961–1962케네디의 베를린 특사, 체크포인트 찰리 미소 전차 대치
라코시 시대 문화정책의 총감독
1953년 6월 소련 지도부는 라코시의 권력 집중을 비판하고 헝가리 지도부 개편을 논의했다. 레버이는 초청받지 못했고, 그달 정치위원회에서도 제외됐다.
부다페스트의 유대계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1918년 헝가리 공산당 창당에 참여했다. 1934~44년 소련에 살았고, 귀국 뒤 1945~50년 당 기관지 「서버드 네프」 편집장을 지냈다. 1948년부터 1953년까지 헝가리 문화생활 전반을 통제했고 1949년부터 문화장관을 겸했다. 1952년부터 라코시에게 밀려나 1953년 6월 크렘린 회담에 초청받지 못했고, 몰로토프는 그가 이념 분야의 「모든 것을 한 몸에」 쥐었다고 비꼬았다. 1953년 정치위원회에서 빠졌다가 1956년 잠시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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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7반전 좌파 잡지 「테트」와 후속지 「마」 편집진에 합류했다.
- 1918헝가리 공산당 창립 모임에 참여하고 당 기관지 「뵈뢰시 우이사그」 편집진에서 일했다.
- 1930–19341930년 체포되어 1931년 3년 6개월형을 선고받았다. 1934년 석방된 뒤 프라하를 거쳐 모스크바로 갔다.
- 1944–19451944년 헝가리로 돌아와 당 중앙위원회 수립에 참여했고, 1945년 당 선전·언론부장이 됐다.
- 1945–1950당 중앙 일간지 「서버드 네프」 편집장을 지냈다.
- 1949–1953공교육부 장관을 지냈다.
- 1953–1958대통령평의회 부의장을 지냈다.
- 19567월 당 중앙위원회에서 정치위원회에 복귀했으나, 10월 헝가리 혁명 때 소련으로 이송됐다.
- 1957헝가리 사회주의노동자당 임시집행위원회 고문으로 귀국해 당 중앙위원회에 선출됐고, 6월 당내 논쟁에서 패배한 뒤 다수파의 견해를 수용했다.
「모스크바파」의 재무장관, 1952년 화폐개혁을 빌미로 숙청되어 아이우드 감옥에서 죽은 세케이 헝가리인 공산주의자
1952년 2월 29일부터 3월 1일까지 열린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화폐개혁의 「과오」는 루카 한 사람의 책임으로 돌려졌다. 그를 변호하려 한 파우케르와 제오르제스쿠는 석 달 뒤 같은 자리에서 같은 길을 밟았다.
트란실바니아 세케이 지방의 헝가리인 가정에서 루커 라슬로로 태어나 철도 공장 노동자로 일했고, 1919년 헝가리 혁명 뒤 루마니아 노동운동에 들어가 1920년대 초 공산당에 가입했다. 여러 차례 투옥되었으며, 1940년 체르너우치 감옥에 있다가 소련군의 북부 부코비나 점령으로 풀려나 소련 시민이 되었고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공화국 최고회의 대의원으로 뽑혔다. 전쟁 중 모스크바에서 아나 파우케르와 함께 망명 루마니아 공산주의자들을 이끌었고, 1944년 귀국해 정치국원·중앙위 서기가 되었다. 1947년 11월부터 재무장관으로서 화폐 안정화와 국유화 재정을 맡았으나, 1952년 1월 화폐개혁의 실행 오류가 빌미가 되어 3월 초 전원회의에서 「우편향」으로 규탄되고 8월 체포되었다. 1954년 10월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종신형으로 감형되어 1963년 아이우드 감옥에서 죽었다. 1968년 차우셰스쿠 지도부의 당 전원회의가 그를 사후 복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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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9루마니아 노동운동 참여
- 1920년대–1940공산당 입당, 여러 차례 투옥
- 1940체르너우치 감옥 석방, 소련 시민·우크라이나 최고회의 대의원
- 1944귀국, 정치국원·중앙위 서기
- 1947–1952재무장관
- 1952「우편향」 규탄, 해임·체포
- 1954사형 선고, 종신형 감형
- 1963아이우드 감옥에서 사망
- 1968사후 복권
소농당 출신의 명목상 국가원수
1953년 6월 소련 지도부는 실권이 거의 없던 도비를 헝가리 대표단에 포함했다. 모스크바의 초청은 그의 국가원수직이나 소농당 경력에 대한 오해, 또는 국가 간 회담임을 드러내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다.
쇠니의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6년만 마치고 날품팔이로 일했다. 1919년 평의회 공화국을 지지했고 농업노동자 운동에 참여했다. 소농당 좌파 지도자로 공산당과 손잡아 1948~52년 총리, 1952~67년 대통령평의회 의장으로 명목상 국가원수를 지냈다. 1953년 6월 크렘린 회담에 초청되었지만, 라이너는 소련 지도부가 그의 실권이나 농민 사이의 권위를 잘못 짐작한 탓이었을 것이라고 본다. 협동조합의 강제 해산을 두려워해 몰로토프의 해산 제안에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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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1952헝가리 총리를 지냈다.
- 1952–1967헝가리 인민공화국 대통령평의회 의장으로 국가원수를 지냈다.
프랑크푸르트학파 철학자이자 1960년대 신좌파의 대표적 이론가
'그것은 가장 진전된 위치에서 위대한 거부, 즉 존재하는 것에 대한 항의다' — 《일차원적 인간》(1964)
헤르베르트 마르쿠제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핵심 철학자로, 마르크스주의와 프로이트 정신분석을 결합하여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 이론을 전개했다. 《에로스와 문명》(1955)에서 자본주의의 억압 구조를 분석하고 해방된 에로스의 유토피아적 가능성을 탐구했으며, 《일차원적 인간》(1964)에서는 기술적 풍요가 비판 의식을 잠식하는 현대 산업사회를 '일차원적 사회'로 규정하며 억압적 탈승화 개념을 제시했다. 독일계 유대인으로 나치를 피해 미국에 망명, 전시 OSS에서 근무하고 브랜다이스대와 UC샌디에이고에서 가르치며 1960년대 학생 운동과 신좌파의 사상적 지주가 되었다. '위대한 거부'로 상징되는 그의 급진적 사유는 비판 이론과 해방 정치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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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2제네바 사회연구소(프랑크푸르트학파) 합류
- 1934–1942컬럼비아대학교 사회연구소 연구원, 뉴욕
- 1942–1951OSS 및 국무부 분석관, 중앙유럽과장
- 1954–1965브랜다이스대학교 정치이론 교수
- 1965–1970캘리포니아대학교 샌디에이고 철학 교수
단 3개월 만에 혁명을 촉발한 마지막 스탈린주의 제1서기
1956년 10월 23일 밤 게뢰는 라디오 연설에서 학생 시위대를 향해 '우리 청년들에게 쇼비니즘의 독을 주입하려는 자들'이라고 규탄했고, 수 시간 내로 평화 시위는 혁명으로 바뀌었다.
헝가리 공산운동의 핵심 인물로, 1918년 창당과 함께 입당해 1919년 평의회 공화국에서 활동했다. 코민테른 요원과 NKVD 공작원으로 프랑스·스페인 등지에서 활동했으며, 스페인 내전에서는 '바르셀로나의 도살자'로 불리며 트로츠키주의자 숙청을 지휘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라코시의 오른팔로 헝가리 경제 스탈린화를 주도했고, 1956년 7월 라코시 후임 제1서기가 되었으나 개혁 요구를 거부했다. 10월 23일 저녁 시위대를 '파시스트'로 규정한 라디오 연설은 봉기를 혁명으로 폭발시켰고, 25일 사임 후 소련으로 도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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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8–19헝가리 공산당 창당 가입, 평의회 공화국 청년공산주의자 활동
- 1925–36코민테른·NKVD 공작원: 프랑스·벨기에·스칸디나비아 등지에서 활동
- 1936–39스페인 내전: 카탈루냐 통일사회당(PSUC) 배후 지도, 트로츠키주의자(POUM) 숙청 지휘
- 1940–44모스크바 망명: KPV 해외국 라코시와 공동 지도, 포로·적군 대상 선전
- 1945–48최고국가평의회 위원, 통상·교통장관
- 1948–53MDP 정치국원·부서기장, 재무장관: 중공업화·집단화로 경제 스탈린화 주도
- 1953–56.07내무장관·부총리; 1956년 7월 MDP 제1서기
- 1956–8010월 25일 사임, 소련 도피; 1960년 귀국, 1962년 출당, 은둔 중 사망
프랑스 극동원정군의 마지막 사령관으로 디엔비엔푸 요새화를 결정해 1954년 패배를 맞은 장군
1953년 11월 디엔비엔푸에 프랑스군을 투입하고 요새화를 명령한 나바르는 1954년 3월 시작된 포위전에서 철수를 명하지 않았으며, 5월 요새가 함락되어 프랑스의 협상 입지가 무너졌다.
1차·2차 세계대전을 치른 프랑스 육군 장군으로, 1953년 5월 살랑의 뒤를 이어 인도차이나 프랑스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부임 직후 본국 정부에 이 전쟁은 이길 수 없고 기대할 수 있는 최선은 교착이라고 보고했다. 도시와 주요 도로를 지키며 베트민을 협상으로 몰아넣는다는 「나바르 계획」에 따라, 라오스로 가는 베트민의 길목을 막으려 1953년 11월 디엔비엔푸에 낙하산 부대를 내려 요새를 세웠다. 1954년 5월 요새가 함락되면서 프랑스의 패배가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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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6–1918생시르 사관학교에 입학하고 제1차 세계대전 전선에서 기병 소대장으로 복무했다.
- 1942–1945독일에 맞선 활동으로 소환되자 지하로 들어가 프랑스 저항운동에 참여했고, 프랑스 해방전에서 제1군 기갑연대를 지휘했다.
- 1945–1953준장이 되어 독일에서 복무했으며 제5기갑사단장과 알퐁스 쥐앵 원수 참모장을 지냈다. 1948~1949년에는 알제리에서 사단을 지휘했다.
- 1953–1954인도차이나 프랑스군 사령관으로서 디엔비엔푸 전투를 지휘했으며, 요새 함락 뒤 교체되었다.
- 1956육군에서 퇴역하고 인도차이나 전쟁에 관한 저서 《인도차이나의 고통》을 출간했다.
전후 폴란드 국가기구를 이끈 공산주의자
1956년 3월 비에루트의 장례식에서 “비에루트는 죽었지만 단결된 우리 당은 살아 있다”고 말했다. 같은 달 제6차 전원회의는 오하프를 제1서기로 선출했고, 고무우카가 제1서기가 된 것은 1956년 10월 제8차 전원회의였다.
제철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나 1923년 폴란드 공산당에 입당한 폴란드의 공산주의 정치인이자 사단장급 장군이다. 1925년과 1936년 두 차례 체포되어 감옥에서 보냈고, 1939년 이후 소련에서 폴란드 애국자 동맹과 폴란드 노동자당 창립에 참여했으며 소련 편성 폴란드군의 정치장교를 맡았다. 전후 실레지아 주지사와 각료회의 부의장을 거쳐 1952년 11월 20일 국가평의회 의장에 임명되어 죽을 때까지 재임했고, 주지사 시절에는 소련의 인력·설비 반출 중단을 추진했다. 1956년 3월 제6차 전원회의에서 제1서기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오하프가 선출되었고, 이후 당내 강경파인 나톨린 계열로 분류되었다. 1964년 8월 7일 암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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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3–1939폴란드 공산당 활동가, 투옥
- 1943–1945소련 편성 폴란드군 정치장교, 정치교육 담당 부사령관
- 1944–1948폴란드 노동자당 정치국 위원
- 1945–1948실레지아-돔브로바 주지사
- 1948–1954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중앙위원회 서기, 정치국 위원
- 1949–1952각료회의 부의장
- 1952–1964폴란드 국가평의회 의장
티토와 결별한 당내 스탈린 지지자
1948년 4월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그는 티토의 대소련 답신에 반대했다.
스레텐 주요비치는 세르비아계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이자 노동운동 조직가로, 제1차 세계대전과 유고슬라비아 인민해방전쟁을 거쳤다. 그는 전쟁기 파르티잔 봉기를 조직하고 최고사령부에서 활동했으며, 해방 뒤 재무장관을 맡았다. 1948년 티토와 스탈린의 충돌에서 그는 소비에트 노선을 지지한 유일한 반대자로 중앙위원회 회의에 나섰고, 그 선택으로 당과 공직에서 축출되어 구금되었다. 1950년 자기비판 뒤 석방되고 훗날 당에 복귀했지만, 그의 경력은 혁명적 국제주의와 유고슬라비아의 자율성 사이의 균열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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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8–1924귀국 후 노동운동·노동조합 활동
- 1924–1933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입당, 당 조직 활동
- 1938–1940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중앙위원
- 1941–1944세르비아 파르티잔 최고사령부·참모 활동
- 1945–1947유고슬라비아 연방 재무장관
- 1948티토·스탈린 분열에서 인포르비로 노선 지지
- 1948–1950가택연금과 수감, 자기비판 뒤 석방
- 1950–1971당 복귀, 《보르바》·경제연구기관 간부
레지스탕스 의장에서 마셜 플랜의 설계자까지, 몰로토프에게 유럽 분열이 소련 탓이라고 응수한 외무장관
1947년 7월 2일 파리 3국 회담 마지막 세션, 몰로토프가 마셜 플랜을 '유럽을 둘로 가르는 음모'라고 비난하자 비도는 '유럽을 분열시키는 것은 바로 소련의 행동'이라고 조용히 응수했고, 이튿날 베빈과 함께 16개국 초청장을 발송했다.
1943년 장 물랭 체포 후 국민저항위원회(CNR) 의장직을 이어받아 프랑스 레지스탕스를 이끌었고, 해방 후 기독교민주주의 정당 인민공화운동(MRP)을 창당했다. 외무장관으로서 1947년 파리 3국 회담에서 몰로토프의 '유럽 분열' 비난에 맞서 소련의 행동이야말로 유럽을 가르고 있다고 정면 반박했고, 소련 이탈 후 영국과 함께 서유럽 16개국을 규합해 마셜 플랜 수용을 주도했다. 1946년과 1949년 두 차례 총리를 지냈으며 디엔비엔푸 포위 당시 미국에 원자폭탄 지원을 요청할 만큼 식민지 전쟁에 매달렸다. 알제리 독립에 반대하며 1962년 비밀리에 '제2의 CNR'을 조직했다가 면책특권을 박탈당하고 브라질로 망명, 1968년 사면으로 귀국했으나 영향력은 회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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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9프랑스 알리에주 물랭 출생
- 1925역사·지리 교수자격시험 수석 합격, 교사로 재직하며 기독교민주주의 언론 활동
- 1943–1944국민저항위원회(CNR) 의장, 장 물랭 후임으로 레지스탕스 통합 지도
- 1944–1946드골 임시정부 외무장관, 샌프란시스코 UN 창설회의 프랑스 수석대표
- 1947외무장관, 파리 3국 회담에서 몰로토프와 대치하며 마셜 플랜 수용 주도
- 1946, 1949–1950두 차례 총리(임시정부 주석·제4공화국 수상)
- 1954외무장관, 디엔비엔푸 전투 위기 관리
- 1962–1968알제리 독립 반대로 면책특권 박탈, 브라질 망명, 1968년 사면 귀국
인도차이나 전쟁의 프랑스군 사령관이자 OAS 지도자였다.
살랑은 1952~1953년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군을 지휘한 뒤 알제리 주재 프랑스 정부 대표를 맡았다. 알제리 독립에 반대해 1961년 4월 장군들의 쿠데타에 가담하고, 실패 뒤 지하로 들어가 프랑스령 알제리의 유지를 주장하는 비밀 무장조직 OAS를 창설·지휘했다. OAS는 알제리와 프랑스에서 테러와 폭력을 벌였다. 1962년 체포되어 종신 구금형을 받았으며, 1968년 사면·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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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2–1953인도차이나 프랑스군 총사령관
- 1958–1960알제리 주재 프랑스 정부 대표
- 1961–19624월 쿠데타 가담, 이후 OAS 지도자
- 1962체포되어 종신 구금형 선고
- 1968사면·복권
기업 권력에서 국제질서의 설계자로 이동한 외교가
얄타 회담 의정서에는 미국 대표로 ‘E. R. 스테티니우스 주니어’의 서명이 남았다.
에드워드 스테티니우스는 대기업 경영과 국가 동원 행정을 거쳐 제2차 세계대전 말 미국 외교의 중심에 선 정치가였다. 무기대여 원조를 관리하며 동맹국의 전쟁 수행을 뒷받침했고, 얄타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함께 전후 유럽과 국제기구의 틀을 협의했다. 그는 얄타 의정서에 미국 대표로 서명한 뒤 유엔 창설회의를 이끌었지만, 소련과의 긴장을 유엔을 통한 협력으로 풀려 한 구상은 트루먼 행정부와 충돌했다. 이 경력은 기업과 국가의 전시 동원이 전후 다자주의로 이어지는 동시에 냉전의 문턱에서 제약받은 과정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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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6제너럴 모터스 입사, 존 리 프랫의 보좌역
- 1931제너럴 모터스 공공·산업관계 담당 부사장
- 1934–1938US스틸 이사, 1938년 이사회 의장
- 1939–1941전쟁자원위원회와 생산우선순위 기관에서 전시 동원 담당
- 1941–1943무기대여 원조 행정관
- 1943–1944미국 국무부 차관
- 1944–1945미국 국무장관, 얄타 회담 미국 대표
- 1945–1946초대 미국 유엔대사
조선공산당 재건의 주역, 남조선로동당 당수
1927년 신의주 법정에서 광인을 가장해 자신의 배설물을 먹는 극단적 연기로 병보석을 얻어내고, 곧 모스크바로 탈출했다.
일제강점기부터 해방정국까지 조선공산주의운동을 이끈 최고지도자.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고 남조선로동당을 이끌었으나, 월북 후 김일성에게 밀려 한국전쟁 패전의 책임으로 숙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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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1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 입당, 상하이에서 활동
- 1922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원동인민대표대회 참석
- 1925조선공산당 창당 참여,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 1928–1930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 수학;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31–1940코민테른 동양비서부 활동; 상하이·국내 지하운동 지도
- 1945조선공산당 재건, 당수 겸 서기장 취임
- 1946–1949남조선로동당 창당, 부위원장(사실상 당수)
- 1948–1953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수상 겸 초대 외무상
유엔 안보리에서 소련의 쿠바 미사일 배치를 추궁한 두 번의 대선 후보
1962년 10월 25일 유엔 안보리에서 소련 대표 발레리안 조린에게 "통역을 기다리지 마십시오. 예입니까, 아니오입니까?"라고 몰아붙였고, 그가 답변을 거부하자 "지옥이 얼어붙을 때까지 답변을 기다리겠습니다"라고 말한 뒤 미사일 사진을 공개했다.
애들레이 유잉 스티븐슨 2세(1900~1965)는 미국의 정치가이자 외교관으로, 일리노이 주의 정치 명가 출신이며 1952년과 1956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에게 두 번 패했다. 일리노이 주지사(1949~1953년, 관행에 따라 31대 또는 33대로 계산)로는 주 경찰 인사에서 정치적 고려를 없애고 실적제를 도입했으며, 적색 공포기에 공직자의 충성서약을 요구하는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1949년 앨저 히스의 인품 증인으로 선서 진술을 했고, 이는 1952년 선거에서 매카시와 닉슨이 그를 공산주의에 무르다며 공격하는 데 쓰였다. 1961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유엔 대사로 재임했으며, 1965년 7월 14일 런던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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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0–1944해군장관실 수석 법률보좌관
- 1945국무장관 특별보좌관 · 유엔 준비위원회 미국 부대표
- 1948–1953제31대 일리노이 주지사
- 1952민주당 대통령 후보
- 1956민주당 대통령 후보 (재지명)
- 1961–1965유엔 주재 미국 대사
국가폭력에 맞선 변호사
그는 당국이 노동자들을 ‘훌리건’으로 갈라 부르는 논리를 거부하고, 국가의 폭력이 폭발의 조건을 만들었다고 법정에서 지적했다.
스타니스와프 헤이모프스키는 전후 폴란드에서 정치적 피고인과 사회적 약자를 변호한 법률가였다. 1956년 포즈난 노동자 봉기 뒤 그는 참가자들의 변호를 맡아, 사건을 단순한 범죄가 아니라 국가 정책과 보안기관의 폭력이 낳은 사회적 충돌로 심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변론은 강압 수사와 당국의 ‘훌리건’ 낙인을 법정에서 다투며 노동자들의 존엄과 법적 권리를 지켰다. 이후 그는 감시와 언론 공세, 거액의 벌금, 변호사 업무 정지로 보복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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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0쿠를란트 리바우에서 출생
- 1924바르샤바대학교 법학 졸업
- 1928–1930포즈난 지방법원 검사로 근무한 뒤 변호사 등록
- 1946최고국가재판소에서 아르투르 그라이저 변호
- 1956포즈난 6월 참가자 예지 스로카와 로만 불친스키 변호
- 1959폴란드 보안기관의 집중 감시 대상이 됨
- 1961변호사 업무 정지와 재정적 탄압을 받음
- 1969포즈난에서 사망
만주 항일투쟁을 이끌고 조선인민군 초대 총사령관을 지낸 국가원수
1955년 12월 박헌영 간첩 사건 재판장을 맡은 최용건은 박헌영에게 사형을 선고했으며,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의 선처 요청을 거절했다.
운남군관학교와 황푸군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뒤 만주에서 동북항일연군 제2로군 참모장과 제7군장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지휘했으며, 김일성·김책과 함께 만주파 트로이카를 형성했다. 1945년 귀국 후 조만식의 조선민주당을 공산주의 노선으로 전환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고,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과 함께 초대 민족보위상 겸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으로 취임해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의 최고위 현장 사령관을 지냈다. 1957년부터 1972년까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으로서 명목상 국가원수를 역임하며 김일성 체제의 대외적 얼굴로 활약했다. 1976년 사망 시 국장이 집행되었고,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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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3–1924운남군관학교 졸업
- 1925–1927황푸군관학교 교관
- 1936–1940동북항일연군 제2로군 참모장·제7군장
- 1942–1945소련 극동군 제88국제여단 부참모장
- 1946–1955조선민주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 1948–1957민족보위상 겸 조선인민군 총사령관
- 1957–1972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 1972–197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주석
중립 외교를 국가 전략으로 만든 장기 집권 대통령
1975년 헬싱키에서 35개국 정상과 대표를 맞이하며 분단된 유럽의 협상 무대를 열었다.
우르호 케코넨은 전후 핀란드의 국가 운영과 대외관계를 규정한 정치가로, 1956년부터 1981년까지 대통령을 지냈다. 그는 소련과의 긴장을 관리하면서도 핀란드의 서방 경제·정치적 연결을 유지하는 중립 외교를 발전시켰다. 1972년 11월 디폴리 예비협의를 핀란드에 유치하고 미국과 캐나다를 포함한 유럽안보협력회의의 틀을 다듬은 일은 그 외교의 절정이었다. 그의 통치는 안정과 국제적 중개의 성과를 남겼지만, 대통령 권한과 동방관계에 의존한 정치가 민주적 경쟁을 좁혔다는 논쟁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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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6–1932중앙탐정경찰청 법률가
- 1936–1937법무부 장관
- 1937–1939내무부 장관
- 1950–1953핀란드 총리
- 1954–1956핀란드 총리
- 1956–1981핀란드 대통령
- 1972–1975유럽안보협력회의 핀란드 개최와 중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