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충격요법의 설계자. 1989년 마조비에츠키 내각의 재무장관 겸 부총리로 임명되어 '발체로비치 계획'을 주도했고, 초인플레이션을 진압하고 가격 자유화와 통화 태환을 단행하며 동구권 최초의 급진적 시장 개혁을 실행했다. 개혁은 폴란드를 유럽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경제로 전환시켰으나 20%의 GDP 하락과 대량 실업을 동반했고, '발체로비치는 물러가라'라는 구호로 상징되는 격렬한 사회적 반발을 낳으며 1989년 체제전환의 약속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소련 철수 후에도 3년을 버텼으나 탈레반에 의해 잔혹히 살해된 아프가니스탄의 마지막 공산주의 대통령
"나는 대통령이 되고 싶지 않았소, 당신이 나를 설득해 밀어붙였고 지원을 약속했소. 이제 나와 아프가니스탄 공화국을 운명에 내던지는 것이오." 셰바르드나제에게, 1991년 가을
파슈툰 명문가 출신의 의사이자 PDPA 파르참파 활동가였던 나지불라는 1980년부터 5년간 비밀경찰 KHAD를 이끌며 잔혹한 탄압으로 두각을 나타냈고, 유리 안드로포프의 주목을 받아 1986년 바브라크 카르말을 대신해 PDPA 사무총장 겸 대통령에 올랐다. '민족화해' 정책으로 이슬람을 국교로 복원하고 복수정당제를 도입했으나 내전은 진정되지 않았고, 소련군 철수를 막으려 애썼지만 1989년 2월 철수가 완료된 뒤에도 3년간 정권을 유지했다. 1991년 소련 해체로 군사·경제 지원이 끊기고 둠두스툼의 배신으로 정권이 붕괴하자 카불의 UN 건물로 피신했으며, 1996년 탈레반이 수도를 점령했을 때 끌려나와 고문 끝에 살해되어 시신이 전시되었다.
의사들이 생명을 구하려 애쓰는 병상에서 팔라흐는 말했다: '내 행동은 이미 목적을 달성했다.' 그리고 동료 학생들에게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말고 살아서 투쟁하라고 당부했다.
1969년 1월 16일, 바르샤바조약군 점령 5개월 만에 체코 사회가 체념으로 빠져드는 것을 막기 위해 바츨라프 광장에서 분신한 카렐대학교 학생. 검열 폐지와 소련군 기관지 발행 중단을 요구하며 자신을 '인간횃불 1호'라 부른 그는 사흘 만에 사망했다. 20만 명이 운집한 장례식은 정상화 직전 체코슬로바키아의 마지막 항의였고, 20년 후 그의 기일 시위는 벨벳 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레닌 조선소에서, 레닌의 이론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접어 버렸다.
1980년 8월 그단스크 레닌 조선소 파업의 실질적 설계자로, 파업 계획을 입안하고 21개 요구를 분류·우선순위화했으며 공장간파업위원회(MKS)를 공동 창립한 폴란드의 민주화 운동가이자 역사가이다. 1981년 12월 계엄 선포 후 4년 넘게 지하에 숨어 불법화된 연대노조의 지하 조직망을 재건했고, 여성으로 변장해 딸의 세례식에 참석할 정도로 철저히 은신했다. 1986년 체포되었다가 사면으로 풀려났고, 공산정권 붕괴 후 국회의원·상원의장·내무차관을 거쳐 2010년에는 몇 시간 동안 폴란드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는 독특한 이력을 남겼다.
1977년 5월 27일 사건 뒤 동료와 함께 도피했다가 3주 만에 체포돼, 비공개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사망했다. 정확한 처형 시점은 사료마다 다르다.
앙골라 태생의 의사이자 혁명가다. 포르투갈공산당에 입당해 지타 세아브라와 함께 공산학생동맹(UEC)을 이끌었고, 1974년 카네이션 혁명 당시에는 UEC 대표로 모스크바의 콤소몰 대회에 파견되어 있었다. 1975년 앙골라로 돌아와 니투 알베스·조제 반두넴을 중심으로 한 친소 정통파에 합류했으며, 1977년 5월 27일 사건 뒤 체포돼 비공개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사망했다. 사망 시점은 사료마다 엇갈린다.
상세 이력 보기
1974.04UEC 대표로 모스크바 콤소몰 대회 참석
1975앙골라 귀환, MPLA 친소 정통파에 합류
1976–1977니투 알베스의 지시로 혁명적 지식인위원회 책임, 대중조직부(DOM) 산하 활동
블라디미르 푸틴은 소련 국가보안기관 출신의 러시아 정치가로, 1990년대 국가 위기 속에서 권력의 중심에 올라섰다. 그는 대통령과 총리를 번갈아 맡으며 연방 권력과 대통령 행정부를 강화했고, 러시아의 국제적 영향력 회복을 통치의 핵심 서사로 삼았다. 2005년 소련 해체를 ‘20세기의 가장 큰 지정학적 재앙’이라고 말한 발언은 해체를 러시아 사회의 상실과 혼란으로 기억하는 그의 역사 인식을 압축한다. 동시에 그의 집권은 정치적 경쟁과 독립 언론의 공간을 좁히고, 대외 군사행동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국가를 재편했다.
"당신은 그들을 배신했어요. 이제 당국이 우리를 빈대처럼 짓밟을 겁니다." 바웬사가 파업 종료를 선언한 순간 그에게 한 말.
그단스크 레닌 조선소 간호사로 일하며 1978년 자유해안노조(WZZ) 창립에 참여하고 지하신문 『해안의 노동자』에 노동안전과 직업병에 관한 글을 기고한 폴란드의 반체제 노동운동가이다. 1980년 8월 16일, 경영진이 임금인상을 약속하자 바웬사가 파업 종료를 선언했지만, 피엔코프스카는 안나 발렌티노비치와 함께 조선소 정문을 막아서서 동조 파업에 들어간 다른 공장 노동자들을 버릴 수 없다고 호소하며 파업을 연대로 전환시켰다. 이 개입으로 공장간파업위원회(MKS)가 결성되었고, 그녀는 21개 요구 중 의료개혁을 담은 16번 요구의 초안을 썼으며 8월 31일 그단스크 협정의 서명자 중 한 명이 되었다.
클루지 출신의 헝가리계 개혁교회 목사로, 차우셰스쿠 정권의 조직적 마을 파괴 계획(체계화)을 공개 비판하고 헝가리 TV와의 비밀 인터뷰에서 인권 유린을 고발하며 세큐리타테의 표적이 되었다. 1989년 12월 16일 티미쇼아라에서 당국의 강제 퇴거 집행을 막으려 모인 신도들의 저지로 시작된 시위는 곧 반체제 봉기로 확산되어 루마니아 혁명의 직접적 발단이 되었다. 혁명 후 오라데아의 개혁교회 주교로 선출되어 교회 재건과 헝가리어 교육에 힘썼으며, 2007년부터 2019년까지 유럽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1979년 스물여섯 살에 캄푸치아인민공화국의 부총리 겸 외무장관으로 취임하여 세계 최연소 외무장관이 됐다.
캄보디아의 정치인이자 전직 군 장교다. 1970년 크메르루주에 가담해 대대장을 지냈고, 1977년 이탈해 베트남 측과 함께 싸웠다. 1979년 정권 붕괴 뒤 캄푸치아인민공화국의 부총리 겸 외무장관이 됐고, 1985년 챈 시의 뒤를 이어 수상이 됐다. 수십 년간 집권했으며 현재 상원 의장 겸 국가수반 대행을 맡고 있다.
1980년 8월 15일, 그녀가 발티츠카 오페라 인근에서 전차를 세우자 그단스크 대중교통 파업이 시작됐다.
헨리카 크지보노스는 그단스크의 전차 운전사이자 노동조합 활동가로, 조선소 안팎의 노동자 행동을 연결한 인물이다. 1980년 8월 15일 전차를 세워 대중교통 파업을 촉발했고, 그 소식은 다른 사업장으로 퍼져 도시 전체의 연대 행동을 넓혔다. 그녀는 사업장 간 파업위원회에서 대중교통 노동자를 대표하고 8월 협정에 서명했으며, 이후 계엄 아래에서는 수감자 지원과 지하 출판물 배포에 참여했다. 훗날 가정위탁시설을 운영하고 국회의원이 된 경력은 거리의 노동자 행동과 돌봄·제도 정치가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예지 보로프차크는 1980년 그단스크 조선소에서 자유노조 운동의 문을 연 젊은 노동자였다. 그는 보그단 펠스키와 루트비크 프론지뉴스키와 함께 8월 14일 파업을 시작했고, 안나 발렌티노비치의 복직과 임금 인상, 1970년 희생자 추모비를 요구했다. 계엄령 뒤에도 저항을 이어 가다 수감과 해고를 겪었으며, 1989년 조선소로 돌아왔다.
우리가 충분히 단호하다면, 집권당이 자유선거에 복종하도록 강제할 수 있다. 56년의 정신을 놓지 않는다면, 러시아 군대의 철수 협상을 즉시 시작할 정부를 선출할 수 있다.
오르반 빅토르는 1989년 너지 임레 재매장식에서 소련군 철수와 자유선거를 요구한 연설로 전국적 명성을 얻은 반공청년 지도자였다. 1998년 총선 승리로 헝가리 최연소 총리가 되어 NATO 가입을 이끌었고, 2010년 재집권 후 개헌·사법·언론을 장악하며 스스로 '비자유민주주의'라 부르는 체제를 구축했다. 2014년 바일레 투슈나드 연설에서 자유민주주의와의 결별을 공개 선언했으며, 2020년 헝가리 역사상 최장기 총리가 되었다. 반공 저항으로 출발한 그의 정치 여정은 21세기 권위주의 포퓰리즘의 대표적 모델이 되었다.
1972년 4월 24일부터 1960년 협력협정 폐기와 말가시화를 '제2의 독립'으로 내걸었으나 1972~1975년 군정은 이를 시행하지 않았다. 란자노로는 이를 '제3의 독립'으로 부르며, FAEM 사무총장직을 둘러싼 사료도 엇갈린다.
마다가스카르에서 태어나 자란 페미니스트 사회주의자다. 정치를 남성의 영역으로 여긴 소시민 가정 출신으로, 학생기독교운동(SCM-MPIKRIMA)을 통해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고 정치화되었다. 1972년 마다가스카르 문학·언어학과 3학년이던 그는 FAEM 사무총장으로 4월 24일 시작된 전국 학생운동을 이끌며 1960년 협력협정 폐기와 말가시화를 '제2의 독립'으로 내걸었고, 5월 12일 밤 체포되어 노시라바에 수감되었다. 나이로비에서 WSCF '해방' 프로그램을 맡았고, 1975년 제네바를 거쳐 1978년 나이로비로 돌아왔으며 남편 체포·석방 뒤 캐나다로 건너갔다. 1991년 영국으로 이주해 유엔여성기금(UNIFEM) 아프리카 부서장을 지내며 2010년 퇴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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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마다가스카르 문학·언어학과 3학년, FAEM 사무총장, 파업위원회 위원
19725월 12일 밤 체포되어 노시라바에 수감
이후나이로비 WSCF 아프리카 지역사무소 프로그램 담당자로 '해방' 프로그램 지도, 세계교회협의회 인종차별 반대 프로그램 위원, 개발협력연구기구 설립 및 서아프리카 담당
1975~1991제네바를 거쳐 1978년 나이로비로 복귀, 캐나다에서 여성학 대학원 수학 및 프랑스어 강의 후 영국으로 이주
2010유엔여성기금(UNIFEM) 아프리카 부서장(Head of the Africa section)으로 퇴직, 이후 독립 전문 컨설턴트로 활동
1992년 9월 2일 총리로 임명되어 9월 7일 내각을 구성했으나, 10월 31일 PCT-URD 연합의 불신임으로 정부가 무너졌다.
콩고 공화국(브라자빌)의 정치가이다. 1960년대 후반 각료를 지내다 1970년 반정부 음모 혐의로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 고문당했으며, 1971년 건강 악화로 석방돼 프랑스로 망명했다. 1990년 다당제 도입과 함께 귀국해 1991년 주권국민회의 부의장단에 참여했고, 1992년 9월 2일 파스칼 리수바 대통령이 총리로 임명했다. 10월 31일 콩고노동당(PCT)과 민주갱신연합(URD)의 불신임으로 11월 11일 사임했고, 1997년 내전 중 벨기에로 망명해 2007년 10월 7일 브뤼셀에서 사망했다.
1988년 5월 남북이 긴장 완화와 국경 비무장화, 공동 석유 탐사구역, 신분증 통행에 합의했고, 1989년 11월 아덴에서 1981년 초안 헌법에 합의해 1990년 5월 22일 통일 예멘공화국이 선포됐다.
예멘의 군인 출신 정치가. 1958년 군에 들어가 1963년 장교로 임관했고 북예멘 내전을 겪었다. 1977년 타이즈 군사총독을 지내다 1978년 북예멘 대통령이 되어 1990년 5월 22일 남북 통일까지 재임했고, 통일 뒤에는 예멘공화국 대통령으로 2012년 사임할 때까지 재임했다. 1994년 이래 독자적으로 통치했고 2011년 예멘 혁명 뒤 후티와 손잡았다가 2017년 말 결별했으며 그해 12월 4일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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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군 입대
1963장교 임관, 북예멘 내전 참전
1977타이즈 군사총독
1978.06아흐마드 알가슈미 암살 뒤 임시대통령위원회 참여
1978.07–1990.05북예멘(예멘아랍공화국) 대통령
1990–2012통일 예멘공화국 대통령, 2011년 11월 권한 이양 뒤 2012년 2월 퇴임
1946년 신민당·공산당 합당을 이끈 연안파 지도자이자 8월 종파사건으로 숙청된 공산주의자
1956년 8월 30일 전원회의에서 최창익은 소련파의 박창옥 등과 함께 김일성의 일인독재화를 지적하며 김일성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이는 '8월 종파사건'으로 비화했고, 이후 연안파는 투옥·연금되었다.
독립운동가이자 공산주의자로, 조선의용대 지도위원·항일군정대학 교관·화북조선독립동맹 부주석을 지냈다. 해방 후 조선신민당 부주석, 북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 겸 정치위원, 재정상·부수상을 역임했다. 1956년 8월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을 비판한 뒤 숙청·수감되었으며 옥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1896–1957, 영어 위키백과는 1896–1960, 소련 문서는 1898년생으로 기록한다. 정확한 생몰연도와 사망 경위에는 이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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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귀국해 조선노동공제회·고려공산청년동맹에 참여
1928–1935'제3차 공산당사건'으로 체포되어 6년간 수감, 1935년 출옥
1936중국으로 망명해 조선민족혁명당에 참여
1938조선청년전위동맹 조직, 조선의용대 지도위원, 같은 해 말 옌안으로 이동해 항일군정대학 교관
1942화북조선독립동맹 창건, 중앙상무위원 겸 서기부장
1945화북조선독립동맹 부주석
1946.2조선신민당 부주석 (주석 김두봉)
1946.8신민당·조선공산당 합당으로 북조선노동당 결성, 당중앙위원회 상무위원 겸 정치위원
1961년 1월 5일, 오스발도 라미레스가 이끄는 반혁명 부대가 트리니다드의 티나히타스에서 그를 살해했다. 쿠바 자료들은 문해운동 개시 엿새째였다고 전하며, 그는 무장하지 않았다. 적어도 농민 엘리오도로 로드리게스 리나레스가 함께 살해되었다.
쿠바 마탄사스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다수 출처는 1942년 2월 19일, 에스캄브라이는 2월 18일로 적는다. 구두닦이와 제빵 일로 집안을 도왔고 1954년 6학년을 마친 뒤 야간에 공부를 이어 갔다. 1960년 자원 교사 모집에 응해 시에라 마에스트라의 미나스 데 프리오 교육학교에서 5월부터 8월까지 훈련을 받았고, 그해 8월 졸업 뒤 마갈리스 올모스 로페스와 함께 산티 시피리투스 산간의 산 암브로시오 지역에 배치되어 라 시에리타의 옛 제재소에 학교를 세우고 낮에는 어린이 44명, 밤에는 성인을 가르쳤다. 1961년 1월 5일 오스발도 라미레스가 이끄는 반혁명 부대에게 살해되었고, 쿠바 자료들은 그를 문해운동의 첫 희생자로 기록한다.
인터뷰에서: "우리는 CIA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그들은 나쁜 사람들을 지원했다."
아프가니스탄 판지시르 계곡 바자라크의 장갈라크 마을에서 타지크족 가정에 태어났다. 아버지 도스트 모함마드 칸은 왕립 아프가니스탄군 대령이었고, 카불 공과대학에서 공학을 공부한 뒤 부르하누딘 라바니의 이슬람회에 가담했다. 1979년 소련의 침공 이후 소련군과 아프가니스탄 공산정권군에 맞서 게릴라전을 벌였고, 1983년 소련군과의 휴전기에 12개 주 130명의 지휘관을 묶는 슈라에 나자르를 세웠다. 헤크마티아르와의 내전으로 카불이 파괴되었고, 아프가니스탄 정의 프로젝트와 휴먼라이츠워치는 1993년 아프샤르 작전 등 인권 침해의 책임을 그에게 물었다. 1996년 이후에는 북부동맹의 군사 지도자로 탈레반에 저항했고, 2001년 9월 9일 알카에다 요원들의 폭탄으로 암살되었다.
앙골라의 화학 공학자·외교관·정치인. 리스본 유학 중 1956년 MPLA 창립 문서 「1956년 선언」에 서명하고 1961년부터 PIDE의 감시를 받다가 1962년 포르투갈을 떠나 코나크리에서 MPLA 외교 실무를 맡았다. 이집트·알제리 대표, 콩고-브라자빌 대표부 총괄, MPLA 정보부 책임자를 거쳐 1976년부터 1984년까지 외무장관을 지냈고, 독립 뒤 MPLA 좌익 분파의 대표적 인물로 1998년 인터뷰에서 당·국가 요직은 민족·지역 인구 비중이 아니라 마르크스-레닌주의 전위 기준으로 채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2010년 6월 26일 루안다에서 76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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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1962리스본 대학 이학부에서 화학 공학 수학, 제국학생회관 거주, 1956년 선언 서명, 1961년부터 PIDE 감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