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5월 20~21일 MPLA 중앙위원회가 그와 니투 알베스를 분파주의 혐의로 제명했고, 5월 27일 쿠데타 미수가 뒤따랐다.
앙골라의 군인·정치가·반식민 사상가. 마르크스주의 계열이던 가족의 영향으로 의학 공부를 접고 MPLA에 들어가 루안다 지하위원회를 조직했고, '철학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1970년 1월 군사정보 임무로 포르투갈 식민군에 입대해 무기를 빼내다 체포됐다가 1974년 카네이션 혁명 뒤 석방됐다. 1974년 7월 룬도지 회의에서 최연소 중앙위원이 됐고, 1975년 3월 FAPLA 국가정치위원 겸 부참모장에 임명됐다. 1976년 제25차 소련공산당 대회에 니투 알베스와 함께 참석했고, 정통 공산주의 니티스타 지도부였다. 1977년 5월 제명 뒤 체포돼 처형됐다.
1977년 8월 체포와 그 뒤의 소식 단절은 더르그의 탄압이 에티오피아인민혁명당을 넘어 자기 협력자였던 메이손 지도부로 돌아선 전환점이었다. 1979년 무렵의 사망은 여러 사료가 전하지만 날짜와 경위가 확정되지 않았다.
에티오피아의 마르크스주의 정치인으로, 전에티오피아사회주의운동(메이손)의 지도자이자 의장이었다. 오로미아 월레가 아르조 출신으로 1960년대 초 프랑스에서 공부하며 소련식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였고, 혁명 직후 귀국해 네게데 고베제와 진보서점을 열었다. 1975년 12월 더르그가 세운 대중조직사무국(POMOA) 의장을 맡아 1976년 4월 20일 발표된 민족민주혁명 강령을 기초했다. 1977년 8월 26일 체포되어 구 게비에 구금되었으며, 수개월의 구금 끝에 사라졌다고 기록된다. 1979년 무렵 사망했다는 서술은 날짜와 경위가 확정되지 않았다. 라틴 문자 쿠베 철자법의 선구자로 '쿠베의 아버지'라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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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유럽 에티오피아 학생연맹 제8차 대회에서 메이손 창립에 참여하고 유럽 오로모 학생 학습반을 조직·지도
1973파리에서 쿠베로 쓴 오로모어 문법서 『히르마타 두비 아파안 오로모』를 출간
1974–1975에티오피아로 귀국해 네게데 고베제와 진보서점을 열어 마르크스-레닌주의 문헌을 보급
1975년 11월 경제장관으로 임명되고 1976년부터 계획부 장관 겸 제2부총리로서 앙골라 경제계획의 설계를 맡았다. 1977년 5월 27일 진압 이후 정부·당 요직에서 물러났다.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다 호샤 올리베이라 디롤루아(1939년 12월 2일 숨베 출생, 1996년 11월 16일 루안다 사망)는 앙골라의 경제학자이자 반식민주의 활동가, 대학 교수였다. 1950년대 루안다에서 민족주의 사상을 접하고 1961년 비리아투 다 크루스의 영향으로 MPLA에 들어가 디롤루아 전시명을 썼다. 돌리지에서 제1혁명훈련센터를 세우고 교수했으며 1963년 동베를린으로 파견되었다. 1974년 중앙위원회·정치국 위원이 되어 11월 8일 루안다에 들어간 26인 대표단에 참여했고, 1975년 11월 경제장관, 1976년부터 계획부 장관 겸 제2부총리를 지냈다. 1977년 5월 27일 진압 이후 정부·당 요직에서 물러났고 1996년 루안다에서 사망했다.
1986년 1월 총격 당시 그는 인도에 있었고, 소련에서 내전 수습을 협상한 뒤 귀국해 대통령에 올랐다.
하드라마우트 출신 전기기술자로 민족해방전선에서 성장해 남예멘의 장관과 총리를 거쳤다. 1986년 아덴 유혈 충돌 뒤 대통령에 올라 혼란을 수습했고, 남예멘의 마지막 국가수반으로서 1990년 남북 통일을 주도해 통일 예멘의 초대 총리가 됐다. 1994년 내전에서는 남부 분리 정부의 총리를 맡았다가 패배 뒤 망명했다.
1991년 9+1 회의에서 연방의 재편을 논의하면서도 투르크메니스탄의 독자성을 끝까지 저울질했다.
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는 소련 말기 투르멘 공화국의 당·정부 지도자에서 독립 투르크메니스탄의 초대 대통령으로 전환한 정치가였다. 그는 1991년 신연방조약을 둘러싼 9+1 회의에 투르크메니스탄 대표단을 이끌고 참여했지만, 공화국의 독자 노선을 지키려는 계산 속에서 협상 자체에는 제한적으로 관여했다. 독립 뒤에는 중립과 국가 주권을 내세우면서 권력을 대통령 개인에게 집중하고, 루흐나마와 광범한 개인숭배를 통해 사회를 통제했다. 그의 통치는 탈소비에트 국가 건설과 권위주의적 고착이 결합한 사례로 남았다.
바츨라프 클라우스는 체코의 경제학자이자 정치가로, 1989년 이후 국가사회주의 경제를 시장경제로 전환하는 급진적 경로를 대표했다. 그는 시민민주당을 세우고 체코슬로바키아의 분리를 이끈 뒤 체코 총리와 대통령을 지냈다. 1968년 프라하의 봄이 내건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의 정치적 자유에는 공감했지만 경제적 제3의 길은 거부했으며, 이 입장은 전환기의 ‘수식어 없는 시장경제’와 이후 체코 보수주의의 핵심 구호가 되었다. 대통령으로서는 유럽 통합과 기후변화 정책을 비판하며 주권과 시장의 우위를 강조했다.
1991년 주권 국민회의는 스스로 주권을 선언하며 콩고인민공화국을 폐지하고 과도 통치의 기본법을 채택했다.
예수회 신부 출신의 콩고 가톨릭 주교로, 응카이와 오완도 교구를 이끌었다. 일당체제가 무너지는 1991년 주권 국민회의의 의장(프레지디움 의장)에 선출되어 회의를 주재했다. 회의가 스스로 주권을 선언하며 콩고인민공화국을 폐지하자, 그는 국민의회를 대체한 과도 최고공화국평의회(CSR) 의장을 맡아 헌법 전환을 이끌었다.
예센스키 게저는 1956년 혁명을 경험한 역사학자이자 헝가리의 체제전환기 외교를 이끈 정치가다. 그는 혁명 뒤 처형된 사람을 약 350명으로 추산해 진압의 규모를 기억하는 데 기여했다. 학자로서 국제관계사와 헝가리의 대외 이미지를 연구했고, 민주 헝가리 포럼 창립 세대로서 서방과의 새로운 관계를 추진했다.
"부자유하고 억압받는 자들 가운데 위대한 사람은 오직 억압자를 파괴하기 위해 투쟁하는 자뿐이다" — 『유럽은 어떻게 아프리카를 저발전시켰는가』 (1972)
가이아나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이자 범아프리카 운동가로, 1972년 『유럽은 어떻게 아프리카를 저발전시켰는가』에서 노예무역과 식민주의,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아프리카의 저발전을 구조적으로 생산했다고 논증해 제3세계 역사학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 다르에스살람대학과 서인도제도대학 강단에서 탈식민 사회과학의 중심을 세웠고, 가이아나에서 다인종 노동계급 연대에 기반한 사회주의 정치를 전개했다.
1986년 1월 13일 중앙위원회 회의장에서 알리 나시르 무함마드의 경호원들이 반대파 정치국원들에게 발포했고, 그 자리에서 숨졌다.
남예멘의 군인·정치가로 예멘사회당 정치국원과 국방장관을 지냈다. 영국 식민 통치에 맞선 민족해방전선에 참여했고 독립 뒤 군에서 성장했으며, 당 분열 뒤 압둘파타흐 이스마일을 지지하는 알투그마 계열에 섰다. 1986년 1월 13일 아덴 중앙위원회 회의장에서 알리 나시르 무함마드의 경호원들이 반대파 정치국원들에게 발포했을 때 숨졌다. 그의 죽음은 뒤이은 내전의 계기 가운데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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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대영국 식민 통치에 맞선 민족해방전선(NLF) 참여
1967 이후독립 뒤 남예멘 군에서 성장, 제22보병여단 지휘
1978예멘사회당 창당 당시 이미 당의 고위 인사
1979.08.11당내 분쟁 속에 내무장관직에서 해임
1980.10.16–1981.08.30내무장관 (사료에 따라 1980~1982년으로 기재되기도 함)
1981.08.30–1986.01.13국방장관, 1985년 2월 하이다르 알아타스 내각에서도 유임 (사료에 따라 1982년부터로 기재되기도 함)
“우리가 협상하는 이유는 사회주의를 위한 더 나은 조건을 만들기 위해서다. 나는 공산주의자다.” — 암살 직전 인터뷰, 1993년
남아공 공산당 사무총장이자 민족의 창(Umkhonto we Sizwe) 참모총장으로, 반아파르트헤이트 무장투쟁에서 협상 전환까지 남아공 해방운동의 좌익을 이끈 혁명가. 1993년 극우 이민자에게 암살되면서 민주이행을 위기로 몰아넣었으나, 그의 죽음은 오히려 1994년 총선을 확정짓는 계기가 되었다.
2002년 12월 28일 사나에서 이슬라흐당 대회 연설을 마친 직후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 당시 예멘사회당 부서기장이었다.
1942년 예멘 이브주 쿠할 마을에서 태어나 잠다르와 사나에서 이슬람 법학을 공부했고, 1960년대 사나의 70일 포위전에 참여했다. 1968년 예멘혁명민주당 창당에 참여했다가 같은 해 8월 사나 사건 이후 3년간 수감되었고, 1971년 아덴으로 가 1972년 정치국원이 되었다. 1978년 예멘사회당 창당에 참여했으며, 통일 예멘의 문화·관광부 장관을 지냈다. 인권과 정치적 다원주의를 옹호하며 야당 연합 결성에 힘썼다.
누군가 내게 공산주의를 무너뜨리는 지도자가 될 거라고 말했다면 결코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은하계 전체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그단스크 조선소의 전기공으로, 1980년 파업을 이끌어 독립 자주 노조 '연대'를 결성하고 공산 정부와의 그단스크 협정을 이끌어냈다. 계엄령 아래 투옥되었고 1983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으며, 1989년 원탁회의의 비공식 야권 대표로서 폴란드의 평화적 체제 전환을 협상했다. 1990년 폴란드 최초의 직선 대통령에 당선되어 시장경제로의 이행과 소련군 철수를 주도했으나, 1995년 재선에 실패하며 정치에서 물러났다. 한 노동운동가의 성공은 소비에트 블록 전체에 균열을 낸 신호였다.
하랄트 예거는 동독 국가보안부에 복무한 국경 통제 장교로, 국가의 여행 통제와 정보활동을 집행했다. 1989년 11월 9일 그는 상관의 명확한 지시를 받지 못한 채 Bornholmer Straße에 몰린 군중과 폭력 위험에 직면했다. 그는 통제 체계의 일부였지만 그날 밤 장벽을 열어 수천 명의 동독 시민이 서베를린으로 건너게 했다. 이후 그는 동독 체제의 내부 모순과 장벽 붕괴의 자유를 함께 인정했다.
“우리는 누구의 뒷마당도 아니며, 결코 팔리지 않을 것이다.” — 헌터칼리지 연설, 뉴욕, 1983년 8월
그레나다의 혁명가이자 인민혁명정부 수상(1979–1983). 런던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귀국해 신JEWEL운동(NJM)을 이끌며 1979년 부패한 게일리 정권을 무너뜨렸다. 집권 후 문맹률을 35%에서 5%로, 실업률을 50%에서 14%로 낮추고 무상의료·여성평등임금·출산휴가를 도입했다. 쿠바와 협력해 국제공항을 건설했으며, '우리는 누구의 뒷마당도 아니다'라는 반제국주의 노선을 견지했다. 1983년 부수상 버나드 코드의 내부 쿠데타로 처형되었고, 이는 미국의 그레나다 침공으로 이어졌다.
「나는 이제 이 법정 앞에서, 이 나라 국민 앞에서, 캘리포니아 주가 나에 대해 제기한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임을 공개적으로 선언합니다」 — 1971년 1월 5일 법정 진술
미국 마르크스주의-페미니스트 철학자이자 감옥 폐지 운동의 핵심 이론가. 1968년 CPUSA 입당, 1980·1984년 부통령 후보 출마. 1970년 체포·16개월 수감 후 무죄 평결로 국제 연대 운동 촉발. 『여성, 인종, 계급』(1981)으로 인종-성별-계급 교차 분석을 정초했고 감옥-산업복합체 개념을 발전시켰다. 1997년 비판적 저항(Critical Resistance)을 공동창립해 폐지 민주주의를 제도화했으며, UC 샌타크루즈 석좌교수로 퇴임했다. 반세기 넘게 급진 사상과 실천의 교차점에 서 있는 살아있는 혁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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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앨라배마주 버밍햄에서 출생 — '다이너마이트 힐' 흑인 중산층 이웃에서 성장
1965브랜다이스대학 우등 졸업 — 헤르베르트 마르쿠제의 제자
1968CPUSA 입당, 블랙팬서당 LA 지부에서 정치교육 담당
1969UCLA 철학과 조교수 임용 — 공산당원 자격으로 즉시 해고, 법원 판결로 복직
1970–1972마린 카운티 법정 무장 사건 연루로 체포, FBI 10대 지명수배 — 16개월 수감 후 전면 무죄 평결
1979소련 레닌 평화상 수상
1980, 1984CPUSA 부통령 후보 — 거스 홀의 러닝메이트
1981『여성, 인종, 계급』 출간 — 교차성 분석의 고전
1991CPUSA 탈당,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를 위한 통신위원회(CCDS) 공동창립
1991–2008UC 샌타크루즈 역사의식·페미니스트 연구 교수 — 2008년 석좌교수 퇴임
1997비판적 저항(Critical Resistance) 공동창립 — 감옥-산업복합체 폐지 운동의 제도적 기반
얀 룰레프스키는 폴란드의 노동조합 지도자이자 민주화 운동가로, 비드고시치 지역 자유노조를 이끌었다. 그는 1981년 농민들의 독자적 노동조합 등록 요구를 연대의 의제로 받아들였고, 3월 19일 지방 국민평의회 회의장에서 민병대에게 폭행당했다. 이 사건은 자유노조가 전국 경고파업을 조직하고 계엄 선포 전의 긴장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에도 그는 계엄기에 internment를 겪었으며, 민주화 뒤에는 국회의원과 상원의원으로 활동했다.
1977년 중앙위원회에서 그는 "나는 곧 혁명의 화신이다"라며 지도부의 즉각 사퇴를 요구했다.
앙골라 해방운동 MPLA의 초대 내무장관이자 급진 '니티스타' 파벌 지도자였다. 식민지 전쟁기 뎀보스 지역 게릴라 지휘관으로 떠올라, 독립 뒤 내무부를 장악해 추종자들을 국가 기구 곳곳에 심었다. 1976년 3월 소련공산당 제25차 대회에 대표단을 이끌고 가 스스로를 '순수 마르크스레닌주의파'로 내세워 소련의 지지를 구했으며, 이것이 네투 지도부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정식 채택을 재촉했다. 1977년 5월 쿠데타 미수 끝에 체포돼 총살당했다.
1981년 3월 19일 비드고슈치에서 농민 연대의 합법화를 요구하던 그는 진압대에 의해 구타당해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로만 바르토슈체는 독립 농민노조의 합법화 투쟁을 민주화 이후의 농민정치로 이어나간 폴란드의 농민·반체제 지도자였다. 1981년 비드고슈치 점거농성을 이끌어 농민 연대의 등록을 관철했고 계엄 시기에는 구금되었으며, 1990년 부활한 폴란드 농민당의 초대 대표가 되어 그해 대선에 출마했으나 이듬해 지도부 경쟁에서 물러난 뒤 보수 성향의 소규모 농민 정당을 창당했다.
낙원이 아니라 헌법을 위한 혁명. 반(反)유토피아적 혁명. 유토피아는 단두대와 굴라크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가정에서 자랐으나 1968년 위기로 투옥되며 반체제 인사가 되었다. 노동자방어위원회(KOR)와 연대노조의 전략가로 활동하고 1989년 원탁회의에 참여했으며, 《가제타 비보르차》 초대 편집장으로서 '당신들의 대통령, 우리의 총리' 구상을 제안해 평화적 권력 이양을 설계했다. 이후 정계에서 물러나 언론인으로 남아 자유민주주의를 옹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