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으로 태어나 가톨릭으로 개종한 그는 스스로를 「나는 『혼례』 속의 유대인이다」라고 불렀다.
로만 브란트슈테터는 폴란드어로 시와 소설, 희곡을 쓰고 히브리어 성서와 셰익스피어를 번역한 폴란드 작가였다.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나 시온주의와 동화의 문제를 탐구했으며, 로마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뒤에도 유대 전통과의 긴장을 문학의 중심에 남겼다. 전후에는 포즈난에 정착해 성서적 상상력과 역사적 기억을 결합한 작품을 썼다. 1980년에는 포즈난 1956년 6월 희생자 기념비 건립 사회위원회 위원장으로서 노동자 봉기의 기억을 공공 기념물로 만드는 조직 작업을 맡았다.
흐루쇼프 비밀연설을 수만 부 찍어내 당의 통제 밖으로 퍼뜨린 바르샤바 당위원회 개혁파 제1서기
1956년 3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휴식 시간, 흐루쇼프에게 스탈린의 반유대주의를 따져 묻자 흐루쇼프는 손을 떨며 스탈린이 소련 유대인에 대한 포그롬을 계획하고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바르샤바 유대인 상인 가정에서 태어나 14세에 공산청년운동에 가담했고, 국제레닌학교에서 수학한 후 폴란드 지하당 활동과 소련 체류를 오갔다. 1938년 NKVD에 체포되어 콜리마 수용소에서 8년을 보낸 뒤 1945년 폴란드로 돌아와 선전·언론·농업 부문에서 스탈린주의 노선을 집행했다. 1955년 바르샤바 당위원회 제1서기가 된 후 제20차 당대회를 계기로 개혁파로 전환, 당원들이 비밀연설을 학습하도록 제안하고 1만 5천여 부의 비공식 인쇄본을 찍어내 연설문이 폐쇄된 당 문서에서 세계적 문서가 되는 결정적 통로를 열었다. 폴란드 10월 후 고무우카와 충돌해 1957년 해임되고 1968년 반유대 캠페인으로 축출되었으며, 이후 반체제 운동을 지지하며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1956년 10월, 흐루쇼프가 군사개입을 위협하자 오하프는 폴란드군을 바르샤바 방어태세에 배치하며 맞섰고, '이 상황에서 고무우카가 국가를 이끌 최선의 선택'이라고 소련 지도부에 말했다.
크라쿠프 출신의 폴란드 공산주의자로, 1929년 폴란드 공산당에 입당해 사나치아 정권하에서 6년 반을 정치범으로 복역했다. 1943년 소련에서 베를링군 정치위원으로 활약한 후 폴란드 노동자당 중앙위원, 공공행정부 장관, 국방차관, 정치국원을 지냈다. 1956년 3월 비에루트 사망 후 제1서기가 되어 흐루쇼프 비밀연설의 폴란드어 번역본을 전국 당 조직과 공공집회를 통해 유포했고, 수천 부가 바르샤바 시장에서 팔릴 정도로 확산시켜 비밀연설의 전세계적 유출을 촉발했다. 포즈난 봉기 진압을 승인했으나 10월에는 소련의 군사개입 위협에 맞서 폴란드의 주권을 지켰고, 이후 고무우카에게 권력을 넘긴 후 1968년 반유대 캠페인에 항의하며 모든 공직에서 사퇴했다.
클레이가 '석탄이라도 실어날라 줄 수 있겠소?' 하고 묻자 르메이는 '우리는 무엇이든 실어나를 수 있다'고 답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일본에 대한 전략폭격을 지휘한 인물로, 1945년 3월 도쿄 대공습을 시작으로 66개 도시를 소이탄으로 태웠다. 1948년 미 유럽공군 사령관으로서 베를린 봉쇄에 맞서 루시우스 클레이에게 '우리는 무엇이든 실어나를 수 있다'고 답하며 공수의 첫 단계를 세웠다. 이어 전략공군사령부(SAC)를 맡아 핵전력 중심의 제트 공군으로 개편했고, 1961년 공군 참모총장이 되어 쿠바 위기 때 미사일 기지 폭격을 주장했다. 은퇴 후에는 인종분리주의자 조지 월리스의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1968년 대선에 나섰다.
아폴로 1호 화재 뒤 그는 NASA가 조사와 수습을 맡아야 한다고 존슨 대통령에게 요구했다.
제임스 웨브는 과학자나 기술자가 아니라 대규모 공공사업을 조직한 미국의 행정가였다. NASA 국장으로서 아폴로 계획에 안정적인 예산과 정치적 지지를 결합하고, 연구센터와 산업·대학을 조정하는 중앙집중적 운영 체계를 세웠다. 그는 유인 달 착륙을 추진하면서도 마리너와 파이어니어 같은 행성과학 및 우주망원경 연구를 지지했다. 아폴로 1호 화재 뒤에는 조사를 이끌고 NASA의 책임을 의회에 설명하며 계획의 연속성을 지켰다.
1945년 정치경찰 책임자가 된 가보르 페테르는 ÁVO·ÁVH를 이끌며 쇼 재판을 준비하고 진행했다. 1953년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1959년 사면으로 풀려났다.
우이페헤르토의 유대인 재단사 집안에서 태어나 1931년 헝가리 공산당에 입당했다. 1945년 부다페스트 정치경찰 책임자가 되었고, 1945~52년 국가보안기관(ÁVO·ÁVH)의 수장으로 러이크 재판을 비롯한 숙청과 고문을 지휘했다. 1953년 초 라코시는 소련의 「반시온주의」 숙청을 본떠 그를 체포했다. 1953년 6월 베리야는 그의 사건을 재검토하라고 요구했지만, 그는 1954년 군사법정에서 시온주의 간첩 혐의로 종신형을 받았다. 1959년 개별 사면으로 풀려나 도서관 사서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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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말노동운동에 참여하고 헝가리 공산당에 입당했다.
1931헝가리 공산당에 입당했다.
1943공산주의 평화당 지도부에 참여했다.
1945부다페스트 헝가리 국가경찰 정치보안부 책임자가 되었다.
1945–1952ÁVO·ÁVH 비밀경찰 조직을 이끌며 쇼 재판 준비와 진행에 핵심 역할을 했다.
1950년 6월 25일, 그는 한국의 상황을 보고하고 결의안 표결을 위한 안전보장이사회 절차를 이끌었다.
어니스트 그로스는 국제법률가이자 미국 외교관으로, 법률 자문과 전후 점령지 행정을 거쳐 유엔에서 미국의 정책을 대표했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시작되자 그는 미국 대표단을 이끌며 안전보장이사회가 결의 82를 채택하도록 절차와 표결을 조율했다. 이 과정은 소련 대표의 불참이라는 조건을 활용한 미국 외교의 성과였지만, 유엔의 집단안보가 강대국 경쟁 속에서 작동한 방식이라는 긴장도 남겼다. 이후 그는 국제변호사로서 티베트 문제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를 다뤘다.
1970년대 말 팜반동은 한 방문객에게 말했다: "전쟁을 수행하는 것은 단순하지만, 나라를 운영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1926년 광저우에서 호치민의 혁명 훈련 과정을 수료한 후, 팜반동은 베트남 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평생을 보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말기 제네바 회담(1954) 북베트남 대표단장으로서 협정에 서명했고, 베트남 전쟁 기간 내내 북베트남의 대외적 얼굴로서 외교와 언론 대응을 주도했다. 1955년부터 1987년까지 32년간 총리로 재임하며 전쟁 수행, 통일, 전후 사회주의 건설을 진두지휘했으나, 전시 동원형 경제 체제를 평화기에도 고수하여 경제난을 심화시켰다. 호치민이 '또 하나의 나'라고 부를 만큼 신임한 혁명가로, 보응우옌잡·레주언과 함께 베트남 현대사의 전 과정을 형성한 핵심 지도자였다.
1977년 3월 3일, 그는 헌장 77 대변인으로 말하겠다며 불러낸 국가보안기관의 장시간 조사를 받았다.
얀 파토치카는 후설과 하이데거에게 배운 체코 철학자로서 현상학과 역사철학을 발전시켰고, 유럽의 위기와 인간의 영혼 돌봄을 탐구했다. 공산당 가입을 거부한 뒤 여러 차례 대학 강단과 출판에서 배제되었지만, 연구와 가정 세미나를 이어 갔다. 1977년 그는 바츨라프 하벨, 이르지 하예크와 함께 헬싱키 최종의정서와 시민권 보장을 요구한 헌장 77의 첫 대변인이 되었다. 반복된 국가보안기관 조사 뒤 건강이 악화되었고, 그는 3월 13일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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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1931프라하 카렐대학교에서 철학·슬라브어문학·로망스어문학을 공부하고 철학 박사학위를 받음
1933프라이부르크대학교에서 에드문트 후설과 마르틴 하이데거에게 현상학을 배움
1936–1939카렐대학교에서 강의 자격을 취득하고 철학 저널 《체코의 정신》 편집을 맡음
1945–1950전후 카렐대학교와 마사리크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쳤으나 공산당 가입 거부 뒤 대학을 떠남
1964–1972체코슬로바키아 과학아카데미 철학연구소에서 일하고 1968년 카렐대학교 교수로 복귀했으나 1972년 퇴직당함
1973–1976가정 세미나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플라톤과 유럽》과 《역사철학의 이단적 에세이》를 발전시킴
1946년 3월 6일 호찌민과 협정을 맺어 프랑스군이 하노이에 전투 없이 진입하도록 했다.
본명은 장 로제(Jean Roger)이며, 제2차 세계대전 중 레지스탕스 정보망 ‘알리앙스’의 노르망디 책임자로 활동했다. 해방 후 프랑스 정부를 대표해 통킹·북부 안남의 공화국 위원으로 임명되어 호찌민과 협상했고, 1946년 3월 6일 협정으로 프랑스군의 하노이 진입을 전투 없이 이루게 했다.
디엔비엔푸 패전 뒤 넉 달 안의 휴전을 약속하고 총리가 되어 1954년 제네바 협정을 맺은 프랑스 정치가
1954년 총리가 된 피에르 망데스프랑스는 인도차이나 전쟁을 끝내기 위해 제네바에서 베트민과 직접 협상해 7월 휴전 협정을 맺고, 튀니지 자치 협상도 시작했다.
급진당 소속의 유대계 변호사·경제 전문가로, 전쟁 중 자유 프랑스에 가담했다. 인도차이나 전쟁을 일찍부터 비판했고, 디엔비엔푸 함락 뒤인 1954년 6월 17일 넉 달 안에 휴전을 이루지 못하면 물러나겠다고 약속하고 총리가 되었다. 7월 21일 제네바 협정으로 약속을 지켰다. 여덟 달 재임하는 동안 튀니지 자치를 인정했고, 그해 11월 알제리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스라엘과의 군사 협력과 프랑스 핵 개발의 토대를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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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급진당 소속으로 유르주 로비에의 하원의원에 당선됐다.
1938레옹 블룸 내각에서 재무차관을 지냈다.
1943–1945자유 프랑스에서 재정위원, 이어 국민경제장관을 맡았고, 긴축 정책을 둘러싸고 드골과 대립해 1945년 4월 사임했다.
1954–1955총리로 인도차이나 전쟁 종식을 협상하고 튀니지 자치 협상을 열었다. 유럽방위공동체 구상에 반대했으며 1955년 2월 내각 불신임으로 물러났다.
“우리 당은 혁명의 첫날부터 베트남 인민의 전체 투쟁을 조직하고 통제한 유일한 지도자다.” — 1976년 통일 승리 연설
베트남의 공산주의 정치가이자 이론가. 1930년 인도차이나공산당 창당에 참여했고, 프랑스 식민 감옥을 두 번 거친 후 호치민의 신임을 얻어 남부 조직을 책임졌다. 1956년 〈남으로 가는 길〉을 집필하여 남베트남 무장해방노선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으며, 1960년 제3차 당대회에서 제1서기에 선출되어 호치민 사후(1969) 당의 최고지도자가 되었다. 1975년 베트남 통일을 완수하고 1978년 캄보디아를 침공하여 크메르루주 정권을 전복시켰으며, 친소 노선 아래 중월전쟁(1979)을 겪으면서도 1986년 사망할 때까지 권좌를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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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1930혁명청년동맹 가입, 인도차이나공산당 창당
1931–1945두 차례 투옥 — 8월 혁명으로 석방, 호치민의 신임 획득
1951–1954남부 중앙사무국장 — 항불전쟁 남부 전선 지휘
1956〈남으로 가는 길〉 집필 — 남부 무장투쟁의 이론적 토대 마련
1960–1969베트남노동당 제1서기 — 대미 전쟁의 실질적 최고지휘관
1969–1986당 최고지도자 — 통일(1975), 캄보디아 침공(1978), 중월전쟁(1979)
그의 혁명 가명 '쯔엉찐'은 '장정(長征)'을 뜻하며, 마오쩌둥의 대장정에 바치는 의도적 경의였다 — 이 이름 하나로 그가 당의 친중 이론가임이 처음부터 분명했다.
베트남의 공산주의 혁명가이자 수석 이론가. 1928년 혁명청년동맹에 가입한 후 인도차이나공산당 창당에 참여했으며, 1940년 서기장에 선출되어 8월 혁명과 항불전쟁 시기 당을 이끌었다. 1953–1956년 토지개혁을 주도하여 대규모 과잉 숙청을 초래했고 그 책임으로 서기장직에서 물러났으나, 이후 국회 상임위원장(1960–1981)과 국가주석(1981–1987)을 지내며 정치적 영향력을 회복했다. 1986년 레주언 사후 다시 서기장에 올라 도이머이 개혁 노선의 전환을 주도한 것은 그의 정치 경력에서 가장 결정적인 유산이다.
“사형 찬반에 대한 그 모든 헛소리 — 전부 헛소리다, 동무들. 집행하라! 필요하다면 법정 판결 없이도.” — 1982년, 슈타지 간부들 앞에서
베를린 빈민가 출신의 공산주의 투사로, 1931년 경찰관 살해 후 소련으로 망명해 NKVD 훈련을 받았다. 스페인 내전 참전 뒤 1945년 귀환하여 동독 국가보안부 창설을 주도했고, 1957년 장관에 올라 32년간 9만 명 규모의 감시 기구를 이끌었다. 슈타지는 동독 사회 전반을 통제했고, 제3세계 무장투쟁 세력과 서유럽 극좌 조직 지원으로 냉전기 사회주의권 안보 협력망을 확장했다. 1989년 체제 붕괴로 물러났고 통일 후 1931년 살인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스탈린은 1948년 3월 27일 서한에서 이렇게 썼다: '영국 스파이 벨레비트가 여전히 유고슬라비아 외무부 제1차관으로 남아 있는 이유를 우리는 이해할 수 없다.'
유고슬라비아의 변호사 출신 파르티잔 장군이자 외교관으로, 전시에는 연합군 군사 임무단과의 접촉 창구를 맡았고 전후에는 외무차관으로서 서방과 협상했다. 1948년 3월 스탈린은 그를 '영국 스파이'라고 직접 지목하며 티토와의 솔직한 외교 서신 교환을 거부했고, 이는 티토-스탈린 결별의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그는 사임 후 복권되어 로마·런던 주재 대사와 유엔 유럽경제위원회 사무총장을 지냈으며, 냉전기 유고슬라비아의 독자 노선을 외교적으로 구현한 인물이다.
폴 니츠는 미국의 냉전 전략과 핵무기 정책을 형성한 외교·안보 관료였다. 그는 NSC-68에서 소련과의 장기 대결을 군사력 증강의 문제로 정식화했지만, 핵무기의 위험을 관리하려면 정교한 협상도 필요하다고 보았다. SALT에 참여하고 레이건 행정부의 INF 협상을 이끌면서, 강한 억지력과 군비 감축을 서로 배타적인 선택으로 보지 않는 실무 노선을 추구했다. 이 때문에 그는 군비경쟁의 설계자이자 협상 가능한 질서를 찾은 인물이라는 상반된 유산을 남겼다.
1948년 3월 제2차 당대회에서 허가이는 돌연 연단에 올라 이미 사과한 간부들을 향해 "잘못을 인정하지 않은 사과는 공허한 말일 뿐"이라고 질타했고, 이 발언은 당내 규율의 새로운 기준이 되었다.
소비에트 고려인 혁명가로, 1945년 소련 점령 당국의 파견을 받아 평양에 도착한 후 조선로동당 창립의 핵심 조직자로 활동했다. 당 중앙위원회 제1비서 겸 제2부위원장으로서 소련식 간부당 노선을 추진했으며, 한국전쟁 중 60만 당원 중 45만 명을 검증·제명하는 대대적 당 정비를 주도했다. 대중당을 구상한 김일성과 당 조직 노선을 둘러싸고 충돌해 1951년 실각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기 '소련파'의 부상과 몰락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체포되며 남긴 말: "음모에 가담하지 않았고, 그 죄를 느끼지 않습니다. 그랬다면 평생의 일을 배반하는 것이었습니다."
소농 출신의 농민 정치가로, 소학교 네 학년만 마친 뒤 1933년 소농당에 입당해 1945년 사무총장으로 전후 최대 정당을 이끌었다. 틸디·너지 정부의 농업장관으로 지주제 해체와 토지개혁을 밀었고, 공산당의 살라미 전술에 맞서 당의 독립을 지켰다. 1947년 2월 국회가 면책특권 박탈을 거부하자 소련군이 조작된 간첩 혐의로 그를 체포해 굴라크로 끌고 갔고, 이 납치는 너지 페렌츠 총리의 사임과 소농당 해체의 방아쇠가 되었다. 1955년 귀환해 1956년 너지 임레 혁명정부의 농업장관으로 복귀했고, 진압 뒤 카다르 체제에 협력하다 1959년 사망했다.
린든 B. 존슨은 의회에서 다져진 협상력으로 미국의 국내 개혁과 냉전 전략을 함께 밀어붙인 대통령이었다. 그는 민권법과 투표권법, 메디케어를 포함한 ‘위대한 사회’를 확장했지만, 베트남전의 확대는 그 성과를 압도하는 역사적 책임이 되었다. 대외적으로는 경쟁을 지속하면서도 소련과 전략무기 제한을 모색해 1967년 글래스버러 정상회담과 1968년 전략무기 협상 합의로 훗날 SALT로 이어질 길을 열었다. 선거에서 물러난 마지막 해에도 베트남 평화협상과 군비통제를 병행하려 했으나, 합의의 결실은 후임 정부가 거두었다.
프라하의 봄에서 내무장관으로 보안기관 개혁을 시도했으나 KGB의 내부 교란으로 좌절된 인물
1968년 8월 침공 당일, 파벨이 해임한 부하 샬고비치는 KGB와 함께 둡체크를 체포했고, 내무부는 장관의 손을 떠났다.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원으로 스페인 내전에 의용군으로 참전했고, 1948년 쿠데타에서는 민병대를 지휘했다. 내무차관으로 공포정치에 가담했으나 1951년 체포되어 슬란스키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고문과 25년형을 받았고, 1955년 무죄 석방되었다. 1968년 프라하의 봄에서 내무장관으로 복귀해 국가보안대(StB) 개혁을 추진하고 KGB 연락장교 6명의 존재를 폭로했으나, 부하인 빌리암 샬고비치가 KGB와 공모해 침공 당일 둡체크 체포를 지원하면서 개혁은 무너졌다.
세쿠리타테를 세운 첫 공산당 내무장관, 파우케르·루카를 「비호」했다는 죄목으로 1952년 함께 숙청되다
1952년 5월 전원회의는 제오르제스쿠에게 우편향에 「화해적 태도」를 보였다는 죄를 물어 정치국과 내무장관 자리에서 밀어냈다. 세쿠리타테를 만든 사람이 이듬해 2월 그 세쿠리타테에 체포되었다.
부쿠레슈티 근교 키틸라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인쇄공으로 일했고, 1929년 루마니아 공산당에 들어가 인쇄 노조에서 활동했다. 1941년 체포되어 10년형을 받고 카란세베시 감옥에서 게오르기우데지와 함께 복역했으며, 1944년 8월 석방되어 중앙위원회 서기가 되었다. 1945년 3월 그로자 정부의 내무장관에 올라 1952년까지 경찰과 보안기관을 장악했고, 1946년 총선의 조작, 1947년 마니우 등 국민농민당 지도부의 체포와 재판, 1948년 세쿠리타테 창설과 무장 저항의 진압을 지휘했다. 당내에서는 아나 파우케르·바실레 루카와 가까워 「모스크바파」의 세 번째 인물로 꼽혔고, 1952년 5월 전원회의에서 우편향에 「화해적 태도」를 보였다는 죄목으로 정치국과 내무장관 자리에서 제거되었다. 1953년 2월 체포되어 재판 없이 1956년 풀려났고 당적을 잃은 뒤 인쇄소 책임자로 일했다. 1968년 차우셰스쿠 지도부가 데지 시대 숙청을 재심하면서 복권되었고 1976년 부쿠레슈티에서 죽었다.
모스크바에서 브레즈네프 앞에 선 크리겔은 이렇게 말했다: '쏘든지 시베리아로 보내든지, 나는 서명하지 않겠다.'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주의 정치인이자 의사. 스페인 내전에서 국제여단 군의관으로 복무하고, 1968년 프라하의 봄에서 KSČ 상임간부회 위원 겸 민족전선 의장으로 개혁을 이끌었다. 바르샤바조약군 침공 당일 체포되어 모스크바로 연행되었고, 26명의 체코슬로바키아 정치인 중 유일하게 모스크바 의정서 서명을 거부했다. 이후 당에서 축출되고 의사 면허도 박탈당했으나, 1977년 헌장 77에 최초 서명하며 생애 마지막까지 반체제 인사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