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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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어 사전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레오 요기헤스

Leo Jogiches

혁명의 지하 조직가. 언제나 뒤에서, 마지막엔 맨 앞에서

1919년 3월 10일,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의 죽음을 추적하던 요기헤스는 베를린 모아비트 교도소에서 체포된 지 몇 시간 만에 뒷머리에 총을 맞고 살해되었다. 마지막으로 수사관에게 남긴 말: 「당신들은 이 살인자들을 절대 찾지 못할 것이다」.

폴란드-유대인 출신 마르크스주의 혁명가. 1893년 로자 룩셈부르크와 함께 SDKPiL을 창립하고, 1차 세계대전 중 스파르타쿠스단의 핵심 지하 조직가로 활동했다. 평생 룩셈부르크의 가장 가까운 정치적 동지이자 연인이었으며, 뛰어난 조직가였으나 스스로 글로 남기는 데는 어려움을 겪었다. 1919년 1월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가 살해되자 KPD 지도부를 맡아 그들의 죽음을 파헤치다 두 달 뒤 같은 의용군 계열에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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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5빌뉴스 최초의 지하 사회주의 연구 서클 창립
  • 1890징집을 피해 취리히로 망명, 룩셈부르크와 만남
  • 1892사회민주주의 도서관 출판사 설립
  • 1893룩셈부르크와 폴란드왕국 사회민주당(SDKP, 훗날 SDKPiL) 공동 창립
  • 1905–1906바르샤바에서 SDKPiL 중앙위 지도 — 체포, 8년 중노동형, 탈옥
  • 1907RSDLP 런던 대회에서 중앙위 후보위원 선출
  • 1916–1918스파르타쿠스단 지하 조직 총괄 — 신문 《스파르타쿠스》 발행 지휘
  • 1919.01–03KPD 지도부 장악, 룩셈부르크·리프크네히트 살해 조사 주도

바츨라프 바츨라보비치 보롭스키

Вацлав Вацлавович Воровски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폴란드 1871–1923 ✕ 암살

혁명과 외교, 문학 사이를 오간 최초의 소비에트 외교관, 로잔에서 총탄에 쓰러지다

1923년 5월 10일 로잔 호텔 세실 식당. 저녁 식사 중 백계 장교 모리스 콘라디가 다가가 권총을 쏘았다. 콘라디는 웨이터에게 리볼버를 건네며 말했다: "나는 좋은 일을 했다 — 러시아 볼셰비키가 유럽 전체를 망쳤다… 이것은 온 세계를 이롭게 할 것이다."

보롭스키는 러시아 마르크스주의 문학비평의 선구자이자 세계 최초의 소비에트 외교관 중 한 사람이다. 폴란드계 귀족 출신으로 1903년 볼셰비키에 합류해 'P. 오를롭스키' 등 여러 필명으로 당 기관지에 날카로운 문학비평과 정치 팸플릿을 발표했다. 1917년 말 스칸디나비아 3국 주재 외교대표로 임명되며 혁명 러시아의 첫 외교 창구를 열었고, 1921년부터 이탈리아 전권대표로 활동하며 제노바 회담에 참가했다. 1923년 로잔 회담 중 백계 망명 장교에게 암살당했으며, 범인에 대한 스위스 법정의 무죄 판결은 소련-스위스 국교 단절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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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혁명운동 참여, 학생 비밀 모임
  • 1897–1899체포, 뱟카 유형
  • 1900–1904제네바 망명, 《이스크라》 기고, 볼셰비키 합류(1903)
  • 1903오데사 잠입, 지하활동, 볼셰비키-폴란드 좌파 연락 담당
  • 1905–1906페테르부르크 볼셰비키 언론 활동, 무기 구매, 제4차 당대회 참가
  • 1915–1916페트로그라드 지멘스-슈케르트 공장 근무
  • 1917.04스톡홀름 자граничное бюро ЦК 위원 (가네츠키·라데크와 함께)
  • 1917–1919스칸디나비아 3국(스웨덴·노르웨이·덴마크) 주재 소비에트 외교대표
  • 1919–1920귀국, 국가출판사(Госиздат) 책임자
  • 1921–1923이탈리아 주재 전권대표 겸 무역대표
  • 1922제노바 회담 소비에트 대표단 참가
  • 1923.05.10로잔 회담 파견 중 백계 장교 M. 콘라디에게 암살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보그다노프

Александ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Богданов

레닌을 철학으로 분노하게 만든 남자, 그리고 자신의 피를 바꾸다 죽은 사이버네틱스의 선구자

모든 조직은 사회에서 결정적 영향력을 얻으면, 아무리 민주적인 강령을 내걸어도 자신의 내부 구조를 사회 전체에 강제하려 한다. 모든 집단은 사회 환경을 자신의 형상과 모습으로 재창조한다.

볼셰비키 공동 창립자이자 레닌의 철학적 라이벌. 보편적 조직 과학 '텍톨로지'로 시스템 이론의 선구자가 되었으며, 세계 최초 수혈 연구소를 설립했다. 1928년 교환 수혈 자가 실험 중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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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2–1899모스크바대학 자연과학부 입학, 불법 학생조직 활동으로 1894년 퇴학·체포·툴라 유배; 하리코프대학 의학부 외부생으로 졸업, 의사 자격 취득
  • 1897『경제학 단기 강좌』 출간 — 레닌이 익명 서평에서 극찬한 노동자 교육용 교재
  • 1903–1904볼셰비키 창립 합류, 제네바 22인 회의에서 최초의 볼셰비키 지도기관인 '다수파위원회 국'에 선출
  • 1905–1909RSDLP 제3·4·5차 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출, 당내 '제2인자'로 레닌과 경쟁;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에서 중앙위원회 대표 활동
  • 1904–1909경험일원론(Empiriomonism) 3부작 출간;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1909)에 의한 철학적 공격으로 결별, 볼셰비키 센터에서 축출
  • 1909–1911그룹 '프표료트(Vperyod)' 조직, 카프리 섬과 볼로냐에서 독자적 당학교 운영
  • 1908–1920년대SF 소설 『붉은 별』(1908)과 『엔지니어 멘니』(1912) 출간; 텍톨로지(Tektology): 보편적 조직 과학 — 전3권 출간, 훗날 시스템 이론·사이버네틱스의 선구로 평가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중 군의관으로 징집; 1914년 귀국, 전선 복무
  • 1918–1920프롤레트쿨트(Proletkult) 이념가로 활동, 프롤레타리아 문화론 주창
  • 1918–1922모스크바대학 정치경제학 교수·공산주의 아카데미 상임간부회 위원
  • 1921–1923부하린에게 공개서한 발송, 당의 비상관리 방식 비판; 1923년 GPU에 체포, '노동자의 진리' 그룹 연루 혐의로 조사받았으나 제르진스키 면담 후 석방
  • 1926–1928세계 최초 수혈 연구소 설립·소장 취임, 교환 수혈을 통한 노화 방지 이론 주창; 1928년 11번째 교환 수혈 자가 실험 중 사망

뱌체슬라프 루돌포비치 멘진스키

Вячеслав Рудольфович Менжински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폴란드 1874–1934 ○ 자연사

병상에서 OGPU를 지휘한 제르진스키의 후계자

인민재정위원이 된 첫날, 사무실로 소파를 끌어들여 '재정인민위원부'라고 써 붙이고 그 위에 누웠다. 레닌이 들어왔을 때 그는 잠들어 있었다.

폴란드 귀족 출신의 볼셰비키로, 19개 국어를 구사하고 은세기 문단에서 소설을 발표한 지식인이었다. 제르진스키 사후 1926년부터 1934년까지 OGPU 의장을 지내며 집단화, 초기 쇼 재판, 굴라그 체계 확대를 감독했다. 파리 망명 시절 교통사고 후유증과 심장병으로 대부분 병상에서 기관을 지휘했으며, 실무는 야고다에게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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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년대–1917볼셰비키 지하활동과 망명, 혁명 뒤 재무·외교 업무 수행
  • 1919–1923체카와 GPU에서 제르진스키의 측근으로 보안 업무에 진입
  • 1926–1934OGPU 의장, 병약한 수장 아래 야고다 등 실무진이 성장
  • 1928–1933샤흐티 사건, 산업당 사건 등 초기 쇼 재판과 강제수용 체계 확대기 감독
  • 1934사망 뒤 OGPU가 NKVD로 편입되고 야고다가 내무인민위원이 됨

이반 아돌포비치 테오도로비치

Иван Адольфович Теодорович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폴란드 1875–1937 ✕ 처형

첫 식량인민위원, 네프 농업마르크스주의로 숙청되다

1917년, 우리 당은 '전시공산주의'로 시작해야 했는가, 아니면 1921년에 '네프'라 불리게 된 길로 갈 수 있었는가. 나는 이미 후자의 견해를 고수했다.

스몰렌스크에서 측량기사의 아들로, 반란 전통을 지닌 폴란드계 가문에서 태어났다. 1895년 모스크바 '노동자동맹'에 가입하고 스몰렌스크 최초의 사회민주주의 서클을 조직했으며, 1907년 제5차 대회에서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1917년 10월 혁명 후 최초의 인민위원회의에서 식량인민위원을 맡았고, 연립정부 구성을 둘러싸고 사임했으나 12월까지 실무를 계속했다. 1922년부터 1928년까지 농업부인민위원을 지내며 네프를 '강력한 농가'를 통한 자금 축적 경로로 해석했고, 경제학자 콘드라티예프를 보호했다. 1937년 6월 11일 체포되어 9월 20일 '모스크바 센터'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같은 날 총살되었으며, 1956년 복권되었다. 사망 연도에는 1940년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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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5모스크바 '노동자동맹' 가입, 스몰렌스크 최초 사회민주주의 서클 조직
  • 1902RSDLP 모스크바 위원회 위원; 체포되어 야쿠티아 6년 유형
  • 1905제네바 《프롤레타리》 편집 서기; 10월 페테르부르크 위원회 위원
  • 1907RSDLP 제5차 대회 볼셰비키 중앙위원 선출
  • 1917첫 소브나르콤 식량인민위원 (10월–12월); 연립정부 불발로 사퇴
  • 1922–1928농업부인민위원
  • 1926–1930국제농업연구소 소장 겸 농민인터내셔널 사무총장
  • 1929–1935《카토르가 이 실카》 편집자, 옛 정치범·유형자협회 출판국장

로만 바츨라보비치 말리놉스키

Роман Вацлавович Малиновский

레닌의 신임을 받은 볼셰비키 중앙위원이자 오흐란카 비밀요원

1913년 2월 볼셰비키 무도회에서 말리놉스키가 빌려준 연미복을 입은 스탈린이 체포되자, 그는 스탈린과 대화 중이던 현장에서 '내가 구해내겠다'고 외쳤다.

볼셰비키 중앙위원이자 제4대 두마 의원으로 활약한 폴란드 출신 노동운동가. 레닌의 깊은 신임을 얻어 당내 최고위 노동자 출신 지도자로 부상했으나, 실은 제정 오흐란카의 최고액 비밀요원 '포르트노이'로서 오르조니키제·스베르들로프·스탈린의 체포를 초래하고 당 분열을 심화시켰다. 1914년 강제 사임 후 1918년 귀환, 재판에서 사형을 받고 크렘린에서 총살되었다. 그의 침투가 드러나면서 볼셰비키 내부의 음모적 불신이 깊어졌고, 이는 훗날 대숙청 시기 편집증적 숙청 논리의 한 기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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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1905이즈마일롭스키 근위연대 복무
  • 1906–1909상트페테르부르크 금속노동자조합 서기
  • 1910오흐란카 비밀요원 '포르트노이'로 포섭됨
  • 1912프라하 당대회에서 볼셰비키 중앙위원 선출
  • 1912–1914제4대 국가두마 볼셰비키 의원·분파 지도자
  • 1914.05강제 사임, 해외 도피
  • 1914–1918독일군 포로수용소 수감
  • 1918.11귀환, 베르호프니 트리부날 사형 판결, 총살

막심 막시모비치 리트비노프

Максим Максимович Литвин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폴란드 1876–1951 ○ 자연사

집단안보를 외친 외교관, 1939년에 치워지다

그의 집단안보 외교를 상징하는 구호는 "평화는 분할될 수 없다"였다. 사료는 이 말이 나온 자리를 하나로 특정하지 않는다. '평화의 불가분성'을 제목으로 내세운 국제연맹 총회 연설은 1936년 7월 1일의 기록이다.

러시아 혁명가이자 소비에트 외교관. 1876년 러시아 제국 그로드노 현 비아위스토크(현 폴란드)의 유대인 상인 가정에서 메이르-헤노흐 발라흐로 태어났다. 1930~1939년 외무인민위원으로 집단안보를 주창했고, 1939년 5월 스탈린이 그를 해임하고 몰로토프를 세웠다. 대숙청기에 그는 숙청과 트로츠키파 탄압을 공개 지지하고 부하린·리코프의 처벌을 심의해 추방과 재판에는 찬성하되 처형에는 반대했다. 1940년 NKVD는 그를 비밀리에 살해할 계획을 세웠으나 실행되지 않았다. 독소전쟁 후 복무에 나가 1941~1943년 주미 대사와 쿠바 공사를 겸했고, 외무부인민위원을 지냈다. 1951년 12월 31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해 노보데비치 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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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39외무인민위원

소피야 시기즈문도브나 제르진스카야

Софья Сигизмундовна Дзержинская
폴란드왕국·리투아니아 사회민주당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폴란드 1882–1968 ○ 자연사

독자적 혁명 경로를 걸은 폴란드 사회민주주의자

1911년 6월 바르샤바 파비아크 감옥에서 아들 얀을 낳고, 생후 8개월 동안 감방에서 함께 살았다.

바르샤바의 폴란드계 유대인 가정 출신으로, 1904년 SDKPiL에 투신해 로자 룩셈부르크 및 레오 요기헤스와 함께 폴란드 혁명운동의 핵심 간부로 활동했다. 반복된 체포와 시베리아 유형에도 지하신문 발행과 크라쿠프 망명 조직을 계속했고, 1918년 베른 소비에트 외교 사절단을 거쳐 모스크바에 정착했다. 1939~1943년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서 폴란드 문제를 맡았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점령 폴란드 대상 공산주의 방송 라디오 코시치우슈코를 지휘했으며, 3차례 레닌 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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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SDKPiL 입당, 바르샤바에서 지하 혁명운동 시작
  • 1906–1911반복 체포·투옥; SDKPiL 제6차 대회 대표 (1908); 펠릭스 제르진스키와 결혼 (1910); 파비아크 감옥에서 아들 얀 출산
  • 1912시베리아 유형 탈출; 크라쿠프에서 SDKPiL 해외분과 사무국 서기
  • 1918–1919베른 소비에트 외교 사절단 근무
  • 1922–1928로자 룩셈부르크 학교·서방 민족소수자 공산대학 교원; 전연방공산당 중앙위 폴란드국 선전선동부 책임비서
  • 1929–1937마르크스-엥겔스-레닌 연구소 연구원 겸 책임편집자
  • 1939–1943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서 폴란드 문제 담당
  • 1941–1946라디오 코시치우슈코 책임자; 1946년 은퇴; 회고록 『대투쟁의 시절』 출간 (1964)

안드레이 야누아리예비치 비신스키

Андрей Януарьевич Вышински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폴란드 1883–1954 ○ 자연사

모스크바 재판의 검사, 뒤에 유엔에서 강경 외교를 대변한 인물

1947년 9월 18일 유엔 총회에서 당시 외무차관에 불과했던 비신스키는 트루먼 독트린과 마셜 플랜이 구호물자를 "정치적 압력의 도구"로 쓴다고 맹비난하며, 구호물자를 정치적 무기로 써서는 안 된다는 1946년 12월 유엔 총회 결의를 인용했다.

폴란드 슐라흐타(귀족) 가문 출신으로 오데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바쿠로 이주했고, 1903년 러시아사민당 멘셰비키파에 들어갔다. 1908년 바일로프 감옥 1년형을 선고받아 그곳에서 스탈린을 만났고, 1913년 키예프대학을 졸업한 뒤 1920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러시아연방 검사(1931), 부검찰총장(1933), 소련 검찰총장(1935~1939)을 지냈고 1936~1938년 세 차례 모스크바 재판 모두에서 국가검사를 맡았다. 1939년 5월부터 인민위원회 부의장, 1940~1946년에는 외무인민위원 제1부위원으로 뉘른베르크 소련 대표단을 지휘했다. 외무장관(1949~1953)과 유엔 상임대표(1953~1954)를 지낸 뒤 1954년 뉴욕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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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1953외무장관

스타니스와프 비켄티예비치 코시오르

Станислав Викентьевич Косиор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폴란드 1889–1939 ✕ 처형

기근을 부인한 우크라이나 당 수장, 스탈린의 총에 쓰러지다

1932년 4월 26일, 우크라이나에 기근이 번지던 때 코시오르는 스탈린에게 보낸 서한에서 밝혔다: "우크라이나에 '기근'이 있다는 온갖 이야기는 단호히 배격해야 합니다. 굶주리는 마을들이 있기는 하나 이는 현지의 무능 탓일 뿐입니다."

1889년 11월 18일(구력 11월 6일) 러시아 제국 지배하 폴란드 왕국 벵그루프에서 공장 노동자 가정의 아들로 태어나 1907년 당에 입당했다. 돈바스와 키예프의 지하운동을 거쳐 우크라이나 공산당 창설에 참여했고, 1928~1938년 우크라이나 당을 이끌며 집단화와 공업화를 밀어붙였다. 1930년 정치국 정위원. 1932~33년 대기근의 존재를 부인하는 보고로 비판받는 동시에 감축과 식량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1938년 5월 체포되어 1939년 2월 26일 사형이 선고·집행되었고, 1956년 3월 14일 복권되었다. 2010년 우크라이나 법원은 그를 1932~33년 기근 조직자 중 한 사람으로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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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1917돈바스 지하 볼셰비키 활동, 여러 차례 체포·유형
  • 1917.10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 1919–1920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서기
  • 1926–1928전연방 공산당 중앙위 서기 겸 조직국원
  • 1928–1938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총서기 → 제1서기
  • 1930–1938전연방 공산당 정치국 정위원
  • 1938.05'폴란드 군사조직' 혐의로 체포
  • 1939.02.26군사재판에서 사형 선고, 당일 집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