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용어 사전소련공산당·볼셰비키

스테판 게오르기예비치 샤우먄

Степан Георгиевич Шаумя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러시아 아르메니아 1878–1918 ✕ 처형

마르크스주의로 무장한 캅카스의 레닌, 바쿠 코뮌의 지도자

바쿠 코뮌 붕괴 직전, 동료의 아내가 먼저 피하라 권하자 샤우먄은 답했다. "노동자들이 나에게 뭐라 하겠는가? 맨 먼저 도망치는 건 나에게 수치다."

아르메니아 마르크스주의의 선구자이자 캅카스 볼셰비키의 지도자. 트빌리시 상인 집안 출신으로 리가 공대와 베를린 대학에서 수학했고, 1899년 아르메니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서클을 조직했다. 「공산당 선언」을 아르메니아어로 번역하고 문학비평을 개척했으며, 1912년 프라하 협의회에서 볼셰비키 중앙위원 후보로 선출되었다. 1918년 바쿠 인민위원회의 의장으로 '바쿠 코뮌'을 이끌었고, 민족문제를 두고 레닌과 편지 논쟁을 벌인 대표적 이론가였다. 1918년 9월 26인의 바쿠 인민위원들과 함께 총살당해 소비에트 순교자가 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898트빌리시 실과학교 졸업, 리가 공과대학 입학
  • 1899아르메니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서클 조직
  • 1900–1902RSDLP 입당, 리가 공대 퇴학, 아르메니아 사회민주주의자 연맹 창립
  • 1902–1905베를린 대학 철학부, 「공산당 선언」 아르메니아어 번역, 제네바에서 레닌과 첫 만남
  • 1906–1914RSDLP 4차·5차 대회 대의원, 바쿠 지하신문 편집, 카프카스 연합위원회 지도
  • 1912프라하 협의회에서 볼셰비키 중앙위원 후보 승인
  • 1917.03–05바쿠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 초대 의장
  • 1917.11–1918.04바쿠 소비에트 집행위 의장, 레닌이 캅카스 특별 전권위원으로 임명
  • 1918.04–07바쿠 인민위원회의 의장 겸 외무위원 — 바쿠 코뮌 수립
  • 1918.09.2026인의 바쿠 인민위원과 함께 체포·총살

알렉산드르 표도로비치 먀스니코프

Александр Фёдорович Мясник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르메니아 1886–1925 ✕ 추락사

벨라루스와 아르메니아에 소비에트 권력을 세운 레닌의 변방 건설자

1917년 10월 혁명 소식이 민스크에 닿자 먀스니코프는 즉시 군사혁명위원회를 만들어 이끌었고, 소비에트 권력은 민스크에서 유혈 없이 수립되었다.

나히체반-나-도누의 아르메니아계 상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1906년 RSDLP에 입당해 불법 문헌 소지로 바쿠에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샤우먄의 영향을 받았다. 1917년 민스크에서 서부전선 볼셰비키를 이끌어 소비에트 권력 수립을 주도했다. 1919년 2월 벨라루스 중앙집행위원회 의장을 거쳐 1921년 5월부터 아르메니아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으로서 아르메니아의 국가 제도와 경제를 세웠다. 1922년부터 자카프카스 연방평의회 의장과 자카프카스 당 제1서기를 지냈다.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과 아르메니아 문학에 관한 저작을 남겼다. 1925년 3월 22일 트빌리시 근처에서 비행기가 불타 추락해 아타르베코프, 모길렙스키와 함께 사망했으며 화재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상세 이력 보기
  • 1906RSDLP 가입, 불법 문헌 소지로 바쿠로 유배 — 샤우먄과 교류
  • 1911–1914모스크바 대학 법학부 졸업(1911), 군 복무 후 변호사 조수로 볼셰비키 언론에 기고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서부전선 복무, 병사들 사이에서 혁명 선전
  • 1917.09–1918.05서북지역 당위원회 의장, 민스크 군사혁명위 의장, 서부전선 총사령관
  • 1919.01–02벨라루스 SSR 초대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겸 군사인민위원
  • 1919–1920모스크바 당위원회 군사조직자·서기; 폴란드 전쟁 시 서부전선 정치국장
  • 1921–1922아르메니아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 겸 군사인민위원, 자카프카스 SFSR 부의장
  • 1922–1925자카프카스 연방평의회 의장, 자캅카스 당 제1서기 — 소련 중앙집행위 상임위원,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당 중앙위 후보위원
  • 1925.03.22트빌리시 근처 항공기 화재로 사망 — 아타르베코프, 모길렙스키와 함께 순직

레프 미하일로비치 카라한

Лев Михайлович Караха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르메니아 1889–1937 ✕ 처형

중국에 대한 짜르 불평등조약을 폐기한 1919년 카라한 선언의 주역

1925년 베이징 외교단 단장이 된 카라한. 부르주아 예법을 조롱하던 볼셰비키였지만, 그가 은빛 육두마차를 타고 흰 장갑을 낀 연미복 차림으로 등장하자 타임지는 이렇게 평했다: "흰 장갑을 우아하게 낄 줄 아는 볼셰비키."

아르메니아계 변호사 가문 출신으로, 1904년 15세에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으며 처음에는 멘셰비키였다. 1917년 볼셰비키에 합류하여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회담 서기를 지낸 뒤 외무부인민위원이 되었다. 1919년 '카라한 선언'을 기초·발표하여 중국에 대한 제정 러시아의 모든 불평등조약과 특권 포기를 선언했고, 이는 소비에트 아시아 정책의 기초를 이룬 문서가 되었다. 주중 대사 시절 1924년 중소협정을 체결했으며, 1937년 대숙청 중 '친파시스트 음모' 혐의로 사형당했다가 1956년 복권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415세에 RSDLP 입당, 처음에는 멘셰비키
  • 1917.05귀국, 메즈라욘치(지역간파) 합류
  • 1917.08제6차 당대회: 메즈라욘치와 함께 볼셰비키 합류
  • 1917–1918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회담 소비에트 대표단 서기
  • 1918–1921외무부인민위원 (RSFSR)
  • 1921–1922주폴란드 RSFSR 전권대표
  • 1922–1923외무인민위원부 동방부장
  • 1923–1926주중 소비에트 전권대표 (1924년부터 대사)
  • 1925베이징 외교단 단장 (두아옌)
  • 1926–1934외무부인민위원 (USSR)
  • 1934–1937주터키 소비에트 전권대표

유벨리안 다비도비치 숨바토프-토푸리제

Ювельян Давидович Сумбатов-Топуридзе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르메니아 (그루지야계 모친) 1889–1960 ○ 구금 중 사망

대량작전기 아제르바이잔 내무인민위원, 베리야 사건으로 체포된 체키스트

1937~1938년 아제르바이잔 내무인민위원이자 특별 트로이카 위원으로 대숙청에 참여했다. 1953년 베리야 사건으로 체포되어 구금 중 사망했다.

쿠타이시현 카파나의 농가에서 아르메니아인 아버지와 그루지야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다(토푸리제는 어머니의 성). 1905~1910년 멘셰비키였고 1918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20년부터 아제르바이잔 체카에서 일했고, 1934년부터 아제르바이잔 GPU·NKVD를 이끌며 1937~1938년 내무인민위원으로 특별 트로이카에 들었다. 1938년 4월부터 NKVD 행정경리국장을 지냈고 1947~1953년 아제르바이잔 각료회의 부의장이었다. 1953년 7월 베리야 사건으로 체포되어 정신병원에 수용되었고, 수사가 끝나기 전인 1960년 8월 숨졌다.

상세 이력 보기
  • 1905–1910멘셰비키로 활동하며 농촌 혁명조직을 만들고 농민에게 전단을 배포했다.
  • 1918–1920붉은군대에서 복무한 뒤 1920년 아제르바이잔 체카에 들어갔다.
  • 1934–1938아제르바이잔 GPU 위원장과 NKVD 국장을 거쳐 1937~1938년 내무인민위원을 지냈고, 특별 트로이카에 참여해 대숙청을 집행했다.
  • 1938–1953NKVD 행정·경리국을 이끌고, 1947~1953년 아제르바이잔 각료회의 부의장을 지냈다. 1953년 베리야 사건으로 체포되어 수사 중 사망했다.

이반 스테파노비치 이사코프

Иван Степанович Исак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르메니아 1894–1967 ○ 자연사

한쪽 다리를 잃고도 두 전쟁을 치른 소련 해군의 학자 제독

스탈린이 이사코프를 평했다: "진짜 함대 제독, 이사코프 동지. 똑똑하군, 다리는 없지만 머리는 있지."

아르메니아계 소련 해군 지휘관으로, 1955년 소련 해군 최고 계급인 아드미랄 플로타 소비에츠코고 소유자에 오른 단 세 명 중 한 명이다. 해군 제1부인민위원과 주참모부장을 지내며 소련 해군의 작전 교리를 정립했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발트·흑해함대와 육군 간 협동작전을 조정하고 레닌그라드 '생명의 길'을 구축했다. 1942년 투압세에서 독일 공습으로 중상을 입어 왼쪽 다리를 절단했으나 종전까지 복무했다. 전후 3권의 『해양 지도책』(스탈린상 1급)을 비롯해 해양학·해군사에 걸친 150여 편의 저작을 남겼고,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과 작가동맹 회원이 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7해군사관학교 졸업, 발트함대 구축함 이쟈슬라프에서 복무
  • 1918발트함대 빙상 항해 참가
  • 1922–1928흑해함대 작전부장 등 참모직 역임
  • 1937–1938발트함대 사령관
  • 1938–1939해군 부인민위원 겸 해군대학교장
  • 1939–1946해군 제1부인민위원
  • 1940–1942해군 주참모부장
  • 1942북캅카스 전선 부사령관, 투압세에서 중상으로 다리 절단
  • 1946–1947해군 주참모부장
  • 1947–1950해군 부총사령관
  • 1955아드미랄 플로타 소비에츠코고 소유자 진급
  • 1958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선출

아나스타스 이바노비치 미코얀

Анастас Иванович Микоя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르메니아 1895–1978 ○ 자연사(폐렴)

소련의 식탁을 만든 사람. 그리고 「일리치에서 일리치까지」의 협상가

1942년 11월 6일 오후 2시 55분경, 붉은 광장 로브노예 메스토. 탈영병 드미트리에프가 스탈린의 차로 오인해 미코얀의 정부 차량에 소총 세 발을 쐈다. 미코얀과 동승자들은 다치지 않았다.

1915년 볼셰비키에 입당했고 1923년부터 50년 넘게 중앙위원을 지낸 소련의 정치가다. 1926년 최연소 인민위원(대외·국내상업), 1935년 정치국원이 되었고 식품공업인민위원(1934~38)으로서 1936년 미국을 시찰했다. 1937년 사형명단에 서명했고 예레반에 파견되어 아르메니아 숙청을 주도했으며, 1940년 폴란드 장교 2만 6천 명 처형 명령에 서명했다. 1956년 헝가리 투입을 유일하게 반대했고, 1960년 쿠바를 방문한 첫 소련 관료였으며 1962년 아바나에서 카스트로를 설득해 미사일을 철수시켰다. 1965년 정치국과 국가원수직에서 물러났다.

상세 이력 보기
  • 1926–1930대외·국내상업인민위원, 30대의 최연소 인민위원
  • 1934–1938식품공업인민위원, 1936년 미국 시찰, 통조림·냉동식품·대량생산 아이스크림 도입
  • 1938–1949대외무역인민위원, 전시 렌드리스 수령 총괄
  • 1953–1964무역·소비재 담당 부총리, 흐루쇼프의 해빙 지원
  • 1956헝가리 개입 반대
  • 1962아바나에서 카스트로 설득
  • 1964–1965최고소비에트 간부회의 의장(명목상 국가원수), 이후 은퇴

이반 흐리스토포로비치 바그라먄

Иван Христофорович Баграмя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르메니아 1897–1982 ○ 자연사

비슬라브 최초의 전선군 사령관, 바그라티온에서 발트까지

1944년 여름, 부대가 발트해에 닿자 바그라먄은 스탈린에게 발트해 물 한 병을 보냈다. 독일군이 해안을 되찾는 사이 병이 크렘린에 도착하자 스탈린은 말했다. "돌려주시오. 바그라먄 동무가 직접 따라 부을 수 있게."

아제르바이잔 출신 아르메니아인으로 비슬라브인 최초 소련 전선군 사령관. 바그라티온 작전에서 습지 돌파로 독일 북부집단군을 쿠를란트에 고립시켰다. 소련원수, 두 번의 소련영웅.

상세 이력 보기
  • 1915–1917러시아 제국군 자원입대, 캅카스 전선 페르시아 원정, 소위
  • 1918–1920아르메니아군에서 튀르크군과 교전, 중대장·기병대대장, 중위
  • 1920–1934붉은군대 합류, 기병연대장, 고급기병학교·프룬제 아카데미 졸업
  • 1934–1940키예프군관구 기병사단 참모장, 참모아카데미 졸업 후 교관
  • 1941–1942남서전선 작전참모 — 키예프 방어, 로스토프 반격, 하리코프 공세
  • 1942–194316군·11근위군 사령관 — 지즈드라, 오룔 반격에서 독일 방어 돌파
  • 1943–19451발트전선군 사령관 — 바그라티온, 메멜, 쾨니히스베르크 함락
  • 1945–1955발트군관구 사령관, 소련원수, 국방차관
  • 1956–1968참모아카데미 원장, 국방차관 겸 후방총국장

스테판 아코포비치 아코포프

Степан Акопович Акоп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르메니아 1899–1958 ○ 자연사

전시 중형기계에서 자동차공업까지 이끈 아르메니아계 생산 관료

1938년 우랄마시 공장장 시절, 군사기술 2급 기술자 계급을 받았다. 전시 중형기계공업 인민위원으로서 KV·IS 중전차와 SU 자주포의 동력계통을 책임졌고, 1945년 5월에는 쿠투조프 1급 훈장 — 대규모 부대 작전을 성공시킨 군사령관에게 주어지는 훈장을 산업 지휘관으로서 받았다.

아르메니아계 소비에트 산업 관료로, 제2차 세계대전 중 중형기계공업 인민위원으로서 전차·자주포·트랙터 생산을 지휘했고, 전후에는 자동차·트랙터 공업을 연이어 관장했다. 우랄마시 공장장을 거쳐 중기계·중형기계 인민위원부에서 말리셰프, 반니코프 등과 함께 스탈린 시대 군수-산업 행정을 떠받친 실무형 관리자였다. 1955년 흐루쇼프에게 공개 비판받고 물러났으나, 이미 3개의 레닌 훈장과 쿠투조프 1급 훈장을 받은 전쟁영웅급 산업 지휘관이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9–1922그루지야 콤소몰 조직비서, 트빌리시 시위원회 책임비서
  • 1922–1931바우만 모스크바 기계기계공학대학에서 수학하며 당 조직 업무 병행
  • 1931–1937포돌스크 크레킹·전기기관차 공장 기술이사, 후에 공장장
  • 1937–1939우랄마시 공장장, 군사기술 2급 계급 수여
  • 1939–1941중기계공업 부인민위원, 제1부인민위원; 중형기계공업 제1부인민위원
  • 1941–1946중형기계공업 인민위원 — 전차·자주포·트랙터 동력계통 생산 총괄
  • 1946–1950자동차공업 장관, 자동차·트랙터공업 장관
  • 1950–1955농업기계제조 차관·제1차관, 기계제조 장관, 자동차·트랙터·농업기계 장관; 1955년 퇴임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후댜코프

Серге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Худяк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르메니아 1902–1950 ✕ 처형

스탈린의 항공 군사고문에서 숙청된 유일한 아르메니아인 항공원수

바쿠 탈출선이 격침되자 수영을 못하던 아르메나크를 건져낸 전우 세르게이 후댜코프. 그가 백위대 습격에 전사하자, 아르메나크는 그의 무기와 외투를 걸치고 부대를 포위망 밖으로 이끌었다 — 그리고 평생 그 이름으로 살았다.

아르메니아 카라바흐 출신으로 15세에 바쿠 유전에서 노동하며 볼셰비키에 합류, 내전에서 기병 지휘관으로 활약하다 익사 직전 구해준 전우 세르게이 후댜코프의 이름을 이어받았다. 주콥스키 공군사관학교를 우등 졸업한 뒤 공군 참모·군수 요직을 거쳐, 대조국전쟁기 모스크바 방어전에서 서부전선 공군을 지휘하고 항공군 편제 개혁을 주도했다. 쿠르스크·드네프르 전투에서 항공작전을 조율하고 1944년 항공원수에 올랐으며, 테헤란·얄타 회담에 스탈린의 항공 군사고문으로 배석했다. 1945년 만주 전략공세작전에서 제12항공군을 지휘해 푸이 체포와 만주 금괴 확보를 성공시켰으나, 그해 12월 체포되어 1950년 처형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8–1922바쿠 적위대 조직, 차리친 방어, 자캅카스 전선 기병대대장
  • 1928–1936기병연대 참모장, 주콥스키 공군사관학교 우등 졸업
  • 1937–1941공군 작전과장·군수국장, 서부특별군관구 공군 참모장 → 서부전선 공군 사령관 (모스크바 방어전)
  • 1942–1943붉은군대 공군 참모장 → 제1항공군 사령관, 항공군 편제 개혁 주도
  • 1943–1944공군 부사령관 겸 참모장, 쿠르스크·드네프르 항공작전 조율, 항공원수 (1944.8)
  • 1943–1945테헤란·얄타 회담 항공 군사고문
  • 1945제12항공군 사령관, 만주 작전 — 푸이 체포·금괴 확보
  • 1945–19541945년 12월 체포, 1950년 4월 18일 처형, 1954년 8월 18일 복권, 1965년 계급·훈장 회복

보그단 자하로비치 코불로프

Богдан Захарович Кобул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르메니아인 1904–1953 ✕ 처형

베리야의 가장 가까운 부관이자 카틴·민족이주의 집행자

메르쿨로프는 회고했다 — "베리야는 밤늦은 업무를 마친 뒤 언제나 코불로프만 데리고 집이나 다차로 향했다." 루뱐카의 그 누구보다 코불로프는 베리야의 사적인 영역에 속한 인물이었다.

트빌리시에서 아르메니아인 재단사의 아들로 태어나 1925년 1월 당에 들어갔고, 1922년 그루지야 체카에서 보안 기관 경력을 시작했다. 1931년 베리야의 눈에 들어 그루지야 GPU 비밀정치부로 옮겨간 뒤 그루지야 내무인민위원 차석(1937–1938)과 NKVD 수사부장(1938–1939)을 지냈다. 1940년 폴란드군 장교·경찰 등을 사형에 처한 카틴 학살 3인조의 일원이었고, NKVD·NKGB 차석으로 체첸·인구시와 크림 타타르 등 민족 강제이주를 지휘했다. 1946년부터 해외 소련 재산 총국(GUSIMZ) 부국장, 1951년 10월부터 제1부국장이었고 1953년 3월 내무부 제1차관이 되었으나 6월 27일 베리야와 함께 체포되어 12월 23일 총살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2–1931그루지야 체카·GPU에서 하급 보안 요원으로 근무
  • 1931–1937베리야에게 발탁되어 그루지야 GPU 비밀정치부에서 활동, NKVD로 승계
  • 1937–1938그루지야 NKVD 차석, 대숙청기 현장 숙청 책임
  • 1938–1939NKVD 수사국장 — 예조프 사건과 주요 정치사건 수사 총괄
  • 1939–1941NKVD 경제총국장, 카틴 학살 사형 판결 3인조(1940) 참여
  • 1941–1945NKVD·NKGB 부인민위원(차석) — 체첸·인구시·크림 타타르 등 민족 강제이주 작전 지휘
  • 1953.03–06소련 내무부 제1차관, 베리야의 측근으로 복귀
  • 1953.06–12베리야와 함께 체포, 사형 선고 후 총살

아르툠 이바노비치 미코얀

Артём Иванович Микоя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르메니아 1905–1970 ○ 뇌졸중

미그(MiG)의 아버지: '한순간'에 하늘을 지배한 전투기 설계자

스탈린이 물었다: "어떤 바보가 우리에게 비밀을 팔겠는가?" 그 바보는 영국 노동당 정부였다. 미코얀은 1946년 제트 엔진을 사러 런던으로 날아갔고, 롤스로이스 닌의 역설계가 곧 MiG-15의 심장이 되었다.

아르메니아 산골 마을 출신 선반공에서 소련 최대 전투기 설계국의 창립자로 거듭난 인물. 1939년 미하일 구레비치와 OKB-155(MiG)를 창설, MiG-15로 한국전쟁의 제공권을 장악하고 MiG-21이라는 사상 최다 생산 초음속 전투기를 내놓았다. 정치국원 아나스타스 미코얀의 동생이지만, 두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과 여섯 차례 스탈린상, 레닌상을 받으며 스스로 기술관료의 정점에 올랐다. 그의 설계국 항공기들은 55개 세계 기록을 수립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3–1928로스토프·모스크바 «디나모» 공장 선반공
  • 1931–1937주콥스키 공군사관학교 졸업, 경비행기 «옥탸브료노크» 설계
  • 1939–1941OKB-155(MiG) 창설, MiG-1·MiG-3 전투기 개발
  • 1946–1953영국서 롤스로이스 닌 도입 → MiG-15; 한국전쟁 제트공중전 주도
  • 1953–1964MiG-17·MiG-19·MiG-21 — 초음속 전투기 시대로 이행
  • 1956–1968사회주의노동영웅 2회, 스탈린상 6회, 레닌상, 소련과학원 정회원
  • 1964–1970MiG-23·MiG-25·MiG-27 — 가변익·고속요격기 세대 설계

안드라니크 멜코노비치 페트로샨츠

Андраник Мелконович Петросьянц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르메니아 1906–2005 ○ 자연사

핵 프로그램의 민간 얼굴, 24년간 원자력 국가위원회 이끈 창립 세대

1986년 체르노빌 기자회견에서 '과학은 희생을 요구합니다'라고 말했다.

안드라니크 페트로샨츠는 소련 원자력 산업의 창립 세대를 대표하는 과학자·행정가로, 원자폭탄 개발을 관리한 제1총국에서 시작해 1962년부터 1986년까지 국가원자력이용위원회 의장으로서 소련 핵 프로그램의 민간 얼굴이자 평화적 이용의 국제적 대변인이었다. 1986년 체르노빌 참사 직후 기자회견에서 '과학은 희생을 요구합니다'라고 발언한 인물로도 기록된다.

상세 이력 보기
  • 1933–1939우랄중공업기계(UZTM)에서 작업반장·기술부장·수석기사 대리 역임
  • 1939–1941중공업기계제조 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 1941–1943전차공업 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 1943–1945국방위원회(GKO) 전차산업 담당 부위원
  • 1947–1953소련 각료회의 제1총국 부국장 — 원자력 프로젝트
  • 1955–1962중형기계공업부 차관
  • 1962–1986국가원자력이용위원회 의장

키릴 이바노비치 셸킨

Кирилл Иванович Щёлки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르메니아계 1911–1968 ○ 자연사

소련 최초의 원자폭탄에 기폭장치를 손수 꽂은 핵물리학자, 제2핵무기연구소의 초대 과학책임자

1949년 8월 29일, 셸킨은 조립동에서 RDS-1을 수령하는 서류에 서명하고, 플루토늄 구체에 기폭장치를 삽입한 뒤 탑의 출입문을 봉인했다. 그가 '기폭' 버튼을 누른 마지막 사람이었다.

키릴 셸킨은 연소·폭발 물리학자로서 스핀 폭굉 이론을 정립했고, 소련 원자폭탄 계획에서 결정적 실무를 맡은 인물이다. 1949년 8월 29일 세미팔라틴스크 실험장에서 그가 직접 플루토늄 구체에 기폭장치를 삽입하고 탑의 출입문을 봉인한 뒤 기폭 버튼을 눌렀다. 이후 1955년 우랄 지역에 두 번째 핵무기 설계국인 첼랴빈스크-70(현 브니이테에프)의 초대 과학책임자 겸 수석설계자로 부임하여 소련 최초로 실전배치된 열핵무기를 개발했다. 쿠르차토프, 하리톤과 함께 세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으나 1959년 연속된 심장발작으로 1960년 은퇴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35–1941소련 과학아카데미 화학물리연구소 연구원(레닌그라드)
  • 1941–1942붉은 군대 자원입대, 모스크바 방어전 참전 (제7근위소총사단)
  • 1944–1947화학물리연구소 실험실장 (모스크바)
  • 1947–1952KB-11(아르자마스-16) 부수석설계자 겸 연구부문장
  • 1952–1955KB-11 수석설계자 제1대리 겸 과학지도자 제1대리
  • 1955–1960NII-1011(첼랴빈스크-70) 초대 과학지도자 겸 수석설계자
  • 1960–1968모스크바 물리기술연구소(MIPT) 연소학과장·교수

레오니트 아르카디예비치 코스탄도프

Леонид Аркадьевич Костанд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르메니아계 1915–1984 ○ 심장마비

브레즈네프 시대 화학화 계획을 지휘한 최장수 화학공업 장관

1984년 라이프치히 박람회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지기 직전까지 동독 측과 화학 플랜트 협상을 진행했다. 그의 유골은 크렘린 벽 묘지에 안치되었는데, 이는 드미트리 우스티노프 바로 앞, 대략 마지막에서 두 번째로 그곳에 묻힌 인물이 되었다.

소련 화학공업의 최장수 책임자로서, 15년간 장관직을 수행하며 비료·고분자·석유화학을 축으로 한 전면적 화학화 계획을 지휘했다. 치르치크 전기화학 콤비나트의 현장 엔지니어로 출발해 질소비료·중수소 생산 기술로 스탈린상과 레닌상을 받았고, 이후 각료회의 부의장으로서 화학·석유·가스 산업 전반을 총괄했다. 아르메니아계로 투르크메니스탄에서 태어나 전연방 산업 관료로 성장했으며, 아르망드 해머와의 협력을 통해 서방 기술 도입 창구 역할도 수행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40치르치크 전기화학 콤비나트 기사·직장장·주임기사·공장장
  • 1953소련 화학공업부 질소공업 총국장
  • 1958국가화학위원회 부위원장 → 1961년 제1부위원장
  • 1963국가화학·석유기계제조위원회 의장 — 소련 장관
  • 1965–1980소련 화학공업부 장관
  • 1971CPSU 중앙위원회 위원 (1966년부터 후보위원)
  • 1980–1984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게오르기 호스로예비치 샤흐나자로프

Георгий Хосроевич Шахназаров

소련 정치학의 창시자, 페레스트로이카 정치개혁의 두뇌

「고르바초프도, 나도, 우리 모두 이중사고자였다. 머릿속에서 진실과 선전을 끊임없이 저울질해야 했다. 반체제냐 굴종이냐, 그게 선택지였다」

바쿠 출신 아르메니아계 정치학자·법학박사. 소련 정치학회를 창립해 17년간 이끌며 사회주의 민주주의 이론을 개척했고, 소비에트 사회 내 이익집단의 다원성을 인정한 초기 이론가 중 한 명이었다. 고르바초프 보좌관으로서 당 독점 폐지·경선 도입·대통령제 전환의 헌법개혁을 설계했으며, 퇴임 후 회고록 『자유의 대가』를 집필하고 SF 작가 '게오르기 샤흐'로도 활동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41–1945포병대 화기소대장·포대정찰반장, 쾨니히스베르크·세바스토폴·민스크 해방전 참전
  • 1949–1952아제르바이잔 국립대 법학부 졸업, 소련 과학아카데미 법학연구소 대학원
  • 1952–1960정치출판사(Politizdat) 편집자
  • 1960–1964『정치자습』·『평화와 사회주의의 제문제』(프라하) 근무
  • 1964–1988중앙위 사회주의국가부 자문관 → 부부장 → 제1부부장 (동독·폴란드·체코·쿠바 담당)
  • 1969법학박사: 논문 「사회주의 민주주의: 문제와 전망」
  • 1973–1990소련 정치학회 회장, 국제정치학회(IPSA) 부회장
  • 1987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연방최고회의 대의원
  • 1988–1991고르바초프 보좌관 → 소련 대통령 고문: 정치개혁·헌법개정 설계
  • 1990–1991인민대의원, 최고회의 헌법입법소위원회 위원장
  • 1992–2001고르바초프 재단 글로벌문제센터 소장

카렌 네르세소비치 브루텐츠

Карен Нерсесович Брутенц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르메니아 1924–2017 ○ 자연사

브레즈네프 시대 제3세계 정책을 설계한 국제부 이론가

브루텐츠와 국제부 전문가들은 1979년 아프가니스탄 파병이 '어리석은 짓'이라고 판단했다. 그 의견을 전달할 부서장 포노마료프는 중대한 12월 회의에서 아예 배제되었다.

아르메니아계 소비에트 국제부 이론가로, 브레즈네프-고르바초프 시기 소련의 제3세계 정책을 실무적으로 설계했다. 중앙위 국제부 제1부부장으로서 '민족민주주의' 개념의 정립을 주도했고, 1979년 아프가니스탄 파병 결정을 내부에서 반대한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46–1948바쿠 정신병원 의사
  • 1950–1954바쿠 시당 위원회 강사
  • 1954–1958사회과학아카데미 대학원생, 1958년 학위 취득
  • 1961–1969『평화와 사회주의의 제문제』(프라하) 민족해방운동부장
  • 1961–1976중앙위 국제부 책임직, 제3세계 정책 기획
  • 1976–1986중앙위 국제부 제1부부장
  • 1986–1990중앙위 후보위원
  • 1997–2017러시아 외교정책협회 부회장

세르고 아나스타시예비치 미코얀

Серго Анастасович Микоян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르메니아 1929–2010 ○ 자연사

냉전의 비공개 기록을 복원한 역사학자

그는 1962년 아버지의 개인 비서로 쿠바 협상을 기록했고, 그 문서가 훗날 공개되며 미사일 철수 뒤에도 전술핵이 쿠바에 남아 있었음이 드러났다.

세르고 미코얀은 라틴아메리카와 소련 대외정책을 연구한 소련·러시아 역사학자이자 아나스타스 미코얀의 아들이었다. 1962년 아버지를 수행해 쿠바를 방문한 경험과 개인 기록을 바탕으로, 공개된 미사일 철수 뒤에도 소련 전술핵이 쿠바에 남아 있었고 협상 과정이 쿠바 지도부와의 균열을 낳았음을 밝혔다. 그는 학술지 《라틴아메리카》를 이끌며 이 지역 연구를 조직했고, 훗날 소련과 미국 연구자들의 공동 냉전사 연구에 참여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52모스크바 국제관계대학 졸업
  • 1956동 대학원 수료
  • 1957–1960《세계경제와 국제관계》 학술 편집자
  • 1960–1990세계경제·국제관계연구소 연구원
  • 1962아나스타스 미코얀의 쿠바 협상 수행원
  • 1970–1990월간지 《라틴아메리카》 편집장
  • 1990년대미국 대학·문서보관소와 공동 연구
  • 2000년대조지타운대학교 교수

스테판 아라마이소비치 시타랸

Степан Арамаисович Ситаря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르메니아 1930–2009 ○ 자연사

협동조합법을 폴리트뷰로에서 밀어붙인 소련 최고위 아르메니아 경제학자

1988년 폴리트뷰로에서 보수파가 협동조합법에 격렬히 반대하자, 시타랸은 "이것은 사회주의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를 구하는 법"이라고 답했다고 전해진다.

아르메니아 출신의 소비에트 경제학자이자 국가 관료로, 코시긴 개혁부터 페레스트로이카까지 소련 경제 개혁의 거의 모든 주요 장면에 이론가이자 실무 책임자로 참여한 교량형 인물이다. 1960년대 중반 코시긴 개혁 준비 위원회에서 상품-화폐 관계 도입을 설계했고, 1986~1989년 고스플란 제1부의장으로서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경제 개혁의 핵심 규범들을 입안했다. 그가 주도한 1988년 협동조합법은 소련 역사상 처음으로 사적 기업 활동에 합법적 지위를 부여한 법률로, 보수파가 장악한 폴리트뷰로에서 직접 변론하여 관철시켰다. 이후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대외경제위원회 의장으로 대외경제 개방을 추진했고, 소련 해체 후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대외경제연구소를 창설하여 이끌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53소련 재무부 산하 재무연구소(NIFI) 선임경제학자, 선임연구원
  • 1966경제학 박사, 이후 교수 직함 획득 (1970)
  • 1970–1974소련 재무부 재무연구소(NIFI) 소장
  • 1974–1983소련 재무차관
  • 1983–1986소련 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 부의장
  • 1986–1989소련 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 제1부의장, 경제체제 개선 부처간위원회 제1부의장
  • 1989–1990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대외경제위원회 의장, 코메콘 주재 소련 상임대표
  • 1990–1991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92–2009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대외경제연구소(후에 센터) 소장

겐리흐 안드레예비치 포고샨

Հենրիկ Անդրեյի Պողոսյան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르메니아인 1931–2000 ○ 자연사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아르메니아 쪽으로 기울게 한 최후의 당 제1서기

1988년 7월 소련 최고회의 연단에서 "현재 상황에서 최선의 해결책은 카라바흐를 아제르바이잔에서 분리하는 것이다. 나는 대안을 보지 못한다."

1931년 스테파나케르트에서 태어난 아르메니아인 당료로, 1988년 2월 24일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 당위원회 제1서기에 임명되어 불과 4일 전 지역 소비에트가 아르메니아 통합 결의를 통과시킨 직후의 폭발적 상황을 물려받았다. 임기 중 3월 당 플레넘을 주재해 모스크바에 카라바흐의 아르메니아 이관을 공식 요청했고, 7월에는 소련 최고회의 연단에서 카라바흐를 아제르바이잔에서 분리하는 것 외에 대안이 없다고 선언했다. 모스크바는 1989년 1월 그를 해임하고 아르카디 볼스키의 특별관리위원회로 대체했으며, 해임 후 모스크바에서 은퇴 생활을 하다 2000년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87년경–1988.02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 집행위원회 부의장·농공위원장
  • 1988.02–1989.01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 당위원회 제1서기
  • 1989소련 인민대의원 (스테파나케르트 선거구)
  • 1989–2000모스크바에서 은퇴 생활

보리스 사르키소비치 케보르코프

Բորիս Սարգսի Կևորկով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르메니아인 1932–1998 ○ 자연사

나고르노-카라바흐에서 바쿠의 통제를 집행한 아르메니아계 당료

자치주는 아르메니아 공화국과 가깝지만, 높은 산으로 분리되어 있다. (1977년 국제 저널 인터뷰에서)

아제르바이잔 샤마흐 태생의 아르메니아인 당료로, 1973년 헤이다르 알리예프에 의해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 당 제1서기로 임명되어 1988년까지 재임했다. 카라바흐 외부 출신으로 알리예프에게 전적으로 충성하며, 지역 아르메니아인들의 민족적 요구를 억압하고 바쿠의 통제력을 강화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1977년 국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카라바흐가 '높은 산으로 아르메니아와 분리되어 있다'고 주장해 동족의 분노를 샀고, 1988년 2월 소비에트가 아르메니아 통합 결의안을 통과시키자 해임되었다. 1992년 바쿠에서 체포·투옥되었다가 1993년 알리예프의 사면으로 석방된 뒤 모스크바로 이주해 중학교 역사 교사로 일하다 1998년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54바쿠 시 콤소몰 강사·선전부 차장
  • 1954–1961바쿠 제르진스키·나리마노프 구 콤소몰 제1서기
  • 1961–1970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 조직·당기관부 책임조직원·감찰관
  • 1970–1973바쿠 키로프 구 당위원회 제1서기
  • 1973–1988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 당위원회 제1서기
  • 1974–1989소련 최고회의 민족회의 대의원 (9~11기)
  • 1988당에서 제명
  • 1993–1998모스크바 중학교 역사 교사

아벨 게제비치 아간베갼

Абел Гезевич Аганбегян

고르바초프의 수석 경제 고문이자 페레스트로이카의 시장개혁 설계사

페레스트로이카는 소비에트 사회 전체의 혁명적 쇄신이다. 성장의 가속은 민주화와 글라스노스트에서 분리될 수 없다. (1988)

트빌리시 태생의 아르메니아계 수리경제학자. 노보시비르스크 IEiOPP 소장(1966–1984)으로 시베리아 개발과 BAM의 경제 토대를 설계하고 『EKO』를 창간했다. 1985년 고르바초프의 수석 경제 고문이 되어 기업 자율성 확대, 시장 요소 도입, 대외경제 개방이라는 개혁 청사진을 제시했다. 과학아카데미 경제분과 서기(1986–1989)로 활동하며 소비에트 계획경제 안에서 최대한의 변화를 모색했고, 소련 해체 후 국민경제아카데미 총장(1989–2002)을 지냈다.

상세 이력 보기
  • 1955–1961노동·임금 국가위원회에서 경제학자로 근무
  • 1961–1966노보시비르스크 IEiOPP 섹터장, 33세에 소장
  • 1966–1984IEiOPP 소장, BAM 과학위원회 의장, 『EKO』 창간·편집장
  • 1974과학아카데미 정회원 (1964년 통신회원)
  • 1985–1989고르바초프 경제 고문, 생산력연구위원회 의장
  • 1986–1989과학아카데미 경제분과 아카데미크-서기, 상임위원
  • 1989–2002소련·러시아 정부 산하 국민경제아카데미 총장
  • 2002–현재국민경제아카데미 경제이론·정책 학과장, 저술 활동 지속

카렌 세로보비치 데미르찬

Карен Серобович Демирчя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르메니아 1932–1999 ✕ 암살

아르메니아를 14년간 이끌며 현대화하고, 카라바흐에 동조해 실각한 후 복귀했으나 의회 총격으로 암살당하다

1975년 4월 23일, 데미르찬은 소비에트 아르메니아 지도부로서는 처음으로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의 조직자들을 공식 규탄하며 공화국의 이름으로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예레반 전기기술공장에서 기술자로 출발해 당비서·주임기사·공장장을 거쳐 1974년 아르메니아 공산당 제1서기로 취임하여 14년간 공화국을 이끌었다. 재임 중 메차모르 원자력발전소와 예레반 지하철을 비롯한 현대적 기반시설을 건설했고, 1975년 소비에트 아르메니아 지도부로서는 최초로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을 공식 규탄했다. 1978년 공화국 헌법에 아르메니아어를 국어로 명기하는 성과를 이끌어냈다. 1988년 나고르노-카라바흐 문제에서 민중 시위에 동조한 이유로 모스크바에 의해 '건강상 사유'로 해임되었다. 소련 붕괴 후 1998년 대선에 출마해 결선에서 40%를 득표하고 1999년 국민의회 의장으로 선출되었으나, 같은 해 10월 의회 총격 사건으로 암살당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54–1966예레반 전기기술공장: 기술자·당비서·주임기사·공장장
  • 1959–1961CPSU 중앙위 고등당학교 수료
  • 1966–1972예레반 시당위 서기 → 제1서기
  • 1972–1974아르메니아 공산당 중앙위 서기
  • 1974–1988아르메니아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1976–1988 아르메니아 SSR 최고소비에트 의장 겸임)
  • 1976–1989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91–1999아름엘렉트로마시나(하이엘렉트로메케나) 전기기기 공장 총지배인
  • 1998–1999아르메니아 인민당 창당·의장
  • 1999아르메니아 국민의회 의장 (6월–10월)

스테판 카라페티 포고샨

Ստեփան Կարապետի Պողոսյան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르메니아인 1932–2012 ○ 자연사

붕괴 직전 아르메니아 공산당의 마지막 지도자

1990년 말, 그는 소비에트 아르메니아의 당을 이끌었지만 그 당의 통치 기반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

스테판 포고샨은 역사학자 출신의 아르메니아 공산당 정치가로, 소비에트 아르메니아의 대중매체와 출판 행정을 오래 맡았다. 그는 사회주의 체제의 해체가 진행되던 시기에 당의 국가적 기반과 정치적 영향력이 약화되는 과정을 대표했다. 1990년 말부터 1991년까지 아르메니아 공산당 제1서기이자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원으로 활동한 뒤 정계를 떠났다.

상세 이력 보기
  • 1955–1958예레반 국립대학교 콤소몰 위원회 서기
  • 1958–1962아르메니아 콤소몰 중앙위원회 간부, 예레반 시 콤소몰 제1서기
  • 1962–1967아르메니아 콤소몰 중앙위원회 서기·제1서기
  • 1967–1970아라라트 지구당위원회 제1서기
  • 1970–1988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국가 텔레비전·라디오 위원회 의장
  • 1988–1990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각료회의 산하 정보통신사 사장, 국가출판위원회 의장
  • 1990–1991아르메니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원

블라디미르 미그라노비치 몹시샨

Վլադիմիր Միգրանովիչ Մովսիսյան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르메니아계 1933–2014 ○ 자연사

소련 아르메니아의 마지막 공산당 제1서기

나고르노카라바흐 문제의 미해결을 이유로 소련 공산당 정치국에서 물러났다.

블라디미르 몹시샨은 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농업·당 관료로 성장한 정치가였다. 1990년 공산당 제1서기와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이 되었지만, 나고르노카라바흐 문제의 해결이 지연되자 정치국을 떠났다. 소련 해체 뒤에도 난민 행정과 국방, 농업 정책에 관여하며 독립 아르메니아의 국가 건설에 참여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58–1965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여러 지역의 수석 수의사
  • 1969–1973아르타샤트 지구당 제1서기
  • 1975–1978아르메니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농업부장
  • 1984–1990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각료회의 제1부의장
  • 1990아르메니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
  • 1991소련 농업·식량부 차관
  • 1996–1999아르메니아 농업부 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