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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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야코블레비치 콘

Феликс Яковлевич Ко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폴란드 1864–1941 ○ 자연사

바르샤바 소년 애국자에서 코민테른의 노혁명가로: 봉인열차와 함께 돌아온 폴란드인

“여섯 살 때 나는 반란군 지도자가 되어 '모스칼'과 '슈바벤'에게서 폴란드를 해방하는 꿈을 꾸었다.” — 회고록 『50년 동안』

20년간 차르의 감옥과 시베리아 유형을 견디며 시베리아 원주민 연구로 금메달을 받은 민족지학자가 된 폴란드 혁명가. 폴란드사회당(PPS) 내에서 피우수트스키의 민족주의 노선에 맞서 좌파 분당을 주도했고, 레닌과 함께 봉인열차로 귀환해 볼셰비키에 합류했다. 국제적색원조회(MOPR) 창립에 참여하고 소비에트 라디오방송체계를 창설했으며, 60년 가까이 국제 혁명운동의 최전선에서 활동하다 대숙청을 넘겨 77세로 자연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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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2폴란드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 '프롤레타리아트' 가입
  • 1884–1891체포, 10년형 선고 — 카라 강제노동수용소 복역; 1889년 여성 수감자 체벌 항의 집단 음독 주도
  • 1891–1904야쿠츠크·이르쿠츠크·미누신스크 유형 — 민족지 연구로 금메달 수상; 레닌·크루프스카야와 교류
  • 1904–1907바르샤바 귀환, PPS 좌파 지도자 — 1906년 피우수트스키 축출 및 PPS-레비차 분당 주도
  • 1907–1914오스트리아 갈리치아 망명 — 드로호비치 노동자 의료보험조합장, PPS-레비차 해외조직 활동
  • 1914–1917스위스 망명 — 치머발트 회의 참석, 국제주의 좌파 활동
  • 1917레닌과 함께 봉인열차로 러시아 귀환; 하리코프 지역 폴란드 문제 정치위원
  • 1918RKP(b) 입당 (당적 1906년 소급 인정); 우크라이나 외무인민위원부·폴란드국 활동
  • 1920폴란드 임시혁명위원회(폴레프콤) 위원 — 비아위스토크에서 폴란드 소비에트 정부 수립 시도
  • 1921우크라이나 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책임서기 (3월–12월)
  • 1922–1923코민테른 집행위원회(ICCI) 서기
  • 1925–1928『크라스나야 즈베즈다』(붉은 별) 편집장
  • 1928–1930『라보차야 가제타』 편집장 및 아동잡지 『무르질카』 주필
  • 1931–1933전연방 라디오방송위원회 초대 의장 — 소비에트 라디오 방송체계 창설
  • 1933–1937RSFSR 교육인민위원부 박물관 부서장, 『소베츠키 무제이』 주필
  • 1937–1941『나샤 스트라나』 편집장; 독일 침공 후 모스크바 라디오 폴란드어 방송 지도

바츨라프 바츨라보비치 보롭스키

Вацлав Вацлавович Воровски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폴란드 1871–1923 ✕ 암살

혁명과 외교, 문학 사이를 오간 최초의 소비에트 외교관, 로잔에서 총탄에 쓰러지다

1923년 5월 10일 로잔 호텔 세실 식당. 저녁 식사 중 백계 장교 모리스 콘라디가 다가가 권총을 쏘았다. 콘라디는 웨이터에게 리볼버를 건네며 말했다: "나는 좋은 일을 했다 — 러시아 볼셰비키가 유럽 전체를 망쳤다… 이것은 온 세계를 이롭게 할 것이다."

보롭스키는 러시아 마르크스주의 문학비평의 선구자이자 세계 최초의 소비에트 외교관 중 한 사람이다. 폴란드계 귀족 출신으로 1903년 볼셰비키에 합류해 'P. 오를롭스키' 등 여러 필명으로 당 기관지에 날카로운 문학비평과 정치 팸플릿을 발표했다. 1917년 말 스칸디나비아 3국 주재 외교대표로 임명되며 혁명 러시아의 첫 외교 창구를 열었고, 1921년부터 이탈리아 전권대표로 활동하며 제노바 회담에 참가했다. 1923년 로잔 회담 중 백계 망명 장교에게 암살당했으며, 범인에 대한 스위스 법정의 무죄 판결은 소련-스위스 국교 단절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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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혁명운동 참여, 학생 비밀 모임
  • 1897–1899체포, 뱟카 유형
  • 1900–1904제네바 망명, 《이스크라》 기고, 볼셰비키 합류(1903)
  • 1903오데사 잠입, 지하활동, 볼셰비키-폴란드 좌파 연락 담당
  • 1905–1906페테르부르크 볼셰비키 언론 활동, 무기 구매, 제4차 당대회 참가
  • 1915–1916페트로그라드 지멘스-슈케르트 공장 근무
  • 1917.04스톡홀름 자граничное бюро ЦК 위원 (가네츠키·라데크와 함께)
  • 1917–1919스칸디나비아 3국(스웨덴·노르웨이·덴마크) 주재 소비에트 외교대표
  • 1919–1920귀국, 국가출판사(Госиздат) 책임자
  • 1921–1923이탈리아 주재 전권대표 겸 무역대표
  • 1922제노바 회담 소비에트 대표단 참가
  • 1923.05.10로잔 회담 파견 중 백계 장교 M. 콘라디에게 암살

뱌체슬라프 루돌포비치 멘진스키

Вячеслав Рудольфович Менжински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폴란드 1874–1934 ○ 자연사

병상에서 OGPU를 지휘한 제르진스키의 후계자

인민재정위원이 된 첫날, 사무실로 소파를 끌어들여 '재정인민위원부'라고 써 붙이고 그 위에 누웠다. 레닌이 들어왔을 때 그는 잠들어 있었다.

폴란드 귀족 출신의 볼셰비키로, 19개 국어를 구사하고 은세기 문단에서 소설을 발표한 지식인이었다. 제르진스키 사후 1926년부터 1934년까지 OGPU 의장을 지내며 집단화, 초기 쇼 재판, 굴라그 체계 확대를 감독했다. 파리 망명 시절 교통사고 후유증과 심장병으로 대부분 병상에서 기관을 지휘했으며, 실무는 야고다에게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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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년대–1917볼셰비키 지하활동과 망명, 혁명 뒤 재무·외교 업무 수행
  • 1919–1923체카와 GPU에서 제르진스키의 측근으로 보안 업무에 진입
  • 1926–1934OGPU 의장, 병약한 수장 아래 야고다 등 실무진이 성장
  • 1928–1933샤흐티 사건, 산업당 사건 등 초기 쇼 재판과 강제수용 체계 확대기 감독
  • 1934사망 뒤 OGPU가 NKVD로 편입되고 야고다가 내무인민위원이 됨

이반 아돌포비치 테오도로비치

Иван Адольфович Теодорович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폴란드 1875–1937 ✕ 처형

첫 식량인민위원, 네프 농업마르크스주의로 숙청되다

1917년, 우리 당은 '전시공산주의'로 시작해야 했는가, 아니면 1921년에 '네프'라 불리게 된 길로 갈 수 있었는가. 나는 이미 후자의 견해를 고수했다.

스몰렌스크에서 측량기사의 아들로, 반란 전통을 지닌 폴란드계 가문에서 태어났다. 1895년 모스크바 '노동자동맹'에 가입하고 스몰렌스크 최초의 사회민주주의 서클을 조직했으며, 1907년 제5차 대회에서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1917년 10월 혁명 후 최초의 인민위원회의에서 식량인민위원을 맡았고, 연립정부 구성을 둘러싸고 사임했으나 12월까지 실무를 계속했다. 1922년부터 1928년까지 농업부인민위원을 지내며 네프를 '강력한 농가'를 통한 자금 축적 경로로 해석했고, 경제학자 콘드라티예프를 보호했다. 1937년 6월 11일 체포되어 9월 20일 '모스크바 센터'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같은 날 총살되었으며, 1956년 복권되었다. 사망 연도에는 1940년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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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5모스크바 '노동자동맹' 가입, 스몰렌스크 최초 사회민주주의 서클 조직
  • 1902RSDLP 모스크바 위원회 위원; 체포되어 야쿠티아 6년 유형
  • 1905제네바 《프롤레타리》 편집 서기; 10월 페테르부르크 위원회 위원
  • 1907RSDLP 제5차 대회 볼셰비키 중앙위원 선출
  • 1917첫 소브나르콤 식량인민위원 (10월–12월); 연립정부 불발로 사퇴
  • 1922–1928농업부인민위원
  • 1926–1930국제농업연구소 소장 겸 농민인터내셔널 사무총장
  • 1929–1935《카토르가 이 실카》 편집자, 옛 정치범·유형자협회 출판국장

막심 막시모비치 리트비노프

Максим Максимович Литвин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폴란드 1876–1951 ○ 자연사

집단안보를 외친 외교관, 1939년에 치워지다

그의 집단안보 외교를 상징하는 구호는 "평화는 분할될 수 없다"였다. 사료는 이 말이 나온 자리를 하나로 특정하지 않는다. '평화의 불가분성'을 제목으로 내세운 국제연맹 총회 연설은 1936년 7월 1일의 기록이다.

러시아 혁명가이자 소비에트 외교관. 1876년 러시아 제국 그로드노 현 비아위스토크(현 폴란드)의 유대인 상인 가정에서 메이르-헤노흐 발라흐로 태어났다. 1930~1939년 외무인민위원으로 집단안보를 주창했고, 1939년 5월 스탈린이 그를 해임하고 몰로토프를 세웠다. 대숙청기에 그는 숙청과 트로츠키파 탄압을 공개 지지하고 부하린·리코프의 처벌을 심의해 추방과 재판에는 찬성하되 처형에는 반대했다. 1940년 NKVD는 그를 비밀리에 살해할 계획을 세웠으나 실행되지 않았다. 독소전쟁 후 복무에 나가 1941~1943년 주미 대사와 쿠바 공사를 겸했고, 외무부인민위원을 지냈다. 1951년 12월 31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해 노보데비치 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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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39외무인민위원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폴란드 1877–1926 ○ 자연사

「철의 펠릭스」: 혁명의 칼을 만든 금욕주의자

1926년 7월 20일, 연합반대파를 격렬히 비판하는 두 시간의 중앙위원회 연설을 마친 직후 심장마비로 쓰러졌다. 육신은 이미 병들어 있었지만 마지막까지 연단을 떠나지 않았다.

차르의 감옥과 유형지에서 11년을 보낸 폴란드 귀족 가문 출신 혁명가. 1917년 12월 체카를 창설해 적색 테러를 집행했고, 요원들에게 「깨끗한 손, 차가운 머리, 뜨거운 심장」을 요구했다. 1926년 중앙위원회에서 격렬한 연설을 마친 직후 심장마비로 죽었다. 그가 만든 기관은 이름을 바꿔 가며 그보다 오래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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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1917체포와 유형 11년, 1917년 석방
  • 1917.12체카 창설, 의장
  • 1921–1924교통인민위원 겸임: 철도 복구
  • 1924–1926국민경제최고회의 의장: 공업 재건
  • 1926.07중앙위 연설 직후 심장마비로 사망

야코프 스타니슬라보비치 가네츠키

Яков Станиславович Ганецки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폴란드 1879–1937 ✕ 처형

크라쿠프에서 스톡홀름까지 레닌의 돈줄을 책임진 폴란드 혁명가

1917년 4월 13일, 스톡홀름 역. 파르부스가 봉인열차로 도착한 레닌을 기다렸다. 레닌은 직접 만나기를 거부하고 가네츠키를 중간에 세웠다. 파르부스가 물었다: "평화가 필요하다. 그가 무엇을 하려는가?" 가네츠키가 전하자 레닌은 답했다: "나는 외교에 관심 없다. 나의 임무는 사회혁명적 선동이다."

폴란드 바르샤바 출신 혁명가로 SDKPiL 창립에 참여하고 레닌의 측근이 되어 볼셰비키의 지하 자금 네트워크를 운영했다. 1차대전기 파르부스와 코펜하겐·스톡홀름에 무역회사를 설립해 전시 상품 무역 이익을 혁명 자금으로 전환했으며, 이 경로는 독일 자금 논쟁의 핵심 쟁점이 되었다. 10월 혁명 후 국유은행 부총재와 대외무역인민위원부 간부로 소비에트 금융체제 구축에 기여했고, 라트비아 전권대표와 카르스 조약 서명으로 외교 무대에도 진출했다. 말년에는 혁명박물관장을 지내다 대숙청 속에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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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1912SDKPiL 창립 참여, 당 주간부, RSDLP 중앙위원 후보
  • 1912–1915레닌의 크라쿠프 이주 주선, 최측근 보좌
  • 1915–1917코펜하겐·스톡홀름에서 파르부스와 무역회사 운영, 볼셰비키 자금 조달
  • 1917–1920국유은행 부총재(인민은행장 대행), 재정부 인민위원, 고흐란 국장
  • 1920–1923라트비아 주재 전권대표, 카르스 조약 서명, 외교·대외무역 인민위원부 근무
  • 1923–1935대외무역인민위원부 간부, 최고경제회의 상임위원, GO-MEZ 국장
  • 1935–1937모스크바 혁명박물관 관장
  • 1937NKVD 체포, 15분 재판 후 총살형, 1954년 사후 복권

이오시프 스타니슬라보비치 운쉴리흐트

Иосиф Станиславович Уншлихт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폴란드 1879–1938 ✕ 처형

체카 부의장에서 민간항공까지: 혁명의 전천후 조직가

1938년 7월 28일 군사재판부 법정에서 고문으로 받아낸 자백을 번복하며 "나는 '폴란드 군사조직'에 가담한 적이 없다"고 진술했으나, 재판은 20분 만에 끝났고 사형이 선고되었다.

폴란드 미아바(당시 러시아 제국 플로츠크 주)의 유대인 소시민 가정에서 태어나 바르샤바 고등기술과정에서 전기기사 자격을 얻었고, 1900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사회민주당(SDKPiL)에 입당했다. 1902~1913년 여러 차례 체포되어 차르 감옥과 시베리아 유형을 겪었다는 점은 사료가 일치하나 체포 횟수는 6차례와 7차례 기록이 갈린다. 1917년 이르쿠츠크 소비에트 위원이자 볼셰비키로 활동했고,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부 위원과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으로 10월 봉기에 참여했으며 제헌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21년부터 체카·GPU 부의장을 지내고 1925~1930년 혁명군사평의회 부의장을 역임했으며, 1937년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되었으나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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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SDKPiL 입당, 이후 RSDLP 볼셰비키 분파 합류
  • 1900–1917여섯 차례 체포, 차르 감옥과 시베리아 유형
  • 1917.10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제헌의회 의원
  • 1917–1918내무인민위원부 콜레기야 위원, 프스코프 전선
  • 1919리투아니아-벨로루시 SSR 군사인민위원
  • 1920서부전선·제16군 혁명군사평의회, 폴란드 임시혁명위원회
  • 1921–1923체카·GPU 부의장, 능동정찰 특별국, 지식인 추방
  • 1925–1930소련 혁명군사평의회 부의장 겸 육해군 부인민위원
  • 1927–1930오소아비아힘 의장
  • 1930–1933고스플란 부의장 (군수공업)
  • 1933–1935민간항공총국장
  • 1935중앙집행위원회 연방회의 서기 직무대행

스타니스와프 스타니스와보비치 페스트콥스키

Станислав Станиславович Пестковски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폴란드 1882–1937 ✕ 처형

폴란드 귀족에서 카자흐 초대 소비에트 지도자가 된 국제주의 혁명가

1917년 11월, 스몰니 연구소에서 멘진스키에게 런던 대학에서 금융학을 공부했다고 말하자, 멘진스키가 몸을 일으키며 「그렇다면 자네를 국가은행 관리자로 임명하겠네」라고 선언했다. 그렇게 페스트콥스키는 소비에트 국가은행의 초대 인민위원이 되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영향을 받아 SDKPiL에 입당하고 1905년 혁명기에는 지도부에서 활동한 폴란드 귀족 출신 볼셰비키. 10월혁명 직후 국가은행 초대 인민위원을 지냈고, 스탈린의 민족문제인민위원부에서 부인민위원으로 일하며 소비에트 민족정책의 제도화에 참여했다. 1919년 키르기스(카자흐) 혁명위원회 초대 의장에 임명되어 사실상 카자흐스탄의 초대 소비에트 지도자가 되었으며, 이후 초대 소련 주멕시코 전권대표와 코민테른·프로핀테른 활동가로 국제혁명운동에 헌신했다. 대숙청으로 1937년 처형, 1955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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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1906SDKPiL 입당, 1905-06년 주이사회 위원
  • 1906–19124년 강제노동형 후 이르쿠츠크 영구유형, 1912년 크라쿠프로 탈출
  • 1917.10–11중앙전신국 인민위원 → 국가은행 인민위원
  • 1917–1919민족문제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스탈린 보좌)
  • 1919–1920키르기스(카자흐) 혁명위원회 초대 의장
  • 1920–1921소비에트-폴란드 전쟁, 서부전선 정치총국장
  • 1924–1926초대 소련 주멕시코 전권대표
  • 1926–1937MOPR 중앙위 부의장, 코민테른·프로핀테른 활동

안드레이 야누아리예비치 비신스키

Андрей Януарьевич Вышински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폴란드 1883–1954 ○ 자연사

모스크바 재판의 검사, 뒤에 유엔에서 강경 외교를 대변한 인물

1947년 9월 18일 유엔 총회에서 당시 외무차관에 불과했던 비신스키는 트루먼 독트린과 마셜 플랜이 구호물자를 "정치적 압력의 도구"로 쓴다고 맹비난하며, 구호물자를 정치적 무기로 써서는 안 된다는 1946년 12월 유엔 총회 결의를 인용했다.

폴란드 슐라흐타(귀족) 가문 출신으로 오데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바쿠로 이주했고, 1903년 러시아사민당 멘셰비키파에 들어갔다. 1908년 바일로프 감옥 1년형을 선고받아 그곳에서 스탈린을 만났고, 1913년 키예프대학을 졸업한 뒤 1920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러시아연방 검사(1931), 부검찰총장(1933), 소련 검찰총장(1935~1939)을 지냈고 1936~1938년 세 차례 모스크바 재판 모두에서 국가검사를 맡았다. 1939년 5월부터 인민위원회 부의장, 1940~1946년에는 외무인민위원 제1부위원으로 뉘른베르크 소련 대표단을 지휘했다. 외무장관(1949~1953)과 유엔 상임대표(1953~1954)를 지낸 뒤 1954년 뉴욕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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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1953외무장관

스타니스와프 아다모비치 메싱

Станислав Адамович Мессинг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폴란드 1890–1937 ✕ 처형

제르진스키의 폴란드 전우, 체카의 초석을 놓고 야고다의 조작에 맞서다

1926년 9월 26일, 레닌그라드 OGPU 청사 집무실에서 18세의 하리코프 청년 아나톨리 트루바가 권총을 난사했다. 메싱은 책상 아래로 몸을 피해 살아남았고, 트루바는 곧 총살당했다.

바르샤바의 유대인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나 1908년 폴란드 사회민주당에 입당, 펠릭스 제르진스키와 유제프 운쉴리히트의 신임을 얻었다. 모스크바 체카 위원장(1921)과 페트로그라드·레닌그라드 체카-OGPU 수장(1921–1929)을 거쳐 1929년 OGPU 제2부의장 겸 해외부(INO) 부장으로 승진, 미하일 트릴리세르와 아르투르 아르투조프 사이 2년간 소련 대외첩보를 지휘했다. 겐리흐 야고다가 조작한 '봄'(Весна) 사건에 반대했다가 1931년 해임되어 대외무역으로 밀려났고, 1937년 폴란드 간첩 혐의로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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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폴란드 사회민주당(SDKPiL) 입당, 바르샤바 요새 투옥 후 벨기에 유형
  • 1913–1917러시아 제국군 징집, 투르케스탄·카프카스 전선 복무, 연대병사위원회 위원
  • 1917–1918소콜니키 집행위원회 서기, 소콜니키 구역 체카 위원장
  • 1918–1920모스크바 체카 비밀작전부장 → 체카 콜레기야 위원 → 모스크바 체카 부위원장
  • 1921.01–11모스크바 체카 위원장
  • 1921–1929페트로그라드·레닌그라드 체카-GPU-OGPU 수장, 페트로그라드 군관구 GPU 부대 사령관 겸임
  • 1926집무실 피격 암살미수, 적기훈장 수훈
  • 1929–1931OGPU 제2부의장 겸 해외부(INO) 부장
  • 1930–1934전연방 공산당 중앙통제위원회 위원
  • 1931'봄'(Весна) 사건 조작에 반대, OGPU 해임 후 대외무역 인민위원부로 전출
  • 1931–1937전연방 상공회의소 의장, 소·몽·투바 무역회의소 의장
  • 19376월 15일 체포, 9월 2일 총살 — '폴란드 간첩' 혐의

아르투르 카를로비치 스타솁스키

Артур Карлович Сташевски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폴란드 1890–1937 ✕ 처형

스페인 공화국 금을 모스크바로 보낸 소련 무역대표

스타솁스키는 재무장관 네그린에게 모스크바에 '금 당좌계정'을 열자고 제안했고, 그 계정으로 무기와 원자재를 살 수 있다고 설득했다.

SDKPiL 출신의 소련 정보장교이자 무역 관료. 베를린에서 합동 레지덴투라를 지휘한 초기 군사정보의 핵심 인물로, 이후 토르그신 이사장과 대외무역 간부를 거쳐 1936년 공화파 스페인의 무역대표로 파견되었다. 스페인에서는 무기 판매 협상과 「작전 X」의 재정적 측면을 관리했으며, 후안 네그린에게 스페인 은행의 금을 소련에 예치하자고 설득한 인물로 지목된다. 1937년 6월 소환되어 두 달 뒤 처형되었고,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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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1924베를린 합동 레지덴투라(INO·군사정보) 책임자
  • 1925–1926소프토르그플로트 이사
  • 1926–1932푸시노토르그·소유스푸시니나 부이사장
  • 1932–1934토르그신 이사장
  • 1934–1937대외무역인민위원부 글라프푸시니나 국장
  • 1936–1937주스페인 소련 무역대표

스타니슬라프 프란체비치 레덴스

Станислав Францевич Реденс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폴란드 1892–1940 ✕ 처형

스탈린의 처남이자 모스크바주 트로이카 의장

1921년 1월 19일 크림에 도착한 레덴스는 심페로폴·세바스토폴·케르치에 사형 선고권을 가진 독립 시(市)체카를 신설하고 자신의 직속으로 두었다. 이 기관들은 브란겔군 잔여 세력과 '계급적 적'에 대한 대량 숙청을 집행했다.

롬자 지방 출신 폴란드인으로 1918년 체카에 입문해 내전기 크림 체카 의장으로서 브란겔군 패잔병에 대한 대량 보복을 지휘했다. 스탈린의 두 번째 부인 나데즈다의 언니 안나 알릴루예바와 결혼해 스탈린의 처남이 되었다. 1933년부터 모스크바주 NKVD 관리국장을 맡아 수도권 보안을 총괄했고, 대숙청기에는 NKVD 명령 제00447호에 따른 모스크바주 트로이카 의장으로서 대량 사형 판결을 주재했으며 처형은 부토보와 코무나르카에서 집행됐다. 1938년 말 폴란드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1940년 2월 총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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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1921크림 체카 의장
  • 1928–1931자캅카스 주재 OGPU 전권대표
  • 1931–1933우크라이나 주재 OGPU 전권대표
  • 1933–1938모스크바주 NKVD 관리국장
  • 1937–1938모스크바주 트로이카 의장
  • 1938카자흐 내무인민위원
  • 1938–1940체포, 재판과 처형

콘스탄틴 크사베리예비치(출생) / 콘스탄티노비치(개명) 로코솝스키

Константин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Рокоссовски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폴란드 1896–1968 ○ 전립선암

소련과 폴란드의 두 원수, 1945년 승리 퍼레이드를 지휘하다

1939년, NKVD는 그를 감옥 뜰로 끌어내 총성을 울렸다. 빈 총성이었다. 고문으로 이가 아홉 개 부러지고 갈비뼈 세 대가 부러졌으나 허위 자백을 거부했다. 석방 후에는 파울루스에게서 빼앗은 작은 권총을 늘 지녔다.

폴란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크사베리 로코소프스키(1853~1902)는 철도 검사로 일하다 사고로 죽었고, 그는 일찍 고아가 되어 제과점과 치과 조수, 공장 노동자로 일했다. 1914년 8월 5 카르고폴 용기병연대에 자원입대해 게오르기 십자훈장 4급을 받았고, 1917년 10월 붉은 근위대에 들어갔다. 내전에서 기병대를 지휘했고 1919년 당에 입당했다. 1937년 8월 17일 체포되어 레닌그라드 슈팔레르나야의 감옥에 1940년까지 갇혀 고문당했으나 거짓 자백을 거부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모스크바·스탈린그라드·쿠르스크를 지휘하고 바그라티온 작전을 입안했으며, 소련 원수(1944)와 폴란드 원수(1949)를 겸한 유일한 인물이다. 1968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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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75 카르고폴 용기병연대에서 1차대전 참전, 게오르기 십자훈장
  • 1918–1921붉은기병대에서 내전 참전, 35기병연대장, 두 차례 적기훈장
  • 1937–1940대숙청으로 체포·투옥, 1940년 복권·석방
  • 1941–194216군 사령관으로 모스크바 방어, 브랸스크 전선군 사령관
  • 1942–1943돈 전선군 사령관 — 스탈린그라드 포위 및 파울루스 생포
  • 1943–1944중부·벨로루시 전선군 사령관 — 쿠르스크 방어, 바그라티온
  • 1944–19451·2 벨로루시 전선군 사령관 — 동프로이센·포메라니아·베를린
  • 1949–1956폴란드 국방장관 겸 부총리, 폴란드 원수

이그나티 이그나티예비치 소스놉스키

Игнатий Игнатьевич Сосновски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폴란드계 1897–1937 ✕ 처형

폴란드 정보원에서 체카 방첩 간부가 된 체키스트

폴란드 정보장교로 소비에트 러시아에 잠입해 활동하다 체카에 체포된 뒤, 체카·오게페우·엔카베데의 방첩 간부로 일했고 1937년 처형됐다.

리가의 폴란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918년 폴란드군 정보장교이자 폴란드군사조직 단원이었고, 1919~1920년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폴란드 정보 거점을 이끌었다. 1920년 6월 체카에 체포되어 8월 협력에 동의했고, 제르진스키가 레닌과 상의한 뒤 그의 입당을 추천했다. 방첩부 백위파과장, 오게페우 특별부 부부장 등을 지냈고 1935년부터 사라토프 변경주 NKVD 제1부국장이었다. 예조프 취임 직후인 1936년 11월 체포되어 1937년 11월 15일 '특별 절차'로 총살되었고 1958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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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0폴란드군 정보장교와 폴란드군사조직 단원으로 활동했으며, 1919~1920년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폴란드 정보망을 운영했다.
  • 19206월 체카에 체포되었고, 8월 체카 협력에 동의했다.
  • 1920–1927체카·GPU 방첩부에서 근무하고, 1922~1927년 방첩부 백위파과장을 지냈다.
  • 1934–1936오게페우·엔카베데 특별부 부부장을 거쳐, 1935년 1월부터 1936년 11월까지 사라토프 변경주 NKVD국 제1부국장을 지냈다.
  • 1936–19581936년 11월 체포되어 1937년 11월 15일 특별 절차로 사형 선고를 받고 총살되었으며, 1958년 사후 복권되었다.

레온 야코블레비치 가이키스

Леон Яковлевич Гайкис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폴란드 1898–1937 ✕ 처형

스페인 주재 두 번째 소련 대사, 부임 석 달 만에 소환되어 총살당했다

콜론타이는 1927년 멕시코에서 일기에 적었다: 「간부라고는 가이키스와 나뿐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암호를 직접 친다. 소름 끼치도록 고립되어 있다.」

1898년 바르샤바에서 태어난 유대계 폴란드인으로, 청년기에는 폴란드 사회당 좌파와 사회민주당에서 활동하다 1917년 볼셰비키에 합류했다. 치체린의 비서, 멕시코 주재 일등서기관, 이스탄불 총영사를 거쳐 1936년 스페인 공화국 대사관 고문으로 마드리드에 파견됐고, 1937년 2월 로젠베르크의 후임 대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석 달 뒤 모스크바로 소환되어 도착 즉시 체포되었고, 1937년 8월 21일 「조국에 대한 배신」 혐의로 총살된 뒤 1955년 복권되었다. 가이키스의 처형으로 소련은 종전까지 스페인에 대사를 다시 두지 않았고, 공화국 수도에는 사실상 빈 대사관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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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19폴란드 사회당 좌파·사회민주당 활동, 적군 제11군 복무
  • 1920카자흐 군사혁명위원회(Kazrevkom) 간부
  • 1921–1924외무인민위원부 근무, 치체린 인민위원 비서
  • 1924–1928주멕시코 대사관 일등서기관 겸 대리대사
  • 1929–1933프로핀테른(적색노조인터내셔널) 근무
  • 1935–1936주이스탄불 총영사
  • 1936–1937.02주스페인 대사관 고문
  • 1937.02–06주스페인 전권대표(대사)

이그나티 스타니슬라보비치 레이스

Игнатий Станиславович Рейсс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폴란드 (갈리치아 유대계) 1899–1937 ✕ 암살

스탈린에게 결별장을 보내고 NKVD에 살해된 소련의 불법공작원

“오늘 침묵하는 자는 스탈린의 공범이 된다.” — 1937년 7월 17일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에 보낸 결별서

본명 나탄 마르코비치 포레츠키. 오스트리아-헝가리령 갈리치아의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나 1919년 폴란드 공산주의 운동에 합류했고, 이후 ‘루트비히’와 ‘이그나티 레이스’라는 이름으로 서유럽에서 소련 군사정보·국가보안기관의 불법공작망을 운영했다. 1928년 적기훈장을 받았으나 모스크바 재판과 대숙청을 겪으며 스탈린 체제와 결별했다. 1937년 7월 당 중앙위원회에 보낸 공개서한에서 훈장을 반납하고 제4인터내셔널 지지를 선언했다. 같은 해 9월 4일 로잔 근교에서 오랜 지인 게르트루트 실트바흐에게 유인된 뒤, 세르게이 시피겔글라스가 지휘한 NKVD 암살조의 총격으로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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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폴란드 공산주의 노동자당 가입
  • 1921–1937중·서유럽에서 코민테른·소련 군사정보·국가보안기관 불법공작 수행
  • 1928정보 공작 공로로 적기훈장 수훈
  • 1937.07스탈린 체제와 공개 결별, 훈장 반납과 제4인터내셔널 지지 선언
  • 1937.09로잔 근교에서 NKVD 암살조에 피살

발터 게르마노비치 크리비츠키

Вальтер Германович Кривицки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폴란드 (갈리치아 유대계) 1899–1941 ✕ 의문사, 자살 판정

스탈린의 비밀 정보 활동을 서방에 처음 증언한 망명 정보관

1936년 12월, 슬루츠키가 그에게 임박한 모스크바와 베를린의 협정에 대해 알렸다. '이번에는 상황이 심각합니다. 아마도 히틀러와의 협정 체결까지 남은 시간은 서너 달뿐일 것...' 크리비츠키의 회고는 나우모프가 1936~1937년의 물밑 정치를 재구성하는 주요 사료다.

갈리치아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본명이 자무엘 긴즈베르크인 소련 군사정보 요원으로, 1930년대에 헤이그를 거점으로 서유럽 비합법 정보망을 이끌었다. 1936년 12월 해외정보부장 슬루츠키에게서 모스크바와 베를린의 물밑 접촉을 들었고, 1937년 여름 파리에서 시피겔글라스와 투하쳅스키 사건의 본질을 논한 끝에, 동료 이그나츠 라이스가 암살되자 그해 가을 망명했다. 1939년 회고록 '나는 스탈린의 요원이었다'를 펴내고 미 의회에서 증언했으며, 1941년 2월 워싱턴의 호텔에서 총상 사체로 발견되었다. 자살로 판정되었으나 논란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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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1혁명기 붉은군대 정보 활동 시작
  • 1921–1935군사정보국(4국) 요원, 유럽 비합법 활동
  • 1935–1937헤이그 주재 비합법 레지덴트
  • 1937라이스 암살 뒤 파리에서 망명
  • 1939회고록 출간, 미 의회 증언
  • 1941워싱턴에서 사망

스타니스와프 길랴로비치 포프와프스키

Станислав Гилярович Поплавски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연방 폴란드인 1902–1973 ○ 사망

포즈난 봉기를 진압한 폴란드계 소비에트 장군

1956년 6월 28일 오후 2시 포즈난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보안국 청사 앞 상황을 장악하라고 명령했다.

우크라이나 포돌리아의 폴란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열여덟 살까지 글을 몰랐던 그는 붉은군대에 징집된 뒤 소비에트 장군으로 성장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폴란드 제1군을 지휘해 베를린 공방전을 치르고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받았다. 전후에도 폴란드군 최고 지휘부에 남아 소련의 감독 역할을 맡았으며, 1956년 6월 국방차관으로서 포즈난 봉기 진압 작전을 현장에서 지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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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붉은군대 징집, 병사로 복무
  • 1935–1938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 1944–1945폴란드 제1군 사령관, 베를린 공방전
  • 1945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
  • 1949–1956폴란드 국방성 차관
  • 1956포즈난 6월 봉기 진압 지휘
  • 1956–1963소련 국방성 복귀, 육군대장으로 퇴역

콘스탄틴 안토노비치 페트르자크

Константин Антонович Петржак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폴란드 1907–1998 ○ 자연사

우라늄 자발핵분열을 발견하고 소련 원자폭탄의 토대를 놓은 물리학자

중성자원을 제거한 뒤에도 이온화실은 계속 신호를 냈다. 우주선 간섭을 배제하기 위해 모스크바 지하철 디나모 역 50m 지하로 실험을 옮긴 끝에, 페트르자크와 플료로프는 우라늄이 스스로 갈라진다는 것을 증명했다.

소련의 핵물리학자. 1940년 게오르기 플료로프와 함께 우라늄-235의 자발핵분열을 발견하여 소련 원자폭탄 계획의 과학적 토대를 놓았다. 전쟁 중 군복무를 거쳐 1942년 카잔으로 복귀, 쿠르차토프의 지휘 아래 중성자원 측정법(동반입자법)을 개발하고 플루토늄 신속검출 기술을 확립했다. 1947년 흘로핀 라듐연구소에 중성자물리·핵분열 연구실을 설립해 40년 가까이 이끌었으며, 1949년 렌소베트 기술원에 핵물리학과를 창설해 소련 핵산업 인력을 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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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8마로비셰르스키 유리공장 도자기·유리 화공
  • 1931–1936레닌그라드대학교 물리학부, 쿠르차토프 지도하 졸업
  • 1936–1941흘로핀 라듐연구소(RIAN) 대학원생, 쿠르차토프·흘로핀 지도
  • 1940플료로프와 우라늄 자발핵분열 공동 발견 (국가발견등록 제33호)
  • 1941–1942붉은 군대 복무, 중위; 카잔으로 소환되어 원자폭탄 계획 투입
  • 1947–1986RIAN 중성자물리·핵분열 연구실 창설 및 실장
  • 1949–1984렌소베트 기술원 핵물리학과 창설 및 학과장
  • 1948물리수학 박사학위 취득

조제프 야코블레비치 코틴

Жозеф Яковлевич Коти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폴란드 1908–1979 ○ 자연사

KV·IS 중전차를 만든 탱크그라드의 수석 설계자

동료 설계자가 남긴 말: '코틴은 누군가를 낚아채지 않으면 밤에 잠을 못 이룬다.' 그의 전차들에는 키로프, 보로실로프, 스탈린의 이름이 붙었다.

소련 중전차 설계의 거장으로, KV 계열과 IS(이오시프 스탈린) 중전차, SU-152·ISU-152 자주포를 세상에 내놓은 군수 기술자이자 행정가. 1937년 29세에 키로프 공장 수석 설계자가 되어 T-28 개량을 시작으로, 에스파냐 내전의 교훈을 반영해 대전차 방어를 뚫을 중장갑 전차 개발에 착수했다. 독소전쟁 발발 후 부전차공업인민위원으로서 레닌그라드에서 첼랴빈스크까지 공장 대피를 진두지휘해 '탱크그라드'를 건설했고, 전쟁 기간 1만 8천 대의 전차와 자주포를 쏟아냈다. 전후에도 PT-76 수륙양용전차, T-10 중전차, K-700 트랙터를 개발하며 민수 분야까지 설계 영역을 넓혔고, 1968년 방위공업차관으로 군수 행정의 정점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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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1937육군기계화·차량화 아카데미 연구부문 엔지니어, 설계국장
  • 1937–1968키로프 공장 SKB-2 수석 설계자 (레닌그라드/첼랴빈스크)
  • 1941–1943소련 전차공업 부인민위원 겸 수석 설계자
  • 1943–1945제100실험전차공장장 겸 수석 설계자 (첼랴빈스크)
  • 1949–1968VNII-100 전차연구소 소장 겸 수석 설계자
  • 1968–1972소련 방위공업차관

보리스 옙세예비치 체르토크

Борис Евсеевич Черток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폴란드 1912–2011 ○ 자연사

스푸트니크의 두뇌를 설계하고 소련 우주사를 기록한 코롤료프의 대리인

1945년 5월 2일, 붉은군대 소령 보리스 체르토크는 베를린 함락 직후 독일의회 의사당 벽에 자기 이름을 써넣었다. 평생 그 순간을 '가장 행복한 성취'라 불렀다. 석 달 뒤 그는 독일의 V-2 로켓 잔해 속에서 소련 우주 프로그램의 첫 페이지를 열고 있었다.

코롤료프의 최측근 대리인으로, 대륙간탄도미사일 R-7부터 스푸트니크·보스토크·소유스·미르까지 소련 우주 로켓의 유도제어 시스템을 50년간 설계했다. 사회주의노동영웅(1961)이자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으로, 은퇴 후 회고록 『로켓과 사람들』 4권을 펴내 소련 우주 프로그램의 속내를 생생히 기록했으며 99세까지 집필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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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38제22항공공장 전기기사, 항공기 특수장비·무장 설계
  • 1940–1945볼호비티노프 설계국(OKB)에서 군용기 전기·무선 장비 담당
  • 1945–1947독일 파견: V-2 유도제어 연구, 라베 연구소·노르트하우젠 연구소 근무
  • 1946–1956NII-88 제어시스템 부서장 → 부수석 엔지니어, 코롤료프와 협업 시작
  • 1956–1974OKB-1 부수석 설계자: R-7, 스푸트니크, 보스토크, 소유스 제어계 설계
  • 1974–1992NPO 에네르기야 부총설계자: 미르 정거장, 에네르기야 로켓 제어계
  • 1994–19994권의 회고록 『로켓과 사람들』 출간, NASA 영역본 발행
  • 2000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академик) 선출

블라디미르 니콜라예비치 첼로메이

Владимир Николаевич Челоме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폴란드 1914–1984 ○ 자연사

흐루쇼프의 후원으로 코롤료프를 넘었으나, 후원자가 몰락하자 밀려난 미사일 설계자

1958년 3월 8일, 첼로메이는 흐루쇼프의 아들 세르게이를 OKB-52의 엔지니어로 채용했다. 이 한 건의 인사로 그는 소련 최고 권력자의 눈과 귀를 직접 확보했고, 이후 6년간 코롤료프조차 넘볼 수 없는 정치적 후원 아래 소련 우주 계획의 정점으로 치솟았다.

소련의 대표적 로켓·우주기술 설계자로, OKB-52(후일 NPO 마시노스트로예니야)를 이끌며 프로톤 발사체, UR-100 대륙간탄도미사일, 알마즈 군사우주정거장, TKS 우주선을 만들었다. 1961년 코롤료프를 대신해 수석설계자회의 의장이 되었으나, 흐루쇼프의 아들 세르게이가 첼로메이 밑에서 일했던 인연 덕에 정치적 후원이 단단했다. 흐루쇼프 실각 후 우스티노프에게 밀려났고, 1981년에는 그의 우주 사업이 전면 중단되었다. 프로톤 로켓은 지금도 운용 중이며, UR-100은 소련 역사상 가장 많이 배치된 ICB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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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키예프 항공대학 졸업, 진동 이론 논문으로 주목
  • 1941중앙항공발동기연구소(CIAM) 입소, VKP(b) 입당
  • 1944–1953OKB-51 소장 겸 수석설계자: V-1 기반 순항미사일 10Х 개발
  • 1955OKB-52(현 NPO 마시노스트로예니야) 수석설계자
  • 1961–1964수석설계자회의 의장으로 코롤료프 계승
  • 1965프로톤 발사체 첫 비행, UR-100 ICBM 배치 시작
  • 1970년대알마즈 군사우주정거장 · TKS 수송선 개발
  • 1981–1984우주 사업 중단 명령; 모교에서 강의하며 조용히 말년을 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