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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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뱅 마레샬

Sylvain Maréchal

평등파 선언을 쓴 프랑스의 저술가

혁명기 급진 저술가로, 1796년 「평등파 선언」에서 법문의 평등을 넘어 실제 평등과 재산의 공동 향유를 요구했다.

프랑스의 저술가로, 법률가·사서로도 일했다. 1796년 「평등파 선언」에서 법문에 적힌 평등을 넘어 실제 생활에서의 평등과 재산의 공동 향유를 요구했다. 바뵈프의 운동과 관련된 글이지만 저자는 마레샬이다. 선언의 모든 표현이 운동 지도부의 합의나 실현된 정책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 글을 통해 혁명기의 평등 요구와 후대 사회주의 사이의 연결, 그 사이에 놓인 차이를 함께 살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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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70마자랭 도서관 부사서로 임용되어 고전학 소양을 쌓았다.
  • 1788「정직한 사람들의 연감」이 파리 고등법원의 판결로 불태워지고 3개월 수감되었으며, 이후 저작을 익명으로 발표했다.
  • 1790–1792「파리 혁명」지의 주필로서 성직자와 교회를 비판하는 반교권 운동을 이끌었고 전쟁 반대 논설을 실었다.
  • 1793–1796바뵈프를 만나 1796년 「평등파 선언」을 작성했으며, 평등파 음모의 비밀 구제위원회 위원이었다.
  • 1801여성에게 글자를 가르치는 것을 금하는 법률안을 제안했고, 유고 「덕에 대하여」는 1807년 간행되었다.

앙투안프랑수아 모모로

Antoine-François Momoro

「자유, 평등, 박애」 표어를 퍼뜨린 코르들리에 클럽의 인쇄업자

파리 도 지도부 위원으로서 파슈 시장과 함께 「자유, 평등, 박애 아니면 죽음」을 담은 표어를 공공건물 정면에 새기게 했다.

브장송 출신의 인쇄·출판업자로, 1787년 파리 인쇄업 조합의 장인이 되었고 혁명이 시작되자 「국민 자유의 첫 인쇄업자」를 자처했다. 코르들리에 클럽의 서기이자 주요 연설가로 클럽의 결의와 벽보를 찍어 퍼뜨렸고, 바렌 도주 뒤 왕의 폐위를 주장했다. 파리 도 지도부 위원 시절 파슈 시장과 함께 「자유, 평등, 박애」를 담은 표어를 공공건물에 새기게 했다. 1793년 방데에서 롱생을 보좌했고 11월 이성 축제를 이끄는 등 탈기독교화에 앞장섰다. 강좌에서는 1794년 3월 에베르파와 함께 체포되어 3월 24일 처형된 인물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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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87파리 인쇄업 조합의 장인으로 받아들여졌다.
  • 1791코르들리에 클럽 서기로 선출되어 결의와 벽보를 작성·배포했고, 바렌 도주 뒤 왕의 폐위를 주장했다.
  • 1793파리 도 지도부 위원으로 파슈 시장과 함께 「자유, 평등, 박애」를 담은 표어를 공공건물에 새기게 했다.
  • 17935월 방데에서 롱생을 보좌했고 11월 10일 이성 축제를 이끌었다.
  • 17943월 에베르파와 함께 체포되어 3월 24일 처형되었다.

피에르조제프 캉봉

Pierre-Joseph Cambon
프랑스 왕정 국가기관 프랑스 프랑스 1756–1820 → 망명지 브뤼셀 근교에서 사망

국민공회 재정위원회를 이끈 재정 전문가

1794년 7월 26일(테르미도르 8일) 로베스피에르가 연설에서 그를 재정의 적으로 지목하자, 곧바로 연단에 올라 국민공회의 의지를 마비시킨 것은 로베스피에르라고 반박했다.

몽펠리에의 면직물 상인 집안 출신으로, 1791년 바렌 도주 뒤 공화국 선포를 청원했다. 입법의회와 국민공회에서 재정위원회를 이끌며 국고를 감독했고, 1793년 8월 공채 대장부 창설안을 내 국가 부채를 하나로 정리했다. 성직자 급여 폐지를 주장해 이신론자 로베스피에르의 반감을 샀다. 테르미도르 8일 로베스피에르가 그를 지목하자 즉시 반박했고, 이 대결은 이튿날 로베스피에르 몰락의 계기 중 하나로 꼽힌다. 그러나 테르미도르 반동기에도 몸을 숨겨야 했고, 1816년 국왕 시해자 추방으로 망명해 브뤼셀 근교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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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91바렌 도주 뒤 국민의회에 공화국 선포를 청원했고, 입법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 1792국민공회 의원으로 재선되었고 10월 재정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 17938월 24일 공채 대장부 창설안을 제출했다.
  • 17947월 26일 테르미도르 8일 연설에서 자신을 지목한 로베스피에르를 연단에서 반박했다.
  • 1816–1820국왕 시해자 추방법으로 벨기에로 망명했고, 1820년 브뤼셀 근교에서 사망했다.

그라쿠스 바뵈프

Gracchus Babeuf

실질적 평등을 요구한 평등파 운동가

혁명이 약속한 법적 평등이 빈곤과 재산 격차 앞에서 무력하다고 본 언론인으로, 1796년 총재정부에 맞선 평등파 음모를 이끌었으나 적발되어 이듬해 처형됐다.

본명은 프랑수아노엘 바뵈프다. 프랑스 혁명기의 언론인이자 평등파 운동가로, 법 앞의 평등을 넘어 재산과 생활 조건의 불평등을 문제 삼았다. 1796년 총재정부에 맞선 평등파의 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이듬해 처형됐다. 「평등파 선언」의 집필자는 실뱅 마레샬이며, 그 글을 바뵈프 자신의 저작이나 이미 시행된 정책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평등파의 구상과 후대 마르크스주의 사이에는 수용과 변화의 역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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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89로이 선거인단의 결의서 첫 조항을 작성해 봉건적 권리 폐지를 요구했다.
  • 1794《민중의 호민관》을 발행하며 테르미도르파를 옹호하고 혁명의 경제적 결과를 공격했다.
  • 1796평등파 음모에 참여했으나 5월 10일 체포됐다. 음모는 5월에 적발됐다.
  • 1797방돔 고등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유죄 판결을 받아 동료들과 함께 처형됐다.

장 프랑수아 바를레

Jean-François Varlet

구역 총회와 직접민주주의를 내세운 앙라제 활동가

생필품 폭동과 구역 총회 정치로 지롱드파 축출에 참여한 인물. 1792년에는 국민공회 의원이었다.

우편국 직원 출신의 파리 구역 활동가로 앙라제와 함께 생필품 문제와 직접민주주의를 주장했다. 1793년 5월 31일~6월 2일 지롱드파 축출 봉기에 참여했다. 이후 혁명정부가 민중의 주권을 억누른다고 비판해 여러 차례 체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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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89–1792혁명 초기 애국가요를 쓰고 국왕의 도피와 국왕 폐위를 요구하는 청원 운동에 나섰으며, 파리 구역의 민중 동원에 참여했다.
  • 1792입법의회가 국왕을 정지시키고 새 헌법 제정을 위해 국민공회 선거를 소집한 뒤 의원으로 선출되어, 직접 보통선거와 선출직 소환을 주장했다.
  • 17932월 22일 파리 빈민의 생필품 가격 상한 요구에 가담했고, 5월 24일 체포되었다가 사흘 만에 석방되었다. 5월 29일 구역 대표자들이 세운 9인 봉기위원회에 참여해 5월 31일~6월 2일 봉기를 이끌었다.
  • 1793–1795공포정치 초기에 다시 체포되어 1793년 10월 29일 석방되었고, 테르미도르 반동 뒤 재차 체포되어 약 1년을 수감 생활로 보냈다.
  • 1800 이후석방 후 욘주 파이이에 정착해 결혼하고 자녀를 두었으며, 1800년 이후 보나파르트를 지지하고 낭트에서 한동안 살았다.
  • 1830–18371830년 7월 혁명에 참여하기 위해 몇 달 동안 파리에 머물렀고, 1836년 낭트를 떠나 코르베유에송으로 이주해 이듬해 그곳에서 익사했다.

프랑수아니콜라 뱅상

François-Nicolas Vincent

전쟁부 사무총장을 지낸 코르들리에 클럽의 에베르파

전쟁부 사무총장으로 부처 사무국을 급진 애국파로 채웠고, 1794년 3월 에베르파와 함께 체포되어 3월 24일 처형되었다.

파리 감옥 수위의 아들로, 소송대리인 사무소의 서기로 일했다. 코르들리에 클럽 초기 회원으로 서기를 맡았고, 1792년 8월 10일 봉기 뒤 파리 코뮌 총평의회에 들어갔다. 1793년 4월 부쇼트 전쟁장관 아래 전쟁부 사무총장이 되어 부처 사무국을 급진 애국파로 채웠다. 1793년 12월 체포되었다가 이듬해 2월 풀려난 뒤 관용파와 혁명정부에 맞선 에베르파의 투쟁에 나섰다. 강좌에서는 1794년 3월 에베르·롱생·모모로 등과 함께 체포되어 3월 24일 처형된 인물로 등장한다. 반역 음모 혐의를 뒷받침할 물증은 제시되지 않았다고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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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928월 10일 봉기 뒤 파리 코뮌 총평의회에 들어가 파브르 데글랑틴의 자리를 이었다.
  • 17934월 부쇼트 장관 아래 전쟁부 사무총장이 되었다.
  • 1793–179412월 17일 일반안전위원회의 명령으로 체포되었다가 이듬해 2월 2일 풀려났다.
  • 17943월 14일 에베르와 함께 다시 체포되어 3월 24일 처형되었다.

샤를로트 코르데

Charlotte Corday
반혁명 세력 프랑스 프랑스 1768–1793 ✕ 혁명재판소 판결 후 처형

지롱드파를 지지한 귀족 출신으로 마라를 암살한 인물

1793년 7월 13일 ‘지롱드파 반란 음모를 안다’고 속여 마라의 면담을 얻어, 약용 목욕 중이던 그를 부엌칼로 찔러 죽였다.

프랑스 혁명기 인물로 지롱드파를 지지했다. 1793년 7월 13일 자코뱅 지도자 장폴 마라를 암살했다. 그녀는 마라를 1792년 9월 학살의 책임자로 보았고 급진화한 자코뱅파 때문에 혁명이 위기에 처했다고 판단했다. 현장에서 체포되어 혁명재판소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7월 17일 단두대에서 처형됐다.

에티엔 카베

Étienne Cabet
초기 사회주의 프랑스 프랑스 1788–1856 ○ 뇌졸중

'공산주의'라는 말을 만든 이카리아 운동의 창시자

1848년 2월 3일, 카베의 추종자 69명이 르아브르 항구에서 배에 올랐다. '이카리아로 가자!' 그들은 신대륙에 지상의 공산낙원을 세우러 떠났다.

프랑스의 유토피아 사회주의자이자 이카리아 운동의 창시자. 1840년 『이카리아 여행』을 출판하여 노동자 협동조합에 기반한 공산사회의 청사진을 제시했고, '공산주의(communisme)'라는 말을 처음 정치적 용어로 정립했다. 약 40만 추종자를 거느린 당대 가장 대중적인 사회주의 옹호자로, 『진정한 기독교』에서 예수의 가르침을 사회 평등의 복음으로 재해석했다. 1848년 미국으로 건너가 텍사스와 일리노이에 이카리아 공동체를 세웠고, 1898년까지 이어진 미국 최장수 비종교 공동체 실험이 되었다. 계몽주의 유토피아 사상과 노동자 운동을 잇는 교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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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88디종 출생. 변호사 자격 취득
  • 1830–18317월혁명 참여 후 바스티아 검찰총장. 코트도르 하원의원 당선
  • 1833–1834『르 포퓰레르』 창간. 반정부 논설로 반역죄 유죄 판결, 영국 망명
  • 1834–1839영국에서 로버트 오웬과 교류하며 공산주의 사상 구상
  • 1840『이카리아 여행』 출판. 스스로 '공산주의자'라고 부른 최초의 인물
  • 1841–1847『르 포퓰레르』 복간. 약 40만 명 독자층 확보, 『진정한 기독교』 출간
  • 1848추종자들과 미국으로 이주. 텍사스·일리노이에 이카리아 공동체 설립
  • 1849–1856노부 이카리아 공동체 지도자. 내부 갈등 속 1856년 세인트루이스에서 사망
혁명적 사회주의 프랑스 프랑스 1805–1881 ○ 뇌졸중

37년을 감옥에서 보낸 봉기의 전략가, '블랑키즘'으로 레닌주의에 길을 열다

"나는 3천만 프랑스인, 나와 같은 프롤레타리아들에게 그들이 살 권리가 있다고 말한 죄로 고발되었습니다." — 1832년 '15인 재판' 최후진술

프랑스 혁명적 사회주의자. 소수 전위의 무장봉기와 혁명적 독재를 주장하는 블랑키즘을 체계화해 마르크스주의와 볼셰비키 전위당론에 영향을 미쳤다. 37년을 감옥에서 보내 '유폐된 자'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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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24카르보나리 가입 — 군주제 전복을 위한 비밀결사
  • 1827샤를 10세 반대 시위 참여 — 세 차례 부상, 목에 총상
  • 18307월 혁명 참전 — 루이 필리프 입헌군주제에 환멸, 공화주의로 전환
  • 1832'민중의 벗(Amis du peuple)' 결성, 체포 — 재판에서 직업을 '프롤레타리아'라 밝힘
  • 1837바르베스·베르나르와 함께 비밀결사 '계절의 모임(Société des Saisons)' 창설
  • 1839.05파리 봉기 주도 — 실패, 사형 선고 후 종신형으로 감형
  • 18482월 혁명으로 석방, '공화주의 중앙협회' 설립 — 적기 채택과 선거 연기 요구
  • 1849–18595월 봉기 실패로 10년형 — 여러 교도소에서 복역
  • 1865–1870브뤼셀 망명 — 『무장봉기 지침』 등 주요 저술 집필
  • 1870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중 라빌레트 봉기 지도, 신문 '조국의 위기' 창설
  • 1871.03.17파리 코뮌 직전 체포 — 부재중 코뮌 위원 선출, 베르사유는 대주교와의 맞교환 거부
  • 1872클레르보 감옥에서 『별을 통한 영원』 집필
  • 1879보르도에서 하원의원 당선(무효화), 사면 석방
  • 1880신문 'Ni Dieu ni maître' 창간, 프랑스 전역 순회 연설

나탈리 르멜

Nathalie Le Mel

프랑스 제본공이자 파리 코뮌의 여성 연합 활동가

브르타뉴 브레스트 출신인 르멜은 파리에서 제본공으로 일하며 노동운동에 참여했다. 1865년 제본공 노동자들의 남녀 동일임금 쟁취에 기여했고, 국제노동자협회에 가입해 외젠 바를랭과 협동조합 식당 라 마르미트를 운영했다. 1871년 파리 코뮌 때 여성 연합의 지도적 활동가로 바리케이드에서 싸웠다. 체포된 뒤 루이즈 미셸과 함께 누벨칼레도니로 유형되었으며 1880년 사면으로 파리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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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5제본공들의 남녀 동일임금 쟁취에 기여하고 국제노동자협회에 가입했다.
  • 1860년대–1871외젠 바를랭과 협동조합 식당 라 마르미트를 운영했다.
  • 1871파리 코뮌의 여성 연합에서 활동하고 바리케이드에서 싸웠다.
  • 1871–1880체포·뉴칼레도니아 유형 뒤 1880년 사면으로 파리로 돌아왔다.

루이즈 미셸

Louise Michel
아나키스트 프랑스 프랑스 1830–1905 ○ 폐렴

코뮌의 바리케이드에서 싸우고 뉴칼레도니아로 유형된 뒤 아나키즘의 상징이 된 「붉은 처녀」

파리 코뮌에서 몽마르트르 여성감시위원회를 이끌고 바리케이드에서 싸운 루이즈 미셸은 패배 뒤 뉴칼레도니아로 유형되었으며, 귀환 후 노동자 집회와 아나키스트 운동에 헌신했다.

오트마른의 성에서 하녀의 딸로 태어나 교사가 되었고, 1850년대 파리 몽마르트르에서 학교를 열며 공화파·사회주의 클럽에 드나들었다. 1871년 3월 18일 몽마르트르에서 대포를 지키러 나섰고, 코뮌 기간 감시위원회와 구급 활동, 방위군 대대에서 활동했다. 피의 주간 뒤 어머니 대신 자수해 법정에서 사형을 요구했으나 뉴칼레도니아 유형을 선고받았다. 그곳에서 카나크인의 1878년 봉기를 지지했다. 1880년 사면으로 돌아와 아나키스트로서 연설과 투옥을 거듭했고 1905년 마르세유에서 강연 여행 중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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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50년대–1860년대마을에서 교사로 일한 뒤 1856년 파리로 옮겼다. 1865년 파리에 학교를 열고 시를 발표했으며, 블랑키주의 혁명가들과 교류하고 여성의 시민권과 여학생 교육을 위한 활동에 참여했다.
  • 1871파리 코뮌에서 몽마르트르 여성감시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제61 몽마르트르 대대에서 싸우며 구급소를 조직했다. 피의 주간에 어머니를 지키려 프랑스군에 자수했다.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요구했지만 태평양의 프랑스 유형지 뉴칼레도니아로 이송형을 선고받았다.
  • 1873–1880뉴칼레도니아로 유형되어 카나크인과 교류하고 프랑스어를 가르쳤으며 1878년 카나크 봉기를 지지했다. 1880년 코뮌 참여자 사면으로 프랑스로 돌아왔다.
  • 1880–1905프랑스로 돌아온 뒤 노동자 집회와 시위에서 연설했고, 아나키스트로서 여러 차례 투옥되면서도 프랑스와 유럽에서 활동했다. 1883년 실업 노동자 시위를 이끌었고, 세바스티앵 포르와 함께 1895년 아나키스트 잡지 《르 리베르테르》를 창간했다. 1905년 마르세유에서 사망했다.

외젠 바를랭

Eugène Varlin
아나키스트 프랑스 프랑스 1839–1871 ✕ 총살

인터내셔널 파리 지부를 이끌고 코뮌의 재정을 맡았다가 피의 주간 마지막 날 총살된 제본공

제본공 노동조합을 국제노동자협회와 파리 노동자협회 연맹으로 연결하고, 파리 코뮌의 재정과 노동 관계를 맡아 조직했다. 1871년 5월 28일 베르사유군에 붙잡혀 몽마르트르에서 다른 포로들과 총살되었다.

농가 출신으로 파리에서 제본공이 되어 1864년 제본공 파업을 이끌었고, 상호부조 조합과 협동 식당 「라 마르미트」를 세웠다. 국제노동자협회 파리 지부의 중심인물로 1868년 두 차례 재판을 받았고, 노동조합 연합회를 조직했다. 1871년 국민방위군 중앙위원회에 들어갔고 코뮌 의원으로 재정과 식량 공급을 맡았다. 코뮌 공안위원회 설치에 반대한 소수파에 속했다. 5월 28일 붙잡혀 몽마르트르로 끌려가 군중에게 구타당한 뒤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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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57제본공 상호부조회를 세우는 데 참여했다.
  • 1864파리 제본공들의 첫 파업을 주도적으로 조직했다.
  • 1869파리 노동자협회 연맹 창립을 도왔다.
  • 1871파리 코뮌 의원으로 선출되어 재정 담당관과 노동 관계 책임을 맡았다.

마르셀 카섕

Marcel Cachin
프랑스 공산당 공산주의 프랑스 프랑스 1869–1958 ○ 자연사

투르 대회에서 SFIO 다수를 코민테른으로 이끌어 프랑스 공산당을 세운 『뤼마니테』 지도자

1920년 투르 대회에서 SFIO의 코민테른 가입을 지지해 다수파의 분열을 이끌고 프랑스 공산당 창립에 참여했다. 1923년 루르 점령 반대로 체포됐으나 상원 고등법원은 불기소 결정을 내렸다.

브르타뉴 팽폴 출신으로 1891년 게드의 프랑스 노동자당에 들어갔고, 1905년 통합 사회당(SFIO)에 참여했다. 1918년부터 평생 『뤼마니테』를 이끌었다. 전쟁 뒤 지지자들이 10월 혁명 쪽으로 기울자, 1920년 투르 대회에서 코민테른 가입을 이끌어 프랑스 공산당의 창립자가 되었다. 1923년 프랑스의 루르 점령을 비난했다가 투옥되었다. 하원 의원과 상원 의원을 지내며 공산당의 원로로 남았고, 1958년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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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2쥘 게드와 폴 라파르그가 세운 프랑스 노동자당의 지롱드 지부에 가입했다.
  • 1905통합 사회당(SFIO) 창당 대회에 참여하고 당 선전 담당자로 활동했다.
  • 1918『뤼마니테』의 책임자로 선출되어 1958년 사망할 때까지 신문을 이끌었다.
  • 1920투르 대회에서 SFIO의 코민테른 가입을 지지하고 분열 뒤 프랑스 공산당의 전신인 프랑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지부(SFIC) 창립에 참여했다.
  • 1923프랑스의 루르 점령에 반대한 뒤 체포되어 상원 고등법원에 회부됐으나, 법원은 불기소 결정을 내렸다.
  • 1936센주 상원의원에 당선되어 프랑스 공산당 계열 첫 상원의원이 됐다.

페르낭 로리오

Fernand Loriot
코민테른 공산주의 프랑스 프랑스 1870–1932

프랑스 사회주의자이자 교원 노동조합 활동가로, 제3인터내셔널 위원회를 이끌었다

전쟁에 반대하며 국제주의 사회주의자들을 조직했고, 프랑스 공산당 창당 과정에서 제3인터내셔널 위원회 서기로 활동했다.

교사로 일하며 1901년 사회당에 가입했고, 교원 노동조합 활동에 참여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전쟁 협력에 반대하고 짐머발트의 입장을 지지했으며, 국제관계 재개 위원회와 제3인터내셔널 위원회의 서기를 맡았다. 1920년 투르 대회에서 창당된 프랑스 공산당의 초기 지도부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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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사회당에 가입
  • 1917국제관계 재개 위원회 서기로 선출
  • 1919제3인터내셔널 위원회 서기
  • 1920투르 대회에서 신설된 공산당 집행위원회 위원 및 국제 서기로 선출
  • 1925공산당 내 볼셰비키화 반대파에서 활동
  • 1926당을 떠나 혁명적 생디칼리즘 운동에 합류

생디칼리슴에서 코민테른·제4인터내셔널까지: 혁명의 한 세기를 관통한 프랑스 국제주의자

레닌은 로스메르를 이렇게 평했다: "그는 다섯 가지나 여섯 가지 언어로 침묵을 지키는 법을 아는 사람이다." — 필리프 로브리외, 『프랑스 공산당 내부사』에서 인용

미국 태생의 프랑스 혁명적 생디칼리스트이자 코민테른 지도부 핵심 인물. 피에르 모나트와 함께 《라 비 우브리에르》를 발행하며 반전 국제주의 운동을 조직했고, 모스크바에서 17개월간 체류하며 적색노동조합인터내셔널(프로핀테른) 창립을 주도했다. 프랑스 공산당 정치국원으로 활약하다 1924년 트로츠키 옹호로 제명된 후 좌익반대파와 트로츠키주의 운동에 투신했으며, 1938년 자신의 페리니 자택에서 제4인터내셔널 창립대회를 개최했다. 만년에는 알제리 전쟁 반대 선언에 서명했고 회고록 『레닌의 모스크바』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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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9–1914CGT 기관지 《라 비 우브리에르》 편집 — 피에르 모나트와 함께 혁명적 생디칼리슴 운동 주도
  • 1915–1918반전 국제주의자로 치머발트 회의 프랑스 참가 조직 — 전쟁 내내 반전 활동 지속
  • 1919–1920제3인터내셔널 가맹위원회 활동 — 모스크바 파견, 17개월 체류하며 코민테른 집행위원 선출
  • 1921적색노동조합인터내셔널(프로핀테른) 창립대회 주도 — 로조프스키·톰 만과 함께 임시평의회 간부
  • 1922–1924프랑스 공산당(PCF) 정치국원 겸 《뤼마니테》 사무총장 — 당내 좌파 지도부 핵심
  • 1924.10트로츠키 반대 운동에 반발하여 수바린·모나트와 함께 PCF에서 제명
  • 1929–1931프랑스 최초 트로츠키주의 조직 공산주의자동맹 결성 참여 — 전술적 차이로 1931년 탈퇴
  • 1938.09페리니 자택에서 제4인터내셔널 창립대회 개최 — GPU의 암살 위협 속 비밀 진행
  • 1939멕시코 방문 — 트로츠키와의 우정 회복, 듀이위원회 참여, 트로츠키 손자 시에바의 후견인
  • 1940–1947제2차 세계대전으로 미국 체류 — 1947년 프랑스 귀환
  • 1953회고록 『레닌의 모스크바』 출간 — 알베르 카뮈 서문
  • 1960알제리 전쟁 반대 '121인 선언' 서명

레옹 주오

Léon Jouhaux

31년간 CGT를 이끌고 마티뇽 협정에 서명한 생디칼리스트, 노벨 평화상 수상자

「노동운동의 역사에서 이보다 큰 승리는 없었다」, 마티뇽 협정 타결 직후 라디오 연설에서, 1936년 6월

성냥 공장 노동자 출신으로 1909년 서른 살에 노동총동맹(CGT) 사무총장이 되어 1940년까지 이끈 프랑스 노동운동의 얼굴. 혁명적 생디칼리슴에서 출발했으나 1914년 신성동맹을 받아들이며 개혁주의로 옮겨 갔고, 베르사유 조약의 노동 조항 기초와 국제노동기구(ILO) 창설에 참여했다. 1936년 재통합된 CGT를 이끌고 마티뇽 협정에 서명했으며, 비시 정권 아래 억류되어 독일로 이송되었다가 살아 돌아와 1948년 공산당 주도의 CGT에서 갈라져 나온 「노동자의 힘」(FO)의 창립 의장이 되었고 1951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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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5–1906오베르빌리에 성냥 공장 노동자, 아버지를 실명시킨 백린에 맞선 파업으로 해고
  • 1909–1940노동총동맹(CGT) 사무총장
  • 1914.08반전 총파업 노선을 접고 「신성동맹」 수용, 조레스 장례식에서 연설
  • 1919–1921베르사유 조약 노동 조항 기초, ILO 창설 참여; CGT 분열로 혁명파가 CGTU로 이탈
  • 1936.03–06재통합 CGT를 이끌고 마티뇽 협정 서명, 조합원 100만에서 400만으로
  • 1940–1945비시 정권의 CGT 해산 뒤 가택연금, 1943년 독일 이송·억류
  • 1947–1948공산당 주도 CGT와 재분열, 「노동자의 힘」(FO) 창립 의장
  • 1947–1954프랑스 경제이사회 의장, 1951년 노벨 평화상 수상
  • 1954.04파리에서 사망

베르티 알브레히트

Berty Albrecht
프랑스 프랑스인 1893–1943 ✕ 옥중 자살

여성해방과 반파시즘을 지하 저항으로 잇다

“삶은 값비싸지 않으며, 죽음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명예와 이상에 맞게 사는 것이다.”

베르티 알브레히트는 여성해방과 반파시즘을 결합한 프랑스의 활동가로, 피임과 낙태의 권리를 주장하며 여성주의 잡지를 만들었다. 나치즘의 위험을 일찍 경고하고 독일인 망명자를 도운 일은 앙리 프르네와의 협력, 그리고 지하 저항운동 콩바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그녀는 Les Petites Ailes와 Vérités의 제작을 맡고 콩바의 사회사업을 조직하며 체포와 투옥, 탈출 뒤에도 활동을 계속했다. 1943년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고문받은 뒤 프레즈네 감옥에서 숨졌고, 사후 해방의 동료로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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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간호사 자격 취득
  • 1918–1931네덜란드와 런던에서 생활, 여성주의와 가족계획 운동 접촉
  • 1933–1935여성주의 잡지 《성 문제》 창간·편집
  • 1933–1940독일 망명자 지원, 반파시즘 활동, 앙리 프르네와 협력
  • 1940–1941지하 간행물 《Les Petites Ailes》·《Vérités》 제작
  • 1941–1943콩바 지도부 협력자·사회사업 책임자
  • 1943체포·고문 뒤 프레즈네 감옥에서 사망

샤를 티용

Charles Tillon
프랑스 의용유격대 공산주의 프랑스 프랑스계 1897–1993 ○ 자연사

노동운동에서 무장 레지스탕스로 나아간 공산주의자

“수와 단결이 우리 힘이 될 것이다.”

금속노동자와 노동조합 활동가로 출발한 샤를 티용은 1919년 해군 mutiny에 참여한 뒤 프랑스 공산당과 CGTU의 지도자로 성장했다. 그는 1940년 독일 점령에 맞선 민족해방과 노동계급의 단결을 호소했고, 1941년부터 공산주의 무장조직을 통합해 프랑스 유격대·의용군(FTP)을 이끌었다. 해방 뒤에는 장관과 의원으로 국가 재건에 참여했지만, 당 지도부와의 갈등으로 1952년 권력에서 밀려났고 1970년 공산당에서 제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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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921프랑스 해군 기관병, 1919년 군함 게생의 반란 주도, 군사형무소 수감
  • 1921–1931프랑스 공산당 가입, CGTU 일드빌렌 지역·낭트 노동조합 지도자
  • 1931–1936CGTU 전국 지도부,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 및 정치국 후보위원
  • 1936–1940하원의원, 스페인 공화파 피난 지원 활동
  • 1940–1944공산당 비밀 지도부, 국민군사위원회와 FTP 창설·최고사령관
  • 1944–1947공군·군수·재건부 장관, 오베르빌리에 시장 및 의원
  • 1952–1970공산당 지도부에서 축출, 1957년 복권, 1970년 제명

장 피에르 물랭

Jean Moulin
프랑스 프랑스인 1899–1943 ✕ 고문 후 사망

분열된 레지스탕스를 묶은 공화주의자

그는 독일군의 허위 서명 강요에 맞서 명예를 훼손하느니 자결을 택하려 했다.

장 물랭은 프랑스의 고위 관료이자 공화주의자로, 나치 점령에 맞선 국내 레지스탕스를 자유 프랑스와 연결한 조직가였다. 그는 샤를 드골의 위임을 받아 경쟁하던 저항운동들을 조정하고, 정치세력과 노동조합까지 포괄하는 국민저항위원회를 세웠다. 그의 통합 작업은 독립성을 지키려는 여러 세력의 긴장 속에서 진행되었으며, 1943년 체포와 고문으로 중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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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2사부아 현 지사 비서실장
  • 1925–1930알베르빌 군 부지사
  • 1936인민전선 항공부 장관 비서실장
  • 1937–1939아베롱 현 지사
  • 1939–1940외르에루아르 현 지사
  • 1941–1943드골의 국내 레지스탕스 대표
  • 1943국가레지스탕스평의회 초대 의장

앙리 프르네

Henri Frenay
프랑스 프랑스인 1905–1988 ○ 자연사

비시 지지에서 저항운동으로 이동한 레지스탕스 조직가

“나는 페탱 원수와 이중 역할, 인간적이고 사회적인 국민혁명을 믿었다.”

앙리 프르네는 프랑스 육군 장교 출신으로, 1940년 패전 뒤 군사적 규율과 애국주의를 지하 저항의 조직 원리로 바꾼 인물이다. 그는 처음에는 페탱과 국민혁명이 프랑스를 구할 수 있다는 기대를 품었지만, 비시의 협력과 억압을 겪으며 입장을 바꾸었다. 베르티 알브레히트와 함께 국민해방운동을 세우고 지하 신문을 확장해 콩바를 주요 저항운동으로 발전시켰으며, 전후에는 포로·강제이송자·난민의 귀환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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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1926생시르 특별군사학교 생도
  • 1935–1938고등전쟁학교 수학, 독일 연구
  • 1939–1940마지노선 제43요새군단 참모장교
  • 1940포로수용소 탈출, 국민해방운동 조직 시작
  • 1941–1943콩바 창립자·지도자, 지하 언론 조직
  • 1943–1945포로·강제이송자·난민 담당 국무위원·장관
  • 1948–1954유럽연방주의자연합 의장
  • 1976회고록 《밤은 끝나리》 출간

에메 세제르

Aimé Césaire
프랑스 공산당 공산주의 프랑스 마르티니크 1913–2008 ○ 자연사

네그리튀드 공동 창시자, 식민주의 비판의 선구

「내 차례다. 하나의 등식을 제시하겠다: 식민주의 = 사물화」 『식민주의 담론』(1950)에서 유럽이 나치즘으로 규정한 방법을 이미 식민지 민족에게 써 왔으며 나치즘은 식민주의를 정당화한 문명의 자연적 귀결이라고 논했다.

마르티니크 바스푸앵트에서 세무원의 아들로 태어나 파리에서 상고르·다마스와 함께 네그리튀드 운동을 열었다. 잡지 L'Étudiant noir는 1934~1935년에 창간되었고, 1935년 5~6월호에서 '네그리튀드'가 처음 현재적 의미로 쓰였다. 프란츠 파농을 가르쳤다. 1945년 공산당의 지원으로 당선돼 56년간 포르드프랑스 시장, 47년간 국민의회 의원을 지냈고 1946년 마르티니크를 프랑스 데파르트망으로 만든 법을 통과시켰다. 1956년 10월 24일 『모리스 토레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흐루쇼프 보고와 마그레브 탄압을 들어 공산당과 결별했으며, 영어권 서술은 헝가리 혁명 탄압을 탈당 사유로 든다. 1958년 마르티니크 진보당을 창당하고 2001년 정계에서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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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파리에서 L'Étudiant noir 창간, '네그리튀드' 개념 최초 제시
  • 1939『고향으로의 귀환 수첩』(Cahier d'un retour au pays natal) 출간
  • 1941수잔 루시와 함께 Tropiques 창간
  • 1945프랑스 공산당 소속 국민의회 의원 및 포르드프랑스 시장 당선
  • 1946마르티니크의 프랑스 데파르트망 편입 법안 주도
  • 1950『식민주의 담론』(Discours sur le colonialisme) 출간
  • 1956헝가리 봉기 탄압에 항의, 『모리스 토레즈에게 보내는 편지』로 PCF 탈퇴
  • 1958마르티니크 진보당(PPM) 창당
  • 1983–1988마르티니크 지역의회 의장
  • 199347년간의 국민의회 의원직 은퇴
  • 200156년간의 포르드프랑스 시장직 은퇴
프랑스 의용유격대 공산주의 프랑스 프랑스 1919–1944 ✕ 전사

점령에 맞선 공산주의 무장투쟁의 선구자

“티티의 원수를 갚았다!”

피에르 조르주는 프랑스 공산주의자이자 레지스탕스 전사로, 스페인 내전에서 국제여단으로 싸우며 일찍부터 반파시즘 무장투쟁을 경험했다. 1941년 8월 21일 파리 바르베 지하철역에서 알퐁스 모제르를 사살한 행동은 프랑스 공산당의 무장 저항을 가시화했지만, 독일 점령군의 인질 처형과 저항 세력에 대한 탄압도 격화시켰다. 그는 프레도, 뒤에는 파비앵 대령이라는 이름으로 지하 전투원과 마키를 조직했고, 파리 해방 뒤에는 파비앵 부대를 이끌고 동부 전선으로 향했다. 1944년 지뢰 폭발로 사망하면서, 그의 생애는 점령에 맞선 결단과 그에 뒤따른 가혹한 보복의 긴장을 함께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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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6–1939스페인 내전 국제여단 전투원
  • 1939–1940프랑스 공산당 청년운동 간부
  • 1940–1941점령 프랑스의 지하 공산주의 조직가
  • 1941–1942조직특별부대 군사위원
  • 1942–1943두 지역 FTP 마키 조직자
  • 1943–1944프랑스 전역 FTP 마키 지휘관
  • 1944파리 해방 전후 FTP·FFI 지휘관
  • 1944파비앵 부대 지휘관, 동부 전선 전사
  • 1941.08.21바르베 지하철역에서 독일 해군 장교 알퐁스 모제르 사살
  • 1944.12.27알자스 합셈에서 지뢰 폭발로 사망

기 모케

Guy Môquet
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 프랑스 프랑스인 1924–1941 ✕ 처형

점령 아래 처형된 공산주의 청년 활동가

그는 처형 전 편지에 “내 죽음이 무언가에 보탬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고 썼다.

기 모케는 파리 출신의 프랑스 공산주의 청년 활동가로, 아버지의 투옥 뒤 지하 활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1940년 열여섯 살에 체포되어 프랑스 당국의 수감과 행정구금을 거쳤고, 1941년 샤토브리앙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독일 점령군은 낭트의 카를 호츠 암살에 대한 보복으로 그를 인질로 선정해 1941년 10월 22일 처형했으며, 그의 죽음은 점령과 협력 체제가 젊은 공산주의자들에게 부과한 대가를 상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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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파리에서 출생
  • 1930년대 후반카르노 고등학교 학생, 공산주의 청년동맹 활동가
  • 1940.10프랑스 경찰에 체포되어 프렌 감옥에 수감
  • 1941.01–02무죄 판결 뒤에도 행정구금되어 상테와 클레르보 수감시설로 이송
  • 1941.05샤토브리앙의 쇼아젤 수용소로 이송
  • 1941.10.22샤토브리앙에서 인질로 처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