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 뒤셴』을 창간해 파리 상퀼로트의 목소리를 만들고 1793년 지롱드파 타도에 앞장선 언론인으로, 급진적 비기독교화를 밀어붙이다 1794년 3월 혁명정부에 체포되어 동료들과 함께 처형됐다.
프랑스 혁명기의 언론인이자 파리 코뮌의 검사 대리. 1790년 창간한 『페르 뒤셴』의 거칠고 대중적인 문체로 상퀼로트 독자층에 영향력을 얻었고 코르들리에 클럽의 유력 인물이 됐다. 1793년 지롱드파 공격, 더 강한 경제 통제와 비기독교화 운동을 지지했다. 다만 ‘에베르파’는 정식 정당이 아니라 그의 신문, 코르들리에 일부, 코뮌 인맥을 묶어 부르는 이름이다. 1794년 3월 봉기 호소가 실패한 뒤 혁명정부에 체포되어 3월 24일 처형됐다.
1789년 7월 11일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초안을 국민의회에 제출했고, 바스티유 습격 뒤 국민위병 총사령관이 되었다. 1791년 샹드마르스에서 국민위병이 군중에게 발포해 신임을 잃고 중도 노선은 끝났다.
1757년 태어나 1834년 파리에서 죽은 프랑스의 군인이자 정치가다. 미국 독립전쟁에 자원해 대륙군 소장으로 요크타운 포위전의 결정적 승리에 기여했고, 1789년 삼부회 의원과 국민위병 총사령관을 지내며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작성에 관여했다. 혁명기에는 입헌군주제를 지키려는 중도 노선을 택했으며, 1791년 샹드마르스 유혈 사건으로 민중의 신임을 잃었고 1792년 체포령 뒤 오스트리아에 억류되어 5년 넘게 수감되었다. 나폴레옹 정부에는 참여하지 않았고 복고 왕정 아래 자유파 의원으로 활동했으며, 1830년 7월 혁명에서 국민위병을 다시 지휘하고 루이필리프를 지지했다.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고 '두 세계의 영웅'으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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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7–1781대륙군 소장으로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 1781년 요크타운 포위전에서 미국군 우익 지휘
1794년 7월 27일 테르미도르 9일, 국민공회 의원들은 그를 약 90명의 동료와 함께 체포했고, 그는 재판 없이 처형됐다.
프랑스 혁명기의 변호사이자 국민공회 의원으로, 공안위원회에서 활동했다. 1792년 생필품 연설에서는 생존에 필요한 물자의 확보를 강조하면서 재산과 상업의 정당한 영역도 인정했다. 1794년 정치도덕 보고에서는 덕과 공포를 혁명 정부의 원리로 제시했다. 이 주장은 공포정을 정당화한 당사자의 논리이며, 여러 위원회와 국민공회가 내린 결정을 모두 그의 개인 명령으로 볼 수는 없다. 테르미도르의 정치적 패배 뒤 처형됐다.
1798년 8월 아부키르만에서 청색기 소장으로 영국 함대를 지휘해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군을 호송한 프랑스 함대를 격파했다. 프랑스 기함 오리앙이 폭발하고 교전한 17척 중 전열함 2척과 프리깃 2척만이 달아났다.
영국 해군 제독. 1758년 노퍽주 번햄소프의 목사관에서 태어나 삼촌 모리스 서클링의 후원으로 해군에 들어갔고, 서인도와 지중해에서 복무하며 1794년 칼비에서 한쪽 눈을, 1797년 산타크루스데테네리페에서 오른팔을 잃었다. 1798년 8월 1~3일 아부키르만에서 프랑스 함대를 격파해 이집트의 나폴레옹 군을 고립시켰고, 1801년 코펜하겐에서 덴마크를 꺾었으며 1805년 트라팔가르에서 전사했다.
1799년 제2차 취리히 전투에서 헬베티아 방면군을 이끌고 코르사코프의 오스트리아·러시아군을 격파했고, 1800년 제노바를 약 60일간 방어하며 오스트리아군을 묶어 보나파르트의 마렝고 승리를 도왔다.
프랑스 혁명전쟁·나폴레옹 전쟁기의 군사령관. 1758년 5월 6일 니스(당시 사르데냐 왕국 니스 백작령)에서 출생명 안드레아 마세나로 태어났다. 구체제 왕립 이탈리아 연대의 사병으로 출발해 1784년 평민이 오를 수 있는 최고 부사관 계급에 이르렀고, 1793년 8월 여단장, 같은 해 12월 20일 사단장이 되었다. 1804년 5월 19일 나폴레옹이 창설한 최초 18명의 제국 원수 중 한 명이 되었고, 1808년 리볼리 공작, 에슬링 대공 작위는 1809년(일부 문헌은 1810년 1월)에 받았다. 1817년 4월 4일 파리에서 58세로 결핵으로 사망했다.
1791년 바렌 도주 뒤 제헌의회에서 영국의 선례를 들어 왕을 재판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바르나브가 7월 15일 연설에서 이를 반박했다.
에브뢰의 변호사로, 1789년 삼부회 제3신분 대표가 되어 제헌의회에서 교회 재산의 국유화를 요구했다. 1791년 바렌 도주 뒤에는 영국의 선례를 들어 왕을 재판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바르나브는 성문 헌법이 없는 영국은 본보기가 될 수 없다며 반박했다. 1792년 국민공회 의원으로 다시 뽑혀 롤랑 부인의 영향 아래 지롱드파의 주요 연설가가 되었고, 마라를 공격하며 도에서 모은 국민방위대로 의회를 지키자고 제안했다. 1793년 6월 2일 지롱드파와 함께 체포령을 받자 노르망디로 달아나 봉기 조직에 가담했다. 이후 보르도 근처에 숨어 지내다 1794년 페티옹과 함께 숨진 채 발견되었으며, 자살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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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에브뢰 바이야주의 제3신분 대표로 삼부회에 선출되어 교회 재산의 국유화를 요구했다.
1791바렌 도주 뒤 영국 선례를 들어 왕을 재판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바르나브가 반박했다.
1792에브뢰 형사재판소 소장을 지낸 뒤 외르 도의 국민공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지롱드파에 합류했다.
혁명이 약속한 법적 평등이 빈곤과 재산 격차 앞에서 무력하다고 본 언론인으로, 1796년 총재정부에 맞선 평등파 음모를 이끌었으나 적발되어 이듬해 처형됐다.
본명은 프랑수아노엘 바뵈프다. 프랑스 혁명기의 언론인이자 평등파 운동가로, 법 앞의 평등을 넘어 재산과 생활 조건의 불평등을 문제 삼았다. 1796년 총재정부에 맞선 평등파의 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이듬해 처형됐다. 「평등파 선언」의 집필자는 실뱅 마레샬이며, 그 글을 바뵈프 자신의 저작이나 이미 시행된 정책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평등파의 구상과 후대 마르크스주의 사이에는 수용과 변화의 역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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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로이 선거인단의 결의서 첫 조항을 작성해 봉건적 권리 폐지를 요구했다.
1794《민중의 호민관》을 발행하며 테르미도르파를 옹호하고 혁명의 경제적 결과를 공격했다.
1794년 2월 북부군 사령관이 되어 플뢰뤼스 전투에 참여했고, 1794년 12월–1795년 1월 얼어붙은 강을 건너 위트레흐트와 암스테르담에 입성했는데, 이때 프랑스 경기병이 얼음 위에서 네덜란드 함대를 사로잡았다.
1778–1804 프랑스 혁명전쟁기의 장군. 프랑스 혁명전쟁 프랑드르 전선에서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와 네덜란드 공화국을 무너뜨리고 라인 전선에서 싸웠다. 이후 왕당파로 돌아섰고, 1797년 프뤽티도르 18일 쿠데타에서 카옌으로 유배되었으며, 런던으로 도피한 뒤 1799년 코르사코프의 참모로 복무했다. 프랑스로 돌아와 나폴레옹에 대한 왕당파 음모에 연루되어 체포되었고, 1804년 4월 감옥에서 죽은 채 발견되었다.
1794년 플뢰뤼스에서 제1차 대동맹에 결정적 승리를 거둔 것이 혁명기의 대표적 순간이다. 1798년에는 오백인회에서 동료 의원 피에르 델브렐과 함께 20~25세의 독신·무자녀 남성을 징병하는 주르당법을 발의해 통과시켰다.
프랑스의 군인으로 프랑스 혁명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에서 복무했고 1804년 제국 원수가 되었다. 1762년 리모주에서 외과의사 로크 주르당의 아들로 태어나 미국 독립 전쟁에 참전했으며, 혁명 전쟁에서 북부군을 이끌어 1793년 10월 와티니에서 승리하고 마우보주 포위를 깼다. 이어 삼브르에뫼즈군을 지휘해 1794년 플뢰뤼스에서 제1차 대동맹을 상대로 결정적 승리를 거두었다. 총재정부 시기 자코뱅 정치인으로서 오백인회 의원(1797~1799)으로 일했고, 1798년 징병법(주르당법)을 입안했다. 1813년 비토리아에서 패배했으나 1830년 7월 혁명을 지지했고, 사망할 때까지 앵발리드 총독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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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8–1783보조루아 연대에 입대해 미국 독립 전쟁에 참전, 1779년 서배너와 서인도 제도에서 복무
17935월 27일 준장으로 진급하고 두 달 뒤 사단장이 되었으며, 9월 22일 북부군 사령관에 임명되어 10월 와티니에서 승리
1794삼브르에뫼즈군(6월 29일 정식 편성)을 이끌고 6월 26일 플뢰뤼스에서 승리
1797–1799오백인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1798년 징병법을 발의·통과시켰고, 1799년 오스트라흐와 슈토카흐에서 패배
1804–1815나폴레옹에게 원수와 백작 작위를 받고 피에몬테 총독을 지냈으며, 1808년 스페인에서 조제프 보나파르트의 참모장을 맡고 1813년 비토리아에서 패배
1816–18331815년 이후 부르봉 왕가에 충성해 1816년 그르노블 총독, 1819년 프랑스 상원의원이 되었고, 1830년 7월 혁명을 지지해 잠시 외무를 맡은 뒤 앵발리드 총독으로 사망할 때까지 재임
1793년 8월 29일 생도맹그 민사위원으로서 북부 관구의 모든 노예가 자유라고 선포했다. 국민공회의 전 식민지 노예제 폐지보다 다섯 달 앞섰다.
파리 고등법원 변호사로, 흑인우호협회의 노예제 폐지론을 지지하는 글을 썼고 브리소와 가까웠다. 1792년 폴브렐 등과 함께 민사위원으로 생도맹그에 파견되었는데, 처음 내건 임무는 노예해방이 아니라 자유 유색인의 동등한 권리 보장이었다. 백인 식민자들과의 충돌과 영국·에스파냐의 위협 속에서 1793년 8월 29일 북부 관구의 노예해방을 선포했다. 해방된 이들에게는 농장 노동 의무가 따랐다. 국민공회는 1794년 2월 4일 노예제 폐지를 모든 식민지로 넓혔다. 해방의 동기가 평등 이념이었는지 권력 유지의 필요였는지는 역사가들 사이에 논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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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4법학 학위를 받고 파리 고등법원 변호사가 되었다.
1792폴브렐 등과 함께 민사위원으로 생도맹그에 파견되었다.
17938월 29일 북부 관구의 노예해방을 선포했다.
1794–1795본국으로 소환되어 식민자들의 고발에 맞서 해명했고, 혐의를 벗었다.
1796–1797생도맹그로 돌아갔으나 투생 루베르튀르가 1797년 8월 그를 배에 태워 프랑스로 돌려보냈다.
전쟁부 사무총장으로 부처 사무국을 급진 애국파로 채웠고, 1794년 3월 에베르파와 함께 체포되어 3월 24일 처형되었다.
파리 감옥 수위의 아들로, 소송대리인 사무소의 서기로 일했다. 코르들리에 클럽 초기 회원으로 서기를 맡았고, 1792년 8월 10일 봉기 뒤 파리 코뮌 총평의회에 들어갔다. 1793년 4월 부쇼트 전쟁장관 아래 전쟁부 사무총장이 되어 부처 사무국을 급진 애국파로 채웠다. 1793년 12월 체포되었다가 이듬해 2월 풀려난 뒤 관용파와 혁명정부에 맞선 에베르파의 투쟁에 나섰다. 강좌에서는 1794년 3월 에베르·롱생·모모로 등과 함께 체포되어 3월 24일 처형된 인물로 등장한다. 반역 음모 혐의를 뒷받침할 물증은 제시되지 않았다고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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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28월 10일 봉기 뒤 파리 코뮌 총평의회에 들어가 파브르 데글랑틴의 자리를 이었다.
17934월 부쇼트 장관 아래 전쟁부 사무총장이 되었다.
1793–179412월 17일 일반안전위원회의 명령으로 체포되었다가 이듬해 2월 2일 풀려났다.
1798년 8월 22일 킬랄라에 상륙하고 8월 27일 캐슬바 전투에서 레이크 경 휘하 영국군을 격파했다. 8월 31일 코노트 공화국이 선포되었고 9월 8일 발리너멕에서 패배해 포로가 되었다.
1767년 생낭보르(로렌 보주)에서 태어나 1792년 자원 입대해 급속히 승진했고 1794년 여단장이 되었다. 1798년 아일랜드 원정을 지휘해 8월 22일 킬랄라에 상륙하고 8월 27일 캐슬바에서 영국군을 격파했으며 8월 31일 코노트 공화국 선포에 관여했으나 9월 8일 발리너멕에서 항복하고 포로 교환으로 귀국했다. 이후 생도맹그 원정에 참전하고 1813년 미국으로 이주해 1815년 뉴올리언스 전투에서 미군을 도왔으며 만년에는 프랑스어 교사로 지내다 1823년 뉴올리언스에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