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역사학자 로버트 번스는 그를 '20세기 미국사에 관한 가장 유능한 소련 전문가 중 한 명'이라 평했다.
전후 세대 최초로 소련에서 미국사 연구의 학문적 기초를 세운 역사가. 레닌그라드대학에서 국제관계사를 전공하고 레닌그라드 역사연구소에서 평생 연구하며 석유정치, 미국 혁명, 미소 관계를 아우르는 300여 편의 저작을 남겼다. 티머시 나프탈리와 함께 소련 공산당·크렘린 문서고를 처음 열어 쿠바 미사일 위기의 내막을 밝힌 『One Hell of a Gamble』(1997)은 냉전사 연구의 전환점이 되었으며, 이어진 『Khrushchev's Cold War』(2006)로 영국 왕립연합군사연구소의 올해의 군사사 서적상을 받았다.
그는 1962년 아버지의 개인 비서로 쿠바 협상을 기록했고, 그 문서가 훗날 공개되며 미사일 철수 뒤에도 전술핵이 쿠바에 남아 있었음이 드러났다.
세르고 미코얀은 라틴아메리카와 소련 대외정책을 연구한 소련·러시아 역사학자이자 아나스타스 미코얀의 아들이었다. 1962년 아버지를 수행해 쿠바를 방문한 경험과 개인 기록을 바탕으로, 공개된 미사일 철수 뒤에도 소련 전술핵이 쿠바에 남아 있었고 협상 과정이 쿠바 지도부와의 균열을 낳았음을 밝혔다. 그는 학술지 《라틴아메리카》를 이끌며 이 지역 연구를 조직했고, 훗날 소련과 미국 연구자들의 공동 냉전사 연구에 참여했다.
「한 기업에 동시에 두 개의 이질적 규제자가 있을 수 없다. 하나의 자동차에 두 명의 운전자와 두 개의 핸들이 동시에 있을 수 없는 것과 같다」, 『회고로 본 계획체제』(2000)에서 코시긴 개혁의 실패를 요약하며.
소련 및 러시아의 경제학자로, 모스크바국립대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우랄공대에서 정치경제학을 가르쳤다. 1965년부터 사망까지 러시아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에서 근무하며 해외 경제이론 비판적 연구 분과를 이끌었고, 후기에는 경제체제 전환 이론과 러시아 경제사상사 연구에 집중했다. 2000년 폴 그레고리와 공저한 『회고로 본 계획체제』에서 1965년 코시긴 개혁의 핵심 모순을 지령적 계획과 준시장이라는 두 이질적 규제자의 한 기업 내 양립 불가능성으로 분석하여, 개혁 연구의 '두 규제자' 학파를 열었다.
블라디미르 트레믈은 소련 경제에서 공식 통계에 잡히지 않는 소득과 소비를 간접 지표로 추정한 미국의 경제학자다. 그는 사모곤을 포함한 실제 주류 소비량과 국가 재정에서 보드카 수입이 차지하는 비중을 분석해, 주류 판매 통계만으로는 소련 사회의 음주 규모를 파악할 수 없음을 보였다. 1982년 저서 《소련의 알코올》은 이 연구를 집약했으며, 소련에서는 도서관 제한 열람 자료로 취급되었다.
2002년 「군사역사잡지」에 실은 글에서 그는 역사가의 의무를 이렇게 적었다: "역사가는 자기 민족과 함께 기뻐하고 슬퍼해야 한다."
그리고리 크리보셰예프는 소련군에서 출발해 총참모부 부총참모장까지 오른 군인이자 군사역사가였다. 그는 1988년부터 군사역사 연구단을 이끌어 비밀 해제 자료를 바탕으로 소련과 러시아 군대의 전쟁 손실을 통계화했고, 그 결과는 1993년 저서로 출간됐다. 이 연구는 겨울전쟁에서 소련군의 회복 불가능한 손실을 12만 6,875명으로 제시해 널리 인용됐지만, 후속 연구자들은 누락과 중복 가능성을 지적하며 더 높은 수치를 제시했다.
『문화대혁명의 기원』 3부작과 『마오의 마지막 혁명』으로 엘리트 정치를 해부한 하버드의 중국학자
1961년까지 런던에서 중국 관련 보도를 담당한 언론인이었고 중국 본토는 1972년에야 처음 방문했으며, 이후 인민공화국 건국부터 문화대혁명까지의 중국 엘리트 정치를 연구했다.
인도에서 태어난 영국인으로 언론인과 노동당 하원의원을 거쳐 학자가 되었고 『차이나 쿼털리』를 창간해 편집했다. 1974년부터 1997년까지 낸 『문화대혁명의 기원』 3부작은 1956년 백화제방부터 1966년까지 최고 지도부 안의 노선 대립을 추적해 문화대혁명이 마오 개인의 변덕이 아니라 대약진 운동 실패 이후 누적된 정치적 갈등의 귀결임을 보였다. 2006년 마이클 쇤할스와 쓴 『마오의 마지막 혁명』은 1966~1976년 전체를 다룬 표준적 서술이다. 하버드대학 교수와 페어뱅크센터 소장을 지냈다.
명예교수로 임명됐을 때 그를 소개하며 인용된 말, '진정 좋은 사람이라면 마음속 깊은 곳에서 누구나 아나키스트다.'
뉴욕 브루클린에서 오데사 출신 유대인 이민 가정의 아들로 태어나 퀸스 칼리지에서 평생 러시아와 미국의 아나키즘 운동사를 가르친 개척적 역사가였다. 『크론시타트 1921』(1970)으로 볼셰비키가 그 봉기를 반혁명 음모로 규정한 신화를 실증적으로 깨뜨렸으며, 훗날 게츨러의 명부 연구가 더 정밀한 수치를 내놓자 그 우위를 인정했다. 아나키스트를 '부도덕하고 폭력적'으로 보는 편견에 맞서 그들을 '사회정의의 선구자'로 복원하려 했고, 평생 모은 2만 점의 자료를 미국 의회도서관에 기증했다.
1968년 위스콘신대학에서 냉전기 미국 학생들에게 마오 시대 중국을 가르쳤고, 개혁개방기 중국이 관료자본주의로 흘러갔다고 진단하며 1989년 베이징에 있었다.
디트로이트 출신으로 위스콘신대학 매디슨 교수를 지냈다. 첫 저작 『리다자오와 중국 마르크스주의의 기원』(1967)은 마르크스주의가 중국에 수용되는 과정에서 민족주의와 농민에 대한 신뢰가 결합한 방식을 밝혔다. 1977년 초판이 나온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는 인민공화국사의 표준 교과서로, 마오주의를 사회주의의 이상과 후진국 근대화라는 이중 과제 사이의 긴장 속에서 읽었다. 그는 마오 시대의 억압을 비판하면서도 개혁기의 시장화가 사회주의의 약속을 저버렸다고 보았다.
스페인어 한마디 몰랐던 서른 살의 영국인이 쓴 《스페인 내전》이 파리에서 출간되어 프랑코 정권 아래 금서로 밀반입됐다.
휴 토머스는 1961년 저서 《스페인 내전》으로 전쟁을 국제 독자에게 널리 알린 영국 역사가다. 그는 외교 자료와 참전자들의 기록, 인터뷰를 바탕으로 공화파의 투쟁과 내부 폭력을 공산주의 진영이나 반공주의 진영의 논리 어느 한쪽으로 단순화하지 않고 서술했다. 이 책은 프랑코 독재 아래의 스페인에서 clandestine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여러 차례 개정되었으며, 사실과 해석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연구의 출발점으로 남았다. 이후 그는 쿠바와 스페인 제국, 세계사를 연구했고 정치적으로는 노동당에서 보수당을 거쳐 자유민주당으로 옮겨 갔다.
로버트 팩스턴은 미국의 현대 유럽사 연구자로, 비시 프랑스와 파시즘의 사회적·정치적 조건을 분석했다. 독일 점령기 문서와 프랑스 자료를 함께 읽어 비시 정권이 독일의 수동적 도구가 아니라 자체적인 국가 재편 구상을 지닌 협력자였음을 밝혔다. 마이클 마루스와 함께 쓴 『비시 프랑스와 유대인』은 비시의 초기 반유대 법령이 독일의 직접 명령 없이 추진된 정책임을 논증해 프랑스의 전후 기억과 역사학을 바꾸었다. 그의 연구는 협력과 저항을 도덕적 신화가 아니라 국가기관, 사회세력, 전쟁 조건의 상호작용으로 보게 했으며 세부 해석을 둘러싼 논쟁도 남겼다.
야아코브 로이는 소련의 유대인, 이슬람, 중동 정책과 소비에트 사회를 연구한 이스라엘 역사가다. 그는 문서 연구와 사회조사를 결합해 국가 정책이 민족 공동체와 대중의 정치 의식에 미친 영향을 추적했다. 『출혈하는 상처』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국내적 비용과 유산을 분석하며, 중앙아시아와 러시아 주민의 태도 차이를 통해 전쟁과 소련 붕괴의 관계를 둘러싼 논쟁에 실증 자료를 보탠다.
1989년, 『CPSU사 문제』에 실린 그의 논문 「이른바 '레닌그라드 사건'」은 이 사건을 '즈다노프 그룹 대 말렌코프-베리야 그룹'의 파벌 투쟁으로 정식화했다. 이후 30년 넘게 이 틀이 논쟁의 출발점이 되었다.
소련의 역사학자. 레닌그라드대학 사학부를 우등 졸업하고 토르조크에서 교사와 당 일꾼으로 일한 뒤, 1966년부터 레닌그라드 당역사연구소에서 25년간 봉쇄·전후복구·당 간부들의 정치 전기를 연구했다. 1989년 『CPSU사 문제』에 발표한 「이른바 '레닌그라드 사건'」에서 이 사건을 즈다노프 그룹과 말렌코프-베리야 그룹 사이의 파벌 투쟁으로 해석하는 틀을 처음 제시했고, 이듬해 빅토르 데미도프와 함께 편찬한 동명의 책은 20만 부 발행으로 대중적 폭발을 일으켰다. 이 작업으로 '레닌그라드 사건' 연구의 포스트소비에트 역사학 전체를 열었으며, 1991년부터 사망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 교수로 후속 세대를 양성했다.
상세 이력 보기
1933칼리닌주 토르조크 출생, 노동자 가정
1952–1957레닌그라드대학 사학부 우등 졸업
1957–1962르제프 중등학교 교사, 이후 토르조크 시당위 선전선동부 지도원·부장
1965후보학위 취득, 「제1차 5개년계획기 레닌그라드 CCC-RKI 활동」
1966–1991레닌그라드 당역사연구소(후일 역사정치연구소) 선임연구원
1987–1989『대화』에 '레닌그라드 사건' 첫 논문 게재, 『CPSU사 문제』에 획기적 논문 발표, 박사학위 취득, KGB상 수상
1990V. I. 데미도프와 『레닌그라드 사건』 편찬, 20만 부 발행
1991–2016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 역사학부 러시아현대사 교수, 150편 이상 논문·저서 발표
그가 편집한 체르노빌 연구서는 6,000여 개 자료를 검토해 장기 피해를 추산하며 공식 사망자 수 중심의 서술에 이의를 제기했다.
알렉세이 야블로코프는 동물학과 생태학을 연구한 소련·러시아 생물학자이자 환경정책가였다. 그는 체르노빌의 장기적 건강·환경 피해를 강조하며 공공 논쟁에 참여했고, 공동 저술서의 높은 사망 추정치는 재난 피해 규모를 둘러싼 논쟁의 한 극단을 이루었다. 과학 연구와 환경운동, 의회·대통령 자문 활동을 오가며 생태 문제를 국가 의제로 끌어올렸다.
멩기스투 정권 시기, 망명자들의 망명·사면 청원을 도와 수십 명이 고문과 죽음을 피하도록 했고 2018년에는 성훈장 대십자 훈장을 받았다.
미국의 정치학자이자 에티오피아 연구자로, 오클라호마주립대학 정치학교수와 명예교수를 지냈다. 평화봉사단 아디스아바바 부단장 부임 시점은 부고·왕실평의회가 1963년, 출판사·도서관 약력이 1964년으로 엇갈린다. 뉴델리 교육자료센터 상주 책임자, 오스틴대학 평생교육원장, 털사대학 선임연구원을 거쳐 1988년부터 2008년까지 오클라호마주립대학에서 가르쳤다. 멩기스투 정권 시기 망명자들의 망명·사면 청원을 도와 수십 명이 고문과 죽음을 피하도록 했고, 2018년 성훈장 대십자 훈장을 받았다. 저서로 《에티오피아: 냉전 이후의 아프리카 국가》(1999)와 《신대륙의 유다의 사자》(2011)가 있다. 미국 의회도서관의 국가연구서 《에티오피아: 국가연구》는 그의 저작이 아니다
마틴 매콜리는 아일랜드에서 태어나 소련과 동유럽의 정치사를 연구한 역사가다. 그는 UCL 슬라브·동유럽학부에서 가르치며 스탈린주의, 흐루쇼프 시대, 냉전과 소련의 흥망을 폭넓게 다뤘다. 20차 당대회 비밀연설을 그는 당을 효율적인 기구로 되돌리려는 개혁이자, 흐루쇼프가 경쟁자들의 권위를 약화한 권력투쟁으로도 해석했다.
역사적 기억이라는 표현 자체가 모순어법이다. 기억은 본질적으로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며 매우 자주 오류에 빠진다.
미국을 대표하는 스페인 현대사 연구자로, 위스콘신대학에서 37년간 봉직하며 파시즘 유형론과 스페인 내전 연구의 보수적 해석을 정립했다. 그의 핵심 주장은 제2공화국 붕괴의 일차적 원인이 우파 음모가 아니라 사회당 주도의 혁명적 급진화에 있다는 것으로, 내전을 혁명과 반혁명의 충돌로 읽는다. 2000년대 이후 프랑코 정권에 온정적이라는 비판을 받으며 비냐스, 프레스턴 등 진보 진영의 주요 논쟁 상대가 되었으나, 그가 세운 수정주의적 틀은 스페인 내전 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 축이다.
나는 오히려 당의 내적으로 비교적 민주적이고 관용적이며 분권화된 구조와 운영 방식, 그리고 당시 대중의 정서에 대한 민감성을 강조할 것이다.
러시아 혁명사 연구의 수정주의 학파를 대표하는 미국 역사학자. 1960년대부터 소련 기록보관소에서 작업한 최초의 서방 연구자 중 한 명으로, 1976년 저서 『볼셰비키 권력 장악』에서 10월 혁명이 소수 쿠데타가 아니라 평화·토지·빵을 요구한 대중의 폭넓은 지지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실증적으로 밝혀 파이프스의 냉전적 쿠데타 테제를 정면으로 뒤집었다. 1917년 볼셰비키 당이 '상대적으로 개방적이고 민주적이며 분권화된 조직'이었다는 그의 발견은 혁명 연구의 패러다임을 바꾸었으며,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배치되는 결론을 기록 자료에 근거해 기꺼이 받아들인 역사가로서도 평가받는다.
1947년의 위기를 그는 생산과 투자 붐의 힘에서 비롯한 달러 결제 위기로 보았다. 본문에 밝혔듯 이는 서술이며, 유럽 회복이 미국 원조 없이도 가능했다는 그의 논지와 함께 논쟁적인 평가를 받았다.
1935년 1월 19일 스토크온트렌트에서 우체국 직원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에서 역사를 전공해 1956년 최우등 학사 학위를 받았고, 1960년 런던정경대학에서 W. N. 메들리콧 지도 아래 제2차 세계대전기 독일 군수산업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에든버러대학교와 이스트앵글리아대학교, 스탠퍼드대학교를 거쳐 UMIST 유럽학 교수(1971–1983)와 유럽대학연구소(EUI) 교수(1983–1986), LSE 경제사 교수(1986–1996)를 지냈고, 1993년 내각부 공식 사료편찬관으로 임명되어 공식 사료 첫 권을 썼다. 1987년 영국학술원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2010년 9월 28일 75세로 사망해 하이게이트 공동묘지 동편에 안장되었다.
그동안 절대 접근할 수 없었던 사료가 마침내 열리자, 그는 역사가로서 '완전히 새로운 시대'에 들어섰다고 회고하며, 다만 그것이 오십 대 중반에야 왔음을 아쉬워했다.
소련 역사학자로 유고슬라비아 현대사와 냉전기 동유럽 국제관계를 전공했다. 1966년부터 인슬라브 연구소에서 근무하며, 1980년대 말 아카이브 개방 이후 스탈린과 유고·불가리아 공산당 지도자들의 회담 기록을 발굴해 스탈린-티토 결별의 기원에 대한 탈냉전기 재평가의 토대를 놓았다. 노먼 네이마크와 공동 편집한 『동유럽 공산정권의 수립』(1997)을 비롯한 수백 편의 저작과 코민포름 회의록 출판으로 국제적 권위를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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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모스크바 국립대학교 역사학부 졸업 (남·서슬라브사 전공)
1962–1966소련 과학아카데미 슬라브학 연구소 아스피란투라
1966–2022슬라브학 연구소 연구원, 선임연구원, 국제관계사 부문장(1990–1993), 수석연구원
보이테흐 마스트니는 체코슬로바키아 출신의 미국 역사학자로, 냉전과 소련 대외정책을 연구했다. 계급 배경 때문에 정규 중등교육 대신 공장 노동과 기록관 실무를 거친 경험은 그의 사료 중심 연구 태도와 맞물렸다. 그는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처음부터 단일한 군사동맹으로 보지 않고, 정치적 협상 수단과 소련의 규율 장치 사이의 긴장 속에서 해석했으며, 공개 기록을 통해 그 실제 작동을 추적했다. 평행사 프로젝트를 이끌며 동구권 군 관계자들의 증언과 문서를 국제 연구 공간에 연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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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프라하에서 출생
1950년대공장 기계공으로 일하며 노동자학교에서 수학
1950년대 후반–1962국립박물관 보조 기록관, 카를대학교에서 중세사와 기록학 전공
1962미국으로 이주해 컬럼비아대학교에서 수학
1970년대–현재컬럼비아대학교, 일리노이대학교, 보스턴대학교, 존스홉킨스 국제관계대학원 등에서 역사와 국제관계 강의
1989년 라진스키는 황제 가족 처형자인 야코프 유롭스키의 수기와 참여자들의 증언을 소련에서 처음으로 공개해, 사형 집행자들 스스로가 그 밤을 초 단위로 이야기하게 했다.
에드바르트 라진스키는 러시아의 역사와 비극적 인물을 대중에게 전달한 역사가이자 극작가, 방송인이다. 모스크바 역사기록보관소에서 훈련받은 그는 연극으로 경력을 시작한 뒤 니콜라이 2세, 라스푸틴, 스탈린 등의 전기를 썼다. 1997년 스탈린 전기에서 새로 공개된 기록과 증언을 바탕으로 베리야가 스탈린을 독살했을 가능성을 제기했으며, 이 주장은 확정된 사실이 아니라 사망 원인을 둘러싼 논쟁의 한 해석으로 남아 있다. 그의 서사적이고 심리적인 역사 서술은 널리 읽혔지만, 사료의 출처와 해석을 둘러싸고 전문 역사가들의 비판도 받았다.
「형성된 경제 메커니즘은 명령경제와 시장경제의 모든 최악의 측면을 결합했다」: 1965년 개혁에 대한 평결.
그는 1970년대부터 소련 공식 통계를 독자적 방법으로 재계산하여, 1928~1985년 국민소득 증가가 공식 84.4배가 아닌 6.6배에 불과하다는 충격적 결과를 도출한 경제학자다. 1987년 바실리 셀류닌과 함께 『노비 미르』에 발표한 「기만적 숫자」는 소련 사회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이후 『러시아 현대 경제사』 전집을 집필하며 소련 계획경제의 성취와 실패를 냉철히 분석했고, 1965년 코시긴 개혁에 대해서는 '명령경제와 시장경제의 모든 최악의 측면을 결합한 개혁'이라는 평결을 내렸다.
로널드 라도시는 미국의 역사가이자 저술가로, 공산주의 가정에서 성장해 미국 공산당과 신좌파를 거쳤다. 로젠버그 사건을 재검토하며 소련 간첩 활동에 관한 기존 신념을 바꾸었고, 이 과정은 그의 반공 보수주의적 전환을 굳혔다. 그는 메리 하벡, 그리고리 세바스티아노프와 함께 『스페인 배신』을 편집해 모스크바 архив 문서를 바탕으로 스페인 내전에서 소련의 정책과 코민테른의 역할을 비판적으로 해석했다.
부하린 전기로 '잃어버린 대안'을 제기하고 소련 개혁 가능성을 끝까지 주장한 미국의 러시아사 학자
"역사의 결정적 순간마다, 스탈린의 등장과 흐루쇼프의 몰락과 소련의 종말, 각각에 대안이 존재했다."
스티븐 코언은 소비에트학계에서 소련 체제가 본질적으로 개혁 불가능했다는 통념에 가장 체계적으로 반박한 학자였다. 1973년 『부하린과 볼셰비키 혁명』에서 니콜라이 부하린의 정치노선을 스탈린주의에 대한 실현 가능한 대안으로 제시하며, 소련사가 단선적 필연이 아니라 분기점들의 연쇄였음을 주장했다.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를 지지하고 부하린의 사후 복권에 기여했으며, 소련 붕괴 후에는 미국의 대러 정책을 '실패한 십자군'으로 비판하면서 냉전 이후에도 러시아를 적대시하는 워싱턴의 합의에 맞섰다. 말년에는 우크라이나 사태와 러시아게이트를 둘러싸고 친푸틴이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미국 언론의 러시아 보도가 냉전기보다 더 이데올로기적이라고 주장하며 고립을 무릅쓰고 소신을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