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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벨 세묘노비치 리발코

Павел Семёнович Рыбалко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894–1948 ○ 신장병

스탈린그라드에서 프라하까지, 3근위전차군을 이끈 두 번의 영웅

쿠르스크 전투 중, 리발코의 차량에 독일 공군이 기총소사를 퍼부었다. 운전병과 부관이 쓰러졌고 차는 구덩이에 빠졌지만, 리발코는 상처 하나 없이 일어나 다른 차로 갈아타고 작전을 계속했다.

평기병에서 출발해 제3근위전차군을 이끌고 쿠르스크에서 프라하까지 진격한 두 차례 소비에트연방 영웅. 제1차 세계대전과 내전에서 다섯 번 부상당했고, 전후 기갑·기계화군 총사령관으로 재직 중 53세로 병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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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7러시아 제국군 82보병사단, 프셰미실 공방전·브루실로프 공세 참전, 부상
  • 1917–1922적위대·적군에서 파르티잔 지휘관, 연대장, 여단 정치위원으로 내전 종군, 다섯 차례 부상
  • 1931–1934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이후 중국 신장에서 군사고문(1934–1935)
  • 1937–1939소련 주폴란드 무관
  • 1940소련 주중국 무관
  • 1942–1943제5전차군·제3전차군 사령관, 오스트로고시스크-로소시 작전 성공, 중장 진급
  • 1943–1945제3근위전차군 사령관 — 쿠르스크, 드네프르, 키예프, 르보프, 비스와-오데르, 베를린, 프라하
  • 1943소비에트연방 영웅 칭호 수여
  • 1945두 번째 소비에트연방 영웅 칭호 수여
  • 1947–1948소련군 기갑·기계화군 총사령관

표도르 이바노비치 톨부힌

Фёдор Иванович Толбухи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4–1949 ○ 당뇨

발칸을 해방하고 병사들의 생명을 가장 아낀 원수

「톨부힌 원수는 전쟁을 장인이 아닌 정밀과학으로 여겼다. 서구적 합리성과 동방적 직관을 결합해, 수가 아닌 기술로 승리했다.」 — 보리스 슬루츠키

농민 출신 장교로 스탈린그라드에서 57군을 지휘했고, 제3·제4우크라이나 전선군 사령관으로 발칸 해방을 이끌었다. 신중한 작전 설계로 병사 희생을 최소화했으며, 사후 소련영웅을 받은 유일한 원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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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7러시아 제국군 자원입대, 참모대위까지 진급, 성 안나·스타니슬라프 훈장
  • 1918–1922적군 입대, 제56소총사단 참모장, 소비에트-폴란드 전쟁·크론슈타트 진압·카렐리아 전역
  • 1938–1941자캅카스 군관구 참모장, 이란 진주 작전 기획
  • 1942–1943제57군 사령관 — 스탈린그라드 방어·반격; 제68군 사령관
  • 1943–1944남부전선·제4우크라이나 전선군 사령관, 돈바스·멜리토폴·크림 해방
  • 1944–1945제3우크라이나 전선군 사령관, 야시-키시뇨프·베오그라드·부다페스트·발라톤·빈 작전, 원수 진급
  • 1945–1947남부군집단 총사령관 (루마니아·불가리아), 연합통제위원회 불가리아 의장
  • 1947–1949자캅카스 군관구 사령관, 소련 최고회의 대의원

막심 알렉세예비치 푸르카예프

Максим Алексеевич Пуркае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러시아 1894–1953 ○ 자연사

목수 아들에서 대장으로, 만주 작전을 지휘한 모르드바인

1941년 11월 7일, 독일군이 모스크바로 접근하는 가운데 푸르카예프는 쿠이비셰프에서 열린 혁명기념일 군사 퍼레이드의 사령관을 맡았다. 외교단 앞에서 펼쳐진 이 퍼레이드는 소련이 아직 건재함을 연합국과 잠재적 적국 모두에 과시하는 무력 시위였다.

모르드바인 출신으로, 차르군 소위에서 붉은 군대의 대장까지 오른 소련의 군사 지휘관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칼리닌 전선군 사령관으로 르제프 공방전을 지휘했으며, 1943년 극동전선군 사령관으로 전임되어 1945년 8월 만주 전략공세작전에서 제2극동전선군을 이끌었다. 이 작전은 소련이 참가한 제2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주요 전역이었다. 전후 극동군관구 사령관을 지냈으나, 칼리닌 전선군 시절 보급 실패로 병사들이 아사한 책임을 물어 해임된 이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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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러시아 제국군 자원입대, 사라토프 준사관학교 졸업
  • 1918붉은 군대 입대, 중대장 · 대대장
  • 1936제1차량화소총사단장
  • 1938–1939벨라루스 군관구 참모장
  • 1939–1940소련 주재 독일 무관
  • 1940–1941키예프 특별군관구 참모장 → 남서전선군 참모장
  • 1941–1942제60군 · 제3충격군 사령관
  • 1942–1943칼리닌 전선군 사령관
  • 1943–1945극동전선군 → 제2극동전선군 사령관, 만주 작전 지휘
  • 1945–1947극동군관구 사령관
  • 1947–1952극동군 총참모장 · 제1부사령관

샬바 오타로비치 체레텔리

Шалва Отарович Церетели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그루지야 1894–1955 ✕ 처형

제정군 장교에서 베리야의 비공식 집행자가 된 국가보안 장교

1939년 7월 8일 모스크바에서 츠할투보로 가는 NKVD 특별열차 안에서 주중 전권대표 보프쿤-루가네츠 부부가 살해되고 교통사고로 위장되었으며, 1953년 심문에서 타격의 책임은 진술마다 엇갈렸다.

그루지야 사치헤레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제정군 장교와 포로 생활을 거쳐 1921년 그루지야 노동농민 민병대에 들어갔고, 1922년 베리야의 추천으로 GPU로 옮겼다. 베리야가 1938년 말 그를 중앙 NKVD 3국 특수부 부책임자로 모스크바에 데려가자, 그는 납치와 은밀한 암살을 전담하는 베리야의 개인 공작원이 되었다. 1937년 8월부터 1938년 7월까지 그루지야 NKVD 특별 트로이카 위원으로 대숙청의 대량 처형 결정에 참여했고, 1941년 그루지야 내무인민위원 제1부위원, 이후 공화국 내무부 차관 겸 국경경비대 관리국장, 중장을 지냈다. 1953년 9월 트빌리시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같은 해 11월 15일 총살됐으며, 아직 명예회복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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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5제정 러시아군 소위, 포로
  • 1937–1938그루지야 민병대 책임자, NKVD 특별 트로이카 위원
  • 1939–1941자캅카스 국경경비대 관리국장
  • 1941–1946그루지야 제1부내무인민위원
  • 1946–1953그루지야 부국가보안장관, 국경경비대 지휘 겸임
  • 1953–1955체포, 트빌리시 재판과 처형

미하일 미하일로비치 조셴코

Михаил Михайлович Зощенко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1894–1958 ○ 심부전

혁명 이후 소비에트 일상을 해부한 풍자의 대가

「나는 어떤 운명이든 지금 내가 가진 이 운명보다는 받아들이겠다」 — 1954년 작가동맹 회의에서, 복권되었으나 다시 공격받던 자리에서.

미하일 조셴코는 소비에트 연방에서 가장 널리 읽힌 풍자 작가로, 혁명 이후 평범한 시민의 어눌한 목소리로 서술되는 스카즈 기법을 통해 공동 아파트, 관료주의, 혁명적 이상과 일상의 괴리를 포착했다. 세라피온 형제단의 핵심 멤버였던 그는 1920~1930년대에 약 1억 부의 책을 판매하며 러시아 문학사에서 가장 대중적인 작가 중 한 명이 되었다. 1946년 안나 아흐마토바와 함께 안드레이 즈다노프의 공개 비난을 받고 작가동맹에서 제명되어 빈곤에 내몰렸으며, 이는 전후 스탈린주의 문화 탄압의 상징적 사건이 되었다. 스탈린 사후 복권되었으나 자신의 작품을 철회하기를 거부했고, 1958년 무명 속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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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17제1차 세계대전 참전, 장교로 복무하며 다섯 차례 훈장 수훈
  • 1919붉은 군대 복무, 건강 악화로 제대
  • 1921세라피온 형제단 가입, 문학 활동 시작
  • 1922–1930년대풍자 단편소설로 소비에트 최고 인기 작가로 부상, 약 1억 부 판매
  • 1939노동적기훈장 수훈
  • 1943『해 뜨기 전에』 연재 시작, 곧 중단 명령
  • 1946즈다노프 비판과 함께 작가동맹 제명, 출판 금지
  • 1953스탈린 사후 작가동맹 재가입

세묜 일리치 보그다노프

Семён Ильич Богдан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 1894–1960 ○ 뇌졸중

베를린에 가장 먼저 진입한 기갑군 사령관, 스탈린 사후 밀려나다

「소비에트 국가의 적들과 싸운 전선에서 내 아들과 세 형제, 누이가 죽었다」 — 1956년 강제 퇴역을 앞두고 올린 사직 청원에서

소련 기갑군 최고의 실전 지휘관 중 한 명. 푸틸로프 공장 노동자 출신으로 제1차 세계대전과 내전을 거쳐 붉은 군대에 몸담았고, 1938년 체포·수감되었다가 1939년 복권되었다. 대조국전쟁에서 제2근위전차군 사령관으로 코르순-셰우첸콥스키, 우만-보토샤니, 루블린-브레스트, 비스와-오데르, 동포메라니아, 베를린 공세 등 결정적 전역을 지휘했으며, 그의 부대는 1945년 4월 베를린 시내에 가장 먼저 돌입한 소련군이었다. 전후 기갑·기계화군 총사령관(1948~1953)으로 소련 전차 병과 전체를 이끌었으나,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에 의해 좌천되어 1956년 건강 악화로 퇴역했다. 두 차례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와 기갑군 원수 계급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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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18러시아 제국군에 자원입대, 소위까지 진급
  • 1918–1930붉은 군대 소대장·중대장·대대장,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및 탐보프 반란 진압 참전
  • 1930–1938연대장·기계화여단장, 1938년 체포·수감
  • 1940–1943복권 후 전차사단장·기계화군단장, 스탈린그라드·쿠르스크 전투 참전
  • 1943–1947제2(근위)전차군 사령관, 베를린 최초 진입 부대 지휘
  • 1948–1953소비에트군 기갑·기계화군 총사령관
  • 1953–1956제7기계화군 사령관 → 기갑군사관학교장, 흐루쇼프에 의해 좌천

야코프 일리치 골레프

Яков Ильич Голе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4–1960 ○ 자연사

전후 재건기에 고스방크를 이끈 재정 기술관료

1933년, 소련 전역이 대기근에 시달리던 때 골레프는 하리코프에 파견되어 국가 수확고 위원회를 이끌었다. 그의 경력에서 가장 어두운 시기였고, 이후 그가 다룰 모든 재정 숫자들 뒤에는 이 장면이 놓여 있었다.

야코프 골레프는 소련의 재정·은행 기술관료로, 1945년부터 1948년까지 소련 국가은행(고스방크) 총재를 지냈다. 노동자 가정 출신으로 제정군 포병으로 1차 대전을 겪고 내전기에 붉은 군대에 복무했으며, 이후 지역 재무 부서를 거쳐 중앙 재정 기구로 진입한 전형적인 소비에트 승진 경로를 밟았다. 고스방크 총재 임기 동안 그는 전시 경제에서 평시 재건으로 이행하는 과도기(1947년 화폐 개혁 직전까지의 신용·발권 체계)를 관리했으며, 이는 전후 소련 재정 안정화의 기술적 토대를 마련한 시기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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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러시아 제국군 포병 복무
  • 1918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19붉은 군대 복무
  • 1920–1924피야티고르스크 식량위원회 · 볼로콜람스크 현 재무과 근무
  • 1924–1930모스크바 주 재무국 근무
  • 1930–1933과학연구 콜호스 연구소 대학원생
  • 1933–1935국가 수확고 위원회 위원장 (하리코프) · 전권위원 (체르니고프, 스탈리노)
  • 1937–1939곡물·축산 국영농장 인민위원부 계획부 부장 · 재정 담당
  • 1939–1940소련 농업은행 총재
  • 1940–1941소련 재무 부인민위원
  • 1941–1945소련 재무 제1부인민위원
  • 1945–1948소련 국가은행(고스방크) 총재
  • 1948–1952소련 재무부 차관 겸 농업은행 총재
  • 1953–1959소련 농업은행 총재

이반 스테파노비치 이사코프

Иван Степанович Исак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르메니아 1894–1967 ○ 자연사

한쪽 다리를 잃고도 두 전쟁을 치른 소련 해군의 학자 제독

스탈린이 이사코프를 평했다: "진짜 함대 제독, 이사코프 동지. 똑똑하군, 다리는 없지만 머리는 있지."

아르메니아계 소련 해군 지휘관으로, 1955년 소련 해군 최고 계급인 아드미랄 플로타 소비에츠코고 소유자에 오른 단 세 명 중 한 명이다. 해군 제1부인민위원과 주참모부장을 지내며 소련 해군의 작전 교리를 정립했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발트·흑해함대와 육군 간 협동작전을 조정하고 레닌그라드 '생명의 길'을 구축했다. 1942년 투압세에서 독일 공습으로 중상을 입어 왼쪽 다리를 절단했으나 종전까지 복무했다. 전후 3권의 『해양 지도책』(스탈린상 1급)을 비롯해 해양학·해군사에 걸친 150여 편의 저작을 남겼고,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과 작가동맹 회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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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해군사관학교 졸업, 발트함대 구축함 이쟈슬라프에서 복무
  • 1918발트함대 빙상 항해 참가
  • 1922–1928흑해함대 작전부장 등 참모직 역임
  • 1937–1938발트함대 사령관
  • 1938–1939해군 부인민위원 겸 해군대학교장
  • 1939–1946해군 제1부인민위원
  • 1940–1942해군 주참모부장
  • 1942북캅카스 전선 부사령관, 투압세에서 중상으로 다리 절단
  • 1946–1947해군 주참모부장
  • 1947–1950해군 부총사령관
  • 1955아드미랄 플로타 소비에츠코고 소유자 진급
  • 1958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선출

데먄 세르게예비치 코롯첸코

Демьян Сергеевич Коротченко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894–1969 ○ 자연사

흐루쇼프의 충복: 우크라이나 정부를 두 번 이끈 농민 출신 당 관료

'침묵이 그의 비장의 카드였다. 흐루쇼프가 무언가 제안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이렇게 말하곤 했다: 네, 네, 물론입니다, 바로 그겁니다.' — 윌리엄 토브먼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정부 수반을 두 차례(1938~1939, 1947~1954) 역임하고 최고소비에트 상임간부회 의장(1954~1969)으로 15년간 재임한 소련의 당·국가 지도자다.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918년 볼셰비키에 입당해 적색 파르티잔을 조직했다. 1930년대 모스크바 바우만 구역에서 니키타 흐루쇼프와 인연을 맺어 측근으로 성장했고, 대숙청기 우크라이나 인민위원회의 의장으로 발탁되었다. 전시 파르티잔 투쟁을 조직하고 종전 후 공화국 재건을 주도했다. 흐루쇼프의 충실한 집행자로, '침묵이 그의 가장 큰 무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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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0적색 파르티잔 조직 · 붉은 군대 정치일꾼
  • 1921–1928쇼스트카·체르니고프·페르보마이스크 당위원회 서기
  • 1931–1937모스크바 바우만 구소비에트 의장 → 모스크바 주당 제2서기 → 서부 주당 제1서기
  • 1938드네프로페트로우스크 주당 제1서기 대행
  • 1938–1939우크라이나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
  • 1939–1947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서기 (전시 파르티잔 조직)
  • 1947–1954우크라이나 SSR 각료회의 의장 (두 번째 임기)
  • 1954–1969우크라이나 SSR 최고소비에트 상임간부회 의장

바실리 미하일로비치 자루빈

Василий Михайлович Заруби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1894–1972 ○ 자연사

게슈타포 첩자를 운용한 소련 원자력 스파이의 대미 레지던트

1941년 10월 12일, 독일군이 모스크바 외곽에 도달한 날, 스탈린은 자루빈을 직접 불러 워싱턴에서의 유일한 임무를 하달했다: '미국이 독일과 단독 강화를 시도할지 여부를 알아내라.'

소련 국가보안 기관의 대표적 해외정보 장교로, 23년간 근무 중 13년을 불법 체류 요원으로 활동했다. 1933년부터 1937년까지 베를린 비합법 레지던트로 근무하며 게슈타포 내부의 핵심 정보원인 빌리 레만(암호명 '브라이텐바흐')을 운용, RSHA와 게슈타포의 구조·작전·군사 계획에 관한 정보를 입수해 모스크바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1년부터 1944년까지는 워싱턴 주재 NKVD 수석 레지던트로서 미국 내 원자력 스파이 활동을 총괄 지휘했으며, 소련의 핵무기 개발에 결정적 정보 기반을 제공했다. 귀국 후 1948년까지 대외정보 부국장을 역임하며 불법 정보망을 감독했고, 퇴역 후에도 KGB 훈련기관에서 후배 정보원들을 교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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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7러시아 제국군 복무, 제1차 세계대전 동부전선 참전
  • 1918–1920붉은 군대 복무, 러시아 내전 남부전선 참전
  • 1920–1925체카·OGPU 내부보안·경제부서 근무 (블라디보스토크)
  • 1925–1927INO OGPU 합법 레지던트: 중국, 핀란드
  • 1927–1929비합법 레지던트: 덴마크, 독일 (체코인 신분)
  • 1929–1933비합법 레지던트: 프랑스 (암호명 '베티')
  • 1933–1937비합법 레지던트: 베를린, 게슈타포 요원 빌리 레만 운용
  • 1939–1940NKVD 장교, 코젤스크 수용소에서 폴란드 포로 심문
  • 1941NKGB 제1총국 부국장, 중국 특수임무 (발터 슈테네스 접촉)
  • 1941–1944NKVD/NKGB 대미 수석 레지던트 (신분: 부영사 바실리 주빌린)
  • 1945–1948NKGB/MGB 대외정보 부국장 겸 비합법정보 부국장
  • 1948건강 문제로 예편, 이후 KGB 훈련기관 강사

세르게이 블라디미로비치 일류신

Сергей Владимирович Ильюши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4–1977 ○ 자연사

일류신 설계국 창립자: Il-2 스투르모빅, 역사상 가장 많이 생산된 전투기

1941년 말, Il-2 생산이 늦어지자 스탈린이 공장에 전보를 쳤다: "Il-2는 붉은 군대에 공기처럼, 빵처럼 필요하다."

볼로그다 빈농의 막내아들로, 열다섯 살에 집을 떠나 막노동으로 시작해 1910년 비행장 인부로 항공을 처음 접했다. 주콥스키 공군사관학교 졸업 후 1933년 자신의 설계국을 세워 Il-2 스투르모빅(36,183대)을 내놓았고, 이 기체는 동부전선의 핵심 타격수단이 되었다. 전후에는 Il-12·Il-14·Il-18·Il-62 여객기로 소련 민간항공을 재건하고 제트 시대로 이끌었다. 7차례 스탈린상과 3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을 받은 유일한 인물로, 37년간 설계국을 이끌며 소련 군용·민간 항공의 기초를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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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8러시아군 항공부대 정비사, 조종사 자격 취득
  • 1919–1921붉은군대 항공기 수리열차 정비사·정치위원
  • 1921–1926주콥스키 공군사관학교 졸업, 군 항공기사
  • 1926–1931공군 과학기술위 항공부문 위원장
  • 1931–1933ЦАГИ 설계국장
  • 1933–1970일류신 설계국(ОКБ) 수석설계사·총설계사
  • 1967–1977공병기술대장(상장), 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표트르 레오니도비치 카피차

Пётр Леонидович Капица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4–1984 ○ 자연사

베리야를 거부하고 초유동성을 발견한 노벨상 물리학자

지난 20년을 보면, 물리학의 새로운 발견에 기초한 세계 기술의 근본적으로 새로운 방향들은 모두 해외에서 발전했고, 우리는 그것들이 확실한 인정을 받은 후에야 받아들였다. —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 1946년

소련의 실험물리학자. 케임브리지에서 러더퍼드 밑에서 연구했고 1934년 소련에 억류되었다. 1937년 액체 헬륨의 초유동성 발견, 베리야의 원자탄 프로젝트 지휘를 거부했다. 1978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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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1934케임브리지 캐번디시 연구소 연구원·자기연구 부소장·몬드 연구소장
  • 1934–1946소련 과학아카데미 물리문제연구소(IFP) 소장
  • 1943–1946소련 인민위원회 산하 산소총국(글라프키슬로로드) 국장
  • 1945원자력 특별위원회 위원 — 베리야의 지휘 방식을 거부하고 사임
  • 1946–1955해임 및 사실상의 가택연금 — 자택 실험실 '물리문제의 오두막'에서 연구 지속
  • 1955–1984물리문제연구소(IFP) 소장 (복권)
  • 1957–1984소련 과학아카데미 상임위원회 위원

이반 미하일로비치 그론스키

Иван Михайлович Гронски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4–1985 ○ 자연사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말을 스탈린과 함께 만든 문학 정치위원

그론스키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이렇게 정의했다: "렘브란트, 루벤스, 레핀을 노동계급에 봉사하게 하는 것."

차르 치하에서 혁명운동을 시작해 소비에트 문학 통제의 설계자 중 한 사람이 된 저널리스트이자 당 관료였다. 1928년부터 1934년까지 소련 2대 신문 《이즈베스티야》의 편집장을 지냈고, 1932년 5월 스탈린과의 대화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용어를 처음 만들어내 문학예술의 공식 교의로 정착시켰다. 같은 해 소비에트 작가동맹 조직위원회 의장을 맡아 고리키와 함께 문학연구소를 설립했으며, 《노비 미르》 편집장으로서 스탈린과 문단을 직접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했다. 1938년 체포되어 16년간 수용소와 유형 생활을 견뎠고, 1954년 복권된 뒤에도 공산주의자로서의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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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1918사회혁명당 맥시멀리스트 당원
  • 1918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28–1934《이즈베스티야》 편집장
  • 1932'사회주의 리얼리즘' 용어 창안 (5월, 스탈린과의 대화)
  • 1932–1934소비에트 작가동맹 조직위원회 의장
  • 1932–1937《노비 미르》 편집장
  • 1933고리키와 함께 문학연구소 설립
  • 1938–1954체포 · 15년형 · 수용소 및 유형
  • 1954–1985복권 · 세계문학연구소 연구원

이반 드미트리예비치 파파닌

Иван Дмитриевич Папани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4–1986 ○ 자연사

유빙 위에서 북극을 기록한 소련 극지 탐험의 얼굴

「우리는 균열과 거대한 수로에 둘러싸여 있다. 눈보라 속에서 유빙이 붕괴하면 탈출은 어려울 것이다…」 — 1938년 1월 29일, 파파닌의 일기.

세계 최초의 유빙 과학기지 '북극점-1'(1937–1938)을 이끈 소련의 극지 탐험가. 네 명의 연구원이 274일 동안 유빙 위에서 생활하며 북극 고위도 지역의 해양·기상 데이터를 수집한 이 원정은 유빙 표류 관측이라는 새로운 방법론을 개척했다. 오토 슈미트의 후임으로 북극항로 총국(글라브세브모르푸티, 1939–1946)을 이끌며 소련의 전략적 북극 해운을 총괄했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국방위원회 대표로서 북극 해상 수송을 지휘했다. 세바스토폴의 선원 가정에서 태어나 내전기 크림에서 붉은 파르티잔으로 활동했으며, 소련 영웅 칭호를 두 차례, 레닌 훈장을 아홉 차례 받았다. 전후에는 소련 과학아카데미 해양탐험부장을 35년간 맡으며 소련 해양학의 제도적 기반을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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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러시아 제국 해군 징집
  • 1918–1920크림에서 붉은 파르티잔 활동, 내전 참전
  • 1920–1922크림 체카 사령관, 하리코프 우크라이나 중앙집행위 군사령관
  • 1923–1932통신인민위원부에서 근무
  • 1932–1933프란츠요제프 제도 티하야만 극지기지장
  • 1934–1935첼류스킨곶 극지기지장
  • 1937–1938세계 최초 유빙기지 '북극점-1' 대장
  • 1939–1946북극항로 총국(글라브세브모르푸티) 국장
  • 1941–1945국방위원회(GKO) 북부 해상수송 전권대표
  • 1948–1951소련 과학아카데미 해양학연구소 부소장
  • 1951–1986소련 과학아카데미 해양탐험부장
  • 1952–1972소련 과학아카데미 내수생물학연구소장 (겸임)

게오르기 예브게니예비치 프로코피예프

Георгий Евгеньевич Прокофье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5–1937 ✕ 처형

경제 파괴 사건을 만들어 낸 부인민위원

1934년 미국 《타임》지는 프로코피예프를 "공장 고장이 나면 기술자를 '사보타주'로 총살하는 일을 관장하는" OGPU 산업 담당 인민위원으로 묘사했다.

OGPU 경제국장으로 소련 기술 전문가들을 겨냥한 '파괴 공작' 사건들을 조작한 체키스트. NKVD 제2부인민위원까지 올랐으나 야고다 실각 후 1937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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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2–1926OGPU 비밀국장, 이어 정보국장
  • 1926–1931OGPU 경제국장
  • 1932–1934OGPU 부의장
  • 1932–1934노농민병대 총국장 겸임
  • 1934–1936내무 제2부인민위원
  • 1936–1937체신 제1부인민위원
  • 1937체포와 처형

로베르트 페트로비치 에이데만

Роберт Петрович Эйдема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라트비아인 1895–1937 ✕ 처형

투하쳅스키 재판의 피고인이 된 라트비아 출신 내전 영웅

1920년 8월 7일 밤, 에이데만이 이끄는 우안집단은 드네프르 강을 도하해 카홉카 교두보를 점령했고, 페레코프에서 60km 떨어진 이 교두보는 브란겔군의 측면과 후방을 겨누는 창끝이 되었다.

라트비아 출신의 소비에트 군사 지휘관이자 작가로, 내전에서 제13군을 지휘하며 카홉카 교두보 방어와 브란겔군 격퇴에 결정적 역할을 한 내전 영웅이었다. 이후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교장과 오소아비아힘 의장으로 적군 간부 양성과 민간 국방훈련 체계를 구축했으나, 1937년 투하쳅스키 사건 피고인으로 총살되고 1957년 복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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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키예프 군사학교 졸업, 16시베리아 예비연대 소위
  • 1917–1918중앙시베리아 집행위원회 부의장, 볼셰비키 입당
  • 1918–1920내전: 제16·41·46소총사단장, 제13군 사령관, 카홉카 방어
  • 1924–1925시베리아 군관구 사령관
  • 1925–1932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교장 겸 군사위원
  • 1932–1937오소아비아힘 중앙평의회 의장
  • 1937체포(5.22), 투하쳅스키 재판 피고, 총살(6.12)

보리스 페트로비치 셰볼다예프

Борис Петрович Шеболдаев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5–1937 ✕ 처형

대테러 전야에 무너진 아조프-흑해 변경주의 당 주인

1934년 제17차 당대회에서 그는 키로프를 찾아가 '노인들'이 레닌의 유언대로 스탈린을 다른 자리로 옮기고 그대를 서기장으로 세우자고 한다는 뜻을 전했다.

1914년 입당한 고참 볼셰비키로, 니즈니볼가와 북캅카스 변경주 당 제1서기로서 집단화와 곡물 징발을 지휘했고 1932년 쿠반의 '검은 명부' 탄압에 그 이름이 남았다. 1934년부터 아조프-흑해 변경주 제1서기를 지냈으나, 1936년 여름 예브도키모프가 '셰볼다예프파' 숙청을 위해 파견되고 류시코프가 지역 NKVD를 맡으면서 포위되었다. 1937년 2~3월 중앙위원회 총회 보고로 격하되어 쿠르스크주로 밀려났고, 그해 6월 체포되어 10월 총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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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볼셰비키 입당
  • 1918–1920국내전기 캅카스에서 정치 활동
  • 1928–1931니즈니볼가 변경주 당 제1서기
  • 1931–1934북캅카스 변경주 당 제1서기
  • 1934–1937아조프-흑해 변경주 당 제1서기
  • 1937쿠르스크주로 격하, 6월 체포, 10월 총살

파벨 페트로비치 불라노프

Павел Петрович Булан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5–1938 ✕ 처형

야고다의 비서로 모스크바 재판을 준비하다 스스로 피고가 된 체키스트

1936년 모스크바 재판에서 피고들의 진술을 짜고 연습시켰으며, 이듬해 숙청되어 1938년 총살되었다.

펜자현 인사르의 산림 감시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1917년 프리놉스키의 도움으로 적위대 사무소에 들어갔고 1921년부터 체카에서 일했다. 1929년 알마아타에 유배된 트로츠키를 비밀리에 오데사로 옮겨 국외로 추방하는 일을 지휘했다. 오게페우 참사회와 NKVD의 비서, 특별협의회 책임비서로 야고다의 신임을 받았고, 1936년 지노비예프·카메네프 재판에서 피고마다 진술을 연습시켰다. 1937년 3월 해임되어 체포되었고, 제3차 모스크바 재판에서 야고다에 불리한 상세한 진술을 한 뒤 1938년 3월 15일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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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펜자현 체카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그해 말 전러시아 체카 비밀정치부로 옮겼다.
  • 1929알마아타에서 유배 중이던 트로츠키를 오데사로 비밀리에 이송하고 소련에서 추방하는 일을 지휘했다.
  • 1929–1934오게페우 참사회 비서, 이어 제1비서를 지냈다.
  • 1934–1937NKVD 비서와 NKVD 특별협의회 책임비서를 맡았다. 1936년 지노비예프·카메네프 재판의 대본을 작성하고 피고들의 진술을 연습시켰으며, 1937년 3월 해임·체포되었다.
  • 1938제3차 모스크바 재판에서 야고다에 대한 증언을 한 뒤, 3월 13일 사형을 선고받아 15일 총살되었다. 1988년 사후 복권되었다.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예조프

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Еж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5–1940 ✕ 처형

‘피의 난쟁이’, 당 인사기구가 키운 대숙청의 집행자

“그보다 더 이상적인 집행자는 모른다. 그에게는 멈출 줄 모른다는 것 하나만이 흠이다.” 그의 후원자 이반 모스크빈이 사위 레프 라즈곤에게 한 말

예조프는 1895년 코브노 현에서 툴라 출신 농민 아버지와 리투아니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922·1924년 서류에는 페테르부르크 출생의 러시아 노동자 가정, 입당 시기도 1917년 3월로 적혔지만 기록과 본인의 심문 진술은 어긋난다. 실제로는 1917년 8월 3일 비테프스크에서 입당해 당 인사기구에서 성장했다. NKVD 수장으로서 스탈린 지도부 아래 1937~38년 대량 체포·처형 작전을 조직했다. 1936~38년 국가 범죄로 최소 130만 명이 체포되고 68만 1692명이 처형되었으며 굴라크 수용자는 68만 5201명 늘었다. 경력 체키스트는 아니었으나 고문에 가담했고, 1939년 4월 10일 체포되어 1940년 2월 총살됐다. 1998년 복권은 거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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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2–1934당 기구에서 간부 인사 담당으로 성장
  • 1934–1936키로프 사건 수사 감독
  • 1936.09내무인민위원
  • 1936–1938대외 작전 지휘: 스페인 주재 NKVD를 관할하고 국외 「트로츠키주의자」 색출 작전을 확대
  • 1937–1938대숙청 집행: 「예조프시나」
  • 1938.11수리교통인민위원으로 전보(사실상 실각)
  • 1939체포
  • 1940처형

블라디미르 예피모비치 체사르스키

Владимир Ефимович Цесарски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유대계) 1895–1940 ✕ 처형

대숙청의 회계장부를 쥐었던 예조프의 심복

1938년 여름, 심사를 기다리는 대량작전 「앨범」이 중앙에 10만 명분 넘게 쌓였다. 그 서류 더미에서 유죄와 형량을 확정하던 회계등록부장이 체사르스키였다.

오데사의 사무원 가정에서 태어나 1915년부터 사회혁명당과 보로트비스트를 거쳐 1919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30년대 당 중앙위 기구에서 일하다 1935년부터 중앙위 서기 예조프의 보고담당 보좌관이 되었고, 예조프가 내무인민위원부를 맡자 그를 따라 들어가 그를 위해 신설된 인민위원 특임전권위원 자리를 거쳐 회계등록을 총괄하는 GUGB 제8부장이 되었다. 대량작전의 「앨범」 심사와 처형 명부 실무가 그의 손을 거쳤고, 1937년 국가보안 상급소좌로 승진했다. 1938년 비밀정치부(제4부)장과 모스크바주 NKVD 국장을 지낸 뒤 우흐토-이젬스키 수용소장으로 밀려났고, 예조프 몰락 직후인 1938년 12월 체포되어 1940년 1월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총살되었다. 2002년 복권이 거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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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19사회혁명당·보로트비스트 활동가
  • 1930–1935당 중앙위 배치부·공업부 실무 간부
  • 1935–1937당 중앙위 서기 예조프의 보고담당 보좌관
  • 1936.10–11내무인민위원 직속 특임전권위원
  • 1936.11–1938.03GUGB 제8부(회계등록)부장 · 「앨범」 심사·명부 실무
  • 1938.03–05GUGB 제4부(비밀정치)부장
  • 1938.05–09모스크바주 NKVD 국장
  • 1938.09–12우흐토-이젬스키 수용소장

이사크 일리치 샤피로

Исаак Ильич Шапиро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895–1940 ✕ 처형

대숙청의 문서와 수치를 관리한 예조프의 비서실장

1938년 11월, 예조프가 NKVD를 잃은 지 며칠 만에 비서실장 샤피로가 체포되었다 — 대숙청의 모든 수치를 관리하던 사람이 이번에는 자기 상관을 겨눈 조서의 진술자가 되었다.

재무인민위원부와 소비에트통제위원회, 당 중앙위 기구를 거친 경제 관료 출신으로, 1937년 1월 예조프를 따라 NKVD에 들어가 비서실 부실장·실장과 제9특별부장을 지냈고, 1938년부터는 작전 기록·등록·통계를 총괄하는 제1특별부장을 맡았다. 대숙청의 문서와 수치가 그의 손을 거쳐 예조프의 책상에 올랐고, 그 공로로 적성훈장과 명예 체키스트 휘장을 받았다. 예조프 몰락 직후인 1938년 11월 13일 체포되어 옛 상관에게 불리한 진술을 남기고 1940년 2월 군사법정에서 총살형을 선고받아 처형되었으며,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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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2적군 정치위원 — 여단 코미사르
  • 1922–1929러시아공화국 재무인민위원부·고스플란 근무
  • 1930년대소비에트통제위원회 부부장, 당 중앙위 기구 부문장
  • 1937.01–07NKVD 비서실 부실장
  • 1937–1938NKVD 비서실장(겸임) · GUGB 제9특별부장
  • 1938.03–11NKVD 제1특별부장 — 작전 기록·등록·통계 총괄
  • 1937–1938러시아공화국 최고회의 대의원

이즈라일 야코블레비치 다긴

Израиль Яковлевич Даги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5–1940 ✕ 처형

북캅카스 NKVD 국장에서 정부 경호부장으로, 대숙청 집행자

1938년 11월, 정부 경호부장 다긴은 베리야의 NKVD 내부 숙청으로 체포되었다. 크렘린을 지키던 자가 루뱐카의 지하 감옥으로 끌려갔다.

예브도키모프의 측근으로 북캅카스 NKVD에서 대숙청기 대량 체포를 지휘한 국가보안 간부. 정부 경호부장으로 크렘린을 지키다 1938년 베리야에게 체포되어 1940년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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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19차르군 복무, 적위대·지하당 활동
  • 1919–1924니콜라예프·헤르손·크림 체카 주요 직책
  • 1924–1934북캅카스 OGPU에서 테르스크 주·변경주 보안 책임자로 승진
  • 1934–1937북캅카스(오르조니키제) 변경주 NKVD 국장
  • 1937.04–06고리키 주 NKVD 국장
  • 1937–1938GUGB NKVD 제1부(정부 경호) 부장
  • 1938–1940체포, 재판, 총살

지노비 마르코비치 우샤코프

Зиновий Маркович Ушак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5–1940 ✕ 처형

투하쳅스키의 자백을 받아낸 심문관, 자기가 맞고 나서야 매를 말했다

자신이 심문받는 자리에서 그는 인정했다. “나는 레포르토보에서 당의 적들을 직접 때려야 했지만, 맞는 자가 겪는 고통은 한 번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 자리에서 그를 때린 것도 같은 기관이었다.

1895년 키예프현의 유대인 목수 집안에서 태어나 헤데르만 마치고 열세 살부터 일했다. 1920년 키예프 체카에 들어가 우크라이나에서 십사 년을 보냈고, 1937년 1월 모스크바 국가보안총국 특별부 부부장이 되었다. 그해 봄 붉은군대 ‘군사파시스트 음모’ 사건의 주임 심문관으로 투하쳅스키와 야키르, 우보레비치의 자백을 만들어냈다. 5월 25일 투하쳅스키의 첫 심문을 맡았고 그 조서에는 핏자국이 남았다. 1938년에는 아직 붙지 않은 에이헤의 갈비뼈를 이용해 그를 고문했다. 그해 9월 하바롭스크에서 체포되어 1940년 1월 26일 총살됐다. 복권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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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키예프 체카
  • 1935–1936벨로루시 NKVD 특별부 부부장
  • 1937.01국가보안총국(GUGB) 특별부 부부장
  • 1937‘군사파시스트 음모’ 사건 주임 심문관
  • 1937.09국가보안소장
  • 1938.09하바롭스크에서 체포
  • 1940.01군사합의회의 사형 선고, 총살

리하르트 구스타보비치 조르게

Рихард Густавович Зорге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독일 1895–1944 ✕ 처형

도쿄에서 전쟁의 시간표를 훔친 스파이

세계대전은 내 생애에 가장 깊은 영향을 끼쳤다. 다른 어떤 요인보다 오로지 이 전쟁 때문에 나는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 1927년 자서전에서

독일 특파원으로 위장해 도쿄에서 활약한 소련 정보원. 바르바로사 작전을 경고하고 일본의 남방 진출을 확인, 시베리아 사단의 모스크바 투입을 이끌어냈다. 1944년 처형, 1964년 소련영웅 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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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1929코민테른·적군 정보부 요원
  • 1930–1933상하이 정보망
  • 1933–1941도쿄, 독일 대사관의 신임을 얻은 특파원
  • 1941.05–06바르바로사 경고 타전, 묵살
  • 1941.09「일본은 북진하지 않는다」, 시베리아 사단 이동의 근거
  • 1941.10체포
  • 1944.11도쿄에서 처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