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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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트르 니콜라예비치 두르노보

Пётр Николаевич Дурново

1905년 혁명을 무력 진압하고 세계대전의 파국을 예견한 제정 내무장관

두르노보는 1914년 각서에서 경고했다: '러시아에서 정치혁명은 불가능하며, 모든 혁명운동은 필연적으로 사회주의 운동으로 변질될 것이다.'

표트르 두르노보는 경찰국장(1884~1893)과 내무장관(1905~1906)을 지낸 러시아 제국의 보수 관료로, 1905년 혁명을 가혹하게 진압해 '반혁명의 도살자'로 불렸다. 해군 장교에서 경찰 수장이 되어 법무부와 내무부에서 승진했고, 장관 시절 비테 총리와 반목하다 함께 물러났다. 국가평의회에서는 1906~1915년 우파 그룹을 이끌었고, 1911년 스톨리핀의 서부 지방 젬스트보 법안을 부결시키는 데 앞장섰다. 1914년 2월 니콜라이 2세에게 올린 '두르노보 각서'에서 독일과의 전쟁이 군사적 패배와 군주정 붕괴, 사회혁명으로 끝나리라 정확히 예견했고, 이는 1917년에 현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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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0해군사관학교 졸업, 태평양·발트 함대 복무
  • 1870군사법률학교 졸업 후 법무성 검사보로 전임
  • 1884–1893내무성 경찰국장
  • 1893–1900원로원 의원
  • 1900–1905내무차관 (우편·전신 담당)
  • 1905.10–1906.04내무장관 (비테 내각)
  • 1906–1915국무회의 의원, 우파 그룹 지도자

뱌체슬라프 콘스탄티노비치 폰 플레베

Вячеслав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фон Плеве

짜르 체제를 지키려 "작은 승리의 전쟁"을 요구한 최후의 강경파 내무장관

"혁명을 막으려면 작은 승리의 전쟁이 필요합니다" — 러일전쟁을 앞두고 세르게이 비테에게 했다고 전해지는 말.

독일계 귀족 가문 출신이나 러시아 정교도로 성장한 플레베는 1881년 알렉산드르 2세 암살 후 경찰국장으로 발탁되어 '인민의 의지'를 분쇄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1902년 내무장관에 오른 그는 농민 봉기를 무력 진압하고 지방 자치기관(젬스트보)을 옥죄었으며, 경찰 주도의 노동운동(주바토프시나)을 시험했다가 곧 폐기하는 등 일관된 강경 노선으로 체제를 방어했다. 1904년 7월 사회혁명당 전투조직의 예고르 사조노프가 던진 폭탄에 암살당했고, 그의 죽음은 스뱌토폴크-미르스키의 '신뢰의 시대'로 가는 문을 열어 피의 일요일 직전의 정치적 전환을 촉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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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7법무부 입부, 검사보로 임관
  • 1879페테르부르크 사법부 검사
  • 1881경찰국장
  • 1884원로원 의원
  • 1885내무차관
  • 1894국무장관 겸 법전편찬 총괄
  • 1899핀란드 대공국 담당 장관-국무비서관
  • 1902내무장관 겸 헌병단장

드미트리 표도로비치 트레포프

Дмитрий Фёдорович Трепов

진압 명령과 개혁 약속을 한 손에 쥔 1905년의 얼굴

「탄약을 아끼지 말라」는 초안을 읽은 모솔로프가 "제정신이냐"고 묻자, 트레포프는 답했다. "제정신이네. 내일이면 발포해야 할 거야. 지금까지 나는 피를 흘리지 않았어. 이 불행을 막을 유일한 방법이 이 문구라네."

악명 높은 페테르부르크 시장의 아들로 태어나 모스크바 경찰을 거쳐 1905년 혁명기 제국 최고의 실력자로 부상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총독, 내무차관, 경찰 및 헌병대 사령관을 동시에 겸하며 독재적 권한을 행사했다. 1905년 10월 "빈 총알 쓰지 말고 실탄을 아끼지 말라"는 명령은 혁명의 상징이 되었고, 바로 그 순간 그가 밀어붙인 10월 선언은 시민적 자유를 약속했다. 선언 이후 궁정 경비사령관으로 밀려났지만 니콜라이 2세의 가장 신임받는 조언자로 남았고, 1906년 심부전으로 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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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4파제스키 군단 졸업, 근위기마연대 배속
  • 1877–1878러시아-튀르크 전쟁 참전, 텔리시 전투에서 부상
  • 1896–1905모스크바 경찰총감
  • 1900소장 진급
  • 1905.01–10상트페테르부르크 총독 (비상대권)
  • 1905.05–10내무차관, 경찰·헌병대 사령관
  • 1905.10–1906.09황실 궁정 경비사령관

세르게이 바실리예비치 주바토프

Сергей Васильевич Зубатов

차르 체제 안에서 노동운동을 길들이려 한 경찰사회주의의 창안자

1917년 3월, 점심 식사 중 미하일 대공 퇴위 소식이 전해지자, 말없이 옆방으로 걸어가 권총 자살했다.

모스크바 오흐라나 국장(1896–1902)과 경찰국 특별부장(1902–1903)을 지내며, 유럽식 비밀수사 체계를 러시아에 도입한 정치경찰 근대화의 주역이다. 혁명 이론에 정통했던 그는 탄압만으로 혁명을 막을 수 없다고 보아, 노동자 경제투쟁을 정부가 중재하는 친정부 합법노조, 이른바 '주바톱시치나(경찰사회주의)'를 창안했다. 1903년 오데사 총파업으로 실험이 무너지고 플레베에게 축출되었으나, 사회개혁을 통한 전제체제 유지라는 그의 구상은 혁명 전야 구체제가 내놓은 가장 독창적인 대응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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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6–1889모스크바 오흐라나의 비밀정보원으로 혁명조직 침투
  • 1889–1896모스크바 오흐라나 특별임무관, 부국장으로 승진
  • 1896–1902모스크바 오흐라나 국장, 정치사찰 체계 근대화
  • 1901–1903친정부 합법노조 설립 — '경찰사회주의' 주도
  • 1902–1903경찰국 특별부장, 전국적 오흐라나 네트워크 구축
  • 1903–1917플레베에 의해 해임·유배, 후일 사면받았으나 공직 복귀 거부

블라디미르 표도로비치 준콥스키

Владимир Фёдорович Джунковский
러시아 제국 국가기관 러시아 러시아 1865–1938 ✕ 처형

오흐라나를 개혁하고 라스푸틴을 고발한 마지막 제국 헌병대 사령관

1915년, 니콜라이 2세 앞에서 라스푸틴의 주벽과 황실 모독 발언을 낱낱이 보고했다. 황제의 유일한 반응은 "경질"이었다.

제국 근위대 장교에서 모스크바 주지사로, 다시 제국 정치경찰의 수장으로 승진한 실무형 귀족 관료. 1913년 헌병대 사령관에 취임하자 지방 오흐라나 지부를 대폭 폐지하고 군대·학교 내 비밀정보원 제도를 금지하는 개혁을 단행했다. 1915년 라스푸틴의 추문을 황제에게 직보했다가 해임되었고, 혁명 후에는 오게페우(OGPU)의 비밀 고문으로 「트레스트」 작전을 자문했다. 그의 방대한 회고록은 제정 말기 정치사와 경찰 제도의 1차 사료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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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1–1905세르게이 대공 전속 부관 (모스크바 총독 보좌)
  • 1905.08–11모스크바 부주지사
  • 1905–1913모스크바 주지사, 소장 진급, 민생·문화 사업 주도
  • 1913–1915내무차관 겸 헌병대 사령관, 오흐라나 개혁 단행
  • 1915.08라스푸틴 보고 후 전격 해임
  • 1915–1917서부전선: 제15시베리아사단장, 제3시베리아군단장, 중장
  • 1918–1921체포·수감, 혁명재판 5년형, 1921년 석방
  • 1920년대오게페우(OGPU) 비밀 고문, 「트레스트」 작전 자문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 발크

Александр Павлович Балк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페트로그라드 시장, 2월 혁명의 물결 앞에 선 경찰 관료

2월 24일, 발크는 하발로프에게 경찰이 '군중의 이동과 집결을 멈출 수 없다'고 보고하고 군에 전권을 이양했다.

알렉산드르 발크는 제정 러시아의 군인이자 경찰 관료로, 16년간 바르샤바 경찰에서 근무하며 도시 치안을 책임졌다. 1916년 11월 페트로그라드 시장(градоначальник)에 임명되어 식량 공급과 교통 문제에 적극 대처했으나, 1917년 2월 혁명 발발 나흘 만에 하발로프에게 경찰이 군중을 통제할 수 없다고 보고하고 군에 전권을 넘긴 뒤 체포되었다. 내전기 백군에 가담했고, 망명길에 올라 브라질의 한 수도원 양로원에서 91세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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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6파블롭스크 군사학교 졸업, 제16라도가 보병연대 배속
  • 1887근위 볼린스키 연대로 전속
  • 1903–1915바르샤바 부경무총감 (1906 정식 임명, 1912 소장 진급), 독일군 점령 후 모스크바 주재
  • 1916.11–1917.02페트로그라드 시장 (градоначальник)
  • 1917.02–062월 혁명 중 체포,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수감, 임시정부에 의해 석방
  • 1918–1920백군 의용군 및 남러시아군 참전, 크림에서 철수
  • 1920–1945유고슬라비아 망명, 볼린스키 연대 퇴역병회 및 러시아 장교협회 베오그라드 지부장
  • 1945–1957브라질 이주, 상파울루 근교 오자스쿠의 수도원 양로원에서 사망

모이세이 솔로모노비치 우리츠키

Моисей Соломонович Урицки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러시아 러시아 1873–1918 ✕ 암살

붉은 테러를 막으려 했으나 그 방아쇠가 된 페트로그라드 체카 의장

「나는 결코 무른 사람이 아니다. 다른 방법이 없다면 내 손으로 모든 반혁명분자를 쏘아 죽이고도 마음이 평온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사형이 비효율적이기 때문에 반대한다」 — 페트로그라드 체카 동료들에게

체르카시 유대인 가정 출신. 키예프 대학 법학부 졸업 후 1898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 처음에는 멘셰비키로 활동했다. 1917년 8월 제6차 당대회에서 볼셰비키에 합류해 중앙위원이 되었고, 10월 무장봉기 당시 군사혁명당중앙에서 봉기를 지휘했다. 1918년 3월 페트로그라드 체카 초대 의장에 임명되었으나 인질 구금과 초법적 처형에 반대하며 모스크바보다 절제된 노선을 취했다. 1918년 8월 30일 암살당했으며, 같은 날 레닌 피격과 함께 적색 테러 공식 선포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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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0년대키예프에서 사회민주주의 운동 시작
  • 1897키예프 대학 법학부 졸업, 군 복무 중 선동 혐의 체포
  • 1901–1905야쿠티야 올료크민스크 8년형 유형, 1905년 탈출
  • 1906–1914볼로그다·아르한겔스크 유형, 1912년 빈 SD 회의 참가
  • 1914–1917망명: 『나셰 슬로보』 특파원, 스톡홀름 체류
  • 1917.05귀국, 메즈라욘치(지역간파) 합류
  • 1917.07–08제6차 당대회: 메즈라욘치와 함께 볼셰비키 합류, 중앙위원
  • 1917.10–12군사혁명당중앙·VRK 위원, 제헌의회 선거관리위원
  • 1918.03–08페트로그라드 체카 초대 의장, 내무위원 겸임

야코프 미하일로비치 유롭스키

Яков Михайлович Юровски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78–1938 ○ 위궤양 천공

마지막 차르를 손수 사살한 체카 집행자

니콜라이에게 말했다.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가 당신을 사살하기로 결정했다고. 그가 "뭐라고?" 하며 알렉세이를 돌아보는 순간, 나는 그를 쏘아 즉사시켰다.

톰스크 현의 유대인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시계공이 되었고, 1905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18년 7월 이파티예프 하우스 사령관으로서 니콜라이 2세와 로마노프 일가의 처형을 직접 지휘하고 차르를 자신의 마우저 권총으로 사살했으며, 시신의 은닉과 훼손까지 진두지휘했다. 내전 후 예카테린부르크 현 체카 의장과 모스크바 구역 체카 책임자를 역임했고, 1921년부터 국가귀금속보관소(Gokhran) 금 부서장으로 일하며 부패 척결에서 신망을 얻었다. 말년에는 모스크바 폴리테크닉 박물관장을 지냈으며, 대숙청 와중에 딸 리마가 트로츠키주의자로 체포된 직후인 1938년 위궤양 천공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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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톰스크에서 볼셰비키 입당
  • 1912체포되어 예카테린부르크로 유배; 사진관 개업
  • 1917예카테린부르크 소비에트 위원; 군사부에서 골로쇼킨의 부관
  • 1918이파티예프 하우스 사령관; 7월 17일 로마노프 일가 처형 지휘
  • 1918–1919모스크바 체카 콜레기움 위원, 구역 체카 책임자
  • 1919예카테린부르크 현 체카 의장
  • 1921국가귀금속보관소(Gokhran) 금 부서장
  • 1928–1933폴리테크닉 박물관장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케드로프

Михаил Сергеевич Кедр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78–1941 ✕ 처형

체카 특별부를 이끌며 북부 적색테러와 최초의 강제수용소 체계를 구축한 올드 볼셰비키

“저는 결백하게 고통받고 있습니다. 믿어주십시오. 시간이 증명할 것입니다.” — 1939년 레포르토보 감옥에서 안드레예프에게 보낸 편지. 1956년 흐루쇼프가 제20차 당대회 비밀연설에서 이 편지를 낭독했다.

볼셰비키 군사조직에서 활동하다 1918년 9월 체카 군사부장, 이후 특별부장이 되어 북부 전선의 적색테러를 총괄했다. 아르한겔스크·볼로그다에서 수천 명을 처형하고, 홀모고리 절멸수용소를 세웠으며, 솔로베츠키 수도원을 폐쇄해 초기 강제노동수용소로 전환했다. 그의 아내 올가의 자매들은 니콜라이 포드보이스키와 결혼했고 아르투르 아르투조프의 어머니였다. 1921년 건강 악화로 체카를 떠난 뒤 경제·보건·스포르틴테른 등 변방 직책을 전전하다 1939년 체포되었고, 1941년 7월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 베리야의 지시로 석방되지 못한 채 사라토프에서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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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1905RSDDP 가입, 코스트로마 노동자대 조직, 모스크바 봉기 무기 공급
  • 1912–1916스위스 망명, 의학 학위 취득, 레닌의 측근
  • 1917군사조직 위원, 『솔다츠카야 프라브다』 편집, 군 해산 인민위원
  • 1918.09–1919체카 군사부장 → 특별부장 (내전기 군내 숙청 총괄)
  • 1920–1921체카 북부 전권대표: 홀모고리·페르토민스크·솔로베츠키 수용소 설립
  • 1927–1931적색스포츠인터내셔널 의장
  • 1939–1941체포·고문, 무죄 판결에도 석방되지 않고 총살

테렌티 드미트리예비치 데리바스

Терентий Дмитриевич Дерибас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3–1938 ✕ 처형

극동의 보안 총독

1937년 8월 11일, 예조프가 류시코프의 전보를 스탈린에게 전달하자, 스탈린은 여백에 직접 써넣었다. "데리바스를 체포해야 할 것이다. 스탈린." 몰로토프와 보로실로프가 '찬성'을 덧붙였고, 데리바스는 다음 날 체포되었다.

볼셰비키 체키스트 출신으로 1929년부터 극동 OGPU-NKVD 전권대표를 맡아 대일 방첩 작전과 BAM 강제노동 건설을 지휘했다. 8년간 '극동의 총독'으로 불렸으나 대숙청에 휩쓸려 1938년 처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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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1927GPU·OGPU 비밀국장
  • 1927–1929OGPU 비밀작전총국 제1부국장
  • 1929–1934극동변경주 주재 OGPU 전권대표
  • 1933–1934BAM 건설 책임자
  • 1934–1937극동변경주 NKVD 관리국장 겸 극동군 특별부장
  • 1937–1938체포, 재판과 처형

미하일 아브라모비치 트릴리세르

Меер Абрамович Трилиссер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3–1940 ✕ 처형

소비에트 해외정보기관의 설계자, 이녜의 7년

베를린에서 중요한 요원과 접선하기 위해 역사학 교수로 위장했을 때, 단벌 신사 트릴리세르에겐 양복이 하나뿐이었다. 새 옷을 급히 맞추고 넥타이를 맨 그날이 그의 진짜 '출장'이었다.

아스트라한의 가난한 구두장이 집안에서 태어나 18세에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한 직업혁명가. 1905년 카잔과 페테르부르크에서 볼셰비키 전투조직을 이끌었고, 스베아보르크 봉기를 조직했으며, 5년간 슐리셀부르크 감옥에서 카토르가를 보냈다. 1922년부터 1929년까지 GPU·OGPU 해외부(INO) 부장으로서 소비에트 대외정보망의 토대를 구축했고, 1926년 OGPU 부의장까지 올랐다. 1938년 체포되어 1940년 총살당했고, 1956년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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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RSDLP 입당, 직업혁명가
  • 1905–1907카잔·페테르부르크 전투조직, 스베아보르크 봉기 주도
  • 1909–19145년 카토르가, 이후 이르쿠츠크주 영구유형
  • 1917–1921시베리아 체카·아무르 혁명위 활동, 극동 첩보망 구축
  • 1922–1929GPU·OGPU 해외부(INO) 부장 — 대외정보 체계 창설
  • 1926–1929OGPU 부의장 겸임
  • 1930–1934노농감찰 부인민위원, 중앙통제위원회 상임위원
  • 1935–1938코민테른 집행위 간부위원 (필명 '모스크빈')

나프탈리 아로노비치 프렌켈

Нафталий Аронович Френкель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3–1960 ○ 자연사

죄수에서 총국장으로, 제 침대에서 죽은 굴라크 행정가

솔제니친이 기록한 프렌켈의 공식: "수감자에게서 처음 3개월 안에 모든 것을 취하라 — 그 이후로는 필요 없다."

콘스탄티노플 태생의 유대계 상인으로, 오데사에서 '흑해의 목재왕'이라 불리던 밀수업자였다. 1924년 솔로프키 죄수로 수용된 후 노동량에 따라 식량을 차등 배급하는 '식량 기준제'를 제안해 1년 만에 수용소 행정가로 발탁되었다. 이후 백해-발트 운하, BAM, 철도건설총국을 이끌며 굴라그 강제노동 체계의 실질적 설계자가 되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 볼가 록카다 철도를 6개월 만에 완공해 전황에 기여했으며, 레닌훈장 3회를 받고 중장으로 퇴역해 모스크바에서 병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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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1927솔로프키 수용소 죄수에서 행정가로
  • 1931–1933백해-발트 운하 공사 책임자
  • 1933–1937BAM 수용소장
  • 1937–1947NKVD·MVD 철도건설총국장
  • 1947중장 계급과 연금으로 퇴역

이반 크세노폰토비치 크세노폰토프

Иван Ксенофонтович Ксенофонт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4–1926 ○ 자연사

체카의 영원한 2인자, 혁명재판의 설계자

“크리스털 같은 청렴함과 당에 대한 헌신… 타고난 부드러움이 혁명의 이익이 요구하는 곳에서는 무자비함과 공존했다.” — 동료 체키스트들의 증언, 1926년

스몰렌스크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모스크바 방직공장 노동자로 혁명운동에 투신한 볼셰비키. 1917년 12월 체카 창설 멤버로 합류해 제르진스키의 비서를 맡았고, 1919년부터 1921년까지 체카 제1부의장 겸 특별재판소장으로서 좌파SR 반란 진압, '전술중앙' 재판, 크론슈타트 봉기 진압을 직접 지휘했다. 내전기 내내 제르진스키·페테르스·라치스와 함께 '체카의 불변 지도핵심 4인'으로 불렸다. 1922년부터 1925년까지 당 중앙위원회 업무관리자로 스탈린의 기구 장악을 보좌했으며, 말년에는 사회보장 부인민위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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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RSDRP 입당, 볼셰비키 분파
  • 1905–1914모스크바·리가에서 혁명 활동, 수차례 체포
  • 1914–1917서부전선 복무, 네스비시·슬루츠크 소비에트 의장
  • 1917.12체카 창설 멤버, 제르진스키 비서
  • 1919–1921체카 제1부의장 겸 특별재판소장
  • 1921크론슈타트 봉기 진압 참여
  • 1922–1925RKP(b) 중앙위원회 업무관리자
  • 1925–1926RSFSR 사회보장 부인민위원

표트르 예피모비치 셰틴킨

Пётр Ефимович Щетинки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4–1927 ○ 사인 논란

예니세이현의 파르티잔군을 이끌고 1921년 몽골에서 운게른을 넘겨받은 시베리아 파르티잔 지휘관

1884년 랴잔현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목수로 일했고, 1906년 징집되어 아친스크의 제29 시베리아 소총연대에서 복무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성 게오르기 십자 훈장 네 개를 모두 받아 장교가 되었고 1917년 이등대위에 올랐다. 1918년 3월 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에 입당했고, 아친스크가 백군에 넘어가자 지하로 들어가 1919년 1월 파르티잔 활동을 시작했다. 다른 파르티잔 부대와 합친 파르티잔군의 참모장으로 타이가를 700킬로미터 행군해 9월 미누신스크를 차지했다. 1921년 8월 그의 부대가 몽골에서 운게른을 넘겨받았다. 그 뒤 시베리아 국경수비대 참모장을 지냈고, 몽골 군사 고문으로 있던 1927년 울란바토르에서 숨졌다. 사인은 출처마다 엇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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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징집, 제29 시베리아 소총연대 복무
  • 1917이등대위
  • 1918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 입당, 아친스크 적위대 지휘관
  • 1919파르티잔군 부사령관 겸 참모장
  • 1920예니세이 소총 사단장
  • 1921몽골 원정 부대 지휘관
  • 1922–1926시베리아 국경수비대 참모장
  • 1926–1927몽골 인민공화국 군사 고문

솔로몬 그리고리예비치 모길렙스키

Соломон Григорьевич Могилевски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5–1925 ✕ 항공사고

소비에트 대외정보기관의 첫 책임자: 이녜의 토대를 놓은 8개월

1921년 초대 이녜 부장으로 취임한 모길렙스키에게 주어진 것은 겨우 몇 명의 요원과 모스크바의 허름한 사무실이 전부였다. 그로부터 불과 8개월 후 소비에트 해외정보기관의 첫 거점망이 유럽과 중동에 뿌리를 내렸다.

파블로그라드의 유대인 상인 집안에서 태어나 18세에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한 직업혁명가. 1904년 체포된 뒤 스위스로 망명해 제네바에서 레닌을 만났고, 그의 추천으로 볼셰비키 분파에 합류했다. 1919년 전연방비상위원회(체카)에 배치되어 모스크바 체카와 특별부에서 활동했으며, 1921년 8월 GPU 해외부(INO)의 초대 부장으로 임명되어 소비에트 대외정보기관의 기초 조직을 구축했다. 1922년 자캅카스 GPU 전권대표 겸 의장으로 전임되어 튀르키예·이란 방면 첩보망을 지휘하고 1924년 그루지야 8월봉기 진압에 참여해 적기훈장을 받았다. 1925년 3월 트빌리시 근방에서 발생한 의문의 항공기 폭발 사고로 먀스니코프, 아타르베코프와 함께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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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파블로그라드 RSDLP 조직 입당
  • 1904체포, 이후 스위스 망명 — 제네바에서 레닌과 만남
  • 1906–1916러시아 귀국 후 예카테리노슬라프 선전활동, 대학 수학, 군 복무
  • 1917민스크 RSDLP 위원, 4월 당 대회 대의원, 10월 혁명 참가
  • 1917–1919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모스크바·키예프 사법기관, 제12군 혁명재판소
  • 1919–1920모스크바 체카, 좌파 SR 음모 적발; GPU 특별부 전권대표
  • 1921–1922GPU 해외부(INO) 부장 — 소비에트 대외정보기관 초대 책임자
  • 1922–1925자캅카스 GPU 전권대표 겸 의장 — 튀르키예·이란 첩보, 1924년 8월봉기 진압

이반 알렉세예비치 아쿨로프

Иван Алексеевич Акул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8–1937 ✕ 처형

소련 검찰제도의 창설자, 국가보안과 사회주의 적법성의 틈바구니에서

부하린의 미망인은 회고했다: '청렴하고 의지가 강한 아쿨로프가 OGPU의 질서를 바로잡기 시작했지만 곧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빈민가 출신으로 1907년 볼셰비키에 입당한 이반 아쿨로프는 지하운동, 내전기 전선위원회, 우랄·시베리아·크림·우크라이나의 당 조직 책임자를 거친 직업혁명가였다. 1933년 소련 검찰청이 신설되자 초대 검찰총장에 임명되어 사회주의 적법성이라는 새 제도의 틀을 구축했으며, 국가보안기구와의 긴장 속에서 검찰의 독자적 영역을 개척했다. 그러나 키로프 암살 이후 긴급법 제정에 연루되었고, 이윽고 자신이 구축에 참여한 탄압 기구에 희생되어 1937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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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RSDLP(b) 입당 · 상트페테르부르크 지하운동
  • 1917–1918우랄 지역당 위원회 서기
  • 1918–1920뱟카·오렌부르크 현당 위원회 서기
  • 1920–1921키르기스 당뷰로 서기
  • 1921–1922크림 지역당 위원회 서기
  • 1922–1927도네츠크 광산노조 위원장
  • 1927–1931전우크라이나 노조평의회 의장
  • 1930–1931노농감찰 부인민위원 · 중앙통제위원회 간부
  • 1931–1932OGPU 제1부의장
  • 1933–1935소련 검찰총장 (초대)
  • 1935–1937소련 중앙집행위원회 서기

라자리 이오시포비치 코간

Лазарь Иосифович Кога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9–1939 ✕ 처형

굴라크의 초대 수장이자 벨로모르 건설 책임자

1932년 벨로모르 운하 현장을 찾은 미코얀에게 코간이 물었다. "'수감자'는 모욕적이고 '라게르니크'는 무미건조합니다. 그래서 생각해낸 말이 '카날로아르메예츠(운하군인)'입니다." 미코얀이 동의했고, 이 말에서 약칭 '제카(з/к)'가 탄생했다.

시베리아 유대 상인 집안 출신의 아나코-코뮤니스트로, 1908년 무장강도로 사형 선고를 받고 복역했다. 1918년 볼셰비키에 합류, 체카와 국경경비대를 거쳐 1930년 신설된 굴라크의 초대 수장이 되어 소비에트 강제노동 체계의 제도화를 이끌었다. 1931년부터 백해-발트 운하 건설을 지휘, 약 17만 명의 수용자를 동원해 2년 만에 227km 수로를 완공했으나 수만 명이 사망했다. 야고다 계열로 분류돼 1938년 체포, 1939년 총살됐으나 1956년 복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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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32OGPU 굴라크 수장
  • 1931–1933백해-발트 운하 건설 책임자
  • 1932–1936굴라크 부수장
  • 1936–1938수상운수 부인민위원
  • 1938–1939체포와 처형

미하일 이바노비치 리조프

Михаил Иванович Рыж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9–1939 ✕ 심문 중 사망

예조프 곁에서 부인민위원까지 오른 뒤 심문실에서 죽어 간 측근

1938년 12월 체포되어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심문 중에 사망했다. 예조프의 조서가 공범으로 꼽은 다섯 이름 가운데 하나였다.

탐보프 현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918년 볼셰비키에 입당했고, 군사위원과 군관구 행정직 등 군·행정 경력을 거쳐 모스크바시 행정에서 일했다. 예조프 시기인 1937년 7월 NKVD 총무경리국장이 되었고 곧 내무부인민위원으로 승진했으며, 그해 12월 소련 임업인민위원으로 옮겨 1938년 10월까지 재임했다. 국가보안 소좌 계급과 적성훈장을 받았고, 예조프의 비서 세라피마 리조바와 부부였다. 예조프 몰락 뒤인 1938년 12월 체포되었고, 예조프의 조서가 자기 음모 집단의 일원으로 꼽은 이름 가운데 하나였다. 1939년 1월 19일 불법 수사 방법이 동원된 심문 끝에 사망했으며, 1955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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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1925군사위원·군관구 행정직
  • 1930년대 초농업 행정과 모스크바시 행정 근무
  • 1937.07–08NKVD 총무경리국(AKhU)장
  • 1937.08–12소련 내무부인민위원
  • 1937.12–1938.10소련 임업인민위원

아르투르 흐리스티아노비치 아르투조프

Артур Христианович Артуз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1–1937 ✕ 처형

소련 첩보·방첩의 창립자, '트레스트' 작전의 두뇌

1925년 모스크바의 한 안전가옥에서 시드니 라일리가 GPU 요원들에게 둘러싸이자, 아르투조프는 옆방에서 전 과정을 지켜보았다고 전해진다.

체카 방첩부(KRO)를 창설하고 백군 망명 조직을 무력화한 '트레스트' 작전을 설계했다. 1931년부터 해외첩보부(INO)를 이끌며 대외 불법 첩보망을 확장했고, 대숙청 속에서 1937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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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RSDLP(b) 입당, 육해군 동원해제 관리국 근무
  • 1918모스크바 군관구 군사정보국장, 군사통제부 활동부장
  • 1919–1922체카 특별부 전권위원 → 특별부 작전과장 → 부부장
  • 1922–1927GPU·OGPU 방첩부(KRO) 부장 — '트레스트', '신디카트-2', '타란텔라' 작전 지휘
  • 1927–1930OGPU 비밀작전국(SOU) 부국장 보좌관
  • 1930–1931OGPU 해외부(INO) 부부장
  • 1931–1935OGPU·GUGB-NKVD 해외부(INO) 부장 — 소련 대외첩보 총괄
  • 1934–1937적군참모부 제4(정보)국 부국장 겸임
  • 1937NKVD 기록보관부로 좌천, 5월 체포, 8월 총살

겐리흐 그리고리예비치 야고다

Генрих Григорьевич Ягода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1–1938 ✕ 처형

굴라크를 키운 NKVD 수장, 숙청의 피고가 되다

1937년 4월, 야고다는 NKVD 내무인민위원직에서 해임되었다. 스탈린이 그를 부른 자리에는 이미 예조프가 앉아 있었다. '당신은 4년이나 늦었다' — 스탈린의 말이다. 야고다가 재판정에서 남긴 마지막 말은 기록에 따라 엇갈린다. 한 버전에서는 총살 직전 '스탈린 동지 만세!'를 외쳤다고 하고, 다른 버전에서는 조용히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 어느 쪽이든, 굴라크의 설계자는 굴라크의 피고가 되었다.

OGPU와 NKVD의 실무 권력자로 백해-발트 운하 같은 강제노동 사업을 지휘했다. 굴라크 시스템의 설계자이자 초대 NKVD 내무인민위원으로 보안기관 통합을 주도했다. 키로프 사건 이후 첫 대숙청 국면을 열었지만, 스탈린은 '충분히 숙청하지 못한다'며 예조프로 교체. 결국 자신이 숙청의 피고가 되어 제3차 모스크바 재판 뒤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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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년대체카-GPU-OGPU 관료로 성장, 수용소와 대형 건설동원 관리
  • 1934–1936초대 NKVD 내무인민위원, 보안기관 통합을 지휘
  • 1934–1935키로프 피살 뒤 탄압 확대와 초기 숙청 수사를 담당
  • 1936예조프로 교체, 통신인민위원으로 좌천
  • 1937–1938체포, 제3차 모스크바 재판 뒤 처형

알렉산드르 게오르기예비치 벨로보로도프

Александр Георгиевич Белобород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 1891–1938 ✕ 처형

로마노프 처형에 서명한 좌익반대파 내무인민위원

「스베르들로프에게 알리시오: 전 가족이 가장과 같은 운명을 함께했다. 공식 발표는 대피 중 사망이다.」 ― 로마노프 일가 처형 후 레닌 비서에게 보낸 암호 전보, 1918년 7월 17일

우랄 지역에서 두각을 나타낸 볼셰비키로, 1918년 우랄소비에트 의장으로서 니콜라이 2세와 로마노프 일가의 처형 결정에 서명했다. 1923년부터 1927년까지 제르진스키의 후임으로 RSFSR 내무인민위원을 지내며 소비에트 경찰·교정 행정을 관장했다. 1923년 「46인 선언」에 서명하며 좌익반대파에 합류했고, 1927년 당에서 축출되었다가 1930년 복당했으나 대숙청 시기 체포되어 1938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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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우랄 지역 당위원회 위원
  • 1918우랄소비에트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 1919–1920당 중앙위원회 조직국 정위원 · 중앙위원
  • 1919–1920제9군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1921–1923RSFSR 내무부인민위원
  • 1923–1927RSFSR 내무인민위원
  • 1930–1936조달위원회 · 국내무역인민위원부 근무

예핌 게오르기예비치 예브도키모프

Ефим Георгиевич Евдоким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1–1940 ✕ 처형

샤흐티 사건의 설계자이자 북캅카스의 실력자

스탈린은 1938년 이렇게 회고했다. "예브도키모프가 숄로호프를 체포하라며 두 번 찾아왔다. 전 백위군과 대화한다는 이유였다. 나는 말했다, 자네는 정치도 인생도 모른다고."

내전 세대의 체키스트로, 브란겔군 포로 대량 처형을 지휘하며 현장형 보안요원으로 두각을 드러냈다. 1923년 북캅카스 OGPU 전권대표로 부임해 지역 권력 기반을 쌓았고, 1928년 샤흐티 사건을 설계해 기술 전문가를 겨냥한 첫 대형 정치 재판의 자백 확보를 지휘했다. 1929년부터 OGPU 비밀작전총국장을 맡으며 야고다와 적대했고, 1934년 당직으로 옮겨 야고다 집권기 보안기관 바깥에 머물렀다. 예조프 취임 후 북캅카스 인맥을 중앙에 공급하며 재기했으나, 예조프와 함께 몰락해 1940년 총살,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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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0모스크바 체카 특별부장, 이어 남서·남부전선 특별부 부부장
  • 1920–1921체카 크림 타격단 책임자
  • 1923–1929북캅카스 주재 OGPU 전권대표
  • 1929–1931OGPU 비밀작전총국장, 콜레기움 위원
  • 1934–1937북캅카스(이후 아조프-흑해)변경주 당 제1서기
  • 1937–1938로스토프주 당 제1서기
  • 1938수상운수 부인민위원
  • 1938–1940체포, 재판과 처형

미하일 이오시포비치 리트빈

Михаил Иосифович Литви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2–1938 ✕ 자살

예조프의 인사책임자, 14,000명 체키스트를 숙청

1938년 여름, 예조프의 다차에서 동료 체키스트들에게 "일이 잘못되면 자살하겠다"고 말했고, 그해 11월 모스크바行 기차를 한 시간 앞두고 권총 자살로 그 말을 실행했다.

볼셰비키 체키스트. 예조프 측근으로 1936년 NKVD 인사국장이 되어 야고다 계열 14,000명을 숙청하고 부하린 재판을 주도했다. 레닌그라드 NKVD 국장이던 1938년 예조프 몰락 직후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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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크라스노야르스크 인쇄노조 위원장
  • 1920–1921극동전선 군사위원·체카 수사관
  • 1930중앙아시아 당국 분배부장
  • 1931–1933볼셰비키 중앙위 간부분배부문 차장
  • 1936–1937NKVD 인사국장
  • 1937–1938GUGB 제4부(비밀정치부)장
  • 1938레닌그라드 NKVD 국장

스테판 막시모비치 페트리첸코

Степан Максимович Петриченко

크론시타트 반란을 이끈 수병, 소련 스파이가 되어 수용소에서 최후를 맞다

1921년 3월 크론시타트. 페트리첸코가 이끄는 임시혁명위원회 기관지는 '여기 크론시타트에서 제3의 혁명의 첫 돌이 놓였다. 노동 대중의 마지막 족쇄를 끊고 새로운 길을 여는 혁명이다'라고 선언했다.

스테판 페트리첸코는 발트함대 전함 페트로파블롭스크의 상급 병기병으로, 1917년 12월 에스토니아 나이사르 섬에서 '소비에트 수병 및 요새건설자 공화국'을 선포하고 의장으로 활동했다. 1921년 3월에는 크론시타트 수병들의 볼셰비키 독재에 반대하는 무장봉기를 이끌며 임시혁명위원회 의장이 되어 '공산주의자 독재를 타도하라'는 요구를 내걸었다. 봉기 진압 후 핀란드로 망명했으나 1922년 소비에트 정보기관에 포섭되어 20년 넘게 비밀 요원으로 활동했다. 1945년 핀란드에서 소련으로 송환되어 '반혁명 테러 조직 가담'으로 10년형을 선고받고, 1947년 수용소 이송 중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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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발트함대 전함 페트로파블롭스크에 배속
  • 1917.12–1918.02나이사르 섬에서 '소비에트 수병 및 요새건설자 공화국' 선포, 의장
  • 1919볼셰비키당에 가입했으나 곧 재등록 과정에서 탈락
  • 1921.03크론시타트 반란 임시혁명위원회 의장; 반란 진압 후 핀란드 망명
  • 1922소비에트 정보기관에 포섭, 핀란드 주재 소련 비밀요원 활동 개시
  • 1927–1937핀란드 케미 제지공장 노동자로 위장하며 첩보 활동 지속
  • 1941핀란드 당국에 체포·구금
  • 1945–1947소련 송환, 반혁명 테러 조직 가담 혐의로 10년형 선고, 수용소 이송 중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