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 혁명 (바이마르 독일)
Conservative Revolution (Weimar Germany)
제1차 세계대전 패전 뒤 바이마르 공화국(1918~1933)에서 활동한 반자유주의·반민주주의·반평등주의 민족주의 지식인들의 흐름을 묶어 부르는 이름. 슈펭글러, 묄러 판 덴 브루크, 에른스트 윙거, 카를 슈미트 등이 꼽히며, 옛 보수주의의 복고 대신 ‘보존할 가치가 있는 것을 새로 창조하는’ 혁명을 내세웠다. 니체를 스승으로 받들었고, 역사학에서는 나치즘의 길을 닦은 흐름으로 다룬다. 이 이름은 1949년 아르민 모흘러의 책으로 퍼졌으며, 그 개념 자체가 논쟁적이다.
상세
‘보수’와 ‘혁명’이 어떻게 한 말이 되었나?
보수는 지키는 것이고 혁명은 뒤엎는 것인데, 둘을 붙인 ‘보수 혁명’은 모순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 모순이 바로 바이마르 독일 우익 지식인들의 자기 이해였다. 그들은 1918년 패전과 11월 혁명으로 무너진 제정을 되돌리려 한 낡은 보수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들이 미워한 것은 1789년 프랑스 혁명 이래의 자유주의, 의회 민주주의, 평등, 그리고 그 위에 선 바이마르 공화국이었고, 그것을 뒤엎고 ‘영원한 가치’에 바탕한 새 질서를 세우는 것이 그들의 혁명이었다.
이 표현은 시인 후고 폰 호프만슈탈이 1927년 뮌헨 대학 강연 「민족의 정신적 공간으로서의 문학」의 끝에서 썼다. 그는 16세기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에 맞서는 큰 반동의 흐름을 말하며 이렇게 맺었다. “내가 말하는 과정은 다름 아니라 유럽 역사가 알지 못하는 규모의 보수 혁명이다.” 호프만슈탈 자신은 정치적 의미로 쓰지 않았지만, 민족주의 진영이 이 말을 반겨 받아들였다.
Der Prozeß, von dem ich rede, ist nichts anderes als eine konservative Revolution von einem Umfange, wie die europäische Geschichte ihn nicht kennt.
오늘날처럼 이 흐름 전체를 가리키는 이름이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뒤다. 에른스트 윙거의 비서를 지낸 스위스 출신 아르민 모흘러가 1949년 학위논문을 책으로 낸 『독일의 보수 혁명 1918~1932』가 이 이름을 퍼뜨렸다. 모흘러는 약 350명을 국민혁명파, 청년보수파, 민족(푈키시)파, 동맹(분트)파, 농촌민중운동의 다섯 갈래로 나누었다.
누가 무엇을 주장했나?
이 흐름에는 하나의 조직도 통일된 교리도 없었고, 잡지와 서클, 책으로 얽힌 느슨한 망이었다. 1918~1922년 『서구의 몰락』으로 서구 문명이 몰락기에 들어섰다고 진단한 오스발트 슈펭글러는 1919년 『프로이센주의와 사회주의』에서 영국식 자유주의에 맞서는 ‘프로이센 사회주의’를 내세웠다. 아르투어 묄러 판 덴 브루크는 1923년 『제3제국』에서 자유주의를 민족을 해체하는 질병으로 그리고, 좌우를 넘어선 ‘제3의 제국’을 꿈꾸었다. 그는 보수란 보존할 가치가 있는 것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제1차 세계대전 참호의 경험을 미화한 에른스트 윙거는 국민혁명파의 대표자로, 1932년 『노동자』에서 기술과 총동원의 시대에 맞는 전사적 노동자 국가를 그렸다. 법학자 카를 슈미트는 의회주의를 공격하며 적과 동지의 구분을 정치의 본질로 보았다.
이들의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주의와 전혀 달랐다. 독일어판 위키백과의 정리대로, 생산수단을 누가 장악할지, 국민소득을 어떻게 나눌지, 계급투쟁을 어떻게 볼지 같은 개념과 분석은 여기서 찾아볼 수 없다. 사회주의는 개인이 이기심을 버리고 국가 권위 아래 민족 공동체에 봉사하는 막연한 질서를 뜻했고, 국제주의를 거부하고 ‘자연적 위계’를 받아들였다. 국민혁명파 일부는 소련에 공감한 민족볼셰비즘에 가까이 가기도 했다.
니체는 이 흐름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했나?
보수 혁명가들은 니체를 자주 스승이자 가장 큰 사상적 원천으로 내세웠다. 그들은 니체에게서 기독교 윤리, 민주주의, 근대, 평등에 대한 경멸을 빌려 왔고, ‘모든 가치의 전도’와 ‘위버멘쉬’를 낡은 부르주아 세계를 부수고 새 엘리트가 이끄는 질서를 세우라는 요구로 읽었다. 니체가 독일 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를 경멸했다는 사실은 이 독해에서 대체로 빠졌다.
이 전유를 제도로 떠받친 곳이 바이마르의 니체 문서보관소였다. 엘리자베트 푀르스터니체는 1923년부터 슈펭글러를 각별히 대우해 재단 이사로 앉히고 중요한 행사의 연사로 세웠다. 니체를 정치철학자로 읽은 알프레트 보임러는 1931년 『철학자이자 정치가 니체』를 내고 뒤에 나치의 대표적 철학자가 되었다. 니체 수용사에서 보수 혁명은 니체가 오른쪽으로 끌려간 가장 중요한 통로였다.
나치즘과는 어떤 관계였나?
독일어판 위키백과는 역사학에서 보수 혁명을 나치 지배의 길닦이로 다룬다고 정리한다. 보수 혁명가들은 대개 나치 당원이 아니었고 대중 정당의 천박함을 경멸하기도 했지만, 나치의 사상을 원칙적으로 거부하지도 않았다. 토마스 만은 1933년 9월 26일 일기에서 나치즘을 “저 보수 혁명의 정치적 현실”이라고 불렀다. 집권 뒤의 반응은 다양했다. 슈미트처럼 적극 협력한 사람도 있었고, 슈펭글러와 윙거처럼 거리를 둔 사람, 나치에 저항하다 투옥된 에른스트 니키시 같은 사람도 있었다.
마르크스주의 쪽의 분석은 루카치의 『이성의 파괴』(1954)가 대표한다. 루카치는 셸링에서 쇼펜하우어, 키르케고르, 니체와 생철학을 거쳐 파시즘에 이르는 독일 비합리주의의 계보를 그렸고, 특히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이 1차 대전 뒤 생철학을 “전투적 반동의 철학”으로 재구성해 파시즘 철학의 직접적 서곡이 되었다고 보았다. 제국주의 단계 독일 부르주아의 위기가 이성에 대한 공격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왜 이 개념 자체가 논쟁적인가?
모흘러의 구도는 나치즘과 구별되는 ‘깨끗한’ 독일 우익의 전통을 만들어 내려는 의도를 품고 있었다. 사회학자 슈테판 브로이어는 ‘보수 혁명’이라는 말을 “근래 사상사 서술의 가장 성공한 창작물 가운데 하나”이지만 지탱할 수 없는 개념이라고 비판했다. 역사가 폴커 바이스는 모흘러가 카를 슈미트 같은 인물의 나치 연루를 빼고 체임벌린 같은 노골적 반유대주의자를 끼워 넣었다며, 그가 “‘보수 혁명’을 발명해 패배 직후의 파시즘 사상 세계에 피난처를 마련해 주었다”고 썼다.
이 논쟁은 과거의 일만이 아니다. 독일어판 위키백과의 첫머리가 말하듯, 오늘날 독일의 신우파와 프랑스의 누벨 드루아트는 보수 혁명의 사상 패턴을 직접 이어받고 있다. 그러니 이 항목은 바이마르 시대의 한 흐름이면서, 오늘의 극우가 자기 계보를 만들 때 끌어오는 이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