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scismo · 1919.03.23–현재

파시즘

Fascism

파시즘은 1919년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탈리아에서 창시한 극우·권위주의·초민족주의 이념과 운동, 그리고 이를 본뜨거나 닮은 여러 나라의 운동과 체제를 이르는 말이다. 이름은 1919년 결성된 이탈리아 전투자동맹에서 나왔고, 그 ‘파쇼’는 고대 로마에서 권력의 상징이던 막대 묶음을 가리킨다. 독재자와 중앙집권, 군사주의, 반대파의 강제 억압, 자연적 위계에 대한 믿음, 민족의 이익에 대한 개인의 종속을 특징으로 하며 민주주의·자유주의·공산주의·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에 반대했다. 무엇을 파시즘으로 볼지는 지금도 논쟁거리이며, 코민테른은 1933~1935년 이를 금융자본의 가장 반동적인 분자들의 공공연한 테러 독재로 정의했다.

상세

이름과 개념

이름은 무솔리니가 1919년 세운 이탈리아 전투자동맹(Fasci italiani di combattimento)에서 나왔고, ‘파쇼’(fascio)라는 말은 고대 로마의 릭토르가 정당한 권력의 상징으로 들고 다닌 막대 묶음(fasces)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탈리아어판 백과사전은 파시즘을 무솔리니가 이탈리아에서 창시하고 히틀러의 민족사회주의와 프랑코 체제 같은 운동에 영감을 준 극우·권위주의·초민족주의 이념과 정치 운동으로 정의하고, 독재적 지도자, 중앙집권적 독재, 군사주의, 반대파의 강제 억압, 자연적 사회 위계에 대한 믿음, 민족(또는 인종)의 이익에 대한 개인 이익의 종속을 특징으로 든다. 이 이념은 운동보다 먼저 마련된 교리가 아니었다. 무솔리니는 파시즘이 “행동의 필요에서 태어났고 행동이었다”고 말했으며, 교리상의 종합은 1932년 조반니 젠틸레와 무솔리니가 정리했다. 이탈리아 역사학에서 파시즘은 주로 1919년 3월 23일부터 1945년 4월 28일까지 무솔리니가 펼친 체제와 이념을 가리키지만, 비교 연구에서는 여러 나라의 비슷한 운동을 묶는 일반 개념으로도 쓰인다.

이탈리아 파시즘 (1919~1945)

제1차 세계대전 뒤의 경제 위기와 실업, 인플레이션, 1919년 선거에서 사회당이 제1당이 된 상황 속에서 ‘붉은 2년’의 노동자·농민 투쟁은 공장 점거로 정점에 이르렀고, 농업·산업 계층 사이에는 10월 혁명을 본뜬 공산주의 혁명에 대한 두려움이 커졌다. 1914년 사회당에서 제명된 전 《아반티!》 편집장 무솔리니는 1919년 3월 23일 밀라노에서 사회주의자, 생디칼리스트, 제대 군인, 미래파 지식인 등 약 300명과 함께 전투자동맹을 세웠다. 첫 선거에서는 의석을 얻지 못했으나 1921년 선거에서 35명이 당선되었다. 파시스트 행동대는 노동조합과 사회주의 정당을 공격했고, 가에타노 살베미니는 1921~1922년에만 약 3,000명이 희생되었다고 추산했다. 1922년 로마 진군 뒤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계엄령 서명을 거부하고 무솔리니에게 정부를 맡겼다. 1924년 선거 부정을 고발한 사회당 의원 자코모 마테오티가 살해된 뒤, 무솔리니는 1925년 1월 3일 연설로 사실상 독재를 선언했고 국가파시스트당은 국가와 일체가 되었으며, 1928년 파시스트 대평의회가 헌법 기관이 되었다. 1943년 7월 25일 대평의회가 국왕에게 권력을 되찾으라는 안건을 올리면서 무솔리니가 체포되었다. 북부의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에서 파시즘이 잠시 되살아났으나, 1945년 4월 말 무솔리니가 파르티잔에게 붙잡혀 총살되면서 끝났다.

유럽과 세계로의 확산

대공황 뒤 여러 나라에서 파시스트 운동이 일어났고, 라틴아메리카는 유럽 밖에서 파시즘이 가장 두드러진 대륙이었다. 영어판 백과사전에 따르면 1932년 헝가리 총리가 된 굄뵈시 줄러는 왕국의 반혁명적 기원인 ‘세게드 이념’에서 나온 파시즘을 추진했다. 루마니아의 철위단은 1940년 이온 안토네스쿠 장군과 함께 국왕을 몰아내 독일·이탈리아 밖에서 외국의 도움 없이 집권한 유일한 파시스트 운동이 되었으나 이듬해 봉기했다가 진압되었다. 스페인에서는 내전 속에서 팔랑헤주의와 권위주의적 교권 세력이 타협한 프랑코 체제가, 오스트리아에서는 1934년 2월 봉기 뒤 ‘오스트리아 파시즘’이라 불린 체제가 섰다. 프랑스에서는 1934년 2월 6일 극우 단체들이 파리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이탈리아어판은 이들 운동 다수가 이탈리아 파시즘과 로마식 경례, 짙은 색 셔츠, 대중 집회, 지도자와 폭력 숭배, 격렬한 반공주의 같은 겉모습만 닮았다고 적는다. 일부 역사가는 독일의 민족사회주의나 1930~1940년대 권위주의 정권들에 ‘파시즘’이라는 이름을 쓰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본다.

마르크스주의와 코민테른의 파시즘론

마르크스주의 학자들은 파시즘을 자본주의적 반동의 국제적 물결의 일부로 보았다. 코민테른의 정의는 1924년 제5차 대회의 비슷한 정식을 거쳐 1933년 12월 집행위원회 제13차 전원회의 결정으로 정리되었고, 게오르기 디미트로프는 1935년 8월 제7차 대회 보고에서 클라라 체트킨이 정식화에 참여한 이 정의, 곧 파시즘은 “금융자본의 가장 반동적이고 가장 배외주의적이며 가장 제국주의적인 분자들의 공공연한 테러 독재”라는 규정을 인용했다. 디미트로프는 파시즘이 오토 바우어의 말처럼 계급 위에 선 국가 권력도, 소부르주아지의 반란도 아니며 “금융자본 자체의 권력”이라고 했다. 이 해석에서는 이탈리아와 독일만이 아니라 폴란드의 사나치아 체제, 오스트리아 신분제 국가, 장제스 지지자들까지 파시즘으로 분류되었다. 1928~1934년에는 사회민주주의를 ‘사회파시즘’으로 보는 노선이 코민테른의 공식 교리였으나 1935년 디미트로프 테제로 대체되었다. 다른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다른 설명을 내놓았다. 레프 트로츠키는 파시즘을 위기에 빠진 소부르주아지의 조직된 운동으로 보고 1929~1933년 독일 공산당에 사회민주당과의 공동전선을 촉구했다. 아우구스트 탈하이머는 마르크스의 보나파르티즘 분석을 끌어와, 계급 세력이 서로 맞선 상황에서 파시즘이 부르주아지로부터 상대적으로 독립해 집권했다고 보았다. 팔미로 톨리아티는 파시즘을 ‘대중적 반동 체제’라 불렀다.

비마르크스주의 연구와 정의 논쟁

1920년대부터 파시즘을 어떻게 정의할지에 대한 합의는 없었다. 이탈리아에서 베네데토 크로체는 파시즘을 이탈리아 역사의 ‘괄호’이자 대전 뒤의 ‘도덕적 질병’으로, 가에타노 살베미니와 행동당은 이탈리아의 오랜 병폐가 낳은 결과로 보았고, 렌초 데 펠리체는 특히 1929~1936년 체제가 얻은 동의를 강조했다. 에른스트 놀테는 1963년 『그 시대의 파시즘』에서 파시즘을 1917~1945년 시대를 특징짓는 반마르크스주의로 정의했다. 로저 그리핀은 1991년 파시즘을 민족의 재생(팔린제네시스)을 핵심 신화로 삼는 대중주의적 초민족주의로 정의했고, 로버트 팩스턴은 2004년 공동체의 쇠퇴와 굴욕에 대한 강박, 통합·힘·순수성 숭배, 전통 엘리트와 손잡은 민족주의 대중 정당을 중심으로 정의했다. 에밀리오 젠틸레는 파시즘을 세속 종교로 신성화된 혁명적·반자유주의적·반마르크스주의적 현상으로 보았다. 최근 연구는 프랑코 체제나 살라자르의 에스타두 노부를 파시즘과 구별되는 권위주의 체제로 보는 경향이 있지만, 이에 반대하는 역사가들도 있다.

1945년 이후와 관련 항목

제2차 세계대전에서 추축국이 패한 뒤 파시즘은 국가 이념으로서는 대체로 끝났고, 공공연히 파시스트를 자처하는 정당은 드물어졌다. 이탈리아 공화국 헌법은 해산된 국가파시스트당의 재건을 금지했지만 이탈리아 사회운동(MSI) 같은 신파시즘 운동이 이어졌다. ‘파시스트’는 정치적 반대자를 비난하는 말로도 흔히 쓰인다. 국가파시스트당은 이탈리아 파시즘의 정당, 파시스트 대평의회는 그 최고 기관이며, 사회파시즘은 사회민주주의를 겨냥한 코민테른의 규정이다. 독일의 변형은 민족사회주의 항목에서 다룬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1. it.wikipedia.org
  2. 위키백과 (영문)
  3. 위키백과 (러시아어)
  4. 위키백과 (영문)
  5. de.wikipedia.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