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주의
Leninism
레닌이 러시아 혁명운동의 조건에 맞추어 발전시킨 마르크스주의의 해석과 실천. 민주집중제로 조직된 전위당이 노동계급에 정치의식을 불어넣고 혁명을 지도해야 한다는 당 이론, 제국주의를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로 보는 분석, 노동자·농민 동맹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이 핵심이다. '레닌주의'라는 이름은 레닌이 병으로 물러난 1922년 무렵부터 당 지도부가 쓰기 시작해 1924년 레닌 사후 정식화되었다. 스탈린의 마르크스-레닌주의, 트로츠키주의, 마오주의처럼 서로 적대한 조류들이 모두 그 정통 계승자를 자처했다.
상세
성립과 이름
레닌주의의 출발점은 1902년 『무엇을 할 것인가』다. 레닌은 여기서 임금 인상과 노동조건을 둘러싼 경제투쟁만으로는 혁명에 이르지 못하며, 노동계급에서 충원된 혁명적 전위당이 정치투쟁을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듬해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2차 대회에서 볼셰비키가 형성되었고, 교리 면에서 레닌주의는 레닌이 이끈 볼셰비즘과 겹친다.
그러나 '레닌주의'라는 말 자체는 레닌이 병으로 일선에서 물러난 1922년 이후에야 당 지도자들의 연설에 자주 등장했다. 1923년 4월 제12차 당대회에서 부하린은 민족 문제에서 레닌주의의 본질이 대러시아 쇼비니즘과의 투쟁에 있다고 말했다. 1924년 1월 레닌이 죽자 정식화가 잇따랐다. 루카치 죄르지는 같은 해 2월 빈에서 낸 소책자 『레닌』에서 레닌주의를 유물변증법 발전의 새 단계로 다루었고, 스탈린은 3월 스베르들로프 대학 강의를 묶은 『레닌주의의 기초』에서 "레닌주의는 제국주의와 프롤레타리아 혁명 시대의 마르크스주의"라고 정의했다. 같은 해 코민테른 제5차 대회에서 지노비예프는 이 말을 전위당 혁명을 가리키는 뜻으로 썼고, 5월 제13차 당대회는 레닌주의를 모든 사회과학 교육에 도입하고 레닌 연구소 설립과 전집 간행을 결정했다.
당·제국주의·국가
레닌의 이론적 기여는 당, 제국주의, 국가, 혁명의 영역에 걸친다. 당은 민주집중제로 조직되어, 정책이 정해지기 전까지는 자유롭게 토론하되 정해진 뒤에는 모든 당원이 이를 따라야 했다. 1916년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는 선진국이 식민지로 금융자본을 수출해 얻은 초과착취의 이윤으로 자국 노동귀족의 생활수준을 높여 노자 관계를 안정시킨다고 분석했고, 여기서 첫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세계 금융 체제의 가장 약한 나라에서 일어나리라는 결론이 나왔다. 1917년 『국가와 혁명』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억압받는 자들의 전위가 지배계급으로 조직되어 억압자를 분쇄하는 체제로 규정했다. 민족 문제에서는 1914년 『민족자결권에 대하여』에서 피억압 민족의 자결권을 옹호하며 대러시아 쇼비니즘에 반대했다.
소련 학계는 레닌주의의 핵심 명제를 넷으로 정리했다. 제국주의는 자본주의의 최고이자 마지막 단계이고, 혁명은 '약한 고리'인 저개발국에서 먼저 일어나며, 혁명이 이기려면 노동자가 주도하는 노동자·농민 동맹이 필요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혁명적 전위당의 지도 아래 실현된다는 것이다.
혁명 이후의 실천
10월 혁명 뒤 레닌주의는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지배적 형태가 되었다. 볼셰비키 정부는 공업을 국유화하고 대외무역을 독점했으며, 내전기에는 전시 공산주의(1918~1921)로 식량과 무기를 조달하다가 1921년 3월 곡물 징발을 농업세로 바꾸고 제한된 사적 상업을 허용하는 신경제정책으로 전환했다. 같은 해 레닌은 당내 분파를 금지했다. 정치적으로는 멘셰비키, 사회혁명당과 좌파 사회혁명당의 분파들, 아나키스트 등 반대 세력 대부분이 억압되어 전위당이 러시아의 유일한 정당으로 남았다. 레닌 자신은 착취자의 선거권 박탈이 프롤레타리아 독재 일반의 문제가 아니라 순전히 러시아의 문제라고 말했다.
볼셰비키·마르크스-레닌주의와의 구별
레닌주의는 레닌의 이론과 실천을 가리키며, 그것을 조직한 분파이자 당인 볼셰비키와는 구별된다. 더 중요한 구별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의 관계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레닌 사후 스탈린이 일국사회주의 노선을 축으로 체계화한 소련의 국가 교리이고, 레닌주의는 그 교리가 정통성의 근거로 삼은 원천이다.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산하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는 레닌주의를 "마르크스주의의 새롭고 더 높은 단계"로 규정하고, 레닌주의 단계가 레닌의 생애에 국한되지 않고 소련 공산당과 형제 당들의 이론 활동으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반대로 둘 사이의 단절을 강조하는 목소리도 일찍부터 있었다. 1925년 제14차 당대회에서 레닌의 아내 크룹스카야는 이런저런 견해에 '진정한 레닌주의'라는 딱지를 붙이지 말라고 경고하며, 위대한 혁명가의 학설이 사후에 해롭지 않은 성상(聖像)으로 바뀐 일이 역사에 있었다는 레닌의 말을 인용했다.
계승 논쟁
레닌 사후 공산주의 조류들은 거의 모두 레닌주의의 계승을 자처했다.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 노선과 트로츠키의 연속혁명 노선은 각각 자기가 레닌의 정통이라 주장하며 상대의 정당성을 부정했다. '트로츠키주의'라는 말도 트로츠키의 견해를 레닌주의에 반하는 분파적 이단으로 그리려고 스탈린과 삼두정이 쓴 것이었다. 레닌은 1922년 당의 관료화와 스탈린의 영향력 확대에 맞서 트로츠키와 손잡았고, 1922년 12월의 유언에서 스탈린을 서기장직에서 물러나게 하라고 권고했다. 이후에도 스탈린주의, 트로츠키주의, 마오주의, 호자주의, 보르디가주의처럼 서로 대립하는 조류들이 모두 레닌주의를 자기 정체성으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