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은 로스메르를 이렇게 평했다: "그는 다섯 가지나 여섯 가지 언어로 침묵을 지키는 법을 아는 사람이다." — 필리프 로브리외, 『프랑스 공산당 내부사』에서 인용
미국 태생의 프랑스 혁명적 생디칼리스트이자 코민테른 지도부 핵심 인물. 피에르 모나트와 함께 《라 비 우브리에르》를 발행하며 반전 국제주의 운동을 조직했고, 모스크바에서 17개월간 체류하며 적색노동조합인터내셔널(프로핀테른) 창립을 주도했다. 프랑스 공산당 정치국원으로 활약하다 1924년 트로츠키 옹호로 제명된 후 좌익반대파와 트로츠키주의 운동에 투신했으며, 1938년 자신의 페리니 자택에서 제4인터내셔널 창립대회를 개최했다. 만년에는 알제리 전쟁 반대 선언에 서명했고 회고록 『레닌의 모스크바』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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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1914CGT 기관지 《라 비 우브리에르》 편집 — 피에르 모나트와 함께 혁명적 생디칼리슴 운동 주도
1915–1918반전 국제주의자로 치머발트 회의 프랑스 참가 조직 — 전쟁 내내 반전 활동 지속
1919–1920제3인터내셔널 가맹위원회 활동 — 모스크바 파견, 17개월 체류하며 코민테른 집행위원 선출
1921적색노동조합인터내셔널(프로핀테른) 창립대회 주도 — 로조프스키·톰 만과 함께 임시평의회 간부
1922–1924프랑스 공산당(PCF) 정치국원 겸 《뤼마니테》 사무총장 — 당내 좌파 지도부 핵심
1924.10트로츠키 반대 운동에 반발하여 수바린·모나트와 함께 PCF에서 제명
1929–1931프랑스 최초 트로츠키주의 조직 공산주의자동맹 결성 참여 — 전술적 차이로 1931년 탈퇴
1938.9페리니 자택에서 제4인터내셔널 창립대회 개최 — GPU의 암살 위협 속 비밀 진행
1939멕시코 방문 — 트로츠키와의 우정 회복, 듀이위원회 참여, 트로츠키 손자 시에바의 후견인
모든 것을 말했다, 어떤 관대함도 바라지 않는다. 완전한 복권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그러나 언젠가 내 무죄가 밝혀지거든 사후에 당적을 회복시키고 신문에 복권 소식을 실어 달라.
예카테리노슬라프 현의 유대인 멜라메드 집안에서 태어나 1901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다. 1905년 혁명 참가와 유형을 거쳐 파리로 망명, 프랑스 노동조합 운동에서 활동했다. 1921년부터 1937년까지 적색노동조합인터내셔널(프로핀테른) 사무총장으로 국제 노동운동의 좌파 축을 조직했다. 1939년 외무부인민위원, 전시에는 소빈포름뷰로를 이끌며 유대인 반파시스트 위원회를 감독했다. 1949년 체포되어 1952년 JAC 재판에서 법정 자백을 철회하고 기소 논리를 조목조목 반박했으나 사형 선고를 받고 총살되었다. 1955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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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1908RSDLP 입당, 카잔에서 1905년 혁명 참가, 체포·유형 후 해외 탈출
1920년 2월 그의 사망설이 퍼지자 핀란드와 러시아의 노동운동 지도자들이 추도 연설을 했고 페트로그라드의 핀란드 공산주의자들은 집회 장소를 '쿠시넨 클럽'이라 불렀지만, 그는 헬싱키에 은신한 채 살아 있었다.
핀란드 라우카아의 재봉사 가정에서 태어나 1904년 핀란드 사회민주당에 들어가 1911~1913년 당 의장을 지냈고, 1918년 혁명정부의 교육담당 인민위원이었다. 1918년 소비에트 러시아로 망명해 핀란드 공산당 창립에 참여했고, 1921년부터 1939년까지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서기로 국제공산운동을 지도했다. 겨울전쟁기 핀란드 민주공화국 정부 수반을 맡았고, 대숙청기에는 아내 아이나와 아들 에사가 탄압받는 동안에도 자유와 지위를 지켜 1937~1939년 숙청을 살아남은 극소수 코민테른 최고 간부였다. 1957년 흐루쇼프를 지지하며 CPSU 중앙위 서기 겸 상임간부회 위원이 되어 '전인민국가' 테제로 탈스탈린화를 이론화했고, 1964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1937년 6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니콜라이 예조프에게 NKVD 비상권한을 부여하는 결의안이 상정되자, 퍄트니츠키는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당 전체를 총살하게 될 것입니다." 회의장은 침묵에 잠겼고, 그는 6월 25일 전원회의에서 축출되었다.
가난한 유대인 재단사의 아들로 태어나 독학으로 글을 깨친 구(舊) 볼셰비키. 『이스크라』의 비밀 국제 배송망을 구축한 지하운동의 명수에서, 12년간 코민테른 서기로 각국 공산당의 연락·재정·간부를 총괄하는 국제기구의 실무 등뼈로 성장했다. 1937년 6월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NKVD의 비상권한 부여에 공개 반대했고, 한 달 뒤 체포되어 1년간 고문 끝에 이듬해 총살되었다. 1956년 복권.
“나는 피고인 공산주의자로서, 내 정치적 명예와 혁명가로서의 명예, 그리고 내 공산주의 이념과 이상을 변호한다.” 1933년 라이프치히 법정에서 한 이 말은 내 전 생애의 내용과 의미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인쇄공·노동운동가로 출발해 1923년 봉기를 이끌었고, 1933년 라이프치히 재판에서 나치에 맞선 법정 변론으로 국제적 상징이 되었다. 제7차 세계대회 직후인 1935년 코민테른 서기장에 올랐고 1943년 코민테른 해산 뒤에는 소련공산당 중앙위 국제정보부를 이끌었다. 대숙청 시기에는 폴란드 공산당 지도부 숙청과 불가리아의 옛 동료 탄압에 관여했으며 일부 구제에도 나섰다. 1945년 불가리아로 돌아와 이듬해 총리가 되었고, 유고슬라비아와의 연방 구상은 스탈린-티토 결별로 무산되었다. 1949년 모스크바 근교에서 사망했다.
1924년 5월, 레닌의 유언이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 낭독되었다. 카메네프가 문서를 읽었고, 지노비예프는 스탈린을 옹호하는 연설에 나서 그를 서기장으로 재선출하자는 동의를 거수로 통과시켰다. 트로츠키의 소수만 반대했고, 유언은 대회에 보고되지 않았다.
레닌의 오랜 망명 동지이자 코민테른 초대 집행위원회 의장으로,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초기 얼굴이었다. 본명은 옵세이-게르숀 라도미슬스키로, 옐리자베트그라드(오늘날 우크라이나 크로피브니츠키)의 유대인 낙농가에서 태어났다. 1917년 10월 무장봉기에는 카메네프와 함께 공개 반대했으나,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으로서 북부의 당 조직을 장악했고 1921년 3월 정치국 정회원이 되었다. 레닌 사후 스탈린·카메네프와 3두체제를 이루어 트로츠키를 고립시켰고, 1925년 12월 신반대파로 패배한 뒤 1926년 레닌그라드 소비에트와 코민테른 의장직에서 밀려났다. 1936년 8월 모스크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총살되었고, 1988년 복권되었다.
1917년 10월 18일, 카메네프는 무장봉기가 혁명에 파멸적이라고 공개적으로 말했다. 레닌은 제명을 요구했으나, 10월 20일 중앙위원회는 사퇴를 받아들였다. 10월 25일 그는 국가원수가 되었으나 11월 4일 연립정부 문제로 사퇴했다.
레닌이 1902년 파리에서 만나 30년 넘게 함께한 가장 오랜 동지다. 1901년 당에 들어가 시베리아 유형과 망명을 거쳤고, 1914년에는 프라우다와 두마 볼셰비키 의원단을 지도했다. 10월 봉기에 반대했으나 혁명 후 모스크바 소비에트 의장(1918~1926)을 지냈고 레닌 병중에는 정치국을 주재했다. 1922년 스탈린을 서기장으로 추천했고 스탈린·지노비예프와 3두체제를 이루었지만 1925년 「우리는 지도자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고 공개 맞서 실각했다. 이후 푸시킨 하우스와 아카데미아 출판사를 이끌며 문학 연구에 전념했고, 1936년 8월 첫 모스크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1988년 복권되었으나 당적은 회복되지 않았다.
1939년 스탈린이 디미트로프에게 말했다: "마누일스키는 아첨꾼이야! 트로츠키주의자였지! 트로츠키주의자 도적떼를 숙청할 때 침묵한 것을 우리가 비판했는데 이제는 아첨을 시작했어!" 트로츠키와 연이 닿은 구볼셰비키 가운데 그만 살아남았다.
볼린의 스비아테츠 마을에서 성직자 가문(영어권 사료는 농민 가문)에서 태어나 소르본에서 법학을 마친 볼셰비키다. 《브페료드》파 성원이었고 1917년 메즈라욘치에 합류했으며 우크라이나와 코민테른 요직을 맡았다. 1920~30년대 코민테른 집행위 서기로서 기구와 각국 공산당의 스탈린주의 숙청을 지도했고, 1945~46년에는 '우크라이나 부르주아 민족주의'에 반대하는 운동을 이끌었다. 194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우크라이나 대표단을 이끌고 유엔 헌장 전문과 제1장 초안을 작성한 위원회를 주재했으며, 1944년부터 1952년까지 우크라이나 외무장관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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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재학 중 RSDLP 입당, 볼셰비키
1905–06페테르부르크 위원회 선동원, 크론슈타트·스베아보르크 수병 봉기 조직
1906체포, 야쿠티야 5년 유형 — 탈출, 파리 망명
1907–12파리 망명, 간헐적 러시아 밀입국 활동
1912–13상트페테르부르크·모스크바 지하활동 후 재망명
1914–171차대전 반대, 트로츠키와 《골로스》·《나셰 슬로보》 발행
1917.5귀국, 메즈라욘치(지역간파) 합류
1917.8제6차 당대회: 메즈라욘치와 함께 볼셰비키 합류
1921–22우크라이나 CP 제1서기, 농업인민위원 — 기근 대응
1924–28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상임간부
1926–1943코민테른 집행위 서기 - 1926년 12월~1928년 7월, 1931년 4월 15일~1943년 5월 해산
1944–50우크라이나 인민위원회 부의장·외무장관, 유엔 창설 대표단
1924–19431924년 7월 15일~1943년 5월 15일 코민테른 집행위 및 상임간부
1944–1952우크라이나 외무인민위원, 1946년부터 외무장관 - 1944년 7월 12일~1952년 6월 10일
미국인 KMT 지지자들이 쑨원에게 '보로딘이 가명이며 본명은 그루젠베르크라는 걸 아십니까' 하고 경고하자, 쑨원은 이렇게 답했다. '압니다. 라파예트요.'
쑨원의 정치고문이자 제1차 국공합작을 설계한 코민테른의 지구적 요원.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16세에 분트에, 1903년 볼셰비키에 가담했으며, 1905년 혁명 후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에서 망명 러시아인 학교를 운영했다. 1919년 멕시코 초대 소비에트 영사로 멕시코공산당 창립을 도왔고, 1923년부터 광저우에서 국민당을 레닌주의 전위정당으로 개조하고 황포군관학교를 설립했다. 그가 성사시킨 국공합작은 중국공산당이 대중정당으로 성장할 발판이 되었으나, 1927년 장제스의 숙청으로 와해되었다.
"스탈린과 모세의 차이를 아십니까? 모세는 유대인들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왔지만, 스탈린 동지는 유대인들을 정치국에서 데리고 나왔지요." — 트로츠키와 지노비예프가 정치국에서 축출된 뒤 라데크가 바자노프에게 던진 농담.
폴란드계 유대인 출신으로 국제 사회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운동을 오간 저널리스트·외교가였다. 레닌의 측근으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협상과 코민테른 창립에 참여했고, 볼셰비키 중앙위원·코민테른 서기를 지냈다. 날카로운 논쟁과 비꼬는 유머로 이름난 좌익 반대파 지도자였으나, 1930년 공개 자아비판으로 복당했다. 대숙청 속 제2차 모스크바 재판의 중심 피고로 법정에서 연극적 자백을 펼쳐 10년형을 받았고, 1939년 옥중에서 스탈린의 지시로 살해됐다.
1920년대 중반, 스탈린은 부하린을 두고 동지를 향해 말했다: 「너와 나, 부하르치크는 히말라야이고, 나머지는 작은 얼룩일 뿐이다.」 10년 뒤 스탈린은 그를 총살하도록 했다.
레닌이 유언에서 「당 전체의 총아」라 부른 명민한 이론가. 브레스트에서는 혁명전쟁을 외친 최좌파였고, 10년 뒤에는 네프와 농민을 지키려 스탈린의 대전환에 맞선 「우편향」이 되었다. 1929년 정치국에서 밀려났다가 1934년 중앙위원으로 복귀해 이즈베스티야 주필과 1936년 헌법 기초에 참여했으나, 1937년 반역 혐의로 체포되어 1938년 재판 끝에 총살되었다. 스탈린에게 「코바, 왜 나의 죽음이 필요한가?」라고 적은 쪽지는 메드베데프 형제의 저술을 통해 전해진다.
«벨라루스인은 민족이 아니며, 그들을 러시아인과 구분짓는 민족지적 특성은 사라져야 한다» — 1918년 10월, 자신이 편집장으로 있던 『즈뱌즈다』 지면을 통해.
라트비아 출신 볼셰비키로, 벨라루스와 라트비아에서 당 조직을 건설했으며 1920년대 벨라루스 공산당 제1서기를 두 차례 역임했다. 코민테른 정보선전부장으로서 각국 공산당의 이념 노선을 조율했고, 역사-당 연구소 소장을 지내며 1935년 『소련 공산당 약사』를 저술했다. 이는 1938년 『볼셰비키당사 단기강좌』의 직접적 전신이다. 1937년 체포되어 이듬해 처형되었고 1955년 복권되었다.
1930년 제16차 당대회 연단에서 그는 스탈린의 강제 집단화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연설을 마치자 강당은 침묵—박수는 터지지 않았다.
그루지야 출신 볼셰비키로, 코민테른 시절 중국 혁명에 깊이 개입했다. 1927년 8·7 긴급회의를 주재해 천두슈를 경질하고 마오쩌둥을 정치국으로 끌어올렸으며, 광저우 봉기를 승인했다. 중국의 '아시아적 생산양식'을 근거로 자본주의 단계를 건너뛸 수 있다는 이론을 폈다. 1930년 시르초프와 함께 스탈린의 강제 집단화에 맞선 첫 당내 반대파를 결성했다가 좌천되었고, 1935년 체포 위협 속에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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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페트로그라드 군사조직에서 활동, 쿠타이시 당비서
1918–20트빌리시·바쿠 위원회, 아제르바이잔 당 중앙위 간부
1921–22크론슈타트 반란 진압 참여, 페트로그라드 비보르크구 당 조직자
1922–24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1925–29코민테른 청년인터내셔널 서기, 1927년 중국 대표로 8·7 긴급회의 및 광저우 봉기 주도
1975년 방광암으로 사망해 ‘프롤레타리아 혁명가’라는 추도사를 받으며 국장으로 묻혔으나, 사인방 재판 직전인 1980년 10월 사후 제명되고 바바오산에서 유해가 옮겨졌다.
산둥의 지주 집안 출신으로 상하이 지하활동을 거쳐 1933년 모스크바에서 왕밍의 오른팔로 소련 숙청을 배웠다. 1937년 옌안에 돌아와 마오 편에 서서 사회부장으로 정풍운동의 「구조 운동」을 지휘해 수천 명을 특무로 몰았다. 건국 후 한동안 물러났다가 1960년대 중소 논쟁과 문화대혁명에서 중앙문혁소조 고문으로 복귀해 류사오치·허룽 등 원로들에 대한 조사와 박해를 주도했다. 1975년 암으로 사망했고 1980년 당적을 박탈당했다.
「리더」, 대장정에 동행한 유일한 서양인이자 쭌이 회의에서 책임을 추궁당한 코민테른 군사고문
코민테른 요원으로 중국에 파견되어 '리더'라는 이름을 썼고 대장정에 동행한 거의 유일한 외국인이었다. 1935년 쭌이 회의에서 보구와 함께 지휘직에서 해임되었으며, 동독이 리더의 정체를 공식 밝힌 것은 1964년이었다.
뮌헨 출신 독일 공산당원으로 1928년 탈옥해 소련에 가 프룬제 군사아카데미에서 배웠다. 1932년 코민테른의 군사고문으로 상하이에 왔고 1933년 장시 소비에트에 들어가 보구와 함께 진지전 방어를 지휘했으나 제5차 포위토벌에 패했다. 대장정에서 1935년 쭌이 회의는 그와 보구의 군사 지도를 비판하고 마오를 앞세웠다. 1939년 모스크바로 돌아갔고 전후 동독에서 번역가·교수로 살며 1973년 회고록 『중국 기록』을 냈다.
1931년 1월, 미프는 상하이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제4차 전원회의에 코민테른 대표로 직접 참석해 왕밍과 그의 그룹을 정치국으로 진입시키며 '28인의 볼셰비키'의 약진을 현장에서 주도했다.
10대 후반에 볼셰비키당에 입당해 내전에 참전한 뒤 스베르들로프 공산대학에서 수학했다. 모스크바 중산대학(중국 노동자 공산대학)의 부총장을 거쳐 1927년 26세의 나이로 총장에 올랐고, 왕밍을 비롯한 '28인의 볼셰비키'로 불리는 중국 유학생 집단을 직접 길러내 초기 중국공산당 내 친소련·정통파 세력의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28년부터 1935년까지 코민테른 동양사무국 부소장으로서 중국 혁명 노선을 조정했으며, 1935년부터 게오르기 디미트로프의 대중국 정치보좌관을 지냈다. 중국 혁명과 식민지 문제에 관한 다수의 저작을 남긴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 중국학의 개척자였다.
1936년 스페인에서 프랑코군의 모로코 병사들에게 접근했다. 반파시즘 연대가 북아프리카 식민지 문제와 충돌하는 지점을 직접 경험했다.
팔레스타인의 공산주의 활동가이자 작가·번역가. 예루살렘에서 성장하고 모스크바에서 공부했으며, 1936년 스페인으로 가 공화파를 지원했다. 프랑코군에 속한 모로코 병사들을 상대로 선전 활동을 벌이며 스페인의 반파시즘과 아랍인의 해방 문제를 연결했다. 이후 언론과 문학 번역에 종사했다. 그의 회고록은 아랍인 참가자의 시각에서 스페인 내전을 읽을 수 있는 자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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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예루살렘에서 영국 위임통치 당국 체신부에서 근무하며 유대인 노동자들을 통해 공산주의 운동에 접촉, 팔레스타인 공산당에 입당.
1925–1928팔레스타인 공산당 지도부의 파견으로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KUTV)에서 수학하고 우크라이나 출신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1930예루살렘에서 열린 제7차 당대회에서 팔레스타인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고 지하 신문 『일랄-아맘』 편집에 참여했다.
1931–1933영국 당국에 체포되어 예루살렘·야파·아크레 감옥에서 2년형을 복역하고 석방 후 6개월간 경찰 감시를 받았다.
1933–1936코민테른의 파견으로 파리에서 아랍어 월간지 『알-샤르크 알-아라비』를 편집했으나 프랑스 당국의 폐간 조치를 당했다.
1935–1936타슈켄트에서 소련의 민족 문제 경험을 연구한 뒤 1936년 8월 코민테른의 지시로 스페인에 파견되어 프랑코군의 모로코 병사들을 상대로 선전 활동을 벌였다.
1937–1939시리아와 레바논으로 옮겨 다마스쿠스·베이루트의 공산주의 서클에서 활동하며 당 기관지에 글을 썼다. 1939년 8월 독소 불가침 조약을 비판한 이유로 시리아-레바논 공산당에서 제명되었다.
1939–1948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영국 당국이 운영하는 근동방송에서 일하면서 문학 활동에 집중했고, 카이로에서 푸시킨(1945)과 체호프(1947)를 출간했다.
1948–19761948년 팔레스타인인 대이주 이후 방송국을 따라 키프로스 리마솔로 옮겨 1950년까지 살았고, 이후 베이루트에서 언론·번역·문학 비평 활동을 이어갔다.
1976–1979딸이 살던 그리스 아테네로 옮겼고 1979년 그곳에서 사망해 아테네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