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10월 혁명 소식이 민스크에 닿자 먀스니코프는 즉시 군사혁명위원회를 만들어 이끌었고, 소비에트 권력은 민스크에서 유혈 없이 수립되었다.
나히체반-나-도누의 아르메니아계 상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1906년 RSDLP에 입당해 불법 문헌 소지로 바쿠에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샤우먄의 영향을 받았다. 1917년 민스크에서 서부전선 볼셰비키를 이끌어 소비에트 권력 수립을 주도했다. 1919년 2월 벨라루스 중앙집행위원회 의장을 거쳐 1921년 5월부터 아르메니아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으로서 아르메니아의 국가 제도와 경제를 세웠다. 1922년부터 자카프카스 연방평의회 의장과 자카프카스 당 제1서기를 지냈다.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과 아르메니아 문학에 관한 저작을 남겼다. 1925년 3월 22일 트빌리시 근처에서 비행기가 불타 추락해 아타르베코프, 모길렙스키와 함께 사망했으며 화재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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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RSDLP 가입, 불법 문헌 소지로 바쿠로 유배 — 샤우먄과 교류
1911–1914모스크바 대학 법학부 졸업(1911), 군 복무 후 변호사 조수로 볼셰비키 언론에 기고
1930년, 디만시테인은 유대인 민족지구에서의 강제 집단화에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그가 스탈린 노선에서 이탈한 유일한 순간이었고, 당 견책을 받았다.
예시바에서 수학하고 랍비 서품을 받은 후 1904년 볼셰비키에 입당한 세묜 디만시테인은 소비에트 정권 초기 20년간 유대인 민족정책의 핵심 설계자였다. 민족문제인민위원부 산하 유대인위원회 위원장(1918), 예브섹치야 의장(1918~1920)을 지냈으며, 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 부부장과 소비에트연방 중앙집행위원회 민족연구소 소장(1932~1936)을 역임했다. 1926년부터 OZET 의장으로서 유대인 농업 정착을 추진하고 유대인 자치주 설립의 토대를 마련했으며, 『혁명과 민족』 등 당대 민족정책의 주요 저널을 편집했다. 1938년 2월 대숙청 와중에 체포되어 그해 8월 처형되었고, 1955년 사후 복권되었다.
제헌의회는 1946년 1월 11일 개회해 같은 날 인민공화국을 선포했고, 3월 16일 인민의회로 전환되었다. 다른 기록은 선출 1월 10·12일(저신뢰 계보), 퇴임 7월 31일로 적는다.
알바니아의 의사·정치인. 1887년 2월 5일 오스만 제국 지로카스트라에서 태어나 이스탄불에서 의학을 공부했고, 1924년 조구 암살 시도로 2주간 수감되고 판 놀리의 6월 혁명을 지지했으며, 1925년 망명지에서 반조구 KONARE를 함께 세웠다. 1939년 이탈리아 침공 후 점령정부 국가평의회에 참여했다가 이를 실책으로 여기고 민족해방운동에 합류해 1944년 페르메트 회의에서 반파시즘 민족해방평의회 의장이 되었다. 1946년 제헌의회 의장이 되었고 인민의회 상임간부회 의장으로 1953년까지 공식 국가수반을 지냈으나, 실제 권력은 노동당 제1서기 엔베르 호자에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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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1920알바니아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1914년 지로카스트라 대대과 블로러에서 근무하고 빈에 파견되었으며, 1915~1918년 발시 시의, 1920년 티라나 병원 의사
1923–1924두러스 시의사
1924조구 암살 시도로 2주간 수감, 판 놀리의 6월 혁명 지지 후 망명, 궐석 재판에서 사형 선고
1925–1932반조구 KONARE 공동 창립에 참여, 제네바에서 기관지 《리리아 콤베타레》 운영(1926년부터 주필)
1933–1939그리스 잔테에서 정치 망명, 1939년 이탈리아 침공 후 귀국
1940–1943점령정부 국가평의회 위원(1944년 1월 13일까지 명부에 남음), 1943년 8월 전선 합류; 이후 민족해방운동 참여
1943.9민족해방 총평의회 상임위원회 의장
1944.5페르메트 회의에서 반파시즘 민족해방평의회 의장(외교 담당)
1944.10–1946호자 의장의 민족해방 반파시즘 위원회에서 외무장관(사료에 따라 1946년 2월 9일 또는 3월 22일까지)
1946–1954지로카스트라 대의원(1945년 12월 2일·1950년 5월 28일 선거)
1946.1–1953제헌의회 의장, 인민의회 전환 후 상임간부회 의장으로 공식 국가수반(영어 위키백과는 제헌의회 의장, ShtetiWeb은 1월 12일 선출·7월 31일까지로 기록)
1952–1953동생 베심 니샤니가 인민정부에 대한 선전 혐의로 체포되고(1952년 10월 1일 체포·8개월 예심구금) 부인과 결별; 1953년 우익지 보도는 부인의 강제퇴거·가택연금과 니샤니의 사실상 포로 상태를 전함
1953.7공식적으로는 7월 24일 건강을 이유로 사임을 요청하고 8월 1일 하지 레시가 후임했으며, 호자가 강제로 사임시켰다는 기록도 있다
1917년 10월 24~25일, 스몰니 연구소에서 무장봉기 지도부의 일원으로 혁명을 지휘했으며, 열흘도 안 되어 29세의 나이로 소비에트 정부 초대 법무인민위원이 되었다.
사라토프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1903년 볼셰비키에 입당하여 1905년 혁명에 참가했다. 1917년 10월혁명 후 소비에트 정부 초대 법무인민위원으로 임명되었고, 이후 최고경제회의(VSNKh) 간부, 시베리아·우랄 경제 책임자, 네프테신디카트 의장, 돈우골 이사장을 거쳐 고스플란 부의장을 지냈다. 당내에서는 제6차 대회(1917년) 이후 중앙위원으로 활동했고, 1918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 조약을 반대한 '좌익 공산주의자'였다가 이후 스탈린을 지지했다. 1937년 체포되어 허위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되었으며 1956년 복권되었다.
카세르타 협정에서 그는 해방 뒤에도 영국군 사령관 스코비에게 군사 지휘권을 맡기는 구상에 동의했다.
그리스의 자유주의 정치가로, 군주제에 반대하면서도 공산주의 운동과는 대립한 사회개혁 지향의 인물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망명정부를 이끌며 레바논 회의와 카세르타 협정을 통해 저항 세력의 정부 참여와 군 통합의 틀을 마련했다. 1944년 귀국 뒤 국민통합정부의 수상으로 국가 통치권을 세우려 했지만, 영국의 군사적 개입과 EAM·비EAM 세력의 충돌 속에서 그 구상은 데켐브리아나와 내전으로 이어졌다. 이후 중앙연합을 창당해 민주주의를 옹호했으며 1967년 군사 쿠데타 뒤 가택연금 중 사망했다.
1905년 1월 9일, 16세의 공장 소년공이었던 시베르니크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겨울궁전 앞에서 '피의 일요일' 발포를 목격했다. 같은 해 가을, 그는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7세에 볼셰비키에 입당한 페테르부르크 노동자 출신으로, 노동조합 중앙평의회 제1서기를 14년간 맡으며 소비에트 노조체계를 구축했다. 1946년 칼리닌의 뒤를 이어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이 되었으나 실권은 스탈린과 정치국에 있었다. 전시에는 산업 대피와 나치 전쟁범죄 조사위원회를 이끌었고, 스탈린 사후에는 흐루쇼프와 함께 당통제위원장으로서 정치적 억압 피해자들의 복권을 주관했다.
에른스트 로이터는 사회민주주의와 공산주의를 오가며 20세기 유럽의 격변을 직접 겪은 독일 정치가였다. 나치의 박해와 터키 망명을 거친 뒤 베를린으로 돌아와 도시 행정과 사회민주주의를 결합한 지도력을 보여 주었다. 베를린 봉쇄 때 그는 서베를린 시민의 결의를 국제사회에 호소했고, 분단된 도시를 자유와 자치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그의 경력은 혁명적 급진주의에서 민주적 지방정치로 이동한 한 세대의 긴장도 드러낸다.
이 재판은 익살극이다. 실제 기소자는 핀란드 국가가 아니라 한 초강대국의 정부이며, 실제 피고는 핀란드 국민이다.
겨울전쟁 발발 직후 핀란드 총리가 되어 소련이 인정을 거부한 합법 정부를 이끌었고, 1940년 3월 모스크바 평화 조약을 협상했다. 핀란드은행 총재 출신의 경제 전문가로 대통령에 올랐으며, 계속전쟁에서 독일과 협력했으나 1944년 뤼티-리벤트로프 협정을 개인 자격으로 맺고 사임해 만네르헤임의 대소 강화를 열었다. 전후 전쟁 책임 재판에서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949년 사면되었고, 오늘날 핀란드에서는 조국을 위해 희생한 지도자로 기억된다.
1956년 11월 1일 기자회견에서 소련의 재침공 가능성을 묻자 "그런 비극은 인간적으로 불가능하다…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답했다.
개혁교회 목사에서 독립소지주당 창립자·지도자로 헝가리 전후 민주화의 얼굴이 된 정치인. 1945년 총선 승리로 총리에 오르고 이듬해 공화국 초대 대통령이 되었으나, 공산당의 살라미 전술로 1948년 사위의 조작된 반역 혐의를 빌미로 사임당하고 8년간 연금되었다. 1956년 10월 너지 임레의 혁명 정부에 합류해 11월 1일 바르샤바조약 탈퇴와 중립 선언에 동참했고, 봉기 진압 후 6년형을 받았다. 1989년 대법원이 형을 무효화하며 복권되었다.
「오랜 세월 전 우리는 운명과의 약속을 맺었고, 이제 그 서약을 실현할 시간이 왔습니다. 한밤중, 세계가 잠든 그 시간에 인도는 생명과 자유를 향해 깨어날 것입니다.」(1947년 8월 14일 독립 전야 연설)
인도 독립운동의 최고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1947년 독립과 함께 초대 총리에 취임하여 1964년 사망할 때까지 인도를 이끌었다. 의회민주주의와 세속주의, 계획경제를 인도 국가의 기초로 삼았으며, 대외적으로는 냉전의 두 진영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비동맹 노선을 개척했다. 1954년 티토와의 공동성명에서 '비동맹'을 국제정치 용어로 처음 규정했고, 1956년 브리유니 선언과 1961년 베오그라드 회의를 통해 비동맹운동의 제도적 기틀을 마련했다. 1962년 중·인도 국경전쟁의 패배로 국내적 위신이 흔들렸으나, 사후에도 인도 공화국의 설계자로 추앙받았다.
죽기 직전 블룸에게 남긴 유서: "그들이 나를 망신시킬 수 없었다면, 적어도 내 죽음의 책임은 지게 될 것이다. 나는 탈영병도, 배신자도 아니다."
릴 시장 출신의 사회당 정치인으로 블룸 내각의 내무장관. 1936년 6월 파업 국면에서 점거 공장에 대한 강제 해산을 거부했고, 인민전선 강령의 첫 항목이던 극우 동맹 해산을 집행했다. 극우 주간지 『그랭구아르』가 1차 대전 중 탈영했다는 날조 기사를 퍼붓자 군 명예심사와 하원의 압도적 표결이 거듭 무고를 확인했지만 캠페인은 멈추지 않았고, 그는 11월 17일 릴의 자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장례에는 수십만이 모였고, 그의 죽음은 언론의 명예훼손을 규제하는 입법 논의를 촉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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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1914릴의 사회주의 학생운동, 당 기관지 기자
1914–1918전우의 시신을 수습하러 나갔다 포로가 되어 독일 수용소 억류
1925–1936릴 시장
1928–1936하원의원, 사회당 노르 연맹 지도자
1936.06내무장관, 점거 공장 강제 해산 거부와 극우 동맹 해산 집행
1936.07–11『그랭구아르』의 탈영 날조 캠페인, 군 심사와 하원 표결로 거듭 무고 확인
1937년 6월 27일, 자신을 축출한 바로 그 중앙위원회 총회가 진행되는 동안 직무 수행 중 체포되었다.
14세에 공장 노동자로 볼셰비키당에 입당한 올드 볼셰비키인 술리모프는 우랄 당 기구에서 성장하여 러시아소비에트연방사회주의공화국 인민위원회의 의장(1930~1937)으로서 첫 두 차례 5개년 계획 기간 동안 공화국의 산업화를 총괄했다. 중앙위원회 위원(1923~1937)이자 조직국 위원(1927~1930)으로서, 노동자 출신 볼셰비키 중 가장 높은 정부 자리까지 오른 인물 중 하나였다. 1937년 6월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의 정치적 불충성 비판 직후 체포되었고, 파괴활동·간첩·반소비에트 테러 조직 가담 혐의로 11월 27일 처형되었다. 1956년 사후 복권되었으며, 1934~1937년에는 체르케스크 시가 그의 이름을 따 술리모프로 불렸다.
1945년 5월 모스크바에서 그는 스탈린에게 소련군의 대일전 준비 시점을 물었고, 스탈린은 8월 8일을 제시했다.
해리 홉킨스는 대공황기 미국의 공공구호를 유급 일자리 정책으로 조직한 행정가이자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가장 가까운 참모였다. 그는 연방구호와 공공사업을 대규모로 운영한 뒤 상무장관을 지냈고, 전쟁기에는 무기대여법과 연합국 협력을 조율했다. 건강 악화에도 루스벨트와 트루먼의 특사로 소련과 협상했으며, 1945년 5월 모스크바에서 스탈린에게 대일전 참전 시점과 일본 점령 구역을 물어 전후 동아시아 질서의 쟁점을 드러냈다.
1936년 8월 4일, 게오르기오스 2세는 메탁사스가 의회를 중단하고 독재체제를 세우는 데 왕의 승인을 보탰다.
게오르기오스 2세는 정치적 위기 속에서 왕정의 복고와 유지를 추구한 그리스 국왕이었다. 1935년 왕위에 돌아온 뒤 이오아니스 메탁사스의 집권과 1936년 8월 4일 독재체제를 승인해 왕권과 군부 권위주의를 결합했다. 그는 영국과의 동맹을 유지하며 이탈리아와 독일의 침공에 맞섰지만, 전쟁 중 망명 정부를 이끌고 해방 뒤에도 왕정 복귀를 추진해 저항운동 세력과 충돌하는 정치적 유산을 남겼다. 1946년 왕위에 복귀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샤를 드골은 프랑스의 군인·저항 지도자·정치가로, 1940년 패전 뒤에도 전쟁을 계속할 프랑스의 대표성을 자임했다. 런던에서 자유 프랑스를 조직해 비시 정권의 정통성 주장에 맞섰고, 해방 뒤에는 임시정부를 이끌며 국가 재건의 방향을 둘러싼 갈등을 드러냈다. 그는 강한 행정부와 국가적 자율성을 중시해 제5공화국을 세웠지만, 개인 권력과 식민지 전쟁을 둘러싼 긴장도 남겼다.
법의 상품형태론을 주창한 마르크스주의 법철학자, 소련 국가의 법적 형태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비판자
1936년 11월 소련 법무부인민위원에 임명된 지 두 달 만인 1937년 1월 20일, 자신이 이론화한 소비에트 법 체계의 정점에서 NKVD에 체포되었다. 법의 소멸을 주장한 마르크스주의 법철학자가 국가 권력의 가장 직접적 형태 앞에 선 순간이었다.
20세기 마르크스주의 법이론의 가장 중요한 인물. 1924년 저작 『법의 일반이론과 마르크스주의』에서 법 형식이 상품 교환 관계에서 비롯되며, 공산주의 아래서 국가와 함께 소멸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1922년 스투치카와 함께 공산아카데미 법학부를 창설했고, 이후 공산아카데미 부원장과 소비에트건설·법연구소 소장을 지냈다. 1936년 소련 법무부인민위원이 되었으나, '프롤레타리아 법' 개념을 옹호한 비신스키와 충돌했다. 1937년 1월 체포되어 9월 처형되었고, 1956년 사후 복권되었다. 그의 상품형태론은 오늘날까지 비판법학과 법사회학에서 폭넓게 연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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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모스크바 법관, 러시아공산당(볼셰비키) 입당
1920–1923외무인민위원부 근무, 베를린 소비에트 대사관 고문 — 라팔로 조약 기초 참여
1932년 6월 추바리는 "모든 마을에서 수만 명의 굶주린 사람들이 기근으로 죽어갔다"며 스탈린과 몰로토프에게 곡물 지원을 요청했다. 스탈린은 그를 두고 "추바리는 착각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받을 몫보다 더 받았다"고 답했다.
우크라이나 페도리우카의 빈농 가정에서 태어난 경제행정가로, 1907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다. 1923년부터 11년간 우크라이나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을 지내며 공업화와 집단화를 추진했고, 1932년 6월 스탈린과 몰로토프에게 기근 실태를 보고하고 곡물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강제 집단화와 1932~33년 기근의 집행 책임도 함께 지며, 2010년 키예프 항소법원은 그를 홀로도모르 조직자 중 한 명으로 판시했다. 1935년 정치국 정위원이 되었으나 1938년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되었고, 1955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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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1, 1907페도리우카(예카테리노슬라프주) 빈농 가정에서 출생, 제정 노동자구에서 사회민주주의 서클 조직, 16세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1911–1917크라마토르스크·마리우폴·모스크바·페트로그라드 공장 노동자, 지하운동
1917페트로그라드 공장위원회 중앙평의회 위원, 10월 혁명기 포병총국 정치위원
1918–1923국가기계제작공장연합(ГОМЗа) 이사장, 최고경제회의 간부, 우크라이나 산업복구 조직국 의장
1921–1923우크라이나 SSR 최고경제회의 의장 겸 중앙석탄공업관리국 의장 (일부 사료는 최고경제회의 의장 재임을 1920~21년으로 기록하며, 이 연대는 출처 간에 엇갈린다)
1941년 10월, 그는 전쟁을 자신할 수 없다며 외교를 택할 사람에게 정권을 맡겨야 한다고 말했다.
고노에 후미마로는 일본의 귀족 정치가이자 제국의 전시 동원을 이끈 총리였다. 사회주의 사상과 반제국주의적 인종평등론에 관심을 보였지만, 서구 제국주의에 맞선다는 명분으로 일본의 중국 침략과 동아시아 지배 구상을 추진했다. 1940년 삼국동맹과 대정익찬회를 주도한 뒤 미국과의 협상을 시도했으나 군부의 확장 노선을 꺾지 못했고, 1941년 도조 히데키에게 정권을 넘겼다. 전후 전범 용의자로 체포될 예정이던 그는 1945년 청산가리로 자살했다.
국유은행 총재 시포프가 스몰니에 체포되어 있던 밤, 고르부노프는 "특별한 예의로서, 대단히 성가셨지만" 자신의 침대를 시포프에게 양보하고 의자에서 잠을 청해야 했다.
니콜라이 고르부노프는 1917년 11월부터 인민위원회의 서기 겸 레닌의 개인비서로 소비에트 정부의 초기 행정 기반을 구축한 볼셰비키 기술관료였다. 바우만 모스크바 고등기술학교 총장(1923-1929)과 소련 과학아카데미 상임서기(1935-1937)를 지내며 과학기술 행정의 핵심 연결고리로 활동했고, 니콜라이 바빌로프의 식물탐사와 전연방 농업과학아카데미(바스흐닐) 설립을 적극 뒷받침했다. 타지키스탄 파미르 원정대(1932-1935)를 이끌어 1933년 소련 최고봉 스탈린봉(현 이스모일 소모니봉) 첫 등정을 조직했으며, 등반가 예브게니 아발라코프와 함께 정상 공격에 직접 참여했다. 대숙청기인 1938년 체포되어 '등반가 사건'으로 처형되었고, 1954년 복권되었다.
1923년 체포 후, 카메네프는 트로츠키에게 이렇게 회고했다: "술탄-갈리예프 체포를 기억하나? 스탈린의 주도로 이뤄진 첫 번째 주요 당원 체포였네. 불행히도 지노비예프와 내가 동의해버렸지."
타타르인 교사 가정 출신으로, 볼셰비키 내 최고위 무슬림 정치인이자 이론가였다. 1917년 입당 후 민족인민위원부 무슬림분과장과 중앙무슬림군사위원회 의장을 맡았다. 식민지 무슬림 민중 전체를 '프롤레타리아 민족'으로 재정의하고 동방 혁명이 세계혁명을 선도해야 한다는 '무슬림 민족공산주의'를 정립했다. 1923년 스탈린 주도로 체포·출당된 최초의 저명 볼셰비키이며, 그의 사상은 후일 나세르와 벤 벨라 등 제3세계 반식민 지도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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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1917교사·사서·언론인; 타타르어·러시아어 신문에 혁명적 글 발표
1917.7물라누르 바히토프와 함께 무슬림 사회주의 위원회(카잔) 공동 창설
1917.11볼셰비키당 입당; 민족인민위원부 무슬림 부문 책임자
1918–1920중앙무슬림군사대학 의장; 붉은 군대 무슬림 부대 조직, 바시키르 부대 편입 주도
1919–1921동방민족 공산주의 조직 중앙국 의장
1920–1923민족인민위원부 대학 구성원; 타타르 자치공화국 창설 주도, 동방노동자 공산대학 강사
그는 1944년 11월 베오그라드 협상에서 연립정부와 섭정을 받아들이면서도 군주제 문제를 전후로 넘겼다.
이반 슈바시치는 크로아티아계 유고슬라비아 정치가이자 변호사로, 전쟁 전 크로아티아 바노비나의 초대 수반을 지냈다. 망명 왕정과 티토가 이끄는 민족해방운동의 세력 균형이 바뀌자 그는 양측을 잇는 비공산주의 협상 대표가 되었다. 그는 1944년 티토와 협상해 아브노이의 결정을 받아들이고 연립정부와 섭정을 구상했지만, 군주제의 존속 여부는 전후 결정으로 남겼다.
라이프치히에서 돌아온 생리학자, 공화국의 금을 모스크바로 보내고 끝까지 항전을 택한 마지막 총리
1938년 5월, 프랑코에게 내민 「13개 조항」. 스페인의 완전한 독립, 보통선거로 선출되는 정부, 지역 자치, 양심의 자유, 토지개혁, 그리고 전쟁 행위에 대한 보복 금지. 프랑코의 답은 무조건 항복이었다.
생리학자 출신의 스페인 사회노동당(PSOE) 정치인. 킬과 라이프치히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스물아홉에 마드리드 대학 생리학 교수가 되어 세베로 오초아를 길러낸 실험실을 세웠으며, 1929년 PSOE에 입당해 1931년 하원의원이 되었다. 1936년 9월 재무장관으로 입각해 국립은행의 금 준비를 카르타헤나로 옮기고 이를 소련에 맡기는 결정에 서명했고, 바르셀로나 5월 사태 뒤인 1937년 5월 총리에 올라 「저항이 곧 승리」를 내걸고 인민군의 중앙집권화를 밀어붙였다. 그가 공산당과 소련 고문단에 의존한 것은 서방의 불개입 아래 무기를 살 곳이 그곳뿐이었기 때문이었으나, 이 때문에 「모스크바의 꼭두각시」라는 비난을 평생 받았다. 1938년 5월 「13개 조항」으로 협상을 시도했으나 프랑코는 무조건 항복만을 고집했고, 1939년 3월 카사도 대령의 쿠데타로 그는 스페인을 떠났다. 1946년 PSOE에서 제명됐고, 2008년에야 당으로부터 복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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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카나리아 제도 라스팔마스의 부유한 가톨릭 가정에서 출생
1906–1915독일 킬과 라이프치히에서 의학·생리학 수학, 1912년 의학박사
1922스물아홉에 마드리드 대학 생리학 교수, 세베로 오초아를 배출한 실험실 창설
1929–1931PSOE 입당, 제2공화국 수립과 함께 라스팔마스 선거구 하원의원 당선
1936.09라르고 카바예로 내각 재무장관 취임, 금 준비를 카르타헤나로 이송
1936.10금 준비 510톤을 소련에 맡기는 결정에 서명, 이른바 「모스크바의 금」
1937.05.17바르셀로나 5월 사태 뒤 총리 취임: 「하나의 전쟁, 하나의 군대, 하나의 지휘」
1938.04–1939.03국방장관 겸임, 「저항이 곧 승리」 노선으로 에브로 공세 지휘
1938.05「13개 조항」 발표로 협상 시도, 프랑코가 거부
1938.09–10국제연맹에서 국제여단의 일방적 철수를 발표하고 바르셀로나 고별 행진 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