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1936년 국제연맹 연단에서 '신과 역사는 여러분의 심판을 기억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솔로몬 왕조의 후예인 하일레 셀라시에 1세는 에티오피아를 근대화하고 국제연맹 연설로 반파시즘의 상징이 된 20세기의 군주였다. 섭정 시절부터 개혁을 이끌어 1931년 헌법과 노예제 폐지를 단행했고, 이탈리아로부터의 망명을 거쳐 1941년 영국군과 함께 귀환해 제정을 회복했다. 그러나 북부의 리스트·구울트 토지와 남부의 토지수여제를 그대로 둔 채 귀족·교회와 타협한 근대화는 농민의 소작 굴레를 풀지 못했고, 1972년 웰로 기근으로 민심이 이탈했다. 1974년 9월 데르그에 폐위된 그는 이듬해 3월 자신의 토지제도를 폐지한 국유화가 내려진 직후인 8월, 군부의 명령으로 목졸려 죽었다.
1930년 11월, 스탈린의 갑작스러운 전화에 "소 생산성 문제입니다, 스탈린 동지"라고 답한 시르초프는 곧바로 정치국에서 강제 집단화를 공개 비판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공대에서 볼셰비키가 되어 내전기 돈 지역 소비에트 권력 수립에 참여했다. 1926–1929년 시베리아 당 제1서기로 네프적 협동조합 노선을 추진했고, 1929년 러시아공화국 인민위원회의 의장과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강제 집단화의 참상을 목격하고 1930년 로미나제와 함께 반대파를 조직, 스탈린의 권력 집중을 비판했다가 모든 직책에서 해임되었다. 1937년 대숙청 중 체포되어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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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볼셰비키 입당, 지하 선전 활동
1917.10–1918로스토프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장, 돈 소비에트공화국 부의장
1918–1919제12군 정치위원, 돈 지역 탈코사크화 참여
1921–1923중앙위원회 등록배치부장 — 노멘클라투라 제도 구축
1924–1926중앙위원회 선동선전부장, 《공산주의 혁명》 편집자
1926–1929시베리아 당 제1서기 — 네프적 협동조합 노선, 곡물 위기 때 스탈린과 갈등
파블레 카라조르제비치는 알렉산다르 1세 암살 뒤 미성년 페타르 2세를 대신해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통치한 섭정공이었다. 그는 중앙집권 체제의 유산을 완화하고 크로아티아 민족운동과 타협하려 했으며, 1939년 크베트코비치-마체크 협정으로 크로아티아 바노비나를 성립시켰다. 그러나 유럽 전쟁이 확대되고 영국과 프랑스의 실질적 보장이 약해지자 중립을 지키려던 외교는 독일 압력에 대한 양보로 기울었고, 1941년 삼국동맹 가입은 군부 쿠데타와 그의 실각을 불렀다. 그는 전후 망명 생활을 하다 1976년 사망했고, 2011년 세르비아 법원에서 복권되었다.
1922년 반란 때 남아 쑨원의 탈출을 엄호하며 '중국은 나 없이도 되지만 당신 없이는 안 된다'고 말했다. 1981년 5월 16일, 죽기 몇 주 전 공산당에 입당해 명예주석이 되었다.
상하이의 부유한 기독교 집안 쑹씨 세 자매의 둘째로, 1915년 쑨원과 결혼했다. 1927년 장제스의 반공 정변에 반대해 국민당 좌파의 상징이 되었고 모스크바로 갔다가 1930년대 상하이에서 민권보장동맹을 이끌었다. 항일전쟁기 홍콩에서 보위중국동맹을 조직해 공산당 근거지에 물자를 보냈다. 1949년 인민공화국의 중앙인민정부 부주석이 되었고 1981년 사망 직전 공산당에 입당해 명예국가주석 칭호를 받았다. 동생 쑹메이링은 장제스의 부인이었다.
10년간 벨라루스 공업화를 진두지휘한 정부수반, 아카데미 숙청에 서명하고 같은 심판대에 서다
1937년 6월 21일 민스크 NKVD 5층 심문실에서 '폴란드 간첩' 혐의를 받던 골로데트는 심문 도중 창밖으로 몸을 던졌다 — 공식 발표는 자살, 비공식 증언은 구타 살해 후 위장.
일곱 살부터 목동으로 일한 농민 혁명가로, 1927년부터 벨라루스 공화국 정부수반을 10년간 맡아 공업화와 집단화를 주도하며 공화국을 농업 국가에서 공업 국가로 바꾸어 놓고 1935년 레닌 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과학아카데미 학자 추방 결의에 직접 서명한 그 자신도 1937년 '폴란드 간첩'으로 체포되어 민스크 NKVD 심문 중 투신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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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1915크리보이로크 광산에서 선로 수리공, 자물쇠공, 전기기사로 노동
1917남서부전선 병사위원회에서 볼셰비키 혁명 선전 활동
1918–1921RCP(b) 입당, 적위대 조직 및 독일군·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군과 교전; 노보집코프현 소비에트 활동
1921–1924고르키현 집행위원회 의장, 도적 진압 트로이카 의장
1925–1927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2서기
1927–1937벨라루스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 — 공업화·집단화 주도
1930전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벨라루스 과학아카데미 학자 6인 추방 결의 서명
1923년 6월, 스탈린이 '범튀르크주의'라고 비난하자 리스쿨로프는 연단에서 반박했다: "몇 달 전만 해도 동지 스탈린이 술탄갈리예프를 혁명적 공산주의자라고 칭송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와서 말을 바꾸는 것은 정치적 편의입니다."
카자흐인 볼셰비키 혁명가로 투르키스탄 자치공화국의 핵심 지도자였다. 중앙아시아 투르크어권 민족들이 하나의 역사적 공동체라고 주장하며 스탈린의 민족 획정에 맞섰고, 1923년 제4차 민족공화국 간부회의에서 '범튀르크주의'라는 비난을 공개 반박했다. RSFSR 인민위원회의 부의장(1926~1937)으로 투르크시브 철도와 카라간다 중공업 단지를 추진했으며, 1932~1933년 카자흐 대기근 때 스탈린에게 직서해 골로쇼킨의 강제집산화가 낳은 참상을 알리고 식량 원조를 이끌어냈다. 1938년 총살, 1956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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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1914메르케 러시아-카자흐 기숙학교 → 피슈페크 농업학교 졸업
1916–1917중앙아시아 민족해방봉기 참가, 체포; 타슈켄트 사범학교 수학; 메르케에서 카자흐 청년 혁명조직 '부하라' 창설
1946년 4월, 그는 빌헬름 피크와 함께 새로 창립된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의 공동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오토 그로테볼은 바이마르기의 사회민주주의 정치가로, 나치 독재에 맞서 의회에서 반대표를 던지고 전후 소련 점령지의 독일 사회민주당을 이끌었다. 그는 처음에는 신중했지만 소련 점령 당국의 압력 속에서 공산당과의 통합을 추진해 1946년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의 공동 의장이 되었다. 이 통합은 동독 국가의 정치적 토대를 놓았지만, 사회민주당 내부의 자유로운 선택이 억압된 강제 통합이기도 했다. 1949년부터 동독 최초의 정부 수반을 맡은 그는 국가 건설과 소련의 영향력 사이에서 제한된 자율성을 행사했다.
'침묵이 그의 비장의 카드였다. 흐루쇼프가 무언가 제안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이렇게 말하곤 했다: 네, 네, 물론입니다, 바로 그겁니다.' — 윌리엄 토브먼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정부 수반을 두 차례(1938~1939, 1947~1954) 역임하고 최고소비에트 상임간부회 의장(1954~1969)으로 15년간 재임한 소련의 당·국가 지도자다.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918년 볼셰비키에 입당해 적색 파르티잔을 조직했다. 1930년대 모스크바 바우만 구역에서 니키타 흐루쇼프와 인연을 맺어 측근으로 성장했고, 대숙청기 우크라이나 인민위원회의 의장으로 발탁되었다. 전시 파르티잔 투쟁을 조직하고 종전 후 공화국 재건을 주도했다. 흐루쇼프의 충실한 집행자로, '침묵이 그의 가장 큰 무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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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1920적색 파르티잔 조직 · 붉은 군대 정치일꾼
1921–1928쇼스트카·체르니고프·페르보마이스크 당위원회 서기
1931–1937모스크바 바우만 구소비에트 의장 → 모스크바 주당 제2서기 → 서부 주당 제1서기
1941년 6월 25일 저녁 의회에서 "핀란드는 소련의 공격 대상이 되었으며, 소련은 핀란드를 상대로 전쟁 행위를 시작했다"고 선언했다.
핀란드은행 간부로 리스토 뤼티의 측근이 된 그는, 뤼티가 1940년 대통령에 오르자 총리로 발탁되었다. 재임 중 핀란드는 독일과 함께 계속전쟁을 치르며 동카렐리야를 점령했고, 경제 문제보다 외교·군사 권한은 만네르헤임과 뤼티, 비팅 외무장관이 쥐고 있었다. 1942년 힘러 방문 때 "우리에게 유대인 문제란 없다"는 말로 핀란드 유대인 논의를 차단한 것으로 유명하다. 1946년 전쟁책임 재판에서 6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949년 사면되었고, 이후 정치에 복귀하지 않고 IOC 위원으로 여생을 보냈다.
1937년 6월 전원회의에서 NKVD와 베리아를 비판했다고 여러 회고록이 전하는데, 해당 회의는 속기록이 남지 않아 발언 원문은 확인되지 않는다.
1895년 10월 20일(구력) 예카테리노슬라프의 유대인 대장장이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영어권 연구는 11월 1일생으로만 적는다. 1913년 볼셰비키에 입당해 툴라에서 「콤무나르」를 창간하고 시·주 소비에트와 군사혁명위원회를 이끌었으며, 1920년에는 아제르바이잔에 파견되었다. 농업협동조합과 콜호스첸트르를 이끌며 집단화를 추진했으나, 1925년에는 쿨라크의 협동조합 가입을 막는 데 반대하기도 했다. 1937년 6월 전원회의에서 NKVD를 비판하고 베리아 관련 자료를 제출한 뒤 6월 25일 체포되어 1938년 2월 10일 총살되었고, 1955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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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1917볼셰비키 입당, 민스크에서 「프라우다」 배포, 1915년 모스크바대 의대 입학(2개 학년 수료), 툴라 볼셰비키 서기
1917–1920툴라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툴라 소비에트 집행위원장, 제2군 정치위원, 「콤무나르」 초대 편집장
1920–1921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바쿠 소비에트 의장
1922–1929농업협동조합연합 부의장, 전러시아 토지·림업노동자조합 의장, 콜호스첸트르 의장으로 집단화를 추진
1929–1930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 선동·대중운동부장
1930–1934모스크바 시당위 서기, 제2서기, 모스크바주 집행위원회 의장
1934–1937RSFSR 보건인민위원(1934.2–1937.3), 소련 위생총감(1935년부터), 초대 소련 보건인민위원(1936.7–1937.6)
재판에서 진술은 몇 마디에 그쳤고, 그중 하나는 "나를 망친 것은 스탈린에 대한 나의 믿음이었다"였다고 전해진다.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1933~1953)로 20년간 공화국을 통치했다. 체카·GPU·OGPU 의장과 내무인민위원을 지낸 인물로, 대숙청기에 공화국 당·국가 간부와 지식인에 대한 대량 탄압을 주도했고 베리야 실각 후 몰락해 1956년 5월 총살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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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볼셰비키당 입당 (1917년 3월 또는 1918년 — 기록 충돌), 쿠바 혁명위원회 부의장
1918–1920러시아 내전: 연대장, 아제르바이잔 사단 군사위원, 혁명군사재판소장
1921–1927아제르바이잔 SSR 체카·GPU·OGPU 의장, 내무인민위원
1929–1930아제르바이잔 SSR GPU·OGPU 의장 (재임)
1932–1933아제르바이잔 SSR 인민위원회 의장
1933–1953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20년), 바쿠 시당위원회 제1서기 겸임 (1950년까지)
1953CPSU 중앙위 상임위원 후보 (3~7월), 아제르바이잔 SSR 각료회의 의장
1954–19561954년 3월 체포, 1956년 4월 사형 선고·5월 총살 집행 (5월 26일설과 5월 7일설이 엇갈림)
스탈린의 요구를 허세로 간주하고 만네르헤임의 타협론을 묵살한 겨울전쟁 직전의 핀란드 외무장관
"소련이 강대국이라는 사실을 잊어라": 파시키비가 모스크바로 떠나기 전 에르코가 남긴 훈시.
헬싱긴 사노마트를 북유럽 최대 일간지로 키운 언론 재벌로, 1938년 12월 외무장관에 취임하여 소련과의 협상 전권을 장악했다. 모스크바로 떠나는 파시키비에게 "소련이 강대국이라는 사실을 잊어라"고 훈시할 만큼 확신에 찬 강경파였으며, 스탈린의 영토 요구를 허세로 간주하고 만네르헤임 원수의 타협 권고를 묵살했다. 그가 소유한 헬싱긴 사노마트가 여론을 타협 불가 방향으로 이끈 가운데 협상은 결렬되었고, 겨울전쟁 발발 후 파시키비는 이를 "에르코의 전쟁"이라 불렀다.
1941년 10월 10일, 스탈린은 서부전선 군사평의회 위원으로 호흘로프를 지명했다. 「툴라와 모스크바로 가는 길을 가능한 한 오래 막아야 한다」 — 주코프, 불가닌, 호흘로프 세 사람의 이름이 모스크바 방어전의 모든 명령에 함께 새겨졌다.
모스크바 근교 구비노 마을에서 농민 아들로 태어나 열 살부터 직조공으로 일했고, 1918년 동네 청년 125명을 모아 붉은 군대에 입대해 내전에서 싸우다 중상을 입었다. 레닌그라드 재무아카데미를 마친 뒤 모스크바 주 소비에트와 중앙소비자조합(첸트로소유스)을 거쳐 1940년 러시아 공화국 인민위원회의 의장에 올랐다. 대조국전쟁이 터지자 서부전선 군사평의회 위원으로 모스크바 방어전의 병력·군수 수송을 총괄했고, 스몰렌스크 해방과 동프로이센 공세까지 종군해 중장 계급을 받은 유일한 러시아 공화국 총리였다. 전후 다시 첸트로소유스를 이끌며 전쟁으로 파괴된 농촌 소비자 협동조합망을 복구했고, 1955년부터는 국가무역감독국장으로 물자 유통을 감독하다 1965년 퇴임했다.
1941년 서부전선. 독일 폭격기들이 모스크바로 날아가자 불가닌은 "왜 격추하지 않는 거요?"라고 소리쳤다. 지도에서 눈을 든 주코프는 "진정하시오,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여기서 쏘면 아군 진지가 폭격당하니 후방 부대에 맡기시오"라고 답했다.
체카에서 출발한 행정가로 모스크바 시 행정과 MELZ 공장장, 러시아연방 총리를 거쳐 스탈린의 신임을 얻었다. 1938년부터 각료회의 부의장으로 국가은행을 맡았고, 전쟁 중에는 서부전선 등 여러 전선의 군사평의회 위원으로 일했다. 1947년 11월 원수 계급을 받았으나 이는 열병식 사열관의 지위를 맞추기 위한 것이었고, 군사 전략가가 아니라 실무형 집행자로 평가되었다. 스탈린 사후 국방장관을 거쳐 1955년 총리가 되어 흐루쇼프와 'B&K'로 불리며 유고·인도·영국을 방문했다. 1957년 반당 그룹 사태에서 어느 편에도 확실히 서지 못한 채 패배했고, 1958년 총리직과 원수 계급을 잃었다. 1975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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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1937체카에서 일하다 모스크바 전기신탁과 MELZ 공장장을 거쳐 모스크바 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의장을 지냈다
1944–1947국가방위위원회와 군 행정에서 전시 관리자로 활동
1947–1949국방부 장관, 전후 군 조직 재편에 관여
1953–1955국방장관, 스탈린 사후 집단지도부의 군사 담당 축
1955–1958각료회의 의장, 흐루쇼프와 함께 말렌코프 이후 정부 운영
1957–1958반당 그룹 사태에서 어느 편에도 확실히 서지 못했고, 패배 뒤 총리직을 잃었다
1942년 11월 6일 오후 2시 55분경, 붉은 광장 로브노예 메스토. 탈영병 드미트리에프가 스탈린의 차로 오인해 미코얀의 정부 차량에 소총 세 발을 쐈다. 미코얀과 동승자들은 다치지 않았다.
1915년 볼셰비키에 입당했고 1923년부터 50년 넘게 중앙위원을 지낸 소련의 정치가다. 1926년 최연소 인민위원(대외·국내상업), 1935년 정치국원이 되었고 식품공업인민위원(1934~38)으로서 1936년 미국을 시찰했다. 1937년 사형명단에 서명했고 예레반에 파견되어 아르메니아 숙청을 주도했으며, 1940년 폴란드 장교 2만 6천 명 처형 명령에 서명했다. 1956년 헝가리 투입을 유일하게 반대했고, 1960년 쿠바를 방문한 첫 소련 관료였으며 1962년 아바나에서 카스트로를 설득해 미사일을 철수시켰다. 1965년 정치국과 국가원수직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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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30대외·국내상업인민위원, 30대의 최연소 인민위원
1934–38식품공업인민위원, 1936년 미국 시찰, 통조림·냉동식품·대량생산 아이스크림 도입
존 J. 매클로이는 법률가 출신의 미국 외교·안보 관료이자 금융가로, 전쟁 수행과 전후 국제질서 구축을 잇는 통로였다. 그는 일본계 미국인 강제수용과 독일 전범 사면·감형 같은 결정에 관여하며 미국 권력의 폭넓은 책임과 그 모순을 드러냈다. 1961년 존 F. 케네디의 군비축소 고문으로서 소련과 시험금지 및 군비축소를 협상했고, 7월 모스크바 회담에서 베를린 위기를 둘러싼 군사적 긴장을 직접 다뤘다.
부하라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자디드 개혁운동에서 소비에트 우즈베키스탄의 초대 총리가 된 중앙아시아 혁명가
러시아 외교관 알렉산드르 바르민의 회고: 「'우즈베크의 레닌'이라 불린 호자예프는 왜소하고 마른 체구였으나 엄청난 에너지로 가득했다. 말라리아로 얼굴이 푸르스름해질 때도 있었지만, 엄청난 업무 속에서도 즐겁게 웃을 줄 알았다. 그는 자기 민족을 알았고 뛰어난 연설가였으며 깊이 사랑받았다.」
부하라의 부유한 상인 가문 출신으로, 11세에 모스크바로 유학하여 전통사회와 근대 유럽의 간극을 체험했다. 1916년 범튀르크주의 자디드 운동에 합류, 청년 부하라당을 창당했고 1918년 토후 전복 시도 실패 후 사형 선고를 받고 타슈켄트로 도피했다. 1920년 부하라 인민소비에트공화국 인민나지르회의 의장이 되었고, 1924년 우즈베크 SSR 수립과 함께 초대 인민위원회의 의장으로서 중앙아시아의 국가 획정과 소비에트 연방 편입을 이끌었다. 1930년대 스탈린의 목화 단작 정책에 반대하다 몰락, 1937년 체포되어 제3차 모스크바 재판에서 사형 선고 후 총살되었다.
1933년 2월, 기칼로는 정치국에 보낸 서한에서 트락토로첸트르 체계의 '쿨라크 및 백위대 음모' 사건을 트로이카가 심리하게 해달라고 직접 요청했다 — 공화국 당수가 직접 숙청 가속을 청원한 장면이다.
오데사 출신 우크라이나인 볼셰비키로, 내전기 그로즈니 방어전(1918)을 지휘해 적기훈장을 받은 전쟁 영웅이다. 1929년부터 우즈베키스탄·아제르바이잔·벨로루시 세 공화국 당 제1서기를 연이어 맡아 공업화와 집단화를 추진했고, 벨로루시에서는 당원 수가 절반 가까이 줄 만큼 대대적 숙청을 주도했다. 1934년 중앙위 후보위원이자 NKVD 트로이카 위원으로 대숙청에 가담했으나, 1937년 체포되어 1938년 총살당했고 1955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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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1917티플리스 군의학교 졸업, 제1차 세계대전 위생병 복무, 게오르기 십자훈장 수훈
1939년 1월 14일, 옛 상관이 자신을 음모에 끌어들였다는 자백서에 서명하도록 강요당했다. 예조프 사건의 첫 진술은 그의 오랜 비서에게서 나왔다.
1898년 보리소글렙스크에서 태어났다. 1925년 여름 키슬로봇스크의 휴양지에서 예조프를 처음 만났고, 1926년부터 당 중앙위 기구의 기술서기로 일했다. 1930년 예조프가 중앙위 부서장이 되자 그의 비서가 되어 1936년까지 곁을 지켰으며, 예조프가 내무인민위원부로 옮긴 뒤에는 잠시 NKVD 비서국에서 일하다 중앙위로 돌아갔다. 남편은 예조프 밑에서 내무부인민위원까지 오른 미하일 리조프였다. 예조프 몰락 뒤인 1938년 12월 17일 체포되어 베리야가 직접 심문했고, 1939년 1월 14일 심문에서는 1931년부터 반혁명 음모 조직의 일원이었으며 옛 상관이 자신을 끌어들였다고 자백하는 문서에 서명하도록 강요당했다. 이 진술이 예조프에 대한 정치적 혐의를 쌓아 올리는 출발점이 되었다. 1940년 1월 26일 군사법정에서 반혁명 활동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아 이튿날 총살되었고, 1956년 9월 복권되었다.
1971년 키신저와의 비밀 회담으로 길을 열어 1972년 2월 21일 닉슨을 베이징에서 맞이했고, 같은 해 2월 28일 상하이 공동성명으로 냉전의 삼각구도를 뒤바꾸었다.
1898년 장쑤성 화이안에서 태어나 1976년 베이징에서 사망한 중국의 정치가다. 중국공산당 초기 지도부의 한 사람으로서 파리 공산주의 조직 가입, 황푸군관학교 정치부 근무, 시안 사건과 충칭 협상의 수석 협상자 활동을 거쳤다.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 성립과 함께 국무원 총리(초기에는 정무원 총리)에 임명되어 1976년 사망할 때까지 재임했고, 1949~1958년에는 외교부장을 겸임하며 초기 대외정책의 설계자로 활동했다. 쭌이 회의 이후 마오쩌둥의 지도 아래에 있었고, 문화대혁명기의 격동 속에서도 국가 행정을 유지하며 권력 균형을 관리했다.
장 물랭은 프랑스의 고위 관료이자 공화주의자로, 나치 점령에 맞선 국내 레지스탕스를 자유 프랑스와 연결한 조직가였다. 그는 샤를 드골의 위임을 받아 경쟁하던 저항운동들을 조정하고, 정치세력과 노동조합까지 포괄하는 국민저항위원회를 세웠다. 그의 통합 작업은 독립성을 지키려는 여러 세력의 긴장 속에서 진행되었으며, 1943년 체포와 고문으로 중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