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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행정 인물 328명

알렉산데르 자바츠키

Aleksander Zawadzki
정부·행정 폴란드 국가기관 폴란드 폴란드계 1899–1964 ○ 자연사

전후 폴란드 국가기구를 이끈 공산주의자

1956년 3월 비에루트의 장례식에서 “비에루트는 죽었지만 단결된 우리 당은 살아 있다”고 말했다. 같은 달 제6차 전원회의는 오하프를 제1서기로 선출했고, 고무우카가 제1서기가 된 것은 1956년 10월 제8차 전원회의였다.

제철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나 1923년 폴란드 공산당에 입당한 폴란드의 공산주의 정치인이자 사단장급 장군이다. 1925년과 1936년 두 차례 체포되어 감옥에서 보냈고, 1939년 이후 소련에서 폴란드 애국자 동맹과 폴란드 노동자당 창립에 참여했으며 소련 편성 폴란드군의 정치장교를 맡았다. 전후 실레지아 주지사와 각료회의 부의장을 거쳐 1952년 11월 20일 국가평의회 의장에 임명되어 죽을 때까지 재임했고, 주지사 시절에는 소련의 인력·설비 반출 중단을 추진했다. 1956년 3월 제6차 전원회의에서 제1서기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오하프가 선출되었고, 이후 당내 강경파인 나톨린 계열로 분류되었다. 1964년 8월 7일 암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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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1939폴란드 공산당 활동가, 투옥
  • 1943–1945소련 편성 폴란드군 정치장교, 정치교육 담당 부사령관
  • 1944–1948폴란드 노동자당 정치국 위원
  • 1945–1948실레지아-돔브로바 주지사
  • 1948–1954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중앙위원회 서기, 정치국 위원
  • 1949–1952각료회의 부의장
  • 1952–1964폴란드 국가평의회 의장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리투아니아 1899–1980 ○ 자연사

리투아니아 소비에트화의 얼굴

1939년 10월 빌뉴스 반환 경축식에서 팔레츠키스는 연단에 올라 스메토나 대통령의 퇴진을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그 발언으로 강제노동수용소에 수감된 그는 불과 8개월 뒤 소련의 후원 아래 리투아니아의 새 지도자가 되어 돌아왔다.

리투아니아의 소비에트화 과정에서 지도자가 되었고, 이후 민족소비에트 의장을 지냈다. 발트 공화국 대표제의 상징적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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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s–1930s리투아니아 좌파 언론인·정치인으로 활동
  • 1940소련의 리투아니아 병합 과정에서 인민정부 수반이 됨
  • 1940–1967리투아니아 SSR 최고소비에트 간부회 의장, 공화국의 공식 얼굴
  • 1966–1970민족소비에트 의장, 발트 공화국 대표제의 상징
  • 1970 이후명예직과 회고의 영역으로 물러남

조르주 비도

Georges Bidault
정부·행정 프랑스 국가기관 프랑스 프랑스 1899–1983 ○ 뇌졸중

레지스탕스 의장에서 마셜 플랜의 설계자까지, 몰로토프에게 유럽 분열이 소련 탓이라고 응수한 외무장관

1947년 7월 2일 파리 3국 회담 마지막 세션, 몰로토프가 마셜 플랜을 '유럽을 둘로 가르는 음모'라고 비난하자 비도는 '유럽을 분열시키는 것은 바로 소련의 행동'이라고 조용히 응수했고, 이튿날 베빈과 함께 16개국 초청장을 발송했다.

1943년 장 물랭 체포 후 국민저항위원회(CNR) 의장직을 이어받아 프랑스 레지스탕스를 이끌었고, 해방 후 기독교민주주의 정당 인민공화운동(MRP)을 창당했다. 외무장관으로서 1947년 파리 3국 회담에서 몰로토프의 '유럽 분열' 비난에 맞서 소련의 행동이야말로 유럽을 가르고 있다고 정면 반박했고, 소련 이탈 후 영국과 함께 서유럽 16개국을 규합해 마셜 플랜 수용을 주도했다. 1946년과 1949년 두 차례 총리를 지냈으며 디엔비엔푸 포위 당시 미국에 원자폭탄 지원을 요청할 만큼 식민지 전쟁에 매달렸다. 알제리 독립에 반대하며 1962년 비밀리에 '제2의 CNR'을 조직했다가 면책특권을 박탈당하고 브라질로 망명, 1968년 사면으로 귀국했으나 영향력은 회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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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9프랑스 알리에주 물랭 출생
  • 1925역사·지리 교수자격시험 수석 합격, 교사로 재직하며 기독교민주주의 언론 활동
  • 1943–1944국민저항위원회(CNR) 의장, 장 물랭 후임으로 레지스탕스 통합 지도
  • 1944–1946드골 임시정부 외무장관, 샌프란시스코 UN 창설회의 프랑스 수석대표
  • 1947외무장관, 파리 3국 회담에서 몰로토프와 대치하며 마셜 플랜 수용 주도
  • 1946, 1949–1950두 차례 총리(임시정부 주석·제4공화국 수상)
  • 1954외무장관, 디엔비엔푸 전투 위기 관리
  • 1962–1968알제리 독립 반대로 면책특권 박탈, 브라질 망명, 1968년 사면 귀국

레오 라그랑주

Léo Lagrange

노동자의 첫 휴가를 설계한 여가·스포츠 차관

「우리의 단순하고 인간적인 목표는 프랑스의 청년 대중이 스포츠에서 기쁨과 건강을 찾게 하고, 노동자들의 여가를 조직해 그들이 되찾은 삶의 기쁨과 존엄을 누리게 하는 것이다」, 차관 취임 라디오 연설, 1936년 6월 10일

변호사 출신의 사회당 하원의원으로, 블룸 정부가 세계 최초로 만든 여가·스포츠 담당 차관직을 맡았다. 국철 40% 할인 「인민 티켓」과 유스호스텔 확충, 대중 스포츠 자격증으로 1936년 여름 60만 명의 생애 첫 유급휴가를 조직했고, 여가 정책을 노동자에게 존엄을 돌려주는 일로 정의했다. 1939년 동원을 자원해 1940년 6월 9일 엔 강 전선에서 포탄에 맞아 전사했다. 오늘날 프랑스 전역의 수천 개 경기장과 체육관이 그의 이름을 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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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1932노르 출신, 파리에서 변호사
  • 1932–1940사회당 하원의원
  • 1936.06세계 첫 여가·스포츠 담당 차관
  • 1936「인민 티켓」으로 60만 명의 생애 첫 휴가 조직
  • 1936–1938유스호스텔 확충, 대중 스포츠 자격증(BSP) 창설
  • 1939–1940동원 자원, 1940년 6월 9일 엔 전선에서 전사

그리고리 아르테모비치 아루티노프

Григорий Артемьевич Арутинов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그루지야 1900–1957 ○ 심장마비

16년간 스탈린 시대 아르메니아를 이끌며 산업 건설과 문화 부흥을 주도한 '그리고리 건설자'

요양 제안을 거절하며: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치료받으면 우리 제르무크는 누가 짓나?' 진흙 속을 걸으며 직접 부지를 정한 끝에 제르무크는 아르메니아 대표 온천도시가 되었다.

1937년 아르메니아 공산당 제1서기로 발탁돼 16년간 공화국을 이끌며 중공업·도시계획과 '다비드 사순스키' 서사시 기념 등 문화 부흥을 주도했다. 1953년 해임 후 국영농장에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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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1922그루지야 공산당 테라비 현위원회 선전부장 · 서기
  • 1922–1924모스크바 마르크스 국민경제연구소 수학 (중퇴)
  • 1927–1930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농촌 담당
  • 1931–1934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조직부장 · 서기국원
  • 1934–1937트빌리시 시당위원회 서기 (제1서기 → 제2서기)
  • 1937–1953아르메니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41–1945자캅카스 전선 군사평의회 위원
  • 1953–1955예레반 근교 국영농장(소프호스) 의장

애들레이 유잉 스티븐슨

Adlai Ewing Stevenson
정부·행정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900–1965 ○ 심장마비

유엔 안보리에서 소련의 쿠바 미사일 배치를 추궁한 두 번의 대선 후보

1962년 10월 25일 유엔 안보리에서 소련 대표 발레리안 조린에게 "통역을 기다리지 마십시오. 예입니까, 아니오입니까?"라고 몰아붙였고, 그가 답변을 거부하자 "지옥이 얼어붙을 때까지 답변을 기다리겠습니다"라고 말한 뒤 미사일 사진을 공개했다.

애들레이 유잉 스티븐슨 2세(1900~1965)는 미국의 정치가이자 외교관으로, 일리노이 주의 정치 명가 출신이며 1952년과 1956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에게 두 번 패했다. 일리노이 주지사(1949~1953년, 관행에 따라 31대 또는 33대로 계산)로는 주 경찰 인사에서 정치적 고려를 없애고 실적제를 도입했으며, 적색 공포기에 공직자의 충성서약을 요구하는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1949년 앨저 히스의 인품 증인으로 선서 진술을 했고, 이는 1952년 선거에서 매카시와 닉슨이 그를 공산주의에 무르다며 공격하는 데 쓰였다. 1961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유엔 대사로 재임했으며, 1965년 7월 14일 런던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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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1944해군장관실 수석 법률보좌관
  • 1945국무장관 특별보좌관 · 유엔 준비위원회 미국 부대표
  • 1948–1953제31대 일리노이 주지사
  • 1952민주당 대통령 후보
  • 1956민주당 대통령 후보 (재지명)
  • 1961–1965유엔 주재 미국 대사

우르호 케코넨

Urho Kekkonen
정부·행정 핀란드 국가기관 핀란드 핀란드인 1900–1986 ○ 자연사

중립 외교를 국가 전략으로 만든 장기 집권 대통령

1975년 헬싱키에서 35개국 정상과 대표를 맞이하며 분단된 유럽의 협상 무대를 열었다.

우르호 케코넨은 전후 핀란드의 국가 운영과 대외관계를 규정한 정치가로, 1956년부터 1981년까지 대통령을 지냈다. 그는 소련과의 긴장을 관리하면서도 핀란드의 서방 경제·정치적 연결을 유지하는 중립 외교를 발전시켰다. 1972년 11월 디폴리 예비협의를 핀란드에 유치하고 미국과 캐나다를 포함한 유럽안보협력회의의 틀을 다듬은 일은 그 외교의 절정이었다. 그의 통치는 안정과 국제적 중개의 성과를 남겼지만, 대통령 권한과 동방관계에 의존한 정치가 민주적 경쟁을 좁혔다는 논쟁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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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1932중앙탐정경찰청 법률가
  • 1936–1937법무부 장관
  • 1937–1939내무부 장관
  • 1950–1953핀란드 총리
  • 1954–1956핀란드 총리
  • 1956–1981핀란드 대통령
  • 1972–1975유럽안보협력회의 핀란드 개최와 중재

콘스탄틴 드미트리예비치 팜필로프

Константин Дмитриевич Памфилов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인 1901–1943 ○ 자연사

전시 러시아 공화국을 이끈 행정가, 모스크바 대피 실패의 책임자

1942년 5월, 독일군이 소련 깊숙이 진격한 전시의 절정에서 팜필로프는 러시아 공화국 인민위원회의 의장 권한대행이 되었다. 1년도 채 안 되어 심부전으로 숨질 때까지, 그는 전선 너머의 민간 행정 전체를 홀로 떠맡았다.

회계사 아들로 태어나 10대에 당에 입당한 콘스탄틴 팜필로프는 남북전쟁과 크론시타트 진압을 거쳐 소비에트 행정가로 성장했다. 모스크바 주택 관리와 러시아 공화국 공공주택 인민위원을 거쳐, 독소전 발발 직후에는 소련 대피위원회 부의장으로서 민간인 소개를 지휘했으나 당·정부 간부 가족 우선 대피로 모스크바 대혼란(1941)의 한 원인을 제공했다. 1942년 5월부터 이반 호흘로프의 후임으로 러시아 공화국 인민위원회의 의장 권한대행을 맡아 전시 행정을 총괄했으며, 재임 중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그의 유골은 크렘린 벽에 안장되었고, 모스크바 공공주택 아카데미는 그의 이름을 따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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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19볼로스트 혁명위원회 의장, 두홉시나 현 소비에트 집행위 서기, 볼로스트 당위 서기, 현 법원 서기
  • 1921크론시타트 봉기 진압 참여 (지원자)
  • 1923스몰렌스크 노동자학교 졸업
  • 1924–1927모스크바 국립대학교 소비에트 법학부 야간과정 수학
  • 1927–1937모스크바 소비에트 근무, 모스크바 주택신탁 관리자
  • 1937–1938러시아 공화국 공공주택 인민위원부 주택총국장
  • 1938–1940러시아 공화국 공공주택 인민위원
  • 1940–1942러시아 공화국 인민위원회의 부의장
  • 1941.9–12소련 인민위원회의 대피위원회 부의장
  • 1942–1943러시아 공화국 인민위원회의 의장 권한대행

니콜라이 그리고리예비치 이그나토프

Николай Григорьевич Игнатов
정부·행정 소련 러시아 1901–1966 ○ 자연사

흐루쇼프를 구하고, 흐루쇼프를 무너뜨린 크렘린의 두 얼굴

1964년 가을, 이그나토프가 자신의 다차에서 고주파 전화로 흐루쇼프 축출 음모를 논의하는 동안, 그의 경호원이 창가에 서서 모든 대화를 들었다. 경호원이 흐루쇼프의 아들 세르게이에게 경고했지만 흐루쇼프는 웃어넘겼다. «그 애송이들이 나한테 맞서? 말도 안 돼!»

목수 아들로 태어나 체카-OGPU에서 11년 복무하고 대숙청 시기 쿠이비셰프 당 책임자로 급부상했다. 1957년 6월 전원회의에서 중앙위원들을 조직해 반당그룹의 흐루쇼프 축출 시도를 저지했고, 그 대가로 중앙위 서기와 당 간부국(프레지디움) 정위원이 되었다. 이후 흐루쇼프에게 밀려나자 1964년 음모의 핵심 조직자로 돌아서 흐루쇼프 축출을 주도했다. 러시아공화국 최고소비에트 간부회 의장으로서 해빙기 최고 권력투쟁의 양면에 모두 깊이 관여한 역설적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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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21적위대 및 붉은군대 복무
  • 1921–1932체카-OGPU에서 돈 지역 및 중앙아시아 근무, 바스마치 진압 참여
  • 1937–1940쿠이비셰프 주당위 제1서기, 포스티셰프 공격으로 부상
  • 1943–1948오룔 주당위 제1서기, 전시 파르티잔 운동 지휘
  • 1949–1952크라스노다르 변강당위 제1서기
  • 1952–1953CPSU 중앙위 서기, 간부국(프레지디움) 후보위원, 소련 조달장관
  • 1955–1957보로네시·고리키 주당위 제1서기, '고리키식 주택건설' 추진
  • 1957–1960CPSU 중앙위 서기, 간부국(프레지디움) 정위원
  • 1959, 1962–1966러시아공화국 최고소비에트 간부회 의장
  • 1960–1962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조달위원회 의장
  • 1964흐루쇼프 축출 음모의 핵심 조직자로 활동

풀헨시오 바티스타

Fulgencio Batista
정부·행정 쿠바 국가기관 쿠바 쿠바인 1901–1973 → 혁명으로 축출 · 망명

선거와 군부 사이에서 권력을 전환한 쿠바 지배자

1959년 1월 1일, 반군이 수도로 진격하자 바티스타는 대통령직을 버리고 쿠바를 떠났다.

풀헨시오 바티스타는 가난한 농촌 출신의 군인·정치가로, 1933년 하사관 반란 뒤 쿠바 정치를 좌우했다. 1940년에는 새 헌법 아래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사회개혁과 연합국 지원을 추진했지만, 1952년 선거 패배가 예상되자 쿠데타로 권력을 되찾았다. 그의 두 번째 통치는 헌정과 정치적 자유를 억압하고 미국 자본 및 하바나의 조직범죄와 결탁한 권위주의 정권이었으며, 불평등과 탄압은 무장 저항을 키웠다. 1959년 쿠바 혁명으로 축출된 그의 망명은 이후 미·쿠바 대립이 심화되는 출발점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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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쿠바 육군 사병
  • 1923–1933농촌경비대 속기사 하사
  • 1933–1940쿠바 육군 참모총장, 실권자
  • 1940–1944쿠바 헌정 대통령
  • 1948–1952쿠바 상원의원
  • 1952–1959쿠바 대통령, 군사독재자
  • 1959–1973망명 생활, 포르투갈·스페인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오르가노프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Органов
정부·행정 소비에트 러시아인 1901–1982 ○ 자연사

NKVD 트로이카에 이름을 올렸던 러시아 공화국 국가원수

1937년, 야로슬라블 주당 제2서기 대행이던 오르가노프는 NKVD 특별트로이카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 법정도, 변호도, 항소도 없는 세 사람의 서명이 곧 사형선고였다.

니콜라이 오르가노프는 1959년부터 1962년까지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RSFSR) 최고소비에트 상임위원회 의장을 지내며 명목상 러시아 공화국의 국가원수로 활동한 소련의 당·국가 관료이다.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925년 볼셰비키당에 입당한 후 프리모르스키와 크라스노야르스크 지역당 제1서기를 거쳐 당내에서 꾸준히 승진했다. 대숙청 시기인 1937년에는 NKVD 특별트로이카 위원으로 임명되어 약식재판과 즉결처형에 가담했으며, 이는 훗날 국가원수 자리에 오른 인물의 전력으로서 냉혹한 모순을 남겼다. 흐루쇼프 시기 말에는 불가리아 주재 소련 대사로 전출되었고, 이후 당 중앙위원회 산하 해외여행위원회 위원장을 끝으로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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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3붉은 군대 복무
  • 1924–1925유리예프-폴스키 현 콤소몰 위원회 서기
  • 1925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34–1937네코우스키 구당위원회 제1서기 (야로슬라블 주)
  • 1937–1938야로슬라블 주당위원회 제2서기 대행 · NKVD 특별트로이카 위원
  • 1943–1947프리모르스키 지방당위원회 제3서기 → 제2서기
  • 1947–1952프리모르스키 지방당위원회 제1서기
  • 1952–1958크라스노야르스크 지방당위원회 제1서기
  • 1952–1971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58–1959RSFSR 각료회의 부의장
  • 1959–1962RSFSR 최고소비에트 상임위원회 의장
  • 1961–1962RSFSR 담당 CPSU 중앙위원회 뷰로 위원
  • 1963–1967주불가리아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67–1973CPSU 중앙위원회 해외여행위원회 위원장

수반나 푸마

ສຸວັນນະພູມາ
정부·행정 라오스 국가기관 라오스 라오스 1901–1984 ○ 자연사

중립파를 이끈 라오스의 마지막 왕실 총리

1975년 11월, 왕정의 마지막 총리가 이복동생 수파누봉과 함께 국왕 사왕 밧타나를 찾아가 퇴위를 권했다.

라오스 왕실 출신의 정치가로, 중립파를 이끌며 우파와 파테트라오 사이에서 여러 차례 연립정부를 이끈 총리였다. 왕정의 마지막 총리로서 1974년부터 제3차 연립정부 수반을 맡았다. 1975년 11월 수파누봉과 함께 루앙프라방으로 날아가 국왕 사왕 밧타나의 퇴위를 설득했고, 12월 전국인민대표대회 개막 직후 사임했다. 공화국 수립 뒤 새 정부의 고문으로 남아 1984년 비엔티안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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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5라오이사라 임시정부 공공사업 장관
  • 1951–1954총리
  • 1956–1958총리 (민족화해·연립 내각)
  • 1960국민의회 의장·총리
  • 1962삼왕자 합의로 민족통일정부 총리
  • 1974–1975제3차 연립정부 총리
  • 1975사임, 새 정부 고문

히로히토

裕仁
정부·행정 일본 국가기관 일본 일본 1901–1989 ○ 자연사

제국의 전쟁과 전후 전환을 통과한 천황

“참기 어려운 것을 참고 견디라”, 1945년 항복 조서의 구절

히로히토는 1926년부터 1989년까지 재위한 일본의 제124대 천황으로, 제국 헌법의 군주와 전후 헌법의 상징천황을 모두 경험했다. 그는 일본의 대외 침략과 태평양전쟁을 승인한 국가 체제의 정점에 있었으며, 전쟁 수행과 전쟁범죄에 대한 책임의 범위는 지금도 논쟁적이다.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 소련의 대일 참전 뒤 교착된 최고전쟁지도회의에 개입해 포츠담 선언 수락을 결정하고 항복 방송을 했다. 전후에는 천황의 신격화를 부정하고 상징적 국가원수로 남았으며, 해양생물학 연구도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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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도쿄에서 출생
  • 1916황태자로 책봉
  • 1921–1926섭정
  • 1926–1945일본 제124대 천황, 제국 헌법상 대권 행사
  • 1941대미·대영·대 네덜란드 개전 결정 승인
  • 1945포츠담 선언 수락을 결정하고 항복 방송
  • 1947–1989일본국 헌법상 상징천황
  • 1989도쿄에서 사망

바실리 바실리예비치 쿠즈네초프

Василий Васильевич Кузнецов
정부·행정 소련 러시아 1901–1990 ○ 자연사

세 번의 권력 공백기를 메운 임시 국가원수, 그로미코의 22년 1차관

1982년 11월 브레즈네프 사망 직후, 81세의 쿠즈네초프는 임시 국가원수로서 소련 국민에게 신년사를 낭독했다. 안드로포프체르넨코가 연이어 사망할 때마다 같은 역할을 반복하며 말년 소련 권력 이양의 얼굴이 되었다.

농민 출신의 금속공학자로 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과 노조 중앙평의회 의장을 거쳐 소련 외교의 실무 책임자가 되었다. 외무부 제1차관으로 22년간 쿠바 미사일 위기 비밀협상, 중소 국경교섭, 유엔 군축외교를 이끌었다. 1977년 최고회의 간부회 제1부의장이 된 후 브레즈네프·안드로포프·체르넨코 사망으로 이어진 세 차례의 권력 공백기마다 임시 국가원수를 지내며 말년 소련을 상징하는 원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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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1930마케옙카 제철소 연구기사·평로공장장
  • 1931–1933카네기공과대학 연수 (미국)
  • 1937–1940중공업인민위원부 기술국장·주임기사
  • 1940–1944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
  • 1944–1953전소비에트노조 중앙평의회 의장
  • 1953주중 소련 대사
  • 1955–1977소련 외무부 제1차관
  • 1977–1986최고회의 간부회 제1부의장

주마바이 샤야흐메토비치 샤야흐메토프

Жумабай Шаяхметович Шаяхметов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카자흐스탄 1902–1966 ↓ 실각 1954

카자흐 SSR 출신 민족소비에트 의장

1946년 여름 투시노 항공 퍼레이드에서 스탈린이 참석자들에게 "동지들, 이것이 주마바이 샤야흐메토프 — 카자흐스탄 최초의 민족 서기다"라고 소개하며 그를 "동방의 독수리"라 불렀다.

카자흐 당 지도부에서 올라와 민족소비에트 의장을 맡았다. 스탈린 말기와 흐루쇼프 초의 공화국 대표제 라인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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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s카자흐 공화국 NKVD와 당 행정에서 성장
  • 1946–1954카자흐 공산당 제1서기, 스탈린 말기 공화국 지도자
  • 1950–1954민족소비에트 의장, 카자흐 대표로 공식 연방 라인에 진입
  • 1954처녀지 개간과 흐루쇼프 노선 속에서 실각
  • 1966중앙권력 복귀 없이 사망

뱅상 앙리 바디

Vincent Badie
정부·행정 프랑스 국가기관 프랑스 프랑스 1902–1989 ○ 자연사

공화국을 지키려 한 급진사회주의자

“공화국 만세, 그래도!”

뱅상 바디는 변호사 출신의 프랑스 급진사회주의 정치인으로, 지방 행정과 의회에서 활동하며 참전군인과 공화국의 권리를 옹호했다. 1940년 7월 그는 헌법 개정 자체에는 열려 있었지만 페탱에게 권력을 넘겨 공화국을 없애는 데는 반대했고, 이를 밝힌 27인 동의안의 발의를 시도한 뒤 전권 부여에 반대표를 던졌다. 비시 당국의 시장직 정지 뒤 레지스탕스에 참여했으며 체포되어 다하우로 deport되었다. 전후에는 다시 의원과 참전군인 담당 장관을 지냈지만 식민 지배와 프랑스의 해외 주둔을 옹호하는 한계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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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몽펠리에 변호사단 변호사
  • 1931–1938에로주 몽펠리에·지냐크 선거구 도의원
  • 1936–1942에로주 하원의원
  • 1938–1941, 1944–1971폴랑 시장
  • 1945임시 자문회의 의원
  • 1946–1958제4공화국 국민의회 의원
  • 1955–1956, 1958참전군인·전쟁 피해자 담당 장관
  • 1957–1958급진사회주의 의원단 의장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리투아니아 1903–1974 ○ 자연사

소련 리투아니아를 34년간 통치한 공산주의자

1949~50년, 모스크바가 리투아니아의 구세대 공산주의자들을 숙청하려 하자 스니에치쿠스는 스탈린에게 직접 맞섰다. 리투아니아는 구시대 공산주의자 단 한 명도 체포되지 않은 유일한 공화국이 되었다.

34년간 리투아니아 공산당 제1서기를 지낸 소련 최장수 공화국 지도자다. 지하운동 출신으로 소비에트화를 주도했으나, 이후 모스크바 간섭을 완충하며 리투아니아어와 문화 공간을 지켜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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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1921리투아니아 공산당 알리투스 지하위원회 책임자
  • 1921–1925스몰렌스크에서 리투아니아 공산당 출판국 근무
  • 1925–1926, 1933–1936코민테른 집행위 내 리투아니아 공산당 대표부 근무
  • 1927–1930리투아니아 공산당 중앙위 서기 (지하), 선전·조직 담당
  • 1936–1939리투아니아 공산당 제1서기 (비합법, 카우나스)
  • 1940.6–1940.8리투아니아 국가보안국장
  • 1940–1974리투아니아 공산당 제1서기 (34년)
  • 1942–1944리투아니아 파르티잔 운동 참모장

너지 페렌츠

Nagy Ferenc

소련의 압박에 사임당한 소농 출신 초대 총리

스위스 국경에서 아들을 돌려받는 대가로, 자동차 보닛 위에서 사임서에 서명했다.

소농 출신의 정치가로, 소련 점령 하 헝가리 제2공화국의 초대 총리(1946~47). 1930년 틸디 졸탄과 소농당을 세워 사무총장을 지내고 1945년 총선 57% 압승 뒤 국회의장을 거쳐 총리에 올라 펭괴 하이퍼인플레이션을 포린트 도입으로 극복했다. 그러나 라코시 공산당이 「살라미 전술」로 소농당 의원을 제거하자 스위스 휴가 중 아들을 인질로 잡혀 사임당하고 미국으로 망명했다. 회고록 「철의 장막 뒤의 투쟁」(1948)은 동유럽 인민민주주의에 대한 서방 서술의 출발점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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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45소농당 공동 창립·초대 사무총장, 반전·반나치 활동
  • 1944.04–10게슈타포 투옥, 석방 뒤 화살십자 정권 하 은신
  • 1945–46복구장관·국회의장·국민최고회의 위원
  • 1946–47제2공화국 초대 총리: 포린트 도입, 파리 평화조약 서명
  • 1947.06스위스에서 사임 강요, 미국 망명
  • 1947–70망명 정치, 국제농민연합 부회장·회장

니콜라이 빅토로비치 포드고르니

Николай Викторович Подгорный
정부·행정 소련 우크라이나 1903–1983 ○ 사망, 사망일 이견

브레즈네프-코시긴 집단지도부의 국가원수

1965년 바쿠에서 중공업 편향과 시베리아 가스 수출을 비판했으나, 자신이 이끌던 하리코프 당조직을 비판한 기사에 대한 반격이었고 수슬로프는 이를 '수정주의적'이라 불렀다.

폴타바현 카를로프카 태생의 우크라이나인으로, 사료는 출생을 1906년 2월 18일로 기록하지만 내전 중 나이를 세 살 올려 여권상 생년은 1903년이 되었다. 제당공업 엔지니어였던 그는 1940년 소련 식품공업 부인민위원이 되었으나 1942년 제당공장 철거를 직접 지휘했다는 허위 보고로 미코얀의 지시로 해임되었다. 1950년 하리코프 주당 제1서기, 1957년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를 거쳐 1963년 중앙위 서기가 되었고 흐루쇼프 축출의 주요 조직자였다. 이듬해부터 국가원수로서 집단지도체제의 한 축을 이루었으나 1977년 정치국에서 해임되고 6월 국가원수직에서 물러났으며, 1983년 1월 사망일과 장소는 사료마다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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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5–1977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
정부·행정 알바니아 국가기관 알바니아 알바니아 1904–1960 ↓ 수감 중 사망

반파시스트 저항에서 전후 야당 운동으로

1945년, 저항운동의 동료들이 권력을 굳히는 동안 선거법이 야당의 출마 준비를 가로막는다고 비판했다.

슈코더르 출신의 알바니아 교육자·정치인. 파리에서 문학을 공부하고 반파시스트 저항에 참여했으며, 1944년 10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교육장관을 지냈다. 전후 선거법과 야당 활동 제한에 반대하다 1946년 체포되어 수감 중 사망했다. 생몰연도는 AIDSSH의 1960년설을 따르며, 사망지·형량의 이견은 아래에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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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3민족해방전선 참여
  • 1944–1945교육장관
  • 1945선거법 비판·민주연합 야당 운동
  • 1946체포·투옥

빌리스 테니소비치 라치스

Вилис Тенисович Лацис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라트비아 1904–1966 ○ 자연사

울마니스의 총애를 받은 작가에서 라트비아 소비에트화의 설계자로

1940년 7월 21일, 라트비아 국회에서 소련 편입 동의안을 직접 상정한 이는 다름 아닌 그 나라에서 가장 사랑받던 소설가 라치스였다.

항구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어부의 아들』(1933)로 라트비아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소설가가 되었다. 카를리스 울마니스 정권의 후원을 받으면서도 지하 공산당 활동을 이어갔고, 1940년 소비에트 합병 후 라트비아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으로 19년간 재임하며 농업 집단화와 1949년 대규모 추방을 주도했다. 정치인으로서 소비에트 라트비아의 제도적 틀을 세우는 한편, 『폭풍』과 『새로운 기슭으로』로 스탈린상을 두 차례 수상하며 소비에트 문학계에서도 정점에 섰다. 1954~1958년 소련 최고회의 민족소비에트 의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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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1935리가 시립도서관 사서
  • 1935–1940신문 『야우나카스 지냐스』 기자
  • 1940.6–8라트비아 SSR 내무장관
  • 1940–1959라트비아 SSR 인민위원회의·각료회의 의장
  • 1952–1961CPSU 중앙위원회 위원 후보
  • 1954–1958소련 최고회의 민족소비에트 의장
  • 1959–1966라트비아 작가동맹 부의장·이사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코시긴

Алексей Николаевич Косыгин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04–1980 ○ 자연사( 심장마비)

계획에 이윤을 심으려 한 총리

1969년 9월 11일, 국경 충돌이 전면전으로 번질 위기에 코시긴은 베이징 공항에 내려 저우언라이와 약 3시간에서 3시간 반 동안 회담하고 국경 협상 재개에 합의했다.

레닌그라드 봉쇄 시기 국가방위위원회 전권대표로 주민 소개와 라도가호 호저 송유관 부설을 맡아 「생명의 길」 보급선을 세운 기술관료 출신 정치가다. 1964년 10월 15일부터 1980년 10월 23일까지 16년간 각료회의 의장을 지내 이 직위 최장 재임 기록을 세웠고, 1965년 이윤과 판매를 기업 평가 지표로 삼는 경제개혁을 발의했다. 개혁이 시행된 제8차 5개년 계획(1966–1970)은 소련 역사상 가장 성공한 시기로 꼽히지만, 개혁은 1968년 프라하 사태 이후 축소되었다. 1969년 베이징 공항에서 저우언라이와 국경 협상 재개에 합의했고, 1979년 아프가니스탄 파병에 반대했으며, 1980년 건강 악화로 본인 요청으로 물러난 뒤 그해 12월 18일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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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40섬유공업인민위원
  • 1941–42레닌그라드 소개위원회: 「생명의 길」 보급선 운영
  • 1943–46러시아공화국 총리
  • 1949「레닌그라드 사건」 숙청에서 살아남다
  • 1964–80각료회의 의장(총리)
  • 1965이윤·자율 지표의 경제개혁 발의
  • 1966–70제8차 5개년 계획: 전후 최고 성장

표트르 게오르기예비치 라주틴

Пётр Георгиевич Лазутин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05–1950 ✕ 처형

레닌그라드 시 집행위원장, 레닌그라드 사건으로 처형된 6인 중 하나

1949년 8월 13일, 라주틴은 동료 레닌그라드 지도부와 함께 게오르기 말렌코프의 집무실로 호출되어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오늘날 카자흐스탄 페트로파블롭스크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4세에 철도 정비공으로 노동을 시작했다. 콤소몰 간부를 거쳐 1937년 레닌그라드로 옮겼고, 포위전 당시 무역·공업 담당 시당 서기로 도시 보급을 책임졌다. 1946년부터 1949년까지 레닌그라드 시 집행위원장으로 재임하며 전후 도시 재건 계획, 텔레비전 방송 재개, 아브로라 순양함 기념화를 진두지휘했다. 1949년 8월 말렌코프 집무실에서 동료 지도부와 함께 체포되어, '레닌그라드 사건'의 주요 피고인 6인 중 하나로 사형을 선고받고 이듬해 10월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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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5페트로파블롭스크에서 철도 정비공으로 노동
  • 1925–1931콤소몰 서기·노동부장 등 카자흐 자치공화국 콤소몰·교육인민위원부 간부
  • 1931–1937레닌그라드 냉동공업대학 수학; 프룬제 구당 위원회 지도원
  • 1937–1941레닌그라드 시당 무역부장, 식품·무역부 부장
  • 1941–1944레닌그라드 시당 무역·공업 담당 서기, 포위전 중 도시 보급 책임
  • 1944–1946레닌그라드 시 집행위원회 제1부의장
  • 1946–1949레닌그라드 시 집행위원회 위원장 (사실상 시장)
  • 1949–1950레닌그라드 사건: 8월 13일 체포, 1950년 9월 30일 사형 선고, 10월 1일 처형; 1954년 복권

페데리카 몬세니

Federica Montseny

공화국 정부에 참여한 스페인 아나키스트

1936년 11월 장관직을 수락했다. 정부 참여를 둘러싼 에마 골드만과의 논쟁은 같은 혁명을 지지하는 아나키스트들 사이에도 전략적 차이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스페인의 아나키스트이자 작가. CNT 계열 활동가로서 1936년 11월부터 1937년 5월까지 공화국 정부의 보건·공공부조 장관을 지냈다. 전쟁 중 의료와 구호 정책을 추진했지만, 국가권력을 거부하는 아나키즘의 원칙과 장관직 수행 사이의 긴장은 운동 내부의 논쟁을 낳았다. 에마 골드만과의 서신은 반파시즘 전쟁과 사회혁명의 관계를 둘러싼 이견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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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열다섯 살에 첫 단편소설 『비극의 시간』을 발표하며 집필 활동 시작
  • 1927이베리아 아나키스트 연맹(FAI)에 가담
  • 1931아나르코생디칼리스트 노동조합 CNT에 가입, 연설가로 두각을 나타냄
  • 19367월 쿠데타 이후 FAI 반도위원회와 CNT 전국위원회 위원으로 활동
  • 193611월 공화국 정부의 보건·사회부조 장관으로 임명
  • 19375월 바르셀로나 5월 사건 뒤 내각 총사퇴로 장관직에서 물러남
  • 1939프랑스로 망명, 이후 툴루즈를 거점으로 망명 CNT 재건과 아나키스트 언론 활동을 이어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