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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지휘 인물 424명

알프레트 요들

Alfred Jodl
군사·지휘 독일 국가기관 독일 독일인 1890–1946 ✕ 처형

나치 전쟁기획의 실무 책임자

1940년 6월 30일 그는 “영국에 대한 최종 승리는 이제 시간문제”라고 썼다.

알프레트 요들은 제2차 세계대전 내내 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 작전참모장을 맡아 나치 국가의 군사 결정을 작전 명령으로 바꾼 직업군인이었다. 1940년 영국을 상대로 최종 승리가 시간문제라고 판단하며 압박과 침공 선택지를 검토했고, OKW에서 관련 준비와 지휘 문서 작성을 조정했다. 그는 소련 정치위원 처형 명령과 특공대 즉결 처형 명령에 서명하거나 배포했으며, 점령지 주민 강제 소개와 가옥 소각 명령에도 책임을 졌다. 전후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네 혐목 모두 유죄 판결을 받아 1946년 교수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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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바이에른 제4야전포병연대에서 군 복무 시작
  • 1914–1918제1차 세계대전 서부전선 포병 장교
  • 1932–1935육군 작전부 근무
  • 1935–1939국방군 최고사령부 국가방위부 책임자
  • 1939–1945국방군 최고사령부 작전참모장
  • 1944육군 상급대장 진급
  • 1945뉘른베르크 재판 피고, 독일 항복문서 서명
  • 1946뉘른베르크에서 교수형

존 P. 루카스

John Porter Lucas
군사·지휘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890–1949 ○ 자연사

안치오의 신중한 지휘관

“그들은 병력이 부족한 나를 상륙시켜 심각한 곤경에 빠뜨리고, 결국 책임을 누구에게 물을 것인가?”

미 육군 소장 존 P. 루카스는 두 차례 세계대전에 복무한 직업군인으로, 상륙작전의 기획과 지휘를 맡았다. 1944년 안치오에서 미 제6군단을 지휘하며 기습의 성과를 즉시 확대하기보다 교두보를 공고히 하는 길을 택했고, 그 선택은 작전의 조건과 상급 지휘부의 모호한 명령이 얽힌 논쟁이 되었다. 독일군의 반격을 버텨 냈지만 곧 지휘권을 잃었으며, 이후에도 중국 국민정부 군사고문단과 미 제5군에서 복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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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미 육군 소위 임관, 기병 장교
  • 1916멕시코 징벌 원정 참가
  • 1918제33보병사단 제108야전통신대대 지휘, 프랑스에서 부상
  • 1932–1936전쟁부 참모본부 인사과 근무
  • 1941–1942제3보병사단장
  • 1943–1944미 제6군단장, 이탈리아 전선과 안치오 상륙작전 지휘
  • 1946–1948중국 국민정부 주재 미 군사고문단장
  • 1948–1949재편성 미 제5군 부사령관

그리고리 이바노비치 쿨리크

Григорий Иванович Кулик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1890–1950 ✕ 처형

차르친에서 스탈린의 신임을 얻은 포병대장, T-34·카추샤를 거부한 원수

로켓포가 뭐가 필요하단 말이냐? 중요한 건 마차 견인포다.

차르친 전투에서 스탈린의 신임을 얻은 포병 장교로, 1937년부터 1941년까지 적군 포병총국을 이끌며 T-34·KV-1 전차, 카추샤 로켓포, 기관단총 도입을 모두 거부한 극단적 군사 보수주의자였다. 독소전 초기 야전 지휘의 연이은 실패로 1942년 원수 계급이 박탈되고 소장으로 강등되었으며, 1950년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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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0제1기병군 포병대장
  • 1926–1929적군 포병총국(GAU) 국장
  • 1932–1936제3소총군단장 겸 군사위원
  • 1937–1941적군 포병총국(GAU) 국장
  • 1939–1941소련 국방 제1인민위원 대리
  • 1941제54군 사령관
  • 1943제4근위군 사령관
  • 1944–1945군 편성·충원 총국 부국장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Friedrich Paulus
군사·지휘 독일 국가기관 독일 독일계 1890–1957 ○ 자연사

명령과 현실 사이에서 무너진 야전사령관

“한 독일 야전원수가 생포된 전례는 아직 없다”는 승진 통보 뒤, 파울루스는 자살하지 않고 항복했다.

프리드리히 파울루스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국방군의 참모 장교이자 장군으로, 소련 침공 계획 수립에도 관여했다. 제6군 사령관으로 스탈린그라드 공격을 지휘했으나, 소련군의 포위 뒤 히틀러의 사수 명령과 군대의 붕괴 사이에 갇혔다. 그는 1943년 1월 31일 항복했고, 포로 생활 중 나치 체제를 비판하며 반나치 독일 장교 조직에 참여했다. 전후 동독에서 군사사를 연구했지만, 그의 경력은 침략전쟁 수행과 뒤늦은 결별이 함께 남긴 책임의 문제를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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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독일 제국군 제111보병연대 장교 후보생
  • 1914–1918제1차 세계대전 참전, 참모 장교
  • 1935–1939기갑부대 사령부 참모장, 제10군 참모장
  • 1939–1940제10군, 이후 제6군 참모장
  • 1940–1941독일 육군 총참모부 작전 병참 담당 차장
  • 1942–1943독일 국방군 제6군 사령관
  • 1943상급대장, 1월 30일 야전원수로 승진
  • 1954–1957동독 군사사 연구 및 강의

에리크 하인리히스

Axel Erik Heinrichs
군사·지휘 핀란드 국가기관 핀란드 핀란드계 1890–1965 ○ 자연사

전쟁과 외교의 경계에 선 핀란드 장군

1941년 한여름, 만네르헤임은 핀란드 사상 최대인 10만 병력의 카렐리야군을 하인리히스에게 맡겨 스비르 강과 오네가 호수 방면 공세를 맡겼다.

에리크 하인리히스는 핀란드의 군인으로, 만네르헤임과 가까이 일하며 전쟁 지휘와 군사참모 업무를 함께 맡았다. 겨울전쟁에서 카렐리야 지협 방어를 지휘한 그는 1941년 독일과의 군사 협력을 조율한 뒤 카렐리야군 사령관으로 공세를 이끌었다. 전후에는 무기 은닉 사건의 여파로 군 경력을 마쳤지만, 1948년 모스크바 협상과 만네르헤임 전기 집필에 참여하며 군사 전문가이자 저술가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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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18독일에서 핀란드 엽병으로 군사훈련과 동부전선 전투에 참여
  • 1918핀란드 내전에서 제7 엽병대대 지휘
  • 1931–1938제1사단 사령관
  • 1939–1940겨울전쟁에서 제3군단과 카렐리야 지협군 지휘
  • 1940–1941핀란드 육군 총참모장, 1941년 독일과의 군사 협의에 참여
  • 1941–1942카렐리야군 사령관으로 동카렐리야 공세 지휘
  • 1942–1944총참모장으로 전쟁 수행과 독일군 연락 담당
  • 1945핀란드 국방군 총사령관, 무기 은닉 사건 뒤 사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Dwight D. Eisenhower
군사·지휘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890–1969 ○ 자연사

노르망디 상륙을 지휘하고 군산복합체를 경고한 5성 장군 대통령

이런 종류의 일에 뛰어들 때는 단 하나만 명심해야 하네. 반드시 성공해야 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지휘한 5성 장군 출신의 제34대 미국 대통령이다. 재임 중 냉전 봉쇄정책을 추진하며 이란·과테말라 쿠데타를 지원했고, 1960년 3월 카스트로 전복을 위한 CIA 비밀공작을 승인했다. 피그스만 침공 실패 후 케네디에게 '이런 일은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고 조언했으며, 소련의 대응을 두려워해 개입을 숨기려는 발상은 오히려 상대를 대담하게 만들 뿐이라고 경고했다. 퇴임사에서는 '군산복합체'의 위험을 경고하며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성찰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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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웨스트포인트 졸업
  • 1942–1945유럽 연합군 최고사령관 (제2차 세계대전)
  • 1945미국 점령 독일 군정장관
  • 1945–1948미국 육군 참모총장
  • 1948–1953컬럼비아 대학교 총장
  • 1951–1952NATO 연합군 최고사령관
  • 1953–1961제34대 미국 대통령

파벨 예브게니예비치 라지미르

Павел Евгеньевич Лазимир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비에트 러시아 러시아 1891–1920 ○ 발진티푸스

볼셰비키 봉기에 좌파 사회혁명당의 얼굴을 빌려준, 이름뿐인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1917년 10월 21일 밤 라지미르는 두 동료와 함께 군구 사령부에 찾아가 수비대에 대한 최고 권한을 선언했고, 폴코브니코프 대령은 그들의 위원을 인정하지 않으며 법을 어기면 체포하겠다고 답했다.

페트로그라드 군 병원의 위생병으로 출발해 사회혁명당의 병사 선전에 투신한 파벨 라지미르는, 2월 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병사부 의장으로 부상했다. 1917년 10월 볼셰비키는 군사혁명위원회에 비당파적 외관을 입히기 위해 좌파 사회혁명당원인 그를 의장으로 앉혔고, 실질적 지휘는 트로츠키가 맡았다. 라지미르 자신이 MRC 규정 초안을 기초했으며, 1918년 볼셰비키에 입당한 뒤 남부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으로 보급·위생을 이끌다 이듬해 발진티푸스로 29세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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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1917페트로그라드 군 병원 위생병; 사회혁명당원으로 병사 선전 활동
  • 1917.3–10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병사부 의장·군사부 부의장
  • 1917.10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초대 의장; MRC 규정 초안 기초
  • 1917.11–1918내무인민위원부·군사인민위원부 콜레기야 위원
  • 1918–1920남부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보급·위생 조직 총괄

아나톨리 니콜라예비치 페펠랴예프

Анатолий Николаевич Пепеляев

27세에 장군이 된 백군 지휘관, 야쿠티야 원정으로 내전을 끝내다

「나는 내 정치적 신념을 모른다. 나는 당파적이지 않다. 나는 인민에게 선과 행복을, 러시아 인민이 친절하고 평화로우며 강하고 위대한 인민이 되길 바란다」: 야쿠티야 원정 중 일기에서

러시아 내전에서 백군의 최연소 장군 중 하나로, 27세에 소장 계급을 받고 '시베리아의 수보로프'로 불렸다. 1918년 12월 페름을 함락시켜 2만 명의 붉은군대 포로를 석방했으며, 콜차크 휘하에서 제1시베리아군을 지휘했다. 내전이 패배로 기운 후에도 하얼빈에서 목수와 마부로 생계를 이어가다 1922년 9월 자원대를 이끌고 야쿠티야 원정에 나섰으며, 1923년 6월 아얀에서의 항복으로 끝난 이 원정은 러시아 내전의 마지막 군사 작전이었다. 사형 선고 후 10년형으로 감형되었으나, 대숙청기인 1938년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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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파블롭스크 군사학교 졸업, 소위 임관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참전, 중령 진급, 성 게오르기 훈장 4등급 수훈
  • 1918.05–08톰스크 반볼셰비키 봉기 주도, 제1중앙시베리아군단 지휘
  • 1918.09–12소장 진급(27세), 페름 함락, '시베리아의 수보로프' 별칭
  • 1919중장 진급, 제1시베리아군 사령관
  • 1920–1922하얼빈 망명, 목수·마부로 생계
  • 1922.09–1923.06시베리아 의용대 이끌고 야쿠티야 원정, 아얀에서 항복
  • 1924–1938사형 선고 후 10년형 감형, 1936년 석방, 1938년 대숙청으로 총살

예브헨 미하일로비치 코노발레츠

Євген Михайлович Коновалець

시치 소총병을 이끌고 UVO와 OUN을 조직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지도자

1938년 5월 23일 로테르담. 신뢰하던 연락원 파벨 수도플라토프가 건넨 우크라이나식 초콜릿 상자 안에는 모스크바에서 제작한 시한폭탄이 들어 있었다.

오스트리아령 갈리치아 자시키우 출신의 우크라이나 군인·정치가. 제1차 세계대전 중 러시아군 포로가 된 뒤 1917년 키이우에서 시치 소총병을 조직했고,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군의 핵심 지휘관으로 싸웠다. 독립전쟁 패배 후 망명지에서 우크라이나 군사조직(UVO)을 이끌었으며, 1929년 빈에서 여러 민족주의 단체를 통합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OUN)을 창설하고 초대 지도자가 되었다. 유럽과 북미의 망명 조직을 연결하고 국제연맹에 우크라이나 문제를 제기하려 했으나, 1938년 로테르담에서 OUN에 침투한 NKVD 요원 파벨 수도플라토프가 건넨 폭탄으로 암살되었다. 1929년 리투아니아 시민권과 여권을 받아 망명 활동의 법적 기반을 마련했지만, 그의 민족적·정치적 정체성과 운동의 목표는 일관되게 우크라이나 독립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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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5오스트리아-헝가리군 복무, 마키우카 전투 뒤 러시아군 포로
  • 1917–1920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군 시치 소총병 조직·지휘
  • 1920–1929우크라이나 군사조직(UVO) 창립·지도
  • 1929–1938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OUN) 초대 지도자
  • 1938.05로테르담에서 파벨 수도플라토프의 폭탄 공작으로 암살
군사·지휘 일본 국가기관 일본 일본 1891–1945 ✕ 전사

미국을 알았던 이오지마 방어 지휘관

미국은 세계의 대국이므로 일본은 가능한 한 이 나라와 싸움을 피해야 한다고 가족에게 말했다.

구리바야시 다다미치는 일본 제국 육군의 장교이자 외교관으로, 미국의 산업력과 군사력을 직접 관찰한 드문 일본군 고위 지휘관이었다. 그는 이오지마에서 해안의 결전을 피하고 지하호와 종심 방어를 결합해 압도적 전력에 맞서는 소모전을 설계했다. 그 방어는 일본의 패배를 막지 못했지만 미국군의 상륙과 섬 점령에 큰 비용을 부과했으며, 동시에 병사들에게 만세 돌격과 무의미한 자결을 강요하지 않으려는 지휘 원칙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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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육군사관학교 졸업, 기병 소위
  • 1923육군대학교 졸업, 성적 2위
  • 1927–1930미국 주재 무관보, 하버드에서 수학
  • 1931–1933캐나다 주재 무관
  • 1941–1943제23군 참모장, 홍콩 전투에 참전
  • 1943–1944근위 제2사단장
  • 1944–1945제109사단장, 오가사와라 병단장, 이오지마 수비 지휘
  • 1945이오지마 전투에서 전사, 사후 육군 대장 추서

발터 모델

Walter Model
군사·지휘 독일 국가기관 독일 독일인 1891–1945 ✕ 자살

히틀러의 소방수라 불리며 동부전선의 위기를 진압한 방어전의 명수

눈보라를 뚫고 동프로이센으로 날아간 모델은 히틀러 앞에서 단안경 너머로 노려보며 물었다. 「총통 각하, 9군을 지휘하는 것이 각하십니까, 나입니까.」

제1차 세계대전에서 참모 장교로 두각을 나타낸 발터 모델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국방군 최고의 방어전 지휘관으로 명성을 떨쳤다. 르제프 돌출부의 9군 사령관으로서 소련군의 여러 대공세를 격퇴해 '방어의 사자'라는 별명을 얻었고, 히틀러에게는 어디든 급파할 수 있는 '소방수'로 신임을 받았다. 1943년 4월 27일 모델은 항공정찰 사진을 제시하며 쿠르스크 돌출부에 구축된 소련군의 종심 방어선 앞에서 성채 작전이 실패할 것이라고 경고한 최초의 고위 지휘관이었으나 공세는 강행되었고, 북부 공격축을 지휘한 그의 9군은 12km조차 돌파하지 못했다. 전쟁 말기 루르 포위망에서 집단 항복을 거부하고 육군 집단을 해산한 뒤 숲에서 권총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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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952보병연대 사관후보생
  • 1917최고사령부 작전과 참모장교
  • 1935육군총국 제8부(기술) 부장
  • 1940제3기갑사단장
  • 1942제9군 사령관, 르제프 방어전
  • 1943성채 작전 북부 공격 지휘
  • 1944중부집단군 사령관 → B집단군 사령관
  • 1945루르 포위망 포위, 군 해산 후 자결

헬무트 바이들링

Helmuth Weidling
군사·지휘 독일 국가기관 독일 독일계 1891–1955 ○ 옥사

붕괴하는 제국의 마지막 베를린 방위 지휘관

“저항을 즉시 중지하라. 베를린의 민간인과 부상자들이 겪는 고통을 매 시간 연장할 뿐이다.”

헬무트 바이들링은 제국군에서 출발해 국방군 포병 장교와 군단 지휘관으로 올라선 독일 장군이었다. 동부전선에서의 지휘는 나치 독일의 침략전쟁과 점령 체계에 연루되었고, 그의 군단은 오자리치 강제수용소 사건과 관련해 전후 책임 추궁의 대상이 되었다. 1945년 4월 23일 베를린 방위구역 사령관이 된 그는 히틀러의 항복 금지 명령 아래 도시 방어를 지휘했으며, 5월 2일 바실리 추이코프와 협상해 주둔군의 저항 중지 명령을 내렸다. 소련 포로가 된 뒤 전쟁범죄로 25년형을 선고받고 1955년 수감 중 사망했으며, 러시아 검찰은 1996년 그를 복권 대상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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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1918프로이센군 포병 및 비행선 부대 장교
  • 1919–1938국가방위군 포병 장교, 연대 지휘관
  • 1939–1941폴란드·프랑스 전역 및 동부전선 포병 지휘
  • 1942–1943제86보병사단 사단장
  • 1943–1945제41기갑군단 사령관
  • 1945.04제56기갑군단 사령관, 오데르 전선과 베를린 전투
  • 1945.04.23–05.02베를린 방위구역 사령관, 주둔군 항복 명령
  • 1952–1955소련 수감 중 전쟁범죄 유죄 판결, 복역

나폴레온 제르바스

Ναπολέων Ζέρβας
군사·지휘 소속 미확정 그리스 그리스인 1891–1957

점령기 저항과 반공 정치 사이의 군인 지도자

1942년 11월, 그는 영국 공작대와 ELAS의 아리스 벨루히오티스 부대가 합류한 고르고포타모스 작전에 자기 병력을 투입했다.

그리스 육군 장교 출신인 나폴레온 제르바스는 1941년 국민공화그리스동맹(EDES)을 세우고 점령에 맞선 비공산주의 저항을 이끌었다. 그는 1942년 고르고포타모스 철교 폭파작전에서 영국 특수작전집행부, ELAS와 협력했지만, 곧 영국의 지원과 공산주의 세력과의 대립을 중시하며 공화주의에서 왕정 지지로 선회했다. 해방 뒤에는 우익 정치인과 공공질서 행정가로 활동하며 저항운동의 군사적 권위를 내전기의 국가 탄압과 결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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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1914지원병으로 입대해 발칸전쟁에 참전하고 하사관학교를 졸업했다.
  • 1916–1920국방운동에 가담해 마케도니아 전선에서 복무하고 소령으로 진급했다.
  • 1925–1926판갈로스 정권 아래 아테네 수비대 사령관과 공화국수비대 대대장을 지냈다.
  • 1941베니젤로스파 장교들과 국민공화그리스동맹(EDES)을 창립했다.
  • 1942–1944EOEA를 조직해 에피루스에서 무장 저항을 지휘하고 고르고포타모스 작전에 참여했다.
  • 1946–1947국회의원이 되어 막시모스 내각에서 무임소 장관과 공공질서 장관을 맡았다.
  • 1950–1951소포클리스 베니젤로스 내각에서 공공사업 장관을 지냈다.

알렉산드르 바실리예비치 고르바토프

Александр Васильевич Горбато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1–1973 ○ 자연사

콜리마에서 살아 돌아와 베를린을 점령하고, 스탈린 시대 억압을 증언한 육군 대장

돈바스 탄광 갱목용 목재를 금지령을 어기고 반출한 사건을 보고받은 스탈린은 "고르바토프는 무덤만이 바로잡을 것이다"라고 말한 뒤, 사리사욕이 없었음을 이유로 사건을 종결시켰다고 전해진다.

1891년 블라디미르현 파호티노의 농가에서 태어나 1912년 제정 러시아 군대에 입대했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 성 게오르기 십자훈장 3·4급을 받으며 상급 하사관까지 올랐다. 1919년 붉은군대에 들어가 내전에서 기병연대장과 바슈키르 기병여단장을 지켰으며, 1937년 해임되고 1938년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면서도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1939년 5월 콜리마 수용소 15년형을 선고받고 1941년 3월 석방되었으며, 1943년부터 종전까지 제3군을 지휘했고 1945년 베를린 사령관이 되었다. 전후 공수군과 발트 군관구를 지휘하고 1955년 육군 대장이 되었으며, 1964년 회고록으로 1930년대 대숙청을 상세히 밝힌 초기 소련 국가 요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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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1817 체르니고프 후사르 연대, 1차대전 참전 — 게오르기 십자훈장 3·4급, 게오르기 메달
  • 1919–21붉은군대 입대, 58기병연대장·바슈키르 기병여단장으로 내전 참전 — 적기훈장
  • 1933–37제4 투르케스탄 산악기병사단장, 제2기병사단장 (1935년 콤브리그)
  • 1938–41체포·고문, 콜리마 수용소 15년형 선고 (1939), 1941년 3월 복권·석방
  • 1941–43제226소총사단장, 제24군 부사령관, 제20근위소총군단장
  • 1943–45제3군 사령관 — 오룔·브랸스크·바그라티온·동프로이센·베를린 작전, 소련영웅 (1945.4)
  • 1945–46베를린 사령관, 제5충격군 사령관, 메클렌부르크 소련군정청장
  • 1950–58공수군 사령관 (1950–54), 발트 군관구 사령관 (1954–58), 1955년 육군 대장
  • 1958–73국방부 감찰총국 감찰고문, 1964년 회고록 《내 생애의 세월》 출간

에프라임 마르코비치 스클랸스키

Эфраим Маркович Склянский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2–1925 ✕ 의문의 익사

트로츠키카르노, 적군의 행정 두뇌이자 삭제된 창건자

트로츠키는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스클랸스키를 나의 대리인으로 선택했다. 그 후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프랑스 혁명의 라자르 카르노에 비견될 인물이 있다면 바로 스클랸스키다."

적군의 실질적 창설자 중 한 명이자 트로츠키의 가장 신뢰받는 대리인. 키예프 의대 출신의 볼셰비키로, 1918년 겨우 26세에 공화국 혁명군사평의회 부의장 겸 전쟁인민위원 대리에 임명되어 내전 내내 트로츠키가 전선을 누비는 동안 모스크바에서 적군의 전 행정·작전 기구를 지휘했다. 트로츠키는 그를 프랑스 혁명의 군사 조직가 라자르 카르노에 비견했다. 스탈린의 권력 장악 속에서 1924년 해임되어 섬유 트러스트로 좌천되었고, 이듬해 미국 출장 중 롱레이크 호수에서 의문의 익사로 사망했다. 스탈린 시기 이후 그의 이름은 소련 군사사에서 철저히 삭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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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키예프 대학 의대 재학 중 볼셰비키 입당, 지하 선전 활동
  • 1916–1917징집, 보병 복무 후 군의관; 5군 군사혁명위원회 지도부
  • 1917.10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2차 소비에트 대회 상임위원
  • 1917–1918총참모부·최고사령부 정치위원, 구군 해체 및 군수물자 보존 책임
  • 1918.3–9공화국 최고군사평의회 위원
  • 1918–1924공화국 혁명군사평의회 부의장 겸 육해군 인민위원 대리 — 적군 행정·작전 총괄
  • 1924–1925해임, 모스수크노 국영섬유트러스트 관리국장
  • 1925독일·프랑스·미국 기술정보 출장 중 롱레이크 호수에서 익사

표트르 이오노비치 바라노프

Пётр Ионович Барано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비에트 러시아 1892–1933 ✕ 항공사고

소비에트 공군과 항공산업의 주요 창설자

1930년 8월 2일, 바라노프는 보로네시 비행장에서 무장 낙하산병의 첫 전투 투하를 명령했다 — "적 영토에서의 사보타주 작전을 위한 무장 낙하산병 집단 투하를 시연하라" — 이날은 소련 공수군(VDV)의 탄생일이 되었다.

소비에트 공군과 항공산업의 주요 창설자로, 1924년부터 1931년까지 노농적군 공군(VVS) 사령관을 맡아 조직적·산업적 기초를 구축했다. 1932년부터 오르조니키제 휘하 중공업 부인민위원 겸 항공공업 총국장으로 항공기·엔진 생산 확대를 주도해 제2차 세계대전을 떠받칠 항공산업 토대를 놓았다. 1930년 8월 2일 보로네시 근교에서 소련 최초의 전투 낙하산병 투하를 지시해 공수군(VDV) 창설의 기원을 만들었고, 비밀 리페츠크 독일 항공학교 설립 협정에도 서명했다. 초기 로켓 연구(GIRD)와 성층권 비행선 개발을 지원했으며 모스크바·하리코프·카잔 항공대학 설립을 주도했다. 1933년 항공 사고로 아내와 함께 사망, 유해는 크렘린 벽에 안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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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 입당; 1913년 체포·페테르부르크 추방
  • 1915–1917제국군 징집, 혁명 선동으로 체포되어 8년 중노동형 선고; 2월 혁명으로 석방
  • 1917–1918루마니아 전선 병사대표소비에트 전선부 의장; 제4도네츠크군 사령관
  • 1919–1921제8군·동부전선 남부집단·투르케스탄 전선·제1군·제14군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크론슈타트 진압 참가(적기훈장)
  • 1921–1922투르케스탄 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바스마치 토벌 지휘(호레즘 공화국 군사훈장)
  • 1923–1924노농적군 기갑부대장 겸 정치위원; 공군 부사령관 겸 사령관 대행
  • 1924–1931노농적군 공군(VVS) 사령관; 1925년부터 소련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1932–1933중공업 부인민위원 겸 항공공업 총국장

미하일 페트로비치 키르포노스

Михаил Петрович Кирпонос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우크라이나 1892–1941 ✕ 전사

키예프 포위망에서 전사한 남서전선 사령관

1941년 6월 26일, 독일 육군참모총장 할더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남부집단군에 맞서는 적군은 단호하고도 정력적인 지휘를 보여주고 있다.」 브로디 전차전의 혼란 속에서도 키르포노스의 남서전선은 붕괴하지 않았다.

가난한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산림 노동자로 일하다 1915년 징집되었다. 내전기에는 쇼로스의 사단에서 대대장·연대장으로 백군과 싸웠고, 프룬제 군사아카데미를 졸업한 뒤 카잔 보병학교 교장을 거쳤다. 1939-40년 겨울전쟁에서 제70소총사단을 지휘해 핀란드만 빙판을 우회하여 비보르크 배후를 차단, 이 공로로 소련영웅 칭호를 받았다. 1941년 1월 키예프 특별군관구 사령관에 임명되었고, 독소전 발발과 함께 남서전선 사령관으로서 브로디 전차전과 우만·키예프 방어전을 지휘했다. 1941년 9월 20일 키예프 포위망 탈출 시도 중 박격포 파편에 전사했으며, 키예프 참사에서 전사한 최고위급 소련 장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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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7러시아제국군 징집, 하사관·연대위원장
  • 1918–21붉은군대 입대, 쇼로스 사단에서 대대장·제22연대장
  • 1927–34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제44소총사단 참모장 등
  • 1934–39카잔 보병학교 교장
  • 1939–40제70소총사단장 — 겨울전쟁, 소련영웅 수훈
  • 1940.04–06제49소총군단장
  • 1940–41 (1월)레닌그라드 군관구 사령관
  • 1941.01–06키예프 특별군관구 사령관 (주코프 후임)
  • 1941.06–09남서전선 사령관 — 브로디·우만·키예프 전투
  • 1941.09.20키예프 포위망 탈출 중 전사

트래퍼드 리말로리

Trafford Leigh-Mallory
군사·지휘 영국 국가기관 영국 영국인 1892–1944 ✕ 추락사

육군 협동을 중시한 연합군 공군 지휘관

몽고메리는 “그만이 지상전에서 이기려는 유일한 공군 지휘관이며 질투심도 없다”며 전쟁성에 리말로리의 유임을 요구했다.

트래퍼드 리말로리는 제1차 세계대전의 항공 정찰과 육군 협동 경험을 바탕으로 왕립공군의 작전 지휘관이 된 영국 공군 원수였다. 영국 전투에서는 대편대 운용을 둘러싸고 휴 다우딩과 키스 파크의 방어적 운용에 맞섰으며, 그 갈등은 지휘부 교체와도 얽혔다. 그는 오버로드에서 연합원정공군을 조정해 독일군 증원과 수송망을 차단하는 항공계획을 추진했지만, 프랑스 민간인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는 판단도 함께 남겼다. 노르망디 전투 뒤 동남아시아 공군 사령관으로 이동하던 중 프랑스 알프스에서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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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왕립비행군단 제7비행대 조종사
  • 1917–1918왕립비행군단 제8비행대 지휘관
  • 1937–1940왕립공군 제12전투비행단 사령관
  • 1940–1942왕립공군 제11전투비행단 사령관
  • 1942–1943왕립공군 전투사령부 총사령관
  • 1943–1944연합원정공군 총사령관, 오버로드
  • 1944동남아시아 공군 사령관 지명

햘마르 프리돌프 실라스부오

Hjalmar Fridolf Siilasvuo
군사·지휘 핀란드 국가기관 핀란드 핀란드인 1892–1947 ○ 자연사

수오무살미에서 두 개 소련 사단을 모티 전술로 궤멸시킨 핀란드의 예거 중장

사단도 채 갖춰지기 전이었다: 실라스부오는 완편되지 않은 제9사단으로 소련 163사단을 연말까지 격파했고, 이어 라테 도로에서 44사단을 포위해 모티 더미로 만들었다.

헬싱키 출신의 예거 장교로, 제1차 세계대전 중 독일로 건너가 프로이센 예거대대에서 훈련받고 핀란드 내전에서 백군 중대장으로 싸웠다. 겨울전쟁 당시 대령으로 제9사단을 지휘, 수오무살미와 라테 도로에서 소련 제163·제44 사단을 모티 전술로 포위·궤멸시켜 오울루를 향한 소련의 핀란드 분단 계획을 무너뜨렸다. 이 전공으로 소장에 오르고 베스트셀러 『수오무살미 전투』를 썼으나, 모든 공을 자신에게 돌렸다는 비판을 받았다. 계속전쟁과 라플란드 전쟁에서 제3군단장으로 북부 전선과 독일군 축출을 지휘했으며, 1944년 만네르헤임 십자훈장을 받고 54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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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18독일 제27프로이센 예거대대 훈련, 동부전선 참전
  • 1918핀란드 내전 백군 중대장, 탐페레·비푸리 전투
  • 1934–1939북포흐얀마 군관구 사령관, 오울루 시의원
  • 1939–1940제9사단장, 수오무살미·라테 도로에서 소련 2개 사단 격멸
  • 1941–1942제3군단장, 북부 핀란드-소련 전선 지휘
  • 1944카렐리야 지협 제3군단장, 부오크시 방어전
  • 1944–1945라플란드 전쟁 핀란드군 총괄 지휘관, 독일군 축출
  • 1944–1947제1사단장; 1947년 사망

라돌라 가이다

Radola Gajda

군단의 승리를 백군 정치로 확장한 장군

예카테린부르크 점령 직후, 가이다는 로마노프 일가가 며칠 전 살해된 바로 그 이파티예프 가옥에 자신의 사령부를 차렸다.

라돌라 가이다는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내전에서 부상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지휘관이자 전간기 체코슬로바키아의 장군·정치가였다. 1918년 군단의 동부집단을 이끌며 노보니콜라옙스크에서 이르쿠츠크까지 철도선을 장악하고, 중립과 무장투쟁 사이의 논쟁에서 전투를 밀어붙였다. 이후 콜차크의 백군에 합류했으나 지휘권을 잃고, 귀국 뒤 군 참모총장 대행과 파시스트 국민공동체 지도자를 거쳤다. 그의 군사적 반볼셰비즘은 체코슬로바키아 정치에서 파시즘으로 변형되었지만, 나치 점령기에는 저항을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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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1911오스트리아-헝가리군 복무
  • 1915–1916몬테네그로군 장교
  • 1917체코슬로바키아 군단 중대·연대 지휘관
  • 1918군단 동부집단 사령관, 이르쿠츠크·예카테린부르크 점령 지휘
  • 1918–1919콜차크 백군 시베리아군 사령관
  • 1922–1926체코슬로바키아군 사단장, 총참모장 대행
  • 1927–1939파시스트 국민공동체 지도자, 국회의원

안드레이 바실리예비치 흐룰료프

Андрей Васильевич Хрулё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2–1962 ○ 자연사

전쟁 물자를 움직인 보이지 않는 총사령관, 스탈린이 승리의 축배를 바친 유일한 병참 장군

크렘린 승전 축하연. 스탈린이 지휘관들에 대한 건배가 끝난 뒤 술잔을 다시 채우며 말했다: 「이제 진정한 사령관, 이 위대한 승리도 없었을 위대한 전쟁의 일꾼을 위해. 흐룔료프 동지를 위해.」

가난한 대장장이 가문의 소년이 상트페테르부르크 금세공 도제를 거쳐 소련군 대장과 소련군 후방의 창설자로 올랐다. 1941년 8월 1일 통합병참체계인 소련군 후방(Тыл Красной армии)을 설립하고 종전까지 이를 이끌며, 동시에 1942~1943년에는 교통인민위원으로서 전시 철도를 관장했다. 전쟁 기간 동안 크렘린궁 스탈린 집무실을 113회 방문하며 최고사령관과 직접 물자와 보급을 조율했고, 승전 기념연에서 스탈린은 「이 위대한 승리도 없었을, 진정한 사령관이자 위대한 전쟁의 일꾼」이라며 흐룔료프를 위한 건배를 제안했다. 사후 흐루쇼프의 반대를 뚫고 크렘린 성벽 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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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1제1기병군 제11기병사단 정치위원, 남북전쟁 참전
  • 1930–1936붉은군대 중앙군사재정국장 → 국방인민위원부 총무국장
  • 1939–1941붉은군대 보급국장 → 주병참감부장
  • 1941–1951국방부인민위원 → 붉은군대 후방총국장 (Тыл 창설)
  • 1942–1943소련 교통인민위원 (철도 총괄)
  • 1943대장 진급 (11월 7일)
  • 1955–1957숙청 군 지휘관 98명 재활 주도, 블류헤르 원수 포함
  • 1958–1962국방부 감찰고문단에서 여생을 보냄

안드레이 이바노비치 예료멘코

Андрей Иванович Ерёменко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우크라이나 1892–1970 ○ 자연사

스탈린그라드의 남쪽 집게발을 닫은 기병 출신 사령관

1941년 8월, 브랸스크 전선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예료멘코는 스탈린에게 직접 "그 악당 구데리안을 때려부수겠습니다"라고 약속했다. 그 약속은 실패했고, 구데리안은 키예프를 포위했다.

우크라이나 빈농 가정에서 태어나 제1차 세계대전에 징집된 병사에서 소련 원수까지 오른 군인. 부됸니의 제1기병군에서 내전을 치렀고, 기병 장교로 숙청기를 무사히 통과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남동전선(후에 스탈린그라드 전선)을 지휘하며 흐루쇼프와 함께 도시 방어 계획을 세웠고, 천왕성 작전에서 남쪽 포위망을 닫아 파울루스의 제6군을 가두는 데 성공했다. 전쟁 동안 무려 여덟 개 전선군을 지휘했고, 1945년 제4우크라이나 전선군을 이끌어 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 해방을 완수했다. 전후 1955년 원수 계급을 받았으나 군사적 성과와 달리 정치적 비중은 제한적이었다. 금지된 종전 일기를 전쟁 내내 몰래 써내려간 기록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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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17제국군 징집병, 남서·루마니아 전선에서 하사관
  • 1918–20마르콥카 빨치산 조직, 제1기병군에서 내전 종군
  • 1935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 1938–39제6기병군단장, 폴란드 동부 진주
  • 1941.6–7서부전선군 사령관 대리, 스몰렌스크 방어전에서 부상
  • 1941.8–10브랸스크 전선군 사령관, 타이푼 작전에서 포위·부상
  • 1942.8–1943.1스탈린그라드 전선군 사령관, 천왕성 작전 남쪽 집게발
  • 1943–44칼리닌·제1발트·제2발트 전선군 사령관
  • 1944독립연안군 사령관, 크림 해방
  • 1945.3–5제4우크라이나 전선군 사령관, 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 해방
  • 1945–58카르파티아·서시베리아·북캅카스 군관구 사령관
  • 1955소련 원수 진급
  • 1958–70국방부 감찰총감, 회고록 집필

키스 로드니 파크

Keith Rodney Park
군사·지휘 영국 국가기관 영국 뉴질랜드계 1892–1975 ○ 자연사

영국 본토 항공전의 방공 지휘관

레이더와 보고 체계가 알려 준 표적에 맞춰 11그룹 전투기를 즉시 출격시켜 남동부 방어를 유지했다.

뉴질랜드 출신의 영국 공군 장교로, 제1차 세계대전의 포병과 전투기 조종 경험을 방공 지휘로 발전시킨 인물이다. 1940년 11그룹을 지휘하며 런던과 잉글랜드 남동부의 전투기 방어를 운용했고, 레이더·보고 체계와 신속한 소규모 출격을 결합해 독일 공군의 공세에 대응했다. 그의 판단은 비행장 피해와 조종사 소모가 누적되는 조건에서 전투기 전력을 보존하면서도 남부 방공망을 유지해야 한다는 긴장 속에서 이루어졌다. 전후에는 몰타와 극동에서도 공중작전을 지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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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6뉴질랜드 원정군 포병 장교로 갈리폴리와 서부전선에 복무
  • 1916–1918왕립비행군단과 왕립공군에서 전투기 조종사, 48비행대대 지휘
  • 1938–1940전투기지휘부 선임 항공참모장교
  • 1940.04–1940.11제11그룹 항공장교 지휘관, 영국 본토 항공전의 남동부 방공 운용
  • 1940–1941훈련지휘부에서 전투기 조종사와 부대 훈련 담당
  • 1941–1942이집트 항공장교 지휘관
  • 1942–1945몰타 방공과 지중해·중동 및 인도 공중작전 지휘
  • 1946영국 공군 퇴역, 공군 원수 계급

프란시스코 프랑코

Francisco Franco

군부 반란을 승리로 이끌고 36년간 스페인을 지배한 총통

1939년 4월 1일의 마지막 전황 보고, 그가 직접 서명했다. 「오늘, 붉은 군대가 포로가 되고 무장이 해제됨으로써 국민군은 최후의 군사 목표에 도달했다. 전쟁은 끝났다.」 그리고 36년의 독재가 시작됐다.

모로코 식민지 전쟁에서 경력을 쌓아 서른셋에 유럽 최연소 장군이 된 직업군인. 1934년 아프리카군을 동원해 아스투리아스 광부 봉기를 진압하면서 우파에게 「질서의 회복자」로 각인됐고, 1936년 7월 군부 반란에 합류해 카나리아 제도에서 모로코로 날아가 독일·이탈리아 수송기의 힘을 빌려 아프리카군을 본토로 실어 날랐다. 그해 10월 반란 진영의 총사령관 겸 국가수반이 되었고, 1937년 통합령으로 팔랑헤와 카를로스파를 하나의 「국민운동」으로 묶어 개인 지배를 굳혔다. 1939년 승리 뒤에는 정치책임법을 앞세운 대규모 처형과 투옥이 이어져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2차대전에서는 비교전을 표방하면서 동부전선에 청색사단을 보냈고, 1953년 미국과의 마드리드 협정과 정교협약으로 전후의 고립에서 벗어났다. 1959년 안정화 계획 이후의 고도성장은 체제를 지탱한 또 하나의 기둥이었으며, 1969년 후안 카를로스를 후계자로 지명한 뒤 1975년 사망과 함께 체제도 해체 과정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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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2갈리시아 페롤의 해군 집안에서 출생
  • 1907–1910톨레도 보병사관학교 수학
  • 1912–1926모로코 식민지 전쟁 참전, 스페인 외인부대 부사령관을 거쳐 서른셋에 준장
  • 1928–1931사라고사 육군사관학교 교장, 제2공화국 수립과 함께 해임
  • 1934.10아프리카군을 동원해 아스투리아스 광부 봉기를 진압
  • 1935–1936참모총장에 올랐다가 인민전선 정부에서 카나리아 제도로 좌천
  • 1936.07.18–19군부 반란에 합류, 전세기 드래건래피드로 모로코로 이동해 아프리카군 공수를 조직
  • 1936.10.01부르고스에서 반란 진영의 총사령관 겸 국가수반으로 선포됨
  • 1937.04.19통합령으로 팔랑헤와 카를로스파를 단일 「국민운동」으로 통합
  • 1939.04.01전쟁 종료 선포, 정치책임법에 따른 대규모 처형·투옥 개시
  • 1940–1943앙다예에서 히틀러와 회담하고 비교전을 표방하면서 동부전선에 청색사단 파병
  • 1953–1955미국과 마드리드 협정, 교황청과 정교협약 체결; 1955년 유엔 가입으로 고립 탈출
  • 1959안정화 계획으로 자립경제 노선을 접고 고도성장기에 진입
  • 1969–1973후안 카를로스를 후계자로 지명, 1973년 총리 카레로 블랑코가 ETA에 암살됨
  • 1975.11.20마드리드에서 사망, 전몰자의 계곡에 안장됐다가 2019년 이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