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1월, 음악가 소환 회의. 즈다노프의 설교가 이어지는 가운데 시키랴토프가 프로코피예프를 향해 주의를 기울이라고 명령했다. 프로코피예프는 대답했다: "나는 나에게 소개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결코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1906년 입당한 볼셰비키로, 모스크바 재봉노동자 사이에서 지하활동을 시작했다. 1921년 레닌의 첫 당원 검증을 집행한 이래 30년간 중앙통제위원회·당통제위원회에서 스탈린기 모든 핵심 숙청의 실무 집행자로 활동했으며(부하린·리코프 기소, 체첸-인구시 지도부 전원 체포, 몰로토프 아내 추방 등) 1952년 당통제위원장 겸 중앙위 상임위원에 올랐으나 스탈린 사후 한 달 만에 상임위에서 제외되었다.
1919년 페트로그라드 공방전. 세르주: 「백발에 우렁찬 목소리, 술 좋아하는 늙은 뱃사람. 도시는 주로 그 덕에 구원되었다」
15세에 하천 선원이 되어 1903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19년 제7군 정치부장으로 유데니치의 페트로그라드 공세를 막아내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고, 빅토르 세르주는 「도시를 구한 것은 주로 예브도키모프였다」고 기록했다. 내전 후 페트로그라드 노조 의장과 소비에트 부의장을 거쳐 1925년 레닌그라드 주당위 제1서기로 지노비예프의 최측근이자 '신반대파' 지도자가 되었다. 1926년 스탈린에 의해 중앙위 서기로 발탁되었으나 곧 통합반대파에 가담해 모든 직위를 잃고 출당됐다. 복당 후 낙농업 관료로 전락했다가 1936년 제1차 모스크바 전시재판에서 지노비예프, 카메네프와 함께 총살됐다.
1918년 1월 5일 제헌의회 개회 순간, 사회자로 나선 원로 사회혁명당원을 단상에서 밀어내고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의 이름으로 직접 개회를 선언했다.
중앙위 서기국 의장과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의장을 겸하며 혁명 직후 볼셰비키 권력의 실무를 총괄했다. 레닌의 정치 결정을 표결·인사·기관 운영으로 전환한 독보적 조직가로, 10월 봉기 실무 지휘, 제헌의회 해산, 최초 소비에트 헌법 제정, 코민테른 창립을 주관했고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비준에서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 12년 넘는 유형과 감옥 생활로 쌓은 당내 인맥과 현장 감각이 그의 무기였다. 34세에 스페인 독감으로 급서하자 레닌은 '당 전체의 기둥이 무너졌다'고 썼으며, 그의 공백은 훗날 스탈린의 권력 집중을 앞당긴 요인이다.
1937년 9월 10일 군사합의회에서 58조 테러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끝내 자백하지 않았고, 공범으로 누구도 지목하지 않았다. 당일 총살되었다.
모스크바 근교 빈농 가정 출신으로 열셋에 오부호프 공장 선반공이 된 볼셰비키 노동자였다. 1차대전 중 실랴프니코프와 함께 페트로그라드에서 당 중앙위 러시아국을 조직했고, 1917년 아친스크 소비에트를 결성했다. 내전 후 금속노동자조합 중앙위원으로 실랴프니코프와 '노동자 반대파'를 공동 지도하며 노동조합의 경제 통제와 당내 노동자 민주주의를 주장했다. 1922년 '22인 서한'에 서명해 코민테른에 당내 탄압을 호소했고, 1933년 출당 후 1937년 재판에서 끝내 자백을 거부하고 총살되었다.
1937년 9월 2일 군사합의회의 비공개 재판에서 테러 음모 혐의를 끝까지 부인하고 다른 사람도 끌어들이지 않았다. 제10차 당대회 강령이 옳았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고, 다른 야권과 달리 과거가 아니라 철저한 노동자 민주주의를 요구했다고 진술했다.
무롬의 가난한 옛의식파 집안에서 태어난 숙련 선반공이었다. 1901년 RSDLP에 입당해 1903년 분열 뒤 볼셰비키로 섰고, 프랑스·독일·영국 공장을 전전하며 유럽 노동운동을 체득했다. 1917년 2월 혁명 때 수도에 있던 최고위 볼셰비키로서 당 중앙위원회 러시아국과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에서 활동했다. 10월혁명 후 초대 노동인민위원으로 8시간 노동제의 기초를 놓았고, 내전 말기 콜론타이와 함께 '노동자 반대파'를 이끌며 노동조합의 경제 통제를 주장했으나 1921년 제10차 당대회에서 패배했다. 외교직으로 밀려난 뒤 1933년 출당, 1935년 징역형을 거쳐 1937년 9월 2일 거짓 기소로 처형되었다. 1963년 사법적 복권, 1988년 당적 복권.
11세에 마을을 떠나 그림 도제가 되었고, 16세에 성상화가 밑에서 이콘을 그렸다. 그로부터 20년 뒤, 같은 손으로 당 중앙기구의 간부 명단을 쥐었다.
블라디미르 현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11세에 도제로 나가 성상화가 기술을 익혔고, 1905년 20세에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내전 후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지역 당 조직을 이끌었고, 1923년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장에 올라 스탈린의 당 기구 강화 초기 단계에서 간부 임명 라인을 관리했으며, 오르그뷰로 후보위원도 지냈다. 이후 15년간 중앙통제위원회와 당통제위원회에서 근무하며 대숙청기의 당 기구 숙청 작업에도 관여했고, 1939년 한동안 직위에서 배제된 뒤 푸시킨 미술관 관장으로 자리를 옮겨 1944년 은퇴할 때까지 박물관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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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RSDRP 입당,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에서 1905-07년 혁명 참여
1913–16체포 및 유형
1917야로슬라블 RSDRP(b) 위원회 위원
1918–21테이코보 현 당위원장·집행위원장,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현 집행위 부위원장, 이후 현 당위 서기
1926년 레닌그라드 부임 첫해, 키로프는 공장을 돌며 180회 넘는 노동자 집회에서 연설했다.
1904년 톰스크에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해 1905년 혁명에 참여한 혁명가이자 소련 정치인이다. 1921년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제1서기로 바쿠 유전 재건을 이끌었고, 1926년 레닌그라드 당을 맡아 1930년 정치국원이 되었다. 내전기에는 아스트라한 방어를 지휘하며 반볼셰비키 봉기를 대규모 사살로 진압했고, 1933년에는 레닌그라드주 '트로이카' 위원으로 반혁명 사건의 사형 판결권을 가졌다. 1934년 12월 1일 레닌그라드 스몰니에서 레오니트 니콜라예프에게 총격당해 사망했고, 그 죽음은 대숙청의 구실이 되었다.
1928년 10월 19일, 스탈린이 직접 모스크바 당 위원회 및 통제위원회 합동 총회 연단에 올라 '우경 위험'을 주제로 기조연설을 했다. 이어 11월 우글라노프는 모스크바 제1서기직에서 해임되었다.
1886년 12월 5일(구력 17일) 야로슬라블현 페오도리츠코예의 러시아인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일하다 1905~07년 혁명에 가담했고 1907년 볼셰비키로 입당했으며, 1914년 재징집되었다가 부상으로 1916년 제대했다. 1924년부터 1928년까지 모스크바 당 조직을 이끌며 최고 실력자로 부상했고, 중앙위 서기 겸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류틴과 함께 좌익 반대파 분쇄에 앞장섰다. 1928년 우익 반대파의 지도자가 되어 강제 집단화와 급속한 공업화에 반대했으나 그해 11월 모스크바 제1서기직에서 해임되었다. 1932년 류틴 사건으로 출당되었다가 1936년 다시 체포되어 1937년 5월 31일 사형을 선고받고 당일 총살되었다.
“혁명가는 침상에서 죽는 법이 없다. 나는 거리에서 죽을 것이다.” 수차례 테러를 겪으며 자식들에게 남긴 말. 1947년 7월 19일, 혜화동 로터리에서 백의사의 총에 쓰러졌다.
1918년 신한청년당을 결성, 3·1운동의 도화선이 된 2·8독립선언을 주도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창립에 참여하고, 1922년 모스크바에서 레닌·트로츠키와 면담했으며 쑨원의 권유로 중국국민당에 가입했다. 1945년 8월 총독부로부터 평화적 치안권 이양을 받아내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 조선인민공화국 부주석이 되었다. 1946~47년 김규식과 좌우합작운동을 이끌며 통일정부를 추진했으나, 극우단체 백의사에 암살당했다. 남북 모두가 공식 추모한 유일한 정치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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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상하이에서 신한청년당 결성, 당수 취임
19192·8독립선언 주도;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부 차장
1920–1922고려공산당 상하이파 입당; 모스크바 원동피압박민족대회 참석, 레닌·트로츠키 면담
1920~1921년 노동반대파의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서 산업의 집단적 관리와 노동자 권익을 옹호하다 10차 당대회에서 레닌 노선에 패배했고, 신경제정책과 당 관료화에 환멸하여 1924년 5월 7일 권총으로 자살했다.
1887년 예카테리노슬라프 현 루간스크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루간스크 탄약 공장의 금속 선반공으로 일했다. 1904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고 아르한겔스크와 야쿠츠크 현으로 유배되어 두 차례 탈출했으며, 1907~1910년 반동 시기에는 사회혁명당에 속했다가 볼셰비키로 돌아왔다. 1917년 3월 루간스크 볼셰비키 위원회 위원이 되었고 8월 금속노동조합 이사회 의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1월 전러시아 제헌의회 의원이 되었다. 1918년 3월 루간스크 지역 인민위원회를 이끌었고 도네츠-크리보이로크 소비에트 공화국 인민위원회 부의장을 지냈으며, 이후 전러시아 노동조합중앙평의회 간부회 위원과 통신노동조합 의장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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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입당
1917루간스크 금속노동조합 의장, 루간스크 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 위원회 위원
1917.12도네츠-크리보이로크 지역 노동조합위원회 의장
1918.3루간스크 지역 인민위원회 의장
1918.4도네츠-크리보이로크 소비에트 공화국 인민위원회 부의장
1918.7.12–10.17우크라이나 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위원
1919.1.25–1921.5.17전러시아 노동조합중앙평의회 간부회 위원
1919.12.10–1920.12.31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서기
1921.1.5–12.29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서기
1921–1922독일 주재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사회주의 공화국 통상대표부 차석 대표
1922.9.22–1924.5.7전러시아 노동조합중앙평의회 간부회 위원, 통신 노동자·직원 노동조합 중앙위원회 의장
기근의 특사이자 공포의 집행자, '우크라이나의 교수형 집행인'으로 불린 뒤 1939년 처형되다
1935년 12월 28일 『프라우다』 기고에서 학교·아동원·소년궁전·클럽·극장에 새해 전나무를 세우자고 제안해 금지되었던 욜카가 되살아났고, 첫 공식 소비에트 욜카는 1935년 12월 30일 하르키우에서 열렸다.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에서 직조공의 아들로 태어나 1904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고, 1908년 체포되어 블라디미르 중앙감옥과 이르쿠츠크 유형을 거쳤다. 10월 혁명기에 이르쿠츠크를 볼셰비키 손에 넘기고 극동공화국 수립에 참여했으며, 1923년 우크라이나로 전보되어 1925년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서기가 되었다. 1933~34년 약 10만 명의 당원이 제명되어 그는 '우크라이나의 교수형 집행인'으로 불렸고, 1937년 쿠이비셰프 제1서기로 옮겨 대숙청을 확대하다 체포되어 1939년 처형되고 1955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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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1917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와 이르쿠츠크에서 지하 볼셰비키 활동; 1905년 이바노보 파업 참가, 여러 차례 체포·유형
1917–1922이르쿠츠크 소비에트 부의장, 혁명재판소 의장, 중앙시베리아 위원, 극동공화국 군사위원
1924–1930키예프·하리코프 당위원회 서기,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서기
1930–1933전연방 공산당 중앙위 서기 겸 조직지도부장
1932.11–12대기근 와중 곡물징발 특별전권대표로 볼가하류·우크라이나 파견
1933–1937우크라이나 공산당 제2서기 ― 코시오르를 능가하는 실권으로 대숙청·러시아화 주도, 당원 10만 명 숙청
1934–1938전연방 공산당 정치국 후보위원
1937–1939쿠이비셰프 주당 제1서기로 좌천, 1938년 2월 체포, 1939년 2월 26일 총살
세르게이 바그다체프는 1903년 입당한 볼셰비키 실천가로, 제정기의 탄압과 망명을 거치며 당 조직 활동을 이어 갔다. 1917년 4월 그는 페트로그라드 위원회의 이름으로 임시정부 타도 구호를 내건 전단을 발표했지만, 중앙위원회 결정과 어긋나 당 규율 위반으로 징계를 받았다. 그의 성급한 구호는 소비에트 권력 이양을 지지하면서도 대중 속에서 실천 가능한 요구를 따져야 했던 혁명기의 긴장을 보여 준다.
「권력은 차르의 사형집행인들 손에서 빼앗아, 공산당 사형집행인들 패거리에게 넘기라고 빼앗은 게 아니다」 — 봉기 중 배포한 전단에서
차르 치하에서 20년 중노동형을 선고받고 슐리셀부르크 요새에서 복역한 사회혁명당 전투원. 1917년 2월 혁명으로 석방된 후 키르사노프 현 민병대장을 지냈으나, 볼셰비키의 식량강제징발과 지방 통치에 반발하여 1918년 지하로 잠적했다. 1920년 8월 탐보프 농민봉기를 장악해 약 20개 연대 규모의 유격군을 조직하고 '노동농민동맹'을 바탕으로 한 대안정부를 수립했으며, 봉기는 그의 이름을 따 '안토놉시나'로 불렸다. 1922년 6월 GPU 부대에 포위되어 동생 드미트리와 함께 총격전 끝에 사망했다.
바자노프의 회고: 톱스투하는 당대회 투표용지의 필적을 하나하나 대조하며 누가 스탈린의 이름을 지웠는지 식별했다. 「그가 가진 건 반쪽짜리 폐뿐이었지만, 스탈린은 그를 전적으로 신뢰했다.」
스탈린의 첫 개인비서(1918~1935)이자 중앙위 비밀부장(1926~1930)으로, 스탈린 개인 사무국을 운영하고 레닌연구소 기록보관소를 통제한 인물이다. 1922년 백과사전 「그라나트」에 스탈린의 첫 공식 전기를 집필했으며, 레닌 전집 초판 편찬 작업을 주도했다. 망명 시절 프랑스 사회당에 가입해 노동자로 일했고, 귀국 후 민족인민위원부 서기로 스탈린과 인연을 맺었다. 그의 기록 관리(특히 레닌과 트로츠키 관련 문서의 선택적 접근)는 스탈린 진영의 이념적 정비에 결정적 도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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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09체르니고프 사회민주주의 조직에서 혁명운동 시작
1909–11불온서적 소지로 체포, 시베리아 유형
1912–17망명, 오스트리아·프랑스에서 노동; 프랑스 사회당 및 파리 RSDLP(b) 지부 가입
1932년 4월 26일, 우크라이나에 기근이 번지던 때 코시오르는 스탈린에게 보낸 서한에서 밝혔다: "우크라이나에 '기근'이 있다는 온갖 이야기는 단호히 배격해야 합니다. 굶주리는 마을들이 있기는 하나 이는 현지의 무능 탓일 뿐입니다."
1889년 11월 18일(구력 11월 6일) 러시아 제국 지배하 폴란드 왕국 벵그루프에서 공장 노동자 가정의 아들로 태어나 1907년 당에 입당했다. 돈바스와 키예프의 지하운동을 거쳐 우크라이나 공산당 창설에 참여했고, 1928~1938년 우크라이나 당을 이끌며 집단화와 공업화를 밀어붙였다. 1930년 정치국 정위원. 1932~33년 대기근의 존재를 부인하는 보고로 비판받는 동시에 감축과 식량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1938년 5월 체포되어 1939년 2월 26일 사형이 선고·집행되었고, 1956년 3월 14일 복권되었다. 2010년 우크라이나 법원은 그를 1932~33년 기근 조직자 중 한 사람으로 인정했다.
'열일곱인가. 많군. 그러나 다른 방법은 없다. 혁명은 무도회가 아니다.' — 미하일 로마노프 처형을 계획하며 쓴 회고록에서, 1918.
모토빌리하 금속노동자 출신의 러시아 혁명가. 1905년 볼셰비키에 합류, 1918년 페름 체카 부의장으로 미하일 대공 처형을 조직했다. 내전 후 당내 검열을 정면 비판하며 '군주제파에서 무정부주의자까지' 언론자유를 요구했고, 레닌의 직접 반박을 불러일으켜 '먀스니코프주의'로 불렸다. 1922년 제명 후 '노동자 그룹'을 결성, 프랑스 망명 중 『최근의 사기』에서 소련을 국가자본주의로 분석했다. 1944년 귀국 후 체포돼 이듬해 총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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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1906모토빌리하 병기공장 금속노동자, 사회혁명당 입당 후 RSDLP(볼셰비키)로 전향, 무장투쟁반 활동
1906–1917반복적 체포·탈옥·유형, 오룔 중앙감옥 복역 후 2월혁명으로 석방
1917–1918모토빌리하 소비에트 의장,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VTsIK) 위원, 페름 체카 부의장
체카 심문에서: '나는 오늘 레닌에게 총을 쐈다. 나 혼자 한 일이다. 나는 그를 혁명의 배신자로 간주한다. 나는 제헌의회를 지지했고 지금도 지지한다.'
볼린주 유대인 교사 가정에서 태어난 파니 카플란은 16세에 무정부주의자로 활동하다 키예프 총독 암살 기도 혐의로 체포되어 시베리아 강제노동형을 선고받았다. 11년간의 수감 중 실명과 회복을 반복했으며, 마리야 스피리도노바의 영향을 받아 사회혁명당(SR)에 합류했다. 1917년 2월 혁명으로 석방된 후, 볼셰비키의 제헌의회 해산을 계기로 레닌을 혁명의 배신자로 규정하고 1918년 8월 30일 모스크바 미헬손 공장에서 권총 세 발을 발사했다. 이 사건은 같은 날 모이세이 우리츠키 암살과 함께 적색 테러의 직접적 발단이 되었으며, 그녀는 나흘 뒤 크렘린에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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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키예프 총독 수호믈리노프 암살 기도 폭탄 음모로 체포됨
1907–1917시베리아 네르친스크 말체프·아카투이 교도소에서 무기징역 복역, 복역 중 실명과 부분 회복 반복
19172월 혁명 후 임시정부 사면으로 석방, 사회혁명당 활동 재개
1918.08.30모스크바 미헬손 공장에서 연설 마친 레닌에게 브라우닝 권총 세 발 발사, 중상 입힘
1932년 9월 OGPU 심문에서: "내 뒤에는 어떤 배후도 없었고 지금도 없다. 나 자신이 이 조직의 주동자였고, 그 선두에 섰으며, 나 혼자 강령과 호소문 전부를 썼다." — 동지들을 감싸며 모든 책임을 홀로 짊어지려 한 순간.
이르쿠츠크 농민 가정 출신으로 1917년 볼셰비키에 합류, 하얼빈 소비에트 의장과 여러 지역 당서기를 역임하고 1927년 중앙위원 후보가 되었다. 강제 집단화를 목격한 후 우익 반대로 전환, 1932년 200쪽 분량의 「류틴 강령」을 집필해 스탈린 개인독재 타도를 호소했다. 이는 당내 마지막 조직적 반대운동이었다. 1932년 체포되어 1937년 25분 재판 끝에 사형 선고를 받고 당일 총살되었다. 1988년 복권.
1923년 46인 선언에 서명한 뒤 제명과 유배, 정치격리소, 수용소를 거쳐 처형될 때까지 십오 년을 반대파로 살았다.
폴란드 벤그로프에서 태어나 1906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다. 스타니스와프 코시오르의 동생으로, 형이 우크라이나 당 제1서기이자 정치국원으로 올라가는 동안 그는 반대파의 길을 걸었다. 1919년 모스크바 금속노조 지도원, 1920년 제12군 혁명군사위원회 위원과 제14군 정치부 부부장을 지냈고, 1920년부터 1922년까지 전우크라이나 노동조합회의 의장, 1922년부터 1924년까지 노동조합 신문 『트루드』 주필을 맡았다. 1921년 민주중앙집권파에 속했고 1923년 46인 선언에 서명한 뒤 좌익반대파로 활동했다. 1928년 5월 제명되어 볼가 독일인 자치공화국의 포크로프스크로 유배되었고, 유배지에서도 활동을 이어가 정치격리소 3년과 미누신스크 유배 5년을 받았다. 1936년 7월 수용소 5년형으로 우흐타-페치라크에 수감되었다가 1937년 12월 다시 체포되어 1938년 3월 30일 보르쿠타에서 처형되었다.
1963년, 72세의 볼로디체바는 유리 카랴킨에게 말했다: "레닌 동지를 해독하는 것은 아주 어려웠고, 스탈린 동지는 아주 쉬웠습니다…"
레닌의 업무서기(1918~1924)로, 1922년 12월 30~31일 「민족 문제 또는 자치화에 관하여」를 포함한 마지막 구술들을 받아썼다. 1923년 3월 5일 레닌이 트로츠키에게 그루지야 사건 방어를 요청한 편지를 받아쓰고 전달했으며, 유언 초기 필사본을 스탈린의 명령으로 폐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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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VII(4월) 전러시아 당대회 서기국 근무, VI 당대회 속기사
1917.11–1918.07인민위원회의(Sovnarkom) 출판국 서기
1918–1924인민위원회의 및 노동국방회의(STO) 타자수·속기사, 서기 보좌관
1922.12–1923.03레닌의 마지막 논문·편지 구술을 받아씀: 「당대회에 보내는 편지」 「민족 문제 또는 자치화에 관하여」 등
라트비아계 농민 가정 출신의 볼셰비키로, 혁명과 당 조직 사업을 거쳐 중앙 지도부에 올랐다. 그는 농촌 정책에서 전면적 집단화를 강행한 핵심 실무자였으며, 모스크바 당 조직을 이끌며 속도전을 밀어붙였다. 그러나 1930년 과속의 책임을 뒤집어쓰고 실각했으며, 이후에도 중앙아시아와 과학 행정에서 당의 정책을 집행했다. 1937년 체포되어 조사 중 사망했고, 1955년 사후 복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