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당의 권력 독점에 맞서다 교수형에 처해진 농민동맹 지도자
미 국무부 특사 마크 에스리지가 페트코프를 「내가 아는 가장 용감한 사람」이라 불렀다.
불가리아 농민동맹(BZNS) 지도자로, 제1차 세계대전 뒤 프랑스에서 법률을 공부하고 1929년 귀국해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43년 조국전선을 공동 창설했으나 1945년 공산당의 권력 독점에 맞서 야당을 이끌었고, 1946년 대국민의회 선거에서 야당 연합 101석을 얻었다. 1947년 6월 의회에서 체포되어 8월 쿠데타 음모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평화조약 발효 여드레 뒤인 9월 23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상세 이력 보기
- 1929귀국, 언론인으로 활동
- 1938제24대 국회의원으로 선출(12월 선거 무효)
- 1941농민동맹 '알렉산더르 스탐볼리스키' 지도자
- 1943조국전선 창설 참여
- 1944조국전선 제1차 정부 무임소장관(1945년 8월까지)
- 1945반공 연합야당 지도자
- 1946제6대 대국민의회 의원
세계 최초의 여성 외무장관이자 루마니아 공산당 「모스크바파」의 수장, 1952년 게오르기우데지의 숙청으로 몰락하다
1952년 5월 26일과 27일에 열린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게오르기우데지는 파우커·루카·제오르제스쿠를 「반당 분파」로 규탄하고 파우커를 정치국에서 제거했다. 데지가 모스크바에서 스탈린의 재가를 받아 온 뒤였고, 슬란스키 재판으로 동유럽 전역에 유대인 공산주의자 숙청의 바람이 불던 때였다.
바슬루이 지방의 정통파 유대인 가정에서 하나 라빈손으로 태어나 히브리어 교사로 일하다 1915년 사회민주당에 들어갔고, 1921년 루마니아 공산당 창당에 참여했다. 1935년 체포되어 이듬해 크라이오바 재판에서 10년형을 받았으며, 1941년 소련과의 죄수 교환으로 모스크바에 건너가 코민테른 밑에서 망명 루마니아 공산주의자들을 이끌었다. 1944년 귀국해 정치국원·중앙위 서기가 되었고, 1947년 11월 외무장관에 올라 세계 최초의 여성 외무장관이 되었다. 바실레 루카·테오하리 제오르제스쿠와 함께 이른바 「모스크바파」를 이루어 감옥파의 게오르기우데지와 당권을 다투었으나, 1952년 5월 스탈린의 재가를 얻은 데지에 의해 「우편향」과 「좌편향」을 동시에 범했다는 죄목으로 정치국에서 쫓겨나고 7월 외무장관에서도 해임되었다. 1953년 2월 체포되었지만 스탈린 사후 풀려나 재판 없이 당적을 잃었고, 정치 출판사에서 번역 일을 하며 여생을 보냈다. 미국 『타임』이 1948년 「세계에서 가장 힘센 여성」으로 표지에 올린 인물이지만, 로버트 레비의 연구는 그가 강제 집단화에 제동을 걸고 유대인의 이스라엘 이주를 허용해 데지보다 온건한 노선을 걸었음을 보여 준다.
상세 이력 보기
- 1915사회민주당 입당
- 1921루마니아 공산당 창당 참여
- 1935–1936체포, 크라이오바 재판에서 10년형
- 1941죄수 교환으로 소련행, 코민테른에서 망명 루마니아 공산주의자 지도
- 1944귀국, 정치국원·중앙위 서기
- 1947–1952외무장관
- 1952정치국 제거, 외무장관 해임
- 1953–1954체포, 스탈린 사후 석방, 당적 박탈
「일 미리오레(Il Migliore)」: 40년간 서유럽 최대 공산당을 이끈 전략가
죽음을 앞두고 쓴 '얄타 각서'로 모스크바로부터의 자율, 다중심주의를 제창하다 (1964)
이탈리아공산당 창립자·서기장. 코민테른 인민전선을 주도했고 1944년 살레르노 전환으로 반파시스트 연정 참여를 이끌었다. 임종 직전 얄타 각서로 다중심주의를 제창, 유로코뮤니즘의 선구가 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1이탈리아공산당(PCd'I) 창립 참여
- 1927–1964당 서기 — PCI를 서유럽 최대 공산당으로
- 1935–1939코민테른 집행부, 스페인 내전에서 인민전선 지도
- 1944살레르노 전환 — 반파시스트 연립정부 참여
- 1946–1948제헌의회 '헌법의 아버지', 1948년 암살 미수 생존
- 1964얄타에서 사망 — '얄타 각서'로 다중심주의 제창
동독을 건설하고 베를린 장벽을 세운 독일 공산주의 지도자
1961년 6월 15일 기자회견에서 "아무도 장벽을 세울 생각이 없습니다"라고 공언했으나, 두 달 뒤인 8월 13일 그의 명령으로 베를린 장벽 건설이 시작되었다.
1893년 라이프치히의 재단사 가정에서 태어나 가구 목수로 훈련받았고, 1912년 사민당에 입당한 뒤 1919년 스파르타쿠스단을 거쳐 1920년 독일공산당(KPD)에 들어갔으며, 1923년 중앙위원, 1928~1933년 라이히스타크 의원이었다. 나치 집권 후 소련으로 망명해 코민테른에서 일했고, 1945년 4월 30일 '울브리히트 그룹'을 이끌고 귀국해 1946년 강제 합병으로 사회주의통일당(SED)을 창당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1950년 SED 제1서기가 되어 동독을 통치하며 1961년 베를린 장벽 건설을 명령하고 1963년 신경제체계 개혁을 추진했으나, 1971년 5월 3일 실각해 호네커에게 자리를 넘겼다.
상세 이력 보기
- 1912독일 사회민주당(SPD) 입당
- 1918스파르타쿠스단 및 독일공산당(KPD) 창립 참여
- 1923–1933KPD 중앙위원, 라이히스타크 의원
- 1933–1945파리·프라하·모스크바 망명, 코민테른 활동
- 1943자유 독일 국가위원회(NKFD) 결성 참여
- 1950–1971독일사회주의통일당(SED) 중앙위 제1서기
- 1960–1973독일민주공화국 국가평의회 의장
- 1971브레즈네프의 압력으로 당직 사임
농민의 나라에 맞게 혁명의 문법을 다시 쓴 중국 혁명의 지도자
1930년 1월 5일 린뱌오에게 보낸 서신에서 옛 중국 속담 “별불꽃 하나가 들판을 태운다(星星之火,可以燎原)”를 인용하며 홍군의 전망을 둘러싼 비관론에 답했다.
후난성 샤오산 부근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창사에서 공부했고, 1911년 혁명과 반제국주의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베이징대학 도서관 직원으로 일하며 마르크스주의를 접했고 1919년 5·4 운동에 참여했으며, 1921년 상하이 제1차 전국대회에 13명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석해 중국공산당 창립에 가담했다. 농촌 근거지와 게릴라전, 인민전쟁 전략을 발전시켰고 1935년 1월 쭌이 회의에서 지도부에 선출되었으며 그해 11월 군사위원회 주석이 되었고, 당 주석직은 1943년에 맡았다. 토지개혁과 공업화를 이끌었고 1950년 10월 한국전쟁에 인민지원군을 파병했으며, 반대파를 탄압하고 대약진 운동(1958~1962)과 1966년 문화대혁명을 겪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1중국공산당 창립 참여
- 1927후난 농민운동 시찰 보고 — 농민 혁명론
- 1934–1935대장정 — 쭌이 회의에서 실권 장악
- 1937철학논문 《실천론》·《모순론》 발표
- 1940《신민주주의론》 발표
- 1949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선포
- 1958–1961대약진 운동 — 파국적 기근
- 1966–1976문화대혁명
안데스의 현실로 마르크스주의를 다시 쓴 독학자
“라틴아메리카의 사회주의는 모사도 복제도 아닌 영웅적 창조여야 한다.” — 『아마우타』(1928)
페루의 마르크스주의 사상가. 이탈리아에서 그람시 사상을 접하고, 마르크스주의를 안데스 현실에 맞게 재창조했다. 『7개 에세이』에서 원주민 문제를 토지 문제로 분석, 페루사회당을 창립했다. 35세로 사망.
상세 이력 보기
- 1919–1923이탈리아 체류 — 공장평의회 운동과 그람시 서클 접촉
- 1926『아마우타』 창간
- 1928『7개 에세이』 — 토지·원주민 문제의 마르크스주의 분석
- 1928–1929페루사회당과 노동총연맹(CGTP) 창립
- 193035세로 사망
18년 감옥에서 버틴 일본공산당 초대 서기장
1956년 흐루쇼프는 제20차 당대회 개막에서 스탈린·고트발트와 함께 '도쿠다 규이치'의 이름을 부르며 기립 추모를 요청했고, 전당대회가 일어섰다.
일본공산당 창립(1922년) 원년 멤버로, 1928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18년간 비전향으로 복역한 후 1945년 초대 서기장으로 당을 재건했다. 1950년 코민포름의 평화혁명노선 비판을 계기로 소련·중국과 보조를 맞춘 무장투쟁으로 전환했고, 공직추방 후 중국으로 망명해 베이징기관에서 당을 지휘하다 1953년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2일본공산당 창립 참여, 중앙위원
- 1928–1945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 18년 복역 (아바시리·지바·도요타마·후추 형무소)
- 1945일본공산당 서기장 (초대)
- 1946–1950중의원 의원 (3선, 도쿄 3구)
- 1950–1953중국 망명, 베이징기관 조직 및 무장투쟁 지휘
샌프란시스코에서 강대국 거부권에 맞서 중소국 연대를 이끈 오스트레일리아 외무장관
스테티니어스·그로미코와 함께 긴급소위원회를 구성한 에바트는 '화해적 태도'로 초안을 제시했고, 6월 20일 총회 토론권 교착이 해소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 노동당 정치인이자 법률가로, 36세에 고등법원 최연소 판사가 되었고 이후 커틴·치플리 정부에서 검찰총장 겸 외무장관을 지냈다. 1945년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 5대 강국의 안보리 거부권에 맞서 중소국 대표로 38건의 수정안을 제출했고, 스테티니어스·그로미코와 함께 긴급소위원회를 구성해 총회 토론권을 둘러싼 교착을 해소했다. 1948년 유엔 총회 의장으로 세계인권선언 초안을 주도했으며, 이스라엘 건국을 심의한 팔레스타인 특별위원회 의장도 맡았다. 1951년 노동당 대표가 되었으나 반공 이슈를 둘러싼 당내 분열과 세 차례 연속 총선 패배 끝에 1960년 정계에서 물러났다.
상세 이력 보기
- 1925–1930뉴사우스웨일스 주의회 의원
- 1930–1940오스트레일리아 고등법원 판사
- 1941–1949검찰총장 겸 외무장관
- 1948–1949유엔 총회 의장
- 1951–1960노동당 대표·야당 지도자
- 1960–1962뉴사우스웨일스 대법원장
관 뚜껑을 연 사람, 침대에서 죽은 첫 지도자
1956년 11월 18일, 모스크바 폴란드 대사관 리셉션에서 서방 대사들에게 말했다. 「역사는 우리 편이다. 우리가 당신들을 묻어버릴 것이다!」 열두 NATO 국가 대사와 이스라엘 대사가 자리를 떴다.
스탈린의 그늘에서 당 간부로 성장해 1953년 권력투쟁에서 승리하고 제1서기가 되었다. 1956년 2월 25일 제20차 당대회 비공개 회의에서 스탈린의 대숙청을 고발하는 비밀연설로 탈스탈린화를 열었다. 1956년 헝가리 봉기를 소련군으로 진압했고,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를 거쳐 미사일 철수와 대가로 미국의 쿠바 불침공 약속을 받아냈다. 1964년 10월 14일 동료들의 표결로 해임되고 은퇴했으며, 회고록을 남기고 1971년 9월 11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35–38모스크바 당 제1서기, 지하철 건설
- 1938–49우크라이나 당 제1서기
- 1942–43스탈린그라드 전선 군사위원
- 1953–64당 제1서기
- 1954–56처녀지 개간, 비밀연설
- 1957「반당 그룹」 격퇴
- 1961제22차 당대회, 스탈린 시신을 묘소에서 이장
- 1964해임, 연금 생활
분단의 현장에서 국가 권력으로 이동한 사회민주주의자
1948년 11월 30일, 그는 동부 부문의 ‘임시 민주 마기스트라트’ 시장으로 선출되었다.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2세는 사회민주당 정치인에서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의 지도자로 이동한 독일 정치가로, 초대 대통령의 아들이라는 상징성과 자신의 정치적 선택이 겹쳐 있었다. 나치 시대에는 불법 정치활동으로 수용소에 구금되었고, 전후에는 소련 점령지에서 사민주의와 공산주의의 강제적 통합을 거쳐 SED 체제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1948년 11월 30일 그는 동부 부문의 비정상적 시의회를 이끌어 선출된 베를린 정부를 폐위시키고 경쟁적 동베를린 마기스트라트를 세웠으며, 이후 도시 재건과 동독 국가기관 운영을 함께 맡았다.
상세 이력 보기
- 1919–1925사회민주당 기관지 《포어베르츠》 편집자
- 1927–1933브란덴부르크안데어하펠 시의원
- 1928–1933독일 국가의회 의원
- 1946–1949브란덴부르크 주의회 의장
- 1946–1979독일 사회주의통일당 중앙위원·정치국 위원
- 1948–1967동베를린 초대 시장
- 1949–1979동독 인민회의·국가평의회 지도부
- 1971–1979SED 인민회의 원내단 의장
빵집 노동자에서 공산당 서기장으로: 반파시즘 인민전선을 이끈 스페인 혁명의 지도자
“우리는 새로운 유형의 민주공화국, 깊은 사회적 내용을 지닌 민주적 의회공화국을 위해 싸우고 있다.” — PCE 중앙위원회 확대회의 보고, 발렌시아, 1937년 3월 5일
스페인공산당(PCE) 서기장으로서 인민전선 전략을 주도하며 당을 소수 분파에서 공화국 진영의 핵심 대중정당으로 키웠다. 세비야의 빵집 노동자 출신으로 아나키스트 노동운동에서 활동하다 1927년 PCE에 입당, 1932년 서기장에 올랐다. 1935년 제7차 코민테른 대회에서 게오르기 디미트로프와 함께 반파시스트 통일전선 노선을 관철했으며, 내전 중에는 “새로운 유형의 민주공화국”을 내걸고 군사적 승리에 당의 전 역량을 집중했다. 말기 위암으로 소련에서 투병하다 1942년 트빌리시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유산은 이후 수십 년간 스페인 공산주의 전통의 토대가 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3세비야 제빵노동조합 '라 아우로라' 가입
- 1917세비야 제빵노동자 파업 지도
- 1920CNT 총파업 참여
- 1925프리모 데 리베라 독재 시기 마드리드에서 체포, 투옥
- 1927스페인공산당(PCE) 입당, 안달루시아 조직 지도
- 1932.3제4차 PCE 대회 — 중앙위원회 위원 선출
- 1932.9PCE 정치국 진입, 곧 서기장 임명
- 1935제7차 코민테른 대회 참석 — 디미트로프의 반파시스트 통일전선 노선 지지
- 1936.2마드리드 선거구 코르테스 의원 당선
- 1936–1939내전 기간 PCE 지휘 — 군사적 승리와 공화국 진영 단결에 주력
- 1938.12위암 치료 위해 소련으로 이송, 레닌그라드에서 수술
- 1939–1942코민테른 사무국 간부 — 스페인·남미·영국령 인도 담당
몽골 혁명과 권력 집중
1945년 8월 스탈린에게 보낸 축전에서, 몽골과 소련 인민의 우정은 영원히 불멸하리라고 다짐했다.
몽골의 1921년 혁명에 참여한 군사·정치 지도자다. 소련과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권력을 집중했고 1930년대 후반 대규모 숙청을 이끌었다. 그의 지도기는 국가 기반 형성과 정치·종교적 억압을 함께 살펴야 하는 시기다.
상세 이력 보기
- 1924–1928인민혁명군 총사령관
- 1928–1930소후랄 상임위원회 의장
- 1930외무장관
- 1935–1939제1부수상
- 1936몽골 인민공화국 원수 칭호
- 1939–1952수상 (정부 수반)
- 1939할힌골 전투에서 몽골군 지휘
「모든 것이 가능하다」를 쓴 사회당 좌파, 인민전선의 왼쪽 경계
「모든 것이 가능하다」, 파업이 절정으로 치닫던 때 『르 포퓔레르』 1면에 실은 기고의 제목이자 결론, 1936년 5월 27일
교사 출신의 사회당(SFIO) 좌파 지도자. 1935년 당내 분파 「혁명적 좌익」을 결성해 인민전선을 지지하되 그 너머의 혁명적 출구를 주장했고, 1936년 5월 파업이 절정으로 치닫던 때 『르 포퓔레르』에 「모든 것이 가능하다」를 실어 논쟁의 한복판에 섰다. 블룸 총리실의 공보 업무를 맡으면서도 급진화를 멈추지 않았고, 1938년 당에서 제명되자 노동자농민사회당(PSOP)을 세웠다. 전쟁 중 멕시코에 망명했고, 전후 SFIO에 복귀해 죽을 때까지 당내 좌파와 반식민주의 진영에 섰다.
상세 이력 보기
- 1895–1914센에마른의 교사 집안, 사범학교를 나와 교사가 됨
- 1914–19181차 대전 참전, 전쟁이 그를 반군국주의자로 만듦
- 1924–1935SFIO 파리 연맹과 교원노조 운동
- 1935당내 분파 「혁명적 좌익」 결성
- 1936.05「모든 것이 가능하다」 기고
- 1936–1937블룸 총리실의 공보 업무 책임
- 1938제명 뒤 노동자농민사회당(PSOP) 창당
- 1940–1946멕시코 망명
- 1946–1958SFIO 복귀, 당내 좌파와 반식민주의 진영에서 활동
- 1958.06파리에서 사망
유럽 대중공산당의 첫 여성 지도자, 그리고 가장 날카로운 반스탈린주의 전향자
“우리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레닌그라드에는 테러가 지배하고 있다.” — 마슬로프에게 보낸 편지가 소련 검열에 적발되며 공개 낭독되었고, 이것이 스탈린과의 결정적 단절이 되었다 (1926년 2월, 코민테른 특별회의).
독일공산당(KPD) 공동의장(1924–1925)으로 유럽 주요 공산당을 이끈 최초의 여성. 빈 철학 교수의 딸로 태어나 1918년 오스트리아 공산당을 공동 창립했고, 베를린에서 마슬로프와 함께 KPD 극좌파를 이끌며 1923년 봉기의 이론적 기반을 마련했다. 코민테른 제5차 대회에서 트로츠키를 공개 비난할 만큼 치열한 파벌 투사였으나, 1926년 스탈린에게 복종을 거부하며 축출된 뒤 평생 반스탈린주의 좌파 지식인으로 활동했다. 망명지 미국에서 정보기관 협력자로 전락했다가 말년에 다시 공산주의로 회귀하는 극적인 궤적을 남겼다.
상세 이력 보기
- 1918오스트리아 공산당(KPÖ) 공동 창립 — 당원 번호 1번
- 1919–1921베를린으로 이주, KPD 입당
- 1921–1923베를린 지역당 지도자 — 마슬로프와 함께 KPD 좌파의 '공세 이론' 주창
- 1924–1925KPD 공동의장 — 제국의회·프로이센 주의회 의원, 코민테른 집행위 후보
- 1924코민테른 제5차 대회 독일 대표단장 — 트로츠키 공개 비난
- 1925–1926모스크바에 강제 체류 — 스탈린의 당 노선 복종 요구 거부
- 1926KPD 제명 — 통합야당 지지
- 1928레닌분트 참여 후 곧 탈퇴
- 1933–1941파리 망명 — 트로츠키와 협력, 국제그룹 결성
- 1941–1955미국 망명 — 《스탈린과 독일 공산주의》(1948) 출간
- 1947하원 반미활동위원회(HUAC)에서 형제 게르하르트·한스 아이슬러에게 불리한 증언
- 1955–1961파리 귀환 — 《레닌에서 마오까지》(1956) 출간, 반공주의 철회
“그들은 통과하지 못하리라!”: 파시스트 군대의 마드리드 진입을 저지한 반파시즘의 목소리
“침략의 파시즘이 스페인에서 저지르는 범죄를 계속 방치한다면, 파시즘은 유럽의 다른 민족들에게도 밀어닥칠 것입니다. 스페인 인민은 무릎 꿇고 사느니 차라리 서서 죽기를 택합니다.” — 파리 지지집회 연설, 1936년 9월 3일
스페인공산당(PCE)의 상징적 지도자로, 내전 중 "¡No pasarán!"을 외쳐 반파시즘 투쟁의 얼굴이 되었다. 망명 중 프랑코 독재에 저항했으며, 1968년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에 공개 반대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7스페인 사회노동당(PSOE) 입당
- 1918『엘 미네로 비스카이노』에 첫 기사 게재, 필명 '파시오나리아' 사용 시작
- 1922통일 스페인공산당(PCE) 창립 참여
- 1930PCE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
- 1933반파시스트 여성연합 창설 의장
- 1935코민테른 제7차 대회 — 집행위원회 후보위원 선출
- 1936.2아스투리아스 지역구 코르테스 의원 당선
- 1936.7라디오 연설 “¡No pasarán!” — 파시스트 군대의 마드리드 진입 저지 호소
- 1937코르테스 부의장 선출
- 1939–1942소련 망명 — 코민테른 활동 지속
- 1941–1963단파방송 '독립 스페인 라디오'(라디오 피레나이카) 지휘
- 1942–1960스페인공산당(PCE) 서기장
- 1945국제민주여성연맹(WIDF) 공동 창립, 부의장
- 1960–1989PCE 의장
- 1968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개입 공개 반대
- 1977프랑코 사후 귀국 — 41년 만에 다시 코르테스 의원 당선
1948년 2월 쿠데타로 체코슬로바키아를 인민민주주의 체제로 전환시킨 공산당 지도자
우리는 체코슬로바키아 프롤레타리아트의 당이며 우리 최고 사령부는 바로 모스크바다. 우리는 러시아 볼셰비키에게서 당신들의 목을 비트는 법을 배우러 모스크바에 간다. 그 웃음보는 찢어 놓겠다! 1929년 12월 21일 체코슬로바키아 국회 첫 연설에서
모라비아의 가난한 농가 출신으로 1921년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KSČ) 창립에 참여했고, 1929년 제5차 대회에서 서기장이 되어 사망까지 당을 이끌었다. 코민테른 서기(1935–1943)를 지내며 인민전선 노선을 추진했고, 1945년 5월 프라하로 돌아와 부총리와 민족전선 의장을 맡았다. 1946년 총선에서 KSČ가 38%를 얻은 뒤 총리가 되었고, 1948년 2월 정변으로 권력을 장악해 그해 6월 14일 체코슬로바키아 최초의 공산당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대통령으로서 산업 국유화와 농업 집단화를 밀어붙이며 밀라다 호라코바(1950년 처형), 루돌프 슬란스키와 블라도 클레멘티스(1952년 처형) 등의 재판을 만들었고, 1953년 3월 14일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1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KSČ) 창립 참여
- 1929–1945KSČ 중앙위원회 서기장
- 1935–1943코민테른 서기
- 1938–1945모스크바 망명, 체코슬로바키아 공산주의 저항 지도
- 1945–1946체코슬로바키아 부총리
- 1946–1948체코슬로바키아 총리
- 1948–1953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분열을 넘어 노동자 통합을 추구한 혁명가
1936년 체포된 뒤 마우린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감옥에 갇혀 있었고, POUM은 그의 부재 속에서 안드레우 닌의 지도 아래 놓였다.
호아킨 마우린은 스페인의 공산주의 정치가이자 노동운동가로, 카탈루냐에서 대중적 혁명정당의 길을 모색했다. 그는 노동자농민블록을 이끌며 공산당의 스탈린주의 노선과 결별했고, 1935년 안드레우 닌과 함께 POUM을 창설해 초대 총서기가 되었다. 1936년 군사봉기 때 국민파 지역에 갇혀 체포된 뒤 내전 전 기간을 감옥에서 보냈으며, 그의 부재 속에서 닌이 당을 이끌었다. 석방과 망명 뒤에는 뉴욕에서 문필과 통신 사업으로 활동하며 스페인 혁명의 경험을 기록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4–1920레리다에서 교사로 일하며 CNT에 가입
- 1920–1922레리다 CNT 서기, 《루차 소시알》 편집자
- 1921–1922CNT 전국 서기국 임시 서기
- 1924–1930카탈루냐발레아르 공산주의연맹 조직자
- 1931–1935노동자농민블록 서기장
- 1935–1936POUM 공동 창립자, 초대 총서기
- 1936인민전선 후보로 바르셀로나 하원의원
- 1949–1973뉴욕 아메리칸 리터러리 에이전시 설립자·작가
CPGB 창립 당원이자 반세기 수석 이론가, 마르크스주의 인도사 서술의 개척자
1956년 흐루쇼프 비밀연설 후 더트는 말했다. '스탈린이라는 태양에도 당연히 약간의 흑점은 있다.' 소련 체제가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고 바로잡을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고 덧붙였다.
영국 공산당 창립 당원으로 반세기 동안 수석 이론가를 지낸 마르크스주의 역사가이자 저널리스트. 1934년 《파시즘과 사회혁명》에서 파시즘을 독점자본주의 위기의 극단적 형태로 분석했고, 1940년 《인도 투데이》로 마르크스주의 인도사 서술을 개척했으며, 1939년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 반전 노선을 둘러싸고 해리 폴릿을 대신해 총서기를 역임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0CPGB 창립 당원
- 1921–1974《Labour Monthly》 창간 · 53년간 편집장
- 1923–1965CPGB 집행위원회 위원
- 1924코민테른 집행위원회(ECCI) 부위원
- 1925–1935코민테른 대표(벨기에·스웨덴) · 인도 공산당 지도
- 1936–1938《Daily Worker》 편집장
- 1939–1941CPGB 총서기
- 1943–1965CPGB 집행위원회 부의장 · 부총재
37년간 프랑스 공산당의 2인자, 의회와 지하를 오간 스탈린주의자
「기회주의, 합법주의, 의회 환상이 있었다… 우리가 당 앞에서 용기 있게 이 자기비판을 수행한다면 대중 사이에 투쟁에 유리한 분위기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1947년 9월 코민포름 창립 회의에서
20구 파리에서 레옹 블룸을 꺾고 국회의원이 된 이후 37년간 프랑스 공산당 지도부에서 모리스 토레즈의 2인자로 활동한 정치인. 제2차 세계대전 중 점령 하 프랑스에서 지하당을 지휘했으며, 전후 국민의회 부의장을 지냈다. 1947년 코민포름 창립 회의에서 PCF의 참여 정부 노선을 '의회 환상'이었다고 자인하며 마셜 플랜에 대한 투쟁적 반대로의 전환을 상징했다. 1969년 대통령 선거에서 21.3%를 득표, 프랑스 공산당 사상 최고 득표율을 기록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5–19171차 대전 참전, 베르됭에서 부상 후 포로
- 1920–1926PCF 창립 당원 → 중앙위원회, 국회의원 당선
- 1928–1936레옹 블룸을 꺾고 재선, 정치국 입성, 국회 부의장
- 1940–1944지하 PCF 책임자, 프랑스 레지스탕스 지도
- 1945–1947제헌의회·국민의회 의원 및 부의장, 3당 연정 참여
- 1947–1953코민포름에서 자기비판 → 마셜 플랜 반대 투쟁, 토레즈 병중 당 대행
- 1959–1975상원 의원 및 공산당 원내대표, 1969년 대선 21.3% 득표
- 1975몽트뢰유에서 사망, 페르 라셰즈에 안장
인도네시아 공화국의 아버지, 마르크스주의와 이슬람을 접목한 혁명 이론가
“모스크바에 앉아 인도네시아 혁명을 지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당신들은 식민주의자들과 다를 바 없다.” — 1926년 봉기 승인을 구하러 마닐라로 온 알리민에게
인도네시아 공산당 초기 의장이자 『공화국을 향하여』의 저자. 마르크스주의와 이슬람의 연대를 주장해 코민테른과 결별했고, 해방 후 완전 독립 노선으로 신생 공화국의 방향을 흔들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3포트 더 콕 사범학교 졸업, 다툭(datuk) 족장 칭호 수여
- 1913–1919네덜란드 유학, 러시아혁명에 감화되어 마르크스주의로 전향
- 1919–1920델리 차 농장 노동자 자녀 교사 — 『가난한 자들의 땅』 집필
- 1921.6사레카트 이슬람 학교(세콜라 탄 말라카) 설립, 세마랑과 반둥으로 확산
- 1921.12인도네시아 공산당(PKI) 의장 취임 — 세마운 후임
- 1922네덜란드 당국에 체포되어 네덜란드로 추방 — CPN 하원 후보 출마
- 1922–1923코민테른 제4차 대회 참석 — 범이슬람주의와 공산주의 연대 주장
- 1923–1925코민테른 동방부 대리인 — 광저우에서 『인도네시아 공화국을 향하여』 집필
- 1925–1927마닐라 체류, 1926년 PKI 봉기를 반대했으나 저지 실패
- 1927방콕에서 인도네시아 공화당(PARI) 결성 — 코민테른과 결별
- 1927–1942중국·싱가포르·필리핀 등지에서 가명으로 지하활동 — 『마딜록』 집필
- 1945–1946인도네시아 귀환, 투쟁연맹 결성 — 스자르르 내각 퇴진 견인
- 1946–1948체포·구금 — 수감 중 자서전 『감옥에서 감옥으로』 집필
- 1949.2.21동자바 블림빙에서 공화국군에 체포되어 총살
억압을 집행하고 스탈린의 숙청에 쓰러진 불가리아 2인자
재판에서 그는 예심 자백을 철회했고, 최후 진술에서 그 자백이 고문으로 짜낸 것임을 밝히려 했다.
불가리아 공산당 정치국원·부총리로, 지하운동 시절부터 게오르기 디미트로프에 이은 당의 실질 2인자였다. 1944년 9월 조국전선 정권에서 중앙위원회 서기를 맡아 인민재판소 설립을 주도하며 억압의 집행자였지만, 소련의 담배 매입가에 맞서 경제 독자성을 지키려다 스탈린과 충돌했다. 1949년 체포되어 영국 간첩·티토 결탁 혐의로 기소됐고, 법정에서 자백을 철회한 유일한 동유럽 전시재판 피고로 12월 16일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1956년 복권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0불가리아 공산당 입당
- 1924공산 출판 배포로 8년형 선고
- 1931당 중앙위원회 위원, 당 기관지 편집
- 1937정치국원 겸 중앙위원회 서기
- 1942지하 저항 조직 중 종신형 선고
- 1945–48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46–49부총리 · 전력화부 장관, 경제 정책 총괄
- 1949해임·체포·재판 후 교수형
전쟁과 탈식민화의 영국 외교가
1945년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 네 연합국 외무장관이 본회의 의장을 교대로 맡았고, 이든도 그 의장단에 포함됐다.
앤서니 이든은 제1차 세계대전 참전 경험을 바탕으로 국제연맹과 집단안보를 중시한 영국 보수 정치가였다. 그는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부상 속에서 세 차례 외무장관을 지냈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윈스턴 처칠의 핵심 외교 보좌역으로 소련 및 연합국과의 전후 질서를 협상했다. 1945년 얄타 회담과 샌프란시스코 국제기구회의에서 영국을 대표하며 전후 국제기구 형성에 참여했지만, 총리 재임 중 수에즈 침공을 추진해 영국 제국의 한계와 미국 의존을 드러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5–1919영국 육군 장교, 서부전선 복무
- 1923–1957워릭·리밍턴 지역 하원의원
- 1931–1934외무차관
- 1935–1938외무장관
- 1940–1945외무장관, 전쟁내각 각료
- 1945얄타 회담 및 샌프란시스코 회의 영국 대표
- 1951–1955외무장관
- 1955–1957영국 총리, 보수당 당수
창당 대회 의장에서 대장정 중 마오와 결별해 국민당으로 간 홍군 지도자
1935년 대장정 중 마오와 합류한 뒤 북상 대신 쓰촨 남하를 고집했다. 8만여 병력의 75% 이상을 잃고 자기 군대와 코민테른의 신뢰를 상실했다.
베이징대 학생으로 5·4 운동에 앞장섰고 1921년 제1차 당대회를 주재했다. 노동운동을 조직하다 1931년 어위완 소비에트로 가 제4방면군의 정치적 지도자가 되었고, 1935년 대장정 중 쓰촨에서 마오의 중앙홍군과 합류했다. 북상 대 서진을 놓고 마오와 대립해 별도의 「중앙」을 세우고 남하했으나 병력을 잃고 1936년 옌안에 합류했다. 1937년 비판을 받은 뒤 1938년 국민당 지역으로 탈출해 당에서 제명되었고, 만년에 홍콩과 캐나다에서 회고록을 썼다. 토론토에서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1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 의장
- 1931–1935어위완 소비에트 · 제4방면군 지도자
우즈베크 공산당 최초의 우즈베크인 제1서기, 강제 집단화와 목화 단작을 이끈 뒤 대숙청에 희생된 인물
«나는 지금 발가벗겨진 인간 형상의 짐승이다.» 1938년 3월 제3차 모스크바 재판 최후 진술에서 이크라모프가 남긴 말로 전해지지만, 다른 사료에는 «너희가 나를 짐승으로 만들었다»는 표현으로 기록되어 있어 정확한 문구는 확정되지 않았다.
타슈켄트의 우즈베크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1918년 볼셰비키당에 입당해 내전기 투르키스탄에서 당 기관을 이끌었고, 1921~1922년 투르키스탄 공산당 중앙위 서기를 지냈다. 1922년부터 스베르들로프 공산대학에서 수학했으며, 1924~1925년 우즈베크 공산당 창당 조직국원을 맡았다. 1929년 제1서기가 되어 우즈베크인 최초로 이 직책에 올랐고 강제 집단화를 밀어붙여 우즈베키스탄을 소련의 주요 목화 공급지로 만들었다. 1934년 전연방 당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으나 1937년 해임되어 9월 20일 체포되었고, 1938년 제3차 모스크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총살되었다. 1957년 6월 완전히 복권되어 당적을 회복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8–1920나만간 교육국 교사·시찰관, 페르가나 농촌사업부장
- 1920–1921나만간 혁명위 부위원장, 무슬림국 의장, 페르가나·시르다리야 지역위 책임서기
- 1921–1922투르키스탄 공산당 중앙위 조직부장 겸 서기
- 1922–1924모스크바 스베르들로프 공산대학 수학
- 1924–1929우즈베크 공산당 창당 조직국원, 타슈켄트 주당위 서기, 중앙위 제2서기, 『콤무니스트』 편집자
- 1929–1937우즈베크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집단화·목화 단작 주도
- 1934–1937전연방 공산당 중앙위원 (소수민족 출신 유일)
- 1937–1938해임·체포, 제3차 모스크바 재판 사형, 총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