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틴 우스티노비치 체르넨코
Константин Устинович Черненко브레즈네프 체제의 마지막 서기장
1985년 2월, 병상에서 투표용지를 받아든 최초의 서기장 — 선거운동도, 연설도 없는 승리
브레즈네프의 비서 출신으로 안드로포프 사후 서기장이 되었지만, 건강 악화로 통치 능력은 제한적이었다. 그의 짧은 집권은 고르바초프 등장의 막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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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4–1985서기장
- 1984–1985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
인물이 수행한 활동과 그 활동에서의 소속을 함께 찾습니다.
브레즈네프 체제의 마지막 서기장
1985년 2월, 병상에서 투표용지를 받아든 최초의 서기장 — 선거운동도, 연설도 없는 승리
브레즈네프의 비서 출신으로 안드로포프 사후 서기장이 되었지만, 건강 악화로 통치 능력은 제한적이었다. 그의 짧은 집권은 고르바초프 등장의 막간이 되었다.
구야시 코뮤니즘의 설계자, 1956년 진압의 책임자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 편이다」(1961년)
피우메에서 하녀의 사생아로 태어나 이탈리아식으로 체르마니크로 등록되었고, 1927년 타자기 정비공 견습을 시작해 1929년 직인이 되었다. 1931년 불법 공산청년동맹과 당에 입당해 지하활동과 투옥을 겪었다. 1948~50년 내무장관으로서 라이크 라슬로 숙청에 관여했고, 1951년 체포되어 1952년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954년 석방되었다. 1956년 10월 25일 서기장이 되어 11월 1일 소련 측으로 넘어가 진압을 수용하고 너지 임레의 처형을 승인했으며, 수백 명 처형과 수만 명 투옥이 뒤따랐다. 1961년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 편이다'를 제창해 대사면과 개혁을 추진했고, 1988년 사임하고 1989년 사망했다.
소련 극동에서 귀환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설자
1945년 10월 14일, 10만 명이 넘는 군중이 평양 운동장에 모여 소련군 해방 환영대회를 열었다. 소련 장군이 '민족의 영웅, 유명한 빨치산 지도자 김일성 동지'를 소개하자, 연단에 오른 것은 33세의 젊은이였다. 군중은 50대쯤 되었을 전설적 게릴라의 실제 모습에 당혹스러워했다.
항일 유격대 지휘관으로 활동하다 1940년대 소련 극동의 제88독립소총여단에 속했고, 1945년 이후 소련 점령 당국의 후원 아래 조선 북부의 권력 중심으로 부상했다.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세운 뒤 당·국가·군의 권력을 장기적으로 집중시켰다.
장벽의 공화국을 장기 통치한 동독 지도자
1989년 10월의 축출은 동독 체제의 붕괴가 지도부 내부에서도 더는 막을 수 없게 되었음을 드러냈다.
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를 거친 독일 공산주의자로, 전후 동독에서 청년조직과 당의 핵심을 지냈다. 1971년부터 1989년까지 독일사회주의통일당을 이끌며 동독의 장기 통치자가 되었다.
프라하의 봄을 짓밟고 '정상화'를 설계한 체코슬로바키아 최장기 지도자
1989년 12월 10일, 후사크는 41년 만의 첫 비공산 다수 내각을 출범시킨 직후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자신이 구축한 체제의 공식적 종말을 직접 목도한 것이다.
슬로바키아 출신 공산주의 법률가. 반나치 슬로바키아 민족봉기 지도부에서 활동했고, 전후 슬로바키아 행정을 장악했으나 1950년 '부르주아 민족주의' 혐의로 종신형을 받았다. 1963년 복권되어 두브체크의 프라하의 봄에서 부총리를 지냈지만, 소련 침공 후 입장을 선회해 개혁파 숙청을 주도했다. 1969년부터 1987년까지 당 총서기, 1975년부터 1989년까지 대통령으로서 20년간 '정상화' 체제를 이끌며 상대적 생활안정과 비밀경찰 탄압을 병행했다. 1989년 벨벳 혁명으로 41년 만의 비공산 내각에 정권을 넘기고 물러났다.
분단의 도시에서 화해의 정치를 만든 사회민주주의자
장벽이 세워진 뒤 그는 말했다. “장벽은 무너져야 하지만, 무너지기 전까지 도시는 살아가야 합니다.”
빌리 브란트는 나치 독재에 맞서 망명과 저항을 거친 독일 사회민주주의 정치가였다. 서베를린 시장으로서 장벽 건설 뒤 흔들린 도시의 사기를 지키고 서방의 책임을 촉구했으며, 장벽을 ‘수치의 장벽’이라 부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연방총리로서는 동방정책과 ‘접근을 통한 변화’를 추진해 냉전의 대립을 완화했고 1971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서방 차관으로 현대화 10년을 이끌었으나 부채 위기와 연대로 막 내린 PZPR 제1서기
1971년 1월 노동자 집회에서 — 「자, 그럼 동지들, 도와주시겠습니까?」 (약한 박수)
프랑스·벨기에 탄광 노동자 출신, 1970년 노동자 봉기 후 PZPR 제1서기가 되어 서방 차관으로 '사회주의적 소비사회'를 추진했다. 생활수준이 올랐으나 외채 위기와 1980년 파업으로 실각했다.
라오스 혁명 지도자·국가주석
1975년 12월 2일 전국인민대표대회는 누학을 라오스인민민주공화국 정부의 부총리 겸 재무장관으로 선출했다. 공화국 수립을 선포한 의장은 누학이 아닌 카이손 폼비한으로 기록되어 있다.
라오스인민혁명당 창당 멤버이자 파테트라오 혁명의 핵심 지도자였다. 시암(현 태국) 무크다한의 라오계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1955년 창당 당시 정치국에서 카이손 다음 서열이었고 1972년 제2차 당대회에서 정치국에 들어가 경제 업무를 맡았다. 1975년 이후 부총리 겸 재무장관을 지냈고, 1992년부터 1998년까지 국가주석을 지냈다.
문화대혁명 피해자의 복권과 사상 해방을 이끈 개혁파 총서기, 그의 죽음이 1989년 시위를 불렀다
1989년 4월 15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다음 날 비공식 추모 집회가 정부에 그의 업적 재평가를 요구했고, 일주일 뒤 10만여 학생이 톈안먼 광장으로 행진했다.
후난 출신으로 열네 살에 소년 홍군이 되어 대장정에 참여했고 건국 후 공산주의청년단을 이끌었다. 문화대혁명에서 박해받았으며 1977년 중앙조직부장으로 수백만 건의 억울한 사건을 재심해 복권시켰고, 1978년 「진리 기준」 논쟁을 조직해 덩샤오핑의 복귀를 뒷받침했다. 1981년 당 주석, 1982년 총서기로 개혁개방을 추진했으나 1986년 말 학생 시위 뒤 「자산계급 자유화」에 관대했다는 이유로 1987년 1월 사임을 강요당했다. 1989년 4월 15일 심장마비로 사망했고 추모 집회가 톈안먼 시위로 번졌다.
총구 앞에서 담배를 붙인 유로코뮤니즘의 설계자
1981년 2월 23일, 테헤로 중령의 민위대원 200명이 의사당에 난입해 기관총을 난사했다. 의원 전원이 바닥으로 몸을 던질 때, 66세의 카리요는 자리에 앉아 담배를 꺼내 천천히 불을 붙였다.
스페인공산당(PCE) 서기장(1960–1982)으로, 베를링구에르·마르셰와 함께 유로코뮤니즘을 주도한 핵심 이론가이다. 1968년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이후 모스크바와 단절하고, 『유로코뮤니즘과 국가』(1977)에서 의회 민주주의를 통한 사회주의 이행을 주장하며 프랑코 사후 스페인의 평화적 민주 이행을 이끌었다.
몽골의 계획경제와 대소 관계
몽골과 소련의 관계를 '큰 형과 작은 동생'(ах дүү) 관계로 규정했던 그는 1953년 스탈린 장례식에서 소련 편입을 청했으나 모스크바는 거절했다.
초이발산 사후 1952년 몽골 정부 수반이 된 지도자다. 소련과의 정치·경제적 연계를 바탕으로 산업화와 협동목축을 추진했다. 장기 집권은 근대화 정책과 당내 반대파 배제, 대외 의존이라는 문제를 함께 남겼으며 1984년 권좌에서 물러났다.
소련의 군사 개입을 거듭 요청했으나 제자의 손에 죽으면서 결국 소련군을 불러들인 아프간 혁명정권 초대 수반
타라키: '실질적이고 기술적인 지원을, 병력과 무장을, 요청합니다.' 코시긴: '이건 매우 복잡한 문제입니다.' 타라키: '당신들이 협의하는 사이 헤라트는 함락될 것입니다.' (1979년 3월 18일, 헤라트 봉기 와중의 전화 통화)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PDPA)의 창립 서기장이자 1978년 4월 혁명으로 수립된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의 초대 혁명평의회 의장 겸 총리. 소작농 출신으로 봄베이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접했고, 귀국 후 파슈툰어 첫 사회소설 『방의 방랑』을 쓴 작가 출신 정치인이었다. 집권 후 급진적 토지개혁과 세속화 정책을 추진했으나 농촌의 전통적 반발로 무장 봉기가 확산되었고, 소련에 반복적으로 군사 개입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1979년 9월 후계자 하피줄라 아민에게 축출된 뒤 베개에 질식사당했으며, 그의 죽음은 두 달 뒤 소련의 침공을 초래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자기 나라에 소련 탱크를 불러들인 초대장에 서명한 당 이념 비서
반역 혐의로 기소된 뒤 빌랴크는 "나는 브레즈네프에게 편지를 쓴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초청장은 개인이 아니라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앞으로 보내졌기 때문이라는, 말장난에 가까운 항변이었다.
루신족 출신의 재단사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정치국원이 된 네오스탈린주의자. 1968년 프라하의 봄 당시 보수파 '건전한 세력'의 핵심으로, 바르샤바조약군 개입을 요청하는 초청장에 서명한 5인 중 한 명이었다. 침공 후 후사크 체제의 이념 책임자로서 '정상화'의 교리적 기초가 된 「위기 발전의 교훈」(1970)을 기초하고 반체제 탄압을 정당화했으며, 1989년 벨벳 혁명으로 축출될 때까지 당내 최강경 노선을 고수했다.
독자 외교와 개인숭배를 결합한 루마니아 지도자
1968년 침공 비판은 동유럽 사회주의권 내부의 균열을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1965년 루마니아 공산당 지도자가 되어 국가주의적 독자 노선과 강한 개인숭배 체제를 구축했다. 1968년 바르샤바 조약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비판했으나, 1989년 혁명 속에서 정권과 함께 무너졌다.
권력과 과학의 권위를 함께 세운 독재정권의 2인자
“함께 싸웠으니, 함께 죽는다!”
엘레나 차우셰스쿠는 루마니아 공산당 정권에서 남편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와 함께 권력을 행사한 정치가였다. 그녀는 당과 국가의 핵심 직책에 오르며 여성 해방과 과학 발전의 상징으로 선전됐지만, 실제로는 가족 중심의 권력 집중과 개인숭배를 강화했다. 1989년 12월 티미쇼아라에서 봉기가 확산되던 시기 정권의 대응에 관여했고, 22일 남편과 함께 달아났다가 체포됐다. 두 사람은 25일 약식 재판 뒤 함께 처형됐다.
쓰촨의 농업개혁에서 총서기까지, 1989년 계엄에 반대해 15년 연금으로 생을 마친 개혁가
1980~1987년 총리, 1987년 총서기로 정치체제 개혁을 맡았으나 1989년 톈안먼 시위 지지로 실각해 죽을 때까지 가택 연금에 있었다
허난 출신으로 광둥의 지방 간부였다가 문화대혁명에서 실각했고, 1975년 쓰촨 제1서기로 복귀해 농가생산책임제와 기업 자율화 실험으로 「먹으려면 자오쯔양을 찾으라」는 말을 낳았다. 1980년 총리, 1987년 총서기가 되어 가격개혁과 정치체제 개혁 구상을 추진했다. 1989년 5월 학생 시위에 대한 계엄에 반대해 광장에서 학생들에게 「우리는 너무 늦게 왔다」고 말한 뒤 실각했고, 이후 2005년 죽을 때까지 베이징 자택에 연금되었다. 몰래 녹음한 회고록이 사후 홍콩에서 출간되었다.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인류학자에서 모잠비크 해방전선의 창립자로
“비록 대학 생활을 무엇보다 사랑했지만, 나는 남은 생애를 조국 해방 전쟁에 바치기로 결심했다.”
미국에서 인류학 박사학위를 받은 학자였으나, 교수직을 버리고 흩어진 모잠비크 해방 조직들을 한데 모아 해방전선(FRELIMO)을 창립했다. 초대 의장으로서 1964년 무장 투쟁을 개시해 독립 전쟁의 토대를 놓고 이를 이끌다가, 1969년 서신 폭탄으로 암살되었다.
라오스 혁명과 경제개혁
1975년 12월 그는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군주제 폐지와 라오스인민민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라오스인민혁명당 지도자이자 1975년 공화국 수립 후 총리였다. 베트남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국가를 재편했고, 1980년대에는 신경제체제로 이어지는 시장 지향 개혁을 이끌었다. 1991년 국가주석이 됐다.
프라하의 봄을 끝장내기 위해 소련에 개입을 요청한 초청장에 서명한 KSČ 강경파
1968년 8월 21일 아침, 두브체크는 '인드라 동지가 이끄는 노동자·농민 정부의 이름으로' 체포되었다. 그러나 인드라의 내각은 단 하루도 현실이 되지 못했고, 그가 서명한 초청장은 1990년대에야 공개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의 네오스탈린주의 정치인. 1968년 프라하의 봄 당시 보수파 핵심으로, 바르샤바조약군 개입을 요청한 '초청 편지'에 서명한 5인 중 하나였으며 침공 직후 소련의 후원 아래 '노동자·농민 정부' 수반으로 내정되었다. 후사크 체제에서도 정치국원과 연방의회 의장으로서 '정상화' 숙청을 추진했고, 1989년 벨벳 혁명으로 축출되어 이듬해 사망했다.
인간의 얼굴을 꿈꾸다 산림청으로 보내진 사람
1968년 8월 21일 새벽, 소련군 장교들이 두브체크의 사무실로 들이닥쳐 전화선을 끊고 수갑을 채웠다. 한 장교가 말했다: '필요하다면 체코인 백만 명을 죽여서라도 반혁명을 끝장낼 것이다.'
프라하의 봄을 이끈 슬로바키아 개혁공산주의자. 소련에서 소년기를 보내고 1968년 검열 폐지와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추진했으나, 바르샤바조약군 침공 후 실각해 산림청 직원으로 15년을 보냈다. 1989년 하벨과 함께 발코니에 다시 섰다.
「네가 일을 맡으면 내가 안심한다」는 마오의 후계자, 4인방을 체포하고 덩샤오핑에게 밀려났다
1976년 10월 6일, 마오쩌둥 사후 한 달 만에 화궈펑은 예젠잉·왕둥싱과 함께 중난하이에서 4인방을 체포하고 당 주석과 군사위 주석을 겸했다. 그러나 1981년 덩샤오핑에게 실권을 넘겼다.
산시 출신으로 후난에서 지방 간부로 일하다 마오의 눈에 들었고, 1976년 1월 저우언라이 사후 총리 대행, 4월 톈안먼 사건 뒤 제1부주석 겸 총리가 되었다. 마오 사후 10월 예젠잉·왕둥싱과 4인방을 체포하고 당 주석·군사위 주석을 겸했다. 「마오 주석의 결정은 모두 지키고 지시는 모두 따른다」는 양개범시로 정통성을 세우려 했으나 1978년 진리 기준 논쟁과 11기 3중전회에서 덩샤오핑에게 주도권을 잃었고 1980~1981년 총리와 당 주석직을 내놓았다. 2002년까지 중앙위원으로 남았다.
독립 투쟁을 이끈 의사 시인, 앙골라의 초대 대통령
「우리의 땅, 우리의 어머니 / 우리는 돌아가리라」. 시집 『성스러운 희망』(1974)에 실린 시 「우리는 돌아가리라」에서.
앙골라 독립 투쟁을 이끈 의사이자 시인. 1956년 12월 MPLA 창립 시 초대 의장이었고, 수감으로 명예직이었다가 1962년 12월 회의에서 실질 의장으로 선출되어 1974년까지 독립 전쟁을 지도했다. 1975년 11월 11일 앙골라 인민공화국 초대 대통령에 취임해 소련·쿠바와 긴밀한 관계 속에서 일당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했으며, 1977년 쿠데타 시도 이후 대규모 숙청을 감행했다.
서구 최대 비집권 공산당을 이끈 유로코뮤니즘의 설계자
『라 레푸블리카』와의 인터뷰(1981년 7월 28일)에서 이탈리아 정당 체제의 구조적 부패를 '도덕적 문제(questione morale)'로 명명하며: "오늘날 정당들은 무엇보다 권력과 후견주의의 기계다. 사회와 사람들의 삶에 대한 지식은 빈약하거나 왜곡되어 있고, 사상·이상·정책은 거의 없거나 모호하며, 감정과 시민적 열정은 제로다." 이 표현은 이후 수십 년간 이탈리아 정치 담론의 기준점이 되었다.
이탈리아 공산당(PCI) 서기장(1972–1984). 소련 지도를 거부하는 민주적 사회주의 노선인 유로코뮤니즘을 주창했으며, 1976년 총선에서 PCI 사상 최고인 34.4% 득표율로 이끌었다.
우자마 사상을 창안하고 비동맹 사회주의 탄자니아를 24년간 이끈 건국 대통령
“우리 아프리카인들은 사회주의로 '개종'될 필요도, 민주주의를 '배울' 필요도 없다. 둘 다 우리의 과거 — 우리를 낳은 전통 사회 — 에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 1962년 에세이 「우자마」
탄자니아의 독립운동 지도자, 건국 대통령, 그리고 아프리카 사회주의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이론가. 1954년 TANU를 창당해 비폭력 독립투쟁을 이끌었고, 1961년 독립을 성취했다. 1967년 아루샤 선언으로 전통적 공동체성을 현대 사회주의와 접목한 독자적 발전 모델인 우자마(Ujamaa)를 제시하고 은행·산업 국유화와 무상교육 확대를 추진했다. 집권 기간 내내 남아프리카 해방운동을 후원했으며 비동맹운동의 중심 인물로 활약했다. 1985년 스스로 권좌에서 물러나 아프리카 지도자로서는 드물게 평화적 정권 이양을 실현했고, 말년에는 부룬디 내전 중재에 헌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