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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정보·치안 인물 210명

이반 알렉세예비치 아쿨로프

Иван Алексеевич Акулов

소련 검찰제도의 창설자, 국가보안과 사회주의 적법성의 틈바구니에서

부하린의 미망인은 회고했다: '청렴하고 의지가 강한 아쿨로프가 OGPU의 질서를 바로잡기 시작했지만 곧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빈민가 출신으로 1907년 볼셰비키에 입당한 이반 아쿨로프는 지하운동, 내전기 전선위원회, 우랄·시베리아·크림·우크라이나의 당 조직 책임자를 거친 직업혁명가였다. 1933년 소련 검찰청이 신설되자 초대 검찰총장에 임명되어 사회주의 적법성이라는 새 제도의 틀을 구축했으며, 국가보안기구와의 긴장 속에서 검찰의 독자적 영역을 개척했다. 그러나 키로프 암살 이후 긴급법 제정에 연루되었고, 이윽고 자신이 구축에 참여한 탄압 기구에 희생되어 1937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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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RSDLP(b) 입당 · 상트페테르부르크 지하운동
  • 1917–1918우랄 지역당 위원회 서기
  • 1918–1920뱟카·오렌부르크 현당 위원회 서기
  • 1920–1921키르기스 당뷰로 서기
  • 1921–1922크림 지역당 위원회 서기
  • 1922–1927도네츠크 광산노조 위원장
  • 1927–1931전우크라이나 노조평의회 의장
  • 1930–1931노농감찰 부인민위원 · 중앙통제위원회 간부
  • 1931–1932OGPU 제1부의장
  • 1933–1935소련 검찰총장 (초대)
  • 1935–1937소련 중앙집행위원회 서기

전우크라이나 체카 의장, 계급적 적색 테러의 이론가

「우리는 부르주아 계급 자체를 섬멸한다. 첫 번째 질문은 피의자가 어느 계급 출신이며 어떤 양육과 직업을 가졌느냐다. 그것이 피의자의 운명을 결정한다」 — 『크라스니 테로르』, 1918년 11월 1일

라트비아 출신의 소련 혁명가이자 저술가로, 본명은 야니스 수드랍스이다. 1918년 7월부터 11월까지 동부전선 제5군의 체카 및 군사재판소 의장을 지냈고, 1919년부터 1921년까지는 전우크라이나 체카 의장으로서 키예프 체카를 직접 지휘했다. 1918년 11월 1일 카잔의 『크라스니 테로르』에 「우리는 부르주아 계급 자체를 섬멸한다」는 논설을 실어 계급 출신과 양육, 직업만으로 피의자의 운명을 정하자고 주장하며 계급적 적색 테러를 이론화했다. 자료들은 그가 개인적 잔혹함으로 명성을 얻었다고 전하며, 데니킨 위원회의 전우크라이나 체카 관련 자료와 라치스 자신의 발언이 이를 뒷받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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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라트비아 사회민주당(SDLK) 입당, 비합법 활동
  • 1908–1915교사 자격 취득, 교편 생활; 모스크바 샤냡스키 인민대 청강
  • 1917.10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10월 봉기
  • 1918.5–7체카 간부위원·반혁명투쟁부장; 제르진스키 직무대행
  • 1918.7–11동부전선 제5군 체카 및 군사재판소 의장
  • 1919–1921전우크라이나 체카(VuChK) 의장
  • 1922–1932글라프솔·솔레신디카트·농업인민위원부 등 경제 행정
  • 1932–1937모스크바 플레하노프 국민경제연구소 소장

이반 테렌티예비치 골랴코프

Иван Терентьевич Голяков

대숙청과 전쟁기를 관통한 소련 최고재판소장

솔제니친은 골랴코프가 "톨스토이, 코롤렌코, 체호프의 작품을 알고 있었다"고 적었다. 모든 사형 선고를 승인했던 재판소장이 마지막으로 남긴 책은 《문학 속의 재판과 법》이었다.

농민 출신으로 1차대전에 참전한 후 1918년 볼셰비키에 입당해 남북전쟁기 군사재판소장을 거쳐 1938년 소련 최고재판소장에 올랐다. 대숙청과 전쟁기를 관통하는 10년간 소련 사법체계를 총괄했으며, 모든 사형 선고를 승인한 정치국 비밀위원회 위원으로서 숙청의 사법적 형식화를 책임졌다. 한편 전연방 법률과학연구소장으로 70여 편의 학술 저작을 남겼고, 기록에 따르면 '합법성' 국면에서는 최대한 많은 유죄판결자를 복권시키려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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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RKP(b) 입당
  • 1919–1925혁명군사재판소장 (제14소총사단·북카프카스 군관구)
  • 1925북카프카스대학 법학과 졸업
  • 1925–1933벨로루시 군관구 혁명군사재판소 부의장
  • 1931–1938소련 최고재판소 군사합의부 위원
  • 1938.1–4RSFSR 검찰총장
  • 1938–1948소련 최고재판소장
  • 1938–1947, 1949–1956전연방 법률과학연구소장

라자리 이오시포비치 코간

Лазарь Иосифович Коган

굴라크의 초대 수장이자 벨로모르 건설 책임자

1932년 벨로모르 운하 현장을 찾은 미코얀에게 코간이 물었다. "'수감자'는 모욕적이고 '라게르니크'는 무미건조합니다. 그래서 생각해낸 말이 '카날로아르메예츠(운하군인)'입니다." 미코얀이 동의했고, 이 말에서 약칭 '제카(з/к)'가 탄생했다.

시베리아 유대 상인 집안 출신의 아나코-코뮤니스트로, 1908년 무장강도로 사형 선고를 받고 복역했다. 1918년 볼셰비키에 합류, 체카와 국경경비대를 거쳐 1930년 신설된 굴라크의 초대 수장이 되어 소비에트 강제노동 체계의 제도화를 이끌었다. 1931년부터 백해-발트 운하 건설을 지휘, 약 17만 명의 수용자를 동원해 2년 만에 227km 수로를 완공했으나 수만 명이 사망했다. 야고다 계열로 분류돼 1938년 체포, 1939년 총살됐으나 1956년 복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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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32OGPU 굴라크 수장
  • 1931–1933백해-발트 운하 건설 책임자
  • 1932–1936굴라크 부수장
  • 1936–1938수상운수 부인민위원
  • 1938–1939체포와 처형

미하일 이바노비치 리조프

Михаил Иванович Рыжов
보안·정보·치안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89–1939 ✕ 심문 중 사망

예조프 곁에서 부인민위원까지 오른 뒤 심문실에서 죽어 간 측근

1938년 12월 체포되어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심문 중에 사망했다. 예조프의 조서가 공범으로 꼽은 다섯 이름 가운데 하나였다.

탐보프 현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918년 볼셰비키에 입당했고, 군사위원과 군관구 행정직 등 군·행정 경력을 거쳐 모스크바시 행정에서 일했다. 예조프 시기인 1937년 7월 NKVD 총무경리국장이 되었고 곧 내무부인민위원으로 승진했으며, 그해 12월 소련 임업인민위원으로 옮겨 1938년 10월까지 재임했다. 국가보안 소좌 계급과 적성훈장을 받았고, 예조프의 비서 세라피마 리조바와 부부였다. 예조프 몰락 뒤인 1938년 12월 체포되었고, 예조프의 조서가 자기 음모 집단의 일원으로 꼽은 이름 가운데 하나였다. 1939년 1월 19일 불법 수사 방법이 동원된 심문 끝에 사망했으며, 1955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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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1925군사위원·군관구 행정직
  • 1930년대 전반농업 행정과 모스크바시 행정 근무
  • 1937.7–8NKVD 총무경리국(AKhU)장
  • 1937.8–12소련 내무부인민위원
  • 1937.12–1938.10소련 임업인민위원

레프 니콜라예비치 벨스키

Лев Николаевич Бельский

소비에트 민병대를 관장한 부인민위원

1931년 야고다의 '베스나' 사건 조작에 항의했다 해고된 인물이, 6년 후 예조프 휘하에서 대숙청 트로이카를 조직했다.

체카 출신으로 1934년 소비에트 민병대 총국장, 1936년 예조프 휘하의 내무부인민위원이 되어 대숙청기 지방 트로이카를 조직했다. 1939년 체포돼 1941년 처형됐으며 복권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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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4–1936NKVD 노농민병대 총국장
  • 1936–1938내무부인민위원
  • 1938–1939철도 제1부인민위원
  • 1939–1941체포, 재판과 처형

바실리 바실리예비치 울리히

Василий Васильевич Ульрих

모스크바 쇼 재판의 판사, 스탈린의 '법적 단두대'

사형을 선고받은 에스토니아 변호사에게 울리히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자네 직업이 드디어 쓸모 있게 됐군!"

소련 최고재판소 군사합의부 의장(1926–1948)으로서 스탈린 시대 대숙청의 사법적 얼굴이었다. 라트비아 리가 출신으로, 독일계 발트인 혁명가 아버지와 러시아 귀족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리가 공과대학을 졸업했다. 1910년 볼셰비키에 입당했고, 1918년 체카에서 경력을 시작해 1926년 군사합의부 의장에 올랐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부하린, 투하쳅스키 등 구당 지도부에 대한 모스크바 쇼 재판(1936–1938)을 주재했고, 2년간 3만 명 이상의 사형 선고를 내린 기관을 지휘했다. 전후에는 블라소프, 크라스노프 등 나치 협력자 재판과 폴란드 지하국가 지도부 재판을 주재했다. 1948년 해임된 뒤 1951년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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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RSDLP(볼셰비키) 입당
  • 1914리가 공과대학 상업과 졸업
  • 1915–1917러시아 제국군 공병대대 소위
  • 1918–1919NKVD·체카 재무과장
  • 1920공화국 혁명군사재판소 판사
  • 1921–1926RSFSR 최고재판소 군사합의부 의장
  • 1926–1948소련 최고재판소 군사합의부 의장
  • 1935–1948소련 최고재판소 부의장
  • 1948–1951군사법률아카데미 고등군사법률과정장

스타니스와프 아다모비치 메싱

Станислав Адамович Мессинг

제르진스키의 폴란드 전우, 체카의 초석을 놓고 야고다의 조작에 맞서다

1926년 9월 26일, 레닌그라드 OGPU 청사 집무실에서 18세의 하리코프 청년 아나톨리 트루바가 권총을 난사했다. 메싱은 책상 아래로 몸을 피해 살아남았고, 트루바는 곧 총살당했다.

바르샤바의 유대인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나 1908년 폴란드 사회민주당에 입당, 펠릭스 제르진스키와 유제프 운쉴리히트의 신임을 얻었다. 모스크바 체카 위원장(1921)과 페트로그라드·레닌그라드 체카-OGPU 수장(1921–1929)을 거쳐 1929년 OGPU 제2부의장 겸 해외부(INO) 부장으로 승진, 미하일 트릴리세르아르투르 아르투조프 사이 2년간 소련 대외첩보를 지휘했다. 겐리흐 야고다가 조작한 '봄'(Весна) 사건에 반대했다가 1931년 해임되어 대외무역으로 밀려났고, 1937년 폴란드 간첩 혐의로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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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폴란드 사회민주당(SDKPiL) 입당, 바르샤바 요새 투옥 후 벨기에 유형
  • 1913–1917러시아 제국군 징집, 투르케스탄·카프카스 전선 복무, 연대병사위원회 위원
  • 1917–1918소콜니키 집행위원회 서기, 소콜니키 구역 체카 위원장
  • 1918–1920모스크바 체카 비밀작전부장 → 체카 콜레기야 위원 → 모스크바 체카 부위원장
  • 1921.1–1921.11모스크바 체카 위원장
  • 1921–1929페트로그라드·레닌그라드 체카-GPU-OGPU 수장, 페트로그라드 군관구 GPU 부대 사령관 겸임
  • 1926집무실 피격 암살미수, 적기훈장 수훈
  • 1929–1931OGPU 제2부의장 겸 해외부(INO) 부장
  • 1930–1934전연방 공산당 중앙통제위원회 위원
  • 1931'봄'(Весна) 사건 조작에 반대, OGPU 해임 후 대외무역 인민위원부로 전출
  • 1931–1937전연방 상공회의소 의장, 소·몽·투바 무역회의소 의장
  • 19376월 15일 체포, 9월 2일 총살 — '폴란드 간첩' 혐의

아르투르 카를로비치 스타솁스키

Артур Карлович Сташевский

스페인 공화국 금을 모스크바로 보낸 소련 무역대표

스타솁스키는 재무장관 네그린에게 모스크바에 '금 당좌계정'을 열자고 제안했고, 그 계정으로 무기와 원자재를 살 수 있다고 설득했다.

SDKPiL 출신의 소련 정보장교이자 무역 관료. 베를린에서 합동 레지덴투라를 지휘한 초기 군사정보의 핵심 인물로, 이후 토르그신 이사장과 대외무역 간부를 거쳐 1936년 공화파 스페인의 무역대표로 파견되었다. 스페인에서는 무기 판매 협상과 「작전 X」의 재정적 측면을 관리했으며, 후안 네그린에게 스페인 은행의 금을 소련에 예치하자고 설득한 인물로 지목된다. 1937년 6월 소환되어 두 달 뒤 처형되었고,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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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1924베를린 합동 레지덴투라(INO·군사정보) 책임자
  • 1925–1926소프토르그플로트 이사
  • 1926–1932푸시노토르그·소유스푸시니나 부이사장
  • 1932–1934토르그신 이사장
  • 1934–1937대외무역인민위원부 글라프푸시니나 국장
  • 1936–1937주스페인 소련 무역대표

아르투르 흐리스티아노비치 아르투조프

Артур Христианович Артузов

소련 첩보·방첩의 창립자, '트레스트' 작전의 두뇌

1925년 모스크바의 한 안전가옥에서 시드니 라일리가 GPU 요원들에게 둘러싸이자, 아르투조프는 옆방에서 전 과정을 지켜보았다고 전해진다.

체카 방첩부(KRO)를 창설하고 백군 망명 조직을 무력화한 '트레스트' 작전을 설계했다. 1931년부터 해외첩보부(INO)를 이끌며 대외 불법 첩보망을 확장했고, 대숙청 속에서 1937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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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RSDLP(b) 입당, 육해군 동원해제 관리국 근무
  • 1918모스크바 군관구 군사정보국장, 군사통제부 활동부장
  • 1919–1922체카 특별부 전권위원 → 특별부 작전과장 → 부부장
  • 1922–1927GPU·OGPU 방첩부(KRO) 부장 — '트레스트', '신디카트-2', '타란텔라' 작전 지휘
  • 1927–1930OGPU 비밀작전국(SOU) 부국장 보좌관
  • 1930–1931OGPU 해외부(INO) 부부장
  • 1931–1935OGPU·GUGB-NKVD 해외부(INO) 부장 — 소련 대외첩보 총괄
  • 1934–1937적군참모부 제4(정보)국 부국장 겸임
  • 1937NKVD 기록보관부로 좌천, 5월 체포, 8월 총살

겐리흐 그리고리예비치 야고다

Генрих Григорьевич Ягода

굴라크를 키운 NKVD 수장, 숙청의 피고가 되다

1937년 4월, 야고다는 NKVD 내무인민위원직에서 해임되었다. 스탈린이 그를 부른 자리에는 이미 예조프가 앉아 있었다. '당신은 4년이나 늦었다' — 스탈린의 말이다. 야고다가 재판정에서 남긴 마지막 말은 기록에 따라 엇갈린다. 한 버전에서는 총살 직전 '스탈린 동지 만세!'를 외쳤다고 하고, 다른 버전에서는 조용히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 어느 쪽이든, 굴라크의 설계자는 굴라크의 피고가 되었다.

OGPU와 NKVD의 실무 권력자로 백해-발트 운하 같은 강제노동 사업을 지휘했다. 굴라크 시스템의 설계자이자 초대 NKVD 내무인민위원으로 보안기관 통합을 주도했다. 키로프 사건 이후 첫 대숙청 국면을 열었지만, 스탈린은 '충분히 숙청하지 못한다'며 예조프로 교체. 결국 자신이 숙청의 피고가 되어 제3차 모스크바 재판 뒤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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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s체카-GPU-OGPU 관료로 성장, 수용소와 대형 건설동원 관리
  • 1934–1936초대 NKVD 내무인민위원, 보안기관 통합을 지휘
  • 1934–1935키로프 피살 뒤 탄압 확대와 초기 숙청 수사를 담당
  • 1936예조프로 교체, 통신인민위원으로 좌천
  • 1937–1938체포, 제3차 모스크바 재판 뒤 처형

알렉산드르 게오르기예비치 벨로보로도프

Александр Георгиевич Белобородов

로마노프 처형에 서명한 좌익반대파 내무인민위원

스베르들로프에게 알리시오: 전 가족이 가장과 같은 운명을 함께했다. 공식 발표는 대피 중 사망이다.」 ― 로마노프 일가 처형 후 레닌 비서에게 보낸 암호 전보, 1918년 7월 17일

우랄 지역에서 두각을 나타낸 볼셰비키로, 1918년 우랄소비에트 의장으로서 니콜라이 2세와 로마노프 일가의 처형 결정에 서명했다. 1923년부터 1927년까지 제르진스키의 후임으로 RSFSR 내무인민위원을 지내며 소비에트 경찰·교정 행정을 관장했다. 1923년 「46인 선언」에 서명하며 좌익반대파에 합류했고, 1927년 당에서 축출되었다가 1930년 복당했으나 대숙청 시기 체포되어 1938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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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우랄 지역 당위원회 위원
  • 1918우랄소비에트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 1919–1920당 중앙위원회 조직국 정위원 · 중앙위원
  • 1919–1920제9군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1921–1923RSFSR 내무부인민위원
  • 1923–1927RSFSR 내무인민위원
  • 1930–1936조달위원회 · 국내무역인민위원부 근무

예핌 게오르기예비치 예브도키모프

Ефим Георгиевич Евдокимов

샤흐티 사건의 설계자이자 북캅카스의 실력자

스탈린은 1938년 이렇게 회고했다. "예브도키모프가 숄로호프를 체포하라며 두 번 찾아왔다. 전 백위군과 대화한다는 이유였다. 나는 말했다, 자네는 정치도 인생도 모른다고."

내전 세대의 체키스트로, 브란겔군 포로 대량 처형을 지휘하며 현장형 보안요원으로 두각을 드러냈다. 1923년 북캅카스 OGPU 전권대표로 부임해 지역 권력 기반을 쌓았고, 1928년 샤흐티 사건을 설계해 기술 전문가를 겨냥한 첫 대형 정치 재판의 자백 확보를 지휘했다. 1929년부터 OGPU 비밀작전총국장을 맡으며 야고다와 적대했고, 1934년 당직으로 옮겨 야고다 집권기 보안기관 바깥에 머물렀다. 예조프 취임 후 북캅카스 인맥을 중앙에 공급하며 재기했으나, 예조프와 함께 몰락해 1940년 총살,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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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0모스크바 체카 특별부장, 이어 남서·남부전선 특별부 부부장
  • 1920–1921체카 크림 타격단 책임자
  • 1923–1929북캅카스 주재 OGPU 전권대표
  • 1929–1931OGPU 비밀작전총국장, 콜레기움 위원
  • 1934–1937북캅카스(이후 아조프-흑해)변경주 당 제1서기
  • 1937–1938로스토프주 당 제1서기
  • 1938수상운수 부인민위원
  • 1938–1940체포, 재판과 처형

프세볼로트 아폴로노비치 발리츠키

Всеволод Аполлонович Балицкий

우크라이나 보안기구의 지배자

1937년 7월 7일, 하바롭스크 역에서 후임 류시코프를 마중 나갔다가 예조프 서명의 체포영장에 의해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11월 27일 자신의 45번째 생일에 '특별절차'로 사형 집행.

우크라이나 GPU·NKVD 수장(1923~1937)으로 공화국 보안의 실권자. 홀로도모르 시기 탄압을 지휘하고 정치국 트로이카 일원으로 사형 처결권을 행사했으며, 민족주의 조작 사건을 주도했다. 1935년 국가보안위원 1급, 1937년 체포·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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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2볼히니아·키예프 체카 의장, 전우크라이나 체카 부의장
  • 1923–1931우크라이나 GPU 의장
  • 1924–1930우크라이나 내무인민위원 겸임
  • 1931–1934OGPU 부의장
  • 1932–1934우크라이나 주재 OGPU 전권대표
  • 1934–1937우크라이나 내무인민위원
  • 1937극동 전출, 체포와 처형

미하일 이오시포비치 리트빈

Михаил Иосифович Литвин

예조프의 인사책임자, 14,000명 체키스트를 숙청

1938년 여름, 예조프의 다차에서 동료 체키스트들에게 "일이 잘못되면 자살하겠다"고 말했고, 그해 11월 모스크바行 기차를 한 시간 앞두고 권총 자살로 그 말을 실행했다.

볼셰비키 체키스트. 예조프 측근으로 1936년 NKVD 인사국장이 되어 야고다 계열 14,000명을 숙청하고 부하린 재판을 주도했다. 레닌그라드 NKVD 국장이던 1938년 예조프 몰락 직후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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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크라스노야르스크 인쇄노조 위원장
  • 1920–1921극동전선 군사위원·체카 수사관
  • 1930중앙아시아 당국 분배부장
  • 1931–1933볼셰비키 중앙위 간부분배부문 차장
  • 1936–1937NKVD 인사국장
  • 1937–1938GUGB 제4부(비밀정치부)장
  • 1938레닌그라드 NKVD 국장

스타니슬라프 프란체비치 레덴스

Станислав Францевич Реденс

스탈린의 처남이자 모스크바주 트로이카 의장

1921년 1월 19일 크림에 도착한 레덴스는 심페로폴·세바스토폴·케르치에 사형 선고권을 가진 독립 시(市)체카를 신설하고 자신의 직속으로 두었다. 이 기관들은 브란겔군 잔여 세력과 '계급적 적'에 대한 대량 숙청을 집행했다.

롬자 지방 출신 폴란드인으로 1918년 체카에 입문해 내전기 크림 체카 의장으로서 브란겔군 패잔병에 대한 대량 보복을 지휘했다. 스탈린의 두 번째 부인 나데즈다의 언니 안나 알릴루예바와 결혼해 스탈린의 처남이 되었다. 1933년부터 모스크바주 NKVD 관리국장을 맡아 수도권 보안을 총괄했고, 대숙청기에는 NKVD 명령 제00447호에 따른 모스크바주 트로이카 의장으로서 대량 사형 판결을 주재했으며 처형은 부토보와 코무나르카에서 집행됐다. 1938년 말 폴란드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1940년 2월 총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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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1921크림 체카 의장
  • 1928–1931자캅카스 주재 OGPU 전권대표
  • 1931–1933우크라이나 주재 OGPU 전권대표
  • 1933–1938모스크바주 NKVD 관리국장
  • 1937–1938모스크바주 트로이카 의장
  • 1938카자흐 내무인민위원
  • 1938–1940체포, 재판과 처형

스테판 막시모비치 페트리첸코

Степан Максимович Петриченко

크론시타트 반란을 이끈 수병, 소련 스파이가 되어 수용소에서 최후를 맞다

1921년 3월 크론시타트. 페트리첸코가 이끄는 임시혁명위원회 기관지는 '여기 크론시타트에서 제3의 혁명의 첫 돌이 놓였다. 노동 대중의 마지막 족쇄를 끊고 새로운 길을 여는 혁명이다'라고 선언했다.

스테판 페트리첸코는 발트함대 전함 페트로파블롭스크의 상급 병기병으로, 1917년 12월 에스토니아 나이사르 섬에서 '소비에트 수병 및 요새건설자 공화국'을 선포하고 의장으로 활동했다. 1921년 3월에는 크론시타트 수병들의 볼셰비키 독재에 반대하는 무장봉기를 이끌며 임시혁명위원회 의장이 되어 '공산주의자 독재를 타도하라'는 요구를 내걸었다. 봉기 진압 후 핀란드로 망명했으나 1922년 소비에트 정보기관에 포섭되어 20년 넘게 비밀 요원으로 활동했다. 1945년 핀란드에서 소련으로 송환되어 '반혁명 테러 조직 가담'으로 10년형을 선고받고, 1947년 수용소 이송 중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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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발트함대 전함 페트로파블롭스크에 배속
  • 1917.12–1918.2나이사르 섬에서 '소비에트 수병 및 요새건설자 공화국' 선포, 의장
  • 1919볼셰비키당에 가입했으나 곧 재등록 과정에서 탈락
  • 1921.3크론시타트 반란 임시혁명위원회 의장; 반란 진압 후 핀란드 망명
  • 1922소비에트 정보기관에 포섭, 핀란드 주재 소련 비밀요원 활동 개시
  • 1927–1937핀란드 케미 제지공장 노동자로 위장하며 첩보 활동 지속
  • 1941핀란드 당국에 체포·구금
  • 1945–1947소련 송환, 반혁명 테러 조직 가담 혐의로 10년형 선고, 수용소 이송 중 사망

바츨라프 노세크

Václav Nosek

1948년 2월 비공산당 경찰 간부 해임으로 정부 위기를 촉발시킨 체코슬로바키아 내무장관

각료회의가 해임 철회를 의결했지만, 노세크는 이를 무시하고 프라하 경찰 간부 8명을 공산당원으로 교체했다.

광부 출신으로 18세에 사회민주당에 입당했고, 1921년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창립에 참여했다. 나치 점령 후 영국으로 망명하여 런던 망명정부 국가평의회 부의장을 지냈으며, 1945년 귀국 후 내무장관에 임명되어 경찰과 보안기구를 공산당 세력으로 재편했다. 1948년 2월 13일 비공산당 경찰 간부 8명을 해임함으로써 내각 위기를 유발했고, 이는 비공산당 장관 12명의 사직과 고트발트의 정권 장악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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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체코슬로바키아 사회민주노동당 입당
  • 1921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KSČ) 창립 대의원
  • 1929KSČ 중앙위원회 위원 선출
  • 1941–1942런던 체코슬로바키아 국가평의회 위원 → 부의장
  • 1945–1953체코슬로바키아 내무장관
  • 1953–1955체코슬로바키아 노동사회복지장관

야코프 이사코비치 세레브랸스키

Яков Исаакович Серебрянский
보안·정보·치안 소련 국가기관 소련 벨라루스 1892–1956 ✕ 심문 중 사망

파리에서 백군 장군을 납치한 소련 특수공작 창시자, 자기 기관에 고문당하다

프랑스 경찰 제복을 입은 그들은 거리에서 쿠테포프를 멈춰 세우고 심문을 구실로 차에 태웠다. 쿠테포프는 저항했고, 몸싸움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세레브랸스키가 내게 말했다. — 파벨 수도플라토프, 『특수임무』

민스크 유대인 가정 출신으로 1923년 OGPU에 영입되어 팔레스타인에 첫 소련 스파이망을 구축했고, 유럽 전역에서 200명 이상을 포섭했다. 1930년 파리에서 프랑스 경찰로 위장해 백군 지도자 쿠테포프 장군을 납치·살해했으며, 트로츠키 아들의 기록보관소 탈취와 스페인 공화파 군용기 밀반입을 지휘했다. NKVD 특수임무반(SGO) 책임자로 활약했으나 1938년 베리야에게 체포되어 아바쿠모프의 고문으로 거짓 자백하고 사형 선고를 받았다. 1941년 수도플라토프의 요청으로 사면되어 전시 정보전에 복귀했고, 1953년 베리야 사건에 연루되어 재체포된 후 부티르카 감옥에서 심문 중 사망했다. 1971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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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1917에스에르 맥시말리스트; 투옥(1909); 제국군, 동프로이센 중상(1914); 바쿠 전기기사
  • 1917–1923바쿠 소비에트 에스에르 활동가; 페르시아; 모스크바 체카; 에스에르 혐의 체포
  • 1923–1929OGPU 팔레스타인·벨기에·프랑스 불법체류자; '야샤 그룹' 간첩망 구축
  • 1929–1934OGPU 특수반장; 쿠테포프 장군 파리 납치(1930); 200명 이상 포섭
  • 1934–1938NKVD 특수임무반(SGO) 책임자; 트로츠키 기록보관소 탈취; 스페인 무기 밀반입; 상급소령
  • 1938–1941체포·고문·사형 선고; 독소전 발발 후 사면
  • 1941–1946NKVD 제4국 전시 정보작전; 1946년 퇴역
  • 1953–1956베리야 사건 연루 재체포; 부티르카 심문 중 사망

니콜라이 블라디미로비치 스코블린

Николай Владимирович Скоблин
보안·정보·치안 소속 미확정 러시아 러시아인 1893–1937/1938? ✕ 실종, 사망 경위 불명

백군 장군이 된 비밀 협력자

1937년 밀러를 만나게 한 뒤, 스코블린은 파리에서 자취를 감췄다.

니콜라이 스코블린은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내전에서 싸운 백군 장교로, 코르닐로프 타격사단을 이끈 젊은 소장으로 명성을 얻었다. 망명 뒤 그는 러시아 전군사연합의 핵심 인물이 되었지만, 소련 정보기관의 협력자로 포섭되어 백계 러시아인 망명 공동체 내부에서 활동했다. 그는 투하쳅스키 사건을 둘러싼 독일 측 문서와 정보가 스탈린의 숙청을 촉발했는지, 아니면 스탈린의 주도 아래 조작·활용되었는지를 둘러싼 논쟁의 중심에 있다. 1937년 예브게니 밀러 납치에 관여한 뒤 사라졌으며, 그의 최후는 확정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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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러시아군 장교
  • 1917–1918코르닐로프 타격부대 대대장
  • 1918–1920코르닐로프 타격연대·사단 지휘관, 백군 소장
  • 1920–1929갈리폴리·불가리아 망명, 코르닐로프 연대 지휘
  • 1929–1937파리 러시아 전군사연합 코르닐로프 연대장
  • 1935–1937ROVS 내부선 방첩 책임자
  • 1937밀러 납치 작전 협력 뒤 실종

카를 빅토로비치 파우케르

Карл Викторович Паукер

스탈린의 경호를 맡은 작전국장

1936년 12월 체카 기념 만찬에서 파우케르는 지노비예프 처형을 재연했다. 두 동료에게 끌려가 무릎 꿇고 "제발 스탈린 동지를 불러주시오!"라 애원했고, 스탈린은 포복절도했다.

렘베르크 출신 유대인 이발사·분장사로, OGPU·NKVD 작전국장과 스탈린 개인 경호 책임자를 지내며 대숙청기 체포·처형을 관장했다. 스탈린의 신임을 받았으나 1937년 암살 모의 혐의로 체포돼 총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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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2–1923OGPU 작전국 부국장
  • 1923–1936OGPU·NKVD 작전국장
  • 1924–1937스탈린 개인 경호 책임자
  • 1936–1937국가보안총국 제1부장
  • 1937체포와 처형

야코프 사울로비치 아그라노프

Яков Саулович Агранов

체카의 정치수사 설계자

1921년 타간체프 사건으로 페트로그라드 지식인들을 대거 처형한 뒤, 어찌 그리 가혹하냐는 물음에 아그라노프는 답했다. "페트로그라드 지식인의 70퍼센트는 한쪽 다리를 적의 진영에 담그고 있었소. 우리는 그 다리를 불태워야 했소."

1893년 10월 12일 모길료프 현 체체르스크에서 상인 집안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912년 사회혁명당에 들어갔다가 1915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고, 같은 해 체포돼 예니세이 현으로 유배됐다. 1918년 인민위원회 서기로 레닌제르진스키의 지시를 직접 받았고, 1919년 체카에 들어가 크론슈타트 봉기와 안토노프 농민 봉기, 타간체프 사건을 수사했다. OGPU 비밀부장과 부의장을 거쳐 1934년 내무인민위원 제1부관 겸 국가보안총국 실질 책임자가 되어 키로프 살해 수사를 지휘했다. 1937년 사라토프로 좌천됐다가 체포돼 1938년 8월 1일 총살됐고, 사후 복권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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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31체카와 OGPU의 정치수사 요원 겸 특별전권위원
  • 1931–1933OGPU 비밀정치부장, OGPU 위원회 위원
  • 1933–1934OGPU 부의장
  • 1934–1936내무인민위원 제1부관, 국가보안총국 업무 실질 지휘
  • 1936–1937NKVD 국가보안총국장
  • 1937–1938사라토프 NKVD 책임자, 1937년 7월 20일 체포돼 1938년 8월 1일 총살

앨런 덜레스

Allen Dulles

비밀전쟁을 제도화한 미국 정보 관료

1945년 북이탈리아 항복 협상은 전쟁을 앞당겼지만, 소련 대표와 이탈리아 파르티잔을 배제한 채 진행됐다.

앨런 덜레스는 미국의 외교관·변호사이자 정보기관 지도자로, 제2차 세계대전의 비밀협상과 냉전의 은밀한 개입을 하나의 경력으로 연결했다. OSS 베른 지국장으로 독일군의 북이탈리아 항복을 협상한 작전 선라이즈를 추진했지만, 그 과정은 소련과의 연합 전선 및 이탈리아 파르티잔의 전후 주권 문제를 낳았다. 뒤이어 CIA를 이끌며 이란과 과테말라의 정권 전복, 쿠바 피그스만 침공 같은 비밀공작을 감독해 미국 정보국가의 범위와 책임을 확대했다. 실패한 쿠바 침공 뒤 사임하면서도, 그의 유산은 정보 수집과 제국적 개입이 결합한 냉전 정치의 전형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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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926미 국무부 외교관, 유럽·근동 담당
  • 1927–1944외교·군축 협상 법률고문, 외교협회 간사·회장
  • 1942–1945OSS 베른 지국장, 작전 선라이즈 협상 담당
  • 1945OSS 베를린 지국장
  • 1951–1953CIA 계획 담당 부국장, 중앙정보국 부국장
  • 1953–1961중앙정보국장
  • 1963–1964케네디 암살 진상조사 워런위원회 위원

콘스탄티노스 마니아다키스

Κωνσταντίνος Μανιαδάκης

독재정권의 공안기구 설계자

경찰은 1940년 가짜 KKE 지도부와 위조 《리조스파스티스》를 내세워 당원들을 혼란에 빠뜨리려 했다.

그리스 육군 장교 출신인 콘스탄티노스 마니아다키스는 이오아니스 메탁사스의 4·8월 독재에서 공안과 반공 탄압을 조직한 핵심 관료였다. 그는 아시팔리아의 정보망과 고문, 섬 강제추방을 결합해 그리스 공산당(KKE)의 공개 활동과 지도부를 무력화했다. 1940년에는 경찰이 통제하는 가짜 KKE 지도부와 위조된 《리조스파스티스》를 만들어 당원들을 혼란시키려 했다. 해방 뒤에도 반공주의를 정치 자산으로 삼아 의원이 되었고, 독재 시기의 책임은 제대로 청산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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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육군사관학교 졸업, 공병 소위
  • 1919–1922소아시아 원정 참전
  • 1923레오나르도풀로스·가르갈리디스 운동 참여로 전역
  • 1929중령으로 군을 사임
  • 1936–1941메탁사스 정권 공안차관, 국가보안 체계 조직
  • 1941코리시스·추데로스 정부의 공안차관 및 내무장관
  • 1941–1949아르헨티나 주재 그리스 공관 감독관
  • 1950–1964우익 정당 소속 국회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