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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인물 2390명

예카테리나 콘스탄티노브나 브레시코-브레시콥스카야

Екатерина Константиновна Брешко-Брешковская
사회운동·조직 사회혁명당 러시아 러시아 1844–1934 ○ 자연사

44년간 감옥과 유형을 견딘 '러시아 혁명의 할머니', 사회주의혁명당 공동 창립자

케넌 씨, 우리가 유형지에서 죽을 수도 있고, 우리 아이들도, 손자들도 유형지에서 죽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무언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 1885년 시베리아에서 조지 케넌에게.

귀족 출신으로 1861년 농노 해방에 참여한 뒤 1874년 '민중 속으로' 운동에 뛰어들었다. 1878년 '193인 재판'에서 정치범 최초의 여성 카토르가형을 선고받아 22년간 감옥과 시베리아 유형을 견뎠으며, 조지 케넌의 르포를 통해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1896년 석방 후 그리고리 게르슈니와 사회주의혁명당(SR)을 결성하고 전투조직 창설을 주도했으며, 1904년 미국 순회 강연으로 혁명 자금을 모금했다. 1917년 2월 혁명 후 임시정부의 상징적 원로로 귀환하여 예비의회 최고령 의장을 맡았으나, 볼셰비키 집권에 반대해 내전 중 백군을 지지했다. 1918년 망명하여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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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1농노 해방에 참여, 가문 영지의 농민들을 위한 학교·도서관·협동조합 설립
  • 1873–1874키예프에서 급진적 지식인 공동체 결성; '민중 속으로' 운동 참여, 가짜 여권으로 농촌 선전 활동
  • 1874–1878체포되어 페트로그라드 구치소 수감; '193인 재판'에서 유죄 판결, 카라 형무소 5년 카토르가형 — 여성 정치범 최초의 강제노역 선고
  • 1878–1896카라 카토르가 복역 후 바르구진·셀렌긴스크 유형; 1881년 탈주 실패로 4년 추가 카토르가형; 22년간 수감·유형 생활, 조지 케넌과의 인터뷰로 국제적 명성
  • 1896–1901니콜라이 2세 대관식 사면으로 석방; 그리고리 게르슈니와 함께 민스크에서 나로드니키 운동 재건, SR 결성 준비
  • 1901–1903사회주의혁명당(SR) 공동 창립; 게르슈니와 함께 전국 비밀 조직 활동, 전투조직 창설 주도
  • 1903–1905체포 위협으로 제네바 망명; 1904년 암스테르담 제2인터내셔널 대회 참석 후 미국 순회 강연 — 약 1만 달러 모금, '바부시카' 별명 획득
  • 1905–1910러시아 귀환, 1905년 혁명 참여; 1908년 예브노 아제프의 배신으로 체포,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수감
  • 1910–1917시베리아 종신 유형 선고; 1913년 이르쿠츠크 탈주 시도 실패 후 야쿠츠크 독방 수감; 미국 여론 압력으로 이르쿠츠크 이감
  • 19172월 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귀환 — 케렌스키의 환영; 예비의회 최고령 의장; 볼셰비키 집권 반대, 체코슬로바크 군단 개입 호소
  • 1918–1934블라디보스토크·일본 경유 미국 망명; 백군 지원 요청 활동; 파리 거쳐 체코슬로바키아 정착, 카르파티아 노동당 조직; 프라하 인근에서 사망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3세

Александ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III
정부·행정 러시아 제국 러시아 러시아 1845–1894 ○ 신장염

부친의 대개혁을 되돌리고 전제정치를 재확립한 '평화를 만드는 자'

오스트리아 대사가 전쟁을 위협하자 알렉산드르 3세는 은제 포크를 매듭으로 구부려 대사의 접시 위에 던지며 말했다: '이것이 바로 내가 그대의 두세 개 군단에게 할 일이다.'

1881년 부친 알렉산드르 2세 암살 직후 즉위한 알렉산드르 3세는 개혁이 혁명을 낳는다는 신념 아래 포베도노스체프의 '전제정치 불가침 선언'으로 개혁안을 폐기하고, 젬스트보 약화·검열 강화·토지대장을 통한 농촌 통제 등 체계적 반개혁을 단행하며 '정교·전제·국민성'을 국시로 러시아화와 유대인 박해를 전개했다. 대외적으로는 큰 전쟁을 피해 '미로트보레츠(평화를 만드는 자)'로 불렸으나, 그의 프랑스-러시아 동맹은 훗날 러시아를 세계대전으로 끌어들이는 지정학적 틀이 되었다. 그가 재건해 아들 니콜라이 2세에게 물려준 전제 권력은 1905년과 1917년 혁명이 산산조각낼 구체제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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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5형 니콜라이 황태자의 죽음으로 황태자(체사레비치)가 되다
  • 1866포베도노스체프에게 법률 교육을 받기 시작하다
  • 1877–78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루슈크 분견대 지휘
  • 1881.3.13부친 암살 후 즉위
  • 1881.4.29'전제정치 불가침 선언' 공포, 반개혁 시작
  • 1889토지대장(zemsky nachalnik) 제도 도입으로 농촌 귀족 통제 강화
  • 1892프랑스-러시아 동맹 체결

표도르 바실리예비치 두바소프

Фёдор Васильевич Дубасов
군사·지휘 러시아 제국 러시아 제국 러시아인 1845–1912 ○ 병사

모스크바 12월 봉기를 포격으로 진압한 제정 러시아 해군 제독

「두바소프 자신이 모스크바 수비대 1만 5천 명 중 신뢰할 수 있는 병력은 5천 명뿐이라고 선언했다」: 레닌, 「모스크바 봉기의 교훈」에서 인용

러일전쟁기의 제독이자 모스크바 총독으로, 1877년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두 척의 기뢰정을 이끌고 터키 장갑함을 격침해 전역 첫 성 게오르기 훈장을 받은 해군 장교였다. 1905년 11월 모스크바 총독에 임명되어 12월 무장봉기를 바리케이드 포격과 세묘놉스키 근위연대 투입으로 진압했으며, 레닌이 인용한 바와 같이 모스크바 수비대 1만 5천 명 중 신뢰할 수 있는 병력은 5천 명뿐이라고 솔직히 인정했다. 사회혁명당의 두 차례 암살 시도에서 살아남았으나 부상으로 휴유증을 앓다 1912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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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0해군사관학교 졸업
  • 1877기뢰정으로 터키 장갑함 격침, 성 게오르기 4급 훈장 수훈
  • 1897–1899태평양함대 사령관, 뤼순항 점령
  • 1901–1905해군기술위원회 의장
  • 1905–1906모스크바 총독, 12월 무장봉기 진압
  • 1906국가평의회 위원; 두 차례 암살 시도에서 생존하고 해군 대장 진급

표트르 니콜라예비치 두르노보

Пётр Николаевич Дурново

1905년 혁명을 무력 진압하고 세계대전의 파국을 예견한 제정 내무장관

두르노보는 1914년 각서에서 경고했다: '러시아에서 정치혁명은 불가능하며, 모든 혁명운동은 필연적으로 사회주의 운동으로 변질될 것이다.'

표트르 두르노보는 러시아 제국 경찰국장(1884~1893)과 내무장관(1905~1906)을 지낸 보수 관료로, 1905년 혁명을 무력 진압해 '반혁명의 도살자'로 불렸다. 해군 장교에서 경찰 수장으로 변신한 특이한 이력을 지녔으며, 내무장관 시절 비테 총리와 대립하다 함께 퇴진했다. 1914년 니콜라이 2세에게 올린 각서에서 독일과의 전쟁이 제정의 붕괴와 사회혁명을 초래하리라 예측했고, 이 예언은 1917년 혁명으로 실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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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0해군사관학교 졸업, 태평양·발트 함대 복무
  • 1870군사법률학교 졸업 후 법무성 검사보로 전임
  • 1884–1893내무성 경찰국장
  • 1893–1900원로원 의원
  • 1900–1905내무차관 (우편·전신 담당)
  • 1905.10–1906.04내무장관 (비테 내각)
  • 1906–1915국무회의 의원, 우파 그룹 지도자

뱌체슬라프 콘스탄티노비치 폰 플레베

Вячеслав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фон Плеве

짜르 체제를 지키려 "작은 승리의 전쟁"을 요구한 최후의 강경파 내무장관

"혁명을 막으려면 작은 승리의 전쟁이 필요합니다" — 러일전쟁을 앞두고 세르게이 비테에게 했다고 전해지는 말.

독일계 귀족 가문 출신이나 러시아 정교도로 성장한 플레베는 1881년 알렉산드르 2세 암살 후 경찰국장으로 발탁되어 '인민의 의지'를 분쇄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1902년 내무장관에 오른 그는 농민 봉기를 무력 진압하고 지방 자치기관(젬스트보)을 옥죄었으며, 경찰 주도의 노동운동(주바토프시나)을 시험했다가 곧 폐기하는 등 일관된 강경 노선으로 체제를 방어했다. 1904년 7월 사회혁명당 전투조직의 예고르 사조노프가 던진 폭탄에 암살당했고, 그의 죽음은 스뱌토폴크-미르스키의 '신뢰의 시대'로 가는 문을 열어 피의 일요일 직전의 정치적 전환을 촉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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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7법무부 입부, 검사보로 임관
  • 1879페테르부르크 사법부 검사
  • 1881경찰국장
  • 1884원로원 의원
  • 1885내무차관
  • 1894국무장관 겸 법전편찬 총괄
  • 1899핀란드 대공국 담당 장관-국무비서관
  • 1902내무장관 겸 헌병단장
학술·연구 소속 미확정 독일 독일 1846–1919 ○ 병사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기초를 놓은 독일 노동운동의 원로 이론가

레닌은 메링을 두고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길 원할 뿐 아니라, 되는 법을 아는 사람'이라 평했다.

독일 마르크스주의 역사학·문예비평·철학을 대표하는 이론가로, 1891년 SPD에 입당하여 『노이에 차이트』의 주요 필자가 되었고 카우츠키·룩셈부르크와 함께 당내 좌파의 이론적 기둥을 이뤘다. 1916년 스파르타쿠스단을 공동 창립하고 1919년 KPD 창당을 주도했으며, 마르크스의 고전적 전기 『카를 마르크스, 그의 생애』(1918)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기념비 『독일 사회민주주의사』(1898)를 남겼다. 프로이센 신화를 해체한 『레싱 전설』(1893)로 엥겔스의 극찬을 받았고, 네오칸트주의와 니체의 영향력에 맞서 사적 유물론을 문화 영역에까지 적용했다. 룩셈부르크·리프크네히트 피살 2주 만에 급환으로 사망했으며, 베를린 사회주의자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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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46포메른 주 슐라베 출생
  • 1884–1890『베를리너 폴크스차이퉁』 편집자
  • 1891SPD 입당; 『노이에 차이트』 주요 필자 (1913년까지)
  • 1902–1907『라이프치거 폴크스차이퉁』 편집장
  • 1906–1911SPD 중앙당학교 강사
  • 1916스파르타쿠스단 공동 창립
  • 1917–1918프로이센 주의회 의원
  • 1919독일 공산당(KPD) 공동 창립

세르게이 겐나디예비치 네차예프

Сергей Геннадиевич Нечаев
사회운동·조직 소속 미확정 러시아 러시아 1847–1882 ○ 옥사

『혁명가의 교리문답』 저자, 목적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허무주의 혁명가

「혁명가는 파멸된 인간이다. 그에게는 자신의 이익도, 사업도, 감정도, 애착도, 재산도, 이름조차도 없다. 그의 전 존재는 오직 하나의 목적, 하나의 사상, 하나의 열정 — 혁명에 삼켜졌다」 — 『혁명가의 교리문답』 서두

『혁명가의 교리문답』을 집필한 허무주의 혁명가. 비밀결사 '인민의 보복'을 조직했으나 동료 살해로 추방당했다. 목적을 위한 모든 수단을 정당화한 그의 '네차예프시나'는 혁명 조직론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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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5–1866모스크바로 이주, 역사가 포고딘의 사무원으로 근무; 교사 시험 응시했으나 실패
  • 1867–1868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 교사 자격 취득 후 교구학교 교사로 근무; 대학 청강생으로 급진 학생운동 참여
  • 1869.4–8자작 체포극을 꾸민 후 스위스로 망명; 바쿠닌·오가료프와 교류, '바흐메테프 기금' 1만 프랑을 확보; 『혁명가의 교리문답』 집필
  • 1869.9–11모스크바 귀환 후 비밀결사 '인민의 보복' 조직, 5인조 체계와 철저한 규율 도입; 자신에게 불복종한 학생 이바노프를 직접 살해
  • 1870–1872재차 해외 도주; 제네바에서 잡지 『인민의 보복』·『공동체』 발행; 러시아 망명자 사회에서 완전히 고립됨
  • 1872–1873취리히에서 체포되어 러시아 정부에 범죄인 인도; 모스크바 배심재판에서 20년 카토르가형 선고
  • 1873–1882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알렉세이옙스크 라벨린에 독방 수감; 수비병 40여 명을 포섭하고 인민의 의지당 집행위원회와 비밀 연락망 구축
  • 1882.12.3수종과 괴혈병 합병증으로 옥사, 35세; 시신은 니콜라옙스카야 철도 프레오브라젠스카야 역 인근에 매장(정확한 위치 미상)

니콜라이 예고로비치 주콥스키

Николай Егорович Жуковский
학술·연구 러시아 러시아 1847–1921 ○ 병사

러시아 항공의 아버지, 유체역학의 수학적 토대를 세우고 TsAGI를 만든 과학자

당대 과학자들이 인간 비행을 비웃을 때, 주콥스키는 1891년 강연 「새의 비상에 관하여」에서 글라이더의 '죽음의 루프' 가능성을 수학으로 증명했고, 22년 후 네스테로프가 하늘에서 그 증명을 완성했다.

러시아 항공학의 창시자이자 현대 유체역학의 아버지. 새의 비행을 수학적으로 분석하여 양력의 순환이론을 정립했고, 1902년 모스크바대에 러시아 최초의 풍동을 건설했다. 1904년 유럽 최초의 공기역학 연구소를 쿠치노에 세웠고, 1918년에는 TsAGI(중앙유체역학연구소)를 창설하여 소련 항공·우주 과학의 제도적 기반이 되었다. 제자 투폴레프, 스테치킨, 유리예프 등이 소련 항공 산업을 이끌었으며, 치올콥스키의 고립된 이론을 국가적 연구 역량으로 전환시킨 제도적 통로가 바로 주콥스키의 학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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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8모스크바대학 물리수학부 응용역학 전공 졸업
  • 1872제국모스크바기술학교 교수, 분석역학 담당, 1920년까지 재직
  • 1885모스크바대학 교수, 유체역학 및 응용역학 강의
  • 1902모스크바대학에 러시아 최초의 흡입식 풍동 건설 지휘
  • 1904쿠치노에 유럽 최초의 공기역학 연구소 설립, 소장 취임
  • 1908모스크바기술학교에 항공동호회 창설, 훗날 투폴레프, 스테치킨, 유리예프 배출
  • 1918TsAGI(중앙유체역학연구소) 창설, 초대 소장

알렉산드르 페트로비치 카르핀스키

Александр Петрович Карпинский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47–1936 ○ 자연사

혁명을 가로질러 과학아카데미를 지킨 첫 선출 총재

1917년 5월 15일 과학아카데미 총회에서 최초의 선출 총재 투표가 열렸다. 카르핀스키는 거의 만장일치로 당선되었다 — 오직 본인만이 자신에게 반대표를 던졌다.

카르핀스키는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최초의 선출 총재(1917–1936)로서, 제정에서 소비에트 체제로의 전환기를 가로질러 학술원을 이끈 세계적 지질학자다. 유럽러시아 최초의 종합 지질도를 완성했고, 동유럽 플랫폼의 2층 구조를 밝혔으며, 남부 유럽러시아를 가로지르는 변형대인 '카르핀스키 선'을 규명해 지구조론의 기초를 놓았다. 페름기 상어 헬리코프리온을 기재했고, 그의 이름은 광물 카르핀스카이트, 달의 크레이터, 러시아 지질연구소에 남아 있다. 1917년 5월 총회에서 거의 만장일치로 선출된 그는 혁명과 내전의 혼란 속에서도 학술원의 장비와 기록을 보존하며 소비에트 기초과학 제도의 연속성을 확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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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6–1869우랄 지역 광산 기사
  • 1869–1896상트페테르부르크 광산연구소 교수
  • 1885–1903지질위원회 위원장
  • 1886제국 과학아카데미 회원 선출
  • 1899–1936광물학회 회장
  • 1916–1917과학아카데미 부총재 대행
  • 1917–1936과학아카데미 총재 · RAS → AN SSSR

지노비 페트로비치 로제스트벤스키

Зиновий Петрович Рожественский
군사·지휘 러시아 제국 러시아 제국 러시아인 1848–1909 ○ 심장마비

쓰시마 해전에서 발트함대를 이끈 제정 러시아 해군 제독

훗날 그는 이렇게 썼다: '시민적 용기가 조금이라도 있었더라면, 이 마지막 함대를 학살터로 보내지 말라고 온 세상에 외쳤어야 했다. 그러나 내게는 그런 불꽃이 없었다.'

제정 러시아 해군의 중장으로, 러일전쟁에서 제2태평양함대를 지휘해 발트해에서 극동까지 철갑함대를 이끄는 전례 없는 항해를 완수했으나, 쓰시마 해전에서 도고 헤이하치로의 일본 함대에 궤멸적 패배를 당했다. 그는 이 원정이 무모한 모험임을 처음부터 직감했지만, '여론을 만족시켜야 한다'며 출항을 강행했고, 훗날 '시민적 용기가 조금이라도 있었더라면 이 마지막 함대를 학살터로 보내지 말라고 온 세상에 외쳤어야 했다'고 토로했다.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포로가 된 그는 귀환 후 군법회의에 회부되었으나 부상으로 인해 무죄 판결을 받고 은둔 속에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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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8–1873해군사관학교 및 미하일롭스키 포병학교 졸업
  • 1877–1878러시아-튀르크 전쟁 참전, 베스타호 포병장교로 터키 철갑함과 교전
  • 1883–1885불가리아 해군 사령관
  • 1891–1893주영국 해군무관
  • 1898–1903소장 진급, 발트함대 포병훈련대 사령관, 해군참모총장
  • 1904–1905중장, 제2태평양함대 사령관: 발트해에서 쓰시마까지 18,000해리 항해, 쓰시마 해전 참패
  • 1906군법회의에서 부상으로 인한 무죄 판결, 퇴역
  • 1909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심장마비로 사망

세르게이 율리예비치 비테

Сергей Юльевич Витте
경제·재정·계획 러시아 제국 러시아 그루지야 1849–1915 ○ 자연사

차르가 미워한 구원투수

1888년, 측근들 앞에서 "화물 기관차 두 대로 황실 열차를 끌면 위험하다"고 직언했다. 며칠 후 보르키 탈선 사고. 알렉산드르 3세는 그를 국철 책임자로 발탁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금본위제를 주도한 제국 근대화의 설계자. 1905년 일본과 강화를 맺고 10월 선언을 받아냈으나, 차르는 위기를 넘겨준 그를 평생 용서하지 않았다. 한직에서 회고록을 쓰다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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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2–1903재무장관, 금본위제, 시베리아 횡단철도, 공업화 드라이브
  • 1905.9포츠머스에서 일본과의 강화 협상 타결
  • 1905.10초대 총리, 10월 선언 기초
  • 1906.4해임, 이후 국가평의회 한직

베라 이바노브나 자술리치

Вера Ивановна Засулич
학술·연구 소속 미확정 소련 러시아 1849–1919 ○ 자연사

나로드니키 권총에서 마르크스주의 비평으로, 한 여성 혁명가가 걸어간 반세기

1878년 3월 31일, 배심원 전원 무죄 평결. 군중은 자술리치를 어깨 위로 들어올려 페테르부르크 거리를 행진했다. 차르 정부는 즉시 재체포를 명령했지만, 혁명가의 총성은 이미 전 유럽에 울려퍼진 뒤였다.

1878년 페테르부르크 시장 트레포프를 저격했고 배심원들은 무죄를 선고했다. 그 한 방은 짜르 전제에 대한 분노를 폭발시켰고 유럽 전역이 그녀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자술리치는 테러가 막다른 길임을 가장 먼저 깨닫고 마르크스주의로 전향했다. 1883년 플레하노프 등과 함께 러시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조직 「노동해방단」을 창립했고, 「이스크라」 편집위원과 제2인터내셔널 러시아 대표, 그리고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문학 비평가로 활동했다. 멘셰비키로서 1917년 10월 혁명에 반대했고 볼셰비키 정권 아래 폐렴으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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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9–73네차예프 사건 연루 체포·투옥·유형
  • 1875–77바쿠닌주의 「남부 폭도단」에서 활동
  • 1878트레포프 저격, 배심원 전원 무죄 — 국제적 센세이션
  • 1879–80「검은 재분할」 공동 창립; 재망명
  • 1883플레하노프 등과 「노동해방단」 창립 —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기원
  • 1896–1904제2인터내셔널 3회 대회에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대표로 참석
  • 1900–03「이스크라」 및 「자랴」 편집위원
  • 1903–17멘셰비키 지도부; 이후 청산주의자

이반 페트로비치 파블로프

Иван Петрович Павлов
학술·연구 소비에트 러시아 1849–1936 ○ 폐렴

조건반사를 발견하고 스탈린에게 '러시아인이라 불리는 것이 부끄럽다'고 쓴 노벨상 생리학자

동료가 거리의 총격 때문에 10분 지각했다고 설명하자, 파블로프가 외쳤다: '혁명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실험실에서 할 실험이 있는데!'

소화생리학 연구로 1904년 노벨상을 수상하고, 개 실험을 통해 조건반사(고전적 조건형성)를 발견하여 현대 행동심리학과 신경과학의 토대를 놓은 러시아·소비에트 생리학자. 레닌의 찬사와 소비에트 정부의 전폭적 지원을 받으면서도 공산당 체제를 공개적으로 비판했으며, 1927년 스탈린에게 지식인 탄압에 대해 '러시아인이라 불리는 것이 부끄럽다'고 썼고 1934년 키로프 암살 후에는 대숙청을 몰로토프에게 항의했다. 그의 고등신경활동에 관한 유물론적 생리학은 사후 소비에트 이데올로기적 정설로 교조화되어, 그 자신의 치열한 독립 정신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파블로프 학설' 국가 정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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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0–1875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자연과학 전공, 자연과학 후보 학위 취득
  • 1875–1879제국의과외과학원 수학, 금메달로 졸업
  • 1884–1886독일 라이프치히·브레슬라우에서 카를 루트비히·루돌프 하이덴하인 밑에서 연구
  • 1890–1895군사의학아카데미 약리학 교수
  • 1891–1936실험의학연구소 생리학부장
  • 1895–1925군사의학아카데미 생리학 교수
  • 1904소화생리학 연구로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 — 러시아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
  • 1925–1936소비에트 과학아카데미 생리학연구소 소장

세르게이 안드레예비치 무롬체프

Сергей Андреевич Муромцев
정치·당 지도 입헌민주당 러시아 러시아 1850–1910 ○ 심장마비

러시아 최초의 헌법적 의회를 이끈 로마법 학자이자 카데트 지도자

1906년 4월 27일 첫 국가두마 개회사: "국가두마에 경의를 표합니다. 위대한 사업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인민의 의지가 불변의 법에 기초한 입법 기관으로 표현됩니다."

로마법 학자이자 카데트 창립 지도자였던 세르게이 무롬체프는 러시아 헌정주의의 얼굴이었다. 모스크바 대학 교수로 법사회학을 개척했고, 법률학회 회장으로 사법 개혁을 주도했다. 1906년 제1대 국가두마 의장에 당선되어(426/436표) 러시아 최초의 입헌적 대의기관을 이끌었으나, 의회 해산 후 비보르크 호소에 서명해 수감되었다. 1910년 그의 장례식은 1905년 혁명 이후 최대 규모의 반체제 시위로, 헌정사에 신화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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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5모스크바 대학 로마법 도첸트
  • 1877법학 박사, 모스크바 대학 교수
  • 1880–1892《법률 회보》 편집자, 모스크바 법률학회 회장
  • 1905.10입헌민주당(카데트) 공동 창립, 중앙위원
  • 1906.4–7제1대 국가두마 의장
  • 1908비보르크 호소 서명으로 3개월 수감
  • 1910사망; 장례식이 대규모 반체제 시위로

마르크 안드레예비치 나탄손

Марк Андреевич Натансон
정치·당 지도 사회혁명당 러시아 제국 리투아니아 유대계 러시아인 1850–1919 ○ 자연사

차이콥스키 서클에서 좌파 에스에르까지, 반세기 러시아 혁명운동의 위대한 결집자

'레닌과 나는 완전히 갈라섰다… 나는 더 이상 레닌을 믿지 않는다' — 1919년 망명 직전, 반세기 동지였던 볼셰비키와의 결별을 선언하다.

마르크 나탄손은 1870년대 차이콥스키 서클, '토지와 자유', '인민의 권리'의 공동 창립을 주도하고 사회혁명당 중앙위원을 지낸, 러시아 혁명운동의 조직적 골격을 반세기 동안 연결한 핵심 조직가이다. 탁월한 결집력으로 '혁명의 이반 칼리타'로 불렸고, 제1차 세계대전 중 치메르발트·킨탈 회의에서 국제주의 입장을 견지하며 레닌과 협력했다. 1917년 좌파 사회혁명당과 혁명적 공산당 창립을 주도했으나, 일당 독재로 기운 볼셰비키에 환멸을 느끼고 '나는 더 이상 레닌을 믿지 않는다'는 말을 남긴 채 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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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1차이콥스키 서클 공동 창립
  • 1876플레하노프와 카잔 광장 시위 조직; '토지와 자유' 결성 주도
  • 1893'인민의 권리'당 창립
  • 1906사회혁명당 중앙위원 선출
  • 1915–1916치메르발트·킨탈 회의 참가
  • 1917좌파 사회혁명당 지도자;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상임위원
  • 1918혁명적 공산당 공동 창립

니콜라이 드미트리예비치 골리친

Николай Дмитриевич Голицын
정부·행정 러시아 제국 러시아 러시아 1850–1925 ✕ 처형

스스로 무능을 고백한 제국의 마지막 총리

1925년, 반신불수 상태로 총살되러 가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인생에 지쳤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총리. 1917년 1월 황제의 임명을 받았을 때 스스로 '무능력'을 이유로 사양했으나, 충신으로서 받아들인 뒤로도 2월 혁명의 파고 앞에서 결정적인 행동을 하지 못했다. 혁명 후 사수공과 공동 농장 경비원으로 생계를 잇다가, 1925년 '리체이스트 사건'에 연루되어 반신불수 상태로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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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1–1879내무부 관료, 폴란드령에서 농민 담당
  • 1879–1885아르한겔스크 부지사, 내무부 경제국 부국장
  • 1885–1903아르한겔스크·칼루가·트베리 지사
  • 1903–1915원로원 의원, 국가평의회 의원
  • 1915–1916러시아 포로구호위원회 의장
  • 1917.01–03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총리

파벨 보리소비치 악셀로트

Павел Борисович Аксельрод
정치·당 지도 소속 미확정 러시아 러시아 1850–1928 ○ 자연사

대중 노동자 정당의 이론가: 레닌의 전위당 모델에 맞서 패배한 논쟁

트로츠키 회고: 「악셀로트 집안에는 소박함과 진심 어린 동지적 참여의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었다.」

나로드니키로 출발해 1883년 플레하노프·자술리치와 함께 러시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조직 「노동해방단」을 창립했다. 1900년 『이스크라』 편집위원, 1903년 RSDLP 분열 후 멘셰비키 핵심 이론가로서 대중적 노동자 정당을 주장하며 레닌의 전위당을 비판했다. 1917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을 지냈으나 10월 혁명에 반대, 이후 망명하여 생을 마칠 때까지 제2인터내셔널에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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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2–74키예프 대학 차이콥스키 서클에서 나로드니키 활동; 「민중 속으로」 참가
  • 1876–79「토지와 자유」 → 분열 후 「검은 재분할」 지도부
  • 1881–83망명 중 마르크스주의로 전향; 독일 사민당 지도부와 교류
  • 1883제네바에서 플레하노프·자술리치 등과 「노동해방단」 공동 창립
  • 1900–03『이스크라』 및 『자랴』 편집위원
  • 1903–05RSDLP 분열 후 멘셰비키 핵심 이론가; 레닌의 전위당이 자코뱅주의로 변질될 위험을 최초로 경고
  • 1906–14제2인터내셔널 활동; 청산주의 전술 정당화; 비엔나 회의 OK 해외서기국 선출
  • 1917귀국,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 10월 혁명 반대하고 재망명
  • 1918–28멘셰비키 망명 지도부; 반볼셰비키 노선 견지; 베를린에서 사망
학술·연구 독일 독일 1850–1932 ○ 자연사

수정주의의 창시자, 진화적 사회주의 이론가, 『사회주의의 전제조건들』 저자

"흔히 '사회주의의 최종 목표'라고 불리는 것에 나는 지극히 적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 목표가 무엇이든 나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며, 운동이 전부다." — 비판자들에 대한 답변 (1899)

독일 사민당의 이론가이자 정치인. 엥겔스의 문학적 유언집행자이자 『사회민주주의자』 편집장으로 마르크스주의 정통파로 출발했으나, 1899년 『사회주의의 전제조건들』을 통해 자본주의 붕괴론·계급양극화·혁명 필연성을 반박하는 수정주의를 제창했다. "목표는 아무것도 아니고 운동이 전부다"라는 명제로 사민주의의 개혁적·의회주의적 전환의 토대를 놓았으며, 이는 혁명적 사회주의와 진화적 사회민주주의의 분기점이 되었다. 세계대전 중 반전 입장으로 USPD 창립에 참여했고,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의회민주주의를 수호하다 나치 집권 6주 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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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2사회민주노동당(SDAP, 아이제나흐파) 입당; 1875년 고타 통합대회 대의원
  • 1881–1890망명지 취리히·런던에서 『사회민주주의자(Der Sozialdemokrat)』 편집장; 엥겔스와 긴밀히 협력
  • 1891카우츠키와 함께 에르푸르트 강령 기초; 1895년 엥겔스의 문학적 유언집행자로 지명됨
  • 1899『사회주의의 전제조건들』 출간 — 수정주의 논쟁 촉발, 국제 사회주의 운동 분열의 기점
  • 1902–1928제국의회 의원(브레슬라우-서부, 후일 포츠담 II) — 조세·통상·헌법 문제 주력
  • 1915–1917전쟁 차관 반대파로 전환; 하제·카우츠키와 평화 선언 발표, USPD 공동 창립
  • 1918–1928바이마르 공화국 재무부 차관보 역임, 의회민주주의 수호 활동; 1932년 사망

토마시 가리크 마사리크

Tomáš Garrigue Masaryk
정치·당 지도 소속 미확정 체코슬로바키아 체코인 1850–1937 ○ 자연사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을 조직하고 볼셰비키와 펜자 협정을 맺은 독립운동의 철학자-대통령

1918년 3월 7일, 68번째 생일을 맞은 마사리크는 시베리아 횡단이 가능하다는 것을 군단에 직접 보여주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나는 열차에 올랐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의회 의원이었던 마사리크는 제1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망명하여 체코슬로바키아 독립운동의 정치적 지도자가 되었다. 1917년 러시아로 건너가 체코·슬로바키아 포로병들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을 편성하고 볼셰비키와 펜자 협정을 체결, 군단의 블라디보스토크 경유 프랑스 이송을 확보했다. 1918년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해 17년간 중부 유럽에서 가장 안정된 민주국가를 이끌었고, 그의 성공은 러시아 내전에 군단이 휘말리는 모순 위에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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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2–1914프라하 카렐 대학 철학 교수
  • 1891–1893오스트리아 제국의회(라이히스라트) 의원 (청년체코당)
  • 1907–1914오스트리아 제국의회 의원 (체코 진보당)
  • 1915–1918체코슬로바키아 민족평의회 의장 (망명)
  • 1917–1918러시아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편성 지휘
  • 1918–1935체코슬로바키아 초대 대통령

안드레이 이바노비치 젤랴보프

Андрей Иванович Желябов
정치·당 지도 인민의 의지 러시아 러시아 1851–1881 ✕ 처형

황제 암살을 조직한 인민의 의지당 실질적 지도자, 경찰 대열을 향해 당의 신념을 선포한 혁명가

「나는 인민 해방의 대의에 봉사해왔다. 이것이 내 유일한 직업이며, 나는 오랜 세월 전 존재를 바쳐 이에 헌신해왔다」 — 1881년 예심 조사에서.

농노 출신으로 인민의 의지당 집행위원회 실질적 지도자였다. 알렉산드르 2세 암살을 총괄 기획했고, 체포 이틀 뒤 암살이 성공했다. 법정에서 인민 해방의 신념을 선언한 뒤 1881년 4월 교수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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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9–1871오데사 노보로시스크 대학 법학부 입학, 학생 소요 주도로 제적·추방
  • 1873–1877차이콥스키 서클 가입, '민중 속으로' 선전운동 참가, 체포 후 '193인 재판'에서 무죄
  • 1879.6리페츠크 대회 참석, 인민의 의지당 집행위원회 창립 멤버
  • 1879.11알렉산드롭스크에서 황제 열차 폭파 미수
  • 1880.2스테판 할투린의 겨울궁전 폭파 기획 지휘
  • 1880–1881집행위원회 실질적 수장, 노동자·학생·군대 조직망 구축, 황제 암살 계획 총괄
  • 1881.2.27암살 이틀 전 체포, 사건 합류 자청
  • 1881.4.3세묘놉스키 연병장에서 교수형 집행

세르게이 미하일로비치 스테프냐크-크라프친스키

Сергей Михайлович Степняк-Кравчинский
문학·예술 소속 미확정 러시아 우크라이나 1851–1895 ✕ 열차 사고사

차르 헌병대장을 단검으로 처단하고 펜으로 서구에 러시아 혁명을 소개한 나로드니키

1878년 메젠초프 암살 직전, 크라프친스키는 선언문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는 사랑을 충분히 설교했다 — 이제 증오를 불러낼 때가 왔다. 무자비한 피의 복수가 이제부터 너희 악행에 대한 대답이 될 것이다.」

러시아 나로드니키 혁명운동과 서구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한 작가이자 혁명가. 차이콥스키 서클에서 활동하고 1878년 헌병대장 메젠초프를 단검으로 암살한 후 망명하여, 런던에서 『지하 러시아』(1883)를 출판하고 자유 러시아 출판 기금과 러시아 자유의 벗 협회를 창립해 망명 반체제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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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2–1873차이콥스키 서클(대선전회) 가입, 페테르부르크 노동자 대상 사회주의 선전
  • 1873–1874‘민중 속으로’ 참여 — 트베리·툴라 농민 선전, 체포 후 탈출
  • 1875–1876헤르체고비나 반오스만 봉기 참전; 제네바 바쿠닌계 기관지 『라보트니크』 기고
  • 1877이탈리아 베네벤토 무장봉기 참가(말라테스타·카피에로와 함께), 체포 후 사면
  • 1878토지와 자유당 입당, 기관지 편집; 8월 4일 메젠초프 암살; 11월 해외 망명
  • 1883『지하 러시아』(Underground Russia) 출판 — 서구 최초의 러시아 혁명운동 종합 보고서
  • 1889소설 『니힐리스트의 생애』(안드레이 코주호프) 출판
  • 1890–1895러시아 자유의 벗 협회·자유 러시아 출판 기금 창립, 월간 『자유 러시아』 편집

베라 니콜라예브나 피그네르

Вера Николаевна Фигнер
문학·예술 소련 러시아 1852–1942 ○ 자연사

나로드나야 볼랴 집행위원회 최후의 생존자, 20년 독방을 산 회고록 작가

「나는 자주 생각했다. 내 삶이 피고석 외에 다른 무엇으로 끝날 수 있었을까? 그리고 매번 스스로 대답했다. 아니오!」 — 1884년 '14인 재판'에서

카잔현 귀족 가문 출신, 취리히 대학 의학부 수학 중 나로드니키 서클 '프리치'에 합류했다. 1879년 나로드나야 볼랴 집행위원으로 선출돼 알렉산드르 2세 암살 계획을 기획했으며, 1881년 거사 후 유일하게 체포를 피한 집행위원이었다. 1883년 배신으로 체포돼 슐리셀부르크 요새 20년 독방 수감 후 회고록 『Запечатлённый труд』(1921–22)로 혁명운동의 핵심 증언을 남겼다. 볼셰비키에 가입하지 않았으나 소련에 남아 대숙청기 스탈린에게 옛 동지들의 구명 탄원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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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2–1875취리히·베른 대학 의학부 수학, '프리치' 서클 참여
  • 1876–1879사마라·사라토프현에서 '민중 속으로' 선전 활동, 펠처 근무
  • 1879–1883나로드나야 볼랴 집행위원; 알렉산드르 2세 암살 기획
  • 1883–1884체포, '14인 재판' 사형 선고 후 무기징역 감형
  • 1884–1904슐리셀부르크 요새 독방 20년 수감
  • 1906–1915해외 망명, 파리 정치범구제위원회 조직
  • 1917전러시아 농민대표소비에트 집행위원, 제헌의회 후보
  • 1921–1932『Запечатлённый труд』 출간, 구(舊)정치범 협회 활동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키발치치

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Кибальчич

차르 암살 폭탄을 설계하고 감옥에서 최초의 유인 로켓을 구상한 인민의 의지당 기술자

「나는 내 구상의 실현 가능성을 믿으며, 이 믿음이 이 비참한 상황에서 나를 지탱한다… 내 생각이 나와 함께 죽지 않고 인류와 함께 남을 것을 알며 평온히 죽음을 맞으리라」 — 1881년 3월, 감옥에서 작성한 유언 편지.

러시아 혁명가이자 '인민의 의지'의 수석 폭발물 기술자로, 알렉산드르 2세 암살에 사용된 투척 폭탄을 설계·제조했다. 사형을 앞둔 감옥에서 분말 추진제, 짐벌식 추력 제어, 안정 날개를 갖춘 세계 최초의 유인 로켓 비행 장치를 설계했으며, 이 구상은 1918년 볼셰비키 연구자들에 의해 발굴·공개되어 콘스탄틴 치올콥스키가 자신의 가장 위대한 선배로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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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1페테르부르크 철도공병대학 입학
  • 1873페테르부르크 의과외과대학 편입, 로켓 추진 실험 착수
  • 1875–1878금서 유포 혐의로 키예프 루키야놉스카야 감옥 수감
  • 1879'인민의 의지' 가입, 수석 폭발물 기술자로 활동
  • 1881.2「정치혁명과 경제문제」를 『나로드나야 볼랴』지에 발표
  • 1881.3.1알렉산드르 2세 암살에 사용된 투척 폭탄 4기 제조
  • 1881.3.23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감옥에서 유인 로켓 비행 장치 설계 완성
  • 1881.4.3다른 페르보마르톱치들과 함께 세묘놉스키 연병장에서 교수형

소피야 리보브나 페롭스카야

Софья Львовна Перовская

흰 손수건으로 차르 암살을 지휘한 인민의 의지당 집행위원, 러시아 첫 여성 정치범 사형수

「우리는 위대한 대의를 시작했다. 어쩌면 두 세대가 이 위에 누워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반드시 해내야 한다」 — 동지들에게 남긴 말.

귀족 출신, 17세에 가문을 떠나 인민의 의지당 집행위원회를 공동 창립했다. 1881년 젤랴보프 체포 후 알렉산드르 2세 암살을 지휘, 흰 손수건으로 폭탄 신호를 보냈다. 동지 밝히지 않고 27세 교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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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9–1870알라르친 여성 과정 입학, 자주학습 서클 참여; 17세에 아버지와 결별하고 자택 이탈
  • 1871–1873나로드니키 서클 결성, 나탄손 서클과 합류; 『자본론』 번역 참여; 차이콥스키 서클 가입, 노동자 계몽과 '민중 속으로' 운동
  • 1874–1878첫 체포·6개월 수감 후 석방; 펠처 자격 취득; '193인 재판' 무죄; 민스킨 탈옥 지원 실패; 올로네츠 유형 도중 볼호보역 탈주, 지하운동 전념
  • 1879.6리페츠크·보로네시 대회 참석, '토지와 자유' 분열 저지 노력; 인민의 의지당 집행위원회 공동 창립
  • 1879.11모스크바 인근 황제 열차 폭파 기도 — '선로감시원 수호루코프의 아내'로 위장
  • 1880오데사 황제 암살 기도 참여; 젤랴보프와 함께 상트페테르부르크 중앙노동자서클 조직 (300여 명)
  • 1881.3.1젤랴보프 체포(2.27) 후 작전 지휘 인수; 예카테리나 운하에서 흰 손수건 신호로 투척수들에게 폭탄 투척 지시 — 알렉산드르 2세 암살 성공
  • 1881.3.10–4.3넵스키 대로서 체포, 특별심판 사형 선고, 세묘놉스키 연병장에서 교수형 — 러시아 최초 여성 정치범 사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