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넌 씨, 우리가 유형지에서 죽을 수도 있고, 우리 아이들도, 손자들도 유형지에서 죽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무언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 1885년 시베리아에서 조지 케넌에게.
귀족 출신으로 1861년 농노 해방에 참여한 뒤 1874년 '민중 속으로' 운동에 뛰어들었다. 1878년 '193인 재판'에서 정치범 최초의 여성 카토르가형을 선고받아 22년간 감옥과 시베리아 유형을 견뎠으며, 조지 케넌의 르포를 통해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1896년 석방 후 그리고리 게르슈니와 사회주의혁명당(SR)을 결성하고 전투조직 창설을 주도했으며, 1904년 미국 순회 강연으로 혁명 자금을 모금했다. 1917년 2월 혁명 후 임시정부의 상징적 원로로 귀환하여 예비의회 최고령 의장을 맡았으나, 볼셰비키 집권에 반대해 내전 중 백군을 지지했다. 1918년 망명하여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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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농노 해방에 참여, 가문 영지의 농민들을 위한 학교·도서관·협동조합 설립
1873–1874키예프에서 급진적 지식인 공동체 결성; '민중 속으로' 운동 참여, 가짜 여권으로 농촌 선전 활동
1874–1878체포되어 페트로그라드 구치소 수감; '193인 재판'에서 유죄 판결, 카라 형무소 5년 카토르가형 — 여성 정치범 최초의 강제노역 선고
1878–1896카라 카토르가 복역 후 바르구진·셀렌긴스크 유형; 1881년 탈주 실패로 4년 추가 카토르가형; 22년간 수감·유형 생활, 조지 케넌과의 인터뷰로 국제적 명성
1896–1901니콜라이 2세 대관식 사면으로 석방; 그리고리 게르슈니와 함께 민스크에서 나로드니키 운동 재건, SR 결성 준비
1901–1903사회주의혁명당(SR) 공동 창립; 게르슈니와 함께 전국 비밀 조직 활동, 전투조직 창설 주도
1903–1905체포 위협으로 제네바 망명; 1904년 암스테르담 제2인터내셔널 대회 참석 후 미국 순회 강연 — 약 1만 달러 모금, '바부시카' 별명 획득
1905–1910러시아 귀환, 1905년 혁명 참여; 1908년 예브노 아제프의 배신으로 체포,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수감
1910–1917시베리아 종신 유형 선고; 1913년 이르쿠츠크 탈주 시도 실패 후 야쿠츠크 독방 수감; 미국 여론 압력으로 이르쿠츠크 이감
19172월 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귀환 — 케렌스키의 환영; 예비의회 최고령 의장; 볼셰비키 집권 반대, 체코슬로바크 군단 개입 호소
1918–1934블라디보스토크·일본 경유 미국 망명; 백군 지원 요청 활동; 파리 거쳐 체코슬로바키아 정착, 카르파티아 노동당 조직; 프라하 인근에서 사망
오스트리아 대사가 전쟁을 위협하자 알렉산드르 3세는 은제 포크를 매듭으로 구부려 대사의 접시 위에 던지며 말했다: '이것이 바로 내가 그대의 두세 개 군단에게 할 일이다.'
1881년 부친 알렉산드르 2세 암살 직후 즉위한 알렉산드르 3세는 개혁이 혁명을 낳는다는 신념 아래 포베도노스체프의 '전제정치 불가침 선언'으로 개혁안을 폐기하고, 젬스트보 약화·검열 강화·토지대장을 통한 농촌 통제 등 체계적 반개혁을 단행하며 '정교·전제·국민성'을 국시로 러시아화와 유대인 박해를 전개했다. 대외적으로는 큰 전쟁을 피해 '미로트보레츠(평화를 만드는 자)'로 불렸으나, 그의 프랑스-러시아 동맹은 훗날 러시아를 세계대전으로 끌어들이는 지정학적 틀이 되었다. 그가 재건해 아들 니콜라이 2세에게 물려준 전제 권력은 1905년과 1917년 혁명이 산산조각낼 구체제 그 자체였다.
「두바소프 자신이 모스크바 수비대 1만 5천 명 중 신뢰할 수 있는 병력은 5천 명뿐이라고 선언했다」: 레닌, 「모스크바 봉기의 교훈」에서 인용
러일전쟁기의 제독이자 모스크바 총독으로, 1877년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두 척의 기뢰정을 이끌고 터키 장갑함을 격침해 전역 첫 성 게오르기 훈장을 받은 해군 장교였다. 1905년 11월 모스크바 총독에 임명되어 12월 무장봉기를 바리케이드 포격과 세묘놉스키 근위연대 투입으로 진압했으며, 레닌이 인용한 바와 같이 모스크바 수비대 1만 5천 명 중 신뢰할 수 있는 병력은 5천 명뿐이라고 솔직히 인정했다. 사회혁명당의 두 차례 암살 시도에서 살아남았으나 부상으로 휴유증을 앓다 1912년 사망했다.
두르노보는 1914년 각서에서 경고했다: '러시아에서 정치혁명은 불가능하며, 모든 혁명운동은 필연적으로 사회주의 운동으로 변질될 것이다.'
표트르 두르노보는 러시아 제국 경찰국장(1884~1893)과 내무장관(1905~1906)을 지낸 보수 관료로, 1905년 혁명을 무력 진압해 '반혁명의 도살자'로 불렸다. 해군 장교에서 경찰 수장으로 변신한 특이한 이력을 지녔으며, 내무장관 시절 비테 총리와 대립하다 함께 퇴진했다. 1914년 니콜라이 2세에게 올린 각서에서 독일과의 전쟁이 제정의 붕괴와 사회혁명을 초래하리라 예측했고, 이 예언은 1917년 혁명으로 실현되었다.
"혁명을 막으려면 작은 승리의 전쟁이 필요합니다" — 러일전쟁을 앞두고 세르게이 비테에게 했다고 전해지는 말.
독일계 귀족 가문 출신이나 러시아 정교도로 성장한 플레베는 1881년 알렉산드르 2세 암살 후 경찰국장으로 발탁되어 '인민의 의지'를 분쇄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1902년 내무장관에 오른 그는 농민 봉기를 무력 진압하고 지방 자치기관(젬스트보)을 옥죄었으며, 경찰 주도의 노동운동(주바토프시나)을 시험했다가 곧 폐기하는 등 일관된 강경 노선으로 체제를 방어했다. 1904년 7월 사회혁명당 전투조직의 예고르 사조노프가 던진 폭탄에 암살당했고, 그의 죽음은 스뱌토폴크-미르스키의 '신뢰의 시대'로 가는 문을 열어 피의 일요일 직전의 정치적 전환을 촉발했다.
레닌은 메링을 두고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길 원할 뿐 아니라, 되는 법을 아는 사람'이라 평했다.
독일 마르크스주의 역사학·문예비평·철학을 대표하는 이론가로, 1891년 SPD에 입당하여 『노이에 차이트』의 주요 필자가 되었고 카우츠키·룩셈부르크와 함께 당내 좌파의 이론적 기둥을 이뤘다. 1916년 스파르타쿠스단을 공동 창립하고 1919년 KPD 창당을 주도했으며, 마르크스의 고전적 전기 『카를 마르크스, 그의 생애』(1918)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기념비 『독일 사회민주주의사』(1898)를 남겼다. 프로이센 신화를 해체한 『레싱 전설』(1893)로 엥겔스의 극찬을 받았고, 네오칸트주의와 니체의 영향력에 맞서 사적 유물론을 문화 영역에까지 적용했다. 룩셈부르크·리프크네히트 피살 2주 만에 급환으로 사망했으며, 베를린 사회주의자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당대 과학자들이 인간 비행을 비웃을 때, 주콥스키는 1891년 강연 「새의 비상에 관하여」에서 글라이더의 '죽음의 루프' 가능성을 수학으로 증명했고, 22년 후 네스테로프가 하늘에서 그 증명을 완성했다.
러시아 항공학의 창시자이자 현대 유체역학의 아버지. 새의 비행을 수학적으로 분석하여 양력의 순환이론을 정립했고, 1902년 모스크바대에 러시아 최초의 풍동을 건설했다. 1904년 유럽 최초의 공기역학 연구소를 쿠치노에 세웠고, 1918년에는 TsAGI(중앙유체역학연구소)를 창설하여 소련 항공·우주 과학의 제도적 기반이 되었다. 제자 투폴레프, 스테치킨, 유리예프 등이 소련 항공 산업을 이끌었으며, 치올콥스키의 고립된 이론을 국가적 연구 역량으로 전환시킨 제도적 통로가 바로 주콥스키의 학교였다.
1917년 5월 15일 과학아카데미 총회에서 최초의 선출 총재 투표가 열렸다. 카르핀스키는 거의 만장일치로 당선되었다 — 오직 본인만이 자신에게 반대표를 던졌다.
카르핀스키는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최초의 선출 총재(1917–1936)로서, 제정에서 소비에트 체제로의 전환기를 가로질러 학술원을 이끈 세계적 지질학자다. 유럽러시아 최초의 종합 지질도를 완성했고, 동유럽 플랫폼의 2층 구조를 밝혔으며, 남부 유럽러시아를 가로지르는 변형대인 '카르핀스키 선'을 규명해 지구조론의 기초를 놓았다. 페름기 상어 헬리코프리온을 기재했고, 그의 이름은 광물 카르핀스카이트, 달의 크레이터, 러시아 지질연구소에 남아 있다. 1917년 5월 총회에서 거의 만장일치로 선출된 그는 혁명과 내전의 혼란 속에서도 학술원의 장비와 기록을 보존하며 소비에트 기초과학 제도의 연속성을 확보했다.
훗날 그는 이렇게 썼다: '시민적 용기가 조금이라도 있었더라면, 이 마지막 함대를 학살터로 보내지 말라고 온 세상에 외쳤어야 했다. 그러나 내게는 그런 불꽃이 없었다.'
제정 러시아 해군의 중장으로, 러일전쟁에서 제2태평양함대를 지휘해 발트해에서 극동까지 철갑함대를 이끄는 전례 없는 항해를 완수했으나, 쓰시마 해전에서 도고 헤이하치로의 일본 함대에 궤멸적 패배를 당했다. 그는 이 원정이 무모한 모험임을 처음부터 직감했지만, '여론을 만족시켜야 한다'며 출항을 강행했고, 훗날 '시민적 용기가 조금이라도 있었더라면 이 마지막 함대를 학살터로 보내지 말라고 온 세상에 외쳤어야 했다'고 토로했다.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포로가 된 그는 귀환 후 군법회의에 회부되었으나 부상으로 인해 무죄 판결을 받고 은둔 속에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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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1873해군사관학교 및 미하일롭스키 포병학교 졸업
1877–1878러시아-튀르크 전쟁 참전, 베스타호 포병장교로 터키 철갑함과 교전
1883–1885불가리아 해군 사령관
1891–1893주영국 해군무관
1898–1903소장 진급, 발트함대 포병훈련대 사령관, 해군참모총장
1904–1905중장, 제2태평양함대 사령관: 발트해에서 쓰시마까지 18,000해리 항해, 쓰시마 해전 참패
1878년 3월 31일, 배심원 전원 무죄 평결. 군중은 자술리치를 어깨 위로 들어올려 페테르부르크 거리를 행진했다. 차르 정부는 즉시 재체포를 명령했지만, 혁명가의 총성은 이미 전 유럽에 울려퍼진 뒤였다.
1878년 페테르부르크 시장 트레포프를 저격했고 배심원들은 무죄를 선고했다. 그 한 방은 짜르 전제에 대한 분노를 폭발시켰고 유럽 전역이 그녀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자술리치는 테러가 막다른 길임을 가장 먼저 깨닫고 마르크스주의로 전향했다. 1883년 플레하노프 등과 함께 러시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조직 「노동해방단」을 창립했고, 「이스크라」 편집위원과 제2인터내셔널 러시아 대표, 그리고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문학 비평가로 활동했다. 멘셰비키로서 1917년 10월 혁명에 반대했고 볼셰비키 정권 아래 폐렴으로 숨졌다.
동료가 거리의 총격 때문에 10분 지각했다고 설명하자, 파블로프가 외쳤다: '혁명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실험실에서 할 실험이 있는데!'
소화생리학 연구로 1904년 노벨상을 수상하고, 개 실험을 통해 조건반사(고전적 조건형성)를 발견하여 현대 행동심리학과 신경과학의 토대를 놓은 러시아·소비에트 생리학자. 레닌의 찬사와 소비에트 정부의 전폭적 지원을 받으면서도 공산당 체제를 공개적으로 비판했으며, 1927년 스탈린에게 지식인 탄압에 대해 '러시아인이라 불리는 것이 부끄럽다'고 썼고 1934년 키로프 암살 후에는 대숙청을 몰로토프에게 항의했다. 그의 고등신경활동에 관한 유물론적 생리학은 사후 소비에트 이데올로기적 정설로 교조화되어, 그 자신의 치열한 독립 정신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파블로프 학설' 국가 정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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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1875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자연과학 전공, 자연과학 후보 학위 취득
1875–1879제국의과외과학원 수학, 금메달로 졸업
1884–1886독일 라이프치히·브레슬라우에서 카를 루트비히·루돌프 하이덴하인 밑에서 연구
1906년 4월 27일 첫 국가두마 개회사: "국가두마에 경의를 표합니다. 위대한 사업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인민의 의지가 불변의 법에 기초한 입법 기관으로 표현됩니다."
로마법 학자이자 카데트 창립 지도자였던 세르게이 무롬체프는 러시아 헌정주의의 얼굴이었다. 모스크바 대학 교수로 법사회학을 개척했고, 법률학회 회장으로 사법 개혁을 주도했다. 1906년 제1대 국가두마 의장에 당선되어(426/436표) 러시아 최초의 입헌적 대의기관을 이끌었으나, 의회 해산 후 비보르크 호소에 서명해 수감되었다. 1910년 그의 장례식은 1905년 혁명 이후 최대 규모의 반체제 시위로, 헌정사에 신화로 남았다.
'레닌과 나는 완전히 갈라섰다… 나는 더 이상 레닌을 믿지 않는다' — 1919년 망명 직전, 반세기 동지였던 볼셰비키와의 결별을 선언하다.
마르크 나탄손은 1870년대 차이콥스키 서클, '토지와 자유', '인민의 권리'의 공동 창립을 주도하고 사회혁명당 중앙위원을 지낸, 러시아 혁명운동의 조직적 골격을 반세기 동안 연결한 핵심 조직가이다. 탁월한 결집력으로 '혁명의 이반 칼리타'로 불렸고, 제1차 세계대전 중 치메르발트·킨탈 회의에서 국제주의 입장을 견지하며 레닌과 협력했다. 1917년 좌파 사회혁명당과 혁명적 공산당 창립을 주도했으나, 일당 독재로 기운 볼셰비키에 환멸을 느끼고 '나는 더 이상 레닌을 믿지 않는다'는 말을 남긴 채 망명했다.
1925년, 반신불수 상태로 총살되러 가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인생에 지쳤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총리. 1917년 1월 황제의 임명을 받았을 때 스스로 '무능력'을 이유로 사양했으나, 충신으로서 받아들인 뒤로도 2월 혁명의 파고 앞에서 결정적인 행동을 하지 못했다. 혁명 후 사수공과 공동 농장 경비원으로 생계를 잇다가, 1925년 '리체이스트 사건'에 연루되어 반신불수 상태로 총살당했다.
트로츠키 회고: 「악셀로트 집안에는 소박함과 진심 어린 동지적 참여의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었다.」
나로드니키로 출발해 1883년 플레하노프·자술리치와 함께 러시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조직 「노동해방단」을 창립했다. 1900년 『이스크라』 편집위원, 1903년 RSDLP 분열 후 멘셰비키 핵심 이론가로서 대중적 노동자 정당을 주장하며 레닌의 전위당을 비판했다. 1917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을 지냈으나 10월 혁명에 반대, 이후 망명하여 생을 마칠 때까지 제2인터내셔널에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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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2–74키예프 대학 차이콥스키 서클에서 나로드니키 활동; 「민중 속으로」 참가
1876–79「토지와 자유」 → 분열 후 「검은 재분할」 지도부
1881–83망명 중 마르크스주의로 전향; 독일 사민당 지도부와 교류
1883제네바에서 플레하노프·자술리치 등과 「노동해방단」 공동 창립
1900–03『이스크라』 및 『자랴』 편집위원
1903–05RSDLP 분열 후 멘셰비키 핵심 이론가; 레닌의 전위당이 자코뱅주의로 변질될 위험을 최초로 경고
1906–14제2인터내셔널 활동; 청산주의 전술 정당화; 비엔나 회의 OK 해외서기국 선출
"흔히 '사회주의의 최종 목표'라고 불리는 것에 나는 지극히 적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 목표가 무엇이든 나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며, 운동이 전부다." — 비판자들에 대한 답변 (1899)
독일 사민당의 이론가이자 정치인. 엥겔스의 문학적 유언집행자이자 『사회민주주의자』 편집장으로 마르크스주의 정통파로 출발했으나, 1899년 『사회주의의 전제조건들』을 통해 자본주의 붕괴론·계급양극화·혁명 필연성을 반박하는 수정주의를 제창했다. "목표는 아무것도 아니고 운동이 전부다"라는 명제로 사민주의의 개혁적·의회주의적 전환의 토대를 놓았으며, 이는 혁명적 사회주의와 진화적 사회민주주의의 분기점이 되었다. 세계대전 중 반전 입장으로 USPD 창립에 참여했고,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의회민주주의를 수호하다 나치 집권 6주 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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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2사회민주노동당(SDAP, 아이제나흐파) 입당; 1875년 고타 통합대회 대의원
1881–1890망명지 취리히·런던에서 『사회민주주의자(Der Sozialdemokrat)』 편집장; 엥겔스와 긴밀히 협력
1891카우츠키와 함께 에르푸르트 강령 기초; 1895년 엥겔스의 문학적 유언집행자로 지명됨
1899『사회주의의 전제조건들』 출간 — 수정주의 논쟁 촉발, 국제 사회주의 운동 분열의 기점
1902–1928제국의회 의원(브레슬라우-서부, 후일 포츠담 II) — 조세·통상·헌법 문제 주력
1915–1917전쟁 차관 반대파로 전환; 하제·카우츠키와 평화 선언 발표, USPD 공동 창립
1918–1928바이마르 공화국 재무부 차관보 역임, 의회민주주의 수호 활동; 1932년 사망
1918년 3월 7일, 68번째 생일을 맞은 마사리크는 시베리아 횡단이 가능하다는 것을 군단에 직접 보여주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나는 열차에 올랐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의회 의원이었던 마사리크는 제1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망명하여 체코슬로바키아 독립운동의 정치적 지도자가 되었다. 1917년 러시아로 건너가 체코·슬로바키아 포로병들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을 편성하고 볼셰비키와 펜자 협정을 체결, 군단의 블라디보스토크 경유 프랑스 이송을 확보했다. 1918년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해 17년간 중부 유럽에서 가장 안정된 민주국가를 이끌었고, 그의 성공은 러시아 내전에 군단이 휘말리는 모순 위에 세워졌다.
1878년 메젠초프 암살 직전, 크라프친스키는 선언문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는 사랑을 충분히 설교했다 — 이제 증오를 불러낼 때가 왔다. 무자비한 피의 복수가 이제부터 너희 악행에 대한 대답이 될 것이다.」
러시아 나로드니키 혁명운동과 서구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한 작가이자 혁명가. 차이콥스키 서클에서 활동하고 1878년 헌병대장 메젠초프를 단검으로 암살한 후 망명하여, 런던에서 『지하 러시아』(1883)를 출판하고 자유 러시아 출판 기금과 러시아 자유의 벗 협회를 창립해 망명 반체제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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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2–1873차이콥스키 서클(대선전회) 가입, 페테르부르크 노동자 대상 사회주의 선전
1873–1874‘민중 속으로’ 참여 — 트베리·툴라 농민 선전, 체포 후 탈출
1875–1876헤르체고비나 반오스만 봉기 참전; 제네바 바쿠닌계 기관지 『라보트니크』 기고
1877이탈리아 베네벤토 무장봉기 참가(말라테스타·카피에로와 함께), 체포 후 사면
1878토지와 자유당 입당, 기관지 편집; 8월 4일 메젠초프 암살; 11월 해외 망명
1883『지하 러시아』(Underground Russia) 출판 — 서구 최초의 러시아 혁명운동 종합 보고서
1889소설 『니힐리스트의 생애』(안드레이 코주호프) 출판
1890–1895러시아 자유의 벗 협회·자유 러시아 출판 기금 창립, 월간 『자유 러시아』 편집
「나는 자주 생각했다. 내 삶이 피고석 외에 다른 무엇으로 끝날 수 있었을까? 그리고 매번 스스로 대답했다. 아니오!」 — 1884년 '14인 재판'에서
카잔현 귀족 가문 출신, 취리히 대학 의학부 수학 중 나로드니키 서클 '프리치'에 합류했다. 1879년 나로드나야 볼랴 집행위원으로 선출돼 알렉산드르 2세 암살 계획을 기획했으며, 1881년 거사 후 유일하게 체포를 피한 집행위원이었다. 1883년 배신으로 체포돼 슐리셀부르크 요새 20년 독방 수감 후 회고록 『Запечатлённый труд』(1921–22)로 혁명운동의 핵심 증언을 남겼다. 볼셰비키에 가입하지 않았으나 소련에 남아 대숙청기 스탈린에게 옛 동지들의 구명 탄원을 썼다.
「나는 내 구상의 실현 가능성을 믿으며, 이 믿음이 이 비참한 상황에서 나를 지탱한다… 내 생각이 나와 함께 죽지 않고 인류와 함께 남을 것을 알며 평온히 죽음을 맞으리라」 — 1881년 3월, 감옥에서 작성한 유언 편지.
러시아 혁명가이자 '인민의 의지'의 수석 폭발물 기술자로, 알렉산드르 2세 암살에 사용된 투척 폭탄을 설계·제조했다. 사형을 앞둔 감옥에서 분말 추진제, 짐벌식 추력 제어, 안정 날개를 갖춘 세계 최초의 유인 로켓 비행 장치를 설계했으며, 이 구상은 1918년 볼셰비키 연구자들에 의해 발굴·공개되어 콘스탄틴 치올콥스키가 자신의 가장 위대한 선배로 꼽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