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3월, 니콜라이 2세에게 보낸 전보에서 국가두마를 '범죄적 무리'라 맹비난한 뒤 이렇게 끝맺었다: "폐하의 충성스러운 신하로서 흐느끼며 말씀드립니다. 가장 고통 없는 탈출구는 이미 제시된 조건들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블라디미르 빅토로비치 사하로프는 제정 러시아의 기병대장으로, 러시아-튀르크 전쟁, 의화단 진압, 러일전쟁, 제1차 세계대전에 이르는 50년 군 경력에서 제국 군사 엘리트의 전형적 궤적을 밟았다. 1915년 11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브루실로프 공세에서 보조 축을 맡아 브로디를 점령하고 수만 명의 포로를 확보했다. 1916년 가을 루마니아 전선의 두너이군 사령관으로 파견되어 페르디난드 1세의 보좌관으로 사실상 전선을 지휘했다. 2월 혁명 직후 니콜라이 2세에게 보낸 전보에서 국가두마를 맹비난하면서도 퇴위를 권고한 장면은 군주제 장교단의 분열된 충성을 보여준다. 혁명 후 해임되었고 내전기 크림에서 백군에 가담, 1920년 녹색군에게 체포·처형되었다.
“인간은 행복을 위해 창조되었다, 새가 비상을 위해 창조되었듯이 — 다만 행복이 언제나 인간을 위해 만들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 『역설』
우크라이나계 아버지와 폴란드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러시아 문학을 자신의 '진정한 조국'으로 삼은 작가이자 인권운동가. 나로드니키 활동으로 여러 차례 시베리아 유배를 겪었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한 『마카르의 꿈』『맹인 음악가』로 1880년대 러시아 문단의 정상에 올랐다. 제정 시절부터 무르탄 사건의 우드무르트 농민, 베일리스 사건의 유대인을 변호했고, 혁명 후에는 루나차르스키에게 보낸 편지들에서 볼셰비키의 적색테러와 사형제를 공개 비판했다. 1902년 알렉세이 고리키의 아카데미 제명에 항의해 자신도 명예 아카데미션을 반납했으며, 죽는 날까지 기근 구호와 고아원 설립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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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9–1885첫 단편 발표, 나로드니키 활동으로 반복 체포·시베리아 유배
1885–1896니주니 노브고로드에서 『마카르의 꿈』『맹인 음악가』 발표, 문학적 명성
1896–1904『루스코예 보가츠트보』 편집, 고리키 제명 항의로 명예 아카데미션 사퇴(1902)
1904–1917『루스코예 보가츠트보』 편집장, 무르탄·베일리스 사건 변호, 사형제 반대 운동
12기병사단은 죽어야 한다. 단번에 죽지 말고 저녁까지 죽어라 — 1914년 8월 29일, 카레딘 사단장에게 내린 브루실로프의 명령
제1차 세계대전에서 러시아군이 거둔 최대의 승리로 평가되는 1916년 브루실로프 공세의 설계자이자 지휘관이다. 전선 전역에 동시 타격을 가하는 새로운 돌파 전술을 고안해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궤멸 직전까지 몰아넣었으며, 이 공세는 이후 소련 군사학에서 교과서적 사례로 연구되었다. 1917년 혁명기에는 러시아군 최고사령관을 지냈으나 군대 해체를 막지 못했고, 러시아 내전 후 볼셰비키의 적군에 합류해 기병 감찰관으로 복무했다. 제정 장교단 출신으로 소비에트 체제에 협력한 그의 행보는 망명 백군 진영에서 배신으로, 소비에트 측에서는 실용적 애국으로 엇갈린 평가를 받았다.
니콜라이 2세는 유형지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나는 모든 적과 박해자를 용서할 힘을 신에게서 받았지만, 루즈스키 부관장군만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갈리치아 정복자라는 명성을 얻은 제정 러시아의 보병대장으로, 1차 세계대전에서 제3군과 북서전선·북부전선을 지휘했다. 1917년 2월 혁명 당시 프스코프에 주둔한 북부전선 사령관으로서 니콜라이 2세의 열차를 맞았고, 알렉세예프 참모총장과 전선 사령관들의 만장일치 전보를 전달하며 차르에게 책임내각 도입과 퇴위를 압박했다. 한 시간 반에 걸친 논쟁 끝에 니콜라이 2세의 뜻을 꺾은 결정적 순간은, 군부가 더 이상 왕조를 지키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전쟁 말기 붉은 군대 입대를 '러시아인끼리의 전쟁'이라 거부하고 광천수 휴양지에 머물다, 1918년 백인민 체카에 의해 인질로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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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7–1878러시아-튀르크 전쟁 참전, 고르니 두브냐크 요새 공격 중 부상
1881니콜라예프 참모대학 졸업, 이후 키예프·빌노 군관구 참모 역임
1904–1905제2만주군 야전참모장으로 러일전쟁 참전
1909보병대장 진급, 군사평의회 위원, 1912년 야전규정 공동 저자
1914.07–09제3군 사령관, 갈리치아 전투에서 리보프 점령
1914.09–1915.03북서전선 총사령관
1915.08–1917.04북부전선 총사령관, 1917년 3월 프스코프에서 니콜라이 2세의 퇴위를 압박
푸리슈케비치 씨가 무라비요프의 목걸이라 부르는 그것을, 그의 후손들은 아마도 스톨리핀의 넥타이라 부르게 될 것입니다…
트베리 지방의 진보적 젬스트보 활동가로 출발해 입헌민주당(카데트) 창당에 참여했고 4회 연속 국가두마 의원을 지낸 러시아 자유주의 정치인이다. 두마 최고의 연설가 중 하나로 불렸으며, 1907년 11월 17일 연단에서 스톨리핀의 야전군법회의를 비판하며 「스톨리핀의 넥타이」라는 말을 남겨 격분한 총리의 결투 신청을 받고 사과해야 했다. 1917년 2월 혁명 후 임시정부의 핀란드 담당 위원을 지냈고 10월 혁명에 반대하여 백군 진영에 가담했으며, 패배 후 망명하여 스위스 로잔에서 생을 마감했다.
1930년대 중반, 요양소에서 "당원 계십니까?"라는 질문에 노인이 답했다. "나는 당원이오. '나로드나야 볼랴' 당원이오."
나로드나야 볼랴 집행위원이자 혁명적 테러 이론가로, 1880년 『테러 투쟁』을 집필하여 소규모 독립 테러 조직에 의한 전제정 타도를 주장했다. 이 구상은 동시대 동료들에게도 급진적이라는 비판을 받았으나 훗날 사회혁명당 테러 전략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 25년간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와 슐리셀부르크 요새에 수감되었고, 출소 후 항공학 개척자·과학 대중화자로 변모하여 1932년 소련 과학아카데미 명예회원이 되었다.
「탄약을 아끼지 말라」는 초안을 읽은 모솔로프가 "제정신이냐"고 묻자, 트레포프는 답했다. "제정신이네. 내일이면 발포해야 할 거야. 지금까지 나는 피를 흘리지 않았어. 이 불행을 막을 유일한 방법이 이 문구라네."
악명 높은 페테르부르크 시장의 아들로 태어나 모스크바 경찰을 거쳐 1905년 혁명기 제국 최고의 실력자로 부상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총독, 내무차관, 경찰 및 헌병대 사령관을 동시에 겸하며 독재적 권한을 행사했다. 1905년 10월 "빈 총알 쓰지 말고 실탄을 아끼지 말라"는 명령은 혁명의 상징이 되었고, 바로 그 순간 그가 밀어붙인 10월 선언은 시민적 자유를 약속했다. 선언 이후 궁정 경비사령관으로 밀려났지만 니콜라이 2세의 가장 신임받는 조언자로 남았고, 1906년 심부전으로 급사했다.
1918년 법정 최후진술에서 "하층 계급이 존재하는 한 나는 그 안에 있고, 범죄자가 존재하는 한 나는 그 일부이며, 감옥에 갇힌 영혼이 있는 한 나는 자유롭지 않다"고 선언했다.
미국 사회주의의 가장 상징적인 인물로, 산업별 노동조합주의의 선구자였다. 미국철도연합(ARU)을 이끌어 1894년 풀먼 파업을 조직하고 투옥 중 마르크스주의를 수용했으며, 미국 사회당(1901)과 IWW(1905) 창립에 참여했다. 다섯 차례 대선에 출마해 1912년 90만 표(6.0%)를 얻었고, 1차 대전 반대 연설로 수감된 1920년에도 91만 표를 득표해 미국 사회주의 선거운동의 정점을 찍었다.
그가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고 말했을 때 동료 유형수들의 반응은 이랬다: '내가 마호메트의 추종자라고 선언했더라도 그들은 이보다 더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로드니키로 출발하여 '검은 재분할'을 거친 후 1883년 스위스에서 플레하노프·자술리치 등과 함께 러시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조직 '노동 해방' 그룹을 창립했다. 조직의 실무자로서 불법 출판물의 간행과 러시아 밀반입을 총괄했으며, 1884년 독일에서 체포되어 러시아에 인도된 후 13년간 카라 강제노동형을 복역했다. 1901년 탈출 후 《이스크라》 편집진에 합류하고 RSDLP 제2차 대회에서 멘셰비키로 서서 당 분열의 한 축을 형성했으며, 말년에는 회고록 《반세기》(За полвека)로 러시아 혁명운동사의 1차 사료를 남겼다.
1917년 10월,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자 플레하노프는 말했다. "러시아의 역사는 아직 사회주의라는 밀빵을 구울 밀가루를 빻지 못했다."
나로드니키로 출발해 러시아에 마르크스주의를 이식한 사람. 레닌 세대 전체가 그의 책으로 배웠다. 그러나 1917년 37년 만에 귀국한 그는 10월 봉기를 「역사의 단계를 무시한 시기상조」라 규탄했다. 제자들이 세운 정권 아래에서 결핵으로 죽었고, 장례식은 반(半)야당 시위가 되었다.
1891년 8월, 정치 집회가 금지된 상황에서 블라고예프는 발칸 산맥 부즐루자 봉우리에 20여 명의 사회주의자들을 비밀리에 모아 불가리아 최초의 사회민주당을 창립했다.
페테르부르크 대학 유학 중이던 1883년 러시아 최초의 맑스주의 서클 '러시아 사회민주당'을 결성하고 불법신문 『라보치』를 발행했으며, 체포·추방 후 불가리아로 돌아와 1891년 부즐루자 대회에서 불가리아 사회민주당을 창립했다. 1903년 개량주의 '광역파'와 결별하고 혁명적 '협소파(테스냐키)'를 이끌었으며, 25년간 이론지 『노보 브레메』를 편집하고 『자본론』을 불가리아어로 번역했다. 발칸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에 반대하고 발칸 연방을 주장했으며, 10월 혁명 후 볼셰비키 편에 서서 1919년 당을 불가리아 공산당으로 재편하고 초대 지도자가 되었다. 레닌의 노농동맹론을 끝내 수용하지 않은 독자적 혁명가로, 불가리아 맑스주의의 이론적 토대를 세운 사상가이기도 했다.
1905년 10월, 니콜라이 2세가 군사독재를 택하려 하자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은 권총을 꺼내 들고 이렇게 외쳤다. "폐하께서 비테의 안을 받아들이지 않으시면, 제가 이 자리에서 제 머리에 총을 쏘겠습니다."
니콜라이 1세의 손자이자 니콜라이 2세의 숙부였던 그는 로마노프 왕조 말기 군부에서 가장 신망을 얻은 대공이었다. 1905년 혁명 당시 차르가 군사독재를 택하려 하자, 권총을 꺼내 들고 자살하겠다며 맞서 니콜라이 2세가 비테의 개혁안과 10월 선언을 수용하게 한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 최고사령관에 임명되어 동부전선을 지휘했으나 탄넨베르크 참패와 보급난 속에 1915년 차르에게 직책을 넘겨주고 캅카스 총독 겸 전선 사령관으로 전임되었다. 혁명 후 크림반도에 은거하다 1919년 영국 전함으로 탈출했고, 망명 중 백군 잔존 세력에 의해 잠시 황제로 추대되기도 했다.
필리프 페탱은 제1차 세계대전의 장군으로, 베르됭 전투의 승리와 병사들의 사기를 회복한 지휘로 프랑스의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1940년 독일의 침공 앞에서 전쟁 지속을 반대하고 휴전을 요청했으며, 의회가 헌법 제정 권한을 넘긴 뒤 비시 프랑스의 국가수반으로 공화국을 권위주의 체제로 대체했다. 그의 정부는 독일과 협력하고 반유대주의 법령을 시행해 점령 질서에 프랑스 국가기구를 결합시켰다. 해방 뒤 고등법원은 그를 적과의 내통과 반역으로 사형 선고했으며, 드골은 이를 종신형으로 감형했다.
1904년 9월 16일 내무부 관료들 앞에서: "행정의 성과는 공공기관과 국민에 대한 진실로 호의적이며 신뢰하는 태도에 달려 있다." 이 한 마디가 '신뢰의 시대'를 열었다.
플레베 암살 후 내무장관에 올라 '신뢰의 시대'를 선언하고 검열 완화·유배자 사면·젬스트보 대회 허용으로 자유주의 여론에 호응했으나, 국무회의에 선출직 대표를 도입하려던 개혁안은 니콜라이 2세에게 거부당했다. 1905년 1월, 가폰 신부의 평화 청원 행진에 대한 그의 무대응은 피의 일요일 학살로 귀결됐고, 사흘 뒤 사임했다. 정직하고 선의에 찼으나 정치적 결단력이 부족했던 그는 개혁과 반동 사이에 끼어 역사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인물로 남았다.
1917년 3월 2일, 알렉세예프는 전 전선 사령관들의 퇴위 권고 전보를 한데 모아 차르에게 전송하며 '폐하께서 무릎을 꿇고 간청하옵니다… 왕위에서 물러나소서'라고 썼다.
러시아 제국군의 참모 장군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 1915년부터 1917년까지 최고사령부(스타프카) 참모총장을 맡아 동부전선 전체 작전을 실질적으로 지휘했다. 갈리치아 공세를 입안하고 1915년 대후퇴를 조직적으로 이끌어 러시아군을 붕괴에서 구한 전략가였으며, 2월 혁명 당시 전선 사령관들의 퇴위 요구 전보를 니콜라이 2세에게 전달해 퇴위를 이끌어냈다. 혁명 후 남러시아에서 의용군의 모체인 '알렉세예프 조직'을 창설해 백군 운동의 군사적·정치적 기반을 놓았으나, 내전이 본격화되기 전 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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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189064 카잔 연대 장교, 러시아-튀르크 전쟁 참전, 니콜라이 참모아카데미 수석 졸업
2월 혁명 당시 시위대 발포를 명령하고 수비대 통제력을 상실한 마지막 페트로그라드 군관구 사령관
2월 26일 하발로프는 도심을 봉쇄하고 시위대를 향해 발포를 명령했으나, 다음날 볼린스키 연대가 이를 거부하며 수비대 전체가 봉기했다.
오세티야계 출신의 제정 러시아 군인으로, 미하일롭스코예 포병학교와 니콜라예프 참모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러시아-튀르크 전쟁에 참전했다. 모스크바 군사학교와 파블롭스크 군사학교 교장을 거쳐 1916년 페트로그라드 군관구 사령관에 임명되었으나, 1917년 2월 혁명 당시 니콜라이 2세의 진압 명령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수비대의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혁명 후 체포되어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에 수감되었다가 석방되었고, 내전 후 남러시아에 남아 예센투키에서 빈곤 속에 사망했다.
「공화국의 포도주 통 속에 사회혁명의 포도주를 준비하십시오!」 — 1905년 5월 1일, 마로생의 포도 재배 협동조합을 방문한 자리에서
장 조레스는 프랑스 사회주의 통합의 중심 인물로, 1902년 프랑스 사회당을 이끌고 1905년 쥘 게드의 혁명적 사회당과 통합해 노동자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SFIO)를 출범시켰다. 1904년 창간한 《뤼마니테》를 통해 개혁적 사회민주주의를 주창했고, 드레퓌스 사건에서는 반유대주의와 군국주의에 맞서 공화국의 양심을 대변했다. 마르크스주의 계급 분석에 기초한 《프랑스 혁명의 사회주의적 역사》(1900~1903)를 저술해 프랑스 혁명사학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1914년 7월, 독일 사민당과의 국제적 총파업으로 세계대전을 막으려 했으나 개전 사흘 전 민족주의자 라울 비용의 총탄에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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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타른주 공화파 의원으로 국민의회 진출
1892–1893카르모 광부 총파업 지지, 독립 사회당 의원으로 재선
1898–1902드레퓌스 사건에서 진보 진영의 양심으로 활동, 《라 프티트 레퓌블리크》 편집
1911년 우창 봉기 뒤 기용되어 청 조정과 혁명파를 동시에 압박해 청 황제의 퇴위를 얻어내고 이듬해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이 되었다. 1915년 제정을 선포했으나 국보전쟁의 반발로 이듬해 3월 퇴위하고 6월에 사망했다.
청 말 북양신군을 키운 군인·관료였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청 조정과 혁명파 사이에서 양쪽을 압박해 1912년 청 황제의 퇴위와 자신의 중화민국 임시대총통 취임을 함께 얻어냈다. 이후 국회를 무력화하고 국민당을 해산했으며, 1915년 말 스스로 황제를 칭했다가 각 성의 반발로 이듬해 제정을 취소하고 곧 병사했다. 그의 죽음 뒤 북양군은 분열해 군벌 시대가 열렸다.
1917년 2월, 참수부에 보낸 전문에서: "수도는 무정부 상태. 정부는 마비되었다. 지체는 죽음이다. 왕조의 운명이 걸린 마지막 시간이다." 니콜라이 2세는 읽고 나서 시종장에게 말했다. "이 뚱보 로댠코가 또 무슨 헛소리를 써 보냈군."
우크라이나계 귀족 출신으로, 1905년 10월당을 공동 창립하여 입헌군주제와 의회주의라는 두 축에서 차르 체제의 점진적 개혁을 추구했다. 1911년부터 1917년까지 제3·4대 국가두마 의장을 지내며 라스푸틴을 공개 비판하고 전시 정부의 무능에 맞섰다. 1917년 2월 혁명기에는 국가두마 임시위원회를 이끌며 니콜라이 2세 퇴위를 결정적으로 추동했으나, 미하일 대공이 즉위를 거부하며 입헌군주제 구상은 무너졌다. 1920년 유고슬라비아로 망명하여 빈곤 속에서 회고록 『라스푸틴의 통치』를 남겼고, 망명 군주주의자들에게 배척당한 채 숨졌다. 혁명 이전 러시아 의회 정치의 가능성과 한계를 한 몸에 체현한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