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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인물 2390명

블라디미르 빅토로비치 사하로프

Владимир Викторович Сахаров
군사·지휘 러시아 제국 러시아 제국 러시아 (모스크바 귀족) 1853–1920 ✕ 처형

브루실로프 공세의 11군 사령관이자 백군에 합류한 기병대장

1917년 3월, 니콜라이 2세에게 보낸 전보에서 국가두마를 '범죄적 무리'라 맹비난한 뒤 이렇게 끝맺었다: "폐하의 충성스러운 신하로서 흐느끼며 말씀드립니다. 가장 고통 없는 탈출구는 이미 제시된 조건들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블라디미르 빅토로비치 사하로프는 제정 러시아의 기병대장으로, 러시아-튀르크 전쟁, 의화단 진압, 러일전쟁, 제1차 세계대전에 이르는 50년 군 경력에서 제국 군사 엘리트의 전형적 궤적을 밟았다. 1915년 11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브루실로프 공세에서 보조 축을 맡아 브로디를 점령하고 수만 명의 포로를 확보했다. 1916년 가을 루마니아 전선의 두너이군 사령관으로 파견되어 페르디난드 1세의 보좌관으로 사실상 전선을 지휘했다. 2월 혁명 직후 니콜라이 2세에게 보낸 전보에서 국가두마를 맹비난하면서도 퇴위를 권고한 장면은 군주제 장교단의 분열된 충성을 보여준다. 혁명 후 해임되었고 내전기 크림에서 백군에 가담, 1920년 녹색군에게 체포·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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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9–1878육군 입대, 파블롭스크 군사학교 졸업, 참모본부 아카데미 졸업
  • 1877–1878러시아-튀르크 전쟁 참전
  • 1880–1897군사학교 교관, 참모직, 기병연대장 역임
  • 1900–1901의화단 진압 작전 중 북만주 주둔군 사령관
  • 1904–1905러일전쟁: 만주군 야전참모장, 총사령관 참모장
  • 1906–1914제7군단장, 제11군단장, 기병대장 진급 (1908)
  • 1914–1915제11군단 이끌고 갈리치아 전투 및 고를리체-타르누프 전투 참전
  • 1915–1916제11군 사령관, 브루실로프 공세에서 브로디 점령
  • 1916–1917두너이군 사령관, 루마니아 전선 총사령관 보좌관
  • 19172월 혁명 후 구치코프에 의해 해임
  • 1918–1920백군에 가담, 크림반도에서 녹색군에게 체포·처형

블라디미르 갈락티오노비치 코롤렌코

Владимир Галактионович Короленко
문학·예술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53–1921 ○ 폐렴

제정도 볼셰비키도 거부한 러시아 문학의 양심

“인간은 행복을 위해 창조되었다, 새가 비상을 위해 창조되었듯이 — 다만 행복이 언제나 인간을 위해 만들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 『역설』

우크라이나계 아버지와 폴란드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러시아 문학을 자신의 '진정한 조국'으로 삼은 작가이자 인권운동가. 나로드니키 활동으로 여러 차례 시베리아 유배를 겪었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한 『마카르의 꿈』『맹인 음악가』로 1880년대 러시아 문단의 정상에 올랐다. 제정 시절부터 무르탄 사건의 우드무르트 농민, 베일리스 사건의 유대인을 변호했고, 혁명 후에는 루나차르스키에게 보낸 편지들에서 볼셰비키의 적색테러와 사형제를 공개 비판했다. 1902년 알렉세이 고리키의 아카데미 제명에 항의해 자신도 명예 아카데미션을 반납했으며, 죽는 날까지 기근 구호와 고아원 설립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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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9–1885첫 단편 발표, 나로드니키 활동으로 반복 체포·시베리아 유배
  • 1885–1896니주니 노브고로드에서 『마카르의 꿈』『맹인 음악가』 발표, 문학적 명성
  • 1896–1904『루스코예 보가츠트보』 편집, 고리키 제명 항의로 명예 아카데미션 사퇴(1902)
  • 1904–1917『루스코예 보가츠트보』 편집장, 무르탄·베일리스 사건 변호, 사형제 반대 운동
  • 1917–1921볼셰비키 테러 비판 — 루나차르스키 서한, 기근 구호 활동 중 사망

알렉세이 알렉세예비치 브루실로프

Алексей Алексеевич Брусилов
군사·지휘 러시아 제국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53–1926 ○ 심부전

브루실로프 공세의 설계자, 혁명 후 붉은 군대에 합류한 제정 러시아 최후의 명장

12기병사단은 죽어야 한다. 단번에 죽지 말고 저녁까지 죽어라 — 1914년 8월 29일, 카레딘 사단장에게 내린 브루실로프의 명령

제1차 세계대전에서 러시아군이 거둔 최대의 승리로 평가되는 1916년 브루실로프 공세의 설계자이자 지휘관이다. 전선 전역에 동시 타격을 가하는 새로운 돌파 전술을 고안해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궤멸 직전까지 몰아넣었으며, 이 공세는 이후 소련 군사학에서 교과서적 사례로 연구되었다. 1917년 혁명기에는 러시아군 최고사령관을 지냈으나 군대 해체를 막지 못했고, 러시아 내전 후 볼셰비키의 적군에 합류해 기병 감찰관으로 복무했다. 제정 장교단 출신으로 소비에트 체제에 협력한 그의 행보는 망명 백군 진영에서 배신으로, 소비에트 측에서는 실용적 애국으로 엇갈린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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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215트베리 용기병연대 소위로 임관
  • 1877–1878러시아-튀르크 전쟁 참전, 아르다한·카르스 공략에서 두각
  • 1902–1906기병장교학교 교장, 러시아 기병 교육의 중심 인물
  • 1914–1916제8군 사령관 → 남서전선 총사령관, 브루실로프 공세 지휘
  • 1917.5–7러시아군 최고사령관, 6월 공세 실패 후 경질
  • 1920–1924붉은 군대 기병 감찰관, 혁명군사평의회 특임

니콜라이 블라디미로비치 루즈스키

Николай Владимирович Рузский
군사·지휘 러시아 제국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54–1918 ✕ 살해

프스코프에서 차르의 퇴위를 강요한 북부전선 사령관

니콜라이 2세는 유형지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나는 모든 적과 박해자를 용서할 힘을 신에게서 받았지만, 루즈스키 부관장군만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갈리치아 정복자라는 명성을 얻은 제정 러시아의 보병대장으로, 1차 세계대전에서 제3군과 북서전선·북부전선을 지휘했다. 1917년 2월 혁명 당시 프스코프에 주둔한 북부전선 사령관으로서 니콜라이 2세의 열차를 맞았고, 알렉세예프 참모총장과 전선 사령관들의 만장일치 전보를 전달하며 차르에게 책임내각 도입과 퇴위를 압박했다. 한 시간 반에 걸친 논쟁 끝에 니콜라이 2세의 뜻을 꺾은 결정적 순간은, 군부가 더 이상 왕조를 지키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전쟁 말기 붉은 군대 입대를 '러시아인끼리의 전쟁'이라 거부하고 광천수 휴양지에 머물다, 1918년 백인민 체카에 의해 인질로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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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7–1878러시아-튀르크 전쟁 참전, 고르니 두브냐크 요새 공격 중 부상
  • 1881니콜라예프 참모대학 졸업, 이후 키예프·빌노 군관구 참모 역임
  • 1904–1905제2만주군 야전참모장으로 러일전쟁 참전
  • 1909보병대장 진급, 군사평의회 위원, 1912년 야전규정 공동 저자
  • 1914.07–09제3군 사령관, 갈리치아 전투에서 리보프 점령
  • 1914.09–1915.03북서전선 총사령관
  • 1915.08–1917.04북부전선 총사령관, 1917년 3월 프스코프에서 니콜라이 2세의 퇴위를 압박
  • 1917.04임시정부와의 군기 유지 갈등으로 사임, 캅카스 광천으로 이주

표도르 이즈마일로비치 로디체프

Фёдор Измайлович Родичев
정치·당 지도 입헌민주당 러시아 제국 러시아인 1854–1933 ○ 사망

스톨리핀의 넥타이」라는 말로 교수대를 고발한 카데트의 두마 연사

푸리슈케비치 씨가 무라비요프의 목걸이라 부르는 그것을, 그의 후손들은 아마도 스톨리핀의 넥타이라 부르게 될 것입니다…

트베리 지방의 진보적 젬스트보 활동가로 출발해 입헌민주당(카데트) 창당에 참여했고 4회 연속 국가두마 의원을 지낸 러시아 자유주의 정치인이다. 두마 최고의 연설가 중 하나로 불렸으며, 1907년 11월 17일 연단에서 스톨리핀의 야전군법회의를 비판하며 「스톨리핀의 넥타이」라는 말을 남겨 격분한 총리의 결투 신청을 받고 사과해야 했다. 1917년 2월 혁명 후 임시정부의 핀란드 담당 위원을 지냈고 10월 혁명에 반대하여 백군 진영에 가담했으며, 패배 후 망명하여 스위스 로잔에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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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6세르비아-튀르크 전쟁 의용군 참전
  • 1877–1895트베리 현 젬스트보 활동가, 베세곤스크 현 귀족 대표(1879–1891)
  • 1898–1904페테르부르크 변호사, 학생 시위 항의 서명으로 추방
  • 1904–1905젬스트보 대회·연회 캠페인 공동 조직, 입헌민주당(카데트) 창당 참여
  • 1906–1917제1~4차 국가두마 카데트 의원, 중앙위원
  • 1917.03–05임시정부 핀란드 담당 위원
  • 1918–1920백군 진영 참여, 세르비아·폴란드 파견 대표
  • 1920–1933망명: 파리, 이후 로잔에서 여생

카를 요한 카우츠키

Karl Johann Kautsky
학술·연구 오스트리아 체코 1854–1938 ○ 자연사

제2인터내셔널의 정통 마르크스주의 수석 이론가,『신시대』창간 편집자, 마르크스『자본론』제4권 편집자

「우리에게 민주주의 없는 사회주의는 생각할 수 없다. 물론 사회적 생산은 비민주적 체제에서도 가능하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해방의 수단으로서의 사회주의는 민주주의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 『프롤레타리아 독재』(1918)

제2인터내셔널의 대표적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에르푸르트 강령을 집필하고 베른슈타인 수정주의를 논박했으며, 혁명 후 볼셰비키 독재 비판으로 사회민주주의와 레닌주의의 분기점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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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5오스트리아 사회민주노동자당 입당, 초기 저작 『다윈과 사회주의』 발표
  • 1880–1883취리히 이주, 번스타인과 교류; 런던에서 마르크스·엥겔스와 개인적 친교
  • 1883–1917『신시대(Die Neue Zeit)』 창간 및 35년간 편집장 — 제2인터내셔널의 대표적 마르크스주의 이론지
  • 1885–1890런던에서 엥겔스와 긴밀히 협력, 마르크스 유고 『잉여가치학설사』 편집 착수
  • 1891–1892에르푸르트 강령 이론부 집필, 주해서 『계급투쟁』 출간 — 독일 사민당의 마르크스주의 정립
  • 1899–1909베른슈타인 수정주의 논쟁에서 정통 마르크스주의 옹호; 『권력에의 길』 출간
  • 1917전쟁 반대 입장으로 사민당 탈당, 독립사회민주당(USPD) 공동 창립
  • 1918–1922『프롤레타리아 독재』 출간으로 볼셰비키 비판, 레닌의 반박서 촉발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모로조프

Никола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Морозов
사회운동·조직 인민의 의지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1854–1946 ○ 자연사

25년 감옥에서 과학자가 된 나로드나야 볼랴의 테러 이론가

1930년대 중반, 요양소에서 "당원 계십니까?"라는 질문에 노인이 답했다. "나는 당원이오. '나로드나야 볼랴' 당원이오."

나로드나야 볼랴 집행위원이자 혁명적 테러 이론가로, 1880년 『테러 투쟁』을 집필하여 소규모 독립 테러 조직에 의한 전제정 타도를 주장했다. 이 구상은 동시대 동료들에게도 급진적이라는 비판을 받았으나 훗날 사회혁명당 테러 전략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 25년간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와 슐리셀부르크 요새에 수감되었고, 출소 후 항공학 개척자·과학 대중화자로 변모하여 1932년 소련 과학아카데미 명예회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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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4차이콥스키 서클 가입, '민중 속으로' 운동 참여
  • 1878『지상과 자유』 공동 편집자
  • 1879나로드나야 볼랴 집행위원회 위원
  • 1880제네바에서 『테러 투쟁』 출간, 마르크스와 면담
  • 1882–1905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슐리셀부르크 요새 수감, 수감 중 자연과학 연구
  • 1907–1917레스가프트 연구소 교수, 러시아 물리화학회·천문학회 정회원
  • 1918–1946레스가프트 자연과학 연구소 소장
  • 1932소련 과학아카데미 명예회원

드미트리 표도로비치 트레포프

Дмитрий Фёдорович Трепов
보안·정보·치안 러시아 제국 러시아 제국 러시아인 1855–1906 ○ 심부전

진압 명령과 개혁 약속을 한 손에 쥔 1905년의 얼굴

「탄약을 아끼지 말라」는 초안을 읽은 모솔로프가 "제정신이냐"고 묻자, 트레포프는 답했다. "제정신이네. 내일이면 발포해야 할 거야. 지금까지 나는 피를 흘리지 않았어. 이 불행을 막을 유일한 방법이 이 문구라네."

악명 높은 페테르부르크 시장의 아들로 태어나 모스크바 경찰을 거쳐 1905년 혁명기 제국 최고의 실력자로 부상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총독, 내무차관, 경찰 및 헌병대 사령관을 동시에 겸하며 독재적 권한을 행사했다. 1905년 10월 "빈 총알 쓰지 말고 실탄을 아끼지 말라"는 명령은 혁명의 상징이 되었고, 바로 그 순간 그가 밀어붙인 10월 선언은 시민적 자유를 약속했다. 선언 이후 궁정 경비사령관으로 밀려났지만 니콜라이 2세의 가장 신임받는 조언자로 남았고, 1906년 심부전으로 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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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4파제스키 군단 졸업, 근위기마연대 배속
  • 1877–78러시아-튀르크 전쟁 참전, 텔리시 전투에서 부상
  • 1896–1905모스크바 경찰총감
  • 1900소장 진급
  • 1905.1–10상트페테르부르크 총독 (비상대권)
  • 1905.5–10내무차관, 경찰·헌병대 사령관
  • 1905.10–1906.9황실 궁정 경비사령관

유진 V. 뎁스

Eugene V. Debs
사회운동·조직 소속 미확정 미국 미국 1855–1926 ○ 심부전

5선 미국 사회당 대통령 후보이자 철도노동자 산업별조합의 선구자

1918년 법정 최후진술에서 "하층 계급이 존재하는 한 나는 그 안에 있고, 범죄자가 존재하는 한 나는 그 일부이며, 감옥에 갇힌 영혼이 있는 한 나는 자유롭지 않다"고 선언했다.

미국 사회주의의 가장 상징적인 인물로, 산업별 노동조합주의의 선구자였다. 미국철도연합(ARU)을 이끌어 1894년 풀먼 파업을 조직하고 투옥 중 마르크스주의를 수용했으며, 미국 사회당(1901)과 IWW(1905) 창립에 참여했다. 다섯 차례 대선에 출마해 1912년 90만 표(6.0%)를 얻었고, 1차 대전 반대 연설로 수감된 1920년에도 91만 표를 득표해 미국 사회주의 선거운동의 정점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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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5기관화부형제단(BLF) 가입
  • 1880–1893BLF 사무총장 겸 기관지 편집장
  • 1885인디애나 주의회 의원 (민주당)
  • 1893–1897미국철도연합(ARU) 창립·위원장
  • 1901미국 사회당 공동 창립
  • 1905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 창립 멤버
  • 1900–1920사회당 대통령 후보 (5회 출마)
  • 1919–1921애틀랜타 연방교도소 수감

이반 블라디미로비치 미추린

Иван Владимирович Мичурин
학술·연구 소련 러시아 1855–1935 ○ 자연사

자신의 이름이 라이선코에게 도용된 독학 육종학자

“우리는 자연의 은혜를 기다릴 수 없다. 자연으로부터 그것을 빼앗는 것이 우리의 과업이다.” — 미추린이 묘목장에서 수십 년간 반복한 이 유명한 문장은 후일 소비에트 체제의 자연 정복 수사로 왜곡되었다.

300종 넘는 과일 품종을 육종한 러시아 독학 원예학자. 교잡육종에 평생을 바쳤고 레닌의 지원으로 묘목장이 국립 연구소로 성장했다. 사후 리센코가 그의 이름을 도용해 '미추린 생물학'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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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55랴잔현 베르시나 영지에서 소귀족 가문의 7번째 자녀로 출생
  • 1872프론스크 군립학교 졸업. 랴잔 김나지움에서 '상관에 대한 무례'로 퇴학당함
  • 1875코즐로프에서 첫 임차지(약 500㎡)에 과일·장과류 600종 이상 수집, 교잡 실험 시작
  • 1888투르마소보 인근에 약 13ha의 토지 구입, 러시아 최초의 선종 묘목장 중 하나 설립
  • 1906첫 학술 논문 발표. 1912년 성 안나 훈장 3등급 수훈
  • 1918인민농업위원회, 미추린 묘목장을 국유화하고 그를 관리자로 임명. 레닌이 개인적 관심 표명
  • 1931레닌 훈장 및 노동적기훈장 수훈. 1934년 생물학 박사 학위, RSFSR 과학기술 공로 활동가 칭호
  • 1935소련 과학 아카데미 명예 회원, 전연방농업과학아카데미 정회원. 6월 7일 사망

레프 그리고리예비치 데이치

Лев Григорьевич Дейч
학술·연구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1855–1941 ○ 사망

'노동 해방' 그룹을 조직하고 멘셰비즘의 기원에 선 마르크스주의 혁명가

그가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고 말했을 때 동료 유형수들의 반응은 이랬다: '내가 마호메트의 추종자라고 선언했더라도 그들은 이보다 더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로드니키로 출발하여 '검은 재분할'을 거친 후 1883년 스위스에서 플레하노프·자술리치 등과 함께 러시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조직 '노동 해방' 그룹을 창립했다. 조직의 실무자로서 불법 출판물의 간행과 러시아 밀반입을 총괄했으며, 1884년 독일에서 체포되어 러시아에 인도된 후 13년간 카라 강제노동형을 복역했다. 1901년 탈출 후 《이스크라》 편집진에 합류하고 RSDLP 제2차 대회에서 멘셰비키로 서서 당 분열의 한 축을 형성했으며, 말년에는 회고록 《반세기》(За полвека)로 러시아 혁명운동사의 1차 사료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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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4키예프 나로드니키 서클 가입
  • 1877치기린 음모 조직
  • 1879'검은 재분할' 당원
  • 1883제네바에서 '노동 해방' 그룹 공동 창립
  • 1901–1903《이스크라》 편집진
  • 1903RSDLP 제2차 대회 멘셰비키 대표
  • 1911–1916뉴욕에서 《스보보드노예 슬로보》 발행
  • 1917플레하노프와 《예딘스트보》 편집

게오르기 발렌티노비치 플레하노프

Георгий Валентинович Плеханов
학술·연구 러시아 러시아 1856–1918 ○ 자연사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아버지: 제자들의 혁명에 반대하다

1917년 10월,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자 플레하노프는 말했다. "러시아의 역사는 아직 사회주의라는 밀빵을 구울 밀가루를 빻지 못했다."

나로드니키로 출발해 러시아에 마르크스주의를 이식한 사람. 레닌 세대 전체가 그의 책으로 배웠다. 그러나 1917년 37년 만에 귀국한 그는 10월 봉기를 「역사의 단계를 무시한 시기상조」라 규탄했다. 제자들이 세운 정권 아래에서 결핵으로 죽었고, 장례식은 반(半)야당 시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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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6–80「토지와 자유」 활동가, 망명
  • 1883제네바에서 「노동해방단」 창립: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시작
  • 1889–1914제2인터내셔널의 러시아 대표 이론가
  • 1903당 분열에서 점차 멘셰비키 쪽으로
  • 191737년 만의 귀국, 10월 봉기 반대

디미터르 니콜로프 블라고예프

Димитр Николов Благоев
정치·당 지도 소속 미확정 불가리아 불가리아 1856–1924 ○ 자연사

러시아 최초의 맑스주의 서클을 조직한 불가리아 사회주의의 창시자

1891년 8월, 정치 집회가 금지된 상황에서 블라고예프는 발칸 산맥 부즐루자 봉우리에 20여 명의 사회주의자들을 비밀리에 모아 불가리아 최초의 사회민주당을 창립했다.

페테르부르크 대학 유학 중이던 1883년 러시아 최초의 맑스주의 서클 '러시아 사회민주당'을 결성하고 불법신문 『라보치』를 발행했으며, 체포·추방 후 불가리아로 돌아와 1891년 부즐루자 대회에서 불가리아 사회민주당을 창립했다. 1903년 개량주의 '광역파'와 결별하고 혁명적 '협소파(테스냐키)'를 이끌었으며, 25년간 이론지 『노보 브레메』를 편집하고 『자본론』을 불가리아어로 번역했다. 발칸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에 반대하고 발칸 연방을 주장했으며, 10월 혁명 후 볼셰비키 편에 서서 1919년 당을 불가리아 공산당으로 재편하고 초대 지도자가 되었다. 레닌의 노농동맹론을 끝내 수용하지 않은 독자적 혁명가로, 불가리아 맑스주의의 이론적 토대를 세운 사상가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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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3–1885러시아 최초의 맑스주의 서클 결성, 『라보치』 발행
  • 1891부즐루자 대회에서 불가리아 사회민주당 창립
  • 1897–1923이론지 『노보 브레메』 편집장
  • 1903–1919협소파(테스냐키) 지도자
  • 1905『자본론』 제1권 불가리아어 번역
  • 1919–1923불가리아 공산당 초대 중앙위원회 의장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Романов
군사·지휘 러시아 제국 러시아 러시아 1856–1929 ○ 병사

차르 앞에서 권총을 꺼내 입헌군주제를 강요한 대공

1905년 10월, 니콜라이 2세가 군사독재를 택하려 하자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은 권총을 꺼내 들고 이렇게 외쳤다. "폐하께서 비테의 안을 받아들이지 않으시면, 제가 이 자리에서 제 머리에 총을 쏘겠습니다."

니콜라이 1세의 손자이자 니콜라이 2세의 숙부였던 그는 로마노프 왕조 말기 군부에서 가장 신망을 얻은 대공이었다. 1905년 혁명 당시 차르가 군사독재를 택하려 하자, 권총을 꺼내 들고 자살하겠다며 맞서 니콜라이 2세가 비테의 개혁안과 10월 선언을 수용하게 한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 최고사령관에 임명되어 동부전선을 지휘했으나 탄넨베르크 참패와 보급난 속에 1915년 차르에게 직책을 넘겨주고 캅카스 총독 겸 전선 사령관으로 전임되었다. 혁명 후 크림반도에 은거하다 1919년 영국 전함으로 탈출했고, 망명 중 백군 잔존 세력에 의해 잠시 황제로 추대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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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7–78러시아-튀르크 전쟁 참전, 성 게오르기 훈장 수훈
  • 1884근위 후사르 연대장
  • 1895–1905기병 총감
  • 1905군사독재 거부, 니콜라이 2세에게 10월 선언 수용 촉구
  • 1905–14페테르부르크 군관구 사령관 겸 국방평의회 의장
  • 1914–15제1차 세계대전 최고사령관
  • 1915–17캅카스 총독 겸 캅카스 전선 사령관
  • 1922백군 잔존 세력에 의해 전러시아 황제로 추대

필리프 페탱

Philippe Pétain
군사·지휘 프랑스 국가기관 프랑스 프랑스 1856–1951 ○ 반역죄 유죄 · 종신형

베르됭의 영웅에서 비시의 협력자로 전락한 원수

1940년 6월 17일, 페탱은 프랑스에 전투를 중지하겠다고 방송했다.

필리프 페탱은 제1차 세계대전의 장군으로, 베르됭 전투의 승리와 병사들의 사기를 회복한 지휘로 프랑스의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1940년 독일의 침공 앞에서 전쟁 지속을 반대하고 휴전을 요청했으며, 의회가 헌법 제정 권한을 넘긴 뒤 비시 프랑스의 국가수반으로 공화국을 권위주의 체제로 대체했다. 그의 정부는 독일과 협력하고 반유대주의 법령을 시행해 점령 질서에 프랑스 국가기구를 결합시켰다. 해방 뒤 고등법원은 그를 적과의 내통과 반역으로 사형 선고했으며, 드골은 이를 종신형으로 감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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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6생시르 육군사관학교 입학
  • 1916베르됭 전투 프랑스군 지휘
  • 1917–1918프랑스군 총사령관
  • 1934전쟁장관
  • 1939–1940주스페인 프랑스 대사
  • 1940.06프랑스 각료회의 의장
  • 1940–1944비시 프랑스 국가수반
  • 1945–1951반역죄 유죄 판결과 종신 구금

표트르 드미트리예비치 스뱌토폴크-미르스키

Пётр Дмитриевич Святополк-Мирский
정부·행정 러시아 제국 러시아 러시아 1857–1914 ○ 자연사

"신뢰의 시대"를 약속했으나 피의 일요일로 끝난 비운의 내무장관

1904년 9월 16일 내무부 관료들 앞에서: "행정의 성과는 공공기관과 국민에 대한 진실로 호의적이며 신뢰하는 태도에 달려 있다." 이 한 마디가 '신뢰의 시대'를 열었다.

플레베 암살 후 내무장관에 올라 '신뢰의 시대'를 선언하고 검열 완화·유배자 사면·젬스트보 대회 허용으로 자유주의 여론에 호응했으나, 국무회의에 선출직 대표를 도입하려던 개혁안은 니콜라이 2세에게 거부당했다. 1905년 1월, 가폰 신부의 평화 청원 행진에 대한 그의 무대응은 피의 일요일 학살로 귀결됐고, 사흘 뒤 사임했다. 정직하고 선의에 찼으나 정치적 결단력이 부족했던 그는 개혁과 반동 사이에 끼어 역사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인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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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5–1897펜자 주지사
  • 1897–1900예카테리노슬라프 주지사
  • 1900–1902내무차관 겸 헌병단장
  • 1902–1904빌나·코브노·그로드노 총독
  • 1904.8–1905.1내무장관, '신뢰의 시대'
  • 1905.1피의 일요일 후 사임, 정계 은퇴

미하일 바실리예비치 알렉세예프

Михаил Васильевич Алексеев
군사·지휘 러시아 제국 러시아 제국 러시아인 1857–1918 ○ 심부전

동부전선을 지휘하고 백군 의용군의 기초를 놓은 차르의 마지막 참모총장

1917년 3월 2일, 알렉세예프는 전 전선 사령관들의 퇴위 권고 전보를 한데 모아 차르에게 전송하며 '폐하께서 무릎을 꿇고 간청하옵니다… 왕위에서 물러나소서'라고 썼다.

러시아 제국군의 참모 장군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 1915년부터 1917년까지 최고사령부(스타프카) 참모총장을 맡아 동부전선 전체 작전을 실질적으로 지휘했다. 갈리치아 공세를 입안하고 1915년 대후퇴를 조직적으로 이끌어 러시아군을 붕괴에서 구한 전략가였으며, 2월 혁명 당시 전선 사령관들의 퇴위 요구 전보를 니콜라이 2세에게 전달해 퇴위를 이끌어냈다. 혁명 후 남러시아에서 의용군의 모체인 '알렉세예프 조직'을 창설해 백군 운동의 군사적·정치적 기반을 놓았으나, 내전이 본격화되기 전 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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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6–189064 카잔 연대 장교, 러시아-튀르크 전쟁 참전, 니콜라이 참모아카데미 수석 졸업
  • 1890–1904참모본부 근무, 니콜라이 아카데미 교수
  • 1904–1905제3 만주군 병참총감 (러일전쟁)
  • 1908–1912키예프 군관구 참모장
  • 1912–1914제13 군단장
  • 1914–1915남서전선 참모장 (갈리치아 공세 입안)
  • 1915북서전선 총사령관, 대후퇴 조직적 지휘
  • 1915–1917최고사령부(스타프카) 참모총장 — 전 러시아군 실질적 총지휘
  • 1917 3–5월임시정부 최고사령관
  • 1917–1918의용군(알렉세예프 조직) 창설자·최고지도자

블라디미르 미하일로비치 베흐테레프

Владимир Михайлович Бехтерев
학술·연구 소련 러시아 1857–1927 ○ 자연사

스탈린을 진단한 뇌과학의 선구자

1927년 12월 23일, 스탈린을 진찰하고 돌아온 베흐테레프가 동료들에게 말했다. '방금 한쪽 팔이 마비된 편집증 환자를 진찰했다.' 다음날 그는 사망했다.

반사학(객관심리학) 창시자이자 강직성 척추염을 발견한 신경학자. 1907년 세계 최초의 종합적 인간과학 연구기관인 정신신경학연구소를 설립했으며, 1927년 스탈린을 편집증으로 진단한 직후 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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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8상트페테르부르크 군사의과대학 졸업, 정신과 클리닉 근무
  • 1881–1884의학박사 학위 취득; 라이프치히·파리·베를린 연수 (분트, 샤르코, 플렉시히)
  • 1885–1893카잔대학 정신과 교수, 정신생리학 실험실 설립
  • 1892강직성 척추염(베흐테레프병) 최초 기술
  • 1893–1913군사의과대학 신경·정신질환 학과장, 『신경학회보』 창간
  • 1907세계 최초의 종합적 인간과학 센터, 정신신경학연구소 설립
  • 1907–1910『객관심리학』 3권 출간, 반사학(레플렉솔로지) 창시
  • 1923레닌 주치의로 두 차례 신경학적 진찰
  • 1927러시아 공화국 공훈과학자 칭호; 스탈린 진단 직후 급사

클라라 체트킨

Clara Zetkin
정치·당 지도 독일 공산당 독일 독일 1857–1933 ○ 자연사

국제 여성의 날의 창시자, 여성해방을 계급투쟁의 심장에 놓다

히틀러 집권 반년 전, 최고령 의원으로서 제국의회 개원 연설에서 반나치 통일전선을 호소하다 (1932)

마르크스주의 여성해방론의 창시자. 여성해방을 계급투쟁의 일부로 보고 1910년 국제 여성의 날을 제안했다. 반전 투쟁과 KPD 창립을 거쳐 75세에 제국의회에서 반나치 통일전선을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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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8–1917SPD 여성운동 지도, 『평등』 편집(1892–1917)
  • 1910코펜하겐 대회에서 국제 여성의 날 제안
  • 1915–1919반전 운동 — 스파르타쿠스단·KPD 창립 참여
  • 1920–1933제국의회 의원, 코민테른 집행위원
  • 1925회고문 《여성문제에 관한 레닌》 발표
  • 1932최고령 의원으로 개원연설 — 반나치 통일전선 호소
  • 1933소련 망명, 6월 사망 — 크렘린 벽 안장

콘스탄틴 예두아르도비치 치올콥스키

Константин Эдуардович Циолковский
학술·연구 소련 러시아 1857–1935 ○ 위암

귀먹은 시골 교사에서 우주비행학의 아버지로. 로켓 방정식 하나로 우주 시대를 연 독학자

「인류는 영원히 지구의 요람에 머물지 않을 것이다. 인류는 대기와 태양계의 한계를 넘어 정복할 것이다.」

로켓 추진의 기본 방정식을 정립한 우주비행학의 선구자. 1903년 다단계 로켓·궤도 정거장·우주 식민지 개념을 제시했고, 그의 이론은 코롤료프와 소비에트 우주 계획의 직접적 토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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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9민중학교 교사 자격 취득
  • 1880–1892보롭스크 시립학교 수학·기하 교사
  • 1892–1921칼루가 현립학교·여자교구학교 수학·물리 교사
  • 1903「반응 장치에 의한 세계 공간 탐구」 발표 — 로켓 방정식 기초 확립
  • 1920러시아 세계학 애호가 협회 회원, 소비에트 정부 개인연금 수여
  • 1924–1935우주비행학 이론 집중 연구 — 다단계 로켓·궤도정거장·우주 식민지 구상
  • 1932노동적기훈장 수훈, 75세 전국 경축

세르게이 세묘노비치 하발로프

Сергей Семёнович Хабалов
군사·지휘 러시아 제국 러시아 제국 러시아 (오세티야계) 1858–1929 ○ 사망

2월 혁명 당시 시위대 발포를 명령하고 수비대 통제력을 상실한 마지막 페트로그라드 군관구 사령관

2월 26일 하발로프는 도심을 봉쇄하고 시위대를 향해 발포를 명령했으나, 다음날 볼린스키 연대가 이를 거부하며 수비대 전체가 봉기했다.

오세티야계 출신의 제정 러시아 군인으로, 미하일롭스코예 포병학교와 니콜라예프 참모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러시아-튀르크 전쟁에 참전했다. 모스크바 군사학교와 파블롭스크 군사학교 교장을 거쳐 1916년 페트로그라드 군관구 사령관에 임명되었으나, 1917년 2월 혁명 당시 니콜라이 2세의 진압 명령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수비대의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혁명 후 체포되어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에 수감되었다가 석방되었고, 내전 후 남러시아에 남아 예센투키에서 빈곤 속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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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8미하일롭스코예 포병학교 졸업, 러시아-튀르크 전쟁 참전
  • 1886니콜라예프 참모아카데미 졸업, 근위대 참모 근무
  • 1903–1905모스크바 군사학교 교장
  • 1905–1914파블롭스크 군사학교 교장
  • 1914–1916우랄주 군사령관 겸 우랄 코사크군 아타만
  • 1916–1917.02페트로그라드 군관구 사령관
  • 1917.02시위 진압 명령 수행 중 수비대 통제력 상실, 체포
  • 1917.10–1929석방 후 남러시아에서 생활, 예센투키에서 사망

장 조레스

Jean Jaurès
정치·당 지도 소속 미확정 프랑스 프랑스 1859–1914 ✕ 암살

노동자 국제 연대와 반전 평화를 위해 싸우다 암살당한 프랑스 사회당 지도자

「공화국의 포도주 통 속에 사회혁명의 포도주를 준비하십시오!」 — 1905년 5월 1일, 마로생의 포도 재배 협동조합을 방문한 자리에서

장 조레스는 프랑스 사회주의 통합의 중심 인물로, 1902년 프랑스 사회당을 이끌고 1905년 쥘 게드의 혁명적 사회당과 통합해 노동자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SFIO)를 출범시켰다. 1904년 창간한 《뤼마니테》를 통해 개혁적 사회민주주의를 주창했고, 드레퓌스 사건에서는 반유대주의와 군국주의에 맞서 공화국의 양심을 대변했다. 마르크스주의 계급 분석에 기초한 《프랑스 혁명의 사회주의적 역사》(1900~1903)를 저술해 프랑스 혁명사학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1914년 7월, 독일 사민당과의 국제적 총파업으로 세계대전을 막으려 했으나 개전 사흘 전 민족주의자 라울 비용의 총탄에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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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5타른주 공화파 의원으로 국민의회 진출
  • 1892–1893카르모 광부 총파업 지지, 독립 사회당 의원으로 재선
  • 1898–1902드레퓌스 사건에서 진보 진영의 양심으로 활동, 《라 프티트 레퓌블리크》 편집
  • 1902프랑스 사회당 창당 및 지도
  • 1904《뤼마니테》 창간
  • 1905SFIO 출범 — 프랑스 사회주의 정당 통합 주도
  • 1900–1903《프랑스 혁명의 사회주의적 역사》 저술
  • 1914반전 총파업 운동 전개 중 암살당함

위안스카이

袁世凯
군사·지휘 북양정부·군벌 중국 중국 1859–1916 ○ 병사

신해혁명의 성과를 가로채 황제가 되려 한 북양군벌의 총수

1911년 우창 봉기 뒤 기용되어 청 조정과 혁명파를 동시에 압박해 청 황제의 퇴위를 얻어내고 이듬해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이 되었다. 1915년 제정을 선포했으나 국보전쟁의 반발로 이듬해 3월 퇴위하고 6월에 사망했다.

청 말 북양신군을 키운 군인·관료였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청 조정과 혁명파 사이에서 양쪽을 압박해 1912년 청 황제의 퇴위와 자신의 중화민국 임시대총통 취임을 함께 얻어냈다. 이후 국회를 무력화하고 국민당을 해산했으며, 1915년 말 스스로 황제를 칭했다가 각 성의 반발로 이듬해 제정을 취소하고 곧 병사했다. 그의 죽음 뒤 북양군은 분열해 군벌 시대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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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1907직례총독 겸 북양대신
  • 1912–1916중화민국 대총통
  • 1915.12–1916.03「중화제국」 황제 자칭

미하일 블라디미로비치 로댠코

Михаил Владимирович Родзянко
정부·행정 러시아 제국 러시아 우크라이나 1859–1924 ○ 자연사

차르에게 '뚱보'라 불린 의회주의자, 제국의 마지막 두마 의장

1917년 2월, 참수부에 보낸 전문에서: "수도는 무정부 상태. 정부는 마비되었다. 지체는 죽음이다. 왕조의 운명이 걸린 마지막 시간이다." 니콜라이 2세는 읽고 나서 시종장에게 말했다. "이 뚱보 로댠코가 또 무슨 헛소리를 써 보냈군."

우크라이나계 귀족 출신으로, 1905년 10월당을 공동 창립하여 입헌군주제와 의회주의라는 두 축에서 차르 체제의 점진적 개혁을 추구했다. 1911년부터 1917년까지 제3·4대 국가두마 의장을 지내며 라스푸틴을 공개 비판하고 전시 정부의 무능에 맞섰다. 1917년 2월 혁명기에는 국가두마 임시위원회를 이끌며 니콜라이 2세 퇴위를 결정적으로 추동했으나, 미하일 대공이 즉위를 거부하며 입헌군주제 구상은 무너졌다. 1920년 유고슬라비아로 망명하여 빈곤 속에서 회고록 『라스푸틴의 통치』를 남겼고, 망명 군주주의자들에게 배척당한 채 숨졌다. 혁명 이전 러시아 의회 정치의 가능성과 한계를 한 몸에 체현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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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0월당(옥탸브리스트) 공동 창립, 입헌군주제 노선
  • 1907–1911제3대 국가두마 의원, 부의장(1909~)
  • 1911–1912제3대 국가두마 의장(구치코프 후임)
  • 1912–1917제4대 국가두마 의장, 진보블록 참여
  • 1917.2–3국가두마 임시위원회 의장, 니콜라이 2세 퇴위 협상 주도
  • 1917 여름구치코프와 자유공화당 창당
  • 1917.10–1920백군 지역(돈·크림)에서 반볼셰비키 활동
  • 1920–1924유고슬라비아 망명, 『라스푸틴의 통치: 제국의 붕괴』 집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