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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인물 2390명

스타니슬라프 세르게예비치 샤탈린

Станислав Сергеевич Шаталин
경제·재정·계획 소속 미확정 소련 러시아 1934–1997 ○ 자연사

500일 계획의 설계자, 소련 계획경제를 시장으로 전환하려 한 급진 개혁파 경제학자

지금 문제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어떤 -이즘을 구하는 게 아니라 우리 나라와 국민을 구하는 것입니다 — 1990년 당 중앙위원회 플레넘에서

레닌그라드 근교 출생. 칸토로비치의 제자로 투입산출모형과 최적계획 이론을 발전시켰고, 1987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1989년 경제분과 아카데미크-서기가 되었다. 1990년 고르바초프옐친의 합의로 작업반을 이끌어 500일 내 시장경제 전환을 구상한 '500일 계획'을 작성, 아발킨의 점진적 노선과 정면 대립했다. 연방 차원에서 채택되지 못했으나 러시아 공화국에서 부분 시행되었고, 제자 가이다르의 1992년 충격요법의 지적 토대가 되었다. 해체 후 '개혁' 재단을 이끌고 통합민주당 창당에 참여했으며, 스파르타크 모스크바 명예회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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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1959재무부 산하 재정연구소 경제연구원
  • 1959–1965고스플란 산하 경제연구소(NIEI) 연구원
  • 1965–1976중앙경제수학연구소(TsEMI) 부소장·부문장
  • 1970–1983모스크바국립대 경제학부 수리경제분석학 주임교수
  • 1974 / 1987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이어 정회원
  • 1976–1986전연방체계연구소 수석연구원, MIPT 일반경제학 강의
  • 1986–1989과학아카데미 과학기술진보경제예측연구소 연구원
  • 1989.12경제개혁 국가위원회 위원
  • 1989–1996과학아카데미·러시아과학아카데미 경제분과 아카데미크-서기
  • 1990500일 계획 작업반장, 소련 대통령자문위원
  • 1990–1991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91통합민주당 창당 조직위원장, '개혁' 국제재단 이사장
  • 1991.6러시아 대통령선거 옐친 신임인

야체크 얀 쿠론

Jacek Jan Kuroń

노동자 자주관리와 시민 연대를 잇은 반체제 사회주의자

1980년 파업이 시작되자 그는 노동자 조직과 자유로운 정보의 족쇄가 마침내 끊겼다고 선언했다.

야체크 쿠론은 폴란드의 사회주의적 이상을 당 관료제의 지배와 분리해 다시 사유한 역사가이자 조직가였다. 카롤 모드젤레프스키와 함께 쓴 「당에 보내는 공개서한」은 관료제가 노동계급을 지배한다고 비판하면서 노동자 평의회와 민주적 다원주의를 제안했다. 그는 1976년 노동자 방어위원회(KOR)를 공동 창립해 노동자와 지식인을 연결했고, 1980년에는 연대의 핵심 자문역으로 노동자 자주관리 노선을 밀었다. 1981년 12월 13일 계엄령 첫날 밤 구금된 뒤에도 지하 연대를 지지했으며, 1989년 이후에는 노동·사회정책 장관으로 전환기의 사회적 권리를 다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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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1961적색 스카우트 운동 공동조직자·월터 대원대 지휘관
  • 1965–1967「당에 보내는 공개서한」 공동 저자, 정치범
  • 1968–19713월 학생 시위 조직자, 정치범
  • 1976–1977노동자 방어위원회(KOR) 공동 창립자
  • 1980–1981독립자치노조 연대 전국위원회 자문역
  • 1981–1984계엄령 수감자, KOR 재판 피고인
  • 1989–1991노동·사회정책 장관
  • 1992–1993노동·사회정책 장관
  • 1989–2001폴란드 하원의원

알로이스 모크

Alois Mock

철의 장막을 가른 오스트리아 유럽주의자

1989년 6월 27일, 모크와 호른 줄러가 쇼프론 인근 철조망을 절단하며 국경 개방을 세계에 알렸다.

알로이스 모크는 오스트리아 국민당의 정치가로, 유럽 통합을 오스트리아 외교의 중심 과제로 삼았다. 외무장관으로서 헝가리의 국경 개방과 오스트리아의 유럽공동체 가입을 추진하며 냉전 종식기의 중부 유럽 재편에 관여했다. 1989년 6월 27일 호른 줄러와 국경 철조망을 상징적으로 절단한 장면은 동독 주민들의 탈출과 동구권 붕괴로 이어진 국경 개방의 국제적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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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빈대학교 법학 박사
  • 1961–1966연방수상실 유럽경제공동체·유럽자유무역연합 담당관, 파리 OECD 대표부
  • 1966–1969요제프 클라우스 수상 비서실장
  • 1969–1970교육·과학·연구·예술·문화·체육 연방장관
  • 1979–1989오스트리아 국민당 연방당수
  • 1987–1989오스트리아 부총리
  • 1987–1995오스트리아 외무장관
  • 1990국방 행정 임시 관장

알렉세이 아르히포비치 레오노프

Алексей Архипович Леоно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34–2019 ○ 자연사

인류 최초로 우주의 문을 열고, 붓으로 우주를 그린 사관

「너무 고요해서 내 심장박동 소리까지 들렸다. 나는 별들에 둘러싸여 통제를 벗어난 채 떠 있었다.」 — 1965년 3월 18일, 인류 최초의 우주유영 12분.

시베리아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1965년 3월 18일 인류 최초로 우주 공간으로 걸어나갔다. 보스호트 2호 밖으로 몸을 내민 12분 동안 우주복이 팽창해 에어록으로 돌아오지 못할 위기에 처했으나, 산소를 빼내며 간신히 귀환했다. 우주에서 색연필로 궤도 일출을 스케치한 최초의 우주 화가이기도 하다. 1975년 소유스 19호 선장으로서 아폴로-소유스 시험 계획을 지휘해 미소 최초의 우주 도킹을 성사시켰고, 이후 1976년부터 1982년까지 가가린 우주비행사훈련센터 부소장 겸 우주비행사단장으로 후배들을 길러냈다. 평생 200점이 넘는 우주화를 남긴 독보적 예술가-우주인으로, 두 차례 소련 영웅 칭호를 받고 공군 소장으로 전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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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추게프 공군비행학교 졸업, 전투기 조종사
  • 1959동독 주둔 소련 공군 정찰연대 배속
  • 1960제1기 우주비행사단 선발 (유리 가가린과 동기)
  • 1965.3.18보스호트 2호: 인류 최초 우주유영 12분 9초
  • 1968소련 유인 달착륙 계획 사령관 후보, 계획 취소
  • 1971소유스 11호 주승무원 사령관, 의료 문제로 교체 — 백업 승무원 전원 사망
  • 1975.7소유스 19호 사령관: 아폴로-소유스 시험 계획, 미소 최초 도킹
  • 1976–1982가가린 우주비행사훈련센터 부소장 겸 우주비행사단장
  • 1991공군 소장으로 퇴역
  • 2002–2019통합러시아당 최고위원회 위원

바실리 게오르기예비치 자하로프

Василий Георгиевич Захаров
이념·선전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34–2023 ○ 자연사

글라스노스트기 문화자유화를 집행한 선전 관료 출신 문화장관

1989년 6월, 소련 최고회의는 니콜라이 리시코프 총리가 제출한 각료 명단을 심사하며 자하로프의 문화장관 재임명을 거부했다. 수십 년간 거수기였던 의회가 현직 장관을 자격 미달이라며 퇴장시킨 첫 사건이었다.

경제학자 출신으로 레닌그라드 당 조직의 선전·선동 부서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중앙으로 진출했고, 1986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문화장관으로 발탁되었다. 재임 기간 동안 금지 도서의 출판, 영화 검열 완화, 예술 창작의 자율성 확대 등 소련 문화정책의 결정적 전환을 주도했으며, 모스크바 예술극장 분할 같은 첨예한 갈등을 직접 중재했다. 1989년 새로 구성된 최고회의가 그의 재임명을 거부하면서 소련 의회가 각료 인준을 실질적으로 심사하는 첫 사례의 주인공이 되었다. 퇴임 후 러시아 공화국 부총리를 지냈고, 회고록에서 고르바초프 시대를 '놓쳐버린 기회들의 통치'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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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1973레닌그라드 대학 졸업 후 톰스크·레닌그라드에서 정치경제학 강의, 1973년 경제학 박사
  • 1973–1983레닌그라드 주당위 선전선동부장 → 서기, 문화·과학·교육 담당
  • 1983–1986중앙위 선전부 제1부부장 → 모스크바 시당위 제2서기 (옐친과 공조)
  • 1986–1989소련 문화장관, 글라스노스트기 금서 해제·검열 완화·극장 자율화 추진
  • 1989–1990러시아 공화국 각료회의 부의장

예브게니 그리고리예비치 야신

Евгений Григорьевич Ясин
학술·연구 러시아 러시아계 1934–2023 ○ 자연사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로의 전환을 설계한 자유주의 경제학자

1968년, 소련 탱크의 체코슬로바키아 진주로 프라하의 봄이 짓밟힌 것을 지켜본 야신은 훗날 '나에게는 그때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고 회고했다.

예브게니 야신은 소련 말기 계획경제를 시장경제로 전환하려는 개혁 구상을 발전시킨 경제학자였다. 그는 샤탈린 그룹의 500일 프로그램 공동 작성자로 참여해 급진적 시장 전환의 청사진을 제시했으며, 소련의 해체 뒤에는 러시아의 개혁 국가기구에서 일했다. 옐친 정부의 경제부 장관으로서 시장개혁을 추진했지만, 전환의 사회적 비용과 국가 역량의 문제를 둘러싼 논쟁에서도 자유주의 노선을 대표했다. 이후 고등경제대학과 자유주의 사상 재단을 이끌며 러시아의 경제정책과 공론장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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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오데사 수문공학연구소 졸업, 교량 건설기사
  • 1963모스크바 국립대학교 경제학부 졸업
  • 1964–1973중앙통계국 연구소 부서장·연구실장
  • 1973–1989소련 과학아카데미 중앙경제수학연구소 연구실장
  • 1989–1991소련 각료회의 경제개혁 국가위원회 부서장, 500일 프로그램 공동 작성자
  • 1994–1997러시아 연방 경제부 장관
  • 1998–2021고등경제대학 학술감독
  • 2000–2019자유주의 사명 재단 대표

알렉산더 예브게니예비치 라비노비치

Alexander Evgen'evich Rabinowitch
학술·연구 미국 미국 1934–2026 ○ 자연사

냉전 쿠데타 테제를 기록으로 뒤집은 러시아 혁명의 수정주의 역사가

나는 오히려 당의 내적으로 비교적 민주적이고 관용적이며 분권화된 구조와 운영 방식, 그리고 당시 대중의 정서에 대한 민감성을 강조할 것이다.

러시아 혁명사 연구의 수정주의 학파를 대표하는 미국 역사학자. 1960년대부터 소련 기록보관소에서 작업한 최초의 서방 연구자 중 한 명으로, 1976년 저서 『볼셰비키 권력 장악』에서 10월 혁명이 소수 쿠데타가 아니라 평화·토지·빵을 요구한 대중의 폭넓은 지지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실증적으로 밝혀 파이프스의 냉전적 쿠데타 테제를 정면으로 뒤집었다. 1917년 볼셰비키 당이 '상대적으로 개방적이고 민주적이며 분권화된 조직'이었다는 그의 발견은 혁명 연구의 패러다임을 바꾸었으며,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배치되는 결론을 기록 자료에 근거해 기꺼이 받아들인 역사가로서도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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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8–1999인디애나 대학교 블루밍턴 역사학 교수
  • 1975–1984인디애나 대학교 러시아·동유럽 연구소 소장
  • 1986–1993인디애나 대학교 국제 프로그램 학장
  • 1976『볼셰비키 권력 장악』 출간: 서방 혁명사 연구의 전환점
  • 2007『볼셰비키 집권기』 출간: 혁명 첫해의 페트로그라드를 기록으로 재구성
  • 2013–2026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상트페테르부르크 역사연구소 부설 연구원
  • 2026『볼셰비키 생존』 출간: 페트로그라드 1919년 연구로 4부작 완성

올레크 다닐로비치 칼루긴

Олег Данилович Калугин

KGB 최연소 장군이자 최고위 망명 비판자

"나는 미국인들을 매우 좋아한다. 그러나 7개월을 이곳에서 보낸 지금, 공산주의 체제가 여러분의 체제보다 낫다는 확신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하다." — 1959년,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위장한 24세 KGB 장교가 《뉴스위크》에.

KGB 최연소 소장으로 대외방첩국(K국)을 이끌며 냉전기 대미 첩보전을 지휘했다. 1980년대 말 체제 개혁파로 전향하여 KGB의 부패를 공개 비판했고, 1991년 쿠데타에서 옐친을 지지한 뒤 미국에 망명해 회고록으로 기관 내부를 폭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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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1956KGB 외국어대학 (레닌그라드)
  • 1956–1958KGB 제101고등정보학교
  • 1958–1959컬럼비아 대학 풀브라이트 장학생 신분으로 작전 실습
  • 1960–1964KGB 뉴욕 레지덴투라 작전장교 (모스크바 라디오 기자 신분)
  • 1965–1970KGB 워싱턴 레지덴투라 부레지던트 겸 대행
  • 1971–1973제1총국 제2국(후일 K국) 부국장
  • 1973–1980KGB 제1총국 K국(대외방첩) 국장
  • 1980–1987KGB 레닌그라드국 제1부국장
  • 1990소련 최고회의 인민대표로 선출

헹 삼린

ហេង សំរិន
정치·당 지도 소속 미확정 캄보디아 캄보디아 1934–

1979년 이후 캄보디아의 재건

1978년 12월 크라티에 대회에서 폴 포트 체제 타도와 사회주의로 향하는 독립을 선언하고, 구국통일전선 의장으로 선출됐다.

크메르루주에서 이탈해 베트남과 협력한 캄보디아 지도자다. 1979년 정권 교체 뒤 캄푸치아인민공화국을 이끌었다. 새 정권은 국가·협동·가족 경제를 결합해 재건을 추진했지만 전쟁과 국제적 대표권 분쟁은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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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9인민혁명평의회 의장
  • 1981국가평의회 의장 겸 인민혁명당 서기장
  • 1991인민혁명당 서기장 퇴임
  • 1992국가평의회 의장 퇴임
  • 1998국회 부의장
  • 2006국회 의장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몰도바 몰도바인 1935–2024 ○ 자연사

소련 말기 몰다비아 공산당의 마지막 수장

그는 공산당 금지를 “불법적인 행위”라고 규정하며 1991년의 단절을 비판했다.

그리고레 예레메이는 소련 말기 몰다비아의 당·국가 관료로, 소비에트 체제의 마지막 국면을 당 내부에서 관리한 인물이다. 그는 몰다비아 공산당 제1서기로 재임하며 연방 해체와 공화국 독립이 겹친 1991년의 전환을 통과했다. 당 해산 뒤에는 몰도바의 외교관과 국회의원으로 활동해 소비에트 정치 경력과 독립국가의 제도 정치 사이를 잇는 행보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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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농촌 중등학교 도서관장으로 노동 시작
  • 1954–1956소련군 복무
  • 1966–1970코토프스크 지구당 제1서기
  • 1970–1980몰다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각료회의 부의장·제1부의장
  • 1980–1990몰다비아 공화국 노동조합평의회 의장
  • 1989–1991소련 인민대의원
  • 1991몰다비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
  • 1994–1998루마니아 주재 몰도바 대사

안제이 그비아즈다

Andrzej Gwiazda

8월의 연대를 만든 비타협적 조직가

1980년 8월 16일, 엘모르 파업을 시작한 그는 그단스크 조선소로 향해 기업간파업위원회에 합류했다.

안제이 그비아즈다는 전자공학자이자 노동조합 활동가로, 1970년대 후반 그단스크의 독립 노동운동을 조직한 인물이다. 그는 해안 자유노조를 공동 창립하고 지하 출판을 이끌며 국가 통제 밖의 노동자 조직을 준비했다. 1980년 8월 16일 엘모르 파업에서 그단스크 조선소로 온 그는 기업간파업위원회 지도부에 합류해 21개 요구안을 공동 작성하고 연대의 초기 지도자가 되었다. 계엄령 뒤 투옥과 탄압을 겪은 그는 레흐 바웬사의 협상 노선과 결별하고 원탁회의 타협에 반대한 경쟁적 야당 흐름을 대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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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6–1973그단스크 공과대학교 사이버네틱스 연구소 조교
  • 1973–1981엘모르 전기·자동화 설비 공장 엔지니어
  • 1978–1980해안 자유노조 공동 창립자·기관지 편집자
  • 1980기업간파업위원회 집행부 위원, 21개 요구안 공동 작성자
  • 1980–1981연대 그단스크 지역·전국조정위원회 부위원장
  • 1986–1989연대 전국위원회 노동그룹 지도자
  • 1989–1997《포자 우크와뎀》 공동 발행·편집
  • 2007–2011국가추모연구소(IPN) 평의회 위원

알프레드스 페테리스의 아들 루빅스

Alfrēds Pētera dēls Rubiks

소련 말기 라트비아 공산당의 완고한 수호자

1991년 8월 쿠데타 시도 뒤 체포되어, 소련 연방 질서를 지키려던 정치가에서 수감된 피고인이 되었다.

알프레드스 루빅스는 리가의 도시 행정과 라트비아 공산당에서 성장한 라트비아 공산주의 정치가였다. 그는 소련 체제와 라트비아의 독립을 둘러싼 충돌에서 당의 연방적 질서를 지키려 했고, 1991년 8월 쿠데타를 지지한 혐의로 체포되어 유죄 판결과 수감으로 정치적 책임을 졌다. 출소 뒤에도 사회주의당을 이끌고 유럽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며 자신의 정치적 노선을 이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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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1957소련군 복무
  • 1957–1961리가 전기기계공장 기술기사
  • 1982–1984라트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지방산업부 장관
  • 1984–1990리가 시 집행위원회 의장
  • 1990–1991라트비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
  • 1991–19971991년 쿠데타 시도 관련 수감, 1995년 8년형 선고
  • 1999–2015라트비아 사회주의당 의장
  • 2009–2014유럽의회 의원

왕훙원

王洪文
정치·당 지도 중국공산당 중국 중국 1935–1992 ↓ 체포 1976 · 병사

상하이 노동자 반란파에서 당 부주석까지 오른 「헬리콥터」, 4인방의 최연소

4인방의 최연소자. 상하이 면방직공장 보위 간부에서 1966년 11월 노동자 반란 본부를 세우고 상하이 코뮌을 조직했으며, 38세에 당 제2부주석까지 올랐다가 1976년 10월 6일 쿠데타로 체포되었다.

지린 출신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뒤 상하이 면방직공장의 보위 간부였다. 1966년 노동자 반란 조직 「공총사」를 이끌어 1967년 1월 상하이 시정부를 접수한 「1월 폭풍」의 주역이 되었고, 장춘차오·야오원위안과 함께 상하이 혁명위원회를 이끌었다. 마오가 「노동자 출신 후계자」로 발탁해 1973년 제10차 당대회에서 당 부주석이 되었으나 경험 부족으로 「헬리콥터」라 조롱받았다. 1976년 10월 4인방으로 체포되어 1981년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1992년 옥중 간질환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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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7–1976상하이 혁명위원회 부주임
  • 1973–1976중공 중앙 부주석

게르만 스테파노비치 티토프

Герман Степанович Тито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인 1935–2000 ○ 심장마비

우주에 오른 두 번째 인간이자 군사우주체계 건설자

우주에서 첫 잠을 청하며 그는 교신했다. "팔과 다리만 잘 정리하면 우주 수면은 훌륭하다… 아기처럼 잤다."

소련의 우주비행사이자 군사우주 지휘관. 1961년 8월 6일 보스토크 2호를 타고 인류 역사상 두 번째로 지구 궤도를 비행했으며, 17바퀴·25시간의 첫 장기 체류로 인간이 우주에서 먹고 자고 일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 25세의 최연소 궤도비행사 기록은 오늘날까지 깨지지 않았다. 우주에서 최초로 수동 조종과 영화 촬영을 수행했으며, 최초로 우주멀미를 겪은 인물이기도 하다. 비행 후 스피랄 우주왕복선 계획의 조종사 훈련을 이끌었고, 1979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 국방부 우주수단총국(ГУКОС/УНКС)의 제1부국장으로서 군사우주체계 시험·개발을 총괄했다. 소련 해체 후 러시아 연방공산당 소속으로 국가두마 의원(1993~2000)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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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스탈린그라드 군사항공학교 졸업, 전투기 조종사
  • 1960제1차 우주비행사대 선발
  • 1961.04보스토크 1호 백업 조종사 (유리 가가린)
  • 1961.08보스토크 2호 탑승 — 17회 지구 궤도, 25시간 18분
  • 1965–1968스피랄 우주왕복선 조종사 훈련대장
  • 1968주콥스키 공군공학아카데미 졸업
  • 1972참모본부 군사아카데미 졸업, 우주지휘통제 부대 부사령관
  • 1973–1979ГУКОС 연구·개발 담당 부국장
  • 1979–1991국방부 우주수단총국(УНКС) 제1부국장, 중장 → 상장
  • 1993–2000러시아 국가두마 의원 (공산당)

발레리 이바노비치 볼딘

Валерий Иванович Болдин

고르바초프의 문서를 관리하다 그를 배반한 당 기구 수호자

1991년 8월 18일, 볼딘은 10년간 보좌했던 고르바초프에게 최후통첩을 전하기 위해 바클라노프·바렌니코프·셰닌과 함께 포로스로 날아갔다.

티미랴제프 농업대학과 중앙위 사회과학원을 졸업한 경제학자 출신으로, 1961년부터 중앙위 기구에서 일했으며 1969년부터 《프라우다》에서 농업부장과 경제논설위원으로 활동했다. 1981년 고르바초프의 보좌관이 되었고, 1987년부터 중앙위 총무부장으로서 정치국과 서기국의 전체 문서 흐름을 통제하는 자리에 올랐으며, 1990년에는 대통령 비서실장까지 겸임했다. 그러나 1991년 8월 쿠데타에서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에 가담하여 바클라노프·바렌니코프·셰닌과 함께 포로스의 고르바초프를 찾아간 4인방 중 한 명이 되었고, 쿠데타 실패 후 체포·구금되었다가 1994년 사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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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1–65중앙위 기구 근무
  • 1969–81《프라우다》 농업부장·경제논설위원
  • 1981–87고르바초프 중앙위 서기·서기장 보좌관
  • 1987–91중앙위 총무부장
  • 1990–91소련 대통령 비서실장
  • 1991GKChP 가담·체포·구금
  • 1994–2006은행 고문

앙드레 밀롱고

André Milongo

과도기를 이끈 세계은행 출신 기술관료

2002년 대선을 이틀 앞두고 후보직을 사퇴하며 '투표의 투명성 조건이 보장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독립 직후 콩고의 첫 국고총감을 지낸 재정 기술관료로, 이후 세계은행 이사를 거치며 국제금융계에 몸담았다. 일당체제가 무너지는 1991년 주권 국민회의에서 4차 투표 끝에 과도 총리로 선출되어 집행권을 받고 다당제 선거까지 이끌었다. 과도기를 마친 뒤 민주공화연합(UDR-Mwinda)을 창설해 드니 사수응게소 정권의 대표적 야당 인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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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4국고총감(Trésorier Payeur Général) 취임
  • 1969–1973기획부 투자총국장
  • 1975–1976총리 경제·재정 고문
  • 1976–1983아프리카개발은행(AfDB) 이사
  • 1986–1990세계은행 이사
  • 1991민주공화연합(UDR-Mwinda) 창설
  • 1991–1992과도 총리
  • 1993–1997국회의장

앨런 밀워드

Alan S. Milward
학술·연구 영국 영국 1935–2010 ○ 사망

마셜 플랜 불필요론으로 전후 서유럽 부흥 서사를 뒤흔든 영국의 경제사학자

1947년의 위기를 그는 생산과 투자 붐의 힘에서 비롯한 달러 결제 위기로 보았다. 본문에 밝혔듯 이는 서술이며, 유럽 회복이 미국 원조 없이도 가능했다는 그의 논지와 함께 논쟁적인 평가를 받았다.

1935년 1월 19일 스토크온트렌트에서 우체국 직원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에서 역사를 전공해 1956년 최우등 학사 학위를 받았고, 1960년 런던정경대학에서 W. N. 메들리콧 지도 아래 제2차 세계대전기 독일 군수산업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에든버러대학교와 이스트앵글리아대학교, 스탠퍼드대학교를 거쳐 UMIST 유럽학 교수(1971–1983)와 유럽대학연구소(EUI) 교수(1983–1986), LSE 경제사 교수(1986–1996)를 지냈고, 1993년 내각부 공식 사료편찬관으로 임명되어 공식 사료 첫 권을 썼다. 1987년 영국학술원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2010년 9월 28일 75세로 사망해 하이게이트 공동묘지 동편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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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0–1965에든버러대학교 경제사 강사
  • 1965–1968이스트앵글리아대학교 강사·선임강사
  • 1968–1971스탠퍼드대학교 경제학 부교수
  • 1971–1983UMIST 유럽학 교수
  • 1983–1986유럽대학연구소(EUI) 교수
  • 1986–1996LSE 경제사 교수
  • 1993내각부 공식 사료편찬관
  • 1996–2002유럽대학연구소(EUI) 교수

레오니트 블라디미로비치 셰바르신

Леонид Владимирович Шебаршин

소련 대외정보의 마지막 책임자

1991년 8월 19일, GKChP 쿠데타가 시작되던 날, 셰바르신은 하루 종일 테니스를 치며 '시위적으로' 거리를 두었다.

소련 KGB 제1총국의 마지막 국장으로, 파키스탄·인도·이란에서 수십 년간 현장 경험을 쌓은 직업 정보장교였다. 1991년 8월 쿠데타에 거리를 두었고 실패 후 하루 동안 KGB 의장 대행을 맡았으나 보리스 옐친의 반대로 바딤 바카틴으로 교체되었으며, 퇴역 후 회고록을 통해 소련 대외정보의 마지막 순간을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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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1962주파키스탄 소련 대사관 통역·3등서기관
  • 1962KGB 제1총국 입국, 101정보학교 훈련
  • 1964–1968파키스탄 주재 KGB 정보장교
  • 1971–1977주인도 KGB 부주재관 → 주재관
  • 1979–1983주이란 KGB 주재관
  • 1983–1987KGB 제1총국 정보분석국 부국장 → 국장
  • 1987–1989KGB 제1총국 부국장 (중동·아프리카 담당)
  • 1989–1991KGB 부의장 겸 제1총국장
  • 1991.8.22–23KGB 의장 대행
외교·국제활동 유엔 에콰도르 칠레계 1935–2014 ○ 급사

6년의 제네바 왕복으로 소련군 철수를 틀 지운 에콰도르 출신 유엔 외교관

고르바초프가 철수 의사를 굳힌 것은 스팅어 미사일이 아니라 '페레스트로이카와 외교 덕분'이라고 그는 훗날 회고록에서 단언했다.

코르도베스는 에콰도르의 외교관이자 유엔 사무차장으로, 1982년부터 6년간 데 쿠엘랴르 사무총장의 개인대표로서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간 제네바 협상을 중재했다. 라울 프레비시와 함께 UNCTAD 창설에 참여했고, 유엔 내에서 특별정무담당 사무차장까지 오르며 이란 인질 위기, 이란-이라크 전쟁, 키프로스 분쟁 등 굵직한 현안을 두루 다뤘다. 1988년 4월 제네바 합의 서명을 이끌어내 소련군 철수의 외교적 틀을 완성했으며, 이후 에콰도르 외무장관과 유엔 대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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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11.03키토 출생
  • 1962칠레대학교 법학 학위 취득, 변호사
  • 1963유엔 입직, 라울 프레비시와 UNCTAD 창설 참여
  • 1978유엔 경제사회담당 사무차장보
  • 1981–1988유엔 특별정무담당 사무차장, 아프가니스탄 담당 사무총장 개인대표
  • 1988.04.14제네바 합의 서명 중재, 소련군 철수 틀 마련
  • 1988–1992에콰도르 외무장관
  • 2005–2007유엔 주재 에콰도르 상임대표

마리안 유르치크

Marian Jurczyk

두 항구의 합의 사이에 선 조선소 노동자 지도자

“의장은 유르치크가 된다”는 결정이 내려지자 대표들은 박수로 화답했다.

마리안 유르치크는 슈체친 조선소 출신의 노동운동가로, 1980년 파업에서 노동자들의 요구를 국가와 협상한 지도자였다. 그는 8월 30일 슈체친 협정에 서명했지만, 단결권 보장을 얻지 못한 채 경제적 양보를 받아들였고, 하루 뒤 그단스크에서 더 폭넓은 합의가 성립하면서 두 지역의 차이가 선명해졌다. 계엄 뒤에는 수감과 재판을 겪었으며, 훗날 레흐 바웬사 진영과 거리를 두고 독자적 노동조합 노선을 이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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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1970슈체친 아돌프 바르스키 조선소 노동자
  • 1970–1971슈체친 노동자 파업 참가자·파업위원
  • 1980.08슈체친 조선소 및 공장간 파업위원회 의장
  • 1980.08.30슈체친 협정 서명자
  • 1980–1981연대 공장간 노동자위원회 의장·전국조정위원
  • 1981–1984계엄기 internment 및 정치 재판 피고인
  • 1997–2000폴란드 상원의원
  • 1998–2006슈체친 시장

발렌티나 세메니브나 셰우첸코

Валентина Семенівна Шевченко
정부·행정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인 1935–2020 ○ 사망

체르노빌 참사 당시 모스크바 반대를 무릅쓰고 어린이 52만 명 대피를 관철한 우크라이나 최고회의 의장

'불은 껐고, 다 정상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는 결혼식, 하나는 텃밭, 하나는 프리피야티 강에서 낚시질입니다.' 내무차관의 4월 26일 아침 보고를 이렇게 전했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 당시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으로서, 모스크바의 지시와 달리 키이우와 오염 지역에서 어린이 52만 6천 명을 닷새 만에 대피시킨 인물이다. 크리비리흐 광부의 딸로 태어나 콤소몰과 교육부 차관을 거쳐 1985년 공화국 국가원수 자리에 올랐으며, 재임 기간 내내 중앙의 정보 통제와 싸우며 현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1989년 우크라이나 인민운동(Rukh) 금지 결의안에 서명을 거부했고, 은퇴 후 아동·여성 복지 재단을 이끌며 소비에트 체제에 대한 긍정적 회고와 독립 우크라이나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견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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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1957크리비리흐에서 피오네르 지도자, 지리 교사, 학교 콤소몰 서기
  • 1957–1962크리비리흐 시 콤소몰 서기, 이후 제르진스키 구 당위원회 서기
  • 1962–1969우크라이나 콤소몰 중앙위원회 서기 겸 부서장
  • 1969–1972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교육부 차관
  • 1975–1985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최고회의 간부회 부의장
  • 1985–1990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 (국가원수)
  • 1985–1989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최고회의 간부회 부의장

블라디미르 니콜라예비치 로보프

Владимир Николаевич Лобов

알마아타에 군대 투입을 거부하고 소련 군사개혁을 설계한 마지막 총참모장

“이것은 광장에서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던 젊은이들이었다. 내게 주어진 과제는 유혈 사태 없이 갈등을 해소하는 것이었다.” — 1986년 알마아타 시위 진압을 위해 군대 투입을 요구한 카자흐 당 지도부의 명령을 거부한 이유를 묻는 질문에.

사병으로 입대하여 소련군 최고 직책인 총참모장까지 오른 직업군인. 중앙아시아 군관구 사령관 시절인 1986년 12월, 알마아타 시위 진압을 위해 병력을 출동시키라는 카자흐 당 지도부의 요구를 거부하고 유혈 사태 없이 사태를 해결했다. 고르바초프의 지시로 군사개혁 초안을 두 차례 작성했으며, 복무 기간 단축·여단제 전환·방어적 군사 태세를 주장했으나 야조프 국방장관 및 이후 러시아 군 수뇌부와 충돌했다. 1991년 8월 쿠데타 이후 총참모장에 임명되었으나, 불과 4개월 뒤 소련 자체가 해체되면서 소련군 마지막 총참모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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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소련군 징집, 투르키스탄 군관구 포병연대 복무
  • 1967–1968주독 소련군 차량화소총대대장 — 프라하 인근 비행장 및 주요 거점 장악
  • 1979–1981제28연합군 사령관, 벨로루시 군관구
  • 1984–1987중앙아시아 군관구 사령관 — 1986년 12월 알마아타 시위 진압 병력 투입 거부
  • 1987–1988소련군 총참모부 제1부참모장 — 군사개혁 초안 작성, 야조프와 충돌 후 해임
  • 1989–1991총참모부 제1부참모장 겸 바르샤바조약기구 합동군 참모장
  • 1991.8소련군 총참모장 — 쿠데타 직후 임명, 소련 해체와 함께 해임
  • 1992–1994군 감찰관·러시아 대통령 군사고문, 이후 퇴역

세르게이 니키티치 흐루쇼프

Сергей Никитич Хрущё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 미국 (이중국적) 러시아인 1935–2020 ○ 자연사

흐루쇼프의 아들이자 첼로메이의 유도체계 엔지니어

1969년 아폴로 11호 달 착륙 당시, 흐루쇼프는 우크라이나에서 KGB 장교와 함께 망원경으로 달을 바라보며 역사적 순간을 지켜보려 했다.

소련의 로켓 엔지니어이자 전산학자. 니키타 흐루쇼프의 아들로, 블라디미르 첼로메이 설계국(OKB-52)에서 순항미사일과 프로톤 우주발사체의 유도체계를 개발했다. 이 시기 크릴라티예 로켓, 군사위성, 달 탐사선, 프로톤 부스터의 핵심 기술에 기여했으며, 1963년에는 28세의 나이로 사회주의 노동영웅과 레닌 훈장을 받았다. 이후 제어컴퓨터연구소(INEUM) 제1부소장으로 옮겨 연구를 이끌었고, 1991년 미국으로 이주해 브라운대학교 왓슨연구소에서 냉전사와 소련 우주개발을 강의하며 저술 활동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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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모스크바전력공학연구소 졸업, OKB-52(첼로메이 설계국) 입사
  • 1958–1968OKB-52 기술자 → 부문장 대리 — 유도체계 개발 (순항미사일, 군사위성, 달 탐사선, 프로톤 로켓)
  • 1959레닌상 수상
  • 1963–1964OKB-52 수석 설계자 겸 부설계국장
  • 1963사회주의 노동영웅 · 레닌 훈장 수훈
  • 1968–1991제어컴퓨터연구소(INEUM) 부문장 → 제1부소장
  • 1991–2020미국 이주, 브라운대학교 왓슨연구소 선임연구원 · 교수

빅토르 페트로비치 브류하노프

Виктор Петрович Брюхано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인 1935–2021 ○ 1988년 10년형, 5년 복역 후 석방

건설을 이끌고 사고의 책임을 진 체르노빌 원전의 첫 소장

발전소 마당에 나가보니 발밑에 흑연 조각들이 널려 있었지만, 그래도 원자로가 파괴됐다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타슈켄트에서 러시아 노동자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나 에너지 공학을 전공하고 화력발전소에서 경력을 쌓았다. 1970년 체르노빌 원전의 건설 책임자 겸 초대 소장으로 임명되어 16년간 발전소를 이끌었고, 공사 지연과 결함 자재로 사표를 냈으나 당 상급자가 찢어버렸다. 1986년 사고 직후 해임되고 1988년 10년형을 선고받았으며, 출소 후에도 체르노빌 사고 수습 업무에 종사하다 2021년 키이우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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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9타슈켄트 공과대학 졸업, 앙그렌 화력발전소 취직
  • 1966슬라뱐스크 화력발전소에서 부수석 엔지니어까지 승진
  • 1970–1986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초대 소장 겸 건설 책임자
  • 1986.07사고 책임으로 당 제명·해임, 8월 체포
  • 1988.0710년형 선고, 도네츠크 교정노동시설 복역
  • 1991.09조기 석방, 우크라이나 대외무역부 근무
  • 1995–2015우크르인테르에네르고에서 체르노빌 사고 수습 업무